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Vincent Van Gogh.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 화가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 등 그의 작품 전부를 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 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그가 죽은 지 11년 후인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반 고흐는 흔히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 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반 고흐 그림을 보유하고 있다.

 

Room of Vincent Van Gogh.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Memories of the Garden at Etten (Ladies of Arles), 1888.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13.

 

이 작품은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Arles)에서 그렸지만 
그 동기는 부모님 집 정원이 있는 북부 고향과 관련이 있다. 
이 당시 반 고흐는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고갱 역시 반 고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이 작품은 고갱의 영향과 반 고흐가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와 함께 발전시킨 종합적인 상징주의 형식과 신인상주의와 

자포니즘(Japonisme) 그리고 심볼리즘(Pont Aven Symbolism)의 융합적 결과물이다.
당시 반 고흐와 고갱과의 예술적 교류에 대해 15년 뒤 고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내가 아를(Arles)에 당도했을 때, 반 고흐는 신인상주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문제에 봉착한듯 보였으며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화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참을성 없고 의존성 강한 성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반 고흐가 그린 보라색 위에 노란색을 입히는 것과 그의 서로 보완하는 색채의 비체계적인 형식은 
그저 단순한 모노톤의 부드러운 불완전한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뭔가가 빠져있었지요.
저는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은 고유의 특성을 나타내듯이 반 고흐는 두려움도 없었고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반 고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의 해바라기 작품들에서 빛을 발하였습니다."
- 폴 고갱

평론가들은 실제로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Arles)에 당도하여 함께 작품 활동을 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화충이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고갱이 오고나서 한동안 고갱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이 작품 'Etten 정원의 추억(Memory of the Garden at Etten)'은 
반 고흐가 고갱의 화풍을 의식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 고흐는 곧 사실주의로 돌아간다.
반 고흐는 당시 고갱의 회화 이론을 간단하게 

실험적으로 사용하였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고갱과 함께 있을 당시 그린 아를의 여인,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병에 걸려 있을 때 고향인 쥔데르트(Zundert)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보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그림의 배경은 반 고흐의 부모님이 머물던 네덜란드 에텐(Etten) 목사관이며, 
화면 앞 쪽에 그려진 두 여인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인 빌이다. 

고흐는 평생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그 쓰라린 외로움 속에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 냈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출발점에 고흐를 위치시키면서, 
'고흐 이후' 화가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예술의 목적'에서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독학자들이다. (…) 
예술의 전통이 아카데미즘으로 몰락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언어를 새로 창조해야 한다. 
오늘날의 화가는 저마다 이 새로운 언어를 A부터 Z까지 재창조할 권리가 있다." 

피카소가 고흐에게서 바라본 새로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술의 규범성'이 '예술의 창조성'보다 우위에 있던 시대의 종말이 아니었을까.
미술을 배워보겠다고 학교나 스승을 찾았을 때마다 '너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돼'라든가, 
'이 학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라는 식으로 악평을 들었던 고흐가 
인생을 걸고 지켜내야 했던 '자기다움'을 피카소 이후의 화가들은 비로소 
'새로운 창조성'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새로운 예술의 언어를 창조하는 독학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피카소의 내면에는 어떤 불안도 싹트고 있었다. 
기존의 모든 전통에서 벗어나 '나만의 새로움'을 만들어간다는 것, 
마침내 그것을 해낸 고흐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고흐 이전의 화가들은 어떤 아카데미에 속하거나 어떤 유파에 속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한 유파에 속하지 않거나 살롱이나 아카데미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 재능과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흐는 바로 이런 유파나 아카데미즘의 안정감과 소속감에서 해방됨으로써 
그림 속의 색채와 형태를 '자기만의 세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고흐의 이런 면이 그의 위대성이긴 하지만, 
이후 현대 화가들에게는 활동의 제약이 될 수도 있음을 간파했다. 

"화가에게 어떤 기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기존의 정해진 규칙들이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해방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해방은 화가에게 엄청난 제약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에도 의존할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의 상태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흐가 독학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고흐는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매우 희귀한 예술가였다는 점을 피카소가 간파했고, 
평생 규범화된 전통과 싸워 온 고흐를 바라보면서 후대의 예술가들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끊임없이 자기만의 새로움을 찾아내기 위해, 
화가는 자기 자신의 새로움과도 싸워야만 한다. 
방금 전에 창조한 새로움을, 이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새로움으로 격파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끝없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다. 
이것은 희열과 고통이 뒤섞인 창조의 모순적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예술가들에게 창조의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했다. 
전통은 더 이상 따라야만 할 규범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고흐는 자신이나 다른 화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광기'와 '비정상'으로 규정해버리는 사회와 
끝까지 싸웠고, 그것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고흐에게 있어 전통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파괴의 대상은 아니다. 
고흐의 새로움과 창조성 또한 '전통과의 대화와 소통, 교감과 분석'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끊임없이 렘브란트, 밀레, 

들라크루아 등의 화가들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했고, 

모네, 고갱, 피사로 등 동시대의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는다. 
고흐는 단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전통과 동시대성과의 적극적인 소통 속에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갔다.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철학을 통해 받은 영감도 
그의 창조성을 일구어가는 데 있어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셰익스피어, 디킨스, 공쿠르 형제, 졸라, 니체 등을 통해 고흐가 받은 영감은 
고흐의 편지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곤 한다. 
그는 전통 자체를 경계한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즘으로 축소되어버린 전통을 경계했던 것이다.

고흐의 새로움은 단지 기법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고흐의 진정한 새로움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참신함이었다. 
힘겨운 노동을 버텨낸 사람들의 하루를 상징하는 신발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농부들, 똑같이 반복되는 동작을 

몇 시간이고 묵묵히 해내는 직공들의 모습을 이토록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격상시킨 것도 고흐 이전에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특히 인물화의 대상이 주로 '화가들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후원자들 
또는 그 후원자들의 취향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델 중심이었던 
과거의 관습이 고흐로 인해 거침없이 파괴된 셈이다. 
그는 '그림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취향에 호소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평생 가난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화가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작품 유통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생각 또한 고흐의 창조적 아이디어 중 하나다. 

그는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샤를 푸리에의 공동체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가들도 서로 외따로 떨어져 홀로 고통 받기보다는 함께 모여 서로의 결핍을 보살피며 
'연대'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직접 실천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고흐는 주어진 환경 내부에서 제한된 새로움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상의 작동원리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완전한 새로움을 원했던 것이다.

 

Bush, 1889.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에 속하는 부시(Bush)는 
생 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에 입원한 5월에 그려졌다.
정신병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약동하는 봄을 싱그럽게 표현했다.
병원 정원에서 라일락 덤불을 묘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붓놀림과 진동하는 모양은 인상주의의 교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인상파의 그림은 그러한 공간의 역학을 알지 못했다. 

반 고흐는 강력한 활력과 극적인 표현으로 가득찬 덤불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주는 자연의 힘은 정원 식물의 파편에 구체화된다. 
인상주의를 거부한 반 고흐는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 
예술가의 낭만적이고 열정적이고 깊이 있는 세계관을 표현했다.

 

Huts,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59 X 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사망하기 직전 아우버스(Auvers)에서 그렸다. 
농부 오두막을 모티브로 한 작업은 반 고흐를 반복적으로 매료시킨다. 

“내 생각에 건축 분야에서 내가 아는 가장 놀라운 것은 
초라한 초가 지붕과 그을음 난로가 있는 오두막입니다.”
라고 반 고흐는 그의 편지 중 하나에서 썼다. 

초가 지붕은 언덕, 들판 및 하늘처럼 자연의 일부이다. 
실생활의 언덕이 많은 부조는 화가에게 
공간의 역동성을 드러내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긴장되고 부분적으로 물결 치는 선과 선은 
기복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색상 대비로 강화된 표현을 만든다. 
이 그림은 작가의 불안한 영혼, 그의 극적인 시야를 표현한 붓으로 만들어졌다.

 

Morning: Peasant Couple Going to Work,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고흐는 밀레와 동시대 화가이지만 밀레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자신의 색깔로 다시 그렸으며 
밀레의 그림 속 언어를 자신의 색채로 번역해 냈다."

그는 밀레의 <장 프랑수아 밀레의 삶과 예술>이란 책을 읽고 밀레의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밀레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밀레의 그림을 수없이 따라 그린 
고흐의 독특한 그림은 또 다른 감동을 주면서 밀레의 그림까지 돋보이게 한다. 

결혼한 농부 부부는 여유롭게 일상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들판을 가로 지르는 길을 따라 산책한다. 
바구니를 든 농부는 마른 체형의 당나귀 등에 앉아 가고, 

남편은 갈퀴를 어깨에 메고 뒤에서 걸어간다.

태양은 오랫동안 떨어지는 그림자의 밝고 푸르고 차가운 색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고, 
따뜻하고 옅은 노란색조는 들판과 인물의 얼굴을 채색한다. 
농부 여성의 잠겨 있는듯한 얼굴은 태양쪽으로 바로 향하게 된다. 
동적인 선은 파스텔과 결합하여 동시에 밝은 색상으로 사진을 빛, 대기 및 공기로 만든다.

 

 Spectators in the Arena at Arles, 1888.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그린 그림은 투우가 열렸던 고대 원형 극장을 묘사한다. 
투우 참가자가 있는 경기장은 거의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주요 "캐릭터"는 좋아하는 쇼를 위해 모인 청중, 잡색의 사람들이다. 
관중 중에는 다른 작품에서 그에 의해 묘사된 예술가의 지인이 있다. 

그림이 만들어지는 동안 고갱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작업하였다. 
이는 공간의 평탄화, 브러시 스트로크를 넓고 어두운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일반화된 색 반점으로 대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회화의 표현은 반 고흐의 강렬한 기질, 그의 극적 시선에 의해 주어진다. 
인상주의에 대한 열정에서 살아남은 반 고흐는 강렬한 예술적 언어를 만들었다.

아를로 간 반 고흐는 이상할 정도로 꼼꼼한 필촉(筆觸)과 

타는 듯한 색채로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전개시킨다.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통요시키는 것에 아주 적합했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반 고흐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반 고흐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외젠느 보쉬(Eugène Boch)의 초상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이 그림에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경탄을, 사랑을 담고 싶었어. 
머릿속으로 나는 무한한 것을 그렸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성취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진한과 인상적인 파랑색으로 간단하게 배경을 그렸어. 
그리고 이 간단한 구성을 퉁해서 빛나는 짙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금발의 머리는 
짙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수수께끼와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어. ”

후기에 제작된 오베르의 풍경화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흐른 하늘 아래 한 없이 넓은 밭이 있고, 

나는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지.”

 

The white House at Night,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59.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붉은색 지붕의 하얀 집 앞의 출입구에는 
이 집을 방문하려고 온 두 여인이 기다리고 있고 큰 길에는 여인 한명이 
무슨 보따리를 들고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1890년 6월 16일 빈센트 반 고흐가 말년에 지냈던 파리 근교 
오베르라는 곳에서 그린 것으로 밤 하늘에는 밝게 빛을 발산하고 있는 노란 별이 한개가 떠 있다. 

이 그림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 혼란기에 
독일의 나치 정부에 빼앗겨서 한동안 행방 불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95년이 되어서야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쟁 전리품 예술 전시회에 등장한 것이 고흐의 그림으로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천문학자들이 오베르의 오천 여 가구 중에 이 그림 속에 있는 하얀 집과 
똑같은 집을 찾아 내어 그 당시 그 위치에 떠 있었던 밝게 빛나는 별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역 추적해 본 결과 1890년 6월 16일 19시경에 
정확히 그림과 동일한 위치에 금성이 밝게 빛나고 있었음을 밝혀 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흐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우리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Portrait of Madame Trabuc, 1889. by Van Gogh. oil on canvas, 63.7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아를레지엔’ 이라는 단어는 반 고흐의 시대에는 훨씬 더 그랬을 것인데 

즉각적으로 조르주 비제가 1872년에 작곡하기도 했던 알퐁스 도데의 

마치 진짜 주인공이 운명 그 자체였던 것처럼, 보기드문 간결함으로 

사랑과 죽음을 그린 비극적인 이야기 <아를의 여인> 을 생각나게 한다.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를의 여인들은 종종 

도데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힘을 전달해 준다.

이 연작의 주인공은 카페 드 라가르의 주인이었던 지누 부인(1848~1911)으로, 
그녀는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강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영상] Vincent van GogH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411, 412번 홀에는 포스트 인상파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인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체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1848년 혁명이 한창이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하였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귀족의 사생아였고 그로 인해 페루와 인연이 있던 트리스탕은 

혁명 강연을 다니다 보르도에서 1844년 병사하였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다행이 페루에서 알린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알린과 식솔을 환대하였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1854년 후견자가 실각하자 알린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조부인 기욤 고갱이 살고 있는 오를레앙으로 갔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알린의 어머니와 배다른 귀족 형제인 트리스탕 모스코소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고 알린은 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알린은 파리에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고갱은 지역의 학교 두어 곳을 옮겨 다니다 명문으로 평가되던 
루아레의 라 사펠-상-메스밍에 있는 카톨릭계 신학 소학교로 편입하였다. 
고갱은 이 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 파리에 있는 해군 예비학교인 로리올 학원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고갱은 다시 오를레앙의 리시 잔 다르크 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구한 직업은 상선 해병을 위한 도선사였다. 
3년간 도선사 생활을 한 고갱은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하였다. 
1867년 7월 7일 어머니 알린이 사망하였으나 고갱은 누나 마리가 
인도까지 달려와 알려주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그 소식을 알지 못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직하였다. 
가족과 친한 지인이었던 구스타프 아로사가 마련해 준 자리로 취직 당시 고갱의 나이는 23세였다.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이 되어 11년을 근무하였다. 
1879년 고갱의 수입은 연간 3만 프랑으로 

2008년 기준으로 환산할 때 12만 5천 달러 정도가 된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고갱은 미술품 거래에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는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73년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1850년 – 1920년)와 결혼했다. 
이후 10년 동안 살면서 둘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4년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수포 판매를 했지만 실패했다. 
고갱은 덴마크어를 하지 못했고 덴마크 사람들은 프랑스제 방수포를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인 가드가 외교관을 위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떠안았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11년간 이어져 오던 중산층의 결혼 생활은 고갱이 전업 화가가 되면서 주저 앉았다. 
살림이 급격히 기울자 아내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하였고 고갱은 1885년 파리로 돌아갔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가드는 결별을 선언하였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종종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렸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이사했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계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채소밭>과 같은 그림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2년 동안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간간히 폴 세잔과도 작업하였다. 
1883년 10월 폴 고갱은 피사로에게 자신이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듬해 1월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했다. 

루앙은 파리보다 집값이 싸지만 멀지는 않아서 고갱은 여름이 오면 
피사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그해 말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끝났다. 
고갱은 1884년 11월 자신의 작품과 도구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곧이어 자신도 아내에게 갔다. 
이때 보낸 작품들 몇 점은 아직도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들의 코펜하겐 삶은 녹녹치 않았고 1년여 만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갔다. 

고갱은 6살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에서 메테가 키웠다.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겨울이 닥치자 고갱은 밑바닥 일들을 하며 혹독한 빈곤을 겪었다.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자 고갱은 누나 마리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다. 

1885년 한 해 동안 고갱은 몇 점 밖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1886년 8회차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 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하였다. 
이 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루앙이나 코펜하겐에서 그린 것으로 새로 작업한 것이라곤 
예전에 그렸던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위로 옷을 덧입힌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 브라크몽이 고갱의 작품 하나를 샀다. 
이 전시회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하였는데 
고갱은 쇠라의 신인상주의니 점묘법이니 하는 것을 경멸하였다. 
이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주선하고 쇠라를 초대한 피사로와 

의견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둘은 절교하였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 반도의 퐁타벤에서 보냈다. 
고갱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무엇보다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갱은 다혈질에 권투와 펜싱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퐁타벤의 화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찰스 라발로 고갱에게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다. 
이 여름에 고갱은 제8차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피사로 화풍의 
누드화를 찢어버리고 대신 <브르타뉴의 양치는 소녀>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당시 퐁타벤에는 영국의 랜돌프 칼데콧이 그린 삽화를 사용한 브르타뉴 여행 안내서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고갱은 이 안내서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화가들 처럼 자신의 작품도 보다 원색을 많이 쓰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브르타뉴 지역의 소녀를 소재로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때의 습작들은 나중에 파리로 돌아와 
<네 명의 브르타뉴 여성>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바탕이 되었다. 

고갱은 라발의 권유대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하였고, 
여행 뒤엔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커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과 함께 퐁타벤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내세우고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였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 화풍, 특히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렸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Miraculous Spring (Nave nave moe), 1894.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4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은 고갱이 폴리네시아를 처음 여행한 후 파리에서 만들어졌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는 원시적 자연성을 보존한 분위기로 고갱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은 타히티의 기억과 만물의 조화에 대한 낭만적인 꿈을 모두 구현했다. 
타히티 여성의 이미지는 삶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수면에 잠긴 그녀의 머리 위로 빛나는 젊은 섬사람은 처녀 순결의 화신이다. 
두 번째 소녀는 과일을 손에 들고 이브처럼 그와 함께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풍경의 깊숙한 곳에서 원주민들은 신비한 고대 신인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춘다. 

고갱은 타히티 (1891-1893)에 처음 머무르고 돌아와 거의 2년 동안 파리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는 원시적 단순함의 보존으로 보았던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 작가의 상상력을 포착했다. 
이 작품은 타히티에 대한 그의 기억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조화에 대한 그의 낭만적인 꿈을 담고 있다. 

타히티 소녀들은 삶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머리 위에 후광이 있는 젊은 섬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진 처녀 순결의 화신이며, 
손에 과일을 들고 있는 두 번째 소녀는 이브와 같다. 
풍경 깊은 곳에서 섬 주민들은 신비한 고대 신인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캔버스는 선과 같이 하나의 리듬에 종속된 일반화된 평면 영역에 
순수한 색상을 적용하여 작가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보여준다.

 

Tahitian Pastorals,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87.5 X 11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타히티 섬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은 자연스러운 "원시적" 삶의 짧은 서사시를 구현한다. 
이 세계의 조화를 찾아 고갱은 폴리네시아로 갔다. 
이국적인 자연의 인상, 섬 주민들의 독특한 외모, 자연의 은혜, 
신비한 신념과 관습이 결합된 낭만적 인 꿈, 타히티 소녀 중 한 명이 플루트를 연주한다. 
원주민들은 이 음악을 달의 여신인 히나에게 바쳤다. 
그림은 히나를 기리기 위한 의식 춤과 음악의 시간이 일몰과 함께 시작된 저녁 시간을 묘사한다. 

 

Tapera mahana (Late Afternoon), 1892. oil on canvas, 72.3 X 9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빈센트 반 고흐가 이십 대를 훌쩍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면 
그의 절친한 친구 고갱은 한술 더 떠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 전에 증권 브로커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지망생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컬렉터가 되기도 했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고는 수준급의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직업을 그만두고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가뜩이나 고갱은 이미 삼십 대를 훌쩍 넘긴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고갱은 결국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갔고, 작품 활동도 아마추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그림을 찾는 컬렉터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절망감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Conversation (Les Parau Parau), 1891.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0.3 x 7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고, 고갱은 유럽과는 다르고 
자연의 조화를 보존한 세계에 대해 낭만적인 인상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에 작가가 붙인 제목은 섬 주민들의 언어에서 "험담" 혹은 "흉보기"으로 번역된다. 
원 안에 앉아 있는 여성들은 대화에 참여하지만 줄거리의 일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의 느낌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갱은 끊임없는 삶의 흐름과 함께 영원한 세계의 
이미지를 창조하는만큼 구체적인 현실을 그리지 않는다. 
인상주의 시대를 거친 고갱은 이 방식을 떠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선의 리듬을 사용하고 공간을 단순화하여 
색상 반점의 음질 조합을 만들어 강조된 장식성에 도달한다.

 

At the foot of the mountain,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 x 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 '산 기슭에서(At the foot of the mountain)'는 낭만적인 이국주의와 
자연의 조화로 고갱을 매료시킨 폴리네시아 타히티 섬에서 그려졌다. 
이 풍경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된 산기슭의 큰 나무는 고갱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 

 

Still Life with Mig and Carafe, 188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54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정물에서 사물의 조합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형식적인 병치의 논리뿐만 아니라 
주제별 고려 사항에서도 나온 것 같다. 
예를 들어 중앙의 레몬은 전체 구성이 걸려 있는 밝은 점이지만 
테이블의 다른 항목과 마찬가지로 그 로그를 준비하는데도 필요하다. 
따라서 레몬 옆에는 매우 강한 와인 한 병, 각설탕, 
뜨거운 물 잔, 혼합용 숟가락 및 큰 머그잔이 있다. 

고갱은 정교하게 조각된 병과 가장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머그잔이라는 
아이러니 한 메모와 함께 두 개의 물체를 나란히 배치했다. 
현재의 정물은 빛을 재현하는 인상파의 관심뿐만 아니라 강한 구성으로도 유명하다.

 

Woman holding a fetus (Eu haere ia oe),1893,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 역시 고갱이 타히티에 머물던 시대에 속한다. 
유럽과는 달리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국적인 세계에서 오세아니아의 밝은 색과 
무성한 초목의 인상, 타히티인들의 모습과 삶 등은 화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섬 주민들의 삶의 평범한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삶의 영원한 리듬, 인간과 자연의 조화의 구체화를 본다. 

손에 과일을 들고 전경에 서 있는 타히티 여인은 이 토착 낙원의 이브이다. 
전통적인 회화의 규칙을 버리고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공간의 평탄함, 선, 모양 및 색 반점의 리드미컬 한 반복, 
큰 배열로 놓인 순수한 페인트는 장식 효과를 증가시킨다.

 

Month of Mary (Te avae no Maria),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6 X 7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타히티 섬에서 일어난 고갱의 생애 말년에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다. 
작품의 주요 주제는 봄 자연의 개화이다. 
기독교 이전의 유럽에서는 5월 초에 깨어남을 위한 이교도 명절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5월 예배는 성모 마리아 숭배와 관련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와 고대 동양 문화에 대한 작가의 인상에서 탄생한 
삶의 자연스러운 리듬은 선과 색의 조화로 캔버스에 구현된다. 
노란색은 동양 미술에서 특히 중요하다. 
여성의 포즈는 자바 섬에 있는 사원 부조의 모습을 닮았고, 
그녀의 흰 가운은 기독교인과 타히티인 모두에게 순결의 상징이다. 
다양한 종교적 사상과 신념을 결합한 작가의 상상력은 원시적 삶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Pie (Te vaa),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5.5 X 1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폴리네시아에서 제작된 이 그림은 섬 주민들의 가족을 묘사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퓌뷔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의 
"가난한 어부(Poor Fisherman)"의 그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갱의 낭만적인 상상력은 타히티의 인상뿐만 아니라 
고대 문화의 기념물인 다른 거장들의 작품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원주민의 포즈는 고대 이집트 그림의 인물인 
어깨의 정면 이미지와 다리의 프로필 이미지와 비슷하다. 
코코넛 껍질에서 마시는 타히티 인의 몸짓은 의식적인 성격을 띤다. 
불행히도 그림의 색상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었으며 
이로인해 색상이 어느 정도 원래의 사운드를 잃었다.

 

Scene from the life of the Tahitians,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89 X 12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는데, 그곳에서 고갱은 깨끗한 세계에 대한 꿈을 이끌었다. 
섬 주민들의 삶의 에피소드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참가자들이 이미지 외부에 남아 있는 일종의 종교적 행동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저녁 시간은 신성한 의식을 위한 시간이다.  

원주민의 고대 숭배를 연구한 작가는 종종 마오리족의 
신념과 관련된 모티프와 상징을 그의 작품에 도입했다. 
일부 캐릭터의 포즈는 파르테논 프리즈의 인물과 비슷하다. 
고대 문화의 공통성을 감지한 주인은 이집트와 골동품 기념물로 눈을 돌렸다. 
고갱은 원래의 자연 생활의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했다. 
소리가 나는 색상의 일반화된 반점, 공간의 평평함, 
선의 리드미컬한 반복은 탁월한 장식 효과를 만든다.

 

Baby (Christmas),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7 X 7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없는 순수함 속에는 꿈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빈센트 반 고흐의 초대로 아를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버려, 재차 순수함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Hiva Oa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는 세잔 · 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Landscape with two goats (Tarari Maruru), 1897.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고갱의 생애 마지막 몇 년 전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다. 
작품의 주제는 아마도 타히티인들의 종교적 신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주민의 관습, 생활 및 신념은 자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영원한 리듬을 따른다. 
전통적인 표현 수단을 포기한 고갱은 이국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개별 스타일을 개발했다. 
어두운 색은 수수께끼의 작품을 제공한다. 
자연 그대로의 오세아니아는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약속된 땅"의 의인화가 되었다. 

 

Idol, 1898.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3.5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타히티 섬에 그려진 우상(Idol)은 신비한 이국적인 세계를 묘사한다. 
아이돌은 유기적인 부분으로 문명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삶의 구체적이고도 신비한 생물처럼 동상이 아니다. 
그림의 실루엣은 나무 줄기의 긴장된 곡선에 반영된다. 
우울한 색상은 기분의 불안을 증가시킨다. 
이 아이돌의 이미지는 고갱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우상은 섬 주민들이 숭배한 폴리네시아의 달의 여신 히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생물에는 자연의 힘이 구체화되어 생성하고 죽인다. 
고갱은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삶에 대한 낭만적인 꿈에 따라 폴리네시아로 옮겨졌다. 
아이돌은 이 삶의 흥미진진한 신비 중 하나의 구체화이다.

 

Women by the sea (motherhood),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5.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 바다의 여성 (모성)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의 생애 말년에 그렸다. 
생명이 자연의 흐름을 보존하는 이국적인 오세아니아 세계에서 고갱은 유럽 문명을 떠난다. 
모성이라는 주제는 마스터 작업의 폴리네시아 시대에 두 번 이상 발생했다. 
이 작품의 등장은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다. 

타히티인으로 고갱의 사랑을 받는 파후라는 1899년 아들을 낳았다. 
실제 장면은 신성한 의식의 특징을 취한다. 
이 구성은 유럽 종교 그림에서 전통적으로 아기를 숭배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접힌 손에 꽃을 든 여성의 중심 인물이 특히 중요해 보인다. 
장식 효과는 리드미컬하게 구성된 색상 배열과 
고갱의 개별 스타일의 특징인 윤곽선의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Three Tahitian women on a yellow background,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8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노란색 바탕에 세 타히티 여성(Three Tahitian women on a yellow background)은 
고갱의 생애 말년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다. 
타히티와 고대 문화의 인상을 결합한 작가의 상상력은 
이국적인 세계의 신비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항상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작품은 미해결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색 반점과 리드미컬한 선의 조화를 이루는 장식적인 그림이다. 
여성의 포즈-특별한 우아함과 가소성, 원주민 여성의 중심은 
자바 섬의 보로부두르 사원 부조에 묘사된 그림과 유사하다. 
"야만인"의 세계는 문명화된 유럽이 잃어버린 자연의 조화를 보존한다.

 

Sunflowers, 1901.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해바라기(Sunflowers)는 고갱이 그의 생애 말년에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다. 
그 주제는 태양의 상징인 해바라기의 모티브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반 고흐의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에 두 예술가는 아를(Arles)에서 작업했으며 반 고흐(Van Gogh)는 해바라기로 정물을 그렸다. 
고갱은 프랑스에서 그에게 보낸 씨앗을 오세아니아에서 재배했다. 
배경의 꽃 중앙에 펼쳐지는 눈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는 눈"과 유사하다. 

 

Two sisters,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0.5 X 6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두 명의 타히티 소녀인 자매는 고갱의 가장 훌륭한 아이들 이미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어린 딸에 대한 기억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신비한 배경은 어린이 피규어의 단순한 실루엣과 대조를 이룬다. 
고상한 단순함은 어린 시절 특유의 섬세함과 결합된다. 

 

Bouquet, 1884.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5.3 X 5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Man Picking Fruit from a Tree, 1897.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영상] Paul Gaugu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가는 서부 Piedmont에 있는 Cesana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들의 성 세잔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에 있는 액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1839년 2월 22일에는 그의 할머니를 대모로, 
삼촌인 Louis를 대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아우구스테 세잔(Louis-Auguste Cézanne 1798~1886)은 
한 은행의 공동창업자였는데, 이 은행은 폴 세잔이 살아있는 동안 번영하여 
폴의 경쟁자들에겐 불가능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폴은 큰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매일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매리(Marie)와 로즈(Rose), 두 여동생이 있었다. 
폴이 열살이 되던 해에 그는 Aix에 있는 성 요셉 학교에 입학했다. 
1852년, 그보다 낮은 학년에 있던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Baptistin Baille를 만났던 
Collège bourbon(지금은 Collège Mignet)에 입학했다. 

1861년, 폴 세잔은 그의 미술적 발전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을 버리고 아약스를 떠나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된다. 
처음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피사로는 세잔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Louveciennes와 Pontoise에서 10년이 넘게 함께 풍경화를 그리면서 
둘의 관계는 합작하는 평등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Jas de Bouffan, the Pool, 자 드 부팡의 수영장, 1876.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1 x 5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특히 상상으로 그려진 중후하고 큰 풍경화도 있었다. 
나중 그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숙된 작품들에서는 거의 건축에 가까운 굳어진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Girl at the Piano (Tannhäuser Overture), 186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2.5 x 5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많은 예술가들이 바그너의 위대한 오페라 작품의 서사적이며, 정신적이고 회화적인 암시에 
전율했지만 가장 열정적이고 원칙주의자였던 화가는 세잔과 반 고흐였다. 
세잔은 바그너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같은 주제로 세 편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 중 마지막 작품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1868년 파리에 간 세잔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서곡뿐 아니라 <탄호이저>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 한달 후 세잔은 액상프로방스로 돌아와 다시 이젤 앞에 섰다.

긴긴 밤에 바느질하는 엄마와 피아노 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어느 시골 가정의 모습은 
그 설명적인 제목으로 인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직선적인 구도와 충돌하며, 벽과 의자 주위에서 불안정한 기운을 조성하는, 
시각적으로 다소 산란스러운 문양에서 감성적인 교류를 포착할 수 있다. 
세잔은 친구에게 자신을 위해 연주해 줄 것을 부탁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으로 청각 신경을 자극시켜 달라' 고 말했다.

 

Flowers in a Blue Vase, 1873.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 x 5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이 작품은 세잔이 인상주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기에 그려졌다. 
세잔의 그림은 60년대의 그림에 비해 더 가벼워졌다. 
작업은 빛의 반사와 진동을 전달하고, 질감은 뛰어난 이동성을 획득했다. 
동시에 형태의 명확성과 회화의 밀도는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한 세잔은 그들의 친구였다. 
그러나 인상파 시대의 작품에서 이미 드러난 세계에 대한 다른 비전은 
세잔을 친구들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미래에 그는 그의 "고전적인" 태도에 의해 결정된 길을 따랐다.

 

Self-portrait in a cap 모자를 쓴 자화상, 1872.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9.7 x 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이 그림은 폴 세잔이 인상파, 특히 피사로(Pissarro)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려졌다. 
작품의 구성은 피사로의 자화상 (Musée d' Orsay, Paris)과 비슷하다. 
인상주의와 함께 캔버스는 자유 획과 관련이 있으며 

조명 효과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글씨의 스케치 성과 윤곽선의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형식은 더 큰 확실성과 밀도를 유지한다. 
세잔은 그의 외모의 특징인 그의 나이보다 나이가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수염뿐만 아니라 세잔이 끊임없이 경험한 내면의 긴장과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평생동안 그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간단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는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 

라고 말한 것과, 그가 Poussin의 “After Nature”를 재구성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통합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조했다.

1852년 세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가난하고 병약한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가 곧 훗날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 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와의 관계는 그가 대표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 네 번째 소설 
〈작품(L'oeuvre)〉 속에 등장시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의 모델이 
세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국을 맞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상황이 세잔 본인과 비슷했고 다른 등장 인물들 또한 
졸라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과 유사했기에 세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졸라가 보내준 소설을 읽은 세잔은 1886년 4월 그에게 "이렇게 훌륭히 추억을 담아주어 감사하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30여년의 우정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잔은 졸라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과 갈등은 훗날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 Cezanne and I, 2015)>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각의 진실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세잔의 욕망은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생생하게, 혹은 살짝 다르게 해석하여 
관객이 이전의 이상적인 관점과는 다른 심미적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잔의 혁신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다양한 설명들을 병든 망막, 맑은 시각, 
그리고 증기 기관차의 영향이라고 평가하게 만들기도 했다.

 

Bank of the marne, 188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1.3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나무로 둘러싸인 전용 센터가 있는 그림의 구성은 닫혀 있고 안정적이다. 
물체의 모양에 배치된 스트로크는 단순한 기하학적 몸체에 접근하는 일반화된 볼륨을 조각한다. 
색상의 색조는 나무의 녹색과 공기의 파란색에 의해 결정되며 작가의 의지로 압축된다. 
세잔이 밝힌 물질 세계 구조의 명확성은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Smoker, 1890~1892.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3.5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종종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자세의 인물은 그에게 더 이상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도움으로 캔버스에 관심 있는 문제의 컬러 솔루션을 전달할 수 있었다.

흡연자(Smoker)에 묘사된 농민의 모습은 차분하고 확고한 성격, 전체적인 특징이 부여된다. 
작가가 결코 사람의 개별적인 특성을 전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인물의 사회적 또는 심리적 초상화를 그려 내려고 했지만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은 사회의 상황에 관계없이 거의 기념비적이다.

흡연자의 눈 대신 페인트의 어두운 점만 있지만 구성이 
일상 생활과 사소한 소란에서 분리되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흡연자(Smoker)의 등 뒤에는 세잔의 병과 사과가 있는 정물이 보인다. 
"무엇보다도-나는 관습을 어기지 않고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Big pine near Aix, 1895~1897.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1 x 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인상주의가 포착하려고 했던 것은 ‘순간적 인상’이었다.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빛과 이 빛이 빚어내는 불규칙한 색채에 의해 
사물의 윤곽은 깨지고, 형태는 해체된다. 
빛으로 채색된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은 회화사의 빛나는 순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 전시가 있은 지 불과 10년 후, 르느와르는 인상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토로하며 
고전주의 거장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갔고, 피사로는 과학을 통해 
인상주의 화면의 허약함을 넘어가려 했던 신인상주의에 주목했다.

그리고 세잔은 인상주의 화면에 ‘솜방망이’ 같은 비전 대신 
“박물관에 있는 미술처럼 단단하고 지속적인” 것을 집어넣고 싶어했다. 
‘경이적인 눈’을 가진 모네의 그림에 단단한 골격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생트-빅트와르로 향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좋은 참고서입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다양한 그림이야말로 실재하면서도 경탄을 금치 못할 연구 대상입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다시 고전주의에 이르고자 했다.

투시도법에 의해 구축된 전통적 회화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변화를 제거한다. 
이 경우 회화 평면은 하나의 점 (소실점)을 중심으로 질서화됨으로써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통제하며, 회화의 모든 요소는 대상과 공간에 종속된다. 
이와 반대로 인상주의의 캔버스는 모든 것이 변화인, 변화가 모든 것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빛과 대상은 해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화면은 해방되는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는 잔상(殘像)들, 흔적들의 무덤이 되었다. 

세잔은 이 모두를 넘어선다. 그에게 자연은 우선적으로 ‘진동’이며 ‘흐름’이다. 
그러나 진동은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순간들이 아니라, 
순간 속에 새겨지는 우주적 힘이자 동일성을 생산하는 차이의 장(場)이다.
그러나 이런 진동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화가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과 견해들에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관습과 제도가 양산하는 온갖 클리셰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세계를 감각하는 ‘민감한 판’이 되어야 한다. 
세계의 삶 속에서 순간이 지나간다. 
화가는 모든 것을 망각한 채 ‘바로 그 순간’이 되어야만 클리셰가 아닌 리얼리티를 그릴 수 있다.

 

Still life with drapery, 1895.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4.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커튼이 있는 정물화(Still life with drapery)는 정물 장르에서 세잔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옛 거장들과 달리 세잔은 사물의 질감을 전달하지 않는다. 
경쾌한 색상으로 표현되어 전체 구성의 역동성과 긴장감을 갖게 한다. 
동시에 그림은 형태와 색상의 균형으로 물질 세계의 무결성과 안정성을 갖게 한다. 

화가 ‘ 모리스 드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는 바로 ‘폴 세잔’의 사과라고 말했다. 
서구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의 사과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세잔의 사과이다. 


세 가지의 사과 중 첫 번째 사과는 이브의 사과다. 
이는 유럽 사회를 지탱하는 힘,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로 합리적 사상과 과학적 사고방식의 근원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은 바로 세잔의 사과인데 세잔은 고흐처럼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사과는 과거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미술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개척한 사과로 유명하다. 

 

Still Life with Apples, 189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5.2 x 4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사과가 왜 유명한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원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재력으로 아들을 마음껏 공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세잔이 법과대학을 가기를 원했다.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법 공부는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본 세잔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1861년 세잔은 법 공부를 그만두고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 ‘아카데미 쉬스’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세잔은 그곳에서 일생의 친구인 ‘카미유 피사로’와 ‘아르망 기요맹’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랑스 유일의 국립 미술 학교인 ‘에꼴 드 보자르’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여 다시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가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된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년 뒤 
은행 일을 그만두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 그림에 몰두하였다.

피사로, 기요맹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1863년부터 1866년까지 꾸준히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바로 낙선전에 참여하였으나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유명세를 탄 ‘ 에두아르 마네’를 
친구 소개로 만나게 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그림에서는 유화물감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와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감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했고 
세잔은 그런 새로운 기법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형태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늘 아쉬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해가 지기 전, 즉 빛의 양이 변하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려 했고, 
그러다 보면 유화물감의 성질상 짧은 터치로만 붓질을 하게 되어 
외곽선과 깔끔한 면은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은 항상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보면 그는 붓 터치로만 해가 뜨는 파리의 풍경을 
표현하려 했고, 결국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세잔은 빛에 대한 색의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깊게 교류하지는 못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작업실을 차리고 그 변하지 않는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Still Life Peaches and Pears, 1888~189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2 x 5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유독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모델이 고정된 포즈를 
오랫동안 취해야 하는 인물화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경화와 달리 
정물은 시간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물은 내가 마음대로 위치를 바꿔도 괜찮은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다.

세잔이 그린 사과가 우리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곽선도 그림자도 진하게 그리지 않았다. 
세잔 이전의 사과는 붉은 색채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빛과 그림자, 반사광 등을 넣어 
사과처럼 보이게 하는 정해진 방법으로 그렸다. 

그러나 세잔은 사과를 입체적이고 둥글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순색으로 붓질을 하였다. 
붓질의 방향이나 터치로 생긴 자연스러운 반짝거림으로, 
보는 사람이 더 직관적으로 사과라고 느낄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사과라는 ‘구’(동그라미) 형태를 짧은 터치가 아닌 
면과 붓질로 더욱 구처럼 보이도록 풀어내려 한 것이다.

세잔의 그림에서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보로 가려져 얼핏 보면 모를 수 있지만 사과가 놓인 탁자의 왼쪽 부분과 
오른쪽 부분의 높낮이가 맞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원근법이나 시선의 높낮이 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세잔은 하나의 완성된 그림에서 여러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데 
대상이 가장 그 대상같이 보이는 시점으로 서로를 조립하는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접시는 보다 접시다워 보이는 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생강 단지는 
속이 빈 둥근 항아리 본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으로 그려내는 것. 
즉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성질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그림에서 고정된 시점이 아닌 다시점으로 형태의 본질을 
색으로 표현하려 했던 세잔의 시도는 당시에는 인정받기 힘들었지만 그의 사후,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세잔의 위대함과 존재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Apples, Peaches, Pears and Grapes, 1879~188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순수한 색 면으로 대상의 형태를 견고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동시대 화가 ‘고갱’을 거쳐 야수주의 ‘마티스’에게,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형태와 각각의 대상들이 보여주는 다시점은 
입체주의 ‘브라크’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 

 

Mont Sainte-Victoire. 1896~189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9 x 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이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 후 
얼마동안 체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 
이 이동은 파리 중심적이던 인상파들이 세잔의 고향이 있는 
남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호텐스(Hortense)의 형제 중 에스타크(Estaque)에 
생트-빅투아르 산(Montagne Sainte-Victoire)이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880~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1888년 가단느(Gardanne)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The Constructive Period)라고 불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세잔의 가족들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세잔은 호텐스(Hortense)와 결혼하였다.

이 해에, 또한 세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잔에게 

1859년에 산 사유지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8년에 가족은 편리를 제공하는 넓은 땅이 있는 대저택 Jas de Bouffan으로 옮겼다. 
이 저택은 현재 땅이 줄어들었지만 시 소유로 공공을 위해서 개방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세잔의 친구이던 에밀 졸라(Émile Zola)와의 친분도 깨어졌다.

 

Mount Sainte-Victoire, 1897~189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10. 

 

세잔은 말한다.
"나는 그 산에 때때로 올라가보곤 했다. 
팔레스트로에서부터 벌써 숲이 나타난다. 벌써 공간의 시작이다.
산타크루스로 인도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들은 벌써 

어떤 위대한 정적이 심신을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도시 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란을 피운 뒤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애써 나는 쾌락으로 들떠서 빠르게 뛰는 가슴의 고동소리며 숲의 넓고 깊은 호흡을 듣는다.
이처럼 음악도 때로는 '스타카토'로부터 '레가토'로 과도기의 과정없이 뛰어넘는 수가 있다.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곡식단처럼 묶여있다가 이 지점에 오면 매듭이 풀려 기쁘게 개화(開花)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순간만을 살도록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Bathers, 1890~189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54.2 x 6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작품 Bathers는 유럽 예술의 유서 깊은 전통을 이어 갔지만 
동시에 화단의 학문적 누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Bathers는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현한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Arc River에서 수영을 즐기는 시골로 갔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잔은 관습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원시적"인 그림처럼 "어색하게" 되었다. 
현재의 그림을 포함한 그의 그림은 역동적인 세계가 살아남을 수 없는 
견고함을 표현하는 단단한 피라미드 구조이다.

 

Self Portrait 자화상, 1880~188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55.5 x 4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어느날, 세잔은 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폭풍에 갇히고 말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2시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잔은 지나가던 마차에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늙은 집사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원래 혈색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러 나갔으나 얼마 후에 다시 쓰러졌다. 
그와 함께 일하던 모델이 도움을 요청하여 침대로 돌아왔지만 세잔은 이후로 일어나지 못했다. 
몇일 뒤, 1906년 10월 22일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렴이었으며, 그의 고향 Aix-en-Province에 있는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Blue landscape 푸른 풍경, 1904~1906.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2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풍경은 인상파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티브로, 물 속의 진동하는 반사는 보이는 세계의 다양성을 상징한다. 
세잔의 작품에서 반사는 움직이지 않고 물은 얼어 붙은 거울과 비슷하다. 
인상파와는 다른 세계관은 예술가를 그들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세잔은 자연에서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Houses Along a Road (Maisons au bord d'une route) 길가의 주택들, 188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6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도로가 회전하는 모티브는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초에 
세잔의 그림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인상을 표현적이고 간단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림을 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도로는 작업 내에서 다양한 평면을 연결한다. 
도로의 굴곡은 세잔에게 자신을 전경과 중간 지대로 제한하는 편리한 방법을 제공했다. 
풍경에는 사람이 없지만 인간 활동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 
통로를 따라 있는 작은 집과 돌담은 사람들이 이 벽 뒤에 남겨진 느낌을 준다.

 

Lady in blue, 190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3.5 x 9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마지막 여성 초상화 중 하나인 이 작품의 모델은 브레몽 부인(Madame Brémond)이다. 
작품의 색조, 모양 및 색상에서 포비즘과 입체파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영상] Paul Cézanne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407 ~ 408번 홀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출난 표현을 선보였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에 대비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 것은 르누아르이다. 
세잔이 풍경 속에 자연의 정신을 품듯이 르누아르는 여인을 그려서 미의 도취를 자아내고 있다.

르느와르는 1841년 2월 25일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4살에 파리로 이사와 7살에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난이 더 심해져 더 이상 르느와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13살의 그를 학교에서 데려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보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자기의 윗그림 그리기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이 훈련소를 다녔는데, 낮에는 이 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료로하는 드로잉 수업에 가곤 했다. 
르느와르는 그 때부터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애칭이 루벤스였다는 것과 
그를 제자로 삼겠다고 자청했던 이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그의 부모님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싶었지만, 
당시 화가라는 직업이 가난으로 직통하는 확실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는 결국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가 되던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화가가 되기로 그와 그의 가족이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살 수도, 모델을 살 수도 없었고, 
먹을 것을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Lady in black,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5.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블랙 레이디 (Lady in black) 초상화는 '르누아르 형' 여성의 서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자연스러운 조화와 여성스러움을 사로 잡는다. 
인상파의 전성기에 그려진 이 작품은 주로 검은 드레스 이미지에서 복잡한 색상 뉘앙스를 보여준다. 
가벼운 공기 환경의 영향으로 음영이 변하는 검은 색은 넓은 범위에 걸쳐 다채로운 비율로 전달된다.
흰색 커프스와 칼라의 색상 반사 작용은 훌륭하게 보여진다. 

얼굴이 더 부드럽고 세밀하다. 
르누아르 초상화의 특징인 이 기법은 자유로운 진동 브러시 스트로크와 결합됩니다. 
이 작품의 모델은 유명한 음악 출판사 사장의 아내인 마담 아트만 (Madame Artmann)라고 한다.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8.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05 x 1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누아르에게 있어서 여성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매력과 

직접적이고 신선한 지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네가 풍경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르누아르는 초상화에서 

어떤 하나의 순간의 느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르누아르의 작품 속 모델들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생함과 자연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여배우 프랑세스 잔느 사마리를 모델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잔느 사마리가 19세기 후반의 특징적이지만 다소 무미건조한 듯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전신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수줍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장갑을 끼고 포개어 놓여 있는 두 손, 가볍게 안쪽으로 살짝 굽혀져 있는 몸, 
매력적이만 다소 경직된 그녀의 미소 등은 그녀가 대중들 앞에 서 있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배경으로 등장하는 응접실과 바로 잔느 사마리이다. 
배경이 되는 응접실의 분위기는 화려하지만 무거운 듯한 느낌이 깃들여져 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잔느 사마리는 밝고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또한 분명 어두운 배경 하에서 묘사된 분홍색 드레스의 

아름답고 거품처럼 부드러운 효과와 잔느 사마리의 자연스러운 자태와 

밝은 미소의 결합이 관객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Girl with a Fan, 1880.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부채를 들고 있는 소녀는 여러 차례 르누아르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르누아르도 그렸던 La Grenouillere 바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전적으로 배열된 특징이 아니라 젊음의 매력, 그녀의 얼굴의 생생한 색, 
그녀의 눈의 빛, 르누아르가 항상 그의 주제에서 추구했던 그 자질들에 있었다. 
따라서 얼굴이 더 매끄럽게 그려지고 여기에서 세부 사항을 선택할 수 있으며 
손, 드레스, 심지어 부채는 대략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Woman Combing Her Hair, 1887.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5.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느와르는 당시 글레르의 밑에서 함께 수학하며 촉망받던 의학도이자 
부유한 화가 지망생인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얹혀 살면서 
모네도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시슬리도 얼마 후 같은 건물로 이사오게 된다. 

르느와르는 모델료가 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 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훗날 외광파의 일원으로 묶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르느와르의 운명이 그를 자연에만 몰두하도록 두지는 않았는데,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후 그녀는 그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의 전기 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글레르의 스튜디오를 나와 바티뇰에서 함께 살던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들에게 
화가 지망생으로의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매일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자기가 칠하고 싶은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온갖 색으로 그들의 캔버스를 물들일 순 없었지만, 그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던 숲 속에서 캔버스를 펼쳐 둔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인 모네, 
시슬리에게 자연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느와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르느와르는 분개했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의 기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Young Girl in a Hat, 189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41.3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1890년대에 르누아르는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의 주제를 자주 그렸다. 
세기 말의 멋진 여성용 모자는 르누아르의 관심을 더욱 불러 일으켰다. 
르누아르는 때때로 그의 모델을 위해 특히 특이한 모자를 주문했다. 
19 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모자인 샬럿은 그 기간 동안 여러차례 
그림과 석판화에서 르누아르에 의해 묘사되었다.

 

Young Woman in a Flowered Hat, 189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41.5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여성은 사상자나, 행동이나 가정 주부, 혹은 자연의 창조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창조자이거나, 혹은 그 장식품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가장 활기찬 색깔, 풍부한 정원 꽃들은 여기서 꽤 적절하다. 
이 작품에서 대표되는 여성은 보통 부드럽고 타원형인 얼굴과 
작고 동그란 코를 가진 여성의 일반적인 르느와르 타입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모델이 아니라, 초상화를 의뢰한 여성일 것이다. 
캔버스가 구식이라는 사실은 모델들의 규칙적인 사진들이 

날짜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Woman head,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38.5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초상화는 주요 장르가 되었고, 
주인공은 살아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의인화하는 여성이다. 
이 모델은 헤어 스타일의 외모와 성격 모두에서 
이번 아티스트의 작품에 등장한 여러 캐릭터와 유사하다. 
이 모델은 안나(Anna)라고 한다. 
스케치는 이미지가 서정적이고 여성스러운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별도의 붓놀림의 자유와 유연성, 색상 관계의 부드러운 뉘앙스 및 
가벼운 공기 환경에 대한 관심은 최근 르누아르 그림 스타일의 특징이다.

 

Woman on a Staircase,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67.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1870년 기병대로 2년 간의 프러시아전쟁 기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르느와르는 
동료들과 자신들만의 협회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하였고, 
그의 총감독 하에 1874년 첫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관람객들은 매우 적었으며, 재정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듬해 재정적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작품들을 

경매에 부쳤지만 반응은 매우 냉담할 뿐이었다.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되주었던 부유한 바지유의 전시와 더불어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심각하게 재고해야만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무렵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이었다. 
그는 프러시아 전쟁기간에 런던에서 처음 모네와 시슬리를 알게 되었는데, 
르느와르는 아마 모네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뒤랑-루엘을 통해 르느와르는 다른 여러 화상들을 만나고, 
자신의 후원자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즉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Man on a Staircase,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67.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이후 르느와르는 살롱에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1878년과 79년 두 차례 모두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다. 
특히 79년 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르느와르에게 부와 명성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르느와르는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0세가 다 된 르느와르에게도 이 무렵에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 모자상 Aline Charigot가 그 주인공이었다. 
1880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서 5년 뒤 그들의 아들 Pierre가 태어나고, 10년 뒤 결혼하게 된다.

젊은 화가 지망생을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의 명성은 
그의 지난날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여러 가지 전개 과정을 거쳐 발전과 성숙, 완성미를 모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으로의 여행이 힘이 되주었다. 

그는 아탈리아로의 그림 여행을 통해 라파엘과 앵그르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잡아 줄 보다 많은 윤곽선을 넣고, 
색조를 좀더 차갑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르느와르의 작품의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따라서 인상주의 작품이라기보다 고전주의 작품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그림이 가지는 사랑스러운 질감과 보풀거리는 듯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어두워진 색조와 분명해진 윤곽선은 이전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르느와르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평가들이나 후원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분명했고, 그

들은 이런 르느와르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르느와르는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여 짙은 색조를 화면에서 격감시켰지만, 
고전에 대한 선망은 죽는 날까지 감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드가를 평생 찬사했음에서 보여진다.

 

In The Garden, 1885.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70.5 x 11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그림의 주인공은 맑은 날에 조용한 화려한 정원에서 쉬고 있는 어린 소년과 소녀다. 
연한 회색의 한 청년이 손으로 소녀를 부드럽게 붙잡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있다. 
그는 목이 마른 표정으로 그녀의 달콤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 반대의 소녀는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조금 사려 깊다. 
왜냐하면 그녀는 방금 그녀의 사랑하는 아내가 될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의 모든 생각은 이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에는 뽑은 꽃, 관능적인 외모, 부드러운 감동 등등으로 로맨스가 묻어 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자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초상화와 예술을 자연스럽게 묘사했으며 여성의 아름다움에서부터 
자연의 장엄함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의 진정한 감정가였다.

르누아르는 작품 속 인물들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청중의 동정을 얻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아를 묘사한 많은 수의 그림은 

그 당시 어떤 남자도 무관심하게 만들 수 없었다. 
르누아르의 많은 그림은 밝은 느낌을 묘사한다. 
그 주된 것은 의심 할 바 없이 사랑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화가의 표준 규칙에서 조금 벗어났다. 
이번에는 그림이 단지 초상화가 아니며 저자가 항상 보여주지 않으려고 시도한 스토리가 있다. 
이 작품은 영혼을 해치고 관객을 움직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평온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엄숙하게 회화 작품을 특정 회화 장르의 틀 속에서 만든 것으로 간주했다.

 

In The Garden, 1883.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4.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순수한 풍경이 비교적 드물게 만나는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이 그림은 특별한 장소를 차지한다. 
1883년 여름, 르누아르는 라만체 해안의 작은 휴양지이자 어촌인 이포트로 갔다. 
그의 친구의 추천으로 르누아르는 Yport 시장인 Alfred Nunès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아이들의 큰 초상화 한 쌍을 그렸다. 
목가적이지는 않지만 평화로운이 두 캔버스와는 달리 작가는 자신을 위해 현재의 그림을 그렸고, 
일반적으로 작가와는 무관한 낭만주의 색조로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실행된다.

 

Party in the Country at Berneval, 1898.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0.3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적이 성격의 소유자 르느와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드가에게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그가 매우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기법을 드가가 충실히 재현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르느와르 이상으로 드가를 찬미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르느와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기쁨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전적 기법과 결합한 그의 이런 새로운 변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의 작품에 대해 살롱 뿐 아니라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조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관절염은 그를 행복 속에만 있게 두지 않았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는 나갈 수도 없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그를 괴롭게 했다. 
르느와르가 그의 노년을 아내와 프로방스 지방의 칸에서 보낸 것은 아마도 이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은 프로방스지방의 일기는 르느와를로 하여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에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한 붓은 예전 같은 붓의 터치를 어느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6년 그의 아내가 죽고 3년 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칸에 살았으며, 
80세가 넘도록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408번 방은 1883년에서 1917년 사이에 유명한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풍경화, 정물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1858년 르누아르는 17살의 나이로 생활비를 벌고자 
문장조각가로 일하던 형 앙리를 통해 부채나 장롱을 채색했다. 
1862년 르누아르는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경쟁 시험에 합격했으며 
샤를 글레르의 공방에 들어가는데, 공방에서 그는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나게 된다. 
퐁텐블로 숲에서 자주 그림을 그리며 그들 네 명은 굳은 우정을 나눴다.

르누아르와 글레르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면서 막을 내렸으며, 
1864년 글레르가 은퇴하자 르누아르는 보자르를 그만 둔다. 
그 와중 르누아르는 살롱에서 작품을 공개하는데, 이 처녀작(에스메랄다 1864)은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전시회 이후 이 작품을 파괴한다. 
이 시기 작품들은 초상화 쪽에서는 앵그르와 드오당크의 영향이, 
또 특히 정물화 쪽에서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영향이 돋보이지만 
몇몇 주제에서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영향 역시 볼 수 있다.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한층 빛에 용해되어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변하지만,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르누아르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리었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말년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 정주하여 오로지 제작만을 계속, 최후에는 영광을 누리며 홀로 들어앉아, 
의자 위에서 화필을 쉬지 않고 아름다운 나부의 제작을 계속했다. 
주요 작품으로 〈해수욕장의 풍경〉, 〈대수욕〉, 〈목욕하는 여인들〉, 〈큰길〉 등이 있다.

In the garden, 1885.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12.5 x 17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르느와르는 마흔 가까이에 18살 어린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
형편상 결혼식은 포기했고, 첫아들이 4살이 되던 해 공식 혼인한다.
르느와르의 부인은 헌신적이어서, 꽃 그리기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서
새벽에 정성들여 예쁜 꽃을 골라 사오고, 자신의 지병을 숨길 정도였다고 한다.

르느와르는 자그마치 5,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르느와르는 생생한 빛, 강렬한 색조 표현, 자유로운 붓 터치로 채색해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어 솔직하고 친근한 구성으로 그림을 그렸다. 

 

Roses and Jasmine in a Delft Vase, 1880~1881.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장미와 쟈스민이 담긴 델프트 화병

 

roses in a vase, 1910~1917.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1.5 x 50.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Landscape. Le Cannet, 190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4 x 1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이 작품은 1902년 르누아르가 정착한 코트 다 쥐르에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칸 교외 르 칸에 있는 예술가의 집을 묘사한다. 
풍경은 초상화 또는 장르 작품의 구성 요소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주제로도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다. 

르누아르는 도시와 특히 시골 풍경을 모두 그렸다. 
모든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의 순간적인 상태를 전달하면서 야외에서 일했다. 
르누아르는 풍경을 그리는 특별한 스타일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화법을 개발했다. 
변덕스러운 붓놀림과 감미로운 색채 배합은 창의력 후반기에 
르누아르를 바꾸지 않은 쾌활한 모습을 표현한다.

 

Harbor in Marseille, 1907. by Paul Signac. oil on canvas. 55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408번 홀에는 르누아르 이외 다른 화가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폴 시냐크(Paul Victor Jules Signac, 1863~193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처음에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하였다. 
그 후 쇠라(Georges Pierre Seurat)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단순하고 신선한 수채화도 많이 남겼다. 

그는 작품 심사 없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앙데팡당 전람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작품으로 <생트로페 항>, <마르세유 항> <크리우르 항> 등이 있다. 
저서로 신인상주의의 이론서가 된 <들라크루아부터 신인상주의까지>가 있다.

 

Port Manech, 1896. by Henry Moret. oil on canvas. 60.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앙리 모레 (Henry Moret 1856~1913)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였다. 
프랑스 지도에서 퐁타방(Pont-Aven)을 지나가는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마네끄 항구가 있다.
온갖 색이 다 사용된 것 같은 작품을 보다가 문득 퐁타방에 모여 있던 화가들의 

오색 숨결이 이곳까지 흘러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덕에는 꽃들이 무리를 지어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고 

바다도 이에 질세라 다양한 색으로 몸을 바꾸고 있다.
건너편 봉우리에는 계절이 오고 가는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긴 점으로 서 있다. 
다음 계절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다.

모레의 상관인 빌레트는 모레를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로링앙 지역의 화가인 에르네스트 코롤러에게 소개한다.
코롤러는 주기적으로 파리 살롱전에 출품을 하는 아카데믹 기법의 화가였다. 
그는 전통 기법뿐만 아니라 외광파 기법도 모레에게 가르쳤다.

 

View of the Church of Santa Maria degli Angeli, near Assisi, 1909, by Henri Edmond Cross. oil on canvas, 
73.5 cm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앙리 에드몽 크로스(Henri Edmond Cross, 856-1910)는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였다.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e)파 화가로 분류되는 에드몽 크로스의 그림 세계는 
본래 사실주의 화풍이었는데, 모네를 만나면서 밝은 빛이 가득한 인상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는 1856년 5월 20일, 프랑스의 두에(Douai)에서 

영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10살 때부터 릴(Lille)의 보(Beaux) 예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데생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76년 파리에 나와 활동하면서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1년에는 크로스(Cross)라는 영어 이름으로 첫 전시회를 개최했다. 
1883년 프랑스 남부로의 여행과 모네(Claude Monet)를 만난 뒤로 
특히 사실주의의 어두운 색채에서 인상주의의 밝은 화풍으로 바뀌게 돤다.

1884년 쇠라(Georges Pierre Seurat)와 시냐크(Paul Signac)를 만나 
교류하면서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예술가협회(the Société des Artistes Independants)'의 일원으로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그의 작품에서 이미 점묘주의 회화를 볼 수 있다.

신인상주의 풍경화가 크로스는 1904년 생트로페(Saint-Tropez)에서 시냐크와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마티스(Hemi Matisse)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점묘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려하고 온화하면서도 쾌락적인 화풍을 창조하게 된다. 

이후로 신인상주의를 이끌어가는 대표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특히 프랑스 남부와 베니스,

이태리 등의 이탈리아의 도시와 숲, 바다 근처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직감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색체 감각이 뛰어나고, 수채화를 잘 그렸으며, 
표현주의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앙리 크로스는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동안 페루자와 아시시의 여러 풍경을 제작했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기법인 점묘법은 작은 페인트 점에 색을 적용하여 
작가가 복잡한 색조를 순수한 색으로 나누고 멀리서 눈으로 결합하는 페인팅 방법이다. 
이런 스타일은 종종 분열주의 또는 신인상주의로 묘사된다. 
인상파는 자연에 대한 경험적 태도를 보였고 신인상파는 빛과 색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 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캔버스에 동일한 붓놀림을 꼼꼼하게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장식용 컬러 모자이크 효과를 만들어 냈다.

 

In the living room, 1900. by Étienne Moreau-Nélaton. oil on canvas. 60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모로우 넬라퉁(Adolphe Étienne Auguste Moreau-Nélaton 1859~1927)은 
프랑스 화가, 미술 수집가 및 미술사 학자였다. 
그의 대규모 컬렉션은 오늘날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서 전체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모로우 넬라퉁은 파리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1882년 모로우 넬라퉁은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를 

방문한 후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1885년 그는 Salon de Paris 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가족 장면이 그의 주요 주제였지만 그는 또한 여러 풍경도 그렸다. 

 

[영상] Auguste Renoir in Hermitage Museum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405번 홀은 주로 정물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Flowers in a clay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3 x 2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유명한 초상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어린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고 큰 감동을 얻었으며,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의 르네상스 화가나 다이크와 같은 17세기 프랑드르 화가, 
와토와 같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헀다.

후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 학교와 메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프랑스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1863년에 또한 그것에 반발한 '살롱 데 르퓌제'에도 출품했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영향을 받아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Roses and nasturtiums in a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8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초상화가였던 앙리 팡탱 라투르는 세련된 배색 효과를 이용해 다수의 정물화를 그렸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와 석판화에 담곤 했다. 
'접시의 장미꽃'에서는  단순히 주제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섬세함과 매우 짧게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늘어가는 애호가들과 영국 수집가들을 위해 

우아하고 절제된 그림을 제작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팡탱 라투르는 모순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그는 대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던 반면에
당대의 혁신적이고 새로운 젊은 화가들과 잦은 교제를 가졌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로 옮겨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길 갈망했지만 정작 그의 대표적인 주제는 꽃 그림이었다.

결국 팡탱 라투르는 미천하다고 여긴 그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좌절감과 

중압감을 느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렸던 그의 꽃 그림들에는 권태로움이 묻어난다. 
앙리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가로 황동하였지만 사실 

그를 유명하게 하고 수입이 되었던 것은 정물화였다.

그는 꽃과 과일 등의 정물들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의 꽃들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과일들은 언제나 달콤한 향기와 과즙을 뿜어 낼듯한 싱싱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그의 정물화는 고전적 표현 요소를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던아트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대상을 부드러운 빛과 함께 
아름답게 묘사한 이런 종류의 그림을 오랫동안 그렸다.

비록 그 자신은 양쪽 어디에 속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팡탱 라툴르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팡탱 라툴르는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제자였고,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스승인 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생활하고 작업하는 
일련의 화가들의 모임에 정식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클루아의 작품과 창조력으로부터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들은 사실적이고, 후기로 갈수록 보다 인상주의적이며 

빛을 색이 아닌 색조로 표현했지만,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 즉 전후 관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두 가지의 회화 양식, 즉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양식에 맞게 혼합하여 그렸다.

그는 고대 거장의 화풍을 연구하며 고전적 요소도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와 교류하면서 혁신적인 시도도 받아 들었던 화가로 

진정 유연한 사고와 태도를 가진 혁신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와 정물화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화풍으로 작업했다.

 

Flower Still-Life, 1863. by Gustave Courbet.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 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
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 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Landscape with a bridge, 1870. by Stanislas Lepin. oil on canvas. 26 x 3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스타니슬라스 레핀 (Stanislas Lepin 1835~1892)은 풍경, 
특히 센 강의 풍경을 전문으로하는 프랑스 화가였다.
레핀의 예술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1859년 노르망디에서 만난 코로였고, 이듬해 그의 학생이 되었다.

레핀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센(Seine) 강이었다. 
그는 인상파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1874년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의 그림은 분위기가 차분하고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다. 
레핀은 1889년 박람회에서 최우수상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892년 파리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Room of Alfred Sisley and Camille Pissarr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406번 홀에는 인상파 풍경화가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작품이 있다.

 

Room of Alfred Sisley and Camille Pissarr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Boulevard Montmartre in Paris, 1897. by Camille Pissarro. oil on canvas. 92.8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덴마크계 프랑스인 인상주의 화가다. 
가장 훌륭한 근대 풍경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섬세한 감정과, 초기 농원(農園)의 연작(連作) 또한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은 파리의 대로 몽마르트(Boulevard Montmartre)를 묘사하는 풍경화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파리의 대로 
몽마르트가 보이는 그랜드 호텔(Grand Hotel de Russy) 방을 임대했다. 
피사로는 같은 지점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날씨에 13점의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빠른 붓놀림으로 설득력 있게 구현된 도시 생활의 역동성은 의식적이지 않고 
공식적이지 않으면서 흥분되고 활기찬 현대 도시의 이미지를 만든다.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인상파의 이론을 실천하여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음으로써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나는데, 피사로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 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하여금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다.

 

French Theater Square in Paris, 1898. by Camille Pissarro.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이 그림은 프랑스 극장 (Comedie Francaise) 근처 파리의 한 구석을 묘사하지만 
극장 건물 자체는 캔버스 밖에 남아 있다. 
카미유 피사로는 그의 작업의 주요 주제가 된 도시의 일상 생활에 관심이 있었다. 
전경에는 당시의 대중 교통 수단이었던 말이 끄는 트레일러와 사람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자유롭고 분리된 스트로크는 인물과 어린 나무 잎의 움직임을 모두 전달한다. 
햇살이 가득한 봄의 분위기는 도시에 활기찬 매력을 더한다. 
클로드 모네처럼 피사로는 여러 주에서 같은 도시 풍경을 여러번 그렸다. 

 

Windy day in Venyo, 1882.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81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는 잉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주의 풍경화가이다.
시슬레는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인 부모인 윌리엄 시슬레(William Sisley)와 

펠리시아 셀(Felicia Sell)에게서 태어났다. 


1860년대 초에 그는 마르크 샤를 가브리엘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공부했다. 
여기에서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된다. 
그들은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사실적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풍경을 그렸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접근법으로, 좀 더 색채가 풍부해졌고 
일반 대중들이 익숙해진 시각보다 더 넓게 그려졌다. 
그 결과로 시슬레와 그의 친구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시슬레의 학생 시절 작품들은 유실되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64년경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인근의 오솔길"(Lane near a Small Town)이다.

이 작품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가 

Ile-de-France에 위치한 Veneux-Nadon 마을에서 그렸다. 
프랑스에서 이 지역의 성격은 시슬레의 작업에서 주요 주제가 되었다. 
흐린 날씨는 밝은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가 전달한 가벼운 공기 환경을 특별한 상태로 매료시킨다. 
유연한 자유 스트로크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가며 나무의 흔들림과 구름의 움직임을 전달한다. 
인상파의 민감한 눈은 자연의 상태를 결정하는 하늘의 삶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식별한다. 

1866년 시슬레는 브르타뉴 지방 출신인 Eugénie Lesouezec과 결혼하여 2명의 자식을 두었다. 
1870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재정적 지원이 끊겨, 

시슬레는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혼자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시슬레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금전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받았다.

 

The town of Villeneuve-la-Garenne, 1872.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80.5 x 5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작은 지방 도시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에서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Villeneuve-la-Garenne 마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는 이 소박한 자연의 매력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소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킨 살아있는 햇빛은 

자연의 다양성에 민감한 시슬레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1880년에 시슬레 가족은 19세기 초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작업하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인근에 있는 모레쉬르루앙(Moret-sur-Loing)으로 이주하였다. 
미술사학자 안 풀레(Anne Poulet)는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곳의 조용한 풍경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기는 그의 재능과 완벽하게 맞았다. 
모네와는 달리 사나운 대양이나 코트 다쥐르(Côte d'Azur)의 빛나는 색채의 풍경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

1857년에서 1961년 사이의 런던에서 지낸 시기와 1874년, 1881년 그리고 1897년 
잉글랜드로 여행한 것을 제외하면 시슬레는 전 생애를 프랑스에서 보냈다.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슬레는 비록 시슬레가 덜 표현적이고, 
더 작은 규모로 작업하기는 했지만 서로 그림이 비슷했던 모네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에 따르면 
"보편적인 특징의, 완벽한 인상주의 회화의 비개인적인 교과서적인 발상"을 가졌던 
공기와 하늘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풍경에 집중했던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적이었다.
시슬레는 그의 부인이 죽은 지 몇 달 뒤에 59세의 나이로 Moret-sur-Loing에서 사망했다.

 

Riverbank at Saint-Mammes, 1884.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인상주의의 방법을 통해 시슬레는 날씨 상태, 
변경 가능한 조명, 진동하는 빛을 작업에 구현할 수 있다. 
하늘은 살아있는 자연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시슬레의 그림에서 좁은 강에서 흐름이 느껴지고 물 표면에 하늘의 반사가 부서진다. 

 

 

 

Room of Claude Mon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403번 홀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다.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 · 시슬레 · 르누아르 · 바지유 등과 사귀게 되었다. 
모네는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 · 드가 · 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다. 
모네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874년 그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Room of Claude Mon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방에 전시된 작품들은 40년 동안 모네의 작업을 시대별로 보여 주고 있다. 
초기-인상파의 첫 전시 7년 전에 모네의 작품 "Woman in the Garden (정원의 여인 1867)"과
"안개 효과 (Effect of Fog 1903)" 등이 전시되어 있다.

 

Woman in the Garden. Sainte-Adresse, 1867.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01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정원의 여인(Woman in the Garden)은 1866년 클로드 모네가 26세 청년이었을 때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여성은 잘 살던 사촌의 젊은 아내인 Jeanne-Marguerite Lecadre이다. 
그림의 스타일은 모네가 나중에 찬사를 받았던 전형적인 인상파 작품과는 달리 매우 구성적이고 세부적이다. 
여인의 밝은 흰색 드레스는 정원의 빨강, 분홍색 및 녹색과 생생하게 대조되고 있다. 

 

Pond at Montgero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94 x 1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인상파의 예술 후원자 중 한 명인 금융가

앨리스 호셰데(E. Hochede)가 의뢰한 4개의 장식 패널 중 하나다. 
모네의 다른 세 작품 중 또 하나의 작품은 다음에 소개할  
"Montgeron의 정원 코너(A corner of the garden in Montgeron)"로 

대형 살롱을 장식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변화하는 자연의 존재 속에서 짧은 순간을 전달하고자 하는 인상파들은 

자신의 작품을 생생한 빛과 공기로 채웠다. 
물결치는 물 속에서 일시적으로 반사하는 풍경이 중심 테마를 형성한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낚싯대를 가진 여성의 실루엣은 나중에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앨리스(Alice)일 가능성이 있다.

 

A Corner of the Garden at Montgero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94 x 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인상주의가 절정에 오르던 시기에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성숙기에 이르렀을 때 그려졌다. 
이곳에서 꽃이 만발한 정원을 모티브로 한 모네는 자연의 순간적인 
시각적 인상을 전달하며 살아 있고 변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그림의 채색은 순수한 색상의 개별 획을 광학적으로 혼합한 것이다. 
빛과 공기로 가득한 공간의 느낌은 진동하는 다채로운 질감으로 나타난다. 
그림은 몽쥬홍(Montgeron)에 있는 호셰데 성(Hochede Castle)의 대형 살롱을 
장식하기 위한 4 개의 장식 패널 중 하나다. 

 

Garden at Bordighera, Impression of Morning, 1884.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65.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보르디게라(Bordighera)의 정원, 아침의 인상은 1995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배경에 야자수와 교회탑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1884년 1월부터 4월까지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의 보르디게라에 머무는 동안 제작되었다. 
그는 미술 평론가 친구인 테오도르 두레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동화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다이아몬드와 보석의 팔레트를 가져갈 것입니다."

1881년에 이르자 원래의 인상파 집단은 해체되기 시작했지만, 그후에도 2차례의 전시회, 
즉 신인상파가 출연한 뒤 1886년에 열린 8번째 전시회와 마지막 전시회가 더 열렸다. 
오직 모네만이 똑같은 열정으로 자연 탐구를 계속했다. 
그가 1880년대에 선택한 장소는 노르망디의 푸르빌 · 에트르타 · 페캉 · 바랑제빌 · 

브르타뉴에 있는 울퉁불퉁한 외딴섬 벨일, 황량한 크뢰즈 강 골짜기, 

프랑스 남부 지방의 망통 · 앙티브, 그리고 이탈리아의 보르디게라 등이었다. 

1886년 그는 2번째로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튤립 꽃밭을 그린 다음 에트르타와 벨일에 잠시 머물렀다. 
1883년 모네와 오슈데, 오슈데의 자녀들, 그리고 모네의 아들인 장과 미셸은 
파리에서 84km 떨어진 베르농 근처에 있는 엡트 강변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모네는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농가를 샀는데, 이 농가는 죽을 때까지 그의 집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프랑스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1880년대에는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1890년대에는 지베르니, 
혹은 그 부근에서 지내면서 연작을 제작하는 일에 전념했다.

 

Haystack at Giverny, 188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81.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지베르니(Giverny)의 건초더미”라는 작품에서 모네는 그의 가장 뛰어난 기술 중 하나를 사용했다. 
모네는 항상 자연의 빛의 놀이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세부 사항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많은 종류의 빛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빛의 가장 작은 변화가 전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풍경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다.

모네는 관측 결과를 실제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조명으로 많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비슷한 그림이 전체 주기에 나타난다. 
그러한 사이클 중 하나는 이 캔버스가 들어간 건초더미의 이미지가 있는 일련의 풍경이다. 
모네는 지베르니 (Giverny)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같은 장소에서 나중에 다른 유명한 그림을 많이 만들었다.

처음 보았을 때 그 그림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왜 이런 풍경에 관심이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관객에게 좀 난해하다.
이 그림은 조용한 농촌 지역에서 매우 평범한 평일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은 수평으로 되어 있고 시각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사진 앞에서 신선하고 짙은 녹색 잔디가 그려져 있으며, 
그 위에 거대한 건초 더미가 놓여 있다. 
이 건초 더미는 즉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관심을 끌게 된다. 

이 신선한 스트립 뒤에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맹렬한 여름 태양이 밝게 빛나는 붉은 빛깔의 잔디를 가미한다. 
빛에서 그림자로의 전환은 가능한 한 명확하게 묘사된다. 
직선이 아니라 캔버스의 대각선을 따라 움직이는 파선을 따라 가며 
신뢰성과 역동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배경에는 작은 숲과 몇 채의 집이 있는데, 

그 위에 떨어지는 빛 때문에 어두운 나무와 강하게 대비된다. 

가벼운 공기와 자연 환경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포착한 모네는 날씨 변화의 순간, 
즉 흐린 바람이 부는 날의 밝은 지평선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인상파는 흐린 자연을 밝은 색으로 칠하여 무한하고 풍부한 색조를 드러낸다. 
이 시대의 특징적인 작은 획으로 그림을 그려서 무지개 빛깔의 효과를 냈다.

 

Poppy Field, 1890.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92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양귀비 들판 (Poppy Field)은 모네가 유명한 풍경 시리즈를 많이 그린 지베르니 (Giverny)에서 제작되었다. 
변화 무쌍한 색조와 움직이는 플로럴 카펫의 광경에 매료된 작가는 이 주제를 거듭 반복했다. 
모네의 대부분의 작품에 내재된 모티브의 겸손함은 결코 살아 있는 숨결의 이미지를 버리지 않는다. 
지베르니의 풍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인 양귀비 밭에 접해 있는 건초더미와 포플러는 
인상주의의 거장 모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Meadows at Giverny, 1888.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92.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1883년에 모네는 처음으로 지베르니를 방문하여 그의 후반기를 살았다. 
1888년 여름, 모네는 남쪽에서 지베르니에 인접한 평야의 초원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이 작품에서 모네는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비와 돌풍이 태양 광선으로 대체되는 자연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환되는 순간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핑크 톤이 구름에 나타나고 따뜻한 햇빛이 젖은 초원에 떨어진다. 
서로 밀접하게 배치된 또다른 작은 획은 진동하는 질감과 

단단한 페인트 레이어를 형성하고 가장 미세한 색상 뉘앙스를 전달한다.

 

On the steep banks near Dieppe, 1897.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6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바다와 바위가 있는 풍경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노르망디 해안을 배경으로 한다.
1890년대에는 계절과 시간, 기상 조건 등에 따라 바뀌는 빛과 색의 영향을 면밀히 연구했다. 
다양한 자연 상태를 포착한다는 아이디어에 매료된 인상파 화가로 그는 일련의 풍경을 묘사했다. 
모네는 안개가 스며드는 가벼운 공기 환경의 가변성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다.

 

Woman in a Garde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50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Embankment in Le Havre, 1874.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61 x 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Landscape. Seine at Asnieres, 1873.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46.4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파리 북서쪽의 센 강에 있는 Asnières에 
페니치가 정박되어 있는 늦은 오후의 풍경을 보여준다. 
약간 북쪽에 있는 센 강의 또 다른 도시인 아르장퇴유에 살았던 모네는 
이 풍경을 그리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왔다.

 

Seine at Rouen, 1872.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54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루앙의 센 강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세일링 보트의 맑은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The Garde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75.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1872~1879년에 모네는 아내 카밀과 아들 장과 함께 아르장퇴유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센 강의 이 작은 마을은 수상 스포츠 애호가들을 매료시켰다. 
모네의 집에는 르누아르(Renoir)와 시슬리(Sisley)가 자주 방문했다. 
모네의 집에서 센 강 건너편에 있는 에두아르 마네 역시 

그를 찾아와 가끔 야외에서 함께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꽃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그가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정원은 풍부한 꽃으로 유명했다. 
모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녹색 잎사귀에서 
새로운 색상 뉘앙스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그의 비전을 훈련했다. 

모네의 풍경에서 인물은 작품의 주요 주제가 아니다. 
풍경에 활기를 불어 넣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모네의 그림에서 인간의 모습은 자연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햇빛 반점과 다양한 색 반사로 인해 서로 섞여 따뜻한 공기의 진동 효과를 표현한다. 
이 떨림은 물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한다. 
모자를 쓴 우아한 여성이 꽃 사이에서 산책하거나 잔디 위에 앉아 있다. 

 

Waterloo Bridge - Effect of Fog, 1903.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01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3년 동안 세 차례 이상 

런던을 방문해 런던 풍경 연작 작업에 열중했다.
이미 1870년 보불전쟁 기간 중 영국으로 피신을 가면서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모네가 이 도시를 그리게 된 것은 

1899년 아내 알리스, 아들 장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스무 살이던 장은 런던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잇따른 연작의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모네 가족은 
런던 최고급 호텔이던 사보이 호텔에 머물렀는데 
호텔 창밖으로 템스 강의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네는 호텔에 머물며 템스 강과 워털루 다리, 채링 크로스 다리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국회의사당 세 가지 모티브로 연작을 그렸는데, 
짙은 안갯속에서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모네는 시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모네는 안갯속에서 빛의 움직임을 펼쳐 보이며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쏟아냈다. 

워털루 다리-안개 효과(Waterloo Bridge - Effect of Fog)를 비롯해서 
그가 런던에서 작업한 그림들은 윤곽과 색이 모두 안개에 잠식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건축물들은 안개에 휩싸여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주변은 마치 꿈속에 들어온 듯 기묘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런던 연작은 1904년 5월 뒤랑 뤼엘의 갤러리에서 공개되었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전시 카탈로그를 쓴 미르보는 다음과 같이 모네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 작품들은 마술적이며, 악몽 같고, 꿈같으며, 신비하고, 강렬하며, 혼돈 같고, 비현실적이다.'

 

Flowers in a clay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3 x 2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유명한 초상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어린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고 큰 감동을 얻었으며,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의 르네상스 화가나 다이크와 같은 17세기 프랑드르 화가, 
와토와 같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헀다.

후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 학교와 메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프랑스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1863년에 또한 그것에 반발한 '살롱 데 르퓌제'에도 출품했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영향을 받아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Roses and nasturtiums in a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8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초상화가였던 팡탱 라투르는 세련된 배색 효과를 이용해 다수의 정물화를 그렸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와 석판화에 담곤 했다. 
'접시의 장미꽃'에서는  단순히 주제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섬세함과 매우 짧게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늘어가는 애호가들과 영국 수집가들을 위해 

우아하고 절제된 그림을 제작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팡탱 라투르는 모순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그는 대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던 반면에
당대의 혁신적이고 새로운 젊은 화가들과 잦은 교제를 가졌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로 옮겨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길 갈망했지만 정작 그의 대표적인 주제는 꽃 그림이었다.

결국 팡탱 라투르는 미천하다고 여긴 그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좌절감과 중압감을 느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렸던 그의 꽃 그림들에는 권태로움이 묻어난다. 
앙리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가로 황동하였지만 

사실 그를 유명하게 하고 수입이 되었던 것은 정물화였다.

그는 꽃과 과일 등의 정물들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의 꽃들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과일들은 언제나 달콤한 향기와 과즙을 뿜어 낼듯한 싱싱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그의 정물화는 고전적 표현 요소를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던 아트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대상을 부드러운 빛과 함께 
아름답게 묘사한 이런 종류의 그림을 오랬동안 그렸다.

비록 그 자신은 양쪽 어디에 속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앙리 팡탱 라툴르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앙리는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제자였고,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스승인 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생활하고 작업하는 
일련의 화가들의 모임에 정식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클루아의 작품과 창조력으로부터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들은 사실적이고, 후기로 갈수록 보다 인상주의적이며 빛을 색이 아닌 색조로 표현했지만,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 즉 전후 관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난 두 가지의 회화 양식, 즉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양식에 맞게 혼합하여 그렸다.

그는 고대 거장의 화풍을 연구하며 고전적 요소도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와 교류하면서 혁신적인 시도도 받아 들었던 화가로 

진정 유연한 사고와 태도를 가진 혁신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와 정물화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화풍으로 작업했다.

 

Hay, 1867~1868. by Armand Guillaumin. oil on canvas. 50 x 2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아르망 기요맹 (Armand Guillaumin, 1841~1927)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리 태생으로 생활 때문에 처음에는 어떤 토목과에 잠깐 근무하면서 여가에 회화를 그렸다. 
연구소에서 세잔과 피사로를 알게 되어 최후까지 친교를 계속했다. 
기요맹은 누구의 감화도 받지 않은 제작으로, 갈색이나 붉은색 · 자색을 많이 쓰는 반면에, 
개성이 강한 매력을 나타내며, 피사로나 모네처럼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야성적이면서 중후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 

 

View of the town of Pont du Chateau, 1885~1886. by Albert Marie Lebourg. oil on canvas. 
31 x 5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알베르 르부르 (Albert Lebourg 1849~1928)는 프랑스 인상파 및 후기 인상주의 풍경 화가다. 
그는 일생 동안 2,000 개가 넘는 풍경화 작품을 남기면서 
빛나는 인상파 스타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879년 제 4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르부르는 클로드 모네, 카밀 피사로, 에드가 드가와 함께 
알제에서 실행된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이며 30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제5회 인상파전 (1880년)에서 그는 루앙, 파리, 알제를 묘사한 20개의 작품을 전시했다. 

르부르는 사계절 내내 루앙과 파리 안팎의 센 강의 애니메이션 장면을 그려 내고 있었다. 
마침내 Puteaux에 정착하여 1888년부터 1895년까지 파리 주변에 머물며 
자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을 그렸다. 

그는 1920년 9월에 뇌졸중으로 몸의 왼쪽이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1년 2월에 재혼했다. 
그해에 2,137개의 작품이 포함된 Catalog Raisonné가 조직되었고 
1923년에 발표되어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영상] Claude Monet in Hermitage Museum

 

 

 

 

 

Room of Pablo Picass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402번 홀에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도 다섯 점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피카소의 작품은 431~434번 홀에 더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에르미타지 일반 참모건물(General Staff Building)에 전시되어 있는 
피카소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Fruit Vase and Bunch of Grapes 과일 꽃병과 포도 다발, 1914. by Pablo Picasso. 
Paper, gouache, tempera, sawdust and pencil. 67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1881~1973)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큐비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3만여 점이 된다. 
피카소 작품의 개수와 다양성 때문에 많은 예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 왔다. 
하지만 각 시기의 명칭을 정하고 시기를 몇 개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계속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1904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 색과 분홍 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피카소는 스탈린을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이 스탈린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되어 
1957년에 제명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 예를들어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발표하였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1938년)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Man with arms crossed on his chest. 1909. by Pablo Picasso. 
Watercolor, gouache and charcoal on paper pasted on cardboard, 65.2 x 4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시터의 머리, 얼굴, 흉상 처리는 1909년 봄 파리에서 

다양한 기법으로 피카소가 제작한 작품의 전형적인 형태와

색상 솔루션의 기하학적 단순화 원리를 보여준다. 
작가는 여기에서 개인의 묘사보다는 오히려 형태의 은밀한 구조의 표현에 관심이 있다.


이미지는 개별 섹션으로 나뉘어 있지만 피카소는 

엄격한 윤곽을 통해 하나의 장식 디자인으로 통합한다. 
황토색과 회색 톤의 간결하고 거의 금욕적이며 조화로운 조합이 전체 구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피카소는 풍부한 색채를 보여주는 것보다 빛과 공간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Nude figure of a young man, 1906. by Pablo Picasso. gouache on cardboard, 67.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이 작품은 피카소가 파리에서 1906년 봄과 스페인에서 같은 해 여름에 작업한 
젊은 남성의 인물이 있는 스케치 및 미완성 작품 그룹에 속한다. 
이 그림에서는 구조적 원리의 기하학을 강조하는 경향이 
피카소의 작업에 나타나기 시작한 후기 장미 시대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십대의 얼굴은 그 자체로 닫히고 주인의 관심은 

골동품 회상이 느껴지는 해석에서 인물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카소 자신은 새로운 형태를 찾고 있다. 
그 안에 둘러싸인 볼륨과 상호 작용하는 활기찬 등고선은 
침착하게 서 있는 청소년의 이미지에서 내면의 긴장과 움직임을 드러낸다.

 

 

Composition with a cut pear, 1914.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5 x 3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904~1906년을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라고 하는데 

이 때 피카소는 황토색과 연한 장미빛을 자주 사용했다.
그림에는 곡예사나 그 가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색적인 구경거리보다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 훨씬 흥미를 느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책임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개인의 무능이나 운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참하기 보다는 신비스런 기운이 더 강했다.

Painting is just another way of keeping a diary. - Pablo Picasso
그림은 일기를 쓰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의 이름을 피하고서는 

한 줄의 글도 써 내려갈 수 없다.  
그만큼 피카소에 대한 수없이 많은 글과 책들이 범람하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피카소는 천재다, 그는 미치광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난센스다,
어린애도 그보다 잘 그릴 수 있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다"
여기에 몇 가지 말들을 덧붙이자면 그는 호색한이기도 했고, 

동시에 휴머니스트, 무정부주의자였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런 천재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게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 살 때에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피카소의 추상화들은 대개가 이런 그의 치밀한 데생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어설픈 그림이거나 미치광이의 그림이라는 식의 비판은 
피카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다.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 이남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스페인(이베리아 반도) 지역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던 유럽의 변두리였다.
스페인 회화의 오랜 전통은 프란시스코 델 고야 이후 그 맥이 끊겨 19세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들라크로와와 마네의 영향으로 20세기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찌감치 자신이 라파엘로보다 낫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던 피카소에게 

파리는 "꿈과 빛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00년 피카소의 나이 열아홉 살 때 그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파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답답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시의 파리는 거리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넋을 잃었고,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원래 태생이 스페인인데다가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었던 피카소였기에 
이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열적이었는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아틀리에는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시기의 스페인 출신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친구였던 시인 뽈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결별하면서까지 평생 한 여자에 충실한 편이었다면 

피카소는 숱한 여성편력을 남겼다.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을 혹은 한 여자가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일인지 아니면 지극히 적합하지 않은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카소 개인의 경우로 국한해 놓고 본다면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말하는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등의 구분은 
모두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이 그의 화면에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에

침잠케 했는데, 1901~1904년에 이르는 이 시기를 일컬어 "청색시대"라 한다.

이어서 그가 첫 여자 피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는 
그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분홍시대를 열게 만든다. (1905년) 
이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되는 데 이 시기에 
피카소 주변의 인물들은 시인 막스 자콥과 아폴리네르, 미국인 화상 스타인 남매, 
독일인 화상 칸 바일러, 화가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현대의 회화사에 있어 "사진의 등장"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동안 자연의 모사에 치중했던 화가들에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 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자 동시에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마음 속으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들라크로와 같은 이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사진가인 A.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기존의 예술이라는 제도권 안에 진입시킨 공로가 크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유럽의 예술계에서 사진이 예술이라는 체제 안으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1859년에 있었다. 
프랑스사진협회의 노력으로 샹젤리에 궁에서 열렸던 "사진 살롱 개최"가 바로 그것인데,
사진의 예술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하던 보들레르조차 "1859년 살롱비평"을 통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1862년에는 앵그르를 비롯한 
유명 미술가들이 사진의 예술 편입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 예술에 편입된 사진은 
그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술의 한 갈래가 되었다. 
좀더 거칠게 말하자면 화가들이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더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피카소가 등장하기 직전인 19세기의 일이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행했던 것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구체적인 결실들을 맺어가는데, 
1907년 일찌기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처리될 수 있다"고 말했던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현실화시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함축된 

기하학적 그림을 경쟁적으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입체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런 혁명적 활동은 단순히 화풍(양식)의 변화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 콜라주, 앙상블라주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무너뜨렸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술의 고귀함은 

작품의 주제만의 문제도, 대상이나 방법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미술이란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그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뽈 엘뤼아르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Zebras at a watering hole, 1906. by Georges Manzana-Pissarro. oil on canvas, 

64.5 x 5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이 작품은 1906~1907년 파리 전시회에서 전시된 피카소 초기의 

특징적이고 조화로운 구성 중 하나이다. 
그의 취향의 형성과 일종의 동양 장식 스타일에 대한 깊은 각인은 풍부한 금색 팔레트와 
구불구불한 선형 아라베스크를 기반으로 하여 구성의 모든 요소를 리듬에 종속시키는 
예술가의 이국적인 아라비아에 대한 매혹에 의해 남아 있다. 

 

Violin and Guitar 바이올린과 기타,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5.5 x 54.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가 당시 관심을 가졌던 큐비시즘 (cuism) 스타일로 그려졌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피카소는 악기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이올린과 기타”이다.
그림의 공간은 패턴, 핑거 보드, 바이올린 “에세이”, 벽지 조각, 테이블 단편, 
눈에 띄지 않는 유리잔의 힌트로 연결되어 상호 침투하는 많은 평면 요소로 해체되며 
정적 생명은 산란 요소의 혼돈에서 나온다.

피카소는 초기 청색시대의 작품과 나중의 입체적 작품들을 
비교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피카소가 진짜 대단한 화가라고 느껴지는 것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작품이 
시기별로 나눠질 수 있게끔 화풍이 변해왔다는 점 아닐까 싶다. 
표현하는 방법이 변한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방식이 변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큐비즘((Cubism 입체파) 시대 (1907~1917)
큐비즘은 20세기 야수파(포비즘 fauvisme) 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유럽 회화를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로부터 해방시킨 20세기 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의 하나이며 입체주의라고 한다. 
큐비즘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 조각, 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큐비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  표현파에서 하나의 극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느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술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 추구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나무를 쌓아 올린 것 같은 입체 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미술은 초기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모더니즘의 가장 의의 있는 발전 가운데  하나인 이 회화 방식은 
1907년과 1914년 사이에 조루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들의 엄격한 목표는 평면의 캔바스 위에다 견고함과 볼륨감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캔버스란 그 2차원성 또는 그 "그림의 성격"을 상실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주제'를 여러 다른 각도에서 묘사하고 동시에 이를 캔버스 위세서 재구성함으로써 
평면들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한다    

20세기 최초의 새로운 미술운동이며 미술사의 전환점인 유파로서 추상화를 시도, 
많은 유파가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고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현대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큐브"는 정육면체란 뜻으로 큐비즘은 1907년 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파리에서 일어나 유럽 전역에 파급된 미술 혁신운동이다.

 

Two Sisters (Date), 190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피카소가 뛰어난 예술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두 자매 (Two Sisters)>는 피카소가 스물한 살에 그린 작품이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또 잘 그렸던 청년은 1901년 여름, 
파리의 생라자르(Saint-Lazare) 병원을 방문해 두 자매의 만남을 목격한다. 
두 자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흩어져 살았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각기 다른 인생을 산 그들은 수녀와 창녀가 되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병원의 매춘부 수용 병동에서 만났지만 

기쁨은 잠시, 서로의 처지가 너무나 달랐다. 
피카소는 두 자매의 기막힌 사연을 잊을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피카소는 두 자매가 남긴 짙은 인상을 
꼬박 일 년에 걸쳐 그려 이듬해 여름에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에서 어느 쪽이 수녀이고 누가 창녀일까.
오른쪽의 여인을 수녀라고 생각하고 왼쪽을 창녀로 보기 쉽다. 
그러나 거꾸로 왼쪽이 수녀고 오른쪽이 창녀가 된 자매다. 
블라우스를 풀어 젖힌 오른쪽 여인의 왼쪽 팔에 아기의 검은 머리가 조금 보인다.
창녀가 된 여인은 세상에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힘겹게 지내면서 

사람들의 학대를 받고 농락을 당해 몸이 더럽혀졌다. 
무시와 경멸을 받을수록 세상을 향한 분개가 커졌다. 
수치를 느낄수록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 분노는 자기 보호의 모습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 앞에 선 수녀는 머리를 들 수 없다. 
친자매의 기구한 운명에 고통스러워하며, 세상 모든 죄의 죄인이 된 심정이다. 
슬픔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녀는 감호 병동에 봉사하러 왔다가 병을 치료하며 

아기를 돌보고 있는 자신의 자매를 우연히 만난다. 


그림에 흐르는 팽팽한 정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해후한 두 자매는 침묵에 잠겼다. 
그럼에도 맨발의 두 자매가 어울린 모습에서 병마와 고독의 고통 너머 
슬픔을 위로하는 친밀한 가족적 유대가 느껴진다. 
수녀 뒤로 아치가 보인다. 아치가 있는 곳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다.

피카소는 무엇이 남달랐을까
20대 초반에 피카소는 소외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1821~1881)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처럼 걸인, 장님, 행상, 유랑인, 노숙자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들을 파란 색조가 감싼다.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에르미타주 대표 소장품 중 하나인 <두 자매>는 
딱 봐도 청색시대 작품으로 진한 청색이 주는 비극적인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청색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를 지나 피카소는 사람의 내면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외형을 해체해서 그 외면을 만든 내면을 그려 입체파(cubism)라고 불리는 표현법을 열었다.

 

The Dance of the Veils,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7년 봄 피카소가 그린 베일의 댄스(The Dance of the Veils)는 
초기 입체파 회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커튼이 달린 누드의 이미지는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 잡았다. 
그 중 가장 주된 작품이 바로 이 그림이다. 


스페인 예술 전통의 특징인 완전히 알 수 없는 세계의 신비한 폐쇄에 대한 아이디어는 
피카소의 전망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 중 하나이다. 
인체의 구조를 변형시킨 피카소는 에너지 넘치는 음영으로 덮인 
별도의 이동 가능한 평면에서 인체를 재현한다. 
그것들을 움직이고 비틀면서 그는 댄서의 긴장하고 요염한 회전을 가시화한다. 
그녀가 매체로서 신비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은 것은 

그녀의 리듬이 완전히 해체된다는 증거이다. 
배경과 커튼이 모두이 회전으로 그려진다.

파블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다. 
93세의 나이로 1973년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그에게 있어 
살아 생전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작품 이외에 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낸 시대는 그렇게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자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전쟁을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그가 이런 전쟁과 대학살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바로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긴 것이다.

마드리드 시절부터 거리의 부랑아들과 빈민을 화폭에 그려내던 무정부주의자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직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공산당의 예술관과 피카소의 예술관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의 학살>을 둘러싼 피카소와 
프랑스 공산당의 충돌은 결국 피카소로 하여금 프랑스 공산당과 결별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피카소는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양심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청색시대 (The Blue Period, 1901-1904) 
화가들, 특히 성공한 화가들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다. 
피카소는 19세 때 바르셀로나를 떠나 낯선 파리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지내게 된다. 
당시 세기 말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페시미즘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청색시대(1901-1904)를 맞이한다.

몽마르트에서의 '청색시대' 동안 피카소는 청색을 주조로 그림을 그리며, 
모든 것을 푸르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계속하고...
그가 좋아하는 색깔로서의 청색, 이 시기 그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청색, 
게다가 그가 입고 다녔던 옷들의 색깔까지도 청색이었다고 하며, 
그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1901년 (20세), 그는 파리를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피카소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월 바르셀로나에서는 첫번째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양한 재료로 그린 초상화 50여 점이었다. 
이때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말경에는 피카소의 서명에서 Ruiz를 완전히 빼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파리를 동경하고 있던 카탈루냐 미술가 · 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파리의 카페 '검은 고양이' (Chat Noir)를 본뜬 
'4마리의 고양이' (Els Quatre Gats)에서 자주 모였다. 
그밖에도 죽어가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제를 주제로 하여 그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임종의 순간, Last Moments〉도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해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렸다.

 

Absinthe drinker, 1901.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7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피카소는 1901년 가을 22세였던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카페에서 인간의 외로움, 고립과 공허함의 주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드가와 피카소의 많은 존경을 받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스페인 사람의 그림에서 주제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감각을 얻었다.

외로운 여 주인공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있고, 

배경은 더럽고 붉은 벽이 불편함을 더 해준다. 
캔버스의 평탄함을 강조하면서 벽의 색과 푸른빛이 도는 대리석 테이블은 
여성을 둘러싼 공간을 안쪽으로 밀어내어 절망적인 외로움으로 그녀를 감싸는 듯하다. 
압생트 벼랑의 포즈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우리는 추방자를 식별할 수 있다. 
그녀 몸의 완전히 밀폐된 공간, 오른손의 표현적인 왜곡은 

코일 스프링의 긴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 엄격하게 상자를 두었다. 
손은 그림의 불완전한 타원을 통해 정확한 수직으로 이어지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보호 손은 어깨를 움켜쥔다. 
모든 것이 내면의 긴장감을 강화하고 주변 세계에서 인물을 차단한다. 
피카소의 실제 관찰을 바탕으로 삶의 비극에 대한 

일반화되고 시대를 초월한 상징을 만들었다.

그림의 뒷면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무거운 오버 페인트 밑에 
숨겨져 있는 여성의 머리는 아마도 작가를 만족시키지 못한 작품의 일부일 것이다.

 

Absinthe, Girl in a Cafe, 1901. by Pablo Picasso. gouache, pastel on paper,
7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피카소의 그림 "압생트(Absinthe)를 가진 소녀"는 주인공의 비대해진 손이 
마치 껴안으려는 듯 눈에 띄기 때문에 특별한 드라마로 가득 차 있다. 
여자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그녀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예술 비평가들은 압생트에 앉아 피카소의 여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최근 연구자료를 보면 이 압생트에 포함된 Thujone은 마치 

강한 커피를 수십 잔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한다. 
신경자극을 통제하고 전달하는 효소를 막음으로써, 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성분에는 납이 일정량 포함되어 오랫동안 음용할 경우 건강을 해친다고 한다.
피카소 또한 이 압생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1901년 가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이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보라색과 황색의 강한 대비가, 마치 술에 취했을 때 느껴지는 알딸딸함을 뿜어내고 있다.

 

Portrait of Soler, 190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00 x 7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3년, 스물 두 살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친구들의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그중에는 젊은 예술가,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후원한 세련된 
바르셀로나 재단사 솔러(Soler)의 초상화가 있다. 
피카소와 솔러는 수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피카소는 한 번 이상 그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 
Hermitage에 소장된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솔러의 전체 모습에 

내재된 예술성과 자연스러운 우아함, 그리고 멋지게 콧수염 끝을 올린 

그의 얇은 얼굴의 기억에 남는 독창성을 전달한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려고 한다. 
솔러를 그의 영혼과 조화를 이루는 강렬하게 우울한 청록색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피카소는 그 사람이 원래 내재되어 있던 "비극적인 삶의 감각"을 지닌 사람을 묘사하게 만든다. 
이 초상화에서는 앞의 "Absinthe Drinker"에서와 같이 카페에서 
한 사람의 외로움을 주제로 사람들 사이의 외로움이 들린다. 
따라서 우울한 느낌과 신경질적인 얼굴에 슬픈 분리의 표현이 있으며, 
그 유령같은 창백함은 배경과 의상의 깊은 음색에 의해 강화된다.

 

Green bowl and black bottle,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1 x 5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녹색 그릇과 검은 병
1907년 피카소는 이미 널리 알려졌으며 새롭고 
소위 큐비스트 방식으로 일련의 그림을 제작한다. 
처음 비평가와 대중을 두려워하게 한 큐비즘은 곧 프랑스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의 회화에서 가장 흔한 트렌드 중 하나로 발전한다. 
세잔 (Cezanne)은 자연을 “볼, 원추, 원통형”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한 
입체파 작가들을 창의적인 프로그램으로 간주했다. 
세잔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따라 가지 않았다.

젊은 예술가들은 더욱 급진적이었다. 
입체파는 그 “깨끗한”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의 구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주변의 자연, 가정 용품, 인간의 모습은 그림의 볼륨과 평면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입체파 작가들과 무엇보다도 피카소는 결코 현실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의 실험은 모든 것이 아니라 인지적이었다. 
그러므로 큐비스트 시대와 관련된 피카소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새로운 측면에서의 현상을 드러내어 피사체에 대한 시청자의 관점을 깊게 한다.

정물 피카소의 작품에서 추상화가 주요 부분을 차지한 시기에 
“녹색 그릇과 검은 병”이 기록되었다. 
구성은 강조되고 간결하다. 
함께 쓰여지는 초안 배경에 대해 두 가지의 평범한 객체만 있다. 
객체의 위치는 재료의 질량, 형상, 심지어 텍스처를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불안감은 짙은 색조 (녹색과 검은 색)의 대비를 붉은 색과 대비하여 나타낸다.
갈색 – 빨간색, 검정 – 회색 및 녹색 귀머거리가 결합된 자신감이 일반화된 그림, 
그러나 예술적 수단의 간결함은 이러한 단순한 대상들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한다.

환상적인 모습을 거부하고 양식의 정확성을 거부함으로써 
피카소는 묘사된 각 혈관의 “성격”을 강화한다. 
가늘고 모양이 완벽하고 우아한 검은색 병 및 넓고 다소 어색한 녹색컵이다. 
비범한 영성과 “활력”을 얻는다. 
작은 정물에서 피카소는 주변 현실에서 무진장의 
시각적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완벽하게 나타냈다.

 

Boy with a dog. Turnover: study of two figures and a man's head in profile, 1905. 
by Pablo Picasso. gouache on cardboard, 57.2 x 4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큐비즘이란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싸롱도통에 출품된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의 풍경>이란 연작를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큐브)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하였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의 풍경>을 살롱전에 출품하였고, 이때 심사위원장은 
마티스였으며 연작 중 두점 만이 입선되었고, 니머지는 모두 낙선되었다. 


마티스 같은 위대한 화가조차도 후대들의 새로운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미술의 법칙인가 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브라크는 출품된 작품 모두를 찾아 
카베레를 화랑에서 개인전을 함으로써 세인의 비판을 구하였다.

세잔느의 " 자연의 형태는 원추, 원통,구형으로 나눌수 있다" 는 주장을 
이론적인 근거로 한 큐비즘은 피카소가 1907년에 대담한 색채와 
면의 구성을 보여주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동시에 표현하려 했는데 
처음에는 색채를 부정하고 흑색, 녹색, 갈색 등으로 제한된 색채를 사용했으며, 
눈에 비친 형상의 우연적인 속성을 일체 생략하였다.

큐비즘의 중심사상은 르네상스 이래 서양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을 이용한 순간적인 현실묘사를 지양하고, 
시점을 다수로하고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 만으로 한정하며 
그 위에 자연의 여러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시켜 
사물의 존재성을 2차원의 '타블로' 구축하여 재구성 하고자 하는데 있다.

 

 Woman head, 1902~190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49.7 x 36.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11년에 살롱 데 쟁데팡탕의 전시실이 큐비즘의

전용으로 이용되면서 집단적인 발표가 이루어졌다. 
큐비즘은 1911년이라고 하는 지극히 짧은 단 한 순간동안 서 있었던 실험 예술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현실에 두려움없이 직면했고 또 그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완전히 독창적인  반 자연주의적인 유형의 형상화를 진전시켰는데 
이것은 동시에 회화적 창조의 메카니즘을 홀딱 발가 벗겼으며 그 과정에서 
추상과 재현의 인위적인 경계를 부셔버려는 쪽으로 멀찍이 나갔던 것이다. 
요컨데 큐비즘은 금세기 전반의 예술에서 회전축과 같은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큐비즘은 르네상스 이후 오랫동안 확고하게 자리잡은 단일시점의 
원근법에 의해 부여된 대상의 가짜 입체감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이차원적 캔버스 평면에 재구성하므로서 예컨데 19세기 리얼리즘 작품에서 보이는 
문학적 암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말하자면 
순수한 시각성에 의한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다.

큐비즘은 근본적으로 정적이며 반성적인 예술양식이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적 성공이 곧  부르조아적인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큐비스트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조아적인 현실을 변혁가능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 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들어가게 하였다

큐비즘의 이론은 대상을 가장 진실되게 파악하기 위해서, 대상을 예리한 매스로 

분석해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종래에는 대상과는 더욱 거리가 먼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은 화면에서 점차 사라져버리는 현실적 이미지를 찾기 위해 
우연히 현실적 오브제를 직접 화면에 붙이는 방법을 찾았다. 
트럼프, 악보, 신문지 조각같은 인쇄물을 화판에 부분적으로 부착하였는데 
부분적으로 추상화된 이미지를 합하려고 하였다

 

Glassware, 1906.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8.5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이 작품은 피카소가 1906년 여름을 보낸 스페인에서 그린 정물화이다. 
그때까지 독립 장르로서의 정물은 피카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물화는 묘사된 것의 본질을 식별하는 데 점점 더 관심이 있음을 증언한다. 

"Glassware"의 구성은 단순하고 고전적인 선명도가 특징이다. 
각 개체는 엄격한 구성 리듬과 비교 및 상호 작용의 논리를 모두 준수하는 동시에 
자체 공간 영역에 존재한다. 

 

Nude woman (bust),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1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6년에 피카소의 작품은 이미 과거와의 "대담한" 

돌파구와 "미지로의 돌파구"의 윤곽을 나타냈다.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예술의 예리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그는 시각적 신뢰성으로부터의 본질적인 자유와 

필수 개념을 포함하는 시스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거친 형태, 안면 마스크는 표현적인 구성성과 미스터리를 

모두 갖춘 기본, 초개인 형태로의 경로를 나타낸다.
강조된 기하학과 도식주의와 함께 그림 언어의 참신함으로 

피카소는 여성의 얼굴에 슬픔의 표현을 유지한다. 

 

friendship,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1.3 x 10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큐비즘은 물체를 입방체처럼 분석 분해해서 그 각 단면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큐비즘 작가들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하였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활되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 있는 요소와 결합하여 융합되었다

피카소, 브라크, 그리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 었으며, 
화면의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레제와 들로네가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큐비즘의 충격은 대단했다. 
즉 기존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창출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표현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네덜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절대적 추상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딧게 하였고, 
미국에서는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유도하였다. 
그 여파의 첫 결과는 191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후기 입체파적 양상들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 등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함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광선주의, 오르비즘, 미래주의, 순수주의 등의 화파를 생성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지대한 그 영향력 만큼 20세기 미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1점 원근 시점에서 벗어난 동시점  즉 다시점 작풍 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화면의 평면화, 빛의 평등한 분산, 
주제의 일관성 등으로 그 실천적 성과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보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론을 성공적인 시도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

아폴리네에르, 앙드레 살몽, 모이스 레이날 등이 비평가로서 이 운동을 지원했다. 
초기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라는 두 걸출한 대가의 독립된 조형상의 모색을 통해 탄생한 큐비즘은 
당시까지 회화에서 추구했던 시각의 리얼리즘을 넘어 '이념의 리얼리즘'을 추구함으로써 
회화의 일대의 혁명을 불러 왔다.

"자연을 원통, 구, 원추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 구축적인 회화 이념에 
힘입은 바가 큰 큐비즘은 대상을 섬세하게 분할함과 아울러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화면에 병치하고 시간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결국 전통적인 회화 원리를 무너뜨렸다.

흔히 피카소의 1907년작 <아비뇽의 처녀들 >과 마티스의 <에스타크 풍경>으로 

비롯했다고 일컬어지는 큐비즘 회화는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인체를 자연스럽게 소재로 하였다 .

 '청색시대' 로부터 '큐비즘시대', '고전적시대' 를 거쳐 말년에 이르기까지 
신화, 일상적인 누드를 지속적으로 그려온 피카소는 물론, <아비뇽 처녀들>에 필적하는 
브라크의 나부들, 기계 미학의 경도를 보인 이후 다양한 형식의 인물을 그린 레제, 
큐비즘 조각가의 개척자 아킨펭코 등의 작품에서는 독자적인 질서로 재구축된 인체를 만날 수 있다.

큐비즘은 한편 반성적인 예술 양식이었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적 성공이 곧 부르즈와적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큐비스트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즈와적 현실을 변혁 가능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 들어가게 했다.

 

Three wome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200 x 1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에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Musical instruments,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8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큐비즘은 초기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1907에서 1909년 사이를 초기 큐비즘이라고 한다.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 시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주제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중요해졌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처럼 환경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폐쇄된 공간 속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방법론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했던 것 같다.
색채의 산만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색채들 만을 그림에 사용한다. 
주제를 택한 다음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본다는 착상을 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모든 단면을 동시에 한 시점으로 보는 방법이었다.

분석적 단계에는 색채가 거의 브라운과 회색 계통, 검정색, 황토색 계통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색채 제한은 화면 안에서의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성, 
구조의 문체에 강조점을 두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Brick factory in Tortosa,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50.7 x 60.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자연에는 원기둥, 원뿔, 구형밖에 없다'는 세잔의 가르침을 따른 <토르토사의 벽돌공장>
큐비즘은 두 개의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번째 자연적 형태는 
기하학적인 동일체의 방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큐비스트들은 
극단적인 결론으로까지 파고 들어갔다. 
두 번째 전제는 4차원의 공간과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지 회화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대상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석적 큐비즘 시기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적 큐비즘(1911-1916)- 다방면에 걸친 회화적 수단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하면 
형태를 파괴하기보다는 상징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주관적이고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형태들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분석적이기 보다는 더욱 심화된 평면성, 단순성, 풍부해진 색채와 질감, 
느슨해진 분위기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추상적 하부구조와 중첩된 소재는 함께 유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각 요소 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종합적 큐비즘은 추상적 요소들을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와 콜라주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 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와 꼴라쥬 마티에르 (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 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실제 나무의 모조를 그려 나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진짜로 나무를 그림에 도입시킨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Young lady,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2.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7년 살롱 토론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Woman with a fan,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 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 삼각추, 

원통형 입방체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는 명칭을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란 최초로 비평가인 R. 보셜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셜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차레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화면 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피카소) 


"내게 있어 큐비즘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 표현 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내 재능을 잘 살릴수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 두기로 한다" (브라크), 

 

Cafe table (Pernod bottle),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45.5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인 <죽은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또한 피카소는 <기타>(1912~1913)와 같은 입체주의 조각들에서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Bathing,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9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여러 시대를 통하여 미술가들은 캔버스와 파넬의 평면 위에 어떻게 
삼차원적 세계를 표현할수 있는냐 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해 왔다. 
15세기 이후 화가들은 앞에 있는 것일수록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는 
원근화법을 사용해 왔는데 이 기법은 2차원의 평면 위에 삼차원의 깊이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프랑스 화가 세잔느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는 자연풍경을 주의깊게 관찰하여 집이나 나무, 산들을 기하학적 형태와 일치시켰으나 
그것들을 반드시 한 시점으로 처리하지는 않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눈도 한곳에 정지시켜 놓지 않음으로써 

일상적인 시야처럼 사실과 같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이 형태를 분리하여 식별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마음 속에서 함께 결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마다 일어나는 과정이지만 회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곧 전통적인 원근 화법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Tavern, around 선술집, 1914.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29.5 x 3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4년 파리에서는 세잔느의 대규모 작품 전시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젊은 화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다. 
동시에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작품도 전시되었는데 그 작품들의 
단순성과 역동성은 미술가들의 관심을 미술의 원칙으로 돌리게 하였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미술과 초기 동굴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원시적인 물건들이 오랫동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왔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예술로 보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미술가들은 원시시대의 의식 용구의 힘과 단순성을 
찬탄의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재생과 영감을 구하였다.

 

Seated woma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7~1908년에 제작한 초기 입체파의 이 작품은 피카소가 시각적 진정성에서 

벗어났고 그가 창조한 "새로운 현실"에 몰입하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무섭게 반발하고 때로는 새롭게 드러난 조화로 눈에 띄기도 한다. 


"앉은 여인(Seated woman)"은 1908년 초 파리에서 그렸다. 
졸거나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누드 인물은 그녀의 윤곽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도식주의로 구별된다. 
직선은 그림의 주요 요소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강한 대비는 볼륨을 만들고 
어두운 황토색은 그림의 색상을 결정한다. 
"앉은 여인"은 수면의 느낌을 준다. 이 주제는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Composition with skull 해골 구성,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16.3 x 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최초로 입체파 회화를 그렸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는
선사시대로 관심을 돌렸던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기질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찬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의 작품에 계속적으로 의존해 왔었다.

그러나 원시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연 이상의 것이었다. 
피카소 자신도 그렇게 느꼈음이 틀림 없겠지만 그는 사람들이 유럽 역사상 
당대의 시점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미개성과 생경함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다.

 

Tenor and violin, 191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55.3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피카소는 전통 화가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데상에 대한

정상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그가 전통적인 데상을 방기한다 할지라도 

그는 주제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손의 수법을 익히고 있었다.
브라크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놀랐다. 
브라크는 자신의 실험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레스다크의 집들>에 보이는 나무의 대각선 조차도 세잔느가 사용했던 고안이다. 
그러므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무엇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전통적인 원근화법과 삼차원적 환영을 버리고 

훨씬 더 얕은 회화적 공간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화면 위의 인물이나 대상들을 마치 캔버스 표면 위로 

불쑥 밀어 올린 듯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하였다. 
또한 단단한 형태들의 집합이 배열되어 새로운 구성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피카소는 직선적이고 때로는 무모하기 조차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브라크는 보다 예민한 입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비평가들은 이들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

 

Farmer (half-length image),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81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1908년 가을 피카소는 파리 근처의 라 루드부아(La Rue-de-Bois) 마을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살았던 집의 여주인의 초상화인 "Farmer"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The Farmer"에서 인간의 육체가 돋보인다. 


머리는 공, 목은 원통, 몸통은 입방체와 같은 기하학적 기호의 

매우 정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시된다. 
여성의 모습은 나무 블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인상이 강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연에 의해 공급되는 숨겨진, 강력하고, 원시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는 "나는 자연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Dryad,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85 x 10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8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초기 입체파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드라이어드(Dryad)의 세계는 따뜻한 햇빛을 알지 못한다. 
어둡고 신비스럽고 비이성적인 모든 것에 열려 있다. 
보이지 않는 높이로 단단히 닫혀 있는 나무 줄기는 

인간형 자손을 그림의 전면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이어드의 모습은 저속하고 공격적이다. 
다각형 실루엣에는 밝은 갈색, 회색 갈색 및 

어두운 갈색의 측면과 같은 기하학적 표면이 포함된다. 
이 얼굴의 관절은 명확한 선으로 표시된다. 
신체를 해석하는 이 새로운 방법은 피카소가 그 구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에너지, 그 안에 작용하는 

밀착력과 추진력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피카소는 말한다. 

"본질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문학으로 가득 찬 그림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피카소는 항상 "말"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고 서술적이지 않았다. 
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본성에 대한 

예술가의 긴장되고 불안한 생각의 구체화였다.

 

Farmer (tall),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농부(Farmer)"는 1908년 여름 말 피카소가 살았던 

파리 근처의 라 루드부아 마을에서 그린 작품이다. 
그 집의 여주인인 농부는 그의 생각을 "이상적인" 살아 있는 구체화의 

일차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문제로 받아 들여 피카소는 

"농부 (성장 중)"와 "농부 (허리 길이 이미지)"라는 두 가지 화신을 만들었다. 

농부의 키 큰 모습은 그녀의 반장 이미지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간단하고 잘 맞는 볼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고 대략적으로 다듬어 진 머리로 끝난다. 
그러나 키가 큰 그림에는 매우 표현력이 강한 몇 가지 악센트가 나타났다. 
치마가 있는 거대한 부풀어 오른 배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먹 팔, 팔 레버, 팔 망치, 공격적인 무게로 가득 차 있다. 
농부는 그녀의 어두운 잠재 의식의 첫 부름에 생명을 얻을 준비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로봇과 비슷하다.

 

House in the garde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73.6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몽마르트의 세탁선이라는 하숙집에서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상풍의 명암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 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 교유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고, 
피카소는 홀타 테  에브로의 에스파니야 풍경을, 브라크는 세잔과 같이 
에스타크의 풍경을 발표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구별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화학 공간을 쌓아 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Woman with mandolin,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2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7년부터 1901년에 이르는 큐비즘의 제 1단계 동안에 보여준 것은 

피카소와 부라크가 아직도 세잔느의 많은 영향 아래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보다 뚜렸이 그들의 양식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정물화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깊이를 주는 모든 일루전을 제거한 채 경치를 이루는 요소들을 앞으로 당겨서 
마치 상자 안에 물건들을 마구 쌓아 놓은 것처럼 그림의 전후 관계를 어지럽혀 놓았다.
이것이 과도기적 단계의 큐비즘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곧 실망할 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주체들을 거의 사라지게 해버린 예술가들에게 매혹될 것이다.

 

[영상] Room of Pablo Picasso

 

 

 

Room of Edgar Deg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4층의 첫 번째 402번 홀에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에드가 드가는 프랑스 파리,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앵그르의 제자로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After the Bath, 1895. by Edgar Degas. pastel, gouache, tempera and charcoal on brown paper. 
81.9 x 7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드가는 풍경화에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진이나 우아한 일본 판화 등 당시 파리에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새로운 표현 방식에 흥미를 느꼈다.
드가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 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 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 왔다. 

드가는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 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다.

 

Woman combing her hair, 1885. by Edgar Degas. pastel on paper. 
54 x 5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880년대에 에드가 드가는 목욕하는 여자 연작에 몰두했다. 
특이한 시각을 채택하는 드가의 능력은 기수나 

발레리나를 다룰 때보다 목욕하는 여인 연작에서 한층 향상되었다. 
그는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몰래 바라보는 듯한 각도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의 일상적인 동작을 캔버스에 담았다. 
드가는 이상화되거나 규범에 의해 강요된 전통적인 누드 자세를 거부했다.

 

Toilet (Woman drying herself after bath), 1884. by Edgar Degas. pastel on brown paper. 
50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드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는 신화적인 주제에 
등장하는 누드와는 매우 다른, 평범하게 남을 의식하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1886년 목욕하는 여인 연작이 공개되었을 때는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조지 무어 같은 친구들조차 드가가 관음증이 있다고 비난했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고 신체만 보이는 낮은 각도에서 그려진 
드가의 누드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음란하고 노골적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Behind the toilet, 1899. by Edgar Degas. pastel, charcoal on tinted paper.
54.5 x 58.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드가에게 여성의 인체는 평생에 걸친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그는 긴 머리카락에 페티시적인 집착을 보여서 

많은 작품에 긴 머리를 빗는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마티스가 오랜 기간 소장하고 있었던 <붉은 방>과 같은 작품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머리빗기>는 이 머리카락이 

추상적인 느낌까지 주는 감각적인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드가가 비범한 시점과 구도로 화면에 구축한 아름다움은 
산문적인 리얼리티에서 드가가 끌어낼 수 있는 시적인 요소였다. 
이 작품과 같은 그의 1890년대 이후의 회화는, 
그 선과 색채가 사실주의적이라기보다는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런 회화는 특히 고갱이나 르동 등 후배 세대 화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Seated dancer straightening shoe ribbons, 1875~1876. by Edgar Degas. charcoal and chalk on paper. 
47.3 x 3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Room 402.

 

1871년 즈음부터 드가는 오페라 극장을 자주 찾아다니면서 

무용 연습에 열중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또는 무대공연에 열중인 

발레리나들의 다양한 포즈를 그리기 시작한다. 
대개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에 관한 연구를 거듭함에 비해, 
드가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드가는 제 1회 인상파 전시회를 제외한 모든 전시회에 참여하였지만, 
인상주의 작가들과 몇 가지 차이점을 갖는다. 
광선에 대한 관심과 우연한 순간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제외하면, 
드가는 인상주의보다는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화가였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그가 가진 주제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마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다시 투루즈 로트렉에 의해 계승된다

 

Dancers heads, second half of the 1890s. by Edgar Degas. pastel, charcoal on light gray paper. 
30.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Room 402.

 

Two Dancers, 0898~1899. by Edgar Degas. pastel on paper. 47.8 x 3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890년대 후반에 드가는 무대에 올라 가기 바로 전에 무용수의 이미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보통 이 순간에 그들은 뭔가 치장을 하고 있다. 
스트랩, 귀걸이, 헤어 스타일 – 아티스트가 “개막 전” 흥분을 정확하게 기록한 제스처. 
무대 뒤에서의 삶은 날개 속의 가벼운 에피소드가 이미 드가를 현장의 광채보다 더 끌어들였다.
이 그림은 머리카락을 교정하는 발레리나인 “Two Dancers”와 정확히 같은 각도이다. 

 

Seated Dancer (Danseuse assise), 1879~1880. by Edgar Degas. 
Charcoal and pastel on paper mounted on pasteboard. 63.5 x 4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Girls (women), 1907. by Georges Rouault. tempera, sometimes pastel on paper. 
Charcoal and pastel on paper mounted on pasteboard. 97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1958)는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이다.
루오는 14세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工房)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4년 후에 미술학교에 입학, 포브의 스승인 모로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로의 화풍을 따랐으나, 스스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소재는 거의 모두가 법관 · 창녀 · 어릿광대 · 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의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Spring. Turnover: Sketch of a vase, 1911. by Georges Rouault. oil on canvas. 
72 x 5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봄 풍경은 조르주 루오의 작품에서 극히 드믄 주제이다. 
고딕 성당의 장미를 연상시키는 구성의 모양, 테두리를 장식하는 무늬가 있는 테두리, 
풍경 형태를 나타내는 강렬한 선과 줄무늬, 사람의 모습, 공간 계획 등은 
모두 루오의 작업 결과로 장식적인 취미를 증명한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도자기 분야, 풍경 형태의 어두운 혼합 사이에  

밝은 수채화 레이어는 어느 정도 조명을 통해서 기능을 한다. 
그러나 루오는 스테인드 글라스 페인팅을 모방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생생한 인식은 일종의 회화적 측면인 

장식적인 원리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을 제공한다.

 

Hall of French painting of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Daumier, Manet, Deg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바로 옆 404 홀에도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 콩코드 광장(Concorde Squar)이 전시되어 있다.

 

Hall of French painting of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Daumier, Manet, Deg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Concorde Square, 1875. by Edgar Degas. oil on canvas. 78.4 x 1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콩코드 광장 (레픽 자작과 그의 딸들)
에드가 드가는 고전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르네상스 걸작의 프레임 안에는 

'세계와 영원'이 들어있는 것 같은데, 근대의 작품은 

'작은 구석, 한 순간, 파편'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근대 도시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드가는 근대의 속도를 따르는 도시인의 눈이 훑고 지나가는 순간 

그 눈에 들어오는 대상의 파편을 적극적으로 그림에 담았다. 
조금만 있으면 그림의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릴 것 같은 레픽은 

그런 행인의 눈에 들어온 대상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눈으로 다른 대상을 보는 산책자(Flaneur)이기도 하다. 
책임감이나 소속감은 없으나 열정적인 구경꾼인 산책자는 드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Nosha (Laundress), 1850~1853. by Honore Daumier. oil on canvas. 
131 x 9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오노레 도미에 (Honoré-Victorin Daumier 1808~1879)는 프랑스의 화가, 조각가 및 판화가였다.
1830년부터 1870년 제 2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까지 그는 

평생 동안 생계를 유지하며 정치인의 캐리커처와 만화를 제작하고 

신문과 정기 간행물에서 동포의 행동을 풍자하며 평생동안 유명해졌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알려져 있다. 
그는 부르주아지, 교회, 변호사, 사법부, 정치인, 군주제를 공격한 공화당 민주당원이었다. 
그는 가잔추어(Gargantua)가 출판된 후 1832년에 몇 달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도미에는 때때로 파리 살롱에서 그림을 전시했지만 그의 작품은 
프랑스 대중과 대부분의 비평가들에 의해 대부분 간과되고 무시되었다. 
그러나 시인이자 예술 평론가인 찰스 버들레어(Charles Baudelaire)와

도미에의 동료 화가는 젊은 세대의 인상파 및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그의 그림을 주목하고 크게 존경했다. 
이후 세대는 도미에를 19 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도미에는 지칠 줄 모르는 다작의 예술가였으며 100개 이상의 조각, 500개의 그림, 
1000개의 그림, 1000개의 나무 조각, 4000개의 석판화를 제작했다. 

 

[영상] Edgar Degas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Bust of D. Kennedy, Jacques Lipschitz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5 

 

자크 립쉬츠(Jacques Lipschitz 1891~1973)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 입체파 조각가였다.
어린 시절 립쉬츠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909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매료되어 
현대 미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12~13년 러시아 제국군에서 잠시 복무한 후 립쉬츠는 파리로 돌아왔다. 
1907년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파리에서 립쉬츠를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소개했다. 
립쉬츠는 입체파 그림의 다색 프리즘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작업했다.
립쉬츠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인 "Bust of D. Kennedy"(1964~1965)가 여기 전시되어 있다.

 

Jacob and the Angel, Jacques Lipschitz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5 

예술적 혁신이 절정에 달한 1920년대에 자크 립쉬츠는 

투명한 조각이라고 불리는 추상적인 형태를 실험했다. 
나중에 그는 더 역동적인 스타일을 개발하여 인물과 동물의 청동 구성에 효과를 적용했다.
1924~25 년에 립쉬츠는 귀화를 통해 프랑스 시민이 되었고  

베르테 키트로서(Berthe Kitrosser)와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정착했다.
1941년 뉴욕으로 이사했을 때 립쉬츠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입체파 스타일로 제작된 조각 "Jacob and the Angel"(1931)은 예술에 대한 립쉬츠의 열정을 반영한다. 

 

Loneliness in the Closet 옷장 속의 외로움, Ilya Kabak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7

일리야 이오시포비치 카바코프(Ilya Iosifovich Kabakov 1933~)는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Dnipropetrovsk)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모스크바에서 30년 동안 일했고 현재는 미국 롱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40년 이상의 경력을 통해 카바코프는 어린 시절부터 1980년대 초까지 
그의 삶을 추적하는 방대한 회고록은 말할 것도없고 
다양한 그림, 드로잉, 설치 및 이론적 텍스트를 제작했다.


모스크바 개념주의자이자 전체 설치 장르의 창시자인 카바코프의 방에는 
2004년 작가가 Hermitage에 설치한 작품 "옷장 속의 외로움(Loneliness in the Closet)"과 
"구석에 있는 화장실(Toilet in the Corner)"이 있다. 

 

Toilet in the Corner 구석에 있는 화장실, Ilya Kabak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7

카바코프는 은밀하고 친밀하며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벽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한다. 
작가는 어렸을 때 옷장에 오랫동안 숨어서 앉아 있거나, 
소련의 현실에서 화장실에서 숨어 있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duard Steinberg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9

 

이 홀은 1960~1980년대 비공식 예술의 리더이자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두 번째 물결의 예술가인 스타인버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러시아 종교 철학의 아이디어를 수행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들은 
작가의 미망인 갈리나 마네비치가 2014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기증했다.


에두아르드 스타인버그(Eduard Arkadevich Steinberg 1937~2012)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러시아의 화가, 철학자 및 활동가였다.
그의 아내 갈리나 마네비치(Galina Iosifovna Manevich) 역시 

러시아의 미술 평론가, 작가 및 수필가이다.
스타인버그는 처음에 생생한 모델과 풍경을 그렸고 

나중에는 "형이상학적 정물"로 전환했다.


1960~1980년대에 스타인버그는 예술 표현의 자유와 

기본 인권을 지지하는 소련의 반체제 운동에 참여했다.
스타인버그는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Dmitry Alexandrovich Prig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51

 

드미트리 프리고프(Dmitry Aleksandrovich Prigov 1940~2007)는 러시아 작가이자 예술가였다. 
프리고프는 소련 시대에 반체제 인사였으며 1986년에 잠시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프리고프는 십대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Art Institute에서 조각가로 훈련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시립 공원의 조각품을 디자인하고 건축가로 일했다. 

프리고프와 그의 친구 루빈스타인(Lev Rubinstein)은 공연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보는 1960년대에 시작된 개념 미술학교의 리더였다. 
그는 또한 깡통에 구절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2005년까지 거의 36,000 개의 시를 썼던 다작의 시인이었다. 
소비에트 시대 동안 그의 시는 지하에서 유통되었다. 
공산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공식적으로 배포되기 훨씬 전에 

émigré 간행물과 Slavic 학술지에 널리 게재되었다.
1987년부터 공식적으로 출판 및 전시되기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작가 연합에 가입했다. 
그는 1975년부터 예술가 연합의 회원이었다.

 

Dmitry Alexandrovich Prig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51

모스크바 개념 주의자이자 예술가, 시인, 조각가인 드미트리 프리고프의 방은 
그의 감독 하에 예술가의 스케치에 따라 지어진 설치물을 보관하고 있다. 
흑백 방은 의자와 일반적인 로프 울타리가 놓여 있고 빈 프레임이 벽에 걸려 있고 
그 옆에 거대한 레이블이 있는 박물관 홀과 비슷하다. 
태블릿에는 "마티스입니다", "렘브란트입니다", "말레비치입니다", 

"레오나르도입니다." 라고 씌여 있다.
드미트리 프리고프는 예술에 대한 인식의 자유와 부족, 예술가 이름의 역할, 
"순수한 묵상"의 불가능성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금속 장식 전시관
이곳에는 오래된 유물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까지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금속 장식들 - 크기도 작은 것부터 큰것까지 다양하게 있다.

 

알렉산더(Alexander) 3세와 마리아 표도르브나(Maria Feodorovna )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시계

 

The Imperial Crown of Russia

 

The Imperial Crown of Russia

 

Rothschild Fabergé Egg

2007년 11월 Christie's 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경매된 Fabergé Egg는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의 러시아 소유 박물관인 바덴바덴에 있는 
파베르제 박물관의 창립자 알렉산더 이바노프가 구입했다.

27cm 높이의 Fabergé Egg는 190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파베르제(Fabergé) 수석 작업장인 마이클 퍼킨(Michael Perchin)이 만들었으며, 
겨울 궁전의 유명한 오르몰루 자동 기계 공작 알에서 영감을 받은 시계와 
자동 기계를 모두 통합한 3개의 대형 Fabergé 달걀 중 하나였다.

 

유리병 장식

 

유리병 장식

 

조각

 

조각

 

Tsar Alexander III와 Tsarina Maria Feodorovna의 대관식, 1888. by Georges Becker. 
oil on canvas, 108 x 1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1883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Tsar Alexander III 1845~1894)와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a Feodorovna 1847-1928)의 대관식 장면을 프랑스 출신의 화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 1845~1909)가 1888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 1846~1909)는

1845년 5월 18일 파리에서 부르주아 멜키즈 가문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성향과 의심할 여지없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파리 줄리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로마노프(Romanovs) 황제 가문의 초청으로 

그는 오랫동안 러시아에 살면서 제국 황실의 명령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조르주 베커는 알렉산더 3세와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황후의 대관식을 
몇 년 동안 작업하여 1888년에 완성했다. 
알렉산더 3세와 마리아 페오도로프나의 대관식은 알렉산더 2세 황제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지 1년 반이 지난 1883년 5 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르주 베커는 1909년 가을 파리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다.

 

인증샷

1896년 5월 14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by Laurits Tuxen. oil on canvas. 

덴마크의 화가이자 조각가 라우리츠 툭센 (Laurits Tuxen 1853~1927)의 작품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14대 황제이자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1868년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1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사적으로는 교양 있고 예의바른 신사였지만, 황제로서는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다 러시아 혁명 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적으로 그는 매우 교양있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그는 당대 러시아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프랑스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발레 애호가였다. 
문학가 중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을 높게 평가했으며 말할 때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 속 내용을 곧잘 인용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선량한 인품과 교양, 사교술 등 입헌군주제 국가의 이상적인 군주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던 셈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니콜라이 2세는 유약하고 무능하면서도 독선적인데다 
심한 반유대주의자에 정치적으로 보수반동으로 전제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유약하기만 해서 주변 말 잘 듣는 예스맨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유약함과 독선이라는 
상반된 성향이 교대로 튀어나와 강단있게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우물쭈물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의 수용해야 할 때는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처리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리더로선 정말 짜증나는 유형이었다. 
전형적인 능력 없으면서 부지런하기만한 지도자상으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 말 안 듣고 자기 독단으로 밀어붙이다 모두 말아먹었다.

당대 러시아 정계에는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 표트르 스톨리핀처럼 유능한 관료들이 존재했으며 
니콜라이 2세 또한 스톨리핀에게 나름대로 힘을 실어주었지만, 
'나름대로 밀어주는 수준'으로 러시아를 되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스톨리핀의 암살 이후로는 황제의 독선을 제지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일 만한 인사들이 없었다.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과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의 

잘못된 대처로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지지를 잃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진퇴양난에 처한다.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정치는 독일인이며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 누이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맡았는데,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때문에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모두 라스푸틴을 싫어했고, 황제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 같은 황족들까지 오빠와 여동생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듣지 않았다. 

당연히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다. 


니콜라이 2세 본인은 권력을 휘두르는 라스푸틴을 황후처럼 

맹신하진 않았지만 아내와의 충돌이 두려워 막지 않았다. 
또한 농민 출신인 라스푸틴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방탕한 행동 또한 백성들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고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자녀들과 지나치게 접촉하고 강간 의혹까지 터지며 라스푸틴을 
잠시 유배보내긴 했지만 상황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의 말기 

러시아 제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니콜라이 2세에 대해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선량한 암군' 혹은 '죄 없던 자녀들까지 묶어서 잔혹하게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나, 
제정의 몰락 자체는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고 본다.

 

1896년 5월 14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by Laurits Tuxen. oil on canvas.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은 우리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다.
고종과 친러파는 아관파천 후 조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러시아에게 확실히 요청하고 싶어 했다. 
전 세계 외교사절이 집결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축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 일행은 비밀리에 니콜라이 2세를 만나 
조선을 러시아 보호국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차르가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이때 제안했다는 내용은 공개된 적이 없어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민영환과 러시아 외무상 로마노프 간에 체결된 각서 내용은 당시 수행원인 
윤치호가 쓴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의 가치를 만주 방위를 위한 완충지대 정도로 생각했다. 
일본에게 요긴한 조선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조선에 얽매이는 것보다 자신들의 국익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의 그런 저의가 드러나는 것은 고종이 환궁하고 나서 1년 여 지난 
1898년 4월 25일 일본과 맺은 로제-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과의 다툼에 

한 발 물러서는 모습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조선에서 러일 간 대립이 종식되고 일본의 독점적 지위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에 극도로 의존한 조선의 경제 구조, 만주 지역 경략의 매력이 러시아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끈을 놓게 만든 요인으로 보인다. 
이해 9월 일본은 경부선 부설권을 재차 획득했다.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1801. 
by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oil on canvas, 178 x 17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의 초상화,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1770-1837)
조세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1814)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재력이 부유한 크리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첫 결혼으로 1794년 7월 28일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 
자작 Alexandre de Beauharnais 장군의 아내였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 조세핀은 몇 달 동안 수감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1796년 그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과 재혼했다. 
1799년에 그녀는 말메종 궁전 (Chateau de Malmaison)의 소유자가 되었다.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1801. 
by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oil on canvas, 178 x 17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Napoleon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 1796~7. by Antoine Jean Gros. 
oil on canvas, 134 x 10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프랑스 화가 앙투안 장 그로스 (Antoine Jean Gros 1771-1835)가 그린
Arcole의 다리 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 1796~7. by Antoine Jean Gros. 
oil on canvas, 134 x 10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전투 장면과 공식적인 초상화를 결합한 이 그림은 화가

앙투안 그로스 (Antoine Jean Gros 1771-1835)의 개인적인 인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캠페인에서 보나파르트와 동행했으며 일어난 모든 일을 목격했다. 
그로스(Gros)는 나폴레옹의 이미지에서 신고전주의 예술의 

전형적이고 강한 개인의 이상을 구체화했다. 
그 모습은 영웅의 결단력과 용감함을 강조하는 긴장된 시선으로 
차갑고 차분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Peter the Great, 1838. 복제품

 

Peter the Great, 1838. by Paul Delaroche, oil on canvas. 130,6 x 97 cm.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 (Paul Delaroche 1797~1856)의 1838년 작품

 

표트르 대제의 옷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승마 초상화, 복제품

 

Catherine II on horseback, 18th century. by Vigilius Ericksen. oil on canvas. 358 х 388 cm. 

 

군복과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Equestrian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with a little arapchon, 1743. 
by Georg Cristoph Grooth. oil on canvas. 

 

Equestrian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with a little arapchon, 1743. 
by Georg Cristoph Grooth. oil on canvas. 

독일 출신 화가 조그 크리스토퍼 그루쓰(Georg Cristoph Grooth 1716~1749)의 
흑인 하인과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승마 초상화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by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파벨 1세(Pavel I Petrovich 1754~1801)는 로마노프 왕조의 9번째 군주로,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이다. 
 파벨의 출생에 대해선 파벨은 원래 표트르 예카테리나 부부의 

자식이 아니라, 예카테리나와 그 애인인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근거는 없다.

파벨은 아내인 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가 죽자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재혼하였다. 
1783년 어머니에 의해 가트치나의 영지에서 살게 된 그는 그 곳에 작은 궁정을 갖고 
영지를 관리하며 사병을 훈련시키고 정부 개혁을 계획하는 일에 몰두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갑작스레 서거하여 1796년 파벨이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살해되었고 따라서 표트르 3세를 계승할 권리를 
그녀가 침해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는 황태자인 동시에 정적으로서 항상 어머니의 감시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혐오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총애하던 신하와 측근들을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여 
국내정치와 대외정치의 정책 전반을 모두 거부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쓰라린 경험의 영향으로 1797년 그는 법령을 발표하여 
제위 계승법을 맏아들 상속의 원칙으로 확립했다. 
또한 프랑스의 혁명 사상과 투쟁을 더욱 거부하였고, 국내로 들어오는 
모든 사상 서적을 금지시켰으며 프랑스풍의 옷도 입을 수 없게 했다. 
이렇게 그의 통치 방식은 엄격하고 혹독한 규제로 일관되었다.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by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그러나 파벨 1세는 음울하고 변덕이 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가 시행한 여러 정책들 간에 일관된 노선은 하나도 없었다. 
예를 들면 영지 경작을 위한 농노들의 노동 부역 일수를 주 3일로 줄였다. 
이는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노들의 강제 노동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시행한 정책이었지만, 
반면 과거보다 더 많은 12만 명의 황실령지 농민을 지주 귀족에게 양도하여 
결과적으로 농노의 수를 늘려놓은 식의 정책이 되고 말았다. 


파벨 1세는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귀족들에게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798년 파벨 1세는 프랑스와 맞서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799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프랑스를 장악하게 되자 
그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사실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정신 질환자의 기질이 있었다. 
파벨 1세가 사람들의 외모만 보고 판단해 잘 생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사람들을 관료로 세우는 일이 있었고, 귀족들의 특권 중 
여러 개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01년 3월 23일 새벽, 파벨 1세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버닝젠 백작의 개인 소유 군인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파벨 1세의 침실에서 들어와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에 파벨 1세는 군인들에게 크게 화를 냈고,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파벨 1세를 처형하였다. 
일설에는 이에 아들 알렉산드르 1세가 동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화가를 알 수 없는 초상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0번째 군주.
본명은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Alexander Pavlovich Romanov 1777~1825)

파벨 1세와 뷔르텐베르크의 소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예카테리나 2세는 외아들 파벨을 싫어하여 그가 제위에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손자인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유주의 교육을 시키며 자신이 직접 데려다가 길렀다.

 
알렉산드르는 그런 그녀의 뜻을 거절하였으나, 예카테리나 2세에 뒤이어 황제가 된 파벨 1세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자 반란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당시의 러시아는 표트르 1세 때부터 추구해 온 
서구화의 결과로 누적된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통 사회와 정치체제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공격과 비판의 대상으로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제군주제가 서구화를 통하여 국력을 강화시키고 행정기구의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동안 계몽주의라는 서구의 사상까지 습득되어, 
입헌정치와 권력층의 특권을 제약하는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농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가장 드세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의 악이라고 여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어 기존 질서와의 마찰이 불가피해지자 
알렉산드르 1세는 결국 러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수호하는 쪽을 택하였지만 
처음에는 국민에 대한 무마책과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러시아 내부의 정치질서를 바로잡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행정기구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알렉산드르 1세는 그의 젊은 시절 친구인 노보실체프, 스트로가노프, 차르토리스키 등으로 구성된 
비(非)공식위원회를 조직하여 여러 차례 회의를 하면서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구성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즉위 이후 1805년까지 비공식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농노제의 폐지를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행정부와 일반 대중은 이런 개혁에 대해 아직 이해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먼저 농노제의 폐지가 가져올 귀족층의 약화를 현재 실권을 쥐고 있는 귀족들이 허락할 리가 없었고 
더욱이 황제 자신도 자신이 특권을 포기하는 자유주의 물결을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회의는 자주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1805년 급기야 

프랑스와의 전쟁 발발로 러시아의 개혁은 일단 보류되었다. 
따라서 농노제는 무수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861년까지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르 1세의 집권 초기 몇 해 동안에는 착실한 성과도 있었다. 
원로원이 부활되어 최고의 사법 및 행정기관으로 바뀌어 황제의 권한을 어느 정도 견제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결실은 근대적인 관료제의 도입이었다. 
이것은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폐지된 합좌제(콜레지아)에 대치된 것이다. 
1802년부터 몇 년 동안 각 부서를 1명의 장관이 책임지는 
현재의 체제와 흡사한 관료제도를 확립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법무부, 외무부, 재무부, 국방부, 상업부 그리고 문교부가 있었으나 
나중에 상업부가 폐지되고 경찰부가 새로 구성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나폴레옹 포위망
1801년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끝없는 야심을 두려워하여 
1804년 영국이 주도하는 대(對)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전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당시 러시아가 반(反)프랑스 세력에 가담하게 된 것은 영국과의 경제적 유대,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통적 우호관계,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전통적 적대 감정 등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로 알렉산드르 1세는 오래 전부터 나폴레옹을 위험 인물로 생각해 왔으며, 
그 나름대로 유럽의 새로운 질서 체계와 연관지은 몇 가지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0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의 연합군이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가담하여 프랑스와 동맹국인 에스파냐와 충돌하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그 해 12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은 아우스테를리치(Battle of Austerlitz)에서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참패를 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아우에르슈테트 전투(Battle of Auerstadt)에서 큰 타격을 받고 전쟁을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전쟁을 수행하여 1806년 프로이센 왕국을 새로운 동맹국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예나(Battle of Jena)에서 프랑스에게 무참하게 격파당했고 
러시아도 프리틀란트(Battle of Friedland)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르 1세는 재빨리 정책을 변경하여 나폴레옹과 강화협정을 맺고 
1807년 6월 25일 틸지트에서 프로이센과 함께 프랑스와 화해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결국 프로이센을 2등국으로 격하시켰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러시아는 동유럽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으며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유럽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대두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지지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맞서면서 
프랑스와 잠정적 화해 관계로 안심하고 기타 상대국들과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국경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었으며 1803년과 1810년 사이에는 
지배권이 서부의 그루지야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대륙 봉쇄(Continental System)
그러나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발표와 함께 양국은 다시 한 번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봉쇄령은 유럽의 무역을 마비시켜 
유럽 각국은 프랑스에게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더욱이 러시아는 농업국가라서 매년 많은 양의 곡물을 영국으로 수출해 왔기 때문에 
대륙봉쇄령으로 수출선이 끊기자 대지주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밖에도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 사이에 서로를 위험시하고 적대시하는 
개인적인 감정과 양국의 외교적 팽창 다툼 등이 1812년 평화를 깨는 주된 요인이 되고 말았다. 
또한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있어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영토가 
탐이 났을 뿐더러 점점 남진해 내려오는 러시아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1812년 6월, 드디어 프랑스는 러시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 15만 명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의 원군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했다. 
병력을 각각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으로 나누어 총공세의 형태를 취했다. 
한편 러시아는 서둘러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 및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서부 국경 지대에 있던 20만 명의 군사들을 

3개 부대로 나누어 프랑스군과 맞서게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병력 수나 경험 면에서 러시아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러시아의 방어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알렉산드르 1세의 계획은 장기전으로 초기에는 방어전을 펴고 
서서히 서부에서 동부쪽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는 1차적으로 스몰렌스크를 근거지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단결하였다. 

고육지책으로 강구한 것이 초토화 작전이었다. 
프랑스군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도록 

후퇴를 거듭하면서 식량과 가옥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리고 항상 일부 병력을 매복대로 남겨두어 프랑스군을 기습공격했다. 
그 결과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러시아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총사령관으로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을 새로이 임명했다. 
수보로프의 제자이자 그의 추종자인 쿠투조프는 후퇴 작전에 동의를 했지만 
일방적인 후퇴를 원하지는 않았다. 
특히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접근해 오자 그는 옛 수도인 모스크바를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서쪽 보로지노 촌락을 방어기지로 

설정하고 나폴레옹과의 대결전을 계획했다. 
보로지노의 지형적 조건은 병력 이동로가 매우 좁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종대로 공격할 수밖에 없음을 이용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쿠투조프는 12만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최대한 적군의 이동로에 근접시켜 
후방을 기습 공격하도록 방어대형을 편성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동요되면 즉시 전방에 배치된 600여 문이 넘는 대포로 포격했다. 
이렇듯 철저한 방어망에 부딪힌 프랑스군은 진격을 쉽게 하지 못했다. 


1812년 9월 5일에 벌어진 야간전투가 도화선이 되어 쌍방의 전투는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이른바 치고 빠지기 전법을 폈고 
프랑스군은 전형적인 공격전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프랑스군의 피해가 늘어났다. 
나폴레옹은 일단 공격을 중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 포 사격을 공격 신호로 하여 총공격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왼쪽 방어선을 공격하자 러시아군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막았다. 
프랑스의 8번째 공격으로 러시아의 바크라치온 장군이 치명상을 입게 되자 
방어전이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왼쪽 방어선이 점령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피해가 상상외로 컸기 때문에 더 이상 진군할 수는 없었다. 
보로지노 전투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격전이었다. 
또 하루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4만여 명이나 전사했으며 
프랑스와 동맹국 측에서는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바크라치온 공작과 그 밖의 유명한 지휘관들이 죽거나 다치는 등 사망자 중에는 
다수의 장군과 수천 명의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러시아 진영의 중앙과 왼쪽은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했지만 오른쪽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전투를 중지하고 모스크바의 남동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9월 14일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모스크바 정복이 곧 러시아의 정복이라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나폴레옹은 크레믈린 궁전을 총본부로 삼고 
전군을 분산시킨 뒤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몇시간 후 모스크바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크레믈린 궁전에까지 옮겨 붙었다.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진화작업을 폈으나 사방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스크바 대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로는 
프랑스 병사들이 민가에 들어가 식량을 약탈할 때 불이 붙은 등불을 그대로 두었다가 
민가에 옮겨 붙게 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의 수비 책임자인 로스토프친이 
프랑스를 괴롭힐 목적으로 죄수들을 석방시켜 곳곳에 방화했다는 설이다.

프랑스군이 애써 고생하며 겨우 정복한 모스크바가 하루도 안 되어 
거의 불타 잿더미가 되었으므로 병사들이 숙영할 집도 없게 되었고 식량도 계속 모자랐다. 
게다가 추위는 예년에 비해 더욱 혹독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이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니 알렉산드르 1세가 
화평을 청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동안 추위는 더욱 극심해져 
프랑스군 내에서 얼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거꾸로 부하를 보내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강화를 구했으나 묵살당했다. 


사태가 갈수록 나빠지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마침내 1개월 만에 퇴각을 결정했다. 
계속되는 혹한과 배고픔에 떨던 프랑스 병사들은 죽은 전우의 옷을 빼앗아 입고 
죽은 말을 뜯어먹으며 퇴각을 했다. 
그러한 때에 기회를 노리던 러시아 기마병들이 출동하여 기습작전으로 협공을 가했다. 
또한 곳곳에서 농민 파르티잔이 들고 일어나 앞길을 막고 공격해왔다.

나폴레옹은 가능하면 선발대가 이미 통과한 길을 피하고 
물자가 있을 만한 다른 길을 택하여 퇴각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눈치챈 러시아군의 기습으로 더욱 곤경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다. 
결국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11월 초에 군대를 해산하고 자유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말 나폴레옹이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올 때는 
출발 당시 60만 대군 중에 겨우 3만 명의 패잔병이 귀국할 수 있었다.

1814년 러시아군의 파리 입성
1813년에 쿠투조프는 죽었으나 러시아군은 황제를 따라 프랑스군을 계속 추격했다. 
1814년 3월 러시아군은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엘바 섬에 유배되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일동 공로를 인정받으며 전후 처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기독교의 정의와 사랑을 내세우며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유럽의 복고 반동에 앞장섰다. 
그 부산물로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을 양도받아 

폴란드 왕국을 부활시키고 그 왕을 겸인하는 소득도 얻었다. 


1812년의 나폴레옹 격퇴 전쟁은 러시아에서는 ‘조국 전쟁’으로 불린다. 
영웅적인 투쟁으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고 

1813년~1814년의 원정 싸움에서까지 대승리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민족 의식은 급속도로 고양됐다. 
러시아의 작가와 음악가, 화가 등 예술가들은 

조국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어 많은 예술 작품을 남겼다.


대프랑스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 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 정치를 일임하고 국제 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했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반동 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는 흑해 연안의 요양지인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 
워낙 갑작스럽고 비밀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가 죽음을 가장하여 제위를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종교에 헌신하고 있다는 소문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알렉산드르 1세를 자칭하는 가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본부인 사이의 자녀가 어려서 죽어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이었다.

 

Battle of Borodino, by Peter von Hess, The State Hermitage Museum

유럽 전역을 빨아들이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러시아를 피해갈 리는 없었고, 
우연적이며 필연적인 몇 가지 이유가 얽혀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일으킨다. 
일찍이 없던 초대규모 병력의 침공 앞에 알렉산드르 1세는 군사적 소양이 

사실상 전무함에도 전선의 전술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러시아군의 

연전연패에 여러모로 기여하였으나 끝까지 항전한다는 의지만은 굳건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는 밀리지 않았을지라도 러시아의 광대한 토지와 

극심한 추위, 그리고 제 몸을 갉아먹는 시간 앞에서 결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정의 기록적인 실패는 결국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몰락을 앞당기는 한편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실상 끝장나며 

나폴레옹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이 세워진 빈 체제에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해방자'로 일컬어지며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군사적 능력이야 어찌됐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라의 지도자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수많은 영웅들로 장식된 모스크바 크렘린 궁의 붉은 성벽 앞에 그의 동상도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젊어서 따르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스스로 깨부수는 모순되는 처지에 있었고 
전쟁 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극히 보수적인 군주가 되면서 한편 미신에 빠져드는 등
영웅으로 떠받들여진 겉모습과 달리 불행한 삶을 살다가 크림 반도에서 요양 중 사망한다.

 

Parting of Napoleon and Alexander I at Tilsit (copy), Anonymous Artist. 19th century.
oil on canvas. 75 x 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Parting of Napoleon and Alexander I at Tilsit (original), 1807. 
by Gioacchino Giuseppe Serangeli. oil on canva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알렉산더 1 세 : 동맹과 적". 
원작자는 로마 출신 화가 지오아치노 주세페 세란젤리 (Gioachino Giuseppe Serangeli 1768-1852)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by Franz Krüger,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독일 출신 화가 겸 석판가 프란츠 크루거 (Franz Krüger 1797~1857)의 작품 니콜라스 1 세의 초상화.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아들 없이 딸만 있었던데다 이전 파벨 1세가 제위 계승법을 확립하면서
여성의 황위 계승을 금지하였으므로 그의 막내 동생인 니콜라이 1세(Nicholas I Pavlovich, 1796~1855)가 
새로운 황제 로마노프 왕조의 11번째 군주로 등극한다.

니콜라이 1세는 1796년에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알렉산드르 1세보다 19살 아래였다. 
니콜라이 1세는 체격이 건장하고 외모가 수려하여 귀족적인 위엄을 뿜어내어 
항상 다른 사람을 압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권위에 찬 엄숙한 사람’ 등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이와 같은 그의 인상처럼 그는 병사들의 복장이나 군대의 훈련 등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제위에 오른 후 먼저 군인들의 제복을 정비할 것을 명령했으며 
심지어 단추의 수까지 지정해 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가 즉위할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전쟁과 내란 등으로 사회가 불안했다. 
게다가 즉위식 때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 이로 인해 

군주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며 항상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본능적인 공포는 그를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혁명 운동 탄압에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의 헌병'으로 불렸다.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by Georg von Bothman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예민하고 의심이 많던 니콜라스 1세는 국가의 모든 기능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여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어갔다. 
니콜라이 1세는 정부의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직접 처리하려 했다. 
국가평의회나 원로원 등의 도움 없이 황제 직속으로 사설 집행부를 만들어 일을 처리했다. 


곧 황제원에 권력이 집중됐다. 
황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처리하는 황제원의 단면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제3부는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곧 거대한 비밀경찰기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3부의 제1과는 반(反)정부 조직을 감시했고, 제2과는 종교적 이단행위를 감시하고 위조화폐를 단속했다. 
제3과는 체류 외국인을 감시하고 해외정보를 수집했으며, 제4과는 농촌과 농민의 동향을 감시했다. 
제5과는 문서검열을 담당했다. 
니콜라이 1세는 제3부에서 작성해 올린 보고서를 상세히 훑어보고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지시했다.

그와 더불어 반(反)정부 사사의 유포를 막기 위해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당시 갓 피어나던 러시아 문학도 제3부와 정부에 의해 감시를 받아, 
개작을 강요받거나 작가가 유형 또는 구금을 당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교육 역시 반동의 깃발 아래 획일적인 통제 하에 놓였다. 


1828년에 제정된 규칙에 따라,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다. 
그와 더불어 법률학교와 여러 기술전문학교를 세우는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는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의 자녀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대학교육의 강조점도 관료체제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대외정책 면에서도 신성동맹의 정통 이념에 충실했던 니콜라이 1세의 첫째 목표는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를 책임지는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혁명운동을 진압하고 
그 여파가 러시아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그의 지배 아래에 있던 
폴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1831년 데이비치 장군이 이끄는 
15만 대군을 바르샤바에 보내 무참하게 진압했다. 


그러고는 폴란드에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던 자유와 자치권을 빼앗고 
완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렸다. 
1832년 5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라는 세 열강국 간의 회의가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이 런던 회의는 그리스에 안정적인 정부를 성립하기 위해 모인 국제 회의였다. 
이 협상으로 바이에른 왕자 오톤을 임금으로 세워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1833년에는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등과 동맹을 맺고 유럽을 수호할 것을 다짐했다.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1848년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프랑스와 즉각 외교를 단절하고 
40만 대군을 서부 국경으로 집결시켰으나, 유럽 각국의 냉담한 반응에 군대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1849년에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가 지원을 요청해왔고, 
니콜라이 1세는 기꺼이 군대를 보내 혁명을 진압하고 합스부르크 가를 위험에서 구출해주었다.

유럽의 혁명을 목도한 니콜라이 1세는 국내에서 억압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경찰통치는 점점 더 독단적으로 변해갔고, 개혁의 방도를 찾으려는 시도는 물론 
이견의 표시마저도 금지되었다. 
대학교에서도 입학자격과 교과과정이 더욱 개악됐다. 
매우 경미한 정치범에게도 시베리아 유형이 떨어졌다. 
체제의 충실한 옹호자였던 우바로프 문교부 장관마저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해임됐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강경책은 곧 군부에 대한 의존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정치가 거의 대부분 장군들로 구성된 특사에 의존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행정적 공백으로 인한 부패와 혼란이 가중되었다.

1853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다뉴브 강 유역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함으로써 크림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았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압력을 가해 왔다. 


주변국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러시아가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러시아는 졸지에 유럽과 맞서 싸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러시아 해안에서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1854년 9월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동맹국들은 7만 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점령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패배하였고 군사적 ·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1855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Decembrists on Senate Square, Uprising of December 14. 1853. by Vasily Timm. 
oil on canvas, 196 x 12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실패로 끝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에서 기인한 것으로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자유주의 운동에 위협을 느껴, 
전제 정치를 더욱 강화하게된다.
19세기 전반기 농노제와 전제정치가 계속 존속하여 빈곤한 삶에 빠져 있던 
러시아 제국에 자유주의 사상이 전파되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을 추격해 유럽을 원정했던 진보적인 성향의 
청년 귀족들 사이에 자유주의 분위기 영향을 받게된 것부터 시작된다.

 

Decembrists on Senate Square, Uprising of December 14. 1853. by Vasily Timm. 
oil on canvas, 196 x 12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청년 귀족들은 1816년부터 구제동맹이라는 결사를 조직하였으나 

중간에 사상적 차이로 인하여 공화제를 주장하는 남부결사,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는 북부결사,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슬라브 결사 

등으로 분열되었으나 활동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면서 3주 동안 후계 계승 논쟁으로 

혼란한 공백기가 이어지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혼란한 기간을 틈타 이를 기회로 봉기를 계획했다. 
이들은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1825년 12월 14일에 봉기를 하게 된다.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농노제폐지 등 서부 유럽같이 자유주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봉기는 준비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하였고 실행 직전에 

남부 결사의 지도자였던 파벨 페스텔이 우연한 경위로 체포됨에 따라 

사전에 계획이 니콜라이 1세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곧 쉽게 진압되었다. 
임시정부의 권력자가 될 예정이던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도망쳤다. 
곧이어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의 연대도 역시 쉽게 진압되어 무너졌다. 

이어서 니콜라이 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페스트체프 류민 5명이 1826년 7월 25일에 처형당했고, 
31명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Vladimir Bobrinsky 백작 (1853-1877)의 초상화, 1879. by Makovsky, Konstantin. 
oil on canvas. 135,5 x 8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15.

러시아 이동파 화가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 1839-1915)의 작품
Vladimir Bobrinsky 백작 (1853-1877)의 초상화.

 

Portrait of the palace grenadier M. Kulako, 1915. by Vladimir Alexandrovich Poyarkov
oil on canvas. 79,5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15.

 

화려한 방들

 

[영상] General Staff Building 3 Fl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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