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재판은 엉터리로 진행되었다.
‘엉터리’의 표현에는 재판정 밖에서, 그러니까 어용화된 언론에서 ‘김근태 죽이기’의 보도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 터져 나온 것까지 포함된다. 신군부는 이른바 ‘협조’ 명목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경찰관들의 고문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 재판은 언론을 동원하여 좌경으로 용공몰이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어용 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ㆍ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하였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 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 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되어 버린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예단과 편견 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半)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 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뉴스 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 분짜리 특집기획물까지 (나 개인에 대한 것을) 만들어 KBS는 방영하였다.
(주석 15)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 때부터 방청인수를 대폭 제한하여 민청련 회원 등의 방청을 막았으며, 그나마 허용된 방청인은 대부분 기관원으로 채우는 등 법관으로서의 기본적 양식도 지키지 않았다. 서성은 증인 심문에서도 판사의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던지곤 하였다.

김근태는 부당하게 진행되는 재판과 장외에서 전개되는 언론기관의 인격학살에 대해 하염없이 분노하면서, 공판 사이 사이에 고문의 실상과 현재의 심경을 담은 <탄원서>를 썼다. 집필 허가를 신청한 지 40일 만에 간신히 허가 통지를 받았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구치소에서는 2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는 데도 김근태에게는 1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쪽수가 매겨진 조서용지를 주었다. 김근태는 여차 하면 없애버릴 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다. 그런데 예상대로였다. 애써 쓴 <탄원서>를 출정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일제식민통치자들보다 더한 야만의 짓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쓸 수 있었다. 김근태가 여러 날 고심하여 쓴 <탄원서>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 부문은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 넘쳐 있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 받은 제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 때 두 겹 비닐 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주석 16)


주석
15> <이제 다시 일어나>, 143쪽.
16> 앞의 책,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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