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구글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교외 지역에  푸슈킨이라는 고을이 있다. 
러시아 국민시인 푸슈킨이 이 고을에 있던 고등학교 졸업생이라 하여 
볼셰비키 혁명 후 고을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다. 
이곳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의 명칭은 표트르 대제의 황후이며 제2대 러시아 황제이기도 한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Alekseevna 1684~1727)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와 관련 건조물군 중 하나로 
18세기 러시아 건축 예술의 산물이며,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17년 예카테리나 1세는 독일의 건축가 요한 프리드리히 브라운슈타인
(Johann-Friedrich Braunstein)에게 자신을 위한 여름 궁전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그후 1743년 4번째 군주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 치세에 완성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56년 5월 6번째 군주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 여제의 

명령에 따라건축가 B. F. 라스트렐리의 감독 아래 옛 구조물을 철거하고

대규모적인 규모로 훨씬 웅장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다.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 Amber)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호박도 약탈당하였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기 전까지 호박방은 정교한 장식과 화려함으로 인해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공원 안내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남쪽 구역

훗날 건물이 복원된 뒤, 소련 정부는 1979년부터 호박방의 복원을 위해 
종적이 묘연해진 호박을 찾았으나 모자이크 일부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하였다.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북쪽 구역

1999년부터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 
호박방은 사방 14m, 높이 5m의 방으로, 원래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계단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은 러시아 고유의 양식과 
서유럽식 왕궁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예카테리나 궁전 무도실

옛날 왕가에선 반드시 무도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해야 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에겐 첫번째 본부인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복사업을 펼치는 남편에게 적합한 부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의 적과 내통하며 표트르 대제를 배신하기도 했다.

 

1698년에 당시 예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 1세는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성정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선 이혼을 금지했기에 표트르 대제는 
이혼한 첫 번째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트비아 출신의 둘째 부인 예카테리나 1세는 호방한 여장부였고 
표트르 대제와 궁합이 잘 맞았다. 
표트르 대제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

예카테리나는 1712년에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 1세가 요로결석으로 서거했으나, 표트르 1세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 간의 짧은 치세로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1727년 5월 17일 4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는 
훗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어머니를 따라 역시 여제가 된다.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의 초상.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1729~1796)는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 ·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또한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독일 출신에 남편 표트르 3세의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러시아인들, 
심지어 소련인들에게도 찬미의 대상이며 민족 자긍심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영토를 서쪽과 남쪽으로 20만 평방 마일(258,000㎢) 이상 확장시켰고,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 주를 재조직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옛 도시들은 새롭게 단장시켰다.

이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문학을 적극 후원해 문학평론을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고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또 과학을 장려하고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예카테리나 궁은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영국식으로 캐서린)에게 
결혼 선물로 준 땅에 지은 성과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정원의 끝에는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있다. 
‘에르마타주’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의 건축물이다. 

 

황제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농노가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테이블을 올려주었고, 
그러면 황제는 그곳에서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냈고 
그러면 농노가 물건을 밧줄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 시설이 보존돼 있다. 
작동은 되긴 하지만 이젠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복원된 호박방

호박(琥珀 Amber)이란 고대의 송진이 굳은 것으로
진주, 산호와 함께 정의상 광물은 아니지만 보석으로 취급된다.
보통 송진(수액이라고도 함)이 굳어서 100만년정도 지나면 호박이 되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생기기 전에 생성된 것으로 자체가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안에 모기나 벌레 등이 들어 있는 것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호박방

방 전체가 황금 같은 빛을 발하는 호박으로 장식되어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박방'이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가장 유명하다. 
지금의 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호박을 싹 긁어가서 나중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단순히 자연 호박만을 가지고 치장해 방을 만든 게 아니라, 
호박에 열처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써서 의도적으로 색이나 모양을 변형시킨 호박들과 
자연 호박들 및 금과 거울을 같이 써서, 매우 화려한 방을 만들었다.

 

호박방

원래 이 호박방은 독일에 있던 것으로 1701년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인 조피 샤를로테 왕비를 위해 지은 것이다.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설치될 예정이던 이 호박방은 계획과 달리 완공 이전에 
프리드리히 부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사치 행각을 싫어하던 지독한 구두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공사가 중단된 호박방은 베를린 궁전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1716년 러시아로 옮겨갔다. 

 

호박방

표트르 대제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호박방을 보고 반해 

러시아에도 호박방을 짓고 싶어했다. 
이를 알게 된 독일 프리드리히 1세가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로 호박방을 떼어다가 보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던 와중으로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전한 상황이었다. 
전쟁 와중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프로이센을 방문한 표트르 대제는 

이 방을 보며 감탄했고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패널들을 표트르에게 외교협정의 대가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러시아로 옮겨진 호박 패널에 예카테리나 2세 때 
더 많은 양의 호박들이 추가되어 방 전체를 장식하게 변모했다.

 

호박방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호박을 싹 긁어가며 훼손했고, 
현재 여름궁전에 있는 호박방은 
원래 호박방이 있던 자리를 공들여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나치가 훔쳐간 호박방 원본은 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설, 
나치의 비밀 벙커에 숨겨 두었다는 설 등이 분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영상] 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앞에서 인증샷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캐서린 대제 (예카테리나 2세)는 1780년대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에게 마노방(Agate Rooms)을 만들도록 했다.
카메론은 이탈리아로 가서 고대 온천의 건축을 연구했다. 
마노방 건물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에는 여러 개의 욕조가 있다. 

건축 공사는 1779 년에 시작되어 1788 년에 완공되었다. 
이 마노가 박힌 인테리어를 포함하는 건물은 콜드 배스 (Cold Bath)라고 불린다.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1 층에는 러시아식 목욕탕, 로마식 목욕탕, 수영장, 냉탕, 
마사지 실, 오락실 등 다양한 종류의 황후 목욕탕이 있다. 
산수유, 진품 및 인조 대리석, 청동 장식품과 같은 다른 귀중한 광물이 사용되었다. 
마노방은 인테리어 작업에 벽옥을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 
이것은 유럽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은 1779년 캐서린 대제(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러시아에 온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의 건축물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북쪽 끝에서 웅장한 계단으로 접근 할 수있는 갤러리는 현재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주변 공원, 특히 큰 연못 (Bol'shoy Prud)과 정원을 향하여 최상의 전망을 갖도록 

설계된 건물의 윗층은 44 개의 가느다란 이온 기둥으로 구성되고 
고대의 위대한 인물의 청동 흉상으로 장식된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큰 연못 (Bol'shoy Prud)
카메론 갤러리 계단 아래에 있는 헤라클레스 동상과 큰 연못 (Bol'shoy Prud)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정원

예카테리나궁 앞에는 대규모 정원이 있다. 
정원은 영국식 정원, 프랑스 베르사유식 정원, 폴란드식 정원 등으로 구분된다. 
영국식 정원은 예카테리나 1세의 취향, 
폴란드식 정원은 표트르 대제의 취향을 반영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베르사유식 정원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로망이었다고. 

 

작은 연못과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 조감도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을 관람하는 우리 일행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인증샷

 

궁전 공원

 

궁전 공원에서 신혼 사진을 찍는 장면

 

궁전 공원

 

목욕탕 (Lower bath)

 

목욕탕 (Lower bath)

 

궁전 공원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큰 연못 연안에 위치한 그로토 파빌리온은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공연을 하는데 사용된다.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4인조 아카펠라 공연이 있었다.
나는 관람료 대신으로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내부와
4계절의 공원 풍경이 담긴 USB를 구입했다. 한 6천원 쯤이었던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인증샷

 

인증샷

 

물고기 다리 (Fish Channel)

 

인증샷

 

물고기 채널 (Fish Channel) 

 

인증샷

 

인증샷

 

키메라 그릇(Bowl with Chimeras)

 

에르미타주 파빌리온 (Hermitage Pavilion)

 

캐서린 공원(Catherine Park)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걷다보면 
공원의 끝에 멋지게 장식된 2 층짜리 건물 에르미타주(Hermitage)가 나온다. 

 

하늘에서 본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으로 
"고독의 장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다. 
에르미타주(Hermitage)의 아이디어는 17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에르미타주(Hermitage)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사냥 오두막을 닮았지만 내부는 아주 멋지게 장식되어 있다. 
구조는 십자가 모양이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의 건설은 미하일 젬초프(Mikhail Zemtsov 1688~1743)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건축가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해외 유학생으로 파견된 청년 그룹 최고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젬초프는 실제로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건설 초기에 사망했다.

에르미타주는 1756년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에 의해 완성되었다. 
라스트렐리는 실제로 러시아에서 바로크 양식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인증샷

건물은 2 층으로 되어 있다. 
벽은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의 주요 궁전처럼 하늘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파사드는 벽을 어깨에 메고 있는 아틀라스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사자 가면도 있다. 
화려한 주철 그릴과 일부 장식품이 도금된 발코니가 여러개 있다. 
전체 건물은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의 작은 버전처럼 보인다.

 

인증샷

 

에르미타주는 체스판의 패턴으로 흑백 대리석 사각형으로 포장된 
패드 위에 세워졌고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구조는 대리석 조각상과 꽃병으로 가득찬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금박을 입힌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에르미타주는 돌로 지어졌으며 치장 벽토로 마감되었다. 
해자는 더 이상 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입장을 하기 위해서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에르미타주(Hermitage) 2층 큰 홀

2층에 큰 홀이 1개 있고 그 주변에 4 개의 작은 방이 있다. 
벽은 금박 조각, 그림 및 많은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인증샷

 

인증샷

 

에르미타주(Hermitage) 천장 장식

천장 장식은 이탈리아 예술가 발레리아니 (G. Valeriani)와 
페레시노티(A. Peresinotti)의 참여로 그려졌다. 
이들은 Peterhof의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름궁전(Grand Palace) 천장 장식에도 참여했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궁전 공원 풍경이 훤히 보인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황제가 2층 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하인들이 1층에서 식탁을 깔고 
음식을 준비해서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식탁과 음식을 올려주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그러면 하인이 필요한 물건을 밧줄로 올려준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과 도르레 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관람객을 위해서 시연을 해 준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의 후계자인 캐서린 대제는 종종 에르미타주에서 외국 대사를 접대했다. 
캐서린은 여기서 손자를 위해 파티를 열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길게 선이 그어진 부분과 접시가 놓인 부분이 
음식을 싣고 아래층으로 내리락 오르락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궁전만큼 황폐화되지 않았다. 
복원이 필요했지만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신중하게 개조된 건물은 캐서린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주변에는 잘 손질된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에르미타주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는 18세기 중반 이후로 변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에르미타주를 관람하면서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가고 내려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관람을 마치고 덧버선을 반납한다.

 

[영상] Hermitage Pavilion

 

아드멀티(Admiralty)

 

아드멀티(Admiralty)

 

점심 식사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1851년~1852년에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이 지어졌다.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큰 연못과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은 1768~1774년 러시아 대 터키 전쟁인 
키오스 전투와 체스마 전투에서 세 번에 걸쳐 러시아 해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기둥은 회색 대리석 받침대에 있고, 세면은 청동 옅은 부조이다. 
러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네 번째 측면에는 전투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와 같은 화강암 플랫폼에 놓여 있으며, 
받침대에 접근 할 수 있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그릴이 있는 아치형 개구부가 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예카테리나 2세. Portrait of Catherine II  Walking in the Park

Empress of Russia, 1794. oil on canvas.  94.5 x 66cm. 

Tretyakov Gallery, Russia Moscow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을 배경으로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산책 중인 캐서린 대제(Catherine II)를 그린 러시아 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의 1794년 작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영상] Catherine Palac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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