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입력 : 2012-11-16 22:16:25수정 : 2012-11-16 22:52:06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 측이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을 중단한 데에는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측의 조직 동원과 물밑 여론전 등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문 후보 측은 이를 “정상적인 정당활동”이라 주장하지만, 안 후보 측은 “바로잡아야 할 구태정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양측이 함께 추구하기로 한 ‘새정치’에 대한 눈높이 자체가 다른 상황이다.

 

협상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건 민주당의 ‘조직 동원’이다. 안 후보 측에 따르면 문 후보 측은 당원들에게 여론조사에 적극 응해달라는 메시지를 다량 발송했다고 한다. ‘오늘 단일화와 관련한 중요한 여론조사가 몇 차례 시행됩니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중요한 여론조사이니 필히 전화 응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단일화 대비, 외출 시 집전화 착신해주세요’ 같은 내용이다. 또 문 후보의 광고를 받아볼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가입자 확보를 위해 당직별로 인원을 총동원하고, 대선자금 펀드 모금에도 의원실마다 할당치를 배정하고 있다고 했다.  

 

안 후보 측은 민주당이 호남지역에서 조직을 동원해 ‘안 후보가 양보할 것’이라는 문자메시지를 퍼뜨리고 ‘민주당 당원과 호남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하라’는 지시까지 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 후보 측 우상호 공보단장은 16일 기자 브리핑에서 “정당조직이 자기 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조직동원정치, 구태정치라고 하는 것은 정당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우 단장은 “문자메시지는 선대위 산하 시민캠프 공인회계사 출신 자원봉사자가 지인들 76명에게 보낸 것이다. 자원봉사자가 지지 후보를 위해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낸 것을 구태정치라 할 수 있느냐”고 덧붙였다.

그러나 안 후보 측 유민영 대변인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낡은 관행을 깨기 위해 안 후보가 나왔다”며 “그런 문제와 관련해 안 후보가 타협하는 게 좋다라고 가르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입을 통해 ‘안철수 양보론’ 등이 유포되고, 비공식 루트를 통해 단일화 협상과정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는 점에 대해서도 안 후보 측은 ‘언론플레이’라며 문제 삼고 있다.

안 후보 측 윤태곤 상황실 부실장은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사실과 다른 것들이 새어나가고, ‘양보론’의 경우 지역 조직에서 유포돼 저희가 펀드를 모집하는 데에도 강력한 항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문 후보 측은 “사적인 대화까지 지적해 실명을 거론하고 문제 삼는 건 과도하다”(우 공보단장)는 입장이다.

안 후보 측은 민주당 백원우 전 의원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안 후보 측 단일화 협상팀인 이태규 미래기획실장의 과거 한나라당 전력을 비난하는 글을 올린 것도 비신사적 행동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양측의 입장 차는 정당정치의 관행화된 문화와 체제를 어느 선까지 인정하고, 얼마나 고쳐나갈 것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에서 비롯된다. 문 후보 측이 일반화된 정치 현실로 생각하는 부분들을 안 후보 측은 본질적 개혁이 필요한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후보 단일화 협상이 마무리된 이후라면 정당조직을 통해 승리하겠다는 것이 문제될 게 없지만, 단일화 이전이고 그 과정이 아름답게 보이려면 서로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민주당이 자꾸 정당정치를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무소속과 후보 단일화를 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며 민주당의 강력한 정치쇄신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민주당이 전혀 정치혁신의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면서도 “안 후보도 ‘양보론’ 등을 문제 삼는데 어차피 현실정치에 들어온 이상 너무 순결주의나 결벽증을 갖고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1 09:50 김삼웅

 

 


2ㆍ12총선 결과는 정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국민은 관제야당이라는 민주한국당(민한당) 대신 김대중ㆍ김영삼이 급조한 신생야당 신민당을 제1야당으로 선택하였다. 두 김씨가 아직 정치규제에서 풀리지 않았으나 신민당의 ‘대부’가 되어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마침내 정국은 5ㆍ17 쿠데타 5년여 만에 5공세력과 새로 결집된 구야권세력이 팽팽하게 대결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동안 민청련을 비롯하여 학생ㆍ청년ㆍ재야ㆍ노동계의 치열한 반독재 투쟁의 결과로 5공의 철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진영은 민청련의 결성을 필두로 1984년 1월 6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같은 해 4월 14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동년 5월 18일 민추협, 동년 6월 29일 민민협을 각각 결성하였다. 이와 함께 재야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포괄하는 민주통일국민협의회(민통협)이 결성되면서 민민협과 민통협의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김근태는 민민협의 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민주세력의 연대를 통해 투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뼈저린 인식때문이었다. 그동안 청년ㆍ노동ㆍ재야 단체들의 개별 활동으로 인해 효율적인 투쟁 성과를 갖지 못한 채 진행된 고립된 폐쇄상태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민청련은 각 민주화ㆍ노동단체를 묶어 협의체 건설에 나서 1984년 6월 29일 상지회관에서 민민협 창립대회를 열었다.

창립대회는 대표위원으로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을 추대하고 서기에 김근태 의장을 선출하였다. 이밖에 감사, 중앙위원회 위원, 상임위원회 위원을 각각 선출, 위촉하였다.

민민협은 각 민주화운동 단체가 그간 합법 영역에서 축적한 역량을 토대로 구축한, 조직운동의 힘이 결집된 형태였다. 이후 민민협은 8월 11일, 종로 1가 서울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10월 1일에는 민민협 소식지 <민중의 소리>를 창간한다. 한편 재야에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상징적 정치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10월 16일 출범하게 되고, 민민협과 국민회의는 1985년 3월 29일 민주ㆍ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통합한다. (주석 1)

80년대 한국사회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청년학생, 노동자, 재야, 여성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와 노동자생존권 보장, 민족자주를 요구하며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 민청련의 투쟁은 괄목할만 했다. 김근태는 항상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 시기 민청련의 주요 활동을 일지로 정리한다.

1984년
4월 7일 - 2차 총회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선언문 채택, 침묵 가두시위
19일 - 4ㆍ19묘지 참배, 경찰의 집단 폭행으로 회원 다수 부상
5월 1일 - <모든 양심수 전원 석방>요구하는 성명서 발표
14일 - 광주 망월동 묘소 참배, 광주 도청 앞에서 가두시위
19일 - 광주항쟁 희생자 추도식, 광주항쟁 자료집 발간
6월 14일 - 노동자 복지협회 등과 택시기사 파업시위 관련 가두홍보
8월 15일 - 민족해방기념식 행사 경찰 방해로 무산되자 가두시위
8월 28일 - 일본 각료 방한 반대 성명 발표
0월 20일 - 제3차 총회(홍사단 강당)
11월 17일 - <민정당사 농성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 기자 회견

1985년
3월 1일 - 국민회의 등 6개 단체와 흥사단에서 3ㆍ1절 기념행사 경찰지지로 성명서 발표 뒤 파고다 공원에서 행사
3월 2일 - 국민회의 등과 <현정권의 야만적인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한다>는 공동성명 발표
3월 21일 - 제4차 총회, 결의문 채택, ‘광주사태 진상규명 위원회’ 발족
4월 2일 - <부당한 철거정책 중단하라>는 전단 살포
11일 - 15개 단체와 공동으로 <옥중에서 신음하는 민주인사 구출하자>는 성명 발표
12일 - <전두환 씨 방미 철회>성명 발표
19일 - 민통련 등과 수유리에서 4ㆍ19혁명기념식 거행
5월 1일 - 전국 32개 민주단체와 기자회견, <5월 광주 민중항쟁 5주년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 발표
5월 3일- ‘광주학살 진상규명위원회’(민청련 소속) 주최, ‘광주민중항쟁 진혼굿’ 개최
10일 - 경찰, 사무실 압수ㆍ수색, 유인물, 책 등 압수, 김근태 등 연행
17일 - <광주사태 책임자 처단 촉구대회>가두 시위 참가
18일 - 기자회견 <5ㆍ18이후 계속되는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라>는 성명 발표.
19일 - 경찰, 사무실 수색ㆍ압수
25일 - 민통련 등과 <서울 미문화원 농성투쟁 지지>성명 발표
29일 - 전학련 등과 종로 2가에서 ‘광주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 개최
30일 - 경찰 폭력 규탄하는 성명발표
6월 7일 - 9개 단체와 서울대에서 국민토론대회 개최
12일 - 민청련 여성부 등 10개 단체, 17개 여학생 대학연합, ‘성도섬유 부당해고 여성 노동자 추진위’ 결정, 간부 3명 연행
22일 - 김근태 의장 중부서로 연행
26일 - 11개 단체와 <현정권의 말기적 노동운동 탄압규탄> 성명
8월 10일 - 5차 총회, 의장 한경남, 부의장 최민화 등 선출
(주석 2)

주석
1>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19쪽.
2> <민주화의 길>, 1~12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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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20 07:33 김삼웅

 

김근태와 민청련이 치열하게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을 즈음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84년 2월 25일 정부는 정치활동 규제자 202명을 추가 해제하고, 이를 계기로 5월 18일 김영삼 상도동계와 김대중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발족하였다.

민청련의 활동이 야권 정치인들을 각성케 하고 민추협 발족에 영향을 주었다. 민추협의 발족으로 5.17사태 이후 쑥대밭이 되었던 야권은 새로운 구심점을 찾고 진영을 갖추게 되었다.

이 해 6월 29일 민청련은 민중운동단체들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을 결성하였다. 청년ㆍ노동자ㆍ농민ㆍ재야ㆍ종교계 등 사회 각 민주세력이 그동안 합법영역에서 축적한 역량을 토대로 연대한 것이다. 민민협 결성을 주도한 김근태는 <민주화의 길> 제4호 <민주화의 깃발을 메고 힘차게 나가자>는 시론을 통해, 결성의 의미와 투쟁방향을 천명했다.

김근태는 “민민협 창립은 민주화운동의 일대 진전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화운동의 실현, 그것은 민민협을 통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민민협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할 것이며, 동시에 민청련운동의 강화를 통해 민민협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는 전제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약)

민주화의 깃발을 메고 힘차게 나가자!

1. 민민협은 무엇을 하려는 운동인가.

청년ㆍ노동자ㆍ농민 및 지식인운동 등 각 부분운동의 역량을 더욱 빠른 속도로 증대시키는 데에 기여하여야 한다. 민중 민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 증가는 물론 올바른 운동방향 정립과 통일성 획득ㆍ투쟁성 제고, 운동규율 강화 등에 일보 전진을 이뤄내야 한다.

민주화 대의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조직운동단체가 대중적 신뢰를 얻는 것은 대단히 귀중하지만, 그 성과가 어떤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어 혹시는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교만함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교만함은 운동에서도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는 분열과 파쟁, 그리고 대의로부터의 타락을 결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민민협 창립의 성과는 무엇인가.

민주화운동의 통일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을 구체적으로 형성한 점이다. 현재 국면에 대한 여러 해석 상의 차이와 부분운동의 내적 특수성이 따른 강조점의 차이, 이에 따른 역량배치에 대한 견해 차이를 각 부분 내에서 극복하고, 진지한 검토와 상호비판을 통해 방향을 수립하면서 양보 속에서 민민협의 창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 집단화되고 있으면서도 각 집단의 특수성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민민협에는 농민ㆍ노동운동 부문과 양심적인 지식인운동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민중운동으로부터 지식인 양심운동세력은 기층대중 생활의 고난과 참을 수 없는 소외의 아픔과 그러면서도 끈질기며 위력적인 민중운동 발전 가능성을 배우고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민민협 운동이 갖고 있는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민민협 내부에서 어떤 의사결정과정의 복잡함과 국민 대중 속에서의 저명함을 부족으로 인해 대표성이 미흡한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를 오히려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하여 조직운동의 발전과 집단적 지도력의 발전계기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민민협은 앞으로 한 발자욱씩 더욱 빠른 속도로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 민청련은 이에 적극 기여하고자 한다.
(주석 18)

김근태는 이 성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화운동 조직ㆍ단체가 “특정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개인 우상화를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는 5공시대 최초로 공개적인 반정부 단체를 이끌면서, 청년민주화운동의 리더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 특정개인의 명망성으로 단체가 귀속되는 것을 한사코 막았고, 그런 전범을 보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가들의 겸손한 처신을 강조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이 실시될 때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이 민청련의 투쟁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김근태 의장에게 종로 출마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김근태는 민청련의 성과를 자기 혼자서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아직 청년운동의 역할이 남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하였다. 그의 언행일체와 겸손함이 묻어나는 ‘비화’다

이즈음, YS는 김근태 의장을 외교구락부에서 만나 종로에서 출마해달라고 권유를 했다.
이때 김근태 의장은 고마운 제의이기는 하나 아직 때가 아니고 나중에 집단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김근태 의장은 대신에 조영래 변호사를 추천했으나 조영래 변호사도 후보제의를 고사했다.

김근태 의장과 YS의 회동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이는 김근태 의장이 당시 지위와 역할을 감안해 본다면 순수성의 훼손과 더불어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그랬던 것이다.
(주석 19)


주석
18> 앞의 책, 제4호, 2~3쪽.
1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29쪽.




민주원로 공정한 단일화 촉구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민주통합당 정대철 상임고문 등 원로들이 16일 국회 정론관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공정한 대선후보 단일화를 촉구하고 있다. 2012. 11. 16 srbaek@yna.co.kr

(서울=연합뉴스) 송수경 기자 = 민주통합당 전직 의원 67명은 16일 민주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 가운데 지지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민주당을 탈당하지 않더라도 개별 자유의사에 따라 안 후보 지지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정대철 이부영 전 의원 등 `정권교체와 민주헌정 확립을 희구하는 전직의원 모임'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문 후보와 안 후보는 범민주진영의 한배를 탔다"며 "단일화 경쟁을 보다 더 민주적 정치과정의 무대로 만들기 위해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장애를 걷어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민주당이 지금까지 당 소속 전ㆍ현직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 그리고 중앙당이나 지역위원회의 당직자들이 안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힐 경우 일종의 해당행위로 간주해왔기 때문에 민주당 당원은 탈당하지 않으면 안 후보를 지지할 수 없었다"며 "이런 내부방침은 철폐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안 후보에 대한 지지표시를 당에 위해로운 것으로 정해 놓고서 입당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며 "민주당 당원들이 상대 후보를 지지하지 못하게 묶어놓은 채 한 무대에서 단일화에 나서라고 하는 것도 불공정 경쟁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민주당은 두 후보에 대한 모든 당원의 자유로운 선택과 지지표명이 아무런 장애없이 보장되고 활성화될 수 있도록 조속히 합당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했다.

성명에는 김덕규 김영진 김재홍 김충조 김태랑 김희철 박광태 박상천 박실 신순범 신중식 유재건 이근식 이우재 이종찬 이창복 이철 장복심 장세환 장재식 조배숙 조성준 조재환 조홍규 최용규 최종원 허운나 전 의원 등 옛 민주계를 주축으로 비문(비문재인)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종걸 최고위원도 기자회견장에 나왔다.

민주원로 공정한 단일화 촉구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민주통합당 정대철 상임고문 등 원로들이 16일 국회 정론관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공정한 대선후보 단일화를 촉구하고 있다. 2012. 11. 16 srbaek@yna.co.kr

hanks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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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9 08:00 김삼웅

 


김근태와 민청련 회원들은 광주항쟁 4주년을 앞두고 5월 14일 버스 두 대로 광주로 내려가 오후 2시 망월동 묘소에 분향하고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김근태는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란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추도식을 마친 일행은 광주 금남로를 따라 스크럼을 짜고 <5월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지켜보고,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에 새로운 충격과 분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청련은 5월 19일 오후 서울 흥사단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라는 주제로 광주민주화운동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진혼굿과 더불어 광주항쟁의 사진ㆍ판화전을 열었다. 또 광주시민 학살 사진과 함께 수기와 일지 등을 담은 자료집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제작 배포하였다. 광주학살 사진 전시와 자료집 발간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추모식이 끝난 뒤 30여 명의 참석자가 경찰의 폭력으로 부상당하였다.

광주 망월동 묘소에서 발표한 김근태의 추모사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영령들이시여.
금남로에도, 무등산에도, 여기 당신들께옵서 몸과 혼을 눕힌 망월산 언덕에도, 봄은 다시 찾아와 푸르른 들빛 빛나고 있건만, 술과 흥분제로 마비된, 저 잔학무도한 군사팟쇼의 하수인들의 미친 총칼에 찢기고 잘리운 상처 아물릴 길 없어 이 푸르른 봄에도 상처마다에서 피를 뚝뚝흘리며 살점을 뜯기우며, 목을 비틀리우며, 우리의 이 아픔, 이 원한, 이 신음을 풀어달라 끝없이 뒤채이며, 누워계신 영령들이시여.

이 땅의 민중들이 민주주의의 햇살 아래 통일된 반도의 남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생기찬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민중들이 폭력도 착취도 외압도 없는 해방과 평화의 땅에서 서로 어울려 즐거이 일하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혼백이나마 고이 잠들게 하여 달라, 즐거이 누워있게 하여달라고, 오늘도 그날의 그 피묻은 하소연을 금남로여, 광화문이여, 우금치며, 공장이며, 학교며, 농촌이며, 바닷가며, 산골이며, 이 강산 골골을 원혼으로 떠돌며 부르짖고 계신 영령들이시여, 투사들이시여, 전사들이시여.

영령들이시여, 5월의 투사들이시여, 민족의 전사들이시여, 저희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저 창칼 앞에 굴복하여 복된 삶을 영위하기 보다는 당신님들이 보여주셨듯이 결단코 저 창칼에 맞부딪혀 싸우다가 쓰러지는 영광의 삶을 택할 것입니다. 창칼의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교활하면 교활할수록, 폭력적이면 폭력적일수록, 저희들의 싸움 또한 가열되어 갈 것입니다.

천지신명이시여, 하늘과 땅의 모든 바른 영령들이시여, 부디 여기 망월산 언덕의 5월의 피묻은 원혼들께서 고히 눈감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5월의 영령들이시여, 천지신명들이시여, 저희들이 행여 눈이 어두워져 제 앞에 바르게 가리지 못할 때면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주시옵고, 저희들이 행여 폭력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면 이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의 비결이 되어주시옵고, 행여 저희들이 사사로운 욕망과 다툼이 민주장정의 앞길을 가로막을 때면 이를 과감이 척결하고 나아갈 수 있는 통합력의 샘물이 되어주시옵고, 언제나 저희들이 작은 허물과 비겁을 나무라시기 전에 저 잔학무도하고 교활한 폭력과 폭력자들과 폭력구조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 저 미친 하수인들까지도 평생 죄책감을 느끼게는 하시되, 그들의 인간됨만은 너그러이 감싸안아 주시옵고, 이들과 저희들이 그 함정에서 분연히 벗어나도록 도와주시옵고, 대신 폭력의 원흉들이 그들 자신이 만든 폭력의 함정에 영겁토로 갇혀 신음하도록 함으로써 이 땅 이 세상에 폭력을 생산하고 조성하는 구조가 영원히 절멸되도록 도와주시옵길 비옵니다.

영령들이시여, 민족의 전사들이시여.
당신들은 편히 누우신 그대로 저희들과 민족의 앞길을 밝히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힘과 빛으로 되어 계시오니, 원컨대 이제는 떠도는 원혼을 거두시고, 피흘림을 멈추시고 편히 쉬옵소서. 평안하소서. 안락하옵소서. 영령들이시여.

살아있는 저희들은 살아있는 동안 언제까지나 부끄럽고 죄스러울 것이옵니다만, 저희들의 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조금씩 씻어가는 모습을 부디 믿고 지켜봐 주시옵고, 지금도 이토록 작고 초라한 터에서 여러모로 불편하시고, 폭력의 난무가 귓전을 어지럽혀 고정하시기 힘든 형편이겠지만 이같은 저희들의, 이 민중의, 이 민족의 작은 노력들이 뭉쳐나가는 그 끝에 당신님들께서 영원히 평안스럽게 잠드실 수 있는 세상이 기필코 올 것임을 믿으시고 불편하시더라도 평안히 잠드시옵소서. 부디 안락하소서.
(주석 17)


김근태의 망월동 추모사는 민청련 의장의 입장에서이기도 하지만 개인 김근태의 5월 광주항쟁과 이들에 대한 학살, 그리고 전두환 세력의 폭력구조, 어떠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기신념의 확신을 밝힌 글이다.

“저희들이 행여 눈이 어두워져 제 앞을 가리지 못할 때면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주시옵고, 저희들이 행여 폭력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면 이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비결”이 되어 달라고 광주의 영령들에게 빌고 다짐하였다. 김근태는 2011년 말 사망할 때까지, 이 다짐을 잊지 않았고, 남영동의 혹독한 폭력(고문)에도 굳건하게 버티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망월동의 다짐’ 때문이었다.

주석
17> 앞의 책, 제3호, 2~3쪽, 1984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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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8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민청련 의장을 맡으면서 점차 정치 투사가 되어갔다.
온순했던 성격도 적극적 야성으로 변해지고, 안기부 수사국장의 술상을 뒤엎을만큼 담대해졌다. 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해지고 대정부 투쟁방법도 여러 방향으로 확대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기관지 발행이었다.

당시 제도언론은 이미 언론의 정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대거 군사정권에 쫓겨난 언론계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면서 정관계 진출과 치부에 눈이 먼 신문ㆍ방송인들이 많았다.

민청련은 반독재투쟁의 홍보전략으로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정론부재의 언론상황에서 대안언론의 기능을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84년 3월 11일 “관제언론이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이 어두움을 뚫고 민주화운동의 앞길을 열어가는 횃불로서 대중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을 선언하며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했다.

<민주화의 길>은 반독재 투쟁의 전위 역할을 하게 되고, 이후 각급 단체의 기관지발행의 효시가 되었다. 김근태는 창간사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며>에서 민청련 기관지의 ‘다섯 가지 임무’를 제시했다.

첫째,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민주화운동은 올바른 운동론하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올바른 운동론은 치열한 논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민주화의 길>은 민주화 열망을 수렴하는 광장이 될 것입니다.

둘째, 정확한 정세분석입니다. 기본적인 정보의 결핍과 와전 때문에 우리 주변은 주먹구구식의 판단이 만연하여 있습니다. 사실의 집적만으로 과학적 판단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 사실의 확인이야말로 올바른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입니다.

셋째, 우리 내부의 동질성 확보입니다. 우리 내부의 분열이나 갈등은 불필요한 오해나 편견 때문에 일어납니다. 정보와 의견이 보다 신속ㆍ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면 우리 내부에 인식의 동질성은 확보될 것이고, 더 나아가 실천의 방향을 일치시키기도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넷째,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 관제언론에 의해 가리워졌지만 특히 민주화운동에 의미 있는 사건을 힘닿는 대로 알릴 것입니다.

다섯째, 다른 운동권과의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운동권의 소식은 물론, 지면을 할애하여 제언을 실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주석 15)

그동안 제도 관제언론에 식상해 온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길>은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수가 되었다. 제도언론(인)에도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이를 접하는 국민이 소수에 불과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많이 알려졌다.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신선한 대안언론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지면의 기사와 정세분석은 상황인식과 민주화운동의 지침 역할을 하였다. 창간호에는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 <자유-생존-평화>와 신경림 시인의 격려시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가 권두를 장식하고, <한반도 주변정세와 한국의 정치ㆍ경제>의 분석, 학원ㆍ노동ㆍ농촌ㆍ재야ㆍ종교계의 소식을 실었다. 하나같이 제도언론에서는 보기 드문 뉴스와 분석이었다. 또 ‘두꺼비’란에 <통일문제 사건을 보면서>라는 시론, 민청련의 활동 경과보고, 시사만평, 민청련의 규약 등을 소개하였다. 기관지는 4~6배판의 20쪽에 불과했지만 내용은 알찼다. 발행인 김근태, 편집인 박계동 체제의 기관지였다.

제2호는 4.19특집호로 제작하여 1984년 4월 25일자로 발행하였다. 2호의 권두논설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 기만적 화해정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천>은 내부에서 많은 토론을 거쳐 작성한 민청련의 상황인식과 실천방향을 제시한 글이다. 이 시기 김근태의 시국인식을 살피게 한다. 이 논설은 오랫동안 청년학생운동의 담론이 되고 더러는 ‘지침’이 되었다.

하나의 칼이라 함은 국민대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다. 즉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대중의 삶 속에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중에 대한 선전을 강화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부정부패의 폭로와 국민대중을 무시하는 제 분야 정책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현 정권의 폭력성과 매판성 및 부도덕성을 철저히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방패는 각 부문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쓰라린 시련에 무릎꿇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관념론이나 준비론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투쟁을 통해서 고난을 감수하면서 추진될 때에만 비로소 실질적 성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고립되어 있는 단위 조직의 개별적 강화가 아니라 운동의 통일성을 기하는 시각에서 조직력의 발전과 통합을 이룩해나가야 한다.

또 다른 방패는 기층 대중과의 구체적인 연대다. 지식인들이 관념적 대중운동 토론에 머무르는 것을 반대하고 기층 민중과의 정서적 동질성을 형성하여 우리는 지식인 노동ㆍ농민운동 참여가 갖는 정당성과 합법성을 쟁취해야 한다.
(주석 16)

제2호는 ‘해직언론인’ 명의로 <권언복합체의 매카시즘>이란 시론, 김정환 시인의 <그날>, 김승균 지도위원의 <4.19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무기명으로 <4월 혁명의 현재적 의미>, 김병걸 지도위원의 <70년대의 몹쓸 유산>, 정세분석으로 <최근의 정치ㆍ경제ㆍ사회상황>, 민청련에서 의욕적으로 신설한 <여성부 발족에 부쳐>, 운동의 노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등이 실렸다.

회원들은 기관지가 나오면 시내 중심가에 나가 배포하였다.
격려해주는 시민들도 많았으나 외면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1984년 3월 14일 오후 7시경 김근태는 종로 2가 4거리에서 배포하다가 종로경찰서 정보계장이 진두지휘하는 사복경찰에 의해 옷이 찢기고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영장도 없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근태는 불법적인 물리적 강제 동행을 거부하다가 경찰관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하고, 3월 16일 즉결재판소로 넘겨져 구류 3일을 선고받았으나, 당일 석방되었다. 민청련은 김 의장의 강제 연행에 항의ㆍ폭력경찰을 고발하는 성명을 내고, ‘내무ㆍ법무장관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폭거에 항의하였다.

민청련은 5개 청년단체들과 연합하여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보고서>의 발표에 이어, 8개 청년단체와 공동으로 <더 이상 이 땅에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는 제하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전두환 정권에서 자행된 인명살상과 인권유린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주석
15> <민주화의 길>, 창간호, 3쪽.
16> 앞의 책, 제2호,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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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7 08:00 김삼웅

 

 

5공체제에서 종교단체를 제외한 최초의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청련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입주한 다음날부터 사무실은 안기부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퇴거를 요구해왔다. 건물주는 집행부가 퇴근하고 나면 집기를 아스팔트바닥에 끌어내고, 다음날 집행부는 다시 들고 올라가는 일이 여러날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종로경찰서에서 현판을 떼어가고 사무실 입구를 봉쇄하면서 회원들과 충돌하였다. 경찰은 출입하려는 회원들을 폭력으로 막고 회원들은 경찰의 불법적인 처사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해찬 상임위 부위원장이 두 차례나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달 여의 공방 끝에 경찰이 철수하면서 민청련은 사무실을 확보하고 정상적인 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사무실이 경찰에 노출되면서 상임위원회의 사무실을 별도로 마련하였다.초기에는 이해찬이 운영하는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하다가, 서강대학교 앞 철길 건너에다가 임시사무실을 얻었다. 이 사무실도 나중에 수사기관원들이 집행부 간부들을 미행하여 알아낸 다음 심야에 침입하여 서류를 뒤지고 훔쳐가는 일이 벌어졌다.

김근태는 수사기관의 끊임없는 도청과 미행에 시달리면서도 민청련을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중의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당시 민청련에서 활동했던 박선숙(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

김근태 의장과 지도부는 공개하되, 의사결정구조는 비공개였어요, 비공개 의사결정구조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하되, 정치적 탄압은 공개된 지도자가 감당하도록 만든 조직이지요. 한번은 민청련 지도부 선임을 놓고 77학번, 78학번 막내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김근태 의장이 토론을 주재하여 무려 17시간 동안 회의한 일이 있어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의 힘을 보여준, 착하고 맑고 민주적인 사람이었죠. 민청련 선배들은 말할 자유도 주고, 말하지 않을 권리도 줬어요.
(주석 12)

민청련은 공개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운동을 전개하였다. 1983년 11월 5일 사무실에서 외부인사 초청 다과회를 갖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을 반대하는 등 민주화를 향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대한 제언과 민주청년의 자세“를 발표하려 했으나 기관원들의 저지로 인근 음식점으로 옮겨 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김근태가 초안을 잡고 집행부의 토론을 거쳐 마련되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우리에게는 자신이 있습니다. 민주화는 세계사의 대세에 합치되며 현상적으로는 끊임없이 패배하지만 밑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쌓여가는 민주 민중역량 발전의 확인을 통해서 또한 우리에게 있는 도덕적인 정당성으로 자신이 있습니다.

1. 미소는 신냉전체제를 구조화시키면서 인류의 목숨을 담보로 전율할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2. 미소의 신냉전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켜 민족의 전멸을 가져 올 전쟁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3. 현군사독재정권은 과연 민주화, 평화적 전권교체를 할 의사가 있는가?
4. 한국의 국민경제는 대외종속적 특권적 불평등 구조를 갖고 있다.
5. 한국의 문화는 독재권력에 의해 문화제국주의에의 굴복과 노예화의 방향으로 조장되고 있다.
6.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은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
7. 민주화운동의 실천방안과 ‘우리의 제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를 위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주석 13)

민청련은 11월 11일 한국기독학생총회연맹, 한국기독청년협의회와 공동명의로 <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명동성당에서 황정하의 추도식을 올렸다. 11월 16일 서울대학교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황정하 학생이 돌연히 사망한데 대한 성명서이고 추도식이었다. 민청련은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이것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유인물을 판매하는 첫 시도였다.

민청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안기부의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안기부는 집행부 간부들을 차례로 만나 협박하고 탈퇴를 종용하였다. 이들이 노리는 핵심은 김근태였다.

안기부에서 가장 만나려고 시도한 사람은 아무래도 김근태 의장이었다.
안기부에서 담당을 한 이는 성용욱 수사1국장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계속 만나주지 않다가 줄기찬 안기부의 협박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심리적인 부담을 감수하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11월 28일 저녁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간 김근태 의장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언쟁이 붙어 김근태 의장이 상을 엎으며 싸움이 붙었는데, 나중에 안기부 최 수사단장이 병원에 찾아와서 대신 사과하고 치료비를 물어줬다.
(주석 14)


주석
12> 김선숙, <한겨레>, 2012년 6월 9일치, <김두식의 고백>.
13> <민주화의 길>, 제1호, 17쪽.
14>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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