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1 08:00 김삼웅

 

옛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역사관)와 그 너머로 인왕산이 보인다. 사진은 보림재블로그에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모지락스런 권력의 하수인들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의병ㆍ독립운동가ㆍ통일운동가ㆍ민주화운동가들이 거쳤던 ‘정규과정’이었다. 한말 이인영 의병대장, 총독암살 미수의 강우규 의사를 시작으로 3ㆍ1운동 민족대표. 유관순 열사, 의열단원, 서로군정서, 대한광복군 등 수많은 지사들이 수감되고 더러는 처형되었다.

해방 뒤에는 조봉암과 인혁당 간부들이 처형되었다.
함석헌ㆍ장준하ㆍ김대중ㆍ리영희ㆍ송건호 등이 거쳐가고 민청학련사건의 학생들에 이어 김근태도 1985년 9월 26일 이곳에 수감되었다. 일제가 침략하면서 이곳에 감옥을 지을 때는 경성감옥이었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고, 해방되던 해 서울형무소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부터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 현지동 101번지, 민족의 한이 서린 이곳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근태가 수감될 당시의 이름은 서울구치소였다. 5공권력의 핵심에 찍힌 김근태는 수감번호 14번을 달고 서대문구치소 중에서도 가장 추운 외진 방에 수감되었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껌뻑거리며 들어오게 되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감옥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이었고, 그것은 우이독경일 뿐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 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주석 1)

김근태가 이처럼 감옥 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수감된 것은 권력핵심의 지침과 아울러 검찰청사에서 잠깐 만난 부인에게 전한 남영동의 고문사실이 알려지게 된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인권위원회 소속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변호사 등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면서 김근태는 가족 면회와 변호사 접근이 금지되고, 가장 추운 방으로 수감되는 보복으로 나타났다. 변협 소속 변호사들의 활동은 뒤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서울구치소의 실상을 더 살펴본다.

남영동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김근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은 뒤에는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도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주석 2) 그래서 간수에게 죽을 부탁하여 오랫동안 천천히 먹었다. ‘먹었다’기 보다는 그냥 삼켰다.

그나마 남영동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편이었다. 며칠 뒤부터는 간신히 삼켰던 죽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상부 지시라 했다. 굶어죽으라는 처사였다.

별안간 밥이 나와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이야기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시받은 담당은 복도 내방 옆에 몰래 붙어서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 확인하는 숨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주석 3)

김근태는 자신이 수감된 건너편 7방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간부에게 전방(轉房)을 요청했다. 8방은 하루종일 햇볕을 볼 수 없으나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빛이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어 있는 방인데도 전방을 거부하고 굳이 9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9방은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곳이었고, 정신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쇠철판으로 작은 창문을 밀봉해 놓은 상태였다. 김근태는 12월 말경에 쇠철판을 뜯어내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내는 조건으로 9방으로 옮겼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病舍)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 큰 체 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주석 4)

김근태에 대한 권력의 학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 해 12월 중순 경부터 서울구치소 위층 15~16개 방에는 모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유독 김근태 방만은 제외시켰다.

아픈 분들 방에 나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번 나도 난로 좀 놔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 준다면 전 사동(舍棟)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주석 5)

혹독한 고문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축이 없이는 걷지도 못한 상태의 중환자, 그래서 서울구치소의 병동에 수감하고서도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차별 대우는 변호인 접견과 가족 면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주석
1>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05쪽, 중원문화사, 1987.
2> 앞의 책, 108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106~107쪽.
5> 앞의 책, 107쪽.

 




02.jpg
0.14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