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7 08:00 김삼웅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뭐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 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했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 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되었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며칠 동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고문자들은 잠을 재우지도 않았고 밥도 주지 않았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잠을 재우지 않아 허기진 육신은 처절하게 허물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9월 6일에는 점심 식사를 주었다. 음식을 보고 배가 고픈데도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의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것으로 악몽과 같은 고문이 끝난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식사는 ‘미끼’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설명하겠다.

고문자들은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신기섭에 대해 캐물었다. 그는 1985년 2월 김대중이 귀국할 때 함께 동행할만큼 미국에서 한국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이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민청련 사무소를 들렸는데, 그를 간첩으로 엮으려는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김근태가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자 대화에서 별로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내면의 외침에 -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히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주석 21)

고문자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이성이나 인간성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고문을 하다가 제풀에 지치면 김근태의 생식기를 가르키며 히죽거렸다.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는 등 인격모독을 일삼았다. 히틀러의 비밀경찰도 이러지는 않았다.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부터 또 고문이 시작되었다. 잡혀와서 3일째 되는 날이다.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너 이새끼, 배후를 안 대?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께”라고 윤재호는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동안 고문대를 정현규와 최상남이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고 하고, 고문기술자는 여러 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주석 22)


주석
20> 앞의 책, 53쪽.
21> 앞의 책, 58~59쪽.
22> 앞의 책, 61쪽.

 

 



02.jpg
0.05MB

<남영동 1985>, 그때 거기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전화가 온다. 정치영화, 혹은 정치적 영화들이 민감한 시기에 연이어 개봉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인기를 끌 무렵에도 그랬고. 최근엔 <남영동 1985>에 대해서 묻는다. 영화 개봉은 관객과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시기를 고르는 것이 최적이다. <남영동 1985>는 저예산 영화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보다도 영화의 실존적 주인공 김근태님이 지난해 인생 산책을 마감하셨기에 이제야 가능했을 것이란 상상도 간다.

  드라마 구성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고문현장에 카메라가 들어가 일지처럼 22일 동안 날짜를 매기며 숨막히는 상황 자체를 재현해낸다. 공간적 배경도 일관되게 단순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밀실, 취조용 작은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낡은 욕실 같은 공간이 전부이다. 등장인물도 단출하다. 밀실을 관리하는 소수 상주인물과 간혹 등장하는 상관 두 명, 그리고 ‘장의사’로 불리는 출장 나온 고문 기술자가 전부이다. 이곳에 잡혀 온 김종태(박원상)는 반국가사범임을 고백하는 가짜 진술서를 써내야만 풀려난다. 가짜 진술서를 요구하는 권력이 비밀리에 집행되는 공간과 시간이 스크린을 숨막히게 물들인다.

  고문과 공포 속에서 권력이 원하는 거짓말을 써냈기에 제대로 기억해낼 수조차 없는 어이없는 상황. 극도로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 또한 반복되는 고문이다. 물, 전기, 고춧가루, 칠성판…그리고 죽음과 고문 흔적의 발각 예방을 위한 안티푸라민과 청진기도 동원된다. 글을 쓰느라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도구들, 이 도구들을 사용하는 이 분야 기술의 달인 인간 이근안(이경영)은 휘파람도 분다. 조금만 들어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노랫말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존 포드의 목가적인 서부극 <황야의 결투>에서 흘러나오던 애수 어린 그 노래 <클레멘타인>. 그런데 끔찍한 짓을 하는 인물의 휘파람으로 이 노래가 들려오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권력이 호출하는 애국이란 명분으로, 직무수행을 충실히 하며 누리고자 하는 평안함을 누리려 부는 휘파람일까? 간혹 끼어드는 아일랜드 민요에서 온 노래 <Johny I hardly knew ye, 조니 난 당신을 거의 알지 못해요>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틈새를 만들며 귀를 간질인다.

충격, 분노…그리고 감동!

  참혹함의 극치에서 나오는 노래, 기막힌 상처와 고통을 통과하는 치유로서 예술의 힘일까? 이 대목에서 우아한 화면 속에 예측불허의 전복으로 종교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그을린 사랑>이 떠오른다. 감옥에서 성고문을 받는 여자, 그녀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노래하는 여자’로 불린다.

  밀실에 근무하는 이들에게도 일상은 힘겹다. 때론 라디오 프로야구 중계를 들으며 어느 팀이 이길 것인지 대화한다. 과도한 근무에 치여 연애할 여유조차 없는 청년은 여자 친구 문제로 괴로워한다. 심지어 김종태에게 상담을 받을 정도로 우스운 상황도 벌어진다. 직장이기에 참혹한 짓에 말려들었지만, 그런 직장으로부터 탈주하지 못하는 시대의 우울을 앓는 이들이 늘 존재할 것만 같아 웃어넘기기 힘들다. 최근 들통 난 민간인 사찰에서 고문은 없었겠지만, 남영동의 그림자가 느껴지기에 그런 것일까? 그때 그 시절을 여전히 앓고 있는 이들의 숨결이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노라면 몸과 맘 모두 저려온다.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다. 인류가 산업화로 파괴한 지구환경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의 제목처럼 영화란 아프고 불편한 진실을 응시하게 만드는 매체이다. 그것은 진실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 삶과 예술의 관계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영화의 존재 이유를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 밀실에서 보여준다.

※ 팁: 일생일대 악역을 맡은 이경영의 연기력이 불편한 볼거리를 넘어 만개한다. 온몸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박원상의 연기투혼도 감동적이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 <2005 동국대 명강의상> 수상
· 저서 :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

 

 

01.gif
0.01MB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6 08:00 김삼웅

 

고문 조사실로 향하는 회전식 철제계단.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김근태는 첫번째 고문으로 이미 질식상태가 되고 말았다. 수사관들의 “항복하지, 이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라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오전 7시 반부터 시작된 고문이 낮 12시 반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5시간 동안 이같은 고문이 계속되었다.

두번째 고문은 이날 저녁 8시경부터 자행되었다. 다시 옷을 벗기고 고문대 위에 칭칭 묶었다. 그리고 오전과 같은 고문을 또 시작했다.

고문자들은 점점 크게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더군요. 당당하고 의젓하게 보이기도 하구요. 물론 무조건 고문을 하는 것이지요. 요구사항은 없었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어떻게 되는 건지 합리적 사고나 대응 같은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학대와 능욕을 어느 만큼 가하고 나면 그러나 고문자들은 뭔가를 반드시 제기하는 것이더군요.

이번에는,
① 폭력혁명주의자임을 자백하고
②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자백하고
③ 각 민주화운동 부문에서 움직이는 핵심적 인물을 대라. 김근태와 민청련이 제일 과격하고 제일 먼저 움직여서 오늘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 우선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을 대라.(…)

얼마 동안은 사실 끈덕지게 버텼었습니다. 허나 안 되더군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의 시인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고통에 못이긴 굴복에의 유혹이 머리를 쳐들더군요.

나는 인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배후가 이범영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로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누군가를 꼬집어서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당시 이범영 씨는 이미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피신중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얘기해도 별 피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번째 물고문도 대략 5시간 걸렸습니다. 끝난 것이 5일 새벽 1시경이었으니까요.

9월 4일의 두 번에 걸친 물고문,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인간적 주체성은 크게 동요되고 일관성 있는 인격은 와해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것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음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만화 같은 현실에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주체성, 그것을 다 포기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두꺼운 모직 겨울 잠바, 검정색과 붉은색의 체크무늬 잠바를 남영동 그곳을 나올 때까지 줄곧 입고 있습니다.
(주석 17)

세번째 고문은 9월 5일 저녁 8시 반부터 다음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전기고문이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라가 버리고요. 이곳에서 무슨 수치심 그런 것을 여밀 계제는 전혀 아니었지요. 그러나 팬티조차 벗겨지고 보니까 더욱 당황케 되면서 이제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소극적 저항의 표시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칠성대 위에 또 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 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머리에 물을 주전자로 들어부었습니다. 그때 물의 섬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기술자는 뭔가 쉴새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하였는데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팬티를 벗겼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물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는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졌습니다. 소스라쳐 놀라게 되고 머리를 힘껏 움직이게 되지요.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는 것 같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습니다.
(주석 18)

전기고문은 뒷날 상처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고문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온몸이 저리고…”  (주석 19)

김근태는 온 몸에 전류를 받으면서 신체의 마비와 정신적 착란상태에 빠져들었다.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어느 틈에 사그라졌다.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주석
17> 앞의 책, 49~50쪽.
18> 앞의 책, 50~51쪽.
19> 앞의 책, 51쪽.

  




01.jpg
0.04MB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0여 명의 건장한 정사복 경찰에 이끌려 강제로 차에 태워졌다.
경찰관의 잠바로 얼굴이 덮힌 채 30~40분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5층 15호실, 이 건물 왼쪽 맨 끝방이었다. 이곳에서 야만적으로 김근태를 고문하고 지휘한 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과 과장(일명 사장) :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 경정 백남운
1과 ? : 경감(?) 고문담당 전문가
1과 상무 :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 경장 ?
  (주석 13)

김근태는 자신을 체포해온 이 자들은 “무슨 열정에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이라고 뒷날 회상을 할만큼 이들은 외견상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순수하다는 인간의 본성을 믿었다. ‘수심(獸心)을 간직한 인면(人面)’ 만을 본 것이다.

백남운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몰려서이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남은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 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 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 거부를 잘 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 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 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하였다.”하자 “그렇다면 그 몸으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하였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석 14)

‘수심(獸心)’들은 김근태의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긴 채 무릎을 꿇렸다. 거부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넓은 밴드로 눈을 가렸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라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 “김근태는 고문 초입의 심경을 이렇게 그렸다. 그는 낭만파 시인이었다. 그리고 순간,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고문 당한 유태인들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김근태는 이때까지도 저들이 정말 고문을 감행하지는 못할 것으로 믿었다. 겁주기 위한 협박 정도로 인식하고 어떤 협박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그는 순결한 휴머니스트였다.

김근태가 이 당시 남영동 인간 도살장에서 당한 고문은 많이 알려졌다. 해외에는 국제인권단체를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의 잔혹성,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다시 살피고,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이 참담한 고문을 어떻게 견뎌 왔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추상을 벗고, 구체적인 실상을 추적한다.

나치독일의 비밀경찰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고문 집단학살하면서 고전음악을 듣거나, 일요일에는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가족과 약속했듯이, 한국의 고문 기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왈츠를 듣거나, 군대 나간 아들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대학진학을 앞둔 자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였다.
(주석 15)

‘악의 평범성’은 히틀러 독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의 한국에서도 벌어진 현상이었다.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부터 22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되는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1) 군을 고문으로 죽였다.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이 고문살해범이다. 김근태 고문 뒤에라도 야수적인 고문이 근절되었다면 박종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칠성대 위에 올려져 눕혀진 나는 순식간에 완전 결박되었습니다. 머리가 핑 하면서도 “저, 그래 견뎌 보자. 견디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라고 각오했던 바가 아니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저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던 그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라고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 설득력이 없더군요. 목이 쉰 것 같기만 하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해. 결국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고 말걸. 이걸 너희들도 알고 있을거야. 클라이맥스에 중지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니 화해니 말해온 것을 싹 지울 수는 없지.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라고 떠올리고, 여기에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여지없이 뚝 끊어졌습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백남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얼굴에, 눈이 가려져 있는 내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 양쪽으로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 꼭지를 틀어 샤워기 아가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꼭지를 잡고서 사정없이 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 물을 담아 동시에 쏟아 붓고 또 쏟아 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은 견딜 수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신 냄새 나는 짙은 껌껌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슥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에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솟고 콧속으로 불길이 솟고요.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이고 하여 칠성대로 기우뚱하였지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 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주석 16)


주석
13> 앞의 책, 38~39쪽.
14> 앞의 책, 42쪽.
15>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91쪽, 한길사, 2006.
16> 앞의 책, 45~46쪽.

 


02.jpg
0.06MB

ICSID에 공식 제소…한국 정부, 최초로 국제중재법정에 서게 돼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투자자-국가소송(ISD)을 제기했다. 외환은행을 인수했던 론스타는 '먹튀'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해외 투자자다(관련 기사 : "론스타, 한미FTA 약한 고리 치고 들어왔다").

론스타는 22일 새벽 워싱턴에 있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한국 정부를 공식 제소했다. 6개월 전 한국 정부에 ISD 의향서를 전달한 론스타가 후속 조치를 취한 것이다.

지난 5월 22일, 론스타는 한국-벨기에 투자보장협정에 근거해 벨기에 주재 한국 대사관에 ISD 의향서를 전달했다.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자의적이고 차별적인 조치로 수십 억 유로(수조 원)의 손해를 봤다는 것이 론스타 측 주장이었다.

한국-벨기에 투자보장협정은 ISD 방침을 알린 뒤 6개월간 사전 협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에 따른 6개월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론스타는 ISD를 제기했다. 론스타가 '피해 금액'으로 정확히 얼마를 요구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외 투자자가 한국 정부에 ISD를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덕련 기자  기사입력 2012-11-22 오후 12:30:22

 

 

매국조약의 달 11월 

 

우리 역사에서 11월은 특별한 달이다. 190511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주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20111122일 한미FTA를 비준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을 미국에 넘겼다. 그로부터 딱 1년이 지난 오늘 새벽(20121122), 듣보잡 투기 자본 론스타대한민국ICSID에 제소했다(관련 기사 보기2012/11/22 [프레시안] 론스타, 결국 한국 정부에 ISD걸었다, 2012/11/22 [미디어오늘] 론스타, 먹튀도 모자라 한국 정부 상대 2조원 소송까지).

 

 

노명박에 의한 사법주권의 박탈 

 

노무현과 이명박이 그렇게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국세청이, 론스타에 대해 과세처분한 것이 정당했는지 여부를, 워싱톤에 있는 World Bank 산하 ICSID에서 재판받게 됐다. 이게 1876년 한일FTA 매국조약(우리는 국사 시간에 강화도조약이라고 배웠다)에 있었던 식민지 조항 중 하나인 치외법권이다. 자국 내에서 벌어진 법률사건을 자국 사법부가 처리하지 못하고, 식민지 종주국(일본, 미국)에서 재판받는 것, 이게 바로 치외법권이고, 한미 FTAISD가 바로 이 19세기 치외법권의 재현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拙著 《쾌도난마 조선정치(하)》를 참고 하시라). 

 

론스타는 지난 522ISD 의향서를 우리 정부에 전달했고, 6개월간 사전협의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자, 6개월을 채우자마자 바로 오늘 새벽, 득달같이 ICSID에 소장을 접수시켰다. 20121122, 노무현이 체결하고 MB가 비준한 한미 FTAISD에 의해,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 끌려가게 됐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사법주권은 박탈됐다. 

 

노빠들은 행복한가? “글로발 스땐다드라서 행복한가? “미국님에게 재판 받아서 행복한가? 노빠들은, 이 국치일에, 단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사람이 먼저라는 개 짖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노무현의 한미 FTA는 착하지만, MBFTA는 나쁘다는 개 짖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하고 노빠들끼리 권력 나누어 먹겠단다. 가능할 거 같은가?

 

 

노명박은 역사 앞에 석고대죄하라 

 

관련 글 몇 개 링크한다. 2012/06/01 [한미 FTA] 론스타, ISD제기 착수1, [한미 FTA] 론스타 ISD제기 착수22011/11/23 [한미 FTA] 노무현을 버려라, 2011/11/03 [한미 FTA] 한미 FTA 반대 이유 요약, 2011/11/05 [한미 FTA] 정동영, 한미 FTA는 애국이냐 매국이냐의 갈림길, 2011/10/28 [한미FTA] 기획재정부 광고- 노무현이 시작한 한미 FTA, MB가 마무리하겠습니다. 2011/10/19 [한미FTA] 문재인은 한미 FTA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혀라 

 

내가 그동안 꾹꾹 참았다. 이해찬이 그 더러운 조동아리로 DJ를 언급했을 때도 꾹꾹참았다(니들 노빠들이 언제부터 DJ를 존경했다고 감히, DJ와 노무현을 같은 반열에 놓고 "DJ와 노무현에 대한 모욕" 운운하는가?). 그런데 오늘 대한민국 정부가 워싱톤으로 질질 끌려 가는 걸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니들은 단일화 문구 싸움 나부랑이에 피가 거꾸로 솟겠지만, 난 ICSID로 끌려가는 "대한민국 주권"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다. 니들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대통령 선거인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지만, 부끄럽지도 않나? 니들이 무슨 얼어죽을 사람사는 세상인가. 나 같으면, 정권 잡고 5년 내내 한나라당과 함께 저질렀던 패악질이, 국민에게 부끄럽고 쪽팔려서 사퇴한다. 사퇴하라(관련 글 보기 2012/08/26 [정치] 문재인은 대선 후보에서 사퇴해야 한다, 관련 동영상 보기문재인이 대통령 돼야 하는 이유).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

012/07/24 08:00 김삼웅

 

고문(Torture)은 '몸을 비틀다'라는 라틴어 ‘torquere'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고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짐승의 행위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ㆍ야만의 행위다. 그래서 국제법과 국내법은 고문을 금지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간에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 세계인권선언 제1조.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대한민국헌법 제11조 2항.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좌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력 또는 가혹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 대한민국 형법 제125조.

전두환 정권의 들러리 국회라는 평이 따르는 제11대 국회는 1983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14조 2항에서 “고문을 하여 사람을 치상케 한 때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치사케 한 때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국제엠네스티는 1973년 <고문폐지를 위한 국제엠네스티선언>에서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고문의 사용은 인간의 자유 및 생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간주된다.
2. 고문은 여하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고문을 통한 효력의 폭력은 누증적 악순환을 초래한다. 고문은 전염병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져 나간다. 고문은 고문당한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고문하는 사람을 야수화한다.
3. 인류의 양심에 부합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이러한 악을 근절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의무이다. 우리는 모든 정부가 고문을 금지하는 국내법과 국제법을 존중하고 또한 이를 개선할 것과 유엔결의 3059호를 수호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또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및 직업상의 책무를 가진 제 인사 및 조직들이 전세계적인 고문폐지운동에 대하여 능동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요청한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형법대전>에 따르면 죄인에게 채찍(볼기를 치는 작은 대)과 혁편(革鞭, 종아리를 치는 가죽띠)을 사용하는 정도의 고문이 있었다. 그러다가 국권을 빼앗기면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여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죽였다. 병탄 초기의 105인사건과 일제말기 한국어학회사건 등이 대표적인 고문 사례로 꼽힌다.

이승만의 친일파 중용으로 일제의 악질 경찰이 그대로 국립경찰로 들어오면서 고문의 악습이 전해지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특무대 요원, 경찰 등 3천명을 뽑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면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기술은 이들을 통해 오롯이 5공으로 전수되었다.

김근태가 서부경찰서에서 잠을 깬 것은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반, 9월의 이 시각은 아직 미영(未明)이다. 이 시간 이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 악마들에게 사지가 찢기고 영혼이 파괴되는 한 마리 희생양이 되었다. 출감 뒤 그가 생생하게 기록한 <남영동>을 대본으로 그가 당한 고문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이 부문은 좀 지루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었으면 한다. 오늘 우리가 이 정도나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김근태 등 민주인사들의 희생과 투쟁의 댓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근태와 이근안을 착각하는 세대는 이것이 ‘신화’가 아닌 불과 30여년 전의 현실이었음을 인식했으면 싶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 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끼어 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7차례의 유치장 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난 2년 동안의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다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여다보고, 바람 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되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주석 11)

혁명가들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많은 편이다. 계산하고 타산에 밝은 사람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속된 이해와 이문을 따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낭만주의자들은 물질적 셈법보다 하늘의 별을 헤고, 호수의 포말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가망이 없는 혁명도 꿈꾸게 된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김근태의 심중에도 낭만성이 켜켜이 쌓였다. 학창시절 그는 문학서적을 끼고 살았다.

신새벽 의경의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김근태는 자신이 풀려나는 것으로 알았다. 여전히 짐승들이 지배해온 5공의 권력 구조를 자세히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에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해지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고무풍선이 바늘에 찔려 별안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 한 사람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하거나 추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주석 12)

주석
11> 앞의 책, 40쪽.
12> 앞의 책, 40쪽.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3 09:50 김삼웅

 

 

신변의 위기를 느낀 김근태는 제5차 민청련 총회도 참석하지 않고 은신하다가 8월 24일 옷을 갈아 입고, 민통련 이창복을 만나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서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오랜 세월 수배 과정에서 피신에 이골이 난 김근태는 지하철을 타면서 경찰을 따돌리고, 민청련 사무실에 들렸다가 장충체육관 근처 커피숍으로 이창복을 만나러 갔다.

커피숍 근처에서 김근태는 미리 배치된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 1개 소대 병력에 의해 연행되기에 이르렀다. 민청련 의장을 사임한지 14일 만이다. 정보기관은 김근태와 이창복이 만나는 장소를 정확히 알고 경찰을 배치했다가 체포한 것이다. 전화를 도청한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 전 의장은 당시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8월 26일 즉결심판에서 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한 유언비어 혐의로 구류 10일을 선고받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복역 중, 9월 4일 새벽 5시 30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이첩되어 6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구류 기간 중 집권세력의 강경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하라는 명령과 지시를 경찰에 내리고, 이후 이첩시킨 대공분실에서 엄청난 고문을 자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주석 6)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의 체포와 함께 집행부 구속, 사무실 압수수색 등 민청련을 압살하고자 했다.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체포된 데 이어 9월 8일 중부서에 의해 사무실이 수색당하고, 9일에는 김희택 부의장과 서원기 집행국장이 긴급 수배되었다. 또 10월 1일에는 김종복 청년부장과 김희상 대변인 연행, 2일에는 최민화 부의장, 7일에는 권형택 사회부장이 각각 연행되었다. 이들에게는 집시법 정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10월 14일에는 체포하지 못한 민청련 임원진 전원에 대해 전국수배령이 내려졌다. 임원진의 가족들에게도 정보과 형사와 강력계 형사들이 동원되어 미행하였다.

5공 정권은 10월 29일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 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청련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주석 7)

정부당국의 날조된 발표는 순치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어용신문들은 “학내외 시위와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근태의 정체가 ‘적색분자’라고 매도하였다.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언론에 의해 인격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빨갱이, 용공좌경, 종북, 적색분자라는 낙인은 사회적 매장을 의미하는 사형선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밖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질하는 시간에 김근태는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망적인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청련 활동 중에 여러 차례 정보기관의 간부와 요원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기관지 <민주화의 길>이 대학근처 서점을 통해 학생들 손으로 들어가고, 학생운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 민청련의 성명서와 선언문 내용이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 노동문제에 너무 자주 그리고 깊이 개입한다는 등의 이유였다. 김근태는 그럴 때마다 당당하게 해명하면서 민청련의 활동을 늦추지 않았다.

여러 통로를 통하여 다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김병곤 씨나 황인하 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오히려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주석 8)

김근태는 5공세력의 야수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 체제의 국군보안사 출신 전두환과 그 일당이 저지른 12ㆍ12하극상,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양심적 언론인, 정치인 탄압 등 잔인무도함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셈이다.

본인이 당한 끔직한 것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핀으로 본인을 과녁에 고정시켜 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칼날을 소리없이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ㆍ불순의 거대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주석 9)

김근태는 5공 권력이 자신을 정치적 ‘과녁’으로 삼는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게 그리고 민주화운동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협과 양보가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팍하게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의한 표적으로서 희생양으로서 본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주석 10)


주석
6> 앞의 책, 234쪽.
7>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1980년대편 2권>, 313쪽, 인물과 사상사, 2003
8> 김근태, <남영동>, 29~30쪽.
9> 앞의 책, 30쪽.
10> 앞의 책, 88쪽.


02.jpg
0.05MB
01.jpg
0.1MB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2 12:06 김삼웅

 

민청련은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전초기지가 되고 김근태와 간부, 회원들은 전위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민청련의 투쟁이 강화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가중되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집행부의 연행 횟수가 늘어나고, 사무실 압수ㆍ수색도 잦았다. 정부는 각 부문운동 단체들과 연대투쟁의 발원지가 민청련이란 사실을 알고 강도 높은 탄압을 자행하였다.

1985년 10월 14일 민청련 지도위원 (계훈제ㆍ백기완ㆍ이우정ㆍ고은ㆍ김병걸 등 32인)들은 <민청련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다-모든 민주세력과 더불어 민청련 파괴음모를 저지할 것을 결의하며>란 결의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민청련 탄압ㆍ파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요지.

우리 지도위원들은 전두환 정권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애국적인 학생ㆍ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 중 극히 일부분만을 뽑아서 용공으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2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민청련을 학생들의 배후로 조작하여 탄압하려는 한심스런 작태에 우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배후 및 용공조작이 애국적인 청년ㆍ학생들을 탄압하려는 명분의 조작일 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단계적으로 분리, 탄압하려는 간교한 술책임을 직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그것은 전체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전면적 파괴공작의 명백한 신호로 간주하고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공동대처를 모색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정권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광주민중학살을 비롯한 자신의 과오를 분명히 시인하면서 스스로 퇴진하는 길만이 민족사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주석 3)

김근태가 주도하는 민청련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던 그동안 금기사항이 된 문제를 제기했다.
‘광주학살진상규명과 전두환 책임추궁’을 이슈화한 것이다. 그리고 겸양과 포용 정신으로 각급 부문운동 그룹과 연대하여 5공정권과 대결하면서 전두환 세력을 코너로 몰았다. 그렇지 않아도 2ㆍ12총선 국면과 제12대 국회에서 야당의 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던 참이었다. 청년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를 찍었다.

총선의 패배로 휘청거리던 5공 정권은 점차 활성화되어 가는 학생, 재야, 민중운동의 도전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탄압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타겟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연결고리인 민청련이었다.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려다가 국내의 반발과 미국의 불승인으로 철회돼, 정치적 위신이 실추된 전두환 정권은 그 제물로 민청련과 김근태를 선택한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전 의장을 서부경찰서에서 구류 만기일인 9월 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참혹한 고문을 했다. (주석 4)

민청련은 1985년 8월 10일 마포구 신수동 소재 신촌교회에서 제5차 총회를 열었다. 여기서 김근태가 물러나고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 전 부의장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은 최민화 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구속 중인 김병곤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하는 등 임원진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당시 김근태 의장은 2년 간의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심신이 지쳐있었는데다가, 김병곤 상임위원장의 경고 쪽지 (김병곤은 검찰에 구속 중에 곧 김근태를 체포할 것 같다는 쪽지를 통해 알려 왔다 - 필자)와 같이 구속된 황인화 한국기독청년협회(Eye) 총무부장 선을 통하여 전달된 기독교권의 우려의 목소리로 인해 이미 표적이 된 사실과 함께, 탄압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민청련 단체를 보호하려면 의장직에 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주석 5)

김근태의 운명 앞에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 왔다. 지금까지는 용케 피해 오고, 민청련을 이끌면서는 몇 차례 집시법 위반 정도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궁지에 몰린 5공 학살자들에게는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압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래 그 시대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를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삼았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고려된다. 역대 독재정권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처지가 되면 어김없이 공안사건을 날조하여 국민을 속이고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럴 때면 제물이 필요했다.


주석
3> <민주화의 길> 제11호, 2~3쪽, (발췌)
4> 김재하, 앞의 책, 164쪽.
5>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33쪽.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서울시 성동구 성수2가3동 289-21 효정빌딩 413 TEL 02-786-3634 FAX 02-463-8554 email : unitedpower1219@gmail.com

 

문서번호 : UP121119-01

수 신 처 :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선거운동본부

참 조 : 이학영 공동선대위원장

제 목 :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소개의 건

 

1. 귀 선거운동본부의 큰 뜻이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2.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은 ‘유신잔재 청산과 역사정의를 위한 민주행동’(약칭 민주행동)을 모체로, 다가오는 18대 대선과 관련하여 비정치권의 모든 사회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총의를 모아 민주진영 단일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 이후 수립될 민주연합정권이 올바른 민주개혁을 이루도록 지원 및 견인할 주체가 되고자 지난 11월 15일(목) 출범하였습니다.

이에 이번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의 후보단일화 논의 재개에 대한 환영의 뜻과 함께 관련하여 필요한 협조를 최대한 지원하고자 하는 본 단체의 출범취지 및 관련 성명을 전해드립니다.

 

※첨부: 1. 후보단일화 논의 재개에 대한 논평

2.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출범선언문

3. 성명-범민주진보후보 단일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

 

 

2012년 11월 19일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상임공동대표     이현배

 

 

 

 

❚논평: 후보 단일화 협상 재개를 온 국민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후보 단일화 협상 재개를 온 국민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문재인 후보, 안철수 후보, 이해찬 대표의 대승적 결단을 높이 평가합니다. 청사에 길이 기록될 것입니다.

국민들도 어깨에 놓인 바위 덩어리를 조금은 내려놓은 기분입니다.

부디 단일화와 정권교체를 이루고 파시즘과 재벌 전횡을 광정하시어, 진정한 민주국가를 이루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은 후보단일화와 정권교체, 그리고 건실한 민주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경향 각지의 시민, 민주운동단체 63개가 모여 2012년 11월 15일 출범한 단체입니다(첨부문건 참조).

우리의 출범 취지에 입각해 후보단일화를 위한 중재, 연락 등 어떠한 일이라도 도울 일이 있다면 서슴지 않겠다는 각오와 제안을 아울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아름다운 협상, 아름다운 단일화, 아름다운 정권교체를 온 국민이 밤낮으로 기원합니다.

 

 

2012년 11월 19일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별첨: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출범선언문

범민주진보후보 단일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

 

 

□참여 단체

가톨릭농민회 (이상식)

강원대학교민주동문회 (최윤)

경희대학교총민주동문회 (정해랑)

계명대학교민주동문회 (이상용)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정용화)

국민대학교민주동문회 (전광출)

기독자교수협의회 (이은선)

김상진기념사업회 (정철훈)

단국대학교민주동문회 (이부영)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강철)

대구경북시민단체연대회의 (김두현)

동국대학교민주동문회 (조영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이명순)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이형숙)

민주평화복지포럼 (이창복)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이종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조순덕)

(사)민주화운동공제회 (유영표)

민청련동지회 (최경환)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이철)

박정희기념도서관대책시민회의 (이단아)

방송독립포럼 (최성민)

백만송이국민의명령 (서상원)

부산환경운동연합 (이흥만)

4·9통일평화재단 (김형태)

사월혁명회 (정동익)

삼수회 (최동전)

새날희망연대 (김병태)

새언론포럼 (박래부)

서강대학교민주동우회 (장근주)

서울대학교농촌법학회 (김준희)

서울대학교문우회 (이장우)

서울대학교이공회 (이덕희)

서울대학교자하연 (연성만)

서울시립대학교민주동문회 (황인상)

10·26재평가와김재규장군명예회복추진위원회 (윤원일)

성균관대학교민주동문회 (최재원)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안중근평화연구원 (윤원일)

언론광장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양재일)

역사정의실천연대 (한상우)

연세대학교민주동문회 (조승우)

6월민주포럼 (윤준하)

6월항쟁계승사업회 (함세웅)

6월항쟁정신계승원주위원회 (이창복)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우회 (황경선)

장준하기념사업회 (서상섭)

재경대구경북대학교민주동문회 (허활석)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배은심)

(사)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강민조)

전북민주동우회 (박성극)

전태일재단 (한석호)

중앙대학교민주동문회 (최연)

진보통합시민회의 (유초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박순희)

7080민주화학생운동연대 (양춘승)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 (남상헌)

평화박물관 (이해동)

학술단체협의회 (유초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정의평화위원회 (이해학)

한국외국어대학교민주동문회 (이상일)

한신대학교민주동문회 (김하범)

(가나다 순, 2012.11.15. 현재 총 63개 단체)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출범 선언문

 

 

 

유신의 심장이 사라진 30여 년 후인 오늘도 유신잔재의 검은 안개가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부마항쟁,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장준하 선생 암살, 최종길 교수 암살 등 무수한 문제들이 진상규명조차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민경제를 파탄시키는 공룡재벌들의 존재와 그 횡포도 유신의 산물입니다. 역사 왜곡을 넘어서 역사를 말살시키고 있는 것도 유신잔재들의 소행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부정적 요소들을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맞고 있는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지혜와 사려 깊은 대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제적 힘 관계는 미국일원주의에서 미·중 이원주의 혹은 다원주의로 바뀌고 있습니다. 천년의 영약인 것 같던 자본주의도 그 구조적 모순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엄중한 시국을 40년 전으로의 복고를 노래하는 무리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유신 심장의 붕괴가 꾸준하고 치열한 민주항쟁의 결과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1980년 봄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에 실패한 것은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인식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그 결과는 얼마나 참혹했습니까?

광주에서 수천 명의 무고한 인명들이 살상되고 정치는 ‘전두환 체제’라 일컫는 제 2의 유신시대로 퇴행하지 않았습니까?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였습니다.

모든 민주개혁이 좌절되고 국민들은 패배의식과 무기력에 빠졌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 중에는 극심한 지역주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오와 우행을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 힘으로 평화스럽게 유신잔재를 청산하고 새 날을 밝힐 거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것이 국민의 뜻이고 역사의 소명입니다.

민주후보는 반드시 통합되고 단결된 힘으로 나서야 합니다.

 

후보들은 역사와 국민 앞에 무한히 겸손하여야 합니다.

본인들이 갖고 있는 강점과 이점들은 국민과 역사 앞에서는 한 줌의 검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여야 합니다.

후보들은 역사와 국민의 뜻을 수행하는 작은 그릇이라는 것도 아울러 깊이 인식하여야 합니다.

통합의 방법은 당사자들이 주위의 조언을 중히 여겨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 통합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절대 조건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유신잔당의 정권 재장악 후에는 아무 것도 바랄 것도, 이룰 것도 없습니다. 총체적인 국가 파탄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 위해 각 후보 진영들만의 힘으로 결과를 얻어내기 힘든 조건과 상황이 있다면, 우리는 미력이나마 사심 없는 순수한 입장으로 적극 단일화 논의를 측면 지원하고 중재할 의사가 있음도 밝혀둡니다.

 

이러한 의사는, 만일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혹시라도 이 민족과 국가 사회의 앞날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겠다는 조짐이 보인다면 즉각 적극적 압박과 비판의 목소리로 바뀔 수도 있으며,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의 입장도 또한 아울러 밝혀둡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의 승리라는 형식적 결과물이 아니라,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수립될 민주연합정권이 이전 민주개혁정부들의 한계를 되풀이하지 않고, 근본적인 개혁에 매진하여 우리 사회에서 거짓과 불의를 일삼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폐해를 일소함으로써, 평등을 지향하는 진보와 자유를 지향하는 보수가 건전한 상호 협력과 경쟁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에서 경제적 민주화를 넘어 사회적 문화적 민주화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을 결성하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민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모든 국민과 사회 제단체에 동참을 호소합니다.

 

국민행동은 당면한 범민주 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출발점으로 하여 이후 수립될 민주연합정권이 온 국민이 바라마지 않는 진정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모든 열정과 능력을 쏟아 지원하고 감시하고 견인할 것입니다.

 

거듭 우리의 취지에 동의하는 전 국민의 회원화와 전 국민의 행사 참여를 제안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새 역사를 만듭시다!!!

 

 

2012년 11월 15일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출범식 참가자 일동

 

 

 

 

 

 

 

범민주진보후보 단일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모두가 승리하는 민주후보 통합을 이루자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선거가 34일 앞으로 다가왔다. 역대 정권의 온갖 과오와 비리 악행을 두루 저질러온 이명박 정부가 임기를 다함에 즈음하여,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재집권을 막아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일구어낼 소명을 우리는 맞이했다.

 

지난 6일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후보가 만나 정권교체를 위한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새 정치를 위한 국민연대를 함께 추진하기로 한 데 대해 우리는 민주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는 일로 환영한다. 아울러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포함한 범민주진보진영 후보들의 헌신적이고 과감한 결단이 원활한 논의와 협력을 거쳐 바람직한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의견을 전하고자 한다.

 

새누리당에 맞서는 범민주진보후보의 단일화는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는 막중한 사업이다. 일차적으로 단일화를 논의 중인 두 후보 간의 원칙적 합의가 준수되지 못하고 온전한 결실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두 후보와 양 선거진영은 조국과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선열들의 피땀 어린 희생을 헛된 노력으로 돌리는 배신과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며, 이 땅에서 대대로 화평과 복리를 누려야 할 자손들에게 간고한 유산을 물려주는 악행이 될 것이다. 수사적 표현을 떠나 그 죄업은 수구독재정권의 죄업보다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로 어제 두 후보 간의 논의가 일시 중단된 사태에 대해 우리는 깊은 우려와 관심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으며, 출범식을 마치는 즉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하여 양 후보 진영을 중재하고자 하는 입장을 밝히는 바이다.

 

범민주진보진영의 후보통합은 어느 한 쪽의 승리나 패배가 아닌 모두의 승리로 귀결되어야 하며, 나아가 정의와 평화를 희구하는 민주시민 모두의 승리로 귀착되어야 한다. 각 후보들은 어느 쪽이든 경선이나 조정 또는 결단을 통해 단일후보의 지위를 흔쾌히 내놓을 각오를 미리부터 가져야 하며, 결과적으로 양보하는 쪽은 단일후보를 자신의 후보로 받아들여 그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선거 이후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의 새 정치를 실현하는 데에도 신뢰에 바탕한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러한 협력의 첫걸음으로 각 후보와 진영들은 단일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의 과정에서부터 협력의 파트너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겸양과 아량을 실천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거듭 양 후보 진영이 새 정치를 염원하는 민주시민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품게 하는 ‘아름다운 경쟁’을 통해서 모두가 승자가 되는 결과를 산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각 후보들과 선거진영은 상호존중의 정신과 지혜결집의 태도로 혁신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연대를 강화하고, 선거에 임하는 정책공약에서도 정강정책의 내용을 공유하는 데 유념해야 한다. 인권·평등·상생·평화의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는 연대인 만큼 이들 가치의 최대실현을 보증하는 방향과 수준에서 각 진영은 자신들의 정강정책과 선거공약보다 진전된 내용을 서로에게서 찾게 될 경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민주당과 진심캠프는 각자의 테두리를 넘어 미래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정책요소들을 심상정 후보를 비롯한 범진보 진영으로부터 과감히 받아들임으로써 양자의 단일화가 범민주진보진영의 후보통합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유신의 확장과 부활을 꿈꾸는 세력집단에게 집권연장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민주진보세력을 최대한 결집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누리당의 재집권이 초래할 배제와 경쟁의 지배정치를 지양하고 통합과 배려의 상생정치를 지향하는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그리고 범진보진영의 협력과 협상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면서, 아름다운 경쟁을 통해 바람직한 통합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는 새로운 개혁정치로 나아가는 첫 단계인 후보통합의 과정에서부터 우리는 가능한 지지와 지원을 최대한 보낼 것을 약속한다. 아울러 우리는 민주진보 통합후보의 선거승리와 그 이후 연합정부의 운영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엄정한 입장에서 비판과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두 후보의 과감한 결단으로 물꼬를 튼 후보통합이 바람직한 성과를 산출하고 새 정치를 향한 민주연합정부의 탄생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요약하여 밝힌다.

 

1.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 그리고 안철수 후보와 진심캠프는 단일화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전 과정에서 누가 후보가 되느냐보다, 국민대중에게 감동을 주고 신뢰 속에 희망을 만드는 우호적 경쟁이 아니면 궁극적으로 누가 후보가 되든 필패할수밖에 없음을 재삼 명심하라.

 

1. 역대 비민주정권들의 악습을 종합계승하고 유신정치의 확장과 합법적 세습을 획책하는 새누리당의 재집권에 반대하는 민주진보세력의 최대결집을 위해 후보단일화의 전 과정에서 두 후보와 양 선거진영은 범진보진영의 주장을 수용하고 참여를 확대하는 데 최대한 노력하라.

 

1. 경선, 결단, 조정의 어떤 방식으로든 범민주진보 통합후보가 결정되고 나면 후보통합에 참여한 모든 선거진영은 통합후보의 당선과 신정부 구성 이후 혁신정치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1.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은 앞으로 더욱 넓은 연대를 통해 정책대안 보완의 지혜와 새 정치 실현의 실천역량을 결집하여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통합후보의 선거승리와 민주연합정부의 혁신정치 실현에 최대한 협력할 것이다.

 

1. 현재 일시 중단된 두 후보 간의 논의가 조속히 재개되기를 국민의 이름으로 촉구하는 한편, 향후 후보 통합에 참여하는 범민주진보진영의 어느 쪽이든 오늘 우리가 밝힌 국민적 대의와 역사적 소명을 저버리는 행태를 보일 경우, 그에 대해 <국민행동>은 혹독한 비판과 질책을 가할 것이다.

 

 

 

2012년 11월 15일

 

민주연합정권을 위한 국민행동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