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겨울 궁전(Winter Palace), 바실리예프스키 섬

 

네바 강에서 본 에르미타시 박물관

에르미타시 박물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① 거울궁전 - ② 소(Small) 에르미타시 - ③ 구(Old) 에르미타시 - ④ 에르미타시 극장
신(New) 에르미타주시 구(Old)에르미타시의 뒷편에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소(Small) 에르미타시만 박물관으로 쓰였으나, 차츰 컬렉션이 많아지면서 확장되어 
지금은 구(Old)에르미타시와 신(New) 에르미타시 뿐만 아니라 겨울궁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까지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고 있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국립 에르미타시 미술관(State Hermitage Museum)이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손꼽힌다.
미술관은 소(Small) 에르미타시, 구(Old)에르미타시, 신(New) 에르미타시, 
에르미타시 극장, 겨울 궁전의 5개 건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고, 120개의 계단이 있다. 
현재 본관의 일부인 겨울궁전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궁이다.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궁전 광장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을 수집한 것이 에르미타시의 기원이다. 
본래는 예카테리나 2세 전용의 미술관으로, 프랑스어로는 "은둔지"를 의미하는 
"에르미타시(Hermitage)"라고 하는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이름이 주어진 배경에는 에르미타시 초기에 굉장히 한정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기에 왕과 귀족들 간 '은둔자의 집' 이라 불렸던 이력이 있어서 이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수집품을 모았으나, 19세기 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시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지만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Jason이 오늘날의 겨울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은둔지, 인적 없는 방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르미타시(Hermitage)"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에르미타시 명칭의 유래이다.

 

상공에서 본 에르미타주 박물관

① 겨울궁전 ② 소(Small) 에르미타시 - ③ 구(Old) 에르미타시 ④ 신(New) 에르미타시  
에르미타시 별관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 

 

에르미타시 박물관 입구

①번 연한 하늘색이 에르미타시 본관인 겨울궁전 입구
②번은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동관 입구이다.
③번은 에르미타시 극장 입구
④번 위-아래 건물이 소에르미타시 입구, 
⑤번 건물이 구(Old) 에르미타시 ⑥번 건물이 신(New) 에르미타시인데 ⑤ ⑥번 신-구 에르미타시를 합쳐 
대에르미타시라고 한다. 위에 조금 진한 색이 구에르미타시, 조금 연한 색이 신에르미타시이다. 
⑤ ⑥번의 입구는 따로 없고 ①번 ④번과 연결된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소(小)에르미타시’와 ‘구(舊)에르미타시’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그리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시 극장을 만든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新)에르미타시이다.

 

궁전 광장에서 본 에르미타시 본관 겨울궁전 입구

에르미타시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관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시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월 폴 총리(1779), 보뎅(1781),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시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동관

궁전광장은 러시아 바로크 예술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 

반대편으로는 카를로 로시(Carlo Rossi)에 의해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개선아치를 갖춘 구 참모본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는 183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47.5m 높이의 알렉산더 원기둥이 서 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 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며, 
볼셰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행진을 위해 사용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군주제 옹호자, 반시오니스트 등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 문화 공연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인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은 
러시아 제국에서 일한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로시 (Carlo di Giovanni Rossi 1775~1849)에 의해 
설계되고 182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지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개별 건물을 개선문인 기념비로 통합하려는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장엄한 아치는 러시아의 영광과 군사적 승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겨울 궁전의 중앙 부분과 대칭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다.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는 등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제정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도 지하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

 

에르미타시 별관 매표소

에르미타시 별관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표를 쉽게 살 수 있는데 이 표를 가지고 본관에 
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에르미타시 입장권은 별관에서 사는게 좋다.

 

참모본부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에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간다.

에르미타시 박물관(Hermitage)은 1993년 참모본부 동쪽 건물에  
19세기 및 20세기 예술 작품을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에 맞게 건물을 개조하는 작업은 2014년에 완료되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박물관의 2층에는 상설 전시물인 아르누보 시대 예술품과 황제에게 제공된 
희귀한 선물 컬렉션, 한때 러시아 제국 재무부 건물에 있던 예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입구에 들어서서 2층으로 

3층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장식 예술과 의상들, 
19세기 프랑스 회화와 조각, 19세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 미술 및 18세기 러시아 근위대 박물관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참모 건물에 거주하던 러시아 제국 외교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다. 

 

2층 출입구에 들어서면 예술품을 전시 관리하는 시설물 모형이 나온다. 

참모관 4층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그 기원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 적군에게 점령한 영토에서 압수되었으며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은 1995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칸딘스키(Vasiliy Kandinskiy)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을 포함하여  
혁명 이전 러시아 미술 컬렉션도 있다.

 

처음에는 로마노프 왕조가 수집한 예술품들을 겨울 궁전의 별관에 숨겨놓고 전시하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어느새 본관 전체로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넘쳐 흐른 나머지 2013년부터는 궁전 광장 건너편의
구 참모본부 건물을 별관으로 편입하여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 별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모형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안뜰 중 한 곳

 

여러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 Review of General Staff Museum

 

 

 

대궁전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대궁전 동쪽 입구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공원으로 향한다.

 

아랫공원(Lower Park) 출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바라보이는 공원 풍경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공원(Lower Park)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박물관
⑪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말리궁전,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

 

페테르고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이곳은 표트르 대제가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승리하여 
핀란드만을 통해 발틱해로 나갈 수 있는 대전과를 올린것을 기념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의 구도로 1714년 공사를 시작하여 1723년 8월 15일 대궁전, 
대폭포, 몬플레지르 궁전 등을 완성하고 이미 이때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기초가 다져졌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대북방 전쟁 (Great Northern War, 서기 1700 - 1721년)에서 
러시아와 스웨덴은 발트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싸웠다. 
1709년에 폴토바(Poltova)에서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 군대를 무찔렀고, 
스웨덴의 칼 12세는(Charles XII) 오토만 제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어서 표트르의 해군은 1714년에 항코(Hanko)에서 스웨덴과의 해전에 이겼다. 


이렇게 발틱해에 거점을 잡고 나서, 표트르 대제는 건축가와 기사들을 모아서, 
해안가에 몽프라시르(Monplasir)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여기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오가는 길에 쓰려고 지은 여름 궁전이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1717년에 베르사이 궁전을 (Chateau de Versailles) 방문한 뒤에, 
표트르 대제는 이에 못지 않은 궁전을 계획하였고, 1721년에 완공하였다. 
물론 나중에 여러 가지가 더 첨가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짓고서 러시아는 발틱해에 항구를 가지게 되었고, 
표트르 대제는 이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페테르고프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태리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가 궁전을 설계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각 분수들의 물 공급을 위하여 1720~1721년 러시아의 수리학 기술자
바실리 뚜볼코프가 네덜란드와 프랑스로부터 배운 기술로 그의 지휘 아래 
자연 저수지에서 윗정원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이곳에서 16m 경사진 아랫공원을 파이프와 관을 통해 분수의 물을 공급하고, 
1721년 여름 아랫공원의 작은 운하와 갑문을 건설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곳에 물을 공급하고, 분수를 작동하기 위하여 
수압에 의한 설비와 펌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벌써 18세기 초에 발달된 러시아의 수리 기술을 이곳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독일군은 페테르고프 궁을 본부로 삼았고 떠날 때 
보복으로 대궁전 등을 불태우는 등 모두 파괴하였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Perseus)

페르세우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다양한 괴물을 처치하는데 

메두사를 살해하고, 바다 괴물이자 바다의 여신인 케토 또는 수염고래를 죽이고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1947년에 주로 자원자들이 동원되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국민이 아끼는 황제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페트로고프(Peterhof)로 지었으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이 궁전을 대체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2차 대전 이후에 페트로보렛츠(페테르 궁전)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 때는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 3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처음에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페트로고프(Peterhof)로 지었으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이 궁전을 대체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2차 대전 이후에 페트로보렛츠(페테르 궁전)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 때는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 3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여름궁전 본관 건물과 주변의 크고 작은 20여 개의 별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유산이지만 정작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여름궁전을 중심으로 조성된 2개의 공원에 조성된 144개의 분수대들이다. 
분수대 건립 당시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분수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대궁전과 핀란드 만 사이에는 대폭포와 해양 운하가 놓여 있다. 
표토르 대제가 처음 만든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제각각 하부 공원에 덧붙인 폭포와 분수는 물을 사용하여 즐길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분수대 전후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삼손 분수대 외에 우산분수나 아담분수, 이브분수, 피라미드 분수 등이 유명하다. 
이 황금분수대에는 여름궁전 내 분수 144개 중 절반이 조금 안 되는 64개의 분수가 집중되어 있다.

 

여름 궁전 뒷편에 위치한 분수공원의 황금 분수대는 7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인공폭포와 어우러져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러시아 관광지를 소개하는 자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황금분수대가 바로 이곳이다.

 

분수의 백미인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

분수공원의 핵심이 되는 연못에는 삼손이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황금색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사자의 입에서는 20m 높이의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보통의 분수는 펌프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윗공원으로부터 배수관으로 이어지는 물의 
자연적 흐름을 통해 분수가 작동하게 만든 당시의 기술은 놀라운 일이다.

크고 작은 분수에서 나온 물은 반원의 호수에 모여서 수로를 따라 핀란드 만으로 흘러나간다.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전사 삼손이
사자와 싸우는 동상의 분수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메인 분수다.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승전 25주년 때 만들었다.


스웨덴 왕의 문장에 사자가 있어 삼손과 사자는 각각 러시아와 스웨덴을 상징하고 있다. 
삼손상은 러시아의 조각가 미카일 코즐로브스크(Mikhail Kozlovsky)가 

제작했으며 높이 3.3m  무게 5톤, 금박이 입힌 사자입에서 물이 20m나 뿜어져 나온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1945년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인 복원 공사는 상당히 특별하다. 
1709년 이미 이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아본 표토르 대제는 
1715년부터 1724년에 걸쳐 이곳에 장-바티스트 알렉상드르 르 블롱과 
니콜로 미케티가 설계한 2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의 일부는 현재의 대궁전의 심장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대궁전은 3층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긴 날개가 더해진 모습이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페테르고프의 가장 큰 기술적 성과는 모든 분수가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은 천연 온천에서 공급되며 윗정원의 저수지에 모인다. 
고도 차이는 그랜드 캐스케이드를 포함하여 아랫공원 대부분의 분수를 움직이는 압력을 생성한다. 
삼손 분수는 길이가 4km (2.5 마일)가 넘는 특수 수로로 공급되며 고지대에서 물과 압력을 끌어온다.

 

  핀란드 만으로 향하는 수로

 

수로 끝에 보이는 바다는 발트해와 연결된 핀란드 만으로 예전에는 여름궁전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황금분수대와 인공폭포의 수로는 수로를 통해 핀란드 만과도 연결되어 있다. 
핀란드 만에서 궁전 뒷편 분수대까지 수로를 따라 작은 배가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는 러시아 황제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1945년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인 복원 공사는 상당히 특별하다. 
1709년 이미 이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아본 표토르 대제는 
1715년부터 1724년에 걸쳐 이곳에 장-바티스트 알렉상드르 르 블롱과 
니콜로 미케티가 설계한 2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의 일부는 현재의 대궁전의 심장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대궁전은 3층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긴 날개가 더해진 모습이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페테르고프(Peterhof)는 넓고 다양하다. 
20개가 넘는 궁전과 파빌리온이 핀란드 만을 따라 뻗은 드넓은 정원에 흩어져 있다. 
왕궁은 이전에는 귀족들의 궁전과 교외 별장의 언저리와 담을 맞대고 있었지만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고, 그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공식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바로크 풍의 파빌리온은 
르 블롱 등의 작품으로 1714년부터 1726년에 걸쳐 지어졌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은 동쪽에 위치한 스트렐나의 콘스탄틴 궁전
(1797~1807년, 안드레이 보로니킨 작)과 별장 궁전(1826~1829년, 아담 메넬라프 작), 
서쪽에 있는 로모노소프의 중국 궁전(1762~1768년, 안토니오 리날디 작)이다.

 

체스 산 분수(Dragons’ Cascade or Chess Mountain Fountain)


동쪽에 있는 체스 산 분수는 서양 장기판을 뜻하는 체스 바탕에 입구에는 날개가 달린 
세 마리 용이 이를 드러내면서 물을 뿜고 있기 때문에 용 분수라고도 한다. 
물은 흰색 검정색의 체스 판 무늬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 
폭포 양편에는 이태리에서 만든 대리석상을 세워 놓았다.

 

체스 산 분수 상단에 있는 작은 드래곤들 입에서 물이 나온다.

 

골든 산 분수(Golden Mountain Cascade)

서쪽에 있는 골든 산 분수는 22개의 대리석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양 받침대에는 그리스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중앙 상부에는 손에 삼지창을 든 로마 바다의 신이 있고 왼쪽에는 그리스의 반은 인간 
반은 바다고기인 해신이 자신의 상징물인 소라고둥을 불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주(酒)신 바커스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있고 계단 아래 연못에는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첫 번째 계단 좌측에는 안드로메다 공주상이 있는데 엄마를 잘못 둔 죄로 제물로 바쳐질 뻔 했다가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구출되어 결국엔 페르세우스와 결혼하게되는 에티오피아의 공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보기드문 해피엔딩 인물이다.

 

로마 분수(Roma Fountain) 2개

체스 산 분수 아래에는 두 개의 로마분수가 있는데 처음에 이 분수는 
나무로 만들었다가 18세기 말에 대리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분수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 있는 두 단으로 된 분수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 분수(Roma Fountain)

 

이탈리얀스키(Ital'yanskiy) 분수

 

이탈리얀스키(Ital'yanskiy) 분수

 

고래 분수(Whale Fountain)

 

다네이드 분수 (Danaid fountain)

 

태양분수(Sun Fountain)

기둥 위에 달려 있는 둥근 형태의 원반에서 물이 분출되면서 
수직형의 원반이 회전하는데 이 모양이 태양을 나타난다고 한다. 
1721-1729에 미케치(Michetti)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독일 나치에 파손된 것을 1957년에 원래대로 복구했다고 한다.

 

태양분수(Sun Fountain)

 

버섯 분수(Mushroom Fountain)

비 오늘날 우산 가장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버섯의 깔때기 가장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이 물방울을 맞으면서 버섯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피라미드 분수(pyramid Fountain)

분수 밑받침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세단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은 오벨리스크처럼 보이고 있다. 
500개의 구멍에서 일곱 개의 계단으로 물이 뿜어 나오고 있다.

 

이브 분수 (Eva fountain)

 

이브 분수 (Eva fountain)

 

아담(Adam) 분수

분수를 장식한 조각품은 베니스 총독의 궁전을 장식했던 
안토니오 리치(Antonio Rizzi)의 유명한 작품을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가 침입 했을 때 나치들이 정원에 묻었는데 분수를 다시 발견하여 
1948년에 원래 형태로 복원 되었다고 한다.

 

아담(Adam) 분수

 

매니저 분수 (Menager fountains)

 

트리톤 벨 분수 (fountains Tritons-bells)

 

트리톤(Triton) 분수

바다 괴물의 턱과 씨름하는 트리톤을 묘사한 Oranzhereiny 분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며 반은 인간 반은 물고기인 
트리톤(Triton)이 바다 괴물의 입을 찢는 모습.
트리톤과 악어, 거북이 등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바다 괴물의 입을 찢는 트리톤(Triton) 분수

 

파르테논 분수

 

파르테논 분수 정면

 

보울 분수(Bowl fountains)를 배경으로 인증샷

 

보울 분수(Bowl fountains)를 배경으로 인증샷

 

요술 분수

요술 분수는 사람이 없으면 물이 나오지 않고 벤치에 앉거나 사람이 벤치 앞을 지나가면 
물이 위로 솟아 오올라 분수 벼락을 맞도록 되어 있다.

 

앗 ~ 깜짝이야 ~~ ! ! 요술 분수

 

나무와 꽃 분수

요술 분수 앞에 꽃과 나무 가지에 분수를 설치했는데 장미와 튤립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도록 만들어져 마치 사람들을 요술 분수 앞으로 유인하는 듯하다.

 

크래커 분수 "벤치" (Cracker fountains "Benches")

 

곡물의 단 분수(The Sheaf Fountain)

이 분수는 몽플레지르 궁전 앞에 있는 분수로 두 개의 포물선을 그리며 
물을 뿜고 있는 형태여서 곡물 단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723년에 설치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파손된 것을 1952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뒤에 붉은색 지붕 건물은 표트르 대제가 가장 많이 이용했다는 
몽플레지르 궁전(Monplaisir Palace)이며 궁전 앞은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과 정원 공중에서 보기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은 핀란드 만을 바라보는 아랫정원 동쪽에 세워져 있다. 
커다랗고 경사진 지붕이 특징인 1층 건물의 가운데는 유리로 커버된 회랑 두 개가 접해 있어서 
회랑을 따라 거닐면서 바다와 공원을 한꺼번에 감상 할 수 있다고 한다.  
몽플레지르궁은 현재는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많이 애용하고 이용했던 여름 별궁으로 여름궁전 내 소궁전이다.
몽플레지르궁은 현재는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1714년에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몽플레지르 궁 
(Monplaisir Palace, 프랑스어로 "my delight") 건축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이 궁은 표트르 대제가 
크론스타트(Kronstadt)의 항구를 통해 유럽을 오가는 도중에 사용할 여름 휴양지였다. 
이 해안 궁전의 ​​벽에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에서 가져온 수백 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Monplaisir palace) 내부

1714~25년에 장 바티스트 레블론 등이 지은 이 건물에는 
표트르 대제가 수집한 서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다.

 

옻칠의 방 (Lacquer Study)

 

접견실 (Green Reception Room)

 

알랙산더 침실

 

황제전용 목욕실 (Bath Building)

 

알현실 (Audience hall)

 

다이븐 룸 (The Divan Room) - 두꺼운 받침대와 매트리스로 된 침대가 있는 방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내부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내부

 

공중에서 본 말리 궁전 (Marly Palace) 전경.
말리궁전은 정원에 둘러쌓인 조용한 곳으로 1725년 표토르 대제가 은퇴 후 머무른 곳이다.

 

말리궁전 배치도 (Axonometrc projection of the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에이비에리(Aviaries) 파빌리온
새장이란 뜻의 에이비에리(Aviaries)는 나무로 만든 파빌리온이다. 

 

표트르 대제 별궁을 보고 가로수 길을 따라 나오면 중앙에 표트르 대제 동상이 서 있다.

 

아랫공원에서 본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보울 분수(Bowl fountains) 앞에서 인증샷

마지막으로 보울 분수(Bowl fountains) 앞에서 인증샷

 

출구를 향해 올라가는데 일행 분이 뒤에서 찰칵!

 

[영상] 페테르고프 (Peterhof) 궁전 아랫공원 (Lower Park)

 

 

 

 

상공에서 본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 윗정원과 핀란드 만 조감도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정원은 도심에서 30km 떨어진 페테르고프에 위치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 버스 또는 수중익선을 타면 궁전에 도달할 수 있다. 
분수, 소규모 폭포, 정원으로 유명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아랫공원 상공에서 본 조감도

1705년, 표트르 대제의 지시로 여름 휴양을 위한 궁전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1710년부터 정원(공원)을 가꿨고, 1714~25년에는 건축가 요한 브라운슈타인 등이 
윗정원과 같은 높이에 바로크 건축 양식을 띤 네덜란드풍의 2층 건물로 황제의 여름 관저를 건립했다. 

이때부터 페테르고프 궁전은 대궁전과 공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여름궁전이 되었다. 
그러나 1745~55년에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대궁전을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러시아의 베르사유",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 라고 불리는 페테르고프는 
황제의 가족들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이 여름을 보내던 곳이다.

궁전 주변에 위치한 소규모 폭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에 

의해 건립된 마를리궁을 본떠서 건립되었다. 
소규모 폭포 안에는 삼손 조각상과 64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궁전 하단부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정원 양식을 본뜬 정원이 들어서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의 일부를 형성한다.

페테르고프 궁전과 정원 경내에는 다양한 궁전 및 분수가 있고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러시아의 베르사유'로 알려진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사치품이 존재하고 있다. 
경내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과거 러시아 군주의 생활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바로크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궁전의 웅장한 노란색과 
흰색 파사드는 내부 장식에 의해 실제로 가려진 느낌이 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독일 군대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지만 나중에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대학살 이후 완벽하게 재현된 대궁전 경내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벽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거대한 그림들이 붙어 있고 금박이 벗겨진 침실은 찾아볼 수 없다. 
왕족들은 활기가 넘치는 공식 알현실과 거실에 앉아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가구와 벽화에 에워싸여 편안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페테르고프의 분수대는 그 자체가 관광명소다. 
5월에 오픈 행사가 시작되고 음악 공연과 불꽃놀이 등 하루 종일 축제가 열린다.
녹음이 우거진 윗정원의 격자 울타리를 따라 거닐어 보거나 
아랫정원에 흩어져 있는 완벽한 하얀색 조각상들을 둘러볼만 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여름궁전이라고도 불리는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대궁전을 사이에 두고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정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Peterhof, State Museum-Reserve
⑪ Fountain-cracker Dubok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윗정원은 넵툰분수, 멍청이분수,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마를리박물관,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이 있다.

 

페테르고프 궁전 앞문(Paradnyye Vorota, Front Gate)

지금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쓰이는 겨울궁전에 대비해 

러시아 제국 황제가 여름에 지내던 궁전으로, 
궁전에서 바로 핀란드 만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분수의 궁전',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분수가 가득한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윗정원(Upper Garden)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국립 에르미타지 박물관 말고 
또 하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궁전들이 근교도시에 자리들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름궁전이다. 
이 대궁전은 길이 300m, 3층으로 지어진 작은 궁전이지만 
이곳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경계라할 수 있는 윗정원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 현관 부분은 육지쪽 윗정원 방향으로 되어 있고, 

후문 현관은 뱃길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아랫공원 핀란드만 방향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도 쾌속선이 다니고 있는 이 뱃길은 에르미타지 박물관 정문 네바강에서 출발하여 
핀란드만을 지나 아랫공원 선착장에 다다른다. 
이 길은 경호의 안전성 때문에 황제들과 손님들이 육로보다 자주 이용했었다.

 

메제움니 (Mezheumny) 분수


물고기 형태의 황금 신화 생물이 있는 메제움니 분수(Mezheumny Fountain) 
윗공원의 연못에서 가운데 금잉어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금잉어가 물을 뿜어대고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매일 11시 정각부터 물을 뿜는 분수들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른 수압을 이용하여 
무동력으로 물이 뿜어지게 만들었으며 분수와 어울어지는 조각상의 균형감 있는 배치들로 해서 
이 정원은 18세기 초 유럽 정원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각상들은 대부분 로마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윗정원의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e) 동상이 오른손에 삼지창을 들고 서 있다.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으로 유피테르와 플루톤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투르누스와 옵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과 거의 비슷한 신이지만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넵투누스(Neptunus)의 개념은 많은 부분 에트루리아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조각상

넵튠 동상 아래에는 좀 더 작은 크기로 말을 탄 기사, 창을 든 전사, 
물고기를 탄 아기들 모습의 동상이 넵튠을 호위하고 있다.
이들 말과 물고기의 입에서는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넵툰 (Neptune) 조각상

로마 신화에 나오는 넵투누스(Neptunus)는 바다의 신으로 바다와 강, 호수, 
조그만 샘에 이르기까지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친 머리칼과 턱수염을 한 건장한 모습에 언제나 세 개의 
뾰족한 끝이 달린 창을 세워 든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단체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숲 터널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오크(Oak-tree) 분수

오크 (Oak-tree 떡갈나무) 분수는 1734년 조각가 P. Sual이 만들었으며 
1746년에 납 참나무가 제거되었고, 1802년에는 아랫공원으로 옮겨졌지만 
"Oak"이라는 이름이 이전 분수에 남아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분수대의 역사는 끝없는 재건과 개조로 오늘날 구체화되었으며 
1929에 마침내 구성적으로 완성되었다.

 

오크(Oak-tree) 분수

오크 분수는 우아함과 조화로 관광객들에게 계속 주목받고 있다. 
분수의 건축 파노라마는 화강암 바닥이 어둡고 밝은 색조의 석판으로 늘어선 둥근 수영장이며, 
중앙에는 불가사리 모양의 응회암 슬라이드가 있다. 

"Oak" 분수의 수영장 한가운데 응회암 언덕에 조각가 D. Rossi가 1809년에 만든 
연극 마스크를 쓰고 있는 큐피드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오크(Oak-tree) 분수에서 인증샷

 

단체 인증샷

 

인증샷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의 측면 날개 맞은 편에는 

대칭으로 위치한 두 개의 광장 연못이 있다. 
이 연못들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의해 지어졌으며 

아랫정원의 분수 시스템을 위한 저수지로 사용되었다. 
처음에 연못은 기술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 연못에 별도의 분수가 세워졌다.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서쪽 연못은 "다이아나의 나무 아래 목욕"이라는 구성으로 장식되었다. 
사냥의 여신은 다섯 마리의 어린 님프, 개, 돌고래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동부 연못의 중앙에는 젊은 신 아폴로(Apollo)의 형상이 있다. 
분수대는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두 조각은 6 개의 동일한 청동 돌고래로 둘러싸여 있다. 
금박을 입힌 바다 동물의 입에서 강력한 아크 제트물이 분출한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전면

정원에 들어서면 잘 조경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를 빠져나가면 세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훤히 드러난다. 
북쪽으로는 연한 갈색의 벽에 푸른빛이 약간 감도는 흰색지붕, 
그 위로 황금색의 탑이 찬란한 로코코 양식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 전면에서 인증샷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 여름궁전

 

궁전의 내부는 라스트렐리의 바로크 양식과, 유리 펠텐 등이 예카테리나 대제를 위해 
새로이 장식한 방들의 보다 차분한 신고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작은 오두막에서 이주해 와 이곳에서 여름을 지냈다고 한다. 
1층은 표트르 대제의 방이고 2층에는 예카테리나 1세의 방이 있었는데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은 표토르 대제가 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름 궁전(Peterhof Summer Palace)''이라고 불린다. 
표트르 대제가 베르사유 궁전을 염두해 두고 조성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이유' 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궁전은 길이 300m의 2층 건물로 1714년에 건조되고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8년까지 완전히 복구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1714년 착공된 이래 9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50년이나 지난 후에야 공사가 끝이 났다.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여름궁전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핀란드만에서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이 조성되었으며, 
러시아 황제의 여름 별장 중에서는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다.  
총면적 1000ha의 부지에는 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 공원,  
가로수 길, 대궁전을 포함하여 20개의 궁전건물이 서 있다.

 

러시아 황제 문장인 쌍두 독수리상이 있는 표트르 궁전 꼭대기의 장식

쌍두 독수리 문장은 27m 높이에 설치했는데 특수 장치로 인해 풍향계처럼 돌아간다. 
이 독수리는 머리가 세 개로 되어지만 보는 각도에서는 머리 두 개만 보이도록 되어 있다.

 

대궁전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탑을 가진 여름궁전 동쪽 입구의 성당 (Church Of Grand Peterhof)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정원으로 향한다.

 

[영상]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윗정원(Upper garden)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출입구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은 중요한 행사와 축하 행사, 리셉션, 
무도회 및 가장 무도회를 주최하는 러시아 차르의 주요 의식 거주지였다. 
이 기념비적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약 30 개의 방이 있다.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 사진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인 
첫 번째 방을 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 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연회실을 지나면서 건물 2층은 아랫공원 부분과 윗정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아랫공원 쪽은 거울방, 모델방, 황금의방, 침실, 황제와 황족들의 전용 하얀식당, 중국의 방 등 
주로 여황제들이 사용하였다는 방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우측으로 돌면서 윗정원 부분은 표트르 대제의 침실, 표트르 대제의 집무실 등으로 나뉘어진다. 
윗정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한 영국식으로, 
아랫공원은 대분수(삼손분수), 장난분수, 요술분수 등 많은 분수와 
바다까지의 작은 수로 등 프랑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하지만 이곳은 대조국전쟁(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으로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이에 독일군들의 보복으로 대궁전 등이 불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 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실내 관람을 위해서 신발 겉에 신어야 하는 덧버선 바구니

 

실내 관람을 위해서는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황금으로 치장한 대궁전의 화려한 그랜드 계단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대부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Winter Palace, Hermitage Museum) 건축가인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에 의해 디자인되어서 스타일은 비슷하다.

대궁전 입구는 건물의 서쪽 부분에 배치되었고

1751년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황금으로

치장하여 만든 화려한 그랜드 계단이 나온다. 

현재 페테르고프 대궁전은 러시아 통치자의 그림과 도자기, 

직물, 독특한 가구 및 개인 소지품을 포함하여 약 350 점의 

전시물을 포함하는 독특한 역사 및 예술 박물관이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18 세기에 댄스홀은 머천트 홀로 알려졌고 270평방 미터로 넓은 면적은 
대궁전 서쪽 절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창문이 2단으로 배열되어 있고 수많은 거울과 그림이 장식으로 사용된다. 
전설에 따르면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제는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금을 방 디자인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인증샷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체스마(Chesma) 홀은 관리들이 리셉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왕좌의 방 앞에 위치한 대기실이다. 
독일 출신 화가 제이콥 필립 해커트(Jacob Philipp Hackert 1737~1807)가 그린 

12점의 작품이 홀의 주요 장식으로 사용된다. 
이 작품들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체스마(Chesma) 전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였다.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재미있는 사실은 체스마(Chesma) 전투의 그림을 보다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카테리나 여제 (Catherine II)는 이탈리아 리보르노 항구에서 호위함을 폭파하여 
해전을 본 적이 없는 예술가가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북쪽과 서쪽 벽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세 개의 빈 벽을 따라 두 줄로 배열된 12 개의 유화를 비춘다. 
해커트(Hackaert)가 그린 이 대형 캔버스는 1769년에서 1773년 사이에 
지중해, 에게해 및 아드리아 해에서 러시아 함대가 수행한 전투에 대한 일종의 그림 기록이다. 
자세한 내용이 담긴 전투 차트, 사건을 목격한 옛 선원의 회상, 
해커트(Hackaert)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괴테(Goethe)는 이러한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왕좌의 방은 군주가 공식 행사를 '위엄 있게' 주재하고, 의회를 개최하고, 
청중에게 경의를 표하고, 높은 영예와 직책을 수여하고, 기타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장소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러시아의 차르가 사용하는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단과 왕좌는 
백말을 탄 캐서린 2 세의 큰 그림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에는 또한 수많은 유화와 11개의 샹들리에가 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는 1730 ~ 1740년 

러시아 제국의 여제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했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Romanov, 1709~1762)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옐리자베타는 모스크바 근처의 콜로멘스코예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 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옐리자베타는 자신이 정식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즉위식 다음 해에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 후계자는 요절한 한 살 위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테르 울리히(Karl Peter Ulrich) 공을 
러시아로 불려서 황위 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울리히는 표트르 대제의 공식 혈통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열 살 때 아버지까지 잃어 공작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가 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면서 
러시아 황태자의 공식 명칭으로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Grand Duk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자 옐리자베타는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러시아 총리대신 베추체프의 영향력이 
약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관여했다.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 소피아 아우구스테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소피아의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Johanna Elisabeth)는 옐리자베타가 
젊은 시절에 약혼했다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홀슈타인-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테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피아는 당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옐리자베타 여제가  표트르 3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고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던 중
1729년생으로 표트르보다 한 살 아래인 소피아가 약혼자로 결정되었다.

훗날 캐서린 여제가 되는 소피아는 1744년 1월에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함께 러시아로 들어와 옐리자베타의 왕궁에서 생활했다. 
소피아는 열성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서 배웠으며, 
옐리자베타와 표트르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때문에 차리나와 귀족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소피아가 남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러시아로 오면서 러시아의 황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745년에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 예카테리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장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 폐기하여 
연대기 작가들의 애를 태웠던 차리나 옐리자베타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보존했을 뿐 아니라,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정리한 <회상록>까지 남겨 
후대의 작가들을 위해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회상록>에 의하면,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곳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표트르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따른 위대한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도 
좀처럼 어릴 적에 받았던 프로이센식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표트르 3세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통치해야 하는 러시아를 후진국이라며 경멸했다. 
특히 그는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러시아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정의한 
프로이센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존경해서 손가락에 
프리드리히가 조각된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은 표트르는 정신적인 성장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유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으며, 
십 대인데도 음주벽이 있었다. 
특히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를 앓고 나서 얼굴에 심한 마마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표트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되었다. 
그의 성기에 결함이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를 할 때 

심각한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녀는 <회상록>에서 이때의 심경을 간단하게 적고 있다.

'만약 그에게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거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 첫날 남편에게 잔인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네가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거야. 
조심해, 예카테리나. 이 남자와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 라고.'

결혼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대신 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당대의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거의 모두 독파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볼테르의 저술에 감동해서 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이들의 교류는 볼테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표트르와 성 관계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스물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남자 경험을 했다. 
명문가 출신의 미남 청년인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였다. 
살티코프는 대략 열두 명 정도로 집계되는 예카테리나의 진지한 애인 중에서 첫 번째 남자였다.

예카테리나는 스물다섯 살인 1754년에 첫 아이 파벨 페트로비치(Pavel Petrovich)를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일 파벨이 표트르의 아들이 아니라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예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파벨이 태어나기 2년 전쯤에 잠시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표트르가 성기 수술을 통해서 성 기능을 회복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녀는 결혼 초기의 

결심을 철회하고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두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우리의 의견은 항상 너무나 달라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무 그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몸을 맡겼다.'

파벨이 태어나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표트르가 애인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Yelizaveta Vorontsova)였다. 
보론초프 가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1세기에 성립된 노브고로드 대공을 계승한 집안이다. 
당시 보론초프 가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던 두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인 옐리자베타와 동생인 예카테리나였다.

옐리자베타 보론초바가 표트르와 공공연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동생인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황태자비인 예카테리나와 긴밀한 친구 관계였다.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명문가 출신인 
미하일 다쉬코프 대공(Prince Mikhail Dashkov)과 결혼해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대공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내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사람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을 낳자마자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파벨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키웠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을 한 달 후에 세례식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여섯 달 후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이유는 예카테리나에게 차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표트르 3세를 거울삼아 
파벨을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손답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생애에서 대단히 소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리 오를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는 노브고로드 시의 행정관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들로 나이는 예카테리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애국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문했으며,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가 부상이 회복된 후에는 동생 
알렉세이(Alexey Grigoryevich Orlov)와 함께 근위대에 배속되어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 가면서 
표트르는 점차 주변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동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그리 영리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예카테리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했다. 
예카테리나 역시 표트르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가급적이면 공개석상은 피했다. 
또한 표트르는 공식적으로는 부적절한 관계임이 분명한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도 보란 듯이 동행하곤 했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 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되었다.

브릴리언트 말을 타고 황후 캐서린 II, 1762. by Virgilius Eriksen. Grand Peterhof Palace.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비길리우스 에릭센(Vigilius Eriksen, 1722~ 1782)은 
1757년부터 1772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예카테리나 2세 황제를 포함한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을 소재로 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덴마크로 귀환한 이후에는 왕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을 포함한 덴마크의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예카테리나의 남편의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고, 황후가 된 직후부터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과 접견하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군부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또한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도 
자주 만나 자리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고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카잔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남편을 폐위하고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표트르 3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당했다.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3세의 살해를 명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사건은 그녀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일반 대중들은 
예카테리나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1762년 9월 차르의 고도(古都)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예카테리나 2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여제의 34년 통치시대가 개막되었다.

개인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배자였다.
러시아에 대해 진정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러시아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녀는 질서와 정의에 바탕을 둔 
통치체제의 확립과 교육의 확대를 꿈꾸어왔었다.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필적하는 궁정을 꾸미고 프랑스를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어 왔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아서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계획에만 쏟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옐리자베타 여제 사망 당시 
이미 텅 비어버린 국고를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762년 성직자의 재산을 정부재산으로 이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나라 전체 토지와 봉토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미미한 정도로 남아 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국록을 받는 공직집단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한편 자신의 쿠데타와 표트르 3세의 의문스런 죽음은 그녀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과 안정을 찾는 것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통적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오랜 적대 국가인 프로이센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764년 자신의 오랜 정부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으로 앉힘으로써 분명한 국경선이 없이 이웃한 3개 열강들의 
야심의 대상이 되어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했다.

반면 그녀의 개혁 노력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가 옹호하던 개혁이 무정부적 · 후진적인 성격의

러시아 현실에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유럽에서도 실행에 옮겨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767년 자신의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하고 헌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과 각 계층(농노를 제외하고)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 개월간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위원회에 내려진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헌법의 초안이 되고 곧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프랑스에서 공포되기에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에서는 사문화되었다.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자 예카테리나는 1768년 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무엇보다도 국가의 영광을 앞세우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와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신하들의 애국심과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1770년 체슈메 전투의 승리가 예카테리나에게 군사적 영예를 

안겨다주기는 했으나 투르크족들은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으며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는 예기치 않았던 곤경에 직면했다. 
먼저 전쟁에 따른 어려움과 함께 무서운 전염병이 모스크바에 창궐했다. 
전염병은 대중들 사이에 민심이탈과 함께 대중동요의 기운을 조성했다. 
1773년 돈 카자크족의 장교 출신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죽은 표트르 3세로 자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 
우랄 산맥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은 남동부 각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774년 6월 푸가초프의 카자크 군대는 모스크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투르크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반란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참수되었으나 
그가 야기한 공포와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이 연민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이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속박을 더욱 단단히 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권좌에 오르기 전 예카테리나는 농노해방을 계획했었다. 
산업의 95%가 농업인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농노는 소유주들의 
재산이었으며 귀족들의 재력은 토지가 아니라 농노의 숫자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자 농노해방이 
농노 소유주들로부터 너그러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소유주들은 곧 예카테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었으므로, 생산수단인 
농노를 빼앗기게 될 경우 나라 전체를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불가피한 악습과 타협한 예카테리나는 
과거 한때 자신이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비난했던 농노제를 
이제 새로이 조직하고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었으며 
이른바 왕실 소유영토를 자신의 총신과 각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 왔던 해당 농민들의 운명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권 말기에 러시아에서는 자유농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농노들의 형편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어쨌든 러시아 국민의 95%는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이룩된 
업적들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 농노의 강제노동은 경제와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원대한 계획에 소요되는 증가일로의 막대한 지출에 자금을 조달해 주었을 따름이다.
그결과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자신이 훌륭한 행정가였음을 입증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도 

술에 관한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바로 예카테리나 2세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였다. 
리가는 소련에서 독립한 발틱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현재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2세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건강이 나빠진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때 주위의 권유에 따라 리가에서 나는 약주를 마셨는 데 
마신 지 얼마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일로 여제를 살린 술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프랑스의 드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마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이 술은 과연 어떤 술일까?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인데 
'블랙 리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세기 중반에 리가의 한 약사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보드카에 25 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45도의 독한 술인데 자세한 성분은 아직까지 비밀이다. 
이 술은 여제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감기 치료 효과와 
건위(健胃, 위를 튼튼하게 함) 작용이 있는데 이름처럼 짙은 검은빛이다.

명실공히 라트비아의 국민주인 리가 블랙 발삼은 국제적인 주류 
품평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기 때문에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두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그러한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예카테리나 여제의 평가와 비판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모순은 그녀의 치세에서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왕이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삐 풀린 특권을 누렸다. 
대신에 이러한 부담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지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들이 
러시아의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하자 농민들은 본래의 땅을 잃었으며,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스스로 귀족들의 농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노들의 삶은 피말릴 정도로 처절하였으며, 특히 성격 파탄의 귀족들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농노들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학대도 감수해야 했으며, 
귀족들의 교활함은 농노들에게 일부러 싼 봉급을 시간제로 줌으로써 
그들이 일주일 내내 노역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도박장에서 돈 대신에 거래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농노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궁전 초상화 홀

이 방의 벽은 유명한 러시아인과 표트르 대제의 친구 및 친척의 그림으로 덮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 곳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조심스럽게 잘 복구되어 보존되고 있다.
대궁전의 내부는 왕좌실, 서재, 중국식 로비, 흰색 식당, 초상화 홀의

다섯 부분으로구성되었으며, 내부 장식이 대단히 아름답다.

 

대궁전 초상화 홀
대궁전 전체 초상화의 갯수가 370개가 넘는다고 한다.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대형 거울이 많이 걸려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흰색 식당은 축제식 사용으로 원래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설계했다. 
그 후 1774 ~ 1775년에 독일계 건축가 유리 펠텐(Yuri Felten 1730~1801)은 
예카테리나 여제(캐서린 대제)의 주문으로 홀을 크게 바꾸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정원의 주철 난간 건축으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유리 펠텐의
새로운 스타일은 이전 라스트렐리 스타일과 완전히 반대였다. 
금빛의 광택 대신 내부는 엄격한 고전적인 대포로 장식되었다. 
방 중앙에는 유명한 영국의 거장이자 도자기 산업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만든 흰색 식탁보와 
30인용 도자기 세트로 덮인 거대한 테이블이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중국식 왕족 거실

 

대궁전 탈의실

 

대궁전 '하프가 있는 방'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 (왕족들의 휴게실)

 

대궁전 표트르 대제의 오크 연구

 

대궁전의 푸른색 드로잉 룸

 

대궁전 브레이크 프론트(Breakfront) 찬장 및 세라믹 스토브

이 세라믹 스토브는 제국 러시아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페테르고프(Peterhof) 대궁전뿐만 아니라 캐서린 궁전(Catherine Palace), 
심지어 우글리치(Uglich) 궁전과 같은 많은 웅장한 궁전에서 볼 수 있다.

 

[영상]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구글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교외 지역에  푸슈킨이라는 고을이 있다. 
러시아 국민시인 푸슈킨이 이 고을에 있던 고등학교 졸업생이라 하여 
볼셰비키 혁명 후 고을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다. 
이곳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의 명칭은 표트르 대제의 황후이며 제2대 러시아 황제이기도 한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Alekseevna 1684~1727)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와 관련 건조물군 중 하나로 
18세기 러시아 건축 예술의 산물이며,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17년 예카테리나 1세는 독일의 건축가 요한 프리드리히 브라운슈타인
(Johann-Friedrich Braunstein)에게 자신을 위한 여름 궁전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그후 1743년 4번째 군주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 치세에 완성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56년 5월 6번째 군주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 여제의 

명령에 따라건축가 B. F. 라스트렐리의 감독 아래 옛 구조물을 철거하고

대규모적인 규모로 훨씬 웅장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다.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 Amber)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호박도 약탈당하였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기 전까지 호박방은 정교한 장식과 화려함으로 인해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공원 안내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남쪽 구역

훗날 건물이 복원된 뒤, 소련 정부는 1979년부터 호박방의 복원을 위해 
종적이 묘연해진 호박을 찾았으나 모자이크 일부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하였다.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북쪽 구역

1999년부터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 
호박방은 사방 14m, 높이 5m의 방으로, 원래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계단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은 러시아 고유의 양식과 
서유럽식 왕궁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예카테리나 궁전 무도실

옛날 왕가에선 반드시 무도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해야 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에겐 첫번째 본부인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복사업을 펼치는 남편에게 적합한 부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의 적과 내통하며 표트르 대제를 배신하기도 했다.

 

1698년에 당시 예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 1세는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성정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선 이혼을 금지했기에 표트르 대제는 
이혼한 첫 번째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트비아 출신의 둘째 부인 예카테리나 1세는 호방한 여장부였고 
표트르 대제와 궁합이 잘 맞았다. 
표트르 대제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

예카테리나는 1712년에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 1세가 요로결석으로 서거했으나, 표트르 1세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 간의 짧은 치세로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1727년 5월 17일 4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는 
훗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어머니를 따라 역시 여제가 된다.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의 초상.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1729~1796)는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 ·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또한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독일 출신에 남편 표트르 3세의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러시아인들, 
심지어 소련인들에게도 찬미의 대상이며 민족 자긍심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영토를 서쪽과 남쪽으로 20만 평방 마일(258,000㎢) 이상 확장시켰고,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 주를 재조직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옛 도시들은 새롭게 단장시켰다.

이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문학을 적극 후원해 문학평론을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고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또 과학을 장려하고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예카테리나 궁은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영국식으로 캐서린)에게 
결혼 선물로 준 땅에 지은 성과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정원의 끝에는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있다. 
‘에르마타주’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의 건축물이다. 

 

황제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농노가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테이블을 올려주었고, 
그러면 황제는 그곳에서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냈고 
그러면 농노가 물건을 밧줄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 시설이 보존돼 있다. 
작동은 되긴 하지만 이젠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복원된 호박방

호박(琥珀 Amber)이란 고대의 송진이 굳은 것으로
진주, 산호와 함께 정의상 광물은 아니지만 보석으로 취급된다.
보통 송진(수액이라고도 함)이 굳어서 100만년정도 지나면 호박이 되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생기기 전에 생성된 것으로 자체가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안에 모기나 벌레 등이 들어 있는 것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호박방

방 전체가 황금 같은 빛을 발하는 호박으로 장식되어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박방'이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가장 유명하다. 
지금의 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호박을 싹 긁어가서 나중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단순히 자연 호박만을 가지고 치장해 방을 만든 게 아니라, 
호박에 열처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써서 의도적으로 색이나 모양을 변형시킨 호박들과 
자연 호박들 및 금과 거울을 같이 써서, 매우 화려한 방을 만들었다.

 

호박방

원래 이 호박방은 독일에 있던 것으로 1701년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인 조피 샤를로테 왕비를 위해 지은 것이다.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설치될 예정이던 이 호박방은 계획과 달리 완공 이전에 
프리드리히 부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사치 행각을 싫어하던 지독한 구두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공사가 중단된 호박방은 베를린 궁전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1716년 러시아로 옮겨갔다. 

 

호박방

표트르 대제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호박방을 보고 반해 

러시아에도 호박방을 짓고 싶어했다. 
이를 알게 된 독일 프리드리히 1세가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로 호박방을 떼어다가 보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던 와중으로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전한 상황이었다. 
전쟁 와중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프로이센을 방문한 표트르 대제는 

이 방을 보며 감탄했고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패널들을 표트르에게 외교협정의 대가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러시아로 옮겨진 호박 패널에 예카테리나 2세 때 
더 많은 양의 호박들이 추가되어 방 전체를 장식하게 변모했다.

 

호박방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호박을 싹 긁어가며 훼손했고, 
현재 여름궁전에 있는 호박방은 
원래 호박방이 있던 자리를 공들여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나치가 훔쳐간 호박방 원본은 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설, 
나치의 비밀 벙커에 숨겨 두었다는 설 등이 분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영상] 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앞에서 인증샷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캐서린 대제 (예카테리나 2세)는 1780년대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에게 마노방(Agate Rooms)을 만들도록 했다.
카메론은 이탈리아로 가서 고대 온천의 건축을 연구했다. 
마노방 건물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에는 여러 개의 욕조가 있다. 

건축 공사는 1779 년에 시작되어 1788 년에 완공되었다. 
이 마노가 박힌 인테리어를 포함하는 건물은 콜드 배스 (Cold Bath)라고 불린다.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1 층에는 러시아식 목욕탕, 로마식 목욕탕, 수영장, 냉탕, 
마사지 실, 오락실 등 다양한 종류의 황후 목욕탕이 있다. 
산수유, 진품 및 인조 대리석, 청동 장식품과 같은 다른 귀중한 광물이 사용되었다. 
마노방은 인테리어 작업에 벽옥을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 
이것은 유럽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은 1779년 캐서린 대제(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러시아에 온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의 건축물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북쪽 끝에서 웅장한 계단으로 접근 할 수있는 갤러리는 현재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주변 공원, 특히 큰 연못 (Bol'shoy Prud)과 정원을 향하여 최상의 전망을 갖도록 

설계된 건물의 윗층은 44 개의 가느다란 이온 기둥으로 구성되고 
고대의 위대한 인물의 청동 흉상으로 장식된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큰 연못 (Bol'shoy Prud)
카메론 갤러리 계단 아래에 있는 헤라클레스 동상과 큰 연못 (Bol'shoy Prud)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정원

예카테리나궁 앞에는 대규모 정원이 있다. 
정원은 영국식 정원, 프랑스 베르사유식 정원, 폴란드식 정원 등으로 구분된다. 
영국식 정원은 예카테리나 1세의 취향, 
폴란드식 정원은 표트르 대제의 취향을 반영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베르사유식 정원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로망이었다고. 

 

작은 연못과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 조감도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을 관람하는 우리 일행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인증샷

 

궁전 공원

 

궁전 공원에서 신혼 사진을 찍는 장면

 

궁전 공원

 

목욕탕 (Lower bath)

 

목욕탕 (Lower bath)

 

궁전 공원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큰 연못 연안에 위치한 그로토 파빌리온은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공연을 하는데 사용된다.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4인조 아카펠라 공연이 있었다.
나는 관람료 대신으로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내부와
4계절의 공원 풍경이 담긴 USB를 구입했다. 한 6천원 쯤이었던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인증샷

 

인증샷

 

물고기 다리 (Fish Channel)

 

인증샷

 

물고기 채널 (Fish Channel) 

 

인증샷

 

인증샷

 

키메라 그릇(Bowl with Chimeras)

 

에르미타주 파빌리온 (Hermitage Pavilion)

 

캐서린 공원(Catherine Park)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걷다보면 
공원의 끝에 멋지게 장식된 2 층짜리 건물 에르미타주(Hermitage)가 나온다. 

 

하늘에서 본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으로 
"고독의 장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다. 
에르미타주(Hermitage)의 아이디어는 17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에르미타주(Hermitage)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사냥 오두막을 닮았지만 내부는 아주 멋지게 장식되어 있다. 
구조는 십자가 모양이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의 건설은 미하일 젬초프(Mikhail Zemtsov 1688~1743)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건축가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해외 유학생으로 파견된 청년 그룹 최고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젬초프는 실제로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건설 초기에 사망했다.

에르미타주는 1756년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에 의해 완성되었다. 
라스트렐리는 실제로 러시아에서 바로크 양식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인증샷

건물은 2 층으로 되어 있다. 
벽은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의 주요 궁전처럼 하늘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파사드는 벽을 어깨에 메고 있는 아틀라스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사자 가면도 있다. 
화려한 주철 그릴과 일부 장식품이 도금된 발코니가 여러개 있다. 
전체 건물은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의 작은 버전처럼 보인다.

 

인증샷

 

에르미타주는 체스판의 패턴으로 흑백 대리석 사각형으로 포장된 
패드 위에 세워졌고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구조는 대리석 조각상과 꽃병으로 가득찬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금박을 입힌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에르미타주는 돌로 지어졌으며 치장 벽토로 마감되었다. 
해자는 더 이상 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입장을 하기 위해서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에르미타주(Hermitage) 2층 큰 홀

2층에 큰 홀이 1개 있고 그 주변에 4 개의 작은 방이 있다. 
벽은 금박 조각, 그림 및 많은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인증샷

 

인증샷

 

에르미타주(Hermitage) 천장 장식

천장 장식은 이탈리아 예술가 발레리아니 (G. Valeriani)와 
페레시노티(A. Peresinotti)의 참여로 그려졌다. 
이들은 Peterhof의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름궁전(Grand Palace) 천장 장식에도 참여했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궁전 공원 풍경이 훤히 보인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황제가 2층 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하인들이 1층에서 식탁을 깔고 
음식을 준비해서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식탁과 음식을 올려주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그러면 하인이 필요한 물건을 밧줄로 올려준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과 도르레 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관람객을 위해서 시연을 해 준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의 후계자인 캐서린 대제는 종종 에르미타주에서 외국 대사를 접대했다. 
캐서린은 여기서 손자를 위해 파티를 열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길게 선이 그어진 부분과 접시가 놓인 부분이 
음식을 싣고 아래층으로 내리락 오르락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궁전만큼 황폐화되지 않았다. 
복원이 필요했지만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신중하게 개조된 건물은 캐서린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주변에는 잘 손질된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에르미타주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는 18세기 중반 이후로 변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에르미타주를 관람하면서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가고 내려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관람을 마치고 덧버선을 반납한다.

 

[영상] Hermitage Pavilion

 

아드멀티(Admiralty)

 

아드멀티(Admiralty)

 

점심 식사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1851년~1852년에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이 지어졌다.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큰 연못과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은 1768~1774년 러시아 대 터키 전쟁인 
키오스 전투와 체스마 전투에서 세 번에 걸쳐 러시아 해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기둥은 회색 대리석 받침대에 있고, 세면은 청동 옅은 부조이다. 
러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네 번째 측면에는 전투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와 같은 화강암 플랫폼에 놓여 있으며, 
받침대에 접근 할 수 있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그릴이 있는 아치형 개구부가 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예카테리나 2세. Portrait of Catherine II  Walking in the Park

Empress of Russia, 1794. oil on canvas.  94.5 x 66cm. 

Tretyakov Gallery, Russia Moscow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을 배경으로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산책 중인 캐서린 대제(Catherine II)를 그린 러시아 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의 1794년 작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영상] Catherine Palace Park

 

 

 

바실리예프스키(Vasilevsky) 섬과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 구글 지도

네바 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동쪽에 있는 러시아 두 번째 호수 라도가 호에서 
서쪽으로 740km를 흘러와 핀란드만으로 들어간다.

 

바실리예프스키(Vasilyevsky) 섬과 궁전다리(Dvortsovyy Most) 상공에서 보기

 

네바 강은 오랜 세월동안 ​오랜 세월 만 연안에 섬 100여 개와 늪지로 이뤄진 
삼각주를 만들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기반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 이곳에 처음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지대였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옛 노브고르드공국을 거쳐 15세기 모스코바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정작 1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표트르대제가 스웨덴의 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라고 판단, 이곳에 새로운 도시건설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1703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건설을 시작으로 상트페트르부르크가 탄생되었다. 


하지만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과 습지대인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돌로 세금을 부과하는 법령을 만들어 도시의 초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고된 노역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습지였던 이곳에 가적같이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됐으며 
급기야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된다.

 

바실리예프스키(Vasilyevsky) 섬과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상공에서 보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섬과 운하들이 300여 개의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북쪽의 베네치아’로 불리기도 하며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다운 도시로 
러시아와 유럽의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건설할 당시 이 바실리 섬을 
암스테르담과 같은 도시 중심지로 건설할 계획을 가졌으나 
강의 범람과 늪지대라는 지리적 취약점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동서남북으로 잘 구획된 도로망이 인상적이며 

아직도 18세기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비롯해 
과학 아카데미산하 박물관, 상품거래소 등이 자리하면서 

학술 및 예술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현재는 2개의 메트로역이 있으며 핀란드만을 통해 

헬싱키를 비롯 발틱 3국 등으로 출발하는 항구가 있다.

 

네바 강변 예르미타주 박물관과 궁전다리

제정 러시아 당시의 오랜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의 중심지이자 짜르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 문학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의 상징적 도시이기도 하다.

 

네바 강 궁전다리(Dvortsovyy Most)와 로스트랄(Rostral Colums) 등대

 

궁전다리를 지나면 바실리 섬으로 오른쪽에 로스트랄 등대가 보이고

왼쪽의 건물은 동물학 박물관이 보인다.
등대 있는 곳이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으로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강 건너편으로 에르미타주박물관과 페트로피블롭스크 요새가 보이는 삼각점에 있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관광객들이 한번 거쳐가는 곳이다.

 

겨울궁전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열려 있는 궁전다리

네바강변 겨울궁전 옆에 위치한 궁전다리(Dvortsovyy Most)는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 큰 섬인 바실리섬과 연결된다. 
이 섬은 동서 6.6km, 남북 4.2km에 달하며 4개의 크고 작은 다리를 통해 
넵스키대로가 있는 중심지역과 뻬뜨로그라드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겨울궁전 가든 옆 도로에서 본 열려 있는 궁전다리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현재 해군성 제방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 "Tsar Carpenter"에 대한 인상적인 기념비는 
특히 매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매우 세밀하게 제작된 기념비는 한 손에 말아 올린 소매와 도끼로 
배를 만드는 힘든 작업을 겪고 있는 젊고 단호한 표트르 대왕을 묘사한다. 
300년 전 젊은 표트르 대왕이 러시아 해군 건설을 돕기 위해 
네덜란드 잔담시에서 러시아로 가져갈 선박 건조 기술을 배웠다.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1909년,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폴타바에서

러시아 해군의 대승리 200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레오폴드 번시탐이 완성한 기념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에 선물했다. 
이 기념비의 제목은 "잔담시에서 선박 건조 기술을 배우는 표트르 대제"였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는 청동 기념비 사본이 잔담시에도 선물되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차르 카펜터"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는 
표트르 대제도 장인으로 일했던 해군성 제방의 네바 강 유역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집권 직후 기념물을 비극적으로 파괴했다.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하지만 원래 "차르 카펜터" 기념비의 청동 사본은 네덜란드 잔담시에 남아 있었다. 
1996년 9월 7일, 네덜란드 정부는 러시아 해군 창설 300 주년과 네덜란드에 있는 
표트르 대제 체류 기념 3세기를 기념하여 이 청동 사본을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 전달했다. 
이 기념비는 왕실 프리깃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 왔고 
헬리콥터를 통해 프리깃에서 해군성 제방의 받침대에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네바 강과 궁전다리(Dvortsovyy Most)

 

라이온스(Lions of the Palace Pier)

 

라이온스(Lions of the Palace Pier)

 

로스트랄(Rostral Colums) 등대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구 해군성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열리고 닫히는 궁전다리(Dvortsovyy Most)

 

겨울궁전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바실리예프스키 섬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조감도

겨울궁전에서 궁전다리를 건너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큰 바실리예프스키 섬(Vasilevsky Island)이 나온다. 
섬 입구 네바 강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핀란드 만으로 흐르는 곳에 
붉은 기둥의 등대 2개가 나란히 서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동물학 박물관과 해군중앙박물관이 마주보고 서 있다. 
수많은 다리와 운하로 연결된 페테르부르크여서 

이곳이 섬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표트르 대제는 암스테르담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서 바실리예프스키 섬이 

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늪지대인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운하망과 

도로망을 만들 때 현재와 같은 직각 구조로 계획하였다. 
즉 동서로 세 개의 대로를 만들고 남북으로 길을 만들어 

서로가 교체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네바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표트르의 계획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에는 공공 건물들과 많은 주택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18세기 당시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곳도 많이 있다.

이 등대는 19세기초 건축가 프랑스 건축가 토만(Thomas de Thomon)이 세웠으며, 
당시는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였고, 해군 박물관은 당시 

상공회의소로 쓰여진 건물이기도 하다. 
또한 한 겨울엔 이곳이 말썰매 경주장이기도 하였다.

 

바실리예프스키 섬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로스트랄 등대 (Rostral Colums)는 양쪽으로 2개인데 
1810년에 세워졌으며, 빨간색으로 칠해진 기둥에는 여러 개의 뱃머리 장식이 붙어 있다. 
이러한 모양의 건축물은 해전의 승리와 자국 해군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스트랄 기둥은 독립형 구조로 실제로 기둥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옅은 부조와 그림으로 장식되지 않고 배의 뱃머리를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각 기둥의 높이는 32m이고 가스 버너의 화염 높이는 7m다.
남쪽 및 북쪽 열, 총 두 개의 열이 있는데 남쪽 방향은 큰 네바(Bolshaya Neva) 방향이고 
북쪽 방향은 작은 네바(Malaya Neva) 방향이다.

 

8 개의 선로 장식된 등대 기둥

각 기둥의 몸통에는 8개의 뱃부리(rostras)로 장식되어 있다. 
뱃부리는 4줄 대칭으로 배열되고 가장 큰 뱃부리(rostras)는 기둥의 하단에 있다. 
배의 활은 위치에 따라 네바 강이나 증권거래소 건물을 향한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여성 조각

각 기둥의 하단은 남자와 여자의 두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각각 상업과 바다의 신을 의인화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역사를 상징하는 남편과 아내라고 믿는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남성 조각

또다른 사람들은 볼가(Volga) 강, 네바(Neva) 강, 드네프르(Dnieper) 강 및 
볼 호프(Volkhv) 강과 같은 러시아 강을 상징한다고 이 인물을 의인화한다.
조각품의 재료로는 야외에서 빠르게 굳어지는 석회암을 사용했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날개 달린 인어상

뱃머리를 장식한 조각상이 특이하다.
상반신은 벗은 상태고 하반신은 용의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기둥은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해전에서 승리하면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를 잘라 기둥을 장식하였는데 
러시아도 이를 본따서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럽을 오가는 선박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사이렌의 꾐을 피하려고 
비슷한 인어 모양 사이렌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등대 꼭대기에는 기름 접시가 있어 축제나 기념일에 불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이것은 등대라기보다는 기념비라고 보아야 될 듯하다.

 

로스트랄 등대

등대에 달려 있는 장식물은 뱃머리로 로스트랄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 역시 뱃머리이다. 
기둥의 대에는 러시아의 4대 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르, 볼가 강을 상징하는 조각품들이 있다. 
이 아름다운 등대는 프랑스의 건축가 장 프랑소와 데도몬에 의해 설계되었다.

 

광장 반대편에도 같은 모양의 등대가 하나 더 있다.

 

등대는 지금도 국경일이나 도시의 경축일 전야와 축제 때 불을 밝힌다. 

일부 학자들은 로스트랄 기둥이 바다가 아닌 강둑에 서 있기 때문에 
등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로스트랄 기둥은 
1995년 50,000 루블, 1997년 50 루블 지폐에 묘사되어 있다.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 항공 사진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와 로스트랄 등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해 있는 그리스 부흥 건축의 중요한 예시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돔 두 토몬(Thomas de Thomon)에 의해 설계된 증권거래소는 
1805년부터 1810년 사이 건조되었다. 
로스트랄 등대는 바실리에프스키 섬의 구 증권거래소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32m의 원기둥이다. 
로스트랄은 뱃머리를 의미하며, 기둥의 대에는 소련의 4대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로, 볼가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다. 
1810년에 돔 두 토몬의 설계로 당시의 상품거래소와 함께 만들어졌다.

두 등대 사이 중앙으로 보이는 건물은 예전에 상품거래소 건물로 
도리스식 건축양식으로 그리스 신전을 많이 닮았다. 
이 건물도 이 건물 또하 프랑스의 건축가 장 프랑수아 또마드 또몽의 작품으로 
현재의 50루불 지폐에도 나와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현재는 인류학박물관이다.

구 상품거래소 (해군 박물관)

바실리예프스키 섬은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항구가 위치하고 있었던 지역이므로 
19세기 초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구 상품거래소는 도리스식 주랑(柱廊)을 가진 건물로 ‘러시아의 파르테논‘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해군박물관으로 사용되며 내부에는 해군 관련 전시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 쯤에 동판으로 부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이곳의 등대와 건물들 그리고 강가의 선착장까지 자세히 표시해 놓았다.

 

동판 부조

 

로스트랄 등대가 네바 강을 끼고 있는 탓에 네바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잔디와 모래가 없어서인지 해수욕과 태양욕을 즐기는 분들은 없다. ㅎ

 

결혼식을 올린 신랑신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곳은 겨울궁전, 성 이삭성당,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등을 네바 강과 함께 
사진 배경으로 하기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관광객들 뿐 아니라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행복한 앞날을 기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미 100년이 넘은 예수의 다리 등 네바 강의 12개 다리들은 
조각품들이 각기 다르고, 얼음이 녹는 초여름부터 새벽에 양쪽으로 들리며 
배들이 발달된 운하를 통해 모스크바까지 다다른다. 
새벽에 부지런하면 교량 관리자와 이야기를 하고, 직접 가운데까지 내려가서 
이 광경을 만끽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오른쪽으로 네바 강 건너 일렬로 늘어선 에르미타주 박물관 풍경이 환상적이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이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해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네바 강변의 하중도에 처음 건설했다. 
강국 러시아가 왜 스웨덴 해군을 경계했는지 의문일 수도 있는데 

당시 스웨덴은 유럽이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내흥을 겪는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원래 중심지였던 키에프 지방이 몽골에 의해 쑥대밭이 된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국가를 개편한지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인접국 스웨덴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가 오기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늪지대였는데, 
이 도시가 거의 처음 기반을 닦은 곳이 이 요새 근처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광지 중 하나. 
가운데의 뾰족한 건물은 성당으로, 러시아 제국이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한 이후의 차르와 황후들의 관이 있다.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까지는 사후 안장되었고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된 후 
암매장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시신을 수습해 1998년 여기에 가족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 외에도 제정 시대 여러 위인들이 한때 수감되었던 옛 감옥 등 
여러 구역이 다른 테마로 관리되고 있다. 
성벽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성당은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착공된 곳으로, 
1712년부터 1733년까지 약 21년에 걸쳐 세워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주교좌가 있었으나 1859년 성 이사악 대성당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카잔 대성당에 있다.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상공에서 본 풍경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St. Petersburg State University)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1724년 1월 28일에 표트르대제가 세운 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페트로그라드 대학교, 

레닌그라드 대학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상공에서 본 풍경

러시아에서 국립모스크바 대학교와 함께 일류학교로 쌍벽을 이룬다.

 

네바 강에서 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캠퍼스 전경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교정에 세워진 박경리 선생 조각상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2018년 6월 20일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동상이 세워졌다. 
대학 본관 뒤 동양학부 건물 옆 현대 조각공원에 세워진 
전신 높이 135cm의 작은 동상 앞면에는 선생의 시 ‘삶’의 마지막 구절인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가 새겨졌다. 


2013년 11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 ‘푸슈킨 플라자’에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1799~837)의 동상이 세워진 것에 대한 

답례이자 한러 우호를 높이는 문화 교류의 하나로 추진됐다.

국내 작가의 동상이 해외에 세워지기는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지난해 상반기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학과에 

선생의 이름이 들어간 강좌가 개설되었다.

박경리 선생의 동상은 2015년 고향 통영과 
‘토지’의 최참판댁이 복원된 경남 하동에 세워진데 이어 
원주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대를 합쳐 모두 4개다. 
모두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제작했다.

 

푸시킨의 집 박물관


바실리예프스키(Vasilevsky) 섬에 있는 푸시킨의 집 박물관 
(Literary Museum of the Institute of Russian Literature) 외관 보기

 

[영상] 바실리예프스키 섬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

 

표트르 1세의 오두막집 구글 지도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를 건너서 오른 쪽 네바 강변에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집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과 표트르 대제 오두막 집

여름 정원(Summer Garden) 내 표트르 대제 여름궁전에서 볼 때
네바 강 바로 건너 편 마주보는 곳에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집이 위치해 있다.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앞 표트르 대제 기념비

 

표트르 대제 기념비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박물관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그 최초의 건축물인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표트르 대제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건축을 감독하기 위해 1703년 5월 말경 
며칠 동안에 만들게 했다는 송판로 지은 오두막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표트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보트도 전시되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표트르 대제의 통나무 오두막 집이다.
벽돌 건물은 이 오두막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용 건물이다.

표트르 대제가 요새 건설과 궁전 건설이 끝날 때까지 무려 8년 동안 살았던 오두막집이다.


1918년부터 국가 관리에 들어갔다. 
박물관에는 북방 전쟁(1700-1721) 승리에 관련된 자료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8세기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으며 당시에 황제가 쓰던 생활용품과 침실 등을 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토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배
아마도 요새가 섬에 있다보니 섬에 드나들기 위해서 사용했던 배였던거 같다.

 

표트르 대제의 조각상과 배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Aurora)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부근에 러시아 순양함 한 척이 영구 정박해 있다. 
순양함 오로라는 극동에서 러시아 해상 전력의 확장 프로그램 하에 
1897년에 시작하여 190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 해군본부에서 건조되었다.

1903년 11월 8일, 오로라 함은 파견함대와 함께 크론슈타트, 포클랜드, 알제리, 
스페시아, 비제르타, 페라에우스, 수에즈, 지부티 등을 거쳐 극동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 파견함대는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시작된 덕에 발트 함대에 배치되었다.

오로라 함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참전하였다. 
1905년 5월 27일에서 28일까지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완패하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06년 2월 오로라는 리바우 항으로 돌아갔다.

 

볼세비키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순양함 오로라(Aurora)

7000톤급 일반 순양함에 불과했었던 이 함정은 1917년 10월 1일 오전 9시 40분에 
함포 한방을 쏘아 올림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바로 그 신호탄 한발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레닌을 선두로 한 볼세비키 혁명이 시작된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육상 전투를 위해 양함의 대포만 떼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현재 이곳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경에 삼성 광고판이 보인다.

 

[영상] Cabin of Peter the Great in St. Petersburg, Russia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안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다.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트레치니(Domenico Trezzini)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여러 차례 불타고 1850년에 철골로 된 첨탑이 서게 되었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피터와 폴 대성당(Peter and Paul Cathedral)은 30 x 60 미터의 
긴 직사각형 형태로 유럽 ​​건축의 전통에 따라 지어졌다.
표트르 대제의 희망에 따라, 모스크바 크렘린 안의 이반 대제의 종루보다 더 높이 지었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에서 알렉산드르 3세까지의 역대 황제가 매장되어 있다.

금으로 도금된 종탑은 높이가 122.5m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D. 트레지니에 의해서 서구교회의 건축양식과 
고대 러시아 교회 건축 양식을 결합해 1712~1733에 만들어 졌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현장에 세워진 
최초의 목조 교회 공사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1704년 4월 1일에 봉헌되었다. 
이 건물은 완전히 건축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실제로 20년 여가 지난 1733년 6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종탑의 기저 역할을 하는 서쪽 정면은 정문 양쪽에 6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부분

대성당의 직사각형 바닥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벽은 창틀에 천사의 머리가 달린 평평한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시계와 천사상

종탑의 시계는 네덜란드에서 1720년에 배송되어 45,000 루블에 구매되었다.
시계는 교회와 군주제 찬송가를 불렀고 18세기부터 현재까지 2번, 
혁명 기간과 위대한 애국 전쟁 기간에 멈췄다.
혁명 시대에 볼셰비키는 혐오스러운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시계에 총을 쐈고 그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 

 

종탑 안의 편종(Carillon) 

표트르 대제의 요청에 따라 첨탑이 있는 종탑이 처음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 사람들의 침략을 관찰하기 위해 전망대가 필요했다. 
종탑은 네바 땅이 러시아로 귀속된 것을 상징했다. 
표트르 대제는 건설 중인 도시가 자랑스러웠고, 수도의 파노라마를 감상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외국인 손님과 종탑으로 올라가 전망을 보여주곤 했다.

 

편종(Carillon) 

기둥으로 장식된 다층 100미터 종탑은 대성당의 주요 부분이다. 
위쪽을 향한 세 번째 층은 금박을 입힌 8 피치 지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거대한 흰색 돌 프레임에 4개의 둥근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편종(Carillon) 

지붕 위에는 좁은 수직 개구부가 있는 우아한 팔각형 드럼이 있다. 
그 위에는 40m의 첨탑이 설치된 얇은 황금 포탑이 있는 높은 황금 왕관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종탑에는 103개의 종이 있으며, 원래의 종은 31개이다.

 

피터와 폴 대성당 외부

동쪽 정면에는 러시아 예술가 티토프(P. Titov)의 프레스코 화가 있다.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

 

피터와 폴 대성당의 첨탑에 있는 천사 풍향계

다층 성당 종탑 꼭대기 첨탑에는 네덜란드인 독일인 폰 볼리스 (von Bolis)가 만든 
6.5 미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으는 천사의 모습이 구리 도금 시트로 장식되어 있다. 
날개 길이는 3.8 미터, 높이는 3.3m, 구조물의 무게는 250kg이다. 
건물 위쪽에 천사는 운명의 변덕으로부터 새로운 러시아 수도의 수호자이다.

 

첨탑에 있는 천사 풍향계

표트르 대제는 날아 다니는 천사를 보지 못했으며 종탑이 미완성된 1725년 1월에 운명했다. 
1833년 6월 29일, 새로운 황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는 

대성당 봉헌식에서 대관식을 열고 축하를 받았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첨탑에서 바라본 네바 강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웅장한 기둥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 내부 공간은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지만 참배자를 위한 사원이 아니다. 
기둥은 대리석, 벽옥, 로도나이트(rhodonite)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석회암 석판으로 포장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비교적 정교한 프레스코화, 화려한 샹들리에, 
인조대리석 기둥 등이 조화로운 화려함을 보인다. 
초록색과 분홍색의  코린트 양식의 대리석 기둥은 
실제 대리석이 아니라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내부 장식은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아주 훌륭하다. 
러시아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을 보아도 훌륭하다.

 

돔 아래 로얄 문(Royal Door) 메인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코노스타시스'는 원래 그리스어로 ‘이콘(icon)을 거는 장소’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동방교회의 성당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만든 신랑부(nave)와 
성직자를 위하여 만든 내진 (內陣) 사이에 ‘이콘’을 걸어 
칸막이를 한 장벽이란 의미로 '성장(聖障)'이라고도 한다.

비잔틴과 러시아 정교 교회에서 성당 전체 건물과 성당 내 가장 신성한 장소를 
분리시키는 경계막으로 보통은 규율에 따라 성화상을 장식한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실내장식만 약 20년이 소요된 만큼 황제의 성당에 걸맞게 내부 공간이 넓고 햇볕이 잘 든다. 
지주, 벽기둥, 대리석 벽, 다양한 색채의 아치, 금박의 석고상, 그리고 다양한 빛깔의 샹들리에 등 
모든 것이 훌륭한데, 특히 이코노스타스(성막)는 떡갈나무를 조각하여 금박을 붙여 장엄함 그 자체다.

 

황제의 궁륭 (Tsar's Canopy)

황제를 비롯한 황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성당에서는 선채로 예배를 드려야했다.
다만 일반 신자들과 다른 점은 지정된 자리(사진)에서 예배를 보았다.

 

피터와 폴 대성당 천장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무덤

피터와 폴 대성당을 제국의 무덤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은 표트르 대제의 뜻이었다. 
나무로 된 피터와 폴 교회의 첫 번째 무덤은 캐서린 황제의 두 살된 딸이 죽었을 때 설치되었다.

 

표트르 대제 묘

1725년 1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 대제의 시신은 네바 강의 얼음 위에서 
종소리와 대포가 울리면서 미완성 된 피터와 폴 교회로 옮겨졌다. 

 

표트르 대제와 아내 아내 캐서린 1세의 묘

표트르 대제의 무덤에는 왕의 흉상, 꽃 및 세인트 앤드류의 해군 깃발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아내 캐서린 1 세와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가 묻혀 있다. 

 

알렉산드르 2세와 Dagmar de Danemark 공주 묘

 

보석이 박혀 있는 황제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와 부인의 묘

성당의 한쪽에는 우랄(Ural)산맥 부근에 묻혀 있다가 1998년 이곳으로 옮겨진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묘(Maria와 Alexei 제외)가 안치되어 있다. 
이들의 시신은 DNA 분석을 통해 확인되었다.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1918] 는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였다. 
적극적인 극동 진출로 러일전쟁을 초래하여 국내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2월혁명(1917)으로 제정이 붕괴되었다.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 황제 부인인 카트리나 예배실

 

카트리나 2세 묘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1894년 사망)까지, 역대 황제가 잠들어 있다. 
또한 1998년 7월 17일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발굴되어 이곳에 다시 매장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묘지도 있다.

 

로마노프 왕조의 계보 

 

스테인드글래스의 성 베드로와 바울

 

스테인드글래스의 성 유다와 성 바르바나 

 

부활하는 예수 스테인드글래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그랜드 듀칼 무덤은 피터와 폴 대성당 옆에 있는 작은 돔형 구조의 건물이다.
황제가 되지 못한 왕족들의 묘로 사용하기 위해서 1896년 러시아 건축가 
다비드 그림(David Ivanovich Grimm)의 설계로 지어졌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영묘는 최대 60개의 무덤을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13개에 불과했다. 
소련은 건물을 도시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하기 위해 무덤을 파괴했다. 
무덤은 나중에 복원되었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내부

내부는 대리석, 모자이크 및 오르몰루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1908년에 처음으로 영묘에 안치되었다. 
다른 8명의 왕족의 시신은 대성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영상]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조감도
피터와 폴 대성당 앞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1716~1824)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조감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금속주화를 만들었던 곳이다.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며 현재도 특별한 기념주화나 메달, 배지 등을 만들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1899년 조폐국에서 만든 5루불 주화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상트페테르부르그 조폐국 건물 뒤 네바강 벽 쪽으로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이 있다.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정문

 

네바 강에서 본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 성벽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내부

 

표트르 대제와 그의 아들 비운의 알렉세이 (그림)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표트르 대제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 존재였다. 
그는 키 2m에 가까운 거구에,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지녔다. 
그가 노여워 고함을 칠 때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개혁왕 표트르 대제는 그 목소리로 러시아를 중세의 긴 잠에서 깨웠다.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겼다. 
평생을 '전사 군주(Royal Warrior)'로 자처하며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 
러시아를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급격한 개혁은 잘 이해받지 못했고 반대에 부딪혔으며,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니콜라이 게(Ge·1831~1894)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페트로고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문책하는 표트르 대제'(1871)에서 
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표트르 대제는 노여운 표정으로 아들을 쏘아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서는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말한다. 
창백하고 무기력하게 서 있는 황태자는 러시아 정교회의 지지를 받는 보수적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겪는 갈등 속에서 스스로 왕위를 포기했던 황태자는 
반란죄로 체포돼 투옥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가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부자(父子)의 유명한 대립은 후에 러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는 서유럽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의 정신적 핵심이며 
서유럽과는 다른 국가라고 생각한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사상적 대립은 
결코 소모적인 것만이 아니어서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힘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가 배출한 세계적 문호들도 
이 대립적 사유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했다. 
최근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대항하여 유라시아 연합을 주장하고, 
유라시아 연합 내부에서는 카이사르 같은 패권을 주장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이런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세 고문 도구 전시관 (Torture instruments of the Middle Ages)

 

[영상]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Fortress) 위치 구글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약도

 

하늘에서 본 네바강과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토끼섬(vasilievsky island) 전경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Fortress)는 네바강(江)의 강폭이 가장 
넓어지는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토끼섬(Zayachy island) 에 축조한 요새이다. 
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건설했다.
요새를 짓기 전까지는 일대가 습지여서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으므로, 
이 요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탄생의 계기가 되는 곳이다. 

뒤쪽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는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이고
앞에 보이는 크론베르크스키(Kronverksky) 해협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는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이다.

크론베르크스키(Kronverksky) 해협은 페트로그라드스키(Petrogradsky) 섬과 
토끼섬(Zayachy island) 사이를 흐르는 길이 약 1km, 폭 약 50m, 
깊이 4m (13ft) 정도의 작은 해협이다. 
 
동쪽으로는 크론베르크스키(Kronverksky) 다리, 
서쪽으로는 요아노프스키(Ioannovsky) 다리에 걸쳐 있다.

요아노프스키(Ioannovsky) 다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건설된 첫 번째 다리였다. 
원래는 1703년에 떠 다니는 목조 다리로 지어졌지만 수년에 걸쳐 더 튼튼한 재료로 보강 및 재건되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조감도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네바 강(江)의 강폭이 가장 넓어지는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토끼 섬에 축조한 요새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탄생의 계기가 되는 곳이다. 

요새를 짓기 전까지는 일대가 습지여서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하여 
1703년 스웨덴에게 정복당했던 땅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세워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大)북방 전쟁(1700~1721)을 치르던 중이었는데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이 도시에 세워진 최초의 건축물로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화강암 성벽은 이것은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1720년경 이후로 요새는 군사 주둔지이자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나중에는 감옥과 대성당 하나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러시아를 근대 국가로 만들려는 표트르 대제의 결심을 보여 주는 기념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안내도

1. The St. Peter and Paul Cathedal  2. The Yawl House   3. The Commandant's House
4. The Mint   5. The Engineers House   6. The St. Johns Bridge   7. The St. John's Gate
8. The Peter's Gate   9. Artillery Arsenal   10. The Guard-house  11. The Nevskie Gate
12. The Commandant's Pier   13. The Naryshkin Bastion   14. The Nikolskie Gate
15. The Zotov Bastion   16. The Vasilyevskie Gate   17. The Trubetskoi Bastion
18. The Alexeevsky Ravelin   19. The Museum of Artillery

 

네바 강 겨울궁전 방향으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조감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사실상 표트르 대제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다. 
도시가 건설되는 동안, 그는 이따금 1703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북쪽에 
단 3일 만에 지은 간소한 통나무집에 머무르곤 했다. 
스웨덴 군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도 닿지 못했으므로, 

사실 전쟁 중에 요새가 필요했던 일은 없었다.  

1733년에는 요새의 중앙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페트로)와 바울(파울로)을 기념하는 
목조 건물의 러시아 정교회가 세워졌는데, 여기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교회는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여러 차례 불타고 1850년에 철골로 된 첨탑이 서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희망에 따라, 크렘린 안의 이반 대제의 종루보다 더 높이 지었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까지 
러시아의 모든 차르들이 안장된 최후의 휴식처가 되었다.  

한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1917년 10월 혁명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분노한 대중들로부터 황제 측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결국에는 볼셰비키 파의 손에 점령당했다. 
1924년 요새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차르들이 누렸던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이 요새는 1990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군사 역사박물관(Military Historical Museum) 방향으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페트로-파블로프스키'는 성경의 '베드로- 바울(Peter and Paul)'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어 표현으로 바로 이 요새 안에 있는 두개의 성당을 일컫는다. 
요새는 처음에는 나무로 지어졌으나 나중에 부분부분 단계별로 돌로 재건축되었다.

 

네바 강을 가로 질러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강어귀에 면적 45.6㎢에 이르는 커다란 삼각주상에 발달된 항구로, 
예로부터 발트해(海) 제일의 무역항을 이루었다. 
네바 강은 전유로(全流路)가 항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백해(白海)와 발트해를 연결하고, 
모스크바~볼가강 유역의 도시, 카스피해∼흑해를 잇는 중요한 수상교통로 구실을 한다.

 

네바 강을 가로 질러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화강암 성벽은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1733년에는 요새의 중앙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페트로)와 바울(파울로)을 
기념하는 목조교회가 세워졌는데, 여기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성벽

화강암 성벽의 두께는 8m에서 12m로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으며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더라도 요새 내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면서 적에 대항할 수 있도록 수도와 무기 제조창, 
식량창고, 성당 등 기본 생활 시설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성벽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적의 급습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1703년 세워진 요새로 18세기 중반부터는 형무소를 겸하였다. 

이 복합구조물은 또한 대성당을 포함하고 있다. 
이 대성당의 디자인은 D. Trezzini가 하였다. 
이 대성당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121.8m에 이르는 첨탑을 가지고 있다. 

요새에는 대성당 이외도 러시아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의 집과 
표토르 1세의 작은 보트의 사본을 보관하고 있는 곳 그리고 그 이외에도 
조폐국 등 중요한 곳을 많이 품고 있다.

 

요새로 가는 최초의 다리,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조감도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요아노프스키 브리지(Ioannovsky Bridge) 야생 토끼 조각상

들어가는 길 곳곳에서 이 섬이 토끼섬이라는 징표를 보여 준다.
야생 토끼 조각상은 도시의 기념일인 2003년 5월 17일 설치되었다.

홍수를 피하려고 한 토끼가 그 순간 섬으로 배에서 내리고 있던 
피터 대왕의 장화에 뛰어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섬에 이 이름이 주어졌고 
바로 여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설립이 시작되었다.
조각품은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홍수에 헌정된 특별한 기념물이 되었다.

 

다리 위에서 동전으로 토끼를 맞추면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

 

1740년에 건립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귀여운 토끼 조각상이 반겨준다.

 

두 번째 문을 향하여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은 요새로 들어가는 메인문으로 
1717년 스위스 출신 건축가 도메니코 트레치니(Domenico Trezzini)가 만들었다. 
요새의 건축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도메니코 트레치니는 표트르 대제가 새로운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물을 설계하도록 제안받았다.
도시가 설립된 1703년 이래로 그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 부분.

표트르 문 입구 위에는 러시아 황실을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상이 걸려 있고 
그 위로 성서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가 묘사된 조각이 있다.

 

성 표트르 문 (St. Peter's Gate)을 들어서서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러시아 조각가 미하일 케미아킨(Mikhail Chemiakin) 작품으로
높이 0.36m (1ft 2in)인 화강암 바닥에 기념비 높이 1.90m (6ft 3in)로 설치되었다.
1991년 6월 6~7일에 설치되었다.

케미아킨은 표트르 대제가 죽기 6년 전인 1719년 라스트렐리가 찍은 
표트르의 얼굴 마스크를 사용하여 동상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이 사실이 동상의 바닥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신체 부위를 확대하여 피터를 기괴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 조각상은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으며 
기물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해야 했다. 
나중에 케미아킨의 견해를 많은 사람들이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케미아킨은 8년 동안 조각상 작업을 했고 세 가지 버전을 만들었는데, 
나머지 두 개는 프랑스 노르망디와 케미아킨이 당시 살았던 뉴욕의 클레버 락에 있다. 

동상을 손으로 만지면 표트르 대제의 기운이 따른다고 해서

사람마다 손으로 만지다보니 손 부분이 반질반질하다.

 

네바(Neva) 게이트 

 

네바(Neva) 게이트의 높이는 12 미터, 너비는 12.2 미터이다. 
네바(Neva) 게이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이 처형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끌려 갔던 곳이라서 "죽음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어두컴컴한 감옥에 있다가 마지막 순간이나마 아름다운 도시와 바다와 하늘이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잠시 헤아려 본다.

 

1787년에 건립된 네바(Neva) 게이트 

 

네바 강이 범람했을 때 수면의 높이를 기록해 두었던 표지 동판

 

네바(Neva) 게이트

 

네바 게이트의 아치(arch) 왼쪽과 오른쪽에는 삼각형 모양의 돌출부를 지탱하는 이중 기둥이 있다. 
기둥과 지하실은 은백색 광택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인증샷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면 해수욕과 태양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에서 본 네바 강 풍경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와 네바 강

 

네바 강에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성벽과 컴맨던트 부두 풍경

 

[영상] 걸어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Peter and Paul Fortress)

 

앙증맞은 토끼 조각상

전망대 (Nevskaya Panorama)로 오르는 길에 토끼 네 마리가 한 마리를 끌어 올리는 
앙증맞은 조각상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힘내라 토끼야 ~ !!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인증샷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성벽에는 총 5개의 문과 6개의 망루가 있다.
요새 건설이 완료된 것은 1703년으로 이날은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탄생된 날이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고 두터운 벽은 과거에 정치범의 감옥으로도 
사용된 일이 있어서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 전경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 전경에서 볼 때 하단 중앙에 보이는 화살표 모양의 부분이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이다. 
그 옆에 컴맨던트 부두(Commandant's pier)가 있어서 기동력을 갖추고 있다.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 상공에서 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전경

 

나리시킨스키 요새(Naryshkin Bastion)의 대포

습지대의 섬에 요새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침입해 오는 스웨덴 군대로부터 러시아를 지키려면 건설을 서둘러야만 했다. 
마침내 표트르 대제 스스로 선두에 서서 지휘한 결과 가을에는 대포의 설치가 끝났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 강을 향한 나리시킨스키 요새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본 첨탑들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바라본 네바 강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바라본 네바 강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전망대 고수다레프(Gosudaryev) 망루

 

전망대 고수다레프(Gosudaryev) 망루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높이 12m,폭 4m)에는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전망대 (Nevskaya Panorama)에서 내려가는 길

 

[영상] 전망대 (Nevskaya Panorama)

 

 

 

 

[영상] 네바 강과 Trinity Bridge

 

마르스 광장(Mars Field, 화성 필드)

마르스 광장(Mars Field, 화성 필드)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위치한 9헥타르 규모의 공원이다. 
광장의 이름에 마르스(Mars)가 들어간 이유는, 이 장소가 오랜 세월동안 
군사 행진과 훈련의 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장소는 "큰 풀밭"(Big meadow)이라고 불렸으나,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즐거운 풀밭"(Funny field)으로 불리다가 18세기 후반에 
"차르의 풀밭"(Tsaritsyn Meadow)으로 부르게 되었다. 

표트르 1세의 통치 시기에 비로소 이곳이 군사 행진과 훈련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1805년경부터 고대 전쟁의 신인 

화성(Mars)을 기리기 위해서 "마르스 광장(Mars Field)" 또는 

"화성 필드(Mars Field)"라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17년의 2월 혁명이 진행 중일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볼셰비키가 이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꺼지지 않는 불을 설치하였으며  
이 광장의 이름을 "혁명 희생자의 광장"이라 명명하였다.

 

화성 필드(Mars Field)와 네바 강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

 

화성 필드(Mars Field) 꺼지지 않는 불꽃 후방 상공에서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를 내려다 본 모습

 

네바 강과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는 파리의 에펠탑을 건설한 프랑스 토목 기술자 
구스타브 에펠(1832~1923) 등이 참여한 프랑스 회사에 의해 1897~1903년 사이에 지어졌다.
네바 강을 가로 지르는 세 번째 영구적인 다리이다. 
길이는 582m (1,909 피트), 너비는 23.6m (77 피트)이다.

다리는 북쪽 끝에 서 있던 올드 트리니티(Trinity - Petrovsky, 올드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이 대성당은 표트르 대제가 1721년 북방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러시아의 첫 번째 황제로 선포하고 취임한 곳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1933년에 파괴 명령을 내릴 때까지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기념물 중 하나였다.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는 아르누보 디자인의 랜드 마크다.

다리는 예술적 주물로된 주철 격자, 랜턴이 달린 화강암 철탑, 
아르누보 스타일의 금속 3색 랜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트리니티 브리지의 로스트랄 오벨리스크(Rostral Сolumns)

트리니티 다리는 웅장한 플로어 램프와 

오벨리스크를 자랑하는 가장 인상적인 다리 중 하나다. 
다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칸델라 브라의 상징으로 장식된

화려한 난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화강암으로 만든 두 개의 

인상적인 피라미드 모양의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둥근 램프의 

틀을 지지하는 4면 플랫폼으로 기초에 장식되어 있다.

수보로프 광장(Suvorov Square)에서 다리 입구 양쪽 

옆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1955년에 리모델링되었다. 
길이는 43미터 (141 피트)로 확장되었고 다른 금속 스팬을 모델로 한 모습이다. 
화강암 아치 경사면이 왼쪽 제방에 설치되었다. 

 

트리니티 브리지 인증샷

 

트리니티 브리지 인증샷

 

네바 강과 트리니티 브리지

 

네바 강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트리니티 브리지에서 인증샷

 

트리니티 브리지에서 인증샷

 

트리니티 브리지의 로스트랄 오벨리스크(Rostral Сolumns)

 

열리고 닫히는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

 

열리고 닫히는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


대형 선박들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 다리를 서서히 

들었다 내렸다 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영상] Trinity Bridge Opening 

 

네바 강 상공에서 본 트리니티 브리지

 

수보로프 광장 (Suvorovskaya Square)

수보로프 광장은 트리니티 브리지와 화성 필드(Mars Field) 사이에 있으며 
살티코프 맨션 (Saltykov`s House, 왼쪽)과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가운데에 있다.

 

수보로프 기념비(A. V. Suvorov statue)

수보로프 기념비(A. V. Suvorov statue)는 계몽주의 시대에 활동한 러시아 신고전주의 조각가
미하일 코즐로프스키(Mikhail Ivanovich Kozlovsky)가 제작한 청동 조각품으로
수보로프 광장(Suvorovskaya Square) 중앙에 있다.

알렉산더 수보로프(Alexander Vasilyevich Suvorov 1729~1800)는 러시아 장군이자 백작이었다. 
수보로프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 사령관 중 한 명이다. 
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수많은 메달, 타이틀 및 영예를 수상했다. 


수보로프는 러시아의 국경을 확장하고 전쟁에 관한 이론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여러 군사 매뉴얼의 저자였고, 그가 명령한 모든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다.
러시아의 여러 군사 아카데미, 기념물, 마을, 박물관 등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는 신고전주의 대리석 궁전으로 

여름 정원과 수보로프 광장 사이에 있다.
이 궁전은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1729~1796)가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리 올로브(Grigory Grigoryevich Orlov 1734~1783) 백작을 위한 선물로 지어졌다.

그리고리 올로브는 캐서린의 남편인 러시아의 표트르 3세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이끌었고 캐서린이 황후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사실상 캐서린과 공동 통치자 였지만, 
캐서린과의 반복되는 불신과 다른 고문들과의 적대감으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화성 필드(Mars Field)에서 본 마블 팰리스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와 알렉산드르 3세의 승마 동상.

알렉산드르 3세(Alexander Alexandrovich Romanov)는  로마노프 왕조의 13번째 군주다.
그는 1845년 3월 10일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아 황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애칭은 사샤. 원래 사샤는 러시아 황제라는 자리에 관심이 없었고 
형 닉사와는 대조적으로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형 닉사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이어 황태자로 책봉된다. 

형 닉사는 "내가 죽으면, 다그마르는 내 동생 사샤와 결혼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다그마르 공주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로 

처음에는 사샤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사샤 또한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닉사의 유언에 따라 서로의 마음을 열고 1866년 결혼했다. 

사샤는 원래 차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주변 사람들 전부 "그는 차르가 될 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나 아버지가 생각한 인물은 맏형 니콜라이였으며 

알렉산드르 자신도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똑똑한 형 덕에 자기가 정치를 하지 않고 

좋아하는 군대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황제들 중에서 표트르 1세 다음가는 거구로 키가 190cm에 달했다. 
유년기부터 그는 남다른 힘을 자랑했는데, 손가락으로 동전을 구부릴 정도였다. 
운동도 잘했고 사격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솔로비요프는 그런 그를 ‘로마노프 가문의 헤라클레스’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그의 완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88년에 알렉산드르 3세는 가족과 함께 크림 반도를 방문했다가 
기차를 타고 다시 수도로 가는 중이었는데, 
과속으로 인해 기차가 전복되어 황제가 탄 객차가 완전히 부서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3세는 무너진 기차의 지붕을 
들어올리는 괴력을 발휘해서 가족들을 탈출시켰다. 
황실 일가는 황제의 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로 인해 알렉산드르 3세는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급성 신장염에도 걸리게 되면서 건강이 갈수록 악화된다. 
그래서 그를 검진한 독일인 의사 에른스트 라이덴의 조언에 따라 
1894년 크림 반도의 리바디야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요양생활 한달만에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승마 동상

이미 황태자 시절부터 반동세력에 가담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였던 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에게 잔혹하게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자 
국민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갖게 되어 태도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테러 주동자들과 관련자들을 모아 목을 매달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스도 부활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차르로 즉위해 자신의 아버지가 폈던 정책들과는 전혀 반대로 나라를 돌린다.

상당히 전제주의적인 정치를 폈는데 자신의 아버지의 즉위 기간에 생겼었던 
개혁들 중에 사실상 농노해방을 제외하고 모두 철회했고 더욱 더 강한 차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급진파에게서 잃고 나서 
안 그래도 싫어하던 급진파를 증오까지 하게 되어 여러 급진파들을 잡아 
대대적으로 주요 지도자들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알렉산드르에 의해 목이 달아난 사람들 중 하나가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레닌의 형이었다. 혁명가 형제들이라 불러도 되겠다.

그는 전제군주제를 강화하고 수호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를 저해하는 것은 무엇이든간에 용납하지 않았다. 
즉위 초기에는 선제가 만들어 놓은 개혁의 분위기가 지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격적인 반동정치로 일관하였다. 
또한 후계자인 아들 니콜라이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게 했고, 
니콜라이 2세 80여년 간 (1830년대~1910년대 후반 ) 계속된 
반동정치와 전제정치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참극을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3세

종교회의 의장인 콘스탄틴 파베도노스체프를 비롯한 알렉산드르 3세 정부는 
의회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보통교육 등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오직 전제정치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만이 
러시아를 보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혁명분자들의 활동은 물론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억압받고 투옥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여러 곳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검열제도가 강화되고 교육의 자유는 축소되었다. 
젬스트보에는 점차 귀족층의 비중이 늘어났고 중앙 정부의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1889년에는 지방관리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각 지방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반란에 실패했던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는 교육의 차별은 물론 
제한 구역을 두어 거주 이전의 자유도 빼앗았다.

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1894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알렉산드르 2세)처럼 암살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인물 가운데는 
훗날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큰형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 이런저런 일에 신경을 쓰느라 바쁜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건강이 나빠졌고 1894년 11월 1일 아내 다그마르와 자녀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 즉위한 그의 장남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 마찬가지로 
전제정치를 하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면서 1918년 7월 17일 
그의 가족들(알렉산드라, OTMA, 알렉세이)과 함께 처형당했다.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외관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외관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영상] Marble Palace in St. Petersburg, Russia

 

마르스 광장(Mars Field, 화성 필드) 전경

 

네바 강에서 폰탄 강을 가로지르는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를 건너면

표트르 대제의 여름 정원이 있고 그 옆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불꽃이 점화된 화성 필드(Mars Field)가 있다.

18세기 초 화성 필드 부지에 늪지대가 있었다. 
그 후, 이곳은 군사 리뷰의 장소로 바뀌었고 "볼쇼이 러그(Bolshoi Lug)"라고 불렸다. 
북부 전쟁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축하연와 축제가 열렸다. 
 
표트로 대제의 아내인 캐서린 1세의 궁전이 화성 필드(Mars Field) 근처에 세워졌고 
그에 인접한 영토는 "차리신(Tsaritsyn Lug)"로 알려지게 되었다.
1805년에야 화성을 상징하는 고대 전쟁의 신, 화성(Mars)를 
기리기 위해 마르스 필드(Mars Field)라 명명되었다.

 

1801년 화가 벤자민 페테르센이 그린 마르스 광장.

오른쪽에는 알렉산더 수보로프 기념비(A. V. Suvorov statue)가 있다. 
전경에서 마르스 광장(Mars Field) 왼쪽에는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가 있다. 
근처에는 니콜라이 루미안체프(Rumiantsev) 백작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있다. 
배경 오른쪽에는 여름 정원이 있다.

모스크바 주립대학 본관 건물을 지은 건축가로 잘 알려진 
레프 루드네프(Lev Vladimirovich Rudnev 1885~1956)는 마르스 광장을 건축하면서
1917~19년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Anatoly Vasilyevich Lunacharsky 1875~1933)의 
비문으로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2월 혁명 이후 마르스 광장(Mars Field)의 대규모 무덤

1917년의 2월 혁명이 진행 중일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혁명의 희생자들은 화성 필드 중앙에 엄숙하게 안장되었다.
나중에 남북 전쟁의 희생자들도 이곳에 묻혔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마르스 광장에 묻혔다. 
이후 볼셰비키가 이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이 광장의 이름을 "혁명 희생자의 광장"이라 명명하였다.

 

마르스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꺼지지 않는 불길.

1920년대에는 기념관 주변에 광장이 배치되었다. 
1957년, 화성 필드(Mars Field)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불꽃이 점화되어 켜진 첫 번째 장소가 되었다.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1917~19년 혁명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고대 러시아어로 즐거움의 들판이라 불렸던 이곳은 
1710년에 와서는 전쟁의 들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엘리자베스 여왕 때 현재 엔지니어 성이 있는 자리에 

궁전이 들어서고 나서 이 들판은 황후의 초원(Tsarina's Meadow)으로 불리게 되었다.

군사조직 형성에 있어서 굉장한 정열을 쏟았던 파울 1세는 
군사들의 퍼레이드와 훈련에 있어 이 광장을 활용하였다. 
그때부터 이 광장의 이름은 마르스 광장(Field of Mars)으로 굳어졌다.
그 후 1917년에 있었던 2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이 광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세워졌다. 
이 꺼지지 않는 불은 2월 혁명 당시 이름 없이 살해된 수 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다.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

 

화성 필드(Mars Field)에서 본 성혈성당 (피의 구원성당)

 

화성 필드(Mars Field) 옆 스완 그루브(Swan Groove) 운하에서 본 
로워 스완 브리지(Lower Swan Bridge)와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 카르피예브(Karpiev) 연못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북쪽)

1990년대 초부터 미하일롭스키 성은 러시아 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초상화 갤러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황후의 공식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
엔지니어링 성(Engineering castle)이라는 애칭이 있다.

 

화성 필드(Mars Field)에서 바라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과 화성 필드를 향한 중앙의 북쪽 외관은 

세르도볼(Serdobol) 화강암으로 만든 넓은 계단이 있는 테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북쪽 상공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18-19 세기에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표트르 1세(Paul I)의 주요 거주지로 지어져야 했다. 
폰탄카(Fontanka) 강과 모이카(Moika) 강이 합류하는 곳에 성을 건설하기로 한 것은
이곳이 표트르 대제 가족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모이카 강 유역을 따라 차르의 여름 정원이 뻗어 있고, 
여기에는 표트르 1세의  여름 궁전과 캐서린 1세의 황금 저택이 있었다.

1745년 이 지역에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황후의 제 3의 여름 궁전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미래의 황제인 파벨 페트로비치가 1754년에 태어났다.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뛰어난 러시아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Vasily Ivanovich Bazhenov)에 의해 12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표트르 대제가 직접 자신이 거주할 궁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전 건설은 표트르 대제가 왕좌에 오른 후에야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이곳을 미하일롭스키 궁전(Mikhailovsky Palace)이라고 명명했다.

 

헤라클레스(Hercules) 동상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북쪽 외관 입구에는 번영과 권력의 상징인 화강암 받침대에 
헤라클레스(Hercules)와 꽃의 여신이 된 클로리스(Chloris)의 동상이 있다.

 

꽃의 여신이 된 클로리스(Chloris)의 동상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남쪽)

1797년 2월 26일에 새 저택의 기초가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4년 동안 건설 작업의 진행 상황을 직접 모니터링했다. 
새로운 거주지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의 이름은 

표트르 대제의 애착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 성의 건축물이 그를 매료시켰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의 남쪽 주요 정면은 광장을 향하고 있다. 
궁전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모이카 강에 의해 씻겨진 섬의 북쪽 해안은 화강암으로 옷을 입었고 
대포가 설치된 두 개의 세미바스티언이 있었다. 
대포는 폰탄카 강변에도 설치되었다. 
운하는 서쪽과 남쪽에 만들어졌다. 

궁전의 계획은 둥근 모서리가 있는 정사각형이며 

그 중앙에는 팔면체 폐쇄 안뜰이 있다. 
주요 정면 측면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3중 돌다리가 있는 부활의 문이 표시되어 있다. 
황실 가족과 외국 대사만이 다리의 중앙 경간을 통과 할 수 있었다.

 

남동쪽 상공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오른쪽으로 폰탄카 강이 흐르고 뒷쪽에 여름 정원과 화성 필드(Mars Field), 
왼쪽으로 미하일로프스키 정원(Mikhaylovskiy Garden)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법령에 의해 "성(Castle)"이라는 단어는 

도시와 교외의 다른 거주지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겨울 궁전(Winter Palace)은 겨울 성(Winter Castle)이 되었다.
하늘 군대의 지도자인 대천사 미하일(Mikhail)의 이미지도 표트르 대제가 애용했고
표트르 대제는 미하일을 하늘의 후원자로 받아 들였다. 
대천사 마이클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이 정해졌다. 


그러나 거주지의 이름 만이 중세 성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Mikhailovsky Castle"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붉은 벽돌로 된 건물 하나만을 의미한다. 
표트르 대제 당시 이 문구는 웅장한 궁전과 

여름 공원 앙상블이었던 황실 거주지를 의미했다. 
그것은 네바 강에서 넵스키 대로 방향으로 폰탄카 강을 따라 
광대한 영토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 여름 정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Mikhailovsky 성 및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Connetable 광장의 전망. 
F. Alekseev. 1800. 주립 러시아 박물관 소장.

광장 중앙에는 1799년 3월 3일 표트르 1세의 법령에 따라 조각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osco Bartolomeo Rastrelli)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형상에 표트르 1세의 승마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서쪽)

서쪽 정면은 중앙 돌출부로 장식된 교회 건물이고 교회 종탑에는 첨탑이 있다. 
한때 꽃병과 조각품으로 장식된 반원형 계단은 교회 입구로 이어진다. 
문은 황제와 황후의 개인 거주 구역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안뜰로 이어진다.

 

서쪽 상공에서 본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이탈리아 출신의 조각가 바르톨로메오 카를로 라스트렐리(Bartolomeo Carlo Rastrelli)는 
1716년에 표트르 1세의 승마 동상 작업을 하기 위해 러시아에 왔다. 
고대 로마 조각품을 모델로 한 승마 기념비는 러시아 황제의 첫 주문이었다. 

1720년에 라스트렐리는 다른 버전의 승마 동상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실물 크기로 표트르 대제의 입상을 작업했다. 
1724년에 라스트렐리는 표트르 대제의 유명한 

초상화 흉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동상을 청동으로 주조하기 전

1725년 1월 28일에 사망했다. 
라스트렐리는 1734년 안나 이바노브나 (Anna Ivanovna)로부터 

모델 작업에 대한 대가를 받았지만 동상을 청동으로 주조하라는 명령은 

1743년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Elizabeth Petrovna) 황후에 의해 이루어졌다. 
1744년 ​​10월부터 11월까지 라스트렐리는 거대한 모델을 만들 수 있었다. 

그 후 조각상의 작업은 라스트렐리의 아들인 건축가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Bartolomeo Francesco Rastrelli)가 관리했다. 
조각상은 1747년 11월 알레산드로 마르텔리(Alessandro Martelli)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1755년까지 뛰어난 정밀도를 자랑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라스트렐리의 표현에 의하면 황제는 새로운 수도를 둘러보고 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놀랍도록 강력하다. 
그는 발에 로마 샌들을 신고 무릎 아래에 사자 반 마스크를 착용한 군용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는 구호의 외투가 달린 로브가 드리워져 있다. 
왼손에는 강한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에는 사령관 막대가 있다.
조각품의 높이는 4.6m, 받침대 높이는 6.2m이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안뜰에 있는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안뜰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영상]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 둘러보기

 

[참고영화] "Poor, Poor Pavel"의 스틸 
(V. Melnikov 감독, V. Sukhorukov 주연. 2003)

한글 자막 제공

 

 

 

[영상] 숙소 돔 부티크 호텔과 전쟁 박물관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위치 구글 사진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폰탄카(Fontanka) 강 입구 여름정원 건너편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에 있다.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룸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룸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욕실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로비 카운터

 

돔 부티크 호텔(Dom Boutique Hotel) 식당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 돔 부티크 호텔

폰탄카(Fontanka) 강 입구 여름 정원 건너편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에 위치한 돔 부티크 호텔 건너편은 전쟁 박물관 건물이다.

 

전쟁 박물관 (Gosudarstvennyy Memorial'nyy Muzey Oborony I Blokady Leningrada)

 

간구츠카야(Gangutskaya) 거리 돔 부티크 호텔과 건너편 전쟁 박물관

 

돔 부티크 호텔 입구 폰탄카 강과 화강암 제방에서 인증샷

 

폰탄카 강과 여름 정원 Coffee House

 

돔 부티크 호텔 입구 폰탄카 강과 화강암 제방에서 인증샷

 

폰탄카 강변 지방법원 (Leningradskiy Oblastnoy Sud) 건물

 

폰탄카 강 제방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네바(Neva) 강에서 본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와 지방법원 건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중 하나인 
프라체크니(Prachechny 세탁) 다리는 네바 강에서 폰탄카 강으로 흐르는 입구에 있다. 
이 지점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의 여름 궁전 옆에 바로 붙어 있다. 


1769년에 지어진 이 다리는 폰탄카(Fontanka) 강의 화강암 제방과 함께 지어졌다. 
화강암으로 지어진 이 다리는 아름다운 곡선 난간이 있는 3단 혹 등받이 구조로 되어 있다. 
"세탁(Prachechny) 다리"를 의미하는 이 이름은 한때 근처에 있던 궁전 세탁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 Most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에서 본 폰탄카(Fontanka) 강

 

폰탄카(Fontanka) 강과 여름 정원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 위에서 인증샷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 위에서 인증샷

 

폰탄카 강과 표트르 대제 여름 궁전(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네바 강변 여름 정원(Summer Garden)의 연철 울타리

 

네바 강과 트리니티 브리지(Trinity Bridge),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Peter and Paul Cathedral)

 

네바 강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네바 강을 배경으로 인증샷

 

네바 강에서 낚시하는 사람

 

네바 강

 

여름 정원과 세인트 마이클 성 및 화성 필드를 포함한 주변 랜드 마크의 파노라마

 

여름 정원과 화성(Mars) 필드

네바 강에서 폰탄 강을 가로지르는 프라체크니(Prachechny) 다리를 건너면 여름 정원이 있고
그 옆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불꽃이 점화된 화성(Mars) 필드가 있다.

18세기 초 화성 필드 부지에 늪지대가 있었다. 
그 후, 이곳은 군사 리뷰의 장소로 바뀌었고 "볼쇼이 러그(Bolshoi Lug)"라고 불렸다. 
북부 전쟁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축제가 열렸다. 
 
표트르 대제의 아내인 캐서린 1세의 궁전이 화성(Mars) 필드 근처에 세워졌고 
그에 인접한 영토는 "차리신(Tsaritsyn Lug)"로 알려지게 되었다.
1805년에야 화성을 상징하는 고대 전쟁의 신, 

마르스를 기리기 위해 화성(Mars)필드라 명명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의 희생자들은 화성 필드 중앙에 엄숙하게 묻혔고, 
나중에 남북 전쟁의 희생자들도 이곳에 묻혔다. 
1917~19년 혁명의 희생자를 위해 기념비가 세워졌고 
1920년대에는 기념관 주변에 광장이 배치되었다. 


1957년, 기념관은 건축가 SG Mayofis의 지시에 따라 재건되었으며, 
그 결과 화성(Mars) 필드는 러시아에서 영원한 불꽃이 켜진 첫 번째 장소가 되었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이곳에 묻혔다. 

 

스완 그루브(Swan Groove, Lebyazhiya Kanavka) 

여름 정원 경계선을 따라 네바(Neva) 강에서 모이카(Moyka) 강 사이를 흐르는 작은 습지 운하다.
1711~1719년에 여름 정원의 운하로 개조되었으며, 잠시 후 인공 연못의 백조가 이곳에 정착했고 
운하 이름은 백조 운하(Swan groove, Lebyazhiya kanavka)로 변경되었다.

 

스완 그루브(Swan Groove, Lebyazhiya Kanavka) 

1733년까지 4 개의 나무 다리가 건설되었고 둑은 나무 판자로 강화되었다. 
1799년에 건축가 필니 코프 (Pilnikov)는 여름 정원의 측면에서 

운하 오른쪽 둑에 석조 테라스를 지었다. 
1953~1956년에는 운하 바닥이 깊어지고 

화강암으로 장식되었으며 경사면은 잔디로 덮여 있었다.

 

[영상] 폰탄카(Fontanka) 강과 네바(Neva) 강

 

여름 정원(Summer Garden) 입구

여름 정원(Summer Garden)은 폰탄카(Fontanka) 섬과 모이카(Moika) 섬, 
백조 운하(Swan Groove)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이며, 

옆에는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이 있다. 


여름 정원은 1704년 표트르 대제가 네덜란드의 정원사이며 

의사인 니콜라스 비들루(Nicolaas Bidloo)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풍의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하였고, 
1712년에 정원 조성공사를 시작하여 거의 대부분이 1719 년에 완성되었다.

 

여름 정원(Summer Garden)의 연철 울타리 


네바(Neva) 강변에 있는 여름 정원(Summer Garden)의 연철 울타리는 

1773~1786년 건축가 유리 펠텐(Yury Felten)이 설계하고 

건설한 걸작으로 유명한 주철 난간 울타리이다.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여름 정원은 기하학적 원리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어

희귀한 꽃과 식물들을 식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유럽에서 들여온 새로운 대리석으로 분수와 조각을 만든 원조다.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입구에서 인증샷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입구에서 인증샷

 

여름 정원 (Summer Garden)  

 

정원은 아름다운 분수와 가로수길, 작은 궁전 등을 배치하여 

조각 정원 같은 분위기의 장소가 있고, 오래된 고목의 숲과 작은 폭포가 있는 개울, 

작은 호수가 어우러져 있는 매우 아름다운 정원이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지어진 최초의 궁전이자 수도관이 있는 도시 최초의 건물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영상]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이반 크릴로프(I. A. Krylovu) 기념비

이반 크릴로프(Ivan Andreevich Krylov 1769~1844)는 

러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우화 작가다.
극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그는 40세에 

자신의 진정한 장르를 발견하고 우화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반 크릴 로프(I. A. Krylovu) 기념비 기단 부분

기념비는 러시아의 조각가 피터 클로트 폰 위르겐스부르크
(Peter Clodt von Jürgensburg 1805~1867)의 작품이다.

 

이반 크릴 로프(I. A. Krylovu) 기념비 기단 부분 

 

문장(紋章) 분수 (Heraldic fountain)

 

문장(紋章) 분수 (Heraldic fountain)

 

여름 정원 역사 박물관

 

Tea House

 

Tea House

 

여름 정원

여름 정원은 표트르 시대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조각 모음이 있는 정원과 황제의 집이었던 이 화원은 하나의 박물관 단지를 구성한다. 

 

여름 정원

 

여름 정원의 아름다운 조각 작품들

 

여름 정원의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숲

 

여름 정원의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숲

 

여름 정원은 기하학적 원리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었고 

희귀한 꽃과 식물들이 많이 식재되어 있다.

 

여름 정원 숲 터널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여름 정원

 

여름 정원 카르피예브(Karpiev) 연못

 

여름 정원 카르피예브(Karpiev) 연못과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 풍경

 

여름 정원 반암 꽃병(Porphyry Vase)

 

[영상] 여름 정원 둘러보기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에서 시작해 
동쪽 네바 강변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에서 끝나는데,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상징적인 구간은 구 해군성이 있는 서쪽 끝에서부터 
보스타니야 광장 모스콥스키 역까지다.  

이 대로 근처에 운하들,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광지가 도보 이동권에 모두 모여 있어서  
관광객들도 이 대로를 중심으로 다니게 된다.

 

네바 강변 구(舊)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구(舊)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앞에서부터 직선으로 뻗어 있는 넵스키 대로

 

구(舊)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궁전 광장 구글 Earth 사진

 

공중에서 본 구 해군성과 네바 강

 

러시아 구 해군성과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러시아 구(舊) 해군성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은 

러시아 제국 해군 본부의 옛 사령부다.  
건축가인 안드레얀 자하로프(Andreyan Zakharov)가 설계를 맡았으며 

1806년부터 1823년까지 건설되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은 1805년 티치노 출신의 
신고전주의 건축가 루이지 루스카(Luigi Rusca 1762~1818)에 의해 설계되었다.
정원은 남쪽과 서쪽 외관을 따라 해군성과 궁전광장, 
네바 강으로 이어지고 동쪽에 성 이삭 성당이 있다.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해군본부는 표트르 대제의 해군 창설에 의해 1704년 11월 5일 건설되었다. 
1706년의 큰 홍수로 목조 건물이었던 이곳은 유실되고, 
지금의 석조 건물로 지워진 것은 1732~1738년 건축가 카로보프에 의해 만들어 졌다.

네프스키대로 쪽의 정문은 넓은 공원의 분수를 지나 서 있다. 
이 문의 높이는 72m로 위에는 망루와 뾰족한 모양의 황금탑으로 설계되었다. 
황금탑 밑부분에는 불, 물, 땅, 대기, 4계절, 4방향의 우주의 조화, 
그리스 신화의 문예,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 뮤즈 등을 비유한 

28개 조각품들이 4방향으로 서있다.

정면의 긴 건물은 1806~1823년 건축가 자하로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407m에 이른다. 
또한 이곳 네바 강 쪽의 후문은 궁전 다리와 길을 사이에 두고 

동궁의 측면과 맞대고, 앞에는 큰 닻이 놓여져 있다.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러시아 구 해군성 (舊海軍省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러시아 구 해군성 (Building of the Main Admiralty) 네바 강 쪽 입구

 

러시아 구 해군성 건물 앞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있고 
정원 내에 고골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극작가 고골 기념비(Monument Gogol)

 

시인 주코브스코무 (V. A. Zhukovskomu) 기념비

 

정치가 고르차코부(A. m. gorchakovu) 기념비

 

시인 레몬토브 (Mikhail Lermontov) 기념비

 

작곡가 글린카 (Michail Glinka) 기념비

 

탐험가 프르체벌스키 (Nikolay Przhevalsky) 기념비

 

궁전 광장에서 본 구 해군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위치 구글 지도

 

넵스키 대로는 서쪽 네바 강변 12번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서 시작해서 
동쪽 네바 강변 4번 구 해군성까지 4.5km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라브라(Alexander Nevsky Lavra)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수도원으로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1710∼1716년에 건립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1240년 북서 러시아에 침입한 스웨덴군(軍)을 격파한 
노브고로트 공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를 말한다. 
지금은 수도원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으나 내부에는 지금도 활동 중인 트로이츠키 교회가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수도원 내에는 11개의 교회가 있고 4개의 묘지 구역에는

러시아 문화를 꽃피게 했던 음악가 차이콥스키(Tchaikovsky),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무소르크스키(Mussorgsky),  
보로딘(Borodin)과 문학가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등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1800년대 초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수없이 많은 성당과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들이 있으나, 
그중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이 가장 크다. 
사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넵스키 대로 북쪽 끝에 있어 

우리나라 여행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1240년 러시아를 침공한 스웨덴군을 소수의 병력으로 
네바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노브고로드의 대공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를 말한다. 
표트르 대제 명에 의해 1710~1716년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가 
네바강 전투에서 대승한 그 자리에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건립에 따른 성인과 신의 가호를 구했던 곳이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동상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가는 길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프로사지 알렉산드라 넵스카바" 역에 내린면 된다.
알렉산드르 넵스카바 역을 나오면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이 나오고 
광장 중앙에 알렉산드르 넵스키 동상이 보인다.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Alexander Yaroslavich Nevsky 1220~1263)는 

류리크 왕조 출신으로 국민적 영웅이다. 
1220년 블라디미르에서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야로슬라프 2세 프세볼로도비치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족들과의 분쟁으로 잠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떠났지만, 

리보니아 독일 기사단의 침입을 걱정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1241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으로 다시 귀환한 후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에게 승리했다. 

이후 그는 침체기 루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숭배받기 시작했으며 
킵차크 한국의 칸에게서 공식적으로 노브고로드공의 지위를 받았고 
1252년부터 훗날 전 루스의 대공이라 불리게 되는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루스 공국들과 킵차크 한국 사이를 중재하였으며, 
1259년에는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1263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반카톨릭에 친몽골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국내의 정적들을 견제하는 데 몽골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1240년 네바 강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스웨덴군을 격파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가 남긴 업적은 루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국토를 잘 지켰다는 높은 공적 때문에 루스 민요에는 

그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또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받아들었다.

표트르 1세는 네바 강의 옛 전쟁터 부근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안장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넵스키 훈장을 제정하였다. 
1942년 소련 정부도 러시아 제국 정부의 전례에 따랐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외벽을 예쁜 수로가 둘러싸고 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입구 삼위일체 교회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은 1710~16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에는 11개의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와 4개의 공동묘지가 있다.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입구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입구에 들어서서 돌아 본 모습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내부 삼위일체 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내부 삼위일체 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수도원 내부에는 크고 작은 교회가 11개 있다.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내부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축복교회 내부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1918년 폐쇄되었고

교회 재산은 국가에 헌납되기도 했다고 한다. 

 

수도원 한곳에 11개의 교회가 있지만 각각 특성이 있고 건립 연대도 조금씩 다르다.

 

레닌과 스탈린 정권 시절엔 무신론자들 박물관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2차 대전 독일군 침공시는 병원으로 이용되었다.

 

<티 흐빈> 공동묘지

 

<티 흐빈> 공동묘지 

공동묘지는 모두 4곳이 설치되어 있으며 라사레브스코이 묘지(18~19세기),  
티 흐빈 공동 묘지(유명 예술, 문학가), 니콜스키 공동묘지, 코사크 묘지(공산주의자)등이 있는데  
그중에서<티 흐빈> 헤크로폴에는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옙스키 유명한 예술가들의 묘지가 있다. 

 

유명 인사 묘지 위치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M. Dostoevsky)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있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묘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 - 1881)는 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M. Dostoevsky) 묘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묘지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1840 - 1893)는 러시아의 작곡가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를 지내다가 40년간 창작에 전념하여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을 가져왔다. 
교향곡, 오페라, 발레곡 이외에 다수의 실내악곡, 협주곡 등을 남겼으며 
특히 발레곡 <백조의 호수>,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 등이 유명하다.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묘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묘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묘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Modest Mussorgsky, 1861 - 1918)는 러시아의 작곡가. 
여러 편의 피아노곡 ·교향곡 ·오페라 ·가곡 등을 작곡했고 러시아 고유의 선법과 대담한 화성, 
변칙적인 리듬 등을 구사해 근대 인상파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보르딘(Alexander Borodin) 묘지


알렉산더 보르딘 (Alexander Borodin,1833 ~1887)은 러시아의 음악가이며,
19세기 러시아 국민악파 작곡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알렉산더 아칸젤스키( Alexander Arkhangelsky) 묘지


알렉산더 아칸젤스키(Alexander Arkhangelsky,1846 - 1924)는 러시아의 음악가이며 
교회음악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알렉산더 다르고미시스키(Alexander Dargomyzhsky) 묘지


알렉산더 다르고미시스키 (Alexander Dargomyzhsky,1813~1869)는 
러시아의 음악가이며 전통을 이어받아 유럽 음악이 아닌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확립, 발전시키기 위해 활동했다 .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Alexander Yevstafyevich Martynov) 묘지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 (Alexander Yevstafyevich Martynov,1816–1860)는 

러시아의 배우이다.

 

아나톨리 리아도프( Anatoly Lyadov) 묘지

아나톨리 리야도브 (Anatoly Lyadov,1855 - 1914)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명한 러시아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한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자이다.

 

안톤 루빈시테인(Anton Rubinstein) 묘지

안톤 루빈시테인 (Anton Rubinstein,1829 - 1894)는 

러시아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며 음악교육가, 궁정악장을 지내고 

왕실 러시아 악우협회(樂友協會)를 설립하였다. .

 

미하일 글링카(Mikhail Glinka) 묘지

미하일 글링카 (Mikhail Glinka,1804 - 1857)는

러시아의 작곡가이고 국민 음악의 시조이다. 
스몰렌스크 현(縣)의 귀족 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1817년 페테르스부르크에 옮긴 후, 사범학교에서 6년간 수학했다.

  그동안 영국인으로서 유명한 작곡가 및 피아니스트인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2년부터 작곡했다. 


1830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순례하고 이탈리아 성악 작곡법을 연구, 
1834년 베를린에서 덴(1799~1858)에게 사사한 후, 특히 가극 작곡가가 될 사명을 깨달아, 
러시아 국민 가극 <황제에게 드린 목숨(1836)>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상연, 
다시 푸시킨에 의한 제2의 가극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에 성공했다. 
1844년 파리, 1845~47년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와 세빌랴에 체재, 

색채적인 관현악곡 외에 피아노곡ㆍ실내악곡ㆍ성악곡 등을 작곡했다.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묘지

밀리 발라키레프 (Mily Balakirev,1837 - 1910)는 러시아의 작곡가 · 피아니스트 · 지휘자다. 
작풍은 동양적 요소와 슬라브 지방색이 강한 낭만적인 개성적 경향을 띠고 있다. 
러시아 민요의 화성화(和聲化)도 중요한 공적으로 차이콥스키 등의 창작에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묘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1848 - 1919)는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이다.

 

바살리 바실리에비치 안드레이예프(Vasily Vasilievich Andreyev) 묘지
바실리 안드레예프(Vasily Vasilievich Andreyev,1861 - 1918)는 러시아의 음악가이다.

 

유리 유르예프(Yuri Yuryev) 묘지
유리 유르예프(Yuri Yuryev ,1872-1948)는 러시아의 배우이다.

 

티흐빈 18세기 인물들의 묘지. 

티흐빈 묘지(Tikhvin Cemetery)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에 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묘지로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의 유해가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티흐빈 묘지 (Tikhvin Cemetery)에는 차이코프스키와 루빈슈타인, 무조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도스토예프스키, 글린카 등의 묘지가 있다. 
라자로 묘지(Lazarus Cemetery)에는 스타로이, 쿠아렝히, 로시, 이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형성한 유명한 건축가들의 묘지가 있다.

 

키모프(Keimov) 묘지

 

더르(Dur) 묘지

 

탈하노바(Tarhanova) 묘지

 

밥킨(Botkin) 묘지

 

쿠인지(Kuindzy) 묘지

 

이바노프 묘지

 

코미사르체프스키(Kommissarzhevsky) 묘지

빅토르 코미사르제프스키(Viktor Grigorievich Komissarzhevsky 1912~1981)는 
러시아의 배우이자 연출가다.
1934년부터 배우로 프메료프 연구극장에 속하였고, 
1941년부터는 연출가로서 활동했다. 
엘모로바 극장 수석 연출가였으며 연극 평론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사모일로바-미쉐리나(samoilova-micherina), 사모일로바-막쉬바(samoilova-maksheeva) 묘지

 

키모프(Keimov) 묘지

 

리야도프 스키페트로프(Lyadov Skipetrov) 묘지

 

안드레프 레오노바(Andreev Leonova) 묘지

 

알렉산드르 코피로브( Alexander Kopylov)의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영상]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Aleksander Nevsky Monas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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