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9 08:00 김삼웅

 

직선제 헌법이 마련되고 대선 일정이 잡히면서 대선 후보가 속속 등장했다.
집권당의 노태우와 야권에서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이른바 ‘1노3김’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노력하고 다수 국민도 이것을 바랐으니,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야권은 분열상을 드러냈다.

재야ㆍ시민단체들도 분열되었다. 후보 단일화와 독자후보 출마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념ㆍ노선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민청련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옥중투쟁을 조직해냈으며 또한 바깥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항쟁을 직시했으며 그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운동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옥중 메시지는 87년 12ㆍ16대선을 앞두고 세 차례 나왔다.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부인 인재근 씨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쓰게 했다. 10월 16일과 28일, 11월 4일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26일의 첫 메시지에서 그는 김대중 씨를 ‘범국민적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씨의 비판적 지지 천명으로 그는 출옥 후 상당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김근태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당시 어떤 입장이 옳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그것은 판단될 것이다." (주석 6)

김근태는 대단히 함축적인 발언을 하였다. 양김 중에 자신의 김대중 지지를 두고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근태의 메시지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을 이끈 핵심적 재야연합세력인 민통련에서는 회원 투표를 거쳐 압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핵심재야세력은 김대중을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5공정권의 각급 부정과 관권동원, 야권후보의 난립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의 실망은 컸다.
5공 폭압세력이 교활한 정치적 술책으로 6ㆍ29를 제의하고, 야권과 재야가 이를 덜컹 받아들이면서 국민의 혁명적 열기가 체제내로 순화되고, 후보 난립으로 군부독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주석
6> 이재화, 앞의 책, 165쪽.



<나의 18대 대선 후기 1> / 유창선 (시사평론가)

“뻔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야 아는 어리석은 자들...”

안철수가 사퇴했던 날 밤. 부산에서의 대선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 있던 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채 페이스북에 그렇게 글을 남겼다. 나에게 18대 대선은 그날 밤 그렇게 끝났다. 안철수를 저렇게 퇴장시키고서 민주당과 문재인이 박근혜를 이긴다? 나는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아주 명백한 표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날 밤, YTN과 MBC, KBS의 해직자들이, 그리고 쌍용차의 노동자들, 철탑에서 고공농성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이야 정권교체 못하더라도 자신들의 금뱃지를 간직하며 야당권력을 누리면 되겠지만, 다시 고통이 연장되는 민중들의 아픔은 어찌하란 말인가....

결국 민주당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지난 4.11 총선 패배에 이어, 국민의 65% 이상이 정권교체를 열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권교체를 무산시키는 주역이 되고 만 것이다.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욕심을 낸 결과이다. 지난 1년 동안 박근혜에게 줄곧 뒤졌던 후보가, 지난 1년 동안 박근혜를 변함없이 이겼던 후보를 밀어내고 자신이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했던 상황은 재앙의 출발점이었다. 과연 정당의 후보이기에 자신들이 단일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정권교체의 대의를 뒷전으로 밀어버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민주당은, 문재인 후보는, 야당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이미 노회해진 486정치인들은, 민주당보다 더 민주당스러운 시민사회 출신 정치인들은, 팬덤문화에 빠져있는 그 지지자들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그리하여 박근혜를 이기는 길을 막아버리고 박근혜에게 지는 길로 국민을 이끌고 갔다. 그것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이길 능력도 없고 이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고 따라오면 이길 수 있다고 한 것, 그것은 거짓이었다....

시종일관 열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박근혜에 줄곧 뒤지는 판세를 민주당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노 핵심들의 백의종군 선언도, 문재인 후보의 의원직 사퇴도 끝내 없었다. 내가 거론한 이해찬 정계은퇴 선언 같은 것은 아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는 모습일 뿐이었다.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했으면 모든 것을 던지고서라도 이길 수 있는 길을 만들었어야 했거늘,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분한 것이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장애물이다. 지금의 민주당이 그대로 있다면 이 나라는 새누리당이 장기집권하는 나라, 새누리당이 2014년 광역선거와 2015년 총선에서도 모두 승리하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무모한 욕심으로 정권교체를 무산시킨데 대해 가장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 천년만년 야당을 하며 야당권력을 놓으려하지 않는 세력은 이제 그만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하기에는 그들 스스로가 이미 너무도 기득권화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민주당이 스스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국민의 힘으로 민주당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적 야당을 만들어내는데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안철수는 그 과정에서 구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과정에서 안철수는 여러 가지로 정치적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능성있는 대안으로 살아있다. 국민의 힘이 모인다면 기득권 세력화 되어버린 민주당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야권의 구심체는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좌절된 국민의 정권교체와 새 정치 염원은 아직도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8 06:50 김삼웅

 

5일 저녁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로비에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부미방)의 주범으로 위암을 앓고 있는 김은숙씨를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에서 윤민석씨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유성호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의 수구보수세력은 노도와 같은 민중의 궐기 앞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간신히 노태우의 6ㆍ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등으로 국면을 호도하고자 하였다. 부마항쟁 등 반유신 투쟁이 10ㆍ26사태로 가라앉고 말았듯이, 6월 민중항쟁도 6ㆍ29선언으로 혁명적 비등점에서 국면의 전환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군부와 이들과 한 패가 된 보수세력은 정치적 술수가 대단히 발달돼 있다. 그들은 강경국면과 유화국면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정권을 계속 유지한다.
노태우의 6ㆍ29선언은 위기 탈출을 위한 유화책이었다. 야당과 재야가 6ㆍ29선언을 받아들이면서 6월항쟁의 국민적 민주화 열기는 체제내로 수용되고,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정국은 급속히 제13대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바뀌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 같았다. 폭압과 살륙의 시대가 어느새 대화와 타협의 시대로 변하는 듯하였다. 야당이 속속 창당되고 기회주의 언론은 온통 차기 대권과 대선의 향방관련 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죽은 자들과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양심수들은 잊혀지고, 산 자와 갇히지 않은 사람들이 제각기 이념과 이해와 입지를 쫓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경주교도소에 갇힌 김근태는 6월항쟁을 주도한 민중의 위대한 역량을 믿으면서도 바깥 소식에,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희망과 좌절, 안도와 비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8월 28일 아내에게 <자유ㆍ석방 앞에서 의연함, 태연함은 태풍 속의 낙엽이지요>라는 제하의 편지에서 심중의 일단을 밝히고 있다.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 바깥소식이 동반하는 설레임과 안타까움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탓도 있겠지만, 이 높은 담벼락 안에서의 삶이 영혼을 무척 피폐케 만드는 것 같소. 이 시대의 징표인 적나라한 폭력, 제도화된 폭력과 경멸이 한껏 도드라지고 있는 이곳에서의 살아냄, 그리고 분노와 항거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긴장될 것을 요구해왔고, 그 때문에 꽤 바빴던 것도 같구려. 지난 2년 말이오.(…)

나갈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이 상태, 이런 우리 마음을 뭐라 말해야 할지요. 지난 7월 10일과 8ㆍ15의 내 심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소. 내 차례는 아직 안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자신에게 타일러 왔는데도, 열렸다 허무하게 도로 닫히는 교도소 정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휘청거리는 것 같았소. 곧 몸져 드러누울 지경이었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버티었지만 말이오.
(주석 3)

이 대목에 이르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7월 10일과 8ㆍ15에 양심수와 일반범에 대한 정부의 감형ㆍ출소 조처가 있었다. 김근태도 대상자의 명단에 오르내렸으나 끝내 배제되었다. 수인들에게 3ㆍ1절과 광복절이 특히 기다려지는 것은 특사라는 ‘성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취임식 연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전직 대통령들. 왼쪽부터 김영삼 전대통령, 노태우 전대통령, 전두환 전대통령, 최규하 전대통령.ⓒ주간사진공동취재단

 

노태우의 6ㆍ29선언에는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사범 석방’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쳐 ‘시국사범’의 석방이 있었지만 김근태는 비껴갔다.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어른답게 해내지 못했다오. 결국 나는 못 나가고 말았구나 라는 그 냉엄한 사실에 짓눌려 허둥대고 만 것이지요.

이번은 아니지만 여하튼 나가는 것이 가까웠으니 여러 가지를 미리 깊이 생각해두고자 하면서 이 민주화의 변화는 무엇인가,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리고 나는 무엇이고 참된 민주화와 민족자주를 위해서 우리는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등을 헤아리느라고 무척 바빴었다오.

간혹 생각이 엉키거나 잠자리에 들 때 쯤이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여 빨리 나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은 아닐까 하며 조바심 치고 가슴 저려 하다가 자신을 돌아보곤 실소도 하였었소. 시계는 네편이야, 대범해야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었다오.

그러나 말이오. 자유ㆍ평등ㆍ석방 앞에서 의연함, 대범함, 어른다움 등은 한낱 태풍 속의 낙엽이었을 뿐이었소. 여러 가지 논리적인 숙고 과정 속에서 진짜 커지고 커져왔던 것은 폭발할 듯한 해방에의 갈망, 자유에의 그리움이었소.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고 그냥 원색적인 해방에의 욕구만 있었던 것이오. 나가고 싶은 것이오. 이곳을 떠나가고 싶었던 것이오. 뻔히 예상되었던 것인데도 이런 강렬한 욕구가 차단되었던 그때의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소. 나는 통째로 교환되었던 것이오.
(주석 4)

이 대목에 이르면 김근태의 소박한 인간적 감성을 만나게 된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누군들 감옥에서 풀려나길 바라지 않겠는가. 행여나 하며 ‘조바심 치고’, ‘가슴 저려’하는 수인의 모습에서 투사 김근태가 아닌 보통사람 김근태가 눈에 선하다. 그는 혁명가나 투사이기 전에 평범한 인간이었다.

김근태의 이 편지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대목이 있다. 이른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김부식ㆍ김은숙ㆍ김현장 등이 경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게 된 심경이다.

내가 이곳 경주에 와서 꽤 괜찮아했던 가장 큰 이유 하나는 은숙이가 여기서 살다가 나갔다는 사실이었소.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묘한 안도감과 구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소. 어찌보면 얄팍하고 뻔뻔스런 것일 수 있는데 은숙이가 고생하던 그곳에서 나도 고생 좀 했다는 사실이 성립하게 된 것이오. 나중에 나가서 은숙이, 부식이, 현장이를 볼 때 말을 틀 건덕지가 생겨준 것이지.

그네들이 결단을 내리고 투쟁할 때, 갇히고 매맞고 외로워할 때, 앞 세대로서 선배로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소. 광주사태 이래로 눈물 많은 사내가 되어 쥐죽은 듯 엎어져 있었을 때 그네들은 일어섰고, 나는 또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소.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조그만 꼬투리가 우연히 생기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왔소. 이 경주에 와서 말이오.
(주석 5)


주석
3> 김근태 옥중서간집,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02~203쪽, 한울,
1992.
4> 앞의 책, 203~204쪽.
5> 앞의 책,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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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

012/08/17 08:00 김삼웅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시위대 ⓒ 6월항쟁기념관

바스티유 감옥을 붓 한 자루로 깨뜨린 볼테르는 막상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다른 감옥에 갇혀 있었다.
민청련을 이끌면서 ‘전두환 바스티유’를 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근태는 6월 항쟁기에 경주교도소 골방에 수감돼 있었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는 침묵하던 ‘남은 자’들까지 분노하는 계기가 되었다. 4ㆍ19가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참살이 화약고의 불이 되었듯이, 6월 항쟁은 박종철ㆍ이한열 등 대학생들의 학살이 항쟁의 뇌관을 터뜨렸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 정문 주변에서 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교문 쪽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않을 때…”라는 노래를 부르며 교문 밖 5미터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순간 SY-44 최루탄 10여 발이 학생들에게 직격으로 날라왔고, 이 중 하나가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동료 학생들이 급히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의식을 잃고 몸도 차갑게 굳어져갔다. 학생들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고, 많은 시민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이한열은 7월 5일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은 6월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부산시민 시국토론회가 열리고 있는 카톨릭센타 앞. 부산가톨릭센터는 6월항쟁의 분화구였다. ⓒ 6월항쟁기념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것에 분노하고, 독재정권의 초강경 시위 진압을 규탄하였다. 특히 6월 18일의 집회에는 전국에서 15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한열 피격에 대한 항의 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함께 하고, 서울과 지방 도시로 이어져 거대한 6월 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9일에 있은 각 대학의 6ㆍ10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중태에 빠진 것은 6월 항쟁의 불꽃을 계속 지피는 활화산으로 승화했다. 전두환 정권의 초강경 탄압의 연속선상에서 박종철이 사망한 것이 6월 항쟁의 문턱까지 군부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투쟁을 이끌어왔고 끝내 6ㆍ10국민대회를 갖게 했는데, 또 한 학생이 중태에 빠졌던 바 박종철의 죽음과 함께 6월 항쟁 기간 내내 투쟁을 타오르게 하는 데 기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주석 1)

시위 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권력은 합법적인 정권일 수 없다. 유신권력과 5공정권은 국민의 정당한 동의를 받지 못한 권력이어서 실체적으로는 존재해도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한 도당(徒黨)에 불과했다. 때문에 정체성의 위기에 몰린 5공 수뇌부는 시민의 저항에 고문과 살상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6월 10일부터 노태우의 6ㆍ29 항복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 시위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반독재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국본’은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감행하여 전국 33개 도시, 4개 군ㆍ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전두환 정부는 서울에 170개 중대 25,000명을 배치하고 전국적으로는 10여만 명을 투입해 철통 방어에 나섰으나, 해일처럼 밀려오는 시위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1919년의 3ㆍ1만세 시위와 1960년 4ㆍ19를 방불케 하는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실제적인 종말을 가져왔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전두환은 6월 18일을 전후하여 계엄을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미국 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군 출동을 자제하라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의 국민항쟁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은 제한된 특정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을 출동시켜 진압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70만 인구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계엄군이 한때 외각으로 밀려났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구 1천만이 사는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자면 수도권의 군 병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군 병력 투입으로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6월 항쟁에서 계엄령을 막는 것은 미국의 자비심도 아니요 전두환의 개과천선도 아닌 바로 한국 국민 자신의 자각과 실천의지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힘이었던 것이다. 6월항쟁이 분출한 힘은 전두환이 사용할 수 있는 군대, 경찰력을 위시한 그 모든 종류의 폭력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2)

주석
1> 서중석, <6월항쟁>, 272쪽, 돌베개, 2011.
2> 유시춘, <6월 민주항쟁>,
93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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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6 08:00 김삼웅

 

2005년 4월 서울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김세진ㆍ이재호 열사 추모비에 향불과 국화가 놓여져있다.

 

김근태는 2월 22일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면서 김세진 군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인 김세진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 위원장 이재호는 1986년 4월 28일 관악구 신림동 4거리에서 전방입소에 반대하며 가두시위 중 분신하여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26일 각각 사망하였다.

편지의 일부를 소개한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이 욕된 어둠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지요. 그 속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젊음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지요.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지 말라”고 외쳤다는 세진이의 금속성 목소리에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라는 여운이 긴 메아리를 나는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젊은 생명을, 세진이, 재호, 영진이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 젊음들이 죽음의 골짜기로 몰리는 동안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나는 세진이, 재호가 정말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종철이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이 팽만한 배와 흥건하게 젖은 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어디 있습니까. 물 먹고 팽만한 배가 되어 죽어 버렸거나, 잠깐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다가 연기를 남기고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요.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세진이의 죽음 이후 두 분이 떨쳐 일어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면서 나는 머리를 끄덕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세진이의 부활일뿐만 아니라, 두 분의 새 생명, 우리 모두가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소선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그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두 분의 일어섬을 기뻐합니다. 사망의 세계를 떨치고 일어선 두 분을 존경합니다. 후둘 후둘 하는 다리 떨림, 가슴 무너짐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요. 두 분 속에서 저는 종철이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뵈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기대옴을 받쳐 주는 두 분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소선 어머니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석 20)

김근태는 3월 14일 경주교도소에서 <기정이 어머니의 구속 소식을 듣고> 의 편지를 썼다.
짧은 글이어서 전문을 소개한다. 구속된 자식들을 풀어놓으라고 시위한 죄로 구속된 ‘기정이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다.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기도하고 계신가요. 기도하면 희끄무레한 먹방이 조금은 환해지던가요. 뜨거운 가슴 설운 마음 주체할 길 없어 15척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 던지고 물어뜯고 침뱉으며 사납게 사납게 소리치며 쳐들어 오셨습니다.

당신은 잠시 피하시라는 유혹 따위는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대달리려 이렇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두움 속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외롭지 않으신가요. 우울해지지 않던가요. 기죽지 않던가요. 혹시 소리 죽여 울지는 않으셨는지요.

어머니,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추운 대관령 바람 한가운데 서 있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스름달 비껴 걸린 나무 위로 일지매처럼 날아 올라가셨었지요. 거기 앉아 담벼락 노려보면서 아들들을 불러대셨지요. 내공 깊게 무림계 고수처럼 어머니의 외침은 하늘을 뒤덮었었습니다. 그렇게 아들들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신은 참다가 참다가 참지 못하여 아들 딸 가슴속으로, 이 설움 많은 담장 안으로 그리하여 먹방 속으로 직행해 버리셨습니다.
어머니는 —.

아, 비열한 저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주석 21)

 


2010년 MBC 노조 파업 당시, 현장을 찾아 연대사를 하다가 소녀처럼 웃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김근태는 1986년 10월 강릉교도소로 면회온 부인을 통해 구두로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우선 교도소 내의 행형제도의 철폐를 통해 재소자의 인간적 생활의 회복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소내(所內)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직적인 옥중투쟁론이다. 이 글은 인재근이 정리하여 전국의 수형인들에게 은밀히 전달되었다.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옥중투쟁의원회(가칭)의 구성을 제안하면서, △ 양심수들의 합방ㆍ합사문제 △ 재소자에 대한 폭행ㆍ폭언근절 △ 전 재소자의 삭발거부와 소내에서 면회ㆍ서신ㆍ서책검열 등에 관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근절해야 한다고 실천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재소자들이 결속하여 투쟁할 것을 권려했다.

주석
20> 앞의 책, 198~199쪽.
21>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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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운명에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1987년 2월, 이번에는 더 멀리 경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발화체’를 아주 멀리 격리시킨 데는 까닭이 있었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 결성대회가 전국 22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건국대학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경찰의 진입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와 옥상에서 3박4일 동안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른바 ‘황소 31입체작전’을 벌여 1,525명을 연행했다.

검찰은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세계학생운동사에서 기록되는 가장 많은 학생을 연행하였다.
12월 5일에는 정부의 언론통제 내막을 밝히는 보도지침이 폭로되고,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김근태가 당했던 치안본부대공분실의 수사관 6명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숨졌다. 2월 7일 서울을 비롯, 전국 16개 지역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리는 등 시국은 태풍권에 들어갔다. 박종철 열사의 추모행사, 장례, 49제가 잇달아 열리면서 정국은 혁명적 열기로 가득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김근태를 서울에서 가장 먼 경주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월간 말>이 폭로한 정부의 ‘보도지침’에는 “김근태 관련 단체의 이적행위 관계를 꼭 1면 톱으로 쓸 것, 주모자인 김근태의 출신 배경 등 신상에 관한 기사를 꼭 박스기사로 취급할 것”을 지시하고, 관제언론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그 때문에 김근태에게는 강성 이미지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김근태는 2월 12일 부인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박종철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뼛가루를 임진강에 뿌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미 우리는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추악한 전쟁은 어느 틈에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적인가. 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어버렸는가.

그런데 임진강에 뿌려진 그 원통한 죽음을 저들은 어떻게 인정했는가. 나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뭔가 빼도 박도 못할 사정이 있었는가. 아니면 은폐하는 뒤처리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는가. 지금은 크게 후회하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금수처럼 당하고도 또 징역을 살아야 하는 권양, 그 흐느낌의 어디에 저들의 양심 같은 것이 끼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아닌 것이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하였다고 주장되는 우종환 서울대생, 남쪽 머언 시골 어느 야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청년, 죽어서 말이 없으니까 뭐라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산 앞바다에서 풍덩 빠져 종적을 감췄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우리 앞에 나타났던 그 청년의 시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애초부터 목에 시멘트 돌덩이를 스스로 매달고 뛰어들어 자살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 이것 뿐이리오만은 이 수상쩍은 죽음들이야말로 진정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분노의 불길이었던 죽음, 항의의 폭탄이었던 죽음, 박영진, 이재호, 김세진 등과 거기에 수상쩍은 죽음이 겹쳐지면서 광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광주, 간단없이 지속되는 그것에 나는 넌덜머리가 나면서 무감각해져 버리고 말았는가.
  (주석 18)

김근태는 잇달은 젊은학생들의 부음 소식에 분노하고 사지육신이 떨렸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갇힌 몸이라 어찌하기 어려웠다. 분노는 창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 뽈 엘뤼아르의 <통금通禁>과 같은 심사였다.

통 금

어쩌란 말이냐 문에는 감시병이 서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길은 막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사면초가인데
어쩌란 말이냐 그녀는 굶주려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린 무기를 빼앗겼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이 오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김근태는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단식을 결행했다. 곡기를 끊고 절규해도 메아리조차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신라의 옛 고도 외곽에 자리한 감옥은 공동묘지처럼 스산했다. 감시병들만 없으면 공동묘지 그대로였다. 3월 12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잘 잡히지 않는구려,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면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것이었소. 항의도 하거니와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 단식을 한 것이었소. 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을 듣자마자 분노의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사흘 째부터는 꽤 고통스러웠소. 얼굴 표정도 아마 찌그러졌었을 것이오. 건강이 안 좋고, 또 자신감까지 없고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오. 공포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달걀귀신처럼 자꾸만 커지는 것이었소.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젊은 죽음을 가슴에 받아들여 서로 교감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는 힘없이 밀려 버리고 말았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소. 배고픈 고통과 공포, 부끄러운 생각 등의 혼란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부각되어 온 것은, 날카롭게 찔러온 것은,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소. 이 염치없는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소.
(주석 19)

역사는 의로운 죽음에는 반드시 피값을 요구한다. 일제는 안중근ㆍ이봉창ㆍ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죽인 피 값으로, 이승만은 김구ㆍ조봉암ㆍ김주열ㆍ4.19 희생자들의 피값으로, 박정희는 조용수ㆍ장준하ㆍ인혁당 등의 피 값으로 무너졌다. 전두환도 수많은 청년들을 죽이고 분신ㆍ자결ㆍ투신으로 몰아가고 있어 무너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 김근태는 믿었다.

주석
18> 앞의 책, 192~193쪽.
19> 앞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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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석 소설가

지난해 겨울, 나는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의 삶을 정리할 기록자로 호출을 받았다. 병상에서 고통을 견디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힘들다고, 못 견디게 고통스럽다고, 차라리 비명이라도 질렀다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토록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끝내 견디려고 애썼고, 견디다 떠났다. 그는 영원한 진술 거부에 들어가 버렸고 나는 서사의 주인공을 잃어버렸다. 한해 가까이 실명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의 집필에 매달렸다.

 

1주기를 앞두고 책을 내게 되어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었다고 여기던 차에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란 책의 출판기념회를 언론을 통해 보았다. 출판기념회 장소에 걸린 현수막이 경악스러웠다. ‘경축 이근안 선생 출판기념회’. 일찍이 자신의 고문 행위를 ‘예술’이라고 표현했던 사람답게 이근안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김근태 의장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말할 수가 없기에 그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밝혀두어야겠다.

 

김근태 의장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그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 의장은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하는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진심인지 의심스러웠다고 했다. ‘의심스러웠다’는 김근태의 표현은 일반적인 어법으로 바꾸면 ‘전혀 아니었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진심이라면 눈물 한 방울은 흘려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 의장은 이근안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어했지만 이근안이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근안을 만나고 와서 김근태 의장은 밤잠을 설쳤다. 혹시 자기가 옹졸해서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했다고 했다. 김 의장의 고민을 들은 한 성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는 하느님의 몫이지 당신의 몫이 아니다. 김 의장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근안이 정말 반성한다면 용서받는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용서를 받고, 받지 않고는 그 자신의 몫이다.

 

김근태 의장은 이근안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는 원수를 용서하는 통 큰 인물로 포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용서를 구하는 것을 알면서 이근안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였기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아우라픽쳐스 제공

 

나는 김근태 의장이 고문에 가담했던 여덟명 중 한 사람을 뒷날 진심으로 용서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근안과 달리 김 의장에게 ‘정말 죄송하다’며 눈물로 사과한 그 고문자는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를 김 의장은 분명히 용서하고 위로했다. 그러나 이 사실도 김근태 의장은 생전에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을 늘 기억했다.

 

‘고문으로 인생이 파괴되고,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누구로부터도 사과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고 있다. 내가 고문을 용서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나.’

 

독재정권에 희생당한 마지막 한 사람이 사과를 받고, 고문을 자행했던 야만세력이 다시는 발붙일 수 없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 김근태 의장은 고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대통령을 뽑을 권리도 빼앗아버렸던 박정희의 딸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박정희에 맞서 10년 동안 수배자로 살며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운 김근태는 출마하지 못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은 투표한다. 김근태는 투표하지 못한다. 슬프다.

 

방현석 소설가

 

등록 : 2012.12.17 19:13 수정 : 2012.12.18 10:0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57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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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세계는 격동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상징되는 잔혹한 유럽의 여름, 월가를 점령하자는 뉴욕의 가을, 그리고 월가점령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공감, 급기야 10월 15일 전 세계 곳곳에서 월가점령 시위 동참......월가점령 시위가 확산되자 미국의 언론, 학계,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보수 쪽에서는 폭도라는 말까지 사용해가면서 월가점령 운동을 폄하하고 있고, 진보 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역사의 순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월가점령에 나선 사람들이 폭도로 여겨지지도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당장 붕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양 진영의 주장이 워낙 강력하고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관계로 자칫 생각과 판단의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월가점령 운동에 대한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차분히 묻고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선 미국인들은 왜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치고 있을까.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왜 월가점령에 공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금융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월가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티파티의 압력에 굴복해 길을 잃은 공화당과 의회에 대한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다.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티파티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있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냉혹해서 그들이 공화당을 장악한 티파티 정도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감세가 중지되거나 약간 다시 오르거나 다음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되거나 일뿐이다. 이런 사실을 2008년 촛불집회를 했던 우리는 너무 잘 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한다.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미국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처럼 경선에 뛰어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해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정치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전자가 쉽고 확률도 높다. 비호감일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2011년 10월

김근태

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4 08:00 김삼웅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낸 제임스 에머슨은 고통과 고난을 분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통은 피할려면 피할 수 있지만, 고난은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이란 이유다. “옳은 일을 위해 감옥에 가는 일”은 피할 수 있는데도 받아들이는 고난이라는 뜻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결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현대사의 아픔, 통증을 자신과 역사ㆍ민중의 통증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피하지 않고 민주화의 전위가 되었다. 무더위 속의 옥살이를 하면서 아내와 지인들이 보내 준 책을 열심히 읽었다. 옥살이의 시간이 더해갈수록 내면의 더께도 그만큼 깊어갔다.

영등포구치소에서 6월 19일 처음으로 어린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 없이도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애비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왔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그도 평범한 아버지였다.

병준아, 병민아 잘 있었니.
오랫동안 너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아버지는 이사를 하였고, 유난히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 병준이, 병민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것은 엄마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엄마 편지와 함께 날아 온 너희들의 그림을 재미있게 들여다 본단다. 엄마, 아빠를 그린 병준이 그림, 병민이 그림 모두 잘 그렸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병준아, 학교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네 그림 속에서 금방 병준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 나올 것 같구나. 학교생활이 신나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그 그림에 배어 있구나. 하늘에는 해가 환하게 웃고 있고 말이다.
(주석 14)

이어지는 다음의 내용을 보면 평범한 30대 후반의 부정(父情)을 흠뿍 느끼게 된다.

병민아, 역곡 일두아파트 뒤에 있던 약수터 기억하고 있니? 거기에 네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오빠, 엄마와 함께 갔던 것, 나는 그리워 한단다. 약수터 가는 논길에서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가 병민이를 반겨 주었고, 앞쪽 산숲에서는 뻐꾸기가 뻐국, 뻐어꾹 하고 울어 댔었지. 아버지가 병민이한테 가는 날 우리 모두 뻐국, 뻐어국 소리내면서 다시 한번 약수터에 가자. 그래서 개구리도 만나고 뻐꾸기도 만나고 말이다. (주석 15)

김근태는 이 해 8월 다시 강릉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계속하여 고통을 주려는 당국의 뜨거운 ‘배려’였다. 시국이 점차 가열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운동권의 ‘발화체’를 가급적 먼 지역으로 격리시키려는 전략이었다.

8월 28일 모처럼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결코 약하지 않은 사람이라면서 “매맞고, 갇히고, 모욕당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거요. 피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핑계를 대서 모면하는 것이 인간의 심정일 것”이라 토로한다.

김근태가 믿는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고난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톨릭신자 김근태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역사의 소명이라면 거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아, 고백 그것이 필요한 것 같소. 우리들의 망설임과 흔들림,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치욕스런 굴종을 강제당할 때, “아니오” 하면서 고개를 바짝 쳐드는 것은 확실히 어렵고 두려운 일이오. 하지만 노예에의 길에 대한 거부의 대가로 틀림없이 찾아드는 매맞고 짓밟힘, 자유의 박탈, 이것은 속병 들게 하는 것이고 한이 맺히게 하는 것이요. 이 갈구, 이 목마름은 그 박탈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네 목마름과 외로움은 너무 깊어서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일단 자유의 냄새가 한번 풍겨지면 송두리째 흔들려 버리고 말 것이지요. 위로 또한 있어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게요. 매맞고 갇힌 자들이 남은 자들 되어 꿈을 깊게 꿀 수 있는 것은 이런 고뇌와 흔들림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오.
(주석 16)

김근태는 외롭고 고통이 심하여 마음이 흔들릴 때면 일제강점기 어려웠던 시기에 고통을 감내하며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젊은 학생들의 통곡소리에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찾곤 하였다.

저 30년대 일본제국주의가 더욱 강성해지고 운동가들 일부가 대열에서 교묘한 논리로 이탈하고 일반대중은 체념 속에서 일상생활로 매몰되어 가던 그 시기는 우리 민족에겐 아주 깜깜한 어둠이었을게요. 그런 어둠 속에서도 일제와 강경하게 싸워 나갔던 민족해방운동가의 맘은 어땠을까 상상해 보면 내 숨이 막혀 버리는 것처럼 답답해지는 것이오.

그런 자랑스런 선조, 선배 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 그 분들은 역사발전 법칙에 대한 명확한 파악과 분석을 했을 것이요. 그 위에 고뇌의 슬픔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신념, 흔들림 속에서도 결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걸음걸음이 있었을게요. 아니 이것만이 전부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것 없는 어떤 것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요.

내 가슴에 패이는 상처를 보면서, 나는 젊은 학생들의 통곡소리를 듣는 것이라오. 저 소리 죽인 흐느낌 말이요.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맘인데, 이렇게 약한 소리만 할 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와지는구료. 하지만 말이요, 이런 흔들림에 대한 고백 속에서 어김없이 다시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 것이요. 이것을 굳게 믿고 싶은 바이요.
(주석 17)


주석
13> 제임스 에머슨 지음, 송우용 감수, <고난, 행복한 선택>, 22쪽, 가치창조, 2002.
14>
<이제 다시 일어나>, 184~185쪽.
15> 앞의 책, 185쪽.
16> 앞의 책,
187쪽.
17> 앞의 책, 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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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

012/08/13 08:00 김삼웅

 

김근태가 서울구치소에서 부인에게 쓴 많은 편지 중 마지막 시기는 1986년 1월이다.
이후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일곱 살짜리 아들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써 보낸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자기 아버지를 그리면서 쓴 글이다.

김근태의 아버지는 여늬 아버지들처럼 초라하고 소심한 분이셨다. 어릴적에 아버지가 3ㆍ1운동 당시 읍내 시장에는 못나가고 뒷동산에 올라가 혼자 만세를 불렀다는 말을 듣고는 심약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이제 30대 후반이 되어 감옥에 앉아서 20년 전에 떠난 아버지의 그 따뜻했던 품속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신의 철부지를 자책한다.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 된 것일 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 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 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주석 10)

김근태는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면서 일곱 살 아들과 네 살짜리 딸 (병민)의 모습이 겹쳤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족이나, 해방 뒤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민주화ㆍ통일운동가의 가족은 매 한가지였다. 일제 때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온갖 감시와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고, 해방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좌경ㆍ용공 ㆍ간첩ㆍ종북’으로 색칠당하면 온전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딸 병민이는 1982년에 태어났다.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 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 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 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오.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주석 11)

김근태는 1986년 6월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양심수들은 특히 권력이 ‘국사범’처럼 지목하는 수인들은 감옥을 자주 옮긴다. 그들의 용어대로 ‘불순분자’들과 차단하기 위해서다. 또 자주 이감을 시켜서 ‘신참’으로 고통을 주려는 보복성도 따른다.

김근태가 서울구치소에서 이감하는 6월 3일 같은 병동에 수감되었던 문익환 목사는 면회온 인재근에게 쪽지 하나를 은밀히 전했다. 다음의 시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밤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다가
아침이면 꿈틀꿈틀 일어나 앉아
눈을 빛내던 방이란다.

해파리처럼 풀어진 몸
인재근의 고운 얼굴 아른거리지 않았으면
물거품처럼 아주 풀어졌을 몸으로
죽음을 깔아뭉개어 되살아난
근태의 방이란다.

민주주의의 손톱끝에만은 남아있어
곤두박히는 허무 나락을 쥐어뜯으며 솟구친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 근태의 방이란다.

1986년 5월 31일 토요일 근태를 이감시키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고 벽돌을 새로 페인트칠을 했단다.
그러나 어쩌리요 창문틈에 남아 있는 근태의 손톱자국을
철창에서 풍겨오는 그의 입김을
푸른 하늘에서 우뚝 솟아나는
근태의 웃는 얼굴을.

눈만 감으면 나는 바람으로 풀어져 신나게 펄럭인다.
근태가 휘두르던 민중의 깃발, 승리의 깃발로.
(주석 12)

영등포구치소에서 다시 ‘신참’이 된 김근태는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여름 뙤약볕에서 겹 옥고를 치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기 어려웠던 그에게 4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인이 되어 잦은 이감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주석
10> 앞의 책, 183쪽.
11> 앞의 책, 184쪽.
12> 앞의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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