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0 08:00 김삼웅

 

사마천은 <사기>의 <임안(任安)에게 드리는 글>에서 사람은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를 만들어도 그것과 대면하기 싫어한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이승의 감옥이 저승의 지옥”이란 말을 남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불의의 시대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이라 말하고, 함석헌은 “자유는 감옥에서 새끼를 친다”고 설파하였다.

감옥은 묘한 곳이어서 강한 사람은 더욱 강하게 만들고, 약한 사람은 허물어지게 한다.
감옥은 육신이 묶여도 생각까지 묶을 순 없어서 인류 지성사에 샛별과 같은 많은 명저들을 남겼다. 볼테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앙리아드>를 쓰고, 존 번연은 베드포드 군형무소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 갇혀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하고, 마르코 플로는 포로로 갇혀 <동방견문록>을, 오 헨리는 옥중에서 <점잖은 약탈자>를, 네루는 <세계사편력>을 썼다. 이밖에도 사례를 들자면 수없이 많다.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니다. 김대중은 진주감옥에서 <옥중서한>을, 신영복은 전국의 여러 감옥을 전전하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정수일은 비슷한 처지에서 <소걸음으로 천리길을 가다>는 옥중기(편지)를 남겼다. 하나같이 옥중문학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도 문익환ㆍ김남주 등 수없이 많다.

감옥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유배문학, 망명문학도 지성사의 보배로 남는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추사 김정희의 불멸의 그림 한 폭 <세한도>는, 정작 당사자들의 피눈물과 고투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으로 전한다.

서울구치소의 수인이 된 김근태는 차분한 마음으로 옥살이를 각오했다. 고문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사법부, 나치의 사법부, 유신체제의 사법부와 다르지 않는 5공체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검ㆍ판사들의 행위에 분노가 치밀고, 고려 최씨 무신정권기 지식인들처럼 글을 쓰는 어용언론ㆍ지식인들에 하염없는 연민을 느끼면서, 그래도 성서의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으면서 옥살이를 시작했다.

육신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망가졌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었다.
자신이 갇힌 방 근처 어딘가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뒤에도 조봉암 선생과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날조된 인혁당사건 희생자 등 한을 품고 이곳에서 처형당한 선열들에 비하면 행운이라 여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독일 출신으로 반나치 저항운동을 하다 국적이 박탈되고 긴 망명생활을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브레히트가 이 시를 쓴 시기와는 42년의 시차가 있었으나 처지와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주석 1)

브레히트가 이 시에서 지적한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흐 등이다. 모두 반 나치 저항지식인들이다.

김근태의 고문폭로는 전체 민주화운동권이 노선을 초월하여 정부의 용공조작에 맞서 재결집하게 되고 더욱 강력한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재판을 거쳐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간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사회는 5공 파쇼정권 타도를 위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수용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가 뿌린 민주화의 씨앗이 청년ㆍ학생들을 움직이게 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가 결성되고, 6월 24일 효성물산ㆍ가리봉전자ㆍ선일섬유 등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 11월 4일 서울대 등 시내 7개 대학생 14명의 주한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 11월 18일 14개 대학생 191명의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결성, 1986년 2월 12일 신민당과 민추협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 돌입, 2월 26일 서울대생들 졸업식장 집단퇴장, 3월 17일 박영진 열사 분신,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 결성, 4월 28일 이재호ㆍ김세진 열사 분신, 5월 3일 인천항쟁,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 6월 4일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사건 등 파쇼 정권의 만행과 이를 타도하기 위한 거대한 민중저항이 전개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5공의 인권유린의 한 상징이 된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남은 자’ 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직장인ㆍ가정주부들까지 분노의 대열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인천 5ㆍ3항쟁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은 다양한 종류의 헌법개정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정권안보 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5ㆍ3항쟁의 배후를 색출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구속ㆍ수배ㆍ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권인숙은 1985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관들은 권인숙에게 공문서위조 혐의 외에 인천 5ㆍ3항쟁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문귀동 형사는 권인숙을 수사계 수사실로 데리고 가 6월 6일과 7일에 걸쳐 조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귀동은 성고문과 협박과 공갈을 하였다.
(주석 2)

비교적 완곡하게 기술한 내용이지만, 이날 문귀동은 용납할 수 없는 성고문을 자행하였다.
5공 수뇌부의 도덕적ㆍ정치적 타락상이 일선 경찰에 의해 여과없이 자행된 것이다. 남영동의 고문기술자들과 한 통속의 타락 정권의 하수인들이었다. 권인숙은 교도소 면회 과정을 통해 성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곧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성고문 사실을 부정하면서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타락한 경찰관들의 악행도 문제이지만, 이를 은폐하면서 민주화운동세력을 매도하는 검찰의 언동에 국민은 더욱 분개하였다.


주석
1> 브레히트 시선, 김광규 옮김,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17쪽, 한마당, 1985.
2>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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