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Pablo Picass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402번 홀에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도 다섯 점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피카소의 작품은 431~434번 홀에 더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에르미타지 일반 참모건물(General Staff Building)에 전시되어 있는 
피카소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Fruit Vase and Bunch of Grapes 과일 꽃병과 포도 다발, 1914. by Pablo Picasso. 
Paper, gouache, tempera, sawdust and pencil. 67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1881~1973)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큐비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3만여 점이 된다. 
피카소 작품의 개수와 다양성 때문에 많은 예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 왔다. 
하지만 각 시기의 명칭을 정하고 시기를 몇 개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계속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1904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 색과 분홍 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피카소는 스탈린을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이 스탈린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되어 
1957년에 제명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 예를들어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발표하였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1938년)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Man with arms crossed on his chest. 1909. by Pablo Picasso. 
Watercolor, gouache and charcoal on paper pasted on cardboard, 65.2 x 4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시터의 머리, 얼굴, 흉상 처리는 1909년 봄 파리에서 

다양한 기법으로 피카소가 제작한 작품의 전형적인 형태와

색상 솔루션의 기하학적 단순화 원리를 보여준다. 
작가는 여기에서 개인의 묘사보다는 오히려 형태의 은밀한 구조의 표현에 관심이 있다.


이미지는 개별 섹션으로 나뉘어 있지만 피카소는 

엄격한 윤곽을 통해 하나의 장식 디자인으로 통합한다. 
황토색과 회색 톤의 간결하고 거의 금욕적이며 조화로운 조합이 전체 구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피카소는 풍부한 색채를 보여주는 것보다 빛과 공간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Nude figure of a young man, 1906. by Pablo Picasso. gouache on cardboard, 67.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이 작품은 피카소가 파리에서 1906년 봄과 스페인에서 같은 해 여름에 작업한 
젊은 남성의 인물이 있는 스케치 및 미완성 작품 그룹에 속한다. 
이 그림에서는 구조적 원리의 기하학을 강조하는 경향이 
피카소의 작업에 나타나기 시작한 후기 장미 시대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십대의 얼굴은 그 자체로 닫히고 주인의 관심은 

골동품 회상이 느껴지는 해석에서 인물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카소 자신은 새로운 형태를 찾고 있다. 
그 안에 둘러싸인 볼륨과 상호 작용하는 활기찬 등고선은 
침착하게 서 있는 청소년의 이미지에서 내면의 긴장과 움직임을 드러낸다.

 

 

Composition with a cut pear, 1914.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5 x 3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904~1906년을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라고 하는데 

이 때 피카소는 황토색과 연한 장미빛을 자주 사용했다.
그림에는 곡예사나 그 가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색적인 구경거리보다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 훨씬 흥미를 느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책임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개인의 무능이나 운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참하기 보다는 신비스런 기운이 더 강했다.

Painting is just another way of keeping a diary. - Pablo Picasso
그림은 일기를 쓰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의 이름을 피하고서는 

한 줄의 글도 써 내려갈 수 없다.  
그만큼 피카소에 대한 수없이 많은 글과 책들이 범람하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피카소는 천재다, 그는 미치광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난센스다,
어린애도 그보다 잘 그릴 수 있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다"
여기에 몇 가지 말들을 덧붙이자면 그는 호색한이기도 했고, 

동시에 휴머니스트, 무정부주의자였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런 천재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게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 살 때에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피카소의 추상화들은 대개가 이런 그의 치밀한 데생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어설픈 그림이거나 미치광이의 그림이라는 식의 비판은 
피카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다.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 이남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스페인(이베리아 반도) 지역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던 유럽의 변두리였다.
스페인 회화의 오랜 전통은 프란시스코 델 고야 이후 그 맥이 끊겨 19세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들라크로와와 마네의 영향으로 20세기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찌감치 자신이 라파엘로보다 낫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던 피카소에게 

파리는 "꿈과 빛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00년 피카소의 나이 열아홉 살 때 그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파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답답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시의 파리는 거리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넋을 잃었고,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원래 태생이 스페인인데다가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었던 피카소였기에 
이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열적이었는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아틀리에는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시기의 스페인 출신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친구였던 시인 뽈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결별하면서까지 평생 한 여자에 충실한 편이었다면 

피카소는 숱한 여성편력을 남겼다.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을 혹은 한 여자가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일인지 아니면 지극히 적합하지 않은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카소 개인의 경우로 국한해 놓고 본다면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말하는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등의 구분은 
모두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이 그의 화면에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에

침잠케 했는데, 1901~1904년에 이르는 이 시기를 일컬어 "청색시대"라 한다.

이어서 그가 첫 여자 피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는 
그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분홍시대를 열게 만든다. (1905년) 
이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되는 데 이 시기에 
피카소 주변의 인물들은 시인 막스 자콥과 아폴리네르, 미국인 화상 스타인 남매, 
독일인 화상 칸 바일러, 화가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현대의 회화사에 있어 "사진의 등장"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동안 자연의 모사에 치중했던 화가들에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 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자 동시에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마음 속으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들라크로와 같은 이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사진가인 A.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기존의 예술이라는 제도권 안에 진입시킨 공로가 크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유럽의 예술계에서 사진이 예술이라는 체제 안으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1859년에 있었다. 
프랑스사진협회의 노력으로 샹젤리에 궁에서 열렸던 "사진 살롱 개최"가 바로 그것인데,
사진의 예술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하던 보들레르조차 "1859년 살롱비평"을 통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1862년에는 앵그르를 비롯한 
유명 미술가들이 사진의 예술 편입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 예술에 편입된 사진은 
그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술의 한 갈래가 되었다. 
좀더 거칠게 말하자면 화가들이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더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피카소가 등장하기 직전인 19세기의 일이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행했던 것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구체적인 결실들을 맺어가는데, 
1907년 일찌기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처리될 수 있다"고 말했던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현실화시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함축된 

기하학적 그림을 경쟁적으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입체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런 혁명적 활동은 단순히 화풍(양식)의 변화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 콜라주, 앙상블라주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무너뜨렸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술의 고귀함은 

작품의 주제만의 문제도, 대상이나 방법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미술이란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그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뽈 엘뤼아르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Zebras at a watering hole, 1906. by Georges Manzana-Pissarro. oil on canvas, 

64.5 x 5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이 작품은 1906~1907년 파리 전시회에서 전시된 피카소 초기의 

특징적이고 조화로운 구성 중 하나이다. 
그의 취향의 형성과 일종의 동양 장식 스타일에 대한 깊은 각인은 풍부한 금색 팔레트와 
구불구불한 선형 아라베스크를 기반으로 하여 구성의 모든 요소를 리듬에 종속시키는 
예술가의 이국적인 아라비아에 대한 매혹에 의해 남아 있다. 

 

Violin and Guitar 바이올린과 기타,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5.5 x 54.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가 당시 관심을 가졌던 큐비시즘 (cuism) 스타일로 그려졌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피카소는 악기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이올린과 기타”이다.
그림의 공간은 패턴, 핑거 보드, 바이올린 “에세이”, 벽지 조각, 테이블 단편, 
눈에 띄지 않는 유리잔의 힌트로 연결되어 상호 침투하는 많은 평면 요소로 해체되며 
정적 생명은 산란 요소의 혼돈에서 나온다.

피카소는 초기 청색시대의 작품과 나중의 입체적 작품들을 
비교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피카소가 진짜 대단한 화가라고 느껴지는 것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작품이 
시기별로 나눠질 수 있게끔 화풍이 변해왔다는 점 아닐까 싶다. 
표현하는 방법이 변한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방식이 변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큐비즘((Cubism 입체파) 시대 (1907~1917)
큐비즘은 20세기 야수파(포비즘 fauvisme) 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유럽 회화를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로부터 해방시킨 20세기 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의 하나이며 입체주의라고 한다. 
큐비즘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 조각, 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큐비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  표현파에서 하나의 극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느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술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 추구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나무를 쌓아 올린 것 같은 입체 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미술은 초기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모더니즘의 가장 의의 있는 발전 가운데  하나인 이 회화 방식은 
1907년과 1914년 사이에 조루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들의 엄격한 목표는 평면의 캔바스 위에다 견고함과 볼륨감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캔버스란 그 2차원성 또는 그 "그림의 성격"을 상실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주제'를 여러 다른 각도에서 묘사하고 동시에 이를 캔버스 위세서 재구성함으로써 
평면들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한다    

20세기 최초의 새로운 미술운동이며 미술사의 전환점인 유파로서 추상화를 시도, 
많은 유파가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고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현대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큐브"는 정육면체란 뜻으로 큐비즘은 1907년 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파리에서 일어나 유럽 전역에 파급된 미술 혁신운동이다.

 

Two Sisters (Date), 190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피카소가 뛰어난 예술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두 자매 (Two Sisters)>는 피카소가 스물한 살에 그린 작품이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또 잘 그렸던 청년은 1901년 여름, 
파리의 생라자르(Saint-Lazare) 병원을 방문해 두 자매의 만남을 목격한다. 
두 자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흩어져 살았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각기 다른 인생을 산 그들은 수녀와 창녀가 되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병원의 매춘부 수용 병동에서 만났지만 

기쁨은 잠시, 서로의 처지가 너무나 달랐다. 
피카소는 두 자매의 기막힌 사연을 잊을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피카소는 두 자매가 남긴 짙은 인상을 
꼬박 일 년에 걸쳐 그려 이듬해 여름에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에서 어느 쪽이 수녀이고 누가 창녀일까.
오른쪽의 여인을 수녀라고 생각하고 왼쪽을 창녀로 보기 쉽다. 
그러나 거꾸로 왼쪽이 수녀고 오른쪽이 창녀가 된 자매다. 
블라우스를 풀어 젖힌 오른쪽 여인의 왼쪽 팔에 아기의 검은 머리가 조금 보인다.
창녀가 된 여인은 세상에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힘겹게 지내면서 

사람들의 학대를 받고 농락을 당해 몸이 더럽혀졌다. 
무시와 경멸을 받을수록 세상을 향한 분개가 커졌다. 
수치를 느낄수록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 분노는 자기 보호의 모습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 앞에 선 수녀는 머리를 들 수 없다. 
친자매의 기구한 운명에 고통스러워하며, 세상 모든 죄의 죄인이 된 심정이다. 
슬픔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녀는 감호 병동에 봉사하러 왔다가 병을 치료하며 

아기를 돌보고 있는 자신의 자매를 우연히 만난다. 


그림에 흐르는 팽팽한 정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해후한 두 자매는 침묵에 잠겼다. 
그럼에도 맨발의 두 자매가 어울린 모습에서 병마와 고독의 고통 너머 
슬픔을 위로하는 친밀한 가족적 유대가 느껴진다. 
수녀 뒤로 아치가 보인다. 아치가 있는 곳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다.

피카소는 무엇이 남달랐을까
20대 초반에 피카소는 소외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1821~1881)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처럼 걸인, 장님, 행상, 유랑인, 노숙자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들을 파란 색조가 감싼다.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에르미타주 대표 소장품 중 하나인 <두 자매>는 
딱 봐도 청색시대 작품으로 진한 청색이 주는 비극적인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청색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를 지나 피카소는 사람의 내면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외형을 해체해서 그 외면을 만든 내면을 그려 입체파(cubism)라고 불리는 표현법을 열었다.

 

The Dance of the Veils,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7년 봄 피카소가 그린 베일의 댄스(The Dance of the Veils)는 
초기 입체파 회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커튼이 달린 누드의 이미지는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 잡았다. 
그 중 가장 주된 작품이 바로 이 그림이다. 


스페인 예술 전통의 특징인 완전히 알 수 없는 세계의 신비한 폐쇄에 대한 아이디어는 
피카소의 전망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 중 하나이다. 
인체의 구조를 변형시킨 피카소는 에너지 넘치는 음영으로 덮인 
별도의 이동 가능한 평면에서 인체를 재현한다. 
그것들을 움직이고 비틀면서 그는 댄서의 긴장하고 요염한 회전을 가시화한다. 
그녀가 매체로서 신비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은 것은 

그녀의 리듬이 완전히 해체된다는 증거이다. 
배경과 커튼이 모두이 회전으로 그려진다.

파블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다. 
93세의 나이로 1973년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그에게 있어 
살아 생전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작품 이외에 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낸 시대는 그렇게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자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전쟁을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그가 이런 전쟁과 대학살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바로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긴 것이다.

마드리드 시절부터 거리의 부랑아들과 빈민을 화폭에 그려내던 무정부주의자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직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공산당의 예술관과 피카소의 예술관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의 학살>을 둘러싼 피카소와 
프랑스 공산당의 충돌은 결국 피카소로 하여금 프랑스 공산당과 결별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피카소는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양심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청색시대 (The Blue Period, 1901-1904) 
화가들, 특히 성공한 화가들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다. 
피카소는 19세 때 바르셀로나를 떠나 낯선 파리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지내게 된다. 
당시 세기 말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페시미즘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청색시대(1901-1904)를 맞이한다.

몽마르트에서의 '청색시대' 동안 피카소는 청색을 주조로 그림을 그리며, 
모든 것을 푸르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계속하고...
그가 좋아하는 색깔로서의 청색, 이 시기 그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청색, 
게다가 그가 입고 다녔던 옷들의 색깔까지도 청색이었다고 하며, 
그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1901년 (20세), 그는 파리를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피카소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월 바르셀로나에서는 첫번째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양한 재료로 그린 초상화 50여 점이었다. 
이때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말경에는 피카소의 서명에서 Ruiz를 완전히 빼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파리를 동경하고 있던 카탈루냐 미술가 · 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파리의 카페 '검은 고양이' (Chat Noir)를 본뜬 
'4마리의 고양이' (Els Quatre Gats)에서 자주 모였다. 
그밖에도 죽어가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제를 주제로 하여 그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임종의 순간, Last Moments〉도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해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렸다.

 

Absinthe drinker, 1901.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7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피카소는 1901년 가을 22세였던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카페에서 인간의 외로움, 고립과 공허함의 주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드가와 피카소의 많은 존경을 받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스페인 사람의 그림에서 주제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감각을 얻었다.

외로운 여 주인공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있고, 

배경은 더럽고 붉은 벽이 불편함을 더 해준다. 
캔버스의 평탄함을 강조하면서 벽의 색과 푸른빛이 도는 대리석 테이블은 
여성을 둘러싼 공간을 안쪽으로 밀어내어 절망적인 외로움으로 그녀를 감싸는 듯하다. 
압생트 벼랑의 포즈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우리는 추방자를 식별할 수 있다. 
그녀 몸의 완전히 밀폐된 공간, 오른손의 표현적인 왜곡은 

코일 스프링의 긴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 엄격하게 상자를 두었다. 
손은 그림의 불완전한 타원을 통해 정확한 수직으로 이어지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보호 손은 어깨를 움켜쥔다. 
모든 것이 내면의 긴장감을 강화하고 주변 세계에서 인물을 차단한다. 
피카소의 실제 관찰을 바탕으로 삶의 비극에 대한 

일반화되고 시대를 초월한 상징을 만들었다.

그림의 뒷면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무거운 오버 페인트 밑에 
숨겨져 있는 여성의 머리는 아마도 작가를 만족시키지 못한 작품의 일부일 것이다.

 

Absinthe, Girl in a Cafe, 1901. by Pablo Picasso. gouache, pastel on paper,
7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피카소의 그림 "압생트(Absinthe)를 가진 소녀"는 주인공의 비대해진 손이 
마치 껴안으려는 듯 눈에 띄기 때문에 특별한 드라마로 가득 차 있다. 
여자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그녀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예술 비평가들은 압생트에 앉아 피카소의 여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최근 연구자료를 보면 이 압생트에 포함된 Thujone은 마치 

강한 커피를 수십 잔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한다. 
신경자극을 통제하고 전달하는 효소를 막음으로써, 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성분에는 납이 일정량 포함되어 오랫동안 음용할 경우 건강을 해친다고 한다.
피카소 또한 이 압생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1901년 가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이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보라색과 황색의 강한 대비가, 마치 술에 취했을 때 느껴지는 알딸딸함을 뿜어내고 있다.

 

Portrait of Soler, 190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00 x 7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3년, 스물 두 살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친구들의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그중에는 젊은 예술가,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후원한 세련된 
바르셀로나 재단사 솔러(Soler)의 초상화가 있다. 
피카소와 솔러는 수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피카소는 한 번 이상 그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 
Hermitage에 소장된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솔러의 전체 모습에 

내재된 예술성과 자연스러운 우아함, 그리고 멋지게 콧수염 끝을 올린 

그의 얇은 얼굴의 기억에 남는 독창성을 전달한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려고 한다. 
솔러를 그의 영혼과 조화를 이루는 강렬하게 우울한 청록색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피카소는 그 사람이 원래 내재되어 있던 "비극적인 삶의 감각"을 지닌 사람을 묘사하게 만든다. 
이 초상화에서는 앞의 "Absinthe Drinker"에서와 같이 카페에서 
한 사람의 외로움을 주제로 사람들 사이의 외로움이 들린다. 
따라서 우울한 느낌과 신경질적인 얼굴에 슬픈 분리의 표현이 있으며, 
그 유령같은 창백함은 배경과 의상의 깊은 음색에 의해 강화된다.

 

Green bowl and black bottle,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1 x 5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녹색 그릇과 검은 병
1907년 피카소는 이미 널리 알려졌으며 새롭고 
소위 큐비스트 방식으로 일련의 그림을 제작한다. 
처음 비평가와 대중을 두려워하게 한 큐비즘은 곧 프랑스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의 회화에서 가장 흔한 트렌드 중 하나로 발전한다. 
세잔 (Cezanne)은 자연을 “볼, 원추, 원통형”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한 
입체파 작가들을 창의적인 프로그램으로 간주했다. 
세잔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따라 가지 않았다.

젊은 예술가들은 더욱 급진적이었다. 
입체파는 그 “깨끗한”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의 구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주변의 자연, 가정 용품, 인간의 모습은 그림의 볼륨과 평면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입체파 작가들과 무엇보다도 피카소는 결코 현실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의 실험은 모든 것이 아니라 인지적이었다. 
그러므로 큐비스트 시대와 관련된 피카소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새로운 측면에서의 현상을 드러내어 피사체에 대한 시청자의 관점을 깊게 한다.

정물 피카소의 작품에서 추상화가 주요 부분을 차지한 시기에 
“녹색 그릇과 검은 병”이 기록되었다. 
구성은 강조되고 간결하다. 
함께 쓰여지는 초안 배경에 대해 두 가지의 평범한 객체만 있다. 
객체의 위치는 재료의 질량, 형상, 심지어 텍스처를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불안감은 짙은 색조 (녹색과 검은 색)의 대비를 붉은 색과 대비하여 나타낸다.
갈색 – 빨간색, 검정 – 회색 및 녹색 귀머거리가 결합된 자신감이 일반화된 그림, 
그러나 예술적 수단의 간결함은 이러한 단순한 대상들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한다.

환상적인 모습을 거부하고 양식의 정확성을 거부함으로써 
피카소는 묘사된 각 혈관의 “성격”을 강화한다. 
가늘고 모양이 완벽하고 우아한 검은색 병 및 넓고 다소 어색한 녹색컵이다. 
비범한 영성과 “활력”을 얻는다. 
작은 정물에서 피카소는 주변 현실에서 무진장의 
시각적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완벽하게 나타냈다.

 

Boy with a dog. Turnover: study of two figures and a man's head in profile, 1905. 
by Pablo Picasso. gouache on cardboard, 57.2 x 4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큐비즘이란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싸롱도통에 출품된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의 풍경>이란 연작를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큐브)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하였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의 풍경>을 살롱전에 출품하였고, 이때 심사위원장은 
마티스였으며 연작 중 두점 만이 입선되었고, 니머지는 모두 낙선되었다. 


마티스 같은 위대한 화가조차도 후대들의 새로운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미술의 법칙인가 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브라크는 출품된 작품 모두를 찾아 
카베레를 화랑에서 개인전을 함으로써 세인의 비판을 구하였다.

세잔느의 " 자연의 형태는 원추, 원통,구형으로 나눌수 있다" 는 주장을 
이론적인 근거로 한 큐비즘은 피카소가 1907년에 대담한 색채와 
면의 구성을 보여주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동시에 표현하려 했는데 
처음에는 색채를 부정하고 흑색, 녹색, 갈색 등으로 제한된 색채를 사용했으며, 
눈에 비친 형상의 우연적인 속성을 일체 생략하였다.

큐비즘의 중심사상은 르네상스 이래 서양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을 이용한 순간적인 현실묘사를 지양하고, 
시점을 다수로하고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 만으로 한정하며 
그 위에 자연의 여러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시켜 
사물의 존재성을 2차원의 '타블로' 구축하여 재구성 하고자 하는데 있다.

 

 Woman head, 1902~190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49.7 x 36.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11년에 살롱 데 쟁데팡탕의 전시실이 큐비즘의

전용으로 이용되면서 집단적인 발표가 이루어졌다. 
큐비즘은 1911년이라고 하는 지극히 짧은 단 한 순간동안 서 있었던 실험 예술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현실에 두려움없이 직면했고 또 그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완전히 독창적인  반 자연주의적인 유형의 형상화를 진전시켰는데 
이것은 동시에 회화적 창조의 메카니즘을 홀딱 발가 벗겼으며 그 과정에서 
추상과 재현의 인위적인 경계를 부셔버려는 쪽으로 멀찍이 나갔던 것이다. 
요컨데 큐비즘은 금세기 전반의 예술에서 회전축과 같은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큐비즘은 르네상스 이후 오랫동안 확고하게 자리잡은 단일시점의 
원근법에 의해 부여된 대상의 가짜 입체감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이차원적 캔버스 평면에 재구성하므로서 예컨데 19세기 리얼리즘 작품에서 보이는 
문학적 암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말하자면 
순수한 시각성에 의한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다.

큐비즘은 근본적으로 정적이며 반성적인 예술양식이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적 성공이 곧  부르조아적인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큐비스트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조아적인 현실을 변혁가능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 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들어가게 하였다

큐비즘의 이론은 대상을 가장 진실되게 파악하기 위해서, 대상을 예리한 매스로 

분석해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종래에는 대상과는 더욱 거리가 먼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은 화면에서 점차 사라져버리는 현실적 이미지를 찾기 위해 
우연히 현실적 오브제를 직접 화면에 붙이는 방법을 찾았다. 
트럼프, 악보, 신문지 조각같은 인쇄물을 화판에 부분적으로 부착하였는데 
부분적으로 추상화된 이미지를 합하려고 하였다

 

Glassware, 1906.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8.5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이 작품은 피카소가 1906년 여름을 보낸 스페인에서 그린 정물화이다. 
그때까지 독립 장르로서의 정물은 피카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물화는 묘사된 것의 본질을 식별하는 데 점점 더 관심이 있음을 증언한다. 

"Glassware"의 구성은 단순하고 고전적인 선명도가 특징이다. 
각 개체는 엄격한 구성 리듬과 비교 및 상호 작용의 논리를 모두 준수하는 동시에 
자체 공간 영역에 존재한다. 

 

Nude woman (bust),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1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6년에 피카소의 작품은 이미 과거와의 "대담한" 

돌파구와 "미지로의 돌파구"의 윤곽을 나타냈다.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예술의 예리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그는 시각적 신뢰성으로부터의 본질적인 자유와 

필수 개념을 포함하는 시스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거친 형태, 안면 마스크는 표현적인 구성성과 미스터리를 

모두 갖춘 기본, 초개인 형태로의 경로를 나타낸다.
강조된 기하학과 도식주의와 함께 그림 언어의 참신함으로 

피카소는 여성의 얼굴에 슬픔의 표현을 유지한다. 

 

friendship,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1.3 x 10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큐비즘은 물체를 입방체처럼 분석 분해해서 그 각 단면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큐비즘 작가들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하였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활되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 있는 요소와 결합하여 융합되었다

피카소, 브라크, 그리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 었으며, 
화면의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레제와 들로네가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큐비즘의 충격은 대단했다. 
즉 기존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창출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표현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네덜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절대적 추상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딧게 하였고, 
미국에서는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유도하였다. 
그 여파의 첫 결과는 191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후기 입체파적 양상들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 등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함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광선주의, 오르비즘, 미래주의, 순수주의 등의 화파를 생성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지대한 그 영향력 만큼 20세기 미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1점 원근 시점에서 벗어난 동시점  즉 다시점 작풍 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화면의 평면화, 빛의 평등한 분산, 
주제의 일관성 등으로 그 실천적 성과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보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론을 성공적인 시도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

아폴리네에르, 앙드레 살몽, 모이스 레이날 등이 비평가로서 이 운동을 지원했다. 
초기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라는 두 걸출한 대가의 독립된 조형상의 모색을 통해 탄생한 큐비즘은 
당시까지 회화에서 추구했던 시각의 리얼리즘을 넘어 '이념의 리얼리즘'을 추구함으로써 
회화의 일대의 혁명을 불러 왔다.

"자연을 원통, 구, 원추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 구축적인 회화 이념에 
힘입은 바가 큰 큐비즘은 대상을 섬세하게 분할함과 아울러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화면에 병치하고 시간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결국 전통적인 회화 원리를 무너뜨렸다.

흔히 피카소의 1907년작 <아비뇽의 처녀들 >과 마티스의 <에스타크 풍경>으로 

비롯했다고 일컬어지는 큐비즘 회화는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인체를 자연스럽게 소재로 하였다 .

 '청색시대' 로부터 '큐비즘시대', '고전적시대' 를 거쳐 말년에 이르기까지 
신화, 일상적인 누드를 지속적으로 그려온 피카소는 물론, <아비뇽 처녀들>에 필적하는 
브라크의 나부들, 기계 미학의 경도를 보인 이후 다양한 형식의 인물을 그린 레제, 
큐비즘 조각가의 개척자 아킨펭코 등의 작품에서는 독자적인 질서로 재구축된 인체를 만날 수 있다.

큐비즘은 한편 반성적인 예술 양식이었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적 성공이 곧 부르즈와적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큐비스트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즈와적 현실을 변혁 가능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 들어가게 했다.

 

Three wome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200 x 1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에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Musical instruments,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8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큐비즘은 초기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1907에서 1909년 사이를 초기 큐비즘이라고 한다.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 시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주제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중요해졌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처럼 환경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폐쇄된 공간 속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방법론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했던 것 같다.
색채의 산만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색채들 만을 그림에 사용한다. 
주제를 택한 다음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본다는 착상을 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모든 단면을 동시에 한 시점으로 보는 방법이었다.

분석적 단계에는 색채가 거의 브라운과 회색 계통, 검정색, 황토색 계통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색채 제한은 화면 안에서의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성, 
구조의 문체에 강조점을 두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Brick factory in Tortosa,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50.7 x 60.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자연에는 원기둥, 원뿔, 구형밖에 없다'는 세잔의 가르침을 따른 <토르토사의 벽돌공장>
큐비즘은 두 개의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번째 자연적 형태는 
기하학적인 동일체의 방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큐비스트들은 
극단적인 결론으로까지 파고 들어갔다. 
두 번째 전제는 4차원의 공간과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지 회화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대상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석적 큐비즘 시기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적 큐비즘(1911-1916)- 다방면에 걸친 회화적 수단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하면 
형태를 파괴하기보다는 상징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주관적이고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형태들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분석적이기 보다는 더욱 심화된 평면성, 단순성, 풍부해진 색채와 질감, 
느슨해진 분위기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추상적 하부구조와 중첩된 소재는 함께 유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각 요소 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종합적 큐비즘은 추상적 요소들을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와 콜라주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 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와 꼴라쥬 마티에르 (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 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실제 나무의 모조를 그려 나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진짜로 나무를 그림에 도입시킨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Young lady,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2.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7년 살롱 토론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Woman with a fan,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 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 삼각추, 

원통형 입방체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는 명칭을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란 최초로 비평가인 R. 보셜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셜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차레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화면 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피카소) 


"내게 있어 큐비즘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 표현 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내 재능을 잘 살릴수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 두기로 한다" (브라크), 

 

Cafe table (Pernod bottle),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45.5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인 <죽은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또한 피카소는 <기타>(1912~1913)와 같은 입체주의 조각들에서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Bathing,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9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여러 시대를 통하여 미술가들은 캔버스와 파넬의 평면 위에 어떻게 
삼차원적 세계를 표현할수 있는냐 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해 왔다. 
15세기 이후 화가들은 앞에 있는 것일수록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는 
원근화법을 사용해 왔는데 이 기법은 2차원의 평면 위에 삼차원의 깊이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프랑스 화가 세잔느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는 자연풍경을 주의깊게 관찰하여 집이나 나무, 산들을 기하학적 형태와 일치시켰으나 
그것들을 반드시 한 시점으로 처리하지는 않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눈도 한곳에 정지시켜 놓지 않음으로써 

일상적인 시야처럼 사실과 같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이 형태를 분리하여 식별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마음 속에서 함께 결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마다 일어나는 과정이지만 회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곧 전통적인 원근 화법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Tavern, around 선술집, 1914.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29.5 x 3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4년 파리에서는 세잔느의 대규모 작품 전시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젊은 화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다. 
동시에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작품도 전시되었는데 그 작품들의 
단순성과 역동성은 미술가들의 관심을 미술의 원칙으로 돌리게 하였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미술과 초기 동굴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원시적인 물건들이 오랫동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왔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예술로 보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미술가들은 원시시대의 의식 용구의 힘과 단순성을 
찬탄의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재생과 영감을 구하였다.

 

Seated woma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7~1908년에 제작한 초기 입체파의 이 작품은 피카소가 시각적 진정성에서 

벗어났고 그가 창조한 "새로운 현실"에 몰입하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무섭게 반발하고 때로는 새롭게 드러난 조화로 눈에 띄기도 한다. 


"앉은 여인(Seated woman)"은 1908년 초 파리에서 그렸다. 
졸거나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누드 인물은 그녀의 윤곽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도식주의로 구별된다. 
직선은 그림의 주요 요소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강한 대비는 볼륨을 만들고 
어두운 황토색은 그림의 색상을 결정한다. 
"앉은 여인"은 수면의 느낌을 준다. 이 주제는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Composition with skull 해골 구성,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16.3 x 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최초로 입체파 회화를 그렸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는
선사시대로 관심을 돌렸던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기질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찬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의 작품에 계속적으로 의존해 왔었다.

그러나 원시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연 이상의 것이었다. 
피카소 자신도 그렇게 느꼈음이 틀림 없겠지만 그는 사람들이 유럽 역사상 
당대의 시점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미개성과 생경함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다.

 

Tenor and violin, 191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55.3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피카소는 전통 화가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데상에 대한

정상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그가 전통적인 데상을 방기한다 할지라도 

그는 주제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손의 수법을 익히고 있었다.
브라크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놀랐다. 
브라크는 자신의 실험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레스다크의 집들>에 보이는 나무의 대각선 조차도 세잔느가 사용했던 고안이다. 
그러므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무엇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전통적인 원근화법과 삼차원적 환영을 버리고 

훨씬 더 얕은 회화적 공간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화면 위의 인물이나 대상들을 마치 캔버스 표면 위로 

불쑥 밀어 올린 듯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하였다. 
또한 단단한 형태들의 집합이 배열되어 새로운 구성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피카소는 직선적이고 때로는 무모하기 조차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브라크는 보다 예민한 입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비평가들은 이들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

 

Farmer (half-length image),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81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1908년 가을 피카소는 파리 근처의 라 루드부아(La Rue-de-Bois) 마을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살았던 집의 여주인의 초상화인 "Farmer"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The Farmer"에서 인간의 육체가 돋보인다. 


머리는 공, 목은 원통, 몸통은 입방체와 같은 기하학적 기호의 

매우 정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시된다. 
여성의 모습은 나무 블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인상이 강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연에 의해 공급되는 숨겨진, 강력하고, 원시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는 "나는 자연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Dryad,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85 x 10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8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초기 입체파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드라이어드(Dryad)의 세계는 따뜻한 햇빛을 알지 못한다. 
어둡고 신비스럽고 비이성적인 모든 것에 열려 있다. 
보이지 않는 높이로 단단히 닫혀 있는 나무 줄기는 

인간형 자손을 그림의 전면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이어드의 모습은 저속하고 공격적이다. 
다각형 실루엣에는 밝은 갈색, 회색 갈색 및 

어두운 갈색의 측면과 같은 기하학적 표면이 포함된다. 
이 얼굴의 관절은 명확한 선으로 표시된다. 
신체를 해석하는 이 새로운 방법은 피카소가 그 구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에너지, 그 안에 작용하는 

밀착력과 추진력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피카소는 말한다. 

"본질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문학으로 가득 찬 그림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피카소는 항상 "말"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고 서술적이지 않았다. 
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본성에 대한 

예술가의 긴장되고 불안한 생각의 구체화였다.

 

Farmer (tall),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농부(Farmer)"는 1908년 여름 말 피카소가 살았던 

파리 근처의 라 루드부아 마을에서 그린 작품이다. 
그 집의 여주인인 농부는 그의 생각을 "이상적인" 살아 있는 구체화의 

일차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문제로 받아 들여 피카소는 

"농부 (성장 중)"와 "농부 (허리 길이 이미지)"라는 두 가지 화신을 만들었다. 

농부의 키 큰 모습은 그녀의 반장 이미지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간단하고 잘 맞는 볼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고 대략적으로 다듬어 진 머리로 끝난다. 
그러나 키가 큰 그림에는 매우 표현력이 강한 몇 가지 악센트가 나타났다. 
치마가 있는 거대한 부풀어 오른 배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먹 팔, 팔 레버, 팔 망치, 공격적인 무게로 가득 차 있다. 
농부는 그녀의 어두운 잠재 의식의 첫 부름에 생명을 얻을 준비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로봇과 비슷하다.

 

House in the garde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73.6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몽마르트의 세탁선이라는 하숙집에서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상풍의 명암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 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 교유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고, 
피카소는 홀타 테  에브로의 에스파니야 풍경을, 브라크는 세잔과 같이 
에스타크의 풍경을 발표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구별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화학 공간을 쌓아 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Woman with mandolin,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2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7년부터 1901년에 이르는 큐비즘의 제 1단계 동안에 보여준 것은 

피카소와 부라크가 아직도 세잔느의 많은 영향 아래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보다 뚜렸이 그들의 양식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정물화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깊이를 주는 모든 일루전을 제거한 채 경치를 이루는 요소들을 앞으로 당겨서 
마치 상자 안에 물건들을 마구 쌓아 놓은 것처럼 그림의 전후 관계를 어지럽혀 놓았다.
이것이 과도기적 단계의 큐비즘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곧 실망할 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주체들을 거의 사라지게 해버린 예술가들에게 매혹될 것이다.

 

[영상] Room of Pablo Pic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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