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7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대단한 문장가다. 편지 글의 면면을 읽다보면 ‘투사’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문장이 곳곳에 널려 있다. 행간에는 리얼리즘 문학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구절이 글의 품격을 높여준다.

‘겨울감옥’ 추위의 정황을 그린 대목이다.

인재근 씨에게.
정월 추위를 타는 모양입니다. 손이 다시 시렵고, 손이 자꾸만 허리춤 사이로 들어갑니다. 더욱 묘한 것은 해가 훤하게 밝은데도 바람이 팽팽해서 어수선하고 약간 불안한 듯한 분위기입니다.

긴밤은 참으로 뒤숭숭했습니다. 한숨이 두껍게 내려쌓여 있는 4동 뒤 좁은 마당을 돌개바람이 사납게 휘저었고 비닐 창문을 쉬지 안하고 덜컹덜컹 흔들어댔습니다. 바람으로 어수선한 밤에 넓은 방에 늦도록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청승맞을 듯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침낭 속으로 잠 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한 밤중에 바람소리, 창문 덜컹거리는 소리로 인해 나의 얄팍한 잠에서 끌려나왔습니다. 어사무사한 경계에서 버둥대다가 결국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마침 아랫배도 탱탱하게되어 더 버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깨고나서 다시 잠이 들지 못해 머리가 띵한 상태입니다.
(주석 14)

다음은 신 새벽 감옥 담장위로 치솟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느낀 소회다. 마치 잘 다듬은 한 편의 산문과 같다.

새벽 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니루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곳의 풍경은 매일 좋구려, 거치른 시멘트 선, 건물의 사나운 직각이 시야를 찢고 들어오지만 거기에 별로 신경 쓰여지지는 않는구려. 때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담장 훨씬 위로 까마득하게 치솟아 올라간 20여 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 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가 없소,

마치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는 체하고 내 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오.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크면서도 미루나무처럼 본때 없이 그리하여 허전하고 허망하게 길다란 그런 모습이 아니고,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을 뒤로 하고 약간씩 구불텅구불텅 틀면서 다시 올가가고 그러다가 줄기를 내어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 빙 둘러쳐진 나무들 모습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구려.

여기에 갇혀져 있던 사람들의 한과 한숨이 저렇게 나무를 구비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오. 당신과 만나서 살아온 지난 날들이 미명에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나무처럼 여겨지는구려. 짧지 않은 세월을 저렇게 쭉 밀고 올라왔고, 그러면서 정답고 또한 구불텅한 구비와 옹이도 없지 않았던 세월이었지요.
(주석 15)

다음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꿈결처럼 다가오는 뿌연 저 인왕산 중턱의 색깔 변화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구려. 우리 어머니는 피리를 잘 불었다오. 버들피리, 보리피리 모두 말이오. 봄은 어머니의 피리소리를 타고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새끼손가락만하게 하고, 입에 무는 부분은 껍질을 살짝 벗긴다오. 먼저 만든 것은 나를 주시고, 또 하나를 만들어 입에 무셔서 적절한 위치를 잡으시는 것이오.

그 곡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입 속과 귓가에서는 뱅뱅 돌고 있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또 뭔가를 호소하고 거듭 호소하면서 반복되고, 변주도 되는 것 같았소. 그럴 때 어머니 표정,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오. 눈길은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리고, 몸은 점점 야위어가는 듯싶고, 그러면서도 생기가 도는 우리 어머니였다오. 이때의 어머니를 제일 사랑했던 것이오.
(주석 16)

다음은 ‘진눈깨비’에 관한 단상이다. 국어사전에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라고 풀이한다. 김근태의 해석은 철학적이다.

며칠 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리는 모양도 그렇지만, 이름부터가 약간 재미있고 짓궂은 듯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귀가 안 맞고 김빠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이 질다는 것이 형용 모순이면서도 말이 되는 것이 재미있고, 도대체 ‘깨비’라고 붙은 것들이 몽조리 약간은 체신 머리 없고, 방정을 떠는데 그러면서도 악의나 잔인함은 상당히 배제되어 있는 듯이 여겨집니다. 방아깨비, 허깨비, 도깨비, 같은 것들이 그것들인데 이 반열에 진눈깨비도 끼어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철 늦은 진눈깨비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은 재미있다든지 장난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산한 느낌이었습니다. 쇠창살에 갇혀 제압당하고 그 쇠창살 위에 다시 촘촘히 그물눈의 쇠철망을 덮씌워 시원스런 시야도 차단당하여 내리고 있는 진눈깨비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마침내 가물가물해지는 짜증스러움이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습니다.
(주석 17)

 



다음은 김병곤의 셋방을 찾아가서 함께 민청련의 일을 하자고 약속하면서, 그 집안의 풍경과 뒷날 닥치게 될 고난의 상념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의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 때였습니다. 마루엔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 씬 식사 준비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결리는 듯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곤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 날 문숙 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주석 18)


주석
14> 앞의 책, 223쪽.
15> 앞의 책, 723쪽.
16> 앞의 책, 73쪽.
17> 앞의 책,230쪽.
18> 앞의 책, 267쪽.


01.jpg
0.07MB
02.jpg
0.72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6 08:00 김삼웅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근태는 1992년 1월 황인철 변호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민변소속으로 반독재투쟁의 재야ㆍ청년ㆍ학생ㆍ노동자들의 변론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다음은 편지의 뒷부분이다.

지금은 아직 우리에겐 겨울입니다. 지난 시기처럼 지독히 캄캄한 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뿌우연 그러나 봄은 머지않은 아니 이미 봄이 우리를 향하여 어느 정도 와있는 겨울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런 겨울의 짓누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연합해야 하겠지요.

그런 새로운 관계, 이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상호의 힘의 관계, 그러나 적대적이지 않고, 제한적으로만 경쟁적이며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토대 위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 위에서 구축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꼬일 수 있는 것이지만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오늘의 위기적 상황에 직면케 된 것이고 다가오고 있는 총선ㆍ대선에서 만일 우리의 연합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의 것보다 훨씬 크고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이 유동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민족 역사에 민중의 삶에 그리고 이 지역 평화와 인류 진보에 큰 부담과 정체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굴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서둘러야 하는데 정말로 서둘러야 하는데 하며 마치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초조함을 안고 지금 저는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이런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배님들, 황 선배님을 포함한 선배님들에게 부과되고 요구되어지고 있는 엄중함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후배들이 뒷받침해드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석 12)

김근태는 비슷한 시점에 홍성우 변호사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 역시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시절 민주인사들을 변론하고, 김근태 사건도 맡았었다. 홍성우는 이 무렵 조영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라는 글모음집을 발간하여 신문에 광고가 실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근태도 홍성우가 보내준 이 책을 읽은 터였다.

이곳 감옥은 바깥의 역사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역사의 흐름과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면제될 수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승인거부, 그리하여 유보도 일종의 특권처럼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이 특권에 집착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데도 추모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연이어 광고로 나오고 그리로 시선도 자꾸 갔습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면서 화들짝 놀라 눈길을 서둘러 돌리곤 했습니다. 저도 결국 다 읽긴 읽었습니다. 그러나 광고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 구절 또 한 구절 이렇게 보았는데 그걸 다 읽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기막힌 슬픔”이라고 하셨지요.
“영래의 손때 묻은 글 줄”이라도 만져서 감당하기 어려운 허전함, 상실감을 메우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생명의 불꽃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직접 보셨을 홍 선배님에겐 정말로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희망없음에 대한 생각은 선배님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이고, 또 그런 원인들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더 큰 좌절과 캄캄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타개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시급하게 그리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초조감도 생깁니다.

홍 선배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이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렇게 되도록 여건이 마련될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통일된 재야가 다시 시급히 꾸려지고, 그것과 통합야당이 민주대연합의 원칙아래 발전적 차원에서 다시 결합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저도 한 역할을 하고 싶지만 그래 봐야 현재로선 별 소용없는 일이고, 바깥에 대한 기대로, 안타까운 희망으로 까치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도 더 이상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래나 병곤이의 죽음은 결국 지난 번 우리의 좌절과 실패의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244쪽.
13> 앞의 책, 246쪽.


01.jpg
0.05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감옥에서 민청련의 동지 장영달, 변호사 황인철과 홍성우에게도 편지를 썼다. 사적인 관계로부터 역사관, 시국관이 담기고, 변론으로서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았다.

 


2012년 8월, 장영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밀양 송전철탑 반대'하는 문구와 그림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 윤성효

민청련 부의장 등을 맡아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장영달에게 보낸 편지에는 1991년 2월 7일자의 소인이 찍혔다. 먼저 부인과 아들 ‘돌민’이의 안부를 묻고 ‘본론’으로 이어진다. 편지의 뒷부분이다.

제도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광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명백히 그럴 만한 이유도 또 그들의 한계도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대중이 재야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까요. 지금도 지배세력과 비판적 제도언론이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대중의 정치 불신은 우리가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결단을 통해 저기 보이는 희망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 30년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파시즘의 대중정서 동원으로 활용될 여지도 충분히 있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아니 1989년도 공안정국 이래 지금까지 오히려 지배세력의 그런 조작이 외세와의 협조와 국내 일부세력의 오류 때문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 온 것이 사실 아니겠어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이런 경고를 하고 다니자 상당히 여러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저어기 저처럼 발전하는 대중운동을 왜 못 보는가 하고 준엄하게 반박하곤 했지요. 그것을 못 본 게 아니라 그것을 진정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튼튼한 힘으로 전진시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활동가들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포퓰리즘 편향에 크게 휘둘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획득했던 대중의 신뢰의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이제 우리는 냉정히 돌아보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또 함께 해야겠지요. 도덕성, 과학성, 힘 등 전차원에서 심각한 되돌아봄이 다급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제 지자제와 임투기간 직후 전면적 실천평가에 기초하여 새로운 편제를 발전시켜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장 선생도 나도 노력하기로 하십시다.

지금 창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온 뒤 섣달 마지막 추위가 제 모습을 보이면서 달려들겠지요. 제법 대응력이 생겼지만 이 징역에서의 추위 앞에는 가끔 “속절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속절없음 속에서 견뎌내는 끈질김을 다시 가슴 속에 품으려하고 있습니다.

장 선생의 따스한 마음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일이지요. 바쁜중에도 편지 주고, 책도 부쳐주고, 재판정까지 와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외상값은 내가 여기서 튼튼하게 지내는 것으로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장 선생!
끝으로 부인에게 꼭(!) 인사 좀 전해주시오.
그리고 돌민이에게도 얘기해주고……. (주석 11)

주석
11> 앞의 책 221 ~ 222쪽

 



01.jpg
0.08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김병곤을 ‘지혜 있는 용기’의 인물로 평가한다. 백범 김구의 천 길 낭떨어지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용기를 일컽는다. 김근태와 김병곤 등 민청련 집행부는 ‘죽는 것이 사는 길’, 곧 지사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대중운동은 기본적으로 전투적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은 전략적으로 그래야 되고, 전술적으로는 용기와 더불어 정말로 지혜있는 유연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 높은 도덕성과 명분은 지난 시기에 투쟁을 통해서, 아니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왜 우리가 이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를 지혜롭게 대중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또한 벌써 지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있는 지도자라 할까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던가요. 서(書)는 어떨까요만, 나머지에 관한 한 정말 뚜렷하게 두드러졌습니다. 요새 정치군인들인 별자리들과는 전혀 달리 진짜 장군의 피가 흐르는 번듯한 허우대와 기상에서 그것은 넉넉히 엿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보스 기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열려 있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견 또한 분명하고, 줏대 없이 그리고 대책없이 흔들리는 경우란 없고, 그리고 결정을 내려야 될 때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 결정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병곤이었죠.

1984년 당시 병곤이가 역할을 맡고 있었던 상임위는 정치, 경제, 국제, 운동론 등을 연구, 분석, 토의하는 모임과 기층 대중 운동을 연구하고 부분적으로 그와 연계되는 모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치 최전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괜찮은 조건이기도 하였지만, 상임위의 활동이 그처럼 매우 활발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병곤이의 그런 지도력, 지혜있음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석 8)

김근태의 ‘김병곤회고’는 더 이어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얘기는 자주 들어서인지, 오래 전 일이기 때문인지, 그러고 어쩌면 지나치게 신화가 되어서인지, 병곤이의 ‘용기 있음’을 예증하는데 설득력과 감동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당시 재판정이 극단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즉자적인 반발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혐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점도 있는 것 같구요.

병곤이가 민청련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9월 경부터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청련이 발족하여 움직인 지 1년 여가 지나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간부 역량이 부족하여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곤이의 참여를 요청하게 되었지요.

이유는 또 있습니다. 1980년의 공간에서도 전술 구사를 둘러싸고 일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심각해져 갔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생 운동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쪽의 대표적 선배 활동가가 병곤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 그리고 1983년 공간에서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부분이 그 영향만큼, 또 기대되는 만큼 활발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를 타개하는 계기로서,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러한 것은 촉발하는 뇌관으로서 병곤이의 적극적 활동이 기대되었습니다.
(주석 9)

김병곤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근태는 깨달았다. 그것은 사형구형에 대한 ‘영광’이라는 반응보다 살얼음판 같은 5공 초기에 청년조직을 기획하고, 맨 앞에 서서 압제자들과 싸운 용기를 더욱 평가한 것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김병곤은 그처럼 허망하게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뜻과 행동에서 분신과 같았던 김근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김근태가 그의 영원한 동지에게 바치는 헌사는 다른 누가 김근태에게 바쳐도 손색이 없겠다. 김근태의 ‘헌사’는 이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일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이구요.(……)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병곤이 보고 “눈 감고 고이 잠드소서.” 라고 말할 때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적 과제 앞에 더 큰 힘으로 개입해야 되는 분명한 이유가 이처럼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곤이를 떠나보내지 않았고, 또한 떠나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우리의 가슴 속에, 눈빛 속에, 그리고 오늘의 이 역사 속에 타오르는 불길로, 불꽃으로 여전히 타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석 10)

주석
8> 앞의 책, 269 ~ 270쪽.
9> 앞의 책, 266~267쪽.
10> 앞의 책, 269 ~ 270쪽.


01.jpg
0.06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이 해 12월 18일 역시 홍성교도소에서 <고 김병곤회고집, 영광입니다>의 편찬위원회로부터 청탁을 받고 <지혜 있는 용기>라는 제목의 회고담을 다시 썼다. 11쪽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하룻만에 다 썼다. 그만큼 고인에 대한 사랑, 동지애, 생전의 역할, 빈자리의 공허함, 천도의 무심 등이 배인 까닭이었다.

지금도 어쩌다가 잡지나 신문에서 병곤이의 사진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상당히 긴장을 하게 됩니다. 흘끔 쳐다보고 딴청을 부리다가 또 쳐다보고, 그러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이지요. 병곤이의 안경 너머 그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나의 눈과 가슴에 친구, 동지들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는 병곤이가 이젠 죽었고,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난 것이며, 생동하는 오늘과 내일에서 그 큰 손을 뗀 것이라는 그 얘기를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병곤이의 떠났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그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주석 5)

먼저 떠나간 동지에 대한 절절한 아픔이 서린다. 혈육이나 부부 중 상처의 경우에 사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과 같은 ‘골육지정’의 발로였다.

지난 1960년대 이래, 1970년대, 1980년대 내내 올곧은 청춘들 상당수가 감옥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을 때, 그 한 가운데서 병곤이는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나아갔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짙게 내리누를 때는 물론이고,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실현에 대한 기대가 다시한번 산산이 부숴져 내렸을 때, 그리하여 폐허 같은 잿빛이 온통 사방을 휘둘러 감고 비통한 침묵에 빠져 우리 모두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그는 또 분연히 일어나 맨 앞에 서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참을 수 없는 허망함과 분노, 그리고 고뇌를 부둥켜안고 버티다가 치명적인 암에 걸렸던 병곤이. 그런 그의 감옥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그리고 전국의 많은 양심수들이 어떻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병곤이를 순순히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는커녕 그 큰 허우대로 되살아나 지금의 위기 상황에,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기회인 이 오늘과 내일에 철저히 개입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병곤이의 민청련 시대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병곤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이제는 거의 신비가 되어 있는 “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라는 말 속에서 지금도 그의 담대함과 용기의 힘찬 꿈틀거림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교도관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일단 사형 선고를 받으면 그 누구든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멍한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픽 하고 옆으로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곤이는 그 아득함과 답답함을 딛고 일어서 그렇게 맞서 외쳤던 것입니다. ‘용기’ 이외에 어떤 말로 이것을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주석 6)

우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는 스스로 고난을 택한 많은 독립지사와 민주인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민족ㆍ민주제단에 바쳐진 ‘제물’이었다.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독립된 국가에서 친일파들과 군사독재의 후예들이 다시 주역이 되는, 가치전도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홍성감옥에서 김병곤을 추모하면서 민청련 시대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절실한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당시 민청련을 대표하는 공개 운동에 대해 “소영웅주의적이며, 결국 저들의 아가리에 운동역량을 똘똘 말아 처넣고 말게 될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는 비판과 비난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좌절과 패배,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덮쳐 온 공포 아래서 있을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사실 당시도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 패배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보신을 가장 중시하는 비겁한 비열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연성수가 ‘두꺼비’를 들고 나와 민청련의 상징으로 하자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동의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비겁함에, 비열함에 반대하면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도 않을 것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지금은 죽는 것이 바로 몇 배로 되살아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저명한 활동가이고 많은 수난과 고난을 겪어 온 병곤이가 다시 적극적으로 이러한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 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논리, 심한 경우 “머리카락 보일라 꽁꽁 숨어라.”는 이른바 안테나론을 결정적으로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병곤이는 참으로 선선히 수락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대답을 가슴에 담아 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든 것에 부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생활의 타성에 묶이지 않고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그것은 그 밑바탕에 큰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요.
(주석 7)

주석
5> <고 김병곤회고집, 영광입니다>, 264쪽, 거름, 1992.
6> 앞의 책, 264 ~ 265쪽.
7> 앞의 책, 266쪽.





01.jpg
0.06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2 08:00 김삼웅

 

김병곤 약전. 푸른나무에서 출판.

김병곤은 유신과 5공시대 그리고 1987년 12월 16~18일 노태우 당선자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에 항의 농성 중 경찰 백골단의 무차별 폭력행사로 심한 구타를 당해 몸이 망가지고 이로 인해 병세가 도져 신음하다가 젊은 나이에 숨졌다.

다섯 번인가요, 여섯 번인가요. 병곤이가 체포되어 구속된 것이. 그것은 대치의 최전선에 늘 서 있었다는 증거지요. 더러 몸을 빼고 싶은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이것은 그러한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당당하게 언제나 맞섰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지요.

마라톤을 비롯, 장거리 달리기할 때 맨 앞에 서는 것이 힘들고 외롭다지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웃었습니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다소 감상적이고 과장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대치의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런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지요. 그것이 얼마나 아픈 진실인가를. 그럼에도 이렇게 맞서는 자신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얼마나 엄청난 피곤과 외로움이 몰려오는지 운동은 이런 대치와 대치 속에서만 전진하지만 개인개인들은 이 과정에서 지치고 소모되고 낙오되는 것이 아직 우리 운동의 현주소이지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개인들이 아직 대량으로 등장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병곤이 또한 피곤했을거고,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내용, 민중이 주인이라는 그 믿음이 실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그 안타까움에 허전해 하고 허망해하기도 했을거예요.
(주석 3)

김근태는 김병곤의 부인을 위로하면서 “병곤이의 삶은 승리이고 완성이었다”라고 위로하였다.
김병곤과 조영래 그리고 유신ㆍ5공ㆍ6공의 폭압에 저항하다가 고문사ㆍ의문사ㆍ투신ㆍ할복ㆍ분신 등으로 자기몸을 던진 민주화의 의열사들은 하나같이 ‘승리이고 완성’된 삶이었다. 김근태 자신까지 포함하여.

이런 생각입니다. 병곤이의 삶은 승리이고 완성이었다. 그의 떠나감에서 이런 우리의 주장은 격심하게 동요되고 무효화될 지경에까지 나아갔지만 승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연약함, 부스러지기 쉬움이 그 완성 속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승리, 반성과 연약함과 치명적 취약성은 서로 대립되면서 통일되는 것이다. 병곤이는 승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치열함과 의지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또한 그런 연약함을 통해 겸손함, 겸허, 되돌아봄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나 자신도 아직 완전히 설득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강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달래고 있지요. (주석 4)

주석
3> 앞의 책, 232~233쪽.
4> 앞의 책, 236쪽




01.jpg
0.06MB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1 08:00 김삼웅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분노하는 학생들. 권위주의 정권의 군경에 맞아 죽은 학생은 열사란 이름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에 맞아 죽은 학생은 자살이란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들이 나약했다고 꾸짖는다. 더욱이 우리 같은 '별종'들이 죽으면 관심 한번 끌어보기 위한 '쇼'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김근태가 두번째 옥살이를 하게되는 1990~1992년은 3당 야합을 계기로 한국의 보수세력이 대동 결속하여 5공 못지않게 전제를 일삼은 시점이었다. 한때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하던 노태우는 3당야합으로 거대 여당을 거느리면서 비판하는 저항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민주화를 지도해온 김영삼의 민자당 참여는 일생일대의 실책이었다. 노태우는 박정희 → 전두환에서 정치적 혈통을 이어받은 그대로를 내보였다.

1991년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박광철 총학생회장이 불법으로 연행되자, 학생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경제학과 1년생 강경대는 4월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 에 동료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무자비하게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박승희 열사의 영정 사진 ⓒ 김은숙

이튿날부터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살인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격렬한 항의시위가 전개되었다. 학생ㆍ시민들은 죽음으로써 노태우폭압에 맞섰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박창수 안양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 18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와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분신, 20일 권창수 광주에서 시위도중 전경의 폭행으로 중태, 22일 광주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경찰의 폭력시위 진압과정에서 압사 등이 잇따랐다.

이런 와중에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시론을 쓰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어둠의 세력’ 운운하는 기자회견을 하여 국민의 분노를 샀다.

노태우 정권은 김근태를 다시 감옥에 보냈지만, 국제사회는 그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1991년 5월 미국 하원의원 17명이 김근태의 구속수감에 대해 한국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12월에는 미국 하원의원 44명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김근태가 옥고를 치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민청련을 함께 조직하고 반독재투쟁의 일선에 섰던 김병곤이 위암투병 중 1990년 12월 6일 사망한 소식이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공안검사의 사형구형에 “영광입니다”고 거침없이 외칠만큼 담대한 청년지도자였다.

또 한 사람은 같은 해 12월 12일 인권변호사로, 학생ㆍ청년기에는 반독재 투사로 활동하고 <전태일 평전>을 써서 문명을 날린 조영래의 죽음이었다. 두 사람과는 너무 각별한 사이였고 동지 관계여서 이들의 부음 소식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할만큼 충격이 컸다.

김근태는 김병곤의 사망소식을 항소심 재판정에 나갔다가 돌아온 날 저녁에 어느 신문 귀퉁이에서 보았다. 충격이었다. 망연자실했다.

침이 마르고 목이 잠겼습니다. 머리속에서는 깨진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듯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고자 했지만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학생ㆍ노동자의 푸르른 죽음도 아프고, 서남동ㆍ성내운 선생님 돌아가심도 그랬지만 이것은 또 다른 아픔이었습니다. 인정될 수 없는 것이지요. 종철의 죽음 때, 석규ㆍ한열이 때 많이 울었고, 조성만의 죽음 때도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었는데, 이상하게 병곤이 기사를 보고 또 보는 데도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안절부절하면서 섰다 앉고 앉았다 일어서고 참 이상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한편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불안불안하였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병곤이의 떠나감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절망하면서 혼란에 빠져갔습니다.

너무 많은 죽음에 부닥쳐서 이제 지쳐버린 것인가. 병곤이의 그 참혹한 모습에 정이 다 달아나고 만 것인가. 내 징역에 빠져서, 내 서러움에 갇혀서 그런 것인가. 내 뇌리를 채우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엉뚱함과 당혹 속에서 밤새 이튿날 접견실에서 인재근을 만나고 그로부터 직접 병곤이 얘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참았지만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병곤이의 캄캄한 죽음은 정서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디찬 현실에 맞부딪쳤을 때 그것을 직접 얘기로 들었을 때 파열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석 1)

 


민변, 조영래추모모임 등이 10일 인권변호사 조영래 20주기 추모 행사를 연다. ⓒ 조영래추모모임

김근태는 김병곤과 조영래의 너무 이른 죽음 앞에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고 탄식했다. 앞의 인용문은 1991년 3월 홍성감옥에서 고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우리는 정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더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인지……. “아직도 ……이니이까” 하는 성서 속의 그 절규와 신음이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겨울 징역을 살고 또 살고 또 더 살아야 하고, 그래야 할 것이고 …… 운동은 모두 시간 속에서 변화ㆍ발전할 터이지만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거의 순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좌우 편향 속에서 동요하고 있는 오늘의 이 풍경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큰 목소리로 “때가 왔다. 지금은 그때이다. 모두 일어서라”하던 그 많은 거짓 예언자들, 이론가들 그리고 뒤에서 아우성치던 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중에 몇은 이제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열세”라고 또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있고…….
(주석 2)


주석
1>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35쪽.
2> 앞의 책, 231쪽.





03.jpg
0.06MB
01.jpg
0.11MB
02.jpg
0.05MB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31 08:00 김삼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고 있다. ⓒ유성호

 

세상에 어느 아빠가 딸을 귀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김근태의 딸 사랑은 각별했다.
“(남편이) 딸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꼭 자기만 딸 있는 거 같아요. 시집도 안 보낼 거래요. 딸애도 아빠 앞에서는 듣기 좋으라고 시집 안 간다고 하는 데 제가 슬쩍 ‘너 어느날 갑자기 뒤통수 치고 갈 거지?’ 했더니 ‘물론이죠’ 하더라구요.”  (주석 22)할만큼 병민이를사랑했다.

김근태의 남다른 딸 사랑의 편지 한 꼭지를 더 소개한다. 5월의 병민이 생일날 <드높은 자존심은 흉이 아니다>는 제목의 편지다.

병민에게
네 말마따나 병민이와 아빠는 짝꿍이란다. 병준이와 엄마가 그런만큼,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병민이 너를 좋아하고 사랑한단다.

어느 땐가 엄마가 와서 네 흉을 보던 얘기가 생각나는구나, 네가 괜히 징징거리고 짜면서 “내 편을 들어줄 아빠는 감옥에 가 있고……” 라고 하면서 꼴이 가관이라고 하더라,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콧등이 찡하면서 매캐해졌었다. 아, 우리 병민이가 이렇게 커가는구나. 이렇게 아빠가 멀리 자주 떨어져 있는 데도 잘 자라고 있고, 또 그런 식으로 기억해주고 있고 말이다.
(주석 23)

병민아. 부모들은 자식들의 변화를 보고 느끼면서 감동을 하곤 한단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자랑스러워하고 말이다.

김근태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병민이 너는 네 일을 네가 스스로 하고 또 그에 대해 책임질 줄 알기 때문에 그런 드높은 자존심은 흉이 아니라 자랑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병민이를 아빠는 자유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노예처럼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이고 대신 동정을 받는 그런 사람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독립된 사람이지. 병민이는 아빠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까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는 자유인에 벌써 한쪽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구나. 이런 의미에서도 또 병민이와 이 아빠는 정말 친구이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병민아.
(주석 24)

딸 얘기만 하다보니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는가 하는 의문이겠지만, 역시 어느 부모가 아들, 딸 차별해서 사랑하겠는가. 이 무렵 병준이는 12살짜리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릴적부터 가정의 풍파를 겪어서인지, 그 나이에도 무척 어른스러웠다. 김근태는 8월 16일 병준이에게 편지를 썼다. <한 줄기 바람처럼 향기로운 너의 노래>란 제목을 달았다. 병준이가 면회를 와서 불러준 노래를 듣고 감동한 것이다.

병준에게.
지난 번에 내려와 병준이 네가 불러준 노래 정말 잘 들었다. 워낙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더욱 각별한 것 같았다. 네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에 빨려 들어갔고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네 노래에 공명되어 아버지 가슴 속에서는 어떤 떨림의 물결이 일어났다.

처음 듣는 노래여서 그 가사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또 곡조의 어디에 아름다움의 무게가 집중되어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상당히 긴 노래인데도 지루하게 생각되지 않았고, 비교적 밝고 명랑하며 또 호소력도 있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노래구나라고 말이다.(……)

병준이의 시원한 한줄기 바람 같았던 노래를 생각하면서, 지난날 아버지의 어둡고 슬프고 서러웠던 노래들, 그리고 실패했던 노래 ‘사랑의 미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노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음악은 무엇인가도 약간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노래는, 음악은 정말 해볼 만한 것이다. 특히 병준이처럼 재능이 있는 경우에는 정말로 고려해 볼 만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물론 그 결정은 병준이 네가 하는 것이고…….

그러나 큰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경우에는 열정과 노력이 재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년엔 중학생이 되는 병준이가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일 것이다.
(주석 25)


주석
22> 인재근, <엄마가 뿔났다>, 41쪽.
23> 김근태, 앞의 책, 55쪽.
24> 앞의
책, 57쪽.
25> 앞의 책, 56~57쪽.




01.jpg
0.12MB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29 08:00 김삼웅

 

 

인도의 독립운동가 네루가 감옥에서 편지를 통해 딸에게 세계사 교육을 시켰듯이 김근태도 홍성교도소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대지기’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어둠을 뚫고 새날을 열고자한 인물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러나 역시 등대지기는 사람이어서 밀려드는 외로움을 어쩔 수 없어 이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통해 우리로부터 위로의 말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병준아, 병민아. 조금만 더 아버지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래의 ‘등대지기’는 실제의 등대지기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희망과 믿음의 불빛을 살구고자 애태우고, 그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지금도 하고 있는 귀중한 사람들,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봉화를 들었던 그 사람들 모두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구나. 김병곤 아저씨, 전태일 아저씨 등이 그렇고 너희들이 잘 아는 문익환 할아버지 또한 우리 모두의 등대지기라고 생각되는구나.

지난 백 여년 동안 그러니까 너희들이 보지 못한 친할아버지가 1901년에 태어나셨는데, 그 한 20~30 여년 전부터(1870년경부터) 지금까지 우리 7천만 겨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 왔단다. 자존심이 짓밟히고, 노예 비슷하게도 되고 매맞고, 죽고, 헤어지고…… 참을 수 없는 지옥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일부 먼저 제 맘대로 하는 왕을 쫓아내고 민주 사회를 이룬 나라들, 그와 더불어 공장을 세우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힘센 군대를 만든 나라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그만 교만해져 다른 나라, 다른 겨레를 짓밟고, 쳐들어가고 하여 미움과 전쟁이 그치지 않은 추악하고 혼란스런 백 여년이었다.

이 백 여년 동안 우리 겨레의 등대지기가 되었던 분들이 유관순 누나, 안중근 의사, 신채호, 한용운, 홍범도 장군이다. 또 있구나. 전봉준ㆍ김옥균 선생 등이 그 분들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중국의 손문ㆍ인도의 네루와 간디 등도 그렇다. 이런 분들의 등대지기 역할로 우리 민중의 배가 암초에, 세계 인류가 증오로 인해 죽고 죽이는 참혹한 지옥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주석 17)

김근태는 현재의 ‘등대지기’를 김병곤ㆍ전태일ㆍ문익환을 들고, 근현대사에서는 유관순ㆍ안중근ㆍ신채호ㆍ한용운ㆍ홍범도ㆍ전봉준ㆍ김옥균, 외국인으로는 중국의 손문, 인도의 네루, 간디를 예시하였다. 어린 자식들에게 쓴 편지여서 김근태의 역사철학이 담긴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역사관의 일면이 드러난다.

김근태가 5월 중순에 두 자식에게 쓴 <빨래를 하다보면>은 특이하다면 특이한 서신이다. ‘인병준과 인병민에게’라고 아들과 딸에게 엄마의 성씨를 붙힌 것이다. 최근에야 부모의 성씨를 함께 쓰는 사람이 많지만, 90년대 초에 자식들에게 어머니의 성씨를 쓰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대단한 남녀평등주의자였다.
아내에게도 꼭 경어를 사용하고, 국회의원ㆍ장관이 되었을 때에도 젊은 비서ㆍ여직원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다음은 앞에서 인용한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연극인 손숙과의 인터뷰 대목이다

 



손 : 아내를 인재근 씨라고 호칭하세요?
김 : 기분이 나면 ‘재근아’ 그러고, 보통은 ‘인재근’ 그러죠.
인 : 저는 김근태 씨라고도 하고, 누구아빠 하기도 하고, 화나면 ‘김꼰대’ 그래요. (웃음)애들도 그렇게 들어서 인지 그냥 엄마라고 안하고 인재근 엄마 그래요.
(주석 18)


주석
17> 앞의 책,44~45쪽.
18> 인재근, <엄마가 뿔났다>, 40~41쪽.


01.jpg
4.91MB
02.jpg
0.07MB

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8 08:00 김삼웅

 

 

교도소 규칙에 따라 면회의 시간이 제한되었다.
먼 길을 달려 병준이와 병민이는 엄마와 함께 홍성교도소에까지 아빠를 만나러 왔다가 잠깐 만나고 되돌아가야만 했다. 옥중의 아비는 되돌아 가는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면서 옥문의 쇠창살을 붙잡는다.

양심수들에게 감옥은 때로는 시인이 되게 하고, 때론 학자가 되게 한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쓰는 편지에는 시적인 감상과 철학적인 심오함이 담기기 일쑤였다.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김근태는 어느 때는 역사학자가 되었다. 3월 27일 홍성교도소에서 쓴 <너의 망설임을 이해한다>는 편지의 몇 부문이다.

병준이, 병민이에게,
어제 돌아가는 길에 비 맞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저녁께부터 부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려 땅거죽을 촉촉이 적시더구나. 이 비가 걷히고 나면 완연한 봄이 우리 앞에 다가설 듯하구나. 땅 위에 조금씩 고여 있는 물 위로 소곤소곤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이곳에서 너희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혼자서 불러보았다.

이번에는 ‘라 구카라차’, 지난번에는 ‘등대지기’였지. 경쾌하지만 약간 부르기는 어려운 ‘라 구카라차’를 잘도 부르더구나. 아버지는 가사도 잊어버리고 박자도 놓쳐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너희들은 배짱 좋게 주욱 앞으로 나갔지.

그런데 이번보다는 지난번 불렀던 ‘등대지기’가 더 마음에 들더구나. 그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가지 느낌이 아버지 가슴에 담겼단다. 그중에 몇 가지만 얘기해보겠다.

우선 그런 노래를 너희들과 함께 부르게 되었다는 것의 확인이 상당히 신나는 일이다. 언젠가 너희들이 엄마와 아버지에게 축복으로 와 태어난 후 포대기에 쌓여 배고프다고 “음매음매”, 똥 쌌다고, 오줌 쌌다고 “음매음매” 하다가 참으로 별안간 너희들 입에서 “엄마” “아빠”하는 부름이 외쳐졌을 때 우리는 상기되었다.

신기하고 그리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면서 진짜 아버지가 이젠 되었구나 의식하게 되면서 책임감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에다가 너희들이 이렇게 컸구나 하는 대견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서도 또 그것이 서로 함께 어울리도록 신경쓰는 데에서 보이는 동료감, 그것을 너희들과 함께 노래로서 확인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여간한 뿌듯함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가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데도 너희들이 스스로 밝게 커가는 모습이 보여 고맙고 기뻤단다.

얘들아. 아버지도 너희들만 했을 때 등대지기를 좋아해서 자주 불렀고, 그 후 커 어른이 된 뒤에도 외롭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단다. 그 노래 분위기는 명랑하지 않고 약간 슬프지 않니. 너희들은 어떠냐.

멀고 험한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배에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등대의 번쩍이는 불빛은 분명히 희망이겠지. 고난과 절망 속에서 한줄기 날카로운 희망일게다. 그런데 그 희망의 불빛을 지켜주는 등대지기는 여간 외로운 것이 아니란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뚝 떨어져 참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란다.

그렇게 참으면서, 외롭게 살면서도 견뎌낼 수 있는 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그래서 그만큼 훌륭한 일이지. 그러면 이러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너희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아름답고도 큰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주석 16)


주석
16> 앞의 책, 43~44쪽.

 


 


01.jpg
4.91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