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7 08:00 김삼웅

 

엉터리 재판은 진행되어서 1986년 3월 16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178호 법정에서 1심 공판이 열렸다. 여전히 방청인은 제한되고, 언론은 외면하거나 정부발표문만을 받아 쓰는 상태였다.

김근태는 최후진술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다른 기록은 훔쳐가고 날조해도 법정의 최후진술만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군부의 하수인이 된 법원이 양심껏, 소신껏 판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긴 감옥살이를 각오하면서 당당하게, 준열하게 진술하였다. 결기 넘치는 진술이었다. 주요 부문을 발췌한다.

본인의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하에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 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본인의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시대를 10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다. 그 때 법원은,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 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하였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00여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이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런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의심이 갔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의 마음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 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 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 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 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 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민주화 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80년 5ㆍ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새로운 민주화 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 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을 봐서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얘기할 자격이 없다. 참모총장 공판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기본적으로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세번째, 정치군부는 이른바 법의 지배와 폭력적 파괴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80년 5ㆍ17 이후 저 광주에서 빈손, 맨주먹과 맨가슴의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총탄을 퍼 부은 자들이 어떻게 법과 평화의 지배를 애기할 수 있겠는가?

네번째, 정치군부는 민생의 문제나 경제건설 문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
79년 12.12, 80년 5ㆍ17 이후 현 정치군부는 전대미문의 권력형 부정부패를 점철시켜 왔고, 이른바 장영자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부정부패 속에 휩싸여 왔으며, 이외에도 갖가지 소문과 풍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반민중적인 작태가 진행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민생문제와 경제건설을 위해서 민주화를 유예하고 연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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