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에 수감되어 항소심 재판을 받으면서 1986년 1월 6일 부인 인재근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검열 때문에 깊은 속내는 털어놓을 수 없지만,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오는 곳이 아니라 여기는 가는 곳이 틀림없소. 쟂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요,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식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고.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 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주석 3)
김근태는 당시 한참 유행중이던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를 흥얼대면서 아내를 생각하는 연모의 마음을 담았다. 더불어 결기를 보인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 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 가히 짐작이 되오. 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오. (주석 4)
서울구치소 검열관은 김근태의 옥중서한의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를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걷게 되는 문장으로 ‘오독’하고 그대로 내보냈다.
이 대목은 건강상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김근태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양심수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김근태의 이런 뜻을 헤아린 민청련은 1987년 9월 그의 고문 실상과 옥중기록을 묶어 책으로 내면서 <이제 다시 일어나>를 제목으로 뽑았다.
김근태는 최진희가 불러 히트한 ‘사랑의 미로’를 열심히 연습하여 아내의 생일날 면회를 왔을 때 접견실에서 이 노래를 불러 선물하였다. 외국의 경우는 몰라도 한국에서 양심수가 아내의 생일선물로 노래를 불러준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 뒷날 김근태 부부의 인터뷰 한 대목이다.
김근태 : 이근안 씨한테 고문을 받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윤동주가 이렇게 해서 옥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시인도 아니고 여기서 옥사하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며 중심을 잡았지요. 아내에게 “나 지금 괜찮다. 흔들리지 않는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 노래가 약간 트로트 비슷해서 나한테는 통 안 맞는데 그땐 그게 기분이 또 맞더라구요. 인재근은 깔깔대고 웃고….
인재근 : 그때는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았어요. 노래도 못하면서 노래 선물을 한다고 그러냐면서…. (주석 5)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가족 면회와 편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봉함엽서에 편지 쓰는 것이 그나마 행복한 순간이다.
김근태는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두 번째로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쪼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측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비켜설 수 있게 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오.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를 핥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나는 이 때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하였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하였던 것이오. (주석 6)
김근태는 이 편지 말미에서 감옥 안 마루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쥐들의 ‘사랑의 언어’에서, 자신의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리게 된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를 확인했다고 썼다.
주석
3> <이제 다시일어나>, 175쪽.
4> 앞의 책, 176쪽.
5> <레이디경향>,
2005년 12월호.
6> 앞의 책,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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