넵스키 대로와 카잔 대성당 - 모스코프스키 역 방향

 

넵스키 대로와 카잔 대성당 - 구 해군성 방향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와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Griboyedova) 운하는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정원 근처의  
모이카(Moyka) 강에서 시작되어 폰탄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5km, 너비는 32미터 되는 작은 운하이다. 


1923년 이전에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의 이름을 따서 

캐서린(Catherine) 운하라고 불렸다.  
소비에트 공산당은 러시아 극작가이자 외교관인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바꿨다.


넵스키 대로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를 건너면 
카잔 대성당과 유서깊은 돔 끄니기(Dom Knigi) 서점이 도로 양편에 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와 카잔 대성당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

 

카잔(Kazan)은 러시아 타타르스탄(Tatarstan)공화국의 수도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이 세운 킵차크 한국(Kipchak Khanate)과 

카잔 한국(Kazan Khanate)의 수도로, 러시아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 1530~1584)는 

카잔 한국을 멸망시키고 그 지배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성 바실리 성당을 건립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Pavlovich Romanov 1777~1825) 시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정교회의 본당으로 건립한 성당의 이름을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으로 정한 이유는 지역적, 역사적인 배경이 아니고,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신앙의 상징인 이콘화(Icon)와 관련이 있다.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안드레이 바로니킨(Andrei Nikiforovich 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성당으로 

소비에트 시절 한때 금지되었던 예배가 지금은 진행되고 있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성당 안에는 프랑스 군에게서 탈취한 107개의 군기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 화려한 이코노스타스는 프랑스군이 러시아 교회로부터 빼앗은 은을 

돌려받아 만든 것이며 쿠투조프 사령관과 바르클레이드 토리 동상은 

승전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19세기 말 경부터 혁명 때까지 성당 앞 광장은 학생들의 집회 장소였으나 
지금은 평화로운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에서 바라본 카잔 대성당

사람들은 카잔 대성당을 러시아 자연석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주로 쓰인 석재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채취한 석회화된 응회석인데 
이 돌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쓰인 이탈리아 석회석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공성 응회석은 쉽게 가공할 수 있어 성당의 외벽이나 기둥머리, 프리즈, 문턱을 만드는 데 쓰였다. 
내부 장식을 위해 보로니힌이 선택한 석재는 카렐리야 대리석, 현지 반암, 벽옥이었다. 
성당 실내는 담홍색 화강암으로 세운 56개의 기둥과 금을 입힌 기둥머리로 장식하였다.

 

카잔 대성당 3D 모델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넵스키 대로 곁에 사원을 짓기로 결정하게 되자
건축가 바로니킨은 성당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해야 될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입구가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즉 넵스키 대로에서 볼 경우 성당의 측면이 보이게 된다. 

이에 바로니킨(Varonikhin)은 측면 파사드에 장엄한 반원형 콜로네이드를 추가하여 
측면 파사드를 메인 파사드가 되도록 시각적으로 변형하여 이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 
석고대리석으로 1m정도 씩 이어서 만들어진 96개의 기둥으로 성당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카잔 대성당 코린트양식 대기둥

4열로 배치된 96개의 코린트 양식 대기둥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연상케 했다. 
1811년 9월 10년 만에 교부(Metropolitan) 성 암브로스(Ambrose)는 새로운 카잔 대성당을 봉헌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육군 원수 미하일 쿠투조프 (Mikhail Kutuzov) 기념 동상

성당 봉헌 1년 뒤 발발한 전쟁에 출전하기 전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 1745~1813)는 성당을 찾아 가호와 승리를 빌었고, 
실제로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잔의 성모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미하일 쿠투조프는 러시아의 야전 원수로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기간 중 
프랑스의 대육군(Grande Armée)을 패퇴시켰다. 
나폴레옹이 추위를 견딜 수 없도록 먹을 것과 땔감마저 없앤 후 
도시를 비워 나폴레옹이 지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다.
더구나 69만명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69,000명만 살아남아 돌아갔으니 이 또한 비운의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이 승리는 나폴레옹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나폴레옹의 몰락을 불러왔다.

1813년 7월엔 카잔 대성당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운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톨스토이의 작품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치러졌다.

 

바클라이 드 톨리(Michael Bogdanovich Barclay de Tolli) 기념 동상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Michael Bogdanovich Barclay de Tolli 1761~ 1818)는  
러시아 원정과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육군 원수이자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터키 전쟁, 스웨덴 전쟁, 폴란드 전쟁에 종군하였다. 
1808∼1809년의 핀란드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출정하여 
보스니아만(灣) 건너의 우메오를 탈취하여 용명을 떨쳤다. 


1810∼1812년 육군장관을 지냈으나 1812년 나폴레옹 1세 군과의 전쟁에서 

그의 후퇴전술은 비난을 받았고, 스몰렌스크에서 패배한 후 

사령관직을 박탈당하여 쿠투조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1813년 다시 사령관에 복귀하여 1814년 파리에 입성하고 

원수가 되었으며, 1815년에는 공작이 되었다.

 

19세기 초 카잔 대성당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당들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웅장한 역사적 성지들이 많다. 
그중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직접 건설을 지시한 성 베드로 · 바울 성당이다. 
나중엔 크렘린의 아르항겔스키 성당을 대신해 이곳이 황실의 묘소가 되었다.

하지만 성 베드로 · 바울 성당은 경비가 삼엄한 요새 안에 있었다. 
도시가 세워지고 백 년이 지나도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제국 수도의 영광을 과시할 수 있는
웅대한 건축미를 지녔으면서도 대중의 접근이 가능한 성당이 없었다.
그런 필요를 채워준 것이 1801년부터 1811년까지 10년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인 네프스키 대로에서도 눈에 띄는 곳에 세워진 카잔 성당이다. 
카잔 성당의 위치와 외관은 도시의 심장부를 장악할 수 있게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1780년대 초엔 미하일 젬초프(М. Земцов)가 설계한 검박한 외관의 '성모 탄생 교회
(церковь Рождества Богородицы)'를 개축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 교회는 기적의 힘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카잔의 성모 이콘(성상화)'이 보관된 곳이다. 
많은 모사본이 제작된 카잔의 성모 이콘은 1579년 카잔 대화재 직후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형상을 담은 
러시아에서 가장 숭배 받는 이콘 가운데 하나다.

17세기 초 이콘이 '동란의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라 불리는 황실의 분란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고 여겨지면서 이콘의 국가적 의미가 커졌다. 
1721년 표트르 대제는 카잔의 성모 이콘의 초기 복사본을 

새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파벨 1세의 짧은 통치기간(1796~1801) 중이었다. 
파벨 1세는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몰타에서 축출된 

성 요한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도 했다.
1811년 공사가 끝날 무렵, 카잔 성당은 국가적 성지가 될 위용을 갖추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1870년부터 자선 단체가 성당에서 운영되어 쉼터 스쿨, 무료 식당, 구호원, 
저렴한 아파트가 있는 주택,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다차를 운영했다. 
성인을 위한 주일학교가 성당에서 운영되었고 자체 신문이 출판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곳에서 따뜻한 옷을 모아 전선으로 보냈고,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위한 기도 예배가 매일 열렸다.

 

소련 시대 역사와 무신론 박물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을 조화시키려던 파벨 1세의 생각이 

카잔 성당의 모습에도 영향을 준 듯 성당 곳곳은 몰타 십자가로 장식돼 있다. 
카잔 성당을 건축한 안드레이 바로니킨(Andrei Nikiforovich Varonikhin)은 
우랄 지역에 있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소유 영지에서 농노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예리한 안목을 지닌 예술의 후원자였다. 
이들은 바로니킨의 재능을 발견하고 1777년 모스크바로 데려와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와 마트베이 카자코프 밑에서 2년간 공부하도록 했다.  

바로니킨은 17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트로가노프 

서클에 들어갔고, 1786년에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1786년부터 1790년까지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 백작의 아들인 

파벨의 유럽 여행에 동행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 전에는 파리에서 개인적으로 건축 실습을 받았다.

1799년 파벨 황제는 로마의 웅장함을 반영한 

새로운 성당을 지을 건축가를 다시 모집하기 시작했다. 
건축 위원회의 수장이 된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는 

즉시 바로니킨을 건축가로 선택했다.
바로니킨의 자격 여부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바로니킨에 대한 스트로가노프의 믿음은 광대한 건축 사업의 조직과 

압도적인 위용의 성당 설계를 통해 입증되었다.

권력이 소련으로 바뀐 후 1929년 볼셰비키들은 성당을 폐쇄했고, 

3년 후 과학아카데미에 넘겨 줬다. 
성당의 둥근 지붕을 장식한 십자가는 첨탑이 달린 도금한 공으로 대체되었고, 
교회 용품들은 여러 박물관으로 흩어졌다. 

성당에는 종교와 무신론 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전시품들은 기독교, 이슬람교, 동양의 신앙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기적의 아이콘은 블라디미르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998년 3월부터 성당이 다시 봉헌되어 정기 예배를 시작했다. 
2년 후 사원은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되어 대성당으로 변모했다.

 

카잔 대성당의 외관

카잔 대성당은 로마 교황의 거주지와 닮았으며 장엄하고 화려하며 
더불어 탁월한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건물은 4 개의 뾰족한 라틴 십자가 형태로 지어졌으며 
십자가 중앙에는 돔이 있고 그 드럼을 따라 16 개의 둥근 창이 있다.

성당의 벽돌벽은 러시아 서북부 도시 갓치나 인근에서 채굴한 
푸도스트(갓치나 인근 마을이름)의 돌, 즉 투파 석회석으로 마감됐다. 
투파는 채굴 직후엔 다루기 쉬우면서도 공기에 노출되면 
서서히 경화되기 때문에 세밀한 조각에 제격이었다. 
투파의 이런 성질은 회랑 입구, 애프스, 세 회랑의 부조에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프리즈를 만드는 데 활용되다.

네 줄로 늘어선 회랑 기둥의 주신과 주두도 투파로 만들어 졌으며, 
세 종류의 화강암과 석회암, 대리석으로 된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회랑의 양쪽 입구에 세워진 블라디미르 성인과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인 동상을 비롯해, 
조각상 제작에는 청동이 쓰였다.
거대한 문들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에 

쓰기 위해 만든 것과 비슷한 모양의 동판으로 덮여 있다.

 

카잔 대성당의 돔

돔은 4개의 모놀리식 철탑으로 지지된다. 
대성당은 반원으로 배열된 94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콜로네이드 뒤에

숨겨져 있으며 그 위에 돔이 72m 높이로 솟아 있다. 
각 기둥의 높이는 14 미터이고 무게는 28 톤이다.

건물 바닥에는 커다란 회색 화강암 기둥으로 만들어진 높은 주각이 있다. 
정면에는 삼각형 페디먼트로 장식된 얕은 부조가 있는 6 개의 기둥 현관이 있다. 
카잔 대성당의 길이는 72.5m, 너비 56.7m이다. 
콜로네이드의 서쪽 부분에는 종탑이 있으며 대성당의 종탑은 지어지지 않았다. 
성전에는 4개의 예배당이 있다. 
1900년에 카잔 대성당 앞에 공공 정원이 배치되어 외관을 마무리했다.

 

카잔 성당 광장(Kazanskaya Square)

성당 앞 광장은 19세기 말부터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학생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지만 
지금은 넵스키(네프스키) 대로를 찾은 사람들에게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유서깊은 돔 끄니기 서점

 

보로니힌 광장(Voronikhinsky squar)에서 본 카잔 대성당

 

1809년 보로니힌 광장(Voronikhinsky squar)에 세운 분수

 

[영상] 그리보예도프(Griboyedov) 운하와 카잔 대성당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성당은 입장료가 무료 이다.
좁은 출입구를 통해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석회암으로 지어 어두운 색조이나 규모가 웅장하고 엄숙하다.

화려한 실내는 신랑과 익랑을 구분하는 28쌍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신은 붉은 핀란드산 화강암을 연마해 만들었고, 주두의 재료는 금도금을 입힌 청동이다.  
원통형 궁륭은 장미 무늬가 새겨진 육각형 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바닥은 주로 우랄 산맥에서 캐낸 석재로 만든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카잔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의 중심은 돔 하단의 공간이다.  
굵직한 기둥이 네 복음서의 저자가 그려진 펜덴티브(pendentive)를 받치고 있다.  
돔 밑부분은 예수와 성모의 생을 주제로 한 조각처럼 보이도록 그린  
회색조 프리즈(그리자이유, grisaille)로 꾸며졌다.  
격천정 돔은 두 겹으로 이루어졌다.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내부

 

이 성당의 성물 카잔의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려는 순례자들

내부에는 의자가 없고 여자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데, 
성호를 긋는 모습이 우리나라 천주교와 반대 방향이다.
한쪽에서는 예배를 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수도사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이 엄숙해 보인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icon)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카잔의 마리아 상>이다. 
이 성상은 쿠투조프가 이끄는 군대가 전장에 가지고 나갔었던 것이고 
보로디노 전투가 있기 전 군사들을 축복할 때도 이 성상을 가지고 했었다고 한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이콘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본

성모마리아 탄생 교회는 로마노프 왕가의 궁정 부속 성당이었다. 
이곳에 왕조의 수호성인으로 여겼던 카잔의 성모 이콘(성화)이 보관되었다. 
카잔 대성당이 세워지자 성물도, 궁정 부속 성당의 역할도 다 물려받게 되었다. 
황실 가족들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렸고,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 기도를 모면하자 이곳에서 감사기도를 드렸고,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도 이곳에서 축하됐다.

카잔 대성당은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유명한 성물 중 하나인 
성모 마리아 이콘을 수호성인으로 하면서 성스러워졌다. 
성당에 기적을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이콘이 보관되어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이 성물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오라고 명령했다.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가 건축되기 전에는 
페트로그라드 방면에 있던 작은 예배당에 이 이콘이 보관돼 있었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이콘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본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 카잔의 수호성인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그린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거룩한 성화상(icon) 가운데 하나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카잔의 성모상의 모사품들을 제작하여 공경하고 있다. 

 

카잔의 성모(Our Lady of Kazan) 

카잔의 성모상은 수세기 동안 러시아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아왔으며, 
진품은 1904년에 절도당하여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에 소재하고 있는 카잔 주교좌 성당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교회 성당들이 카잔의 성모에게 봉헌되어 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카잔의 성모 축일은 7월 21일과 11월 4일이다.

 

이콘 '카잔의 성모'

이콘 '카잔의 성모'는 1579년 ​성모의 계시를 받은 볼가 강변의 

카잔 마을에 사는 9세 소녀마토로나의 꿈에서 성모 마리아가 알려 준대로 찾아가 

땅속에서 발견하여 가져왔기 때문에 "카잔성당"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에선 성상화를 종교 작품으로만 여기지 않고 

구세주나 성모, 성인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숭배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카잔의 성모를 기적의 힘을 주는 이콘으로 받들어 

발견된 장소에 테오토코스(성모) 수도원을 지어 이콘을 모신다.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를 수호하는 대표적 이콘이 됐고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야로슬라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카잔의 성모 복제화를 모신 카잔성당이 들어선다.

1904년 카잔 테오토코스 수도원에 도둑이 들어 카잔의 성모를 훔쳐 간다.
도둑은 나중에 붙잡혔지만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한 황금 액자를 탐냈기에 

액자만 챙기고 성상화는 잘게 잘라 태워 버렸다고 진술한다.
온 나라가 좌절과 공황에 빠져 앞으로 나라에 나쁜 일이 닥칠 거라고 걱정한대로 
1905년 노동자들 시위에 군이 발포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러일전쟁에서 패한다.

카잔성당이 지닌 의미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쳐들어 오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가 출정하기 앞서 

카잔성당에 찾아와 카잔의 성모에게 경배하며 도움을 청한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까지 쳐들어 온 나폴레옹 군에게 온 도시를 비우는 작전을 벌여 
나폴레옹군이 제풀에 물러가자 추격해 대파한다.
69만 나폴레옹군은 9만 3천명 만 살아 퇴각했다.

쿠투조프는 1812년 스몰렌스크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무찌른 공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고귀한 스몰렌스크 공작 전하'라는 영광스러운 작위를 얻는다.
성당에는 나폴레옹군에게서 빼앗은 107개 군기(軍旗)와 

승리의 트로피가 걸려 전승기념관의 성격도 겸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카잔의 성모가 정말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이라는 믿음을 더 굳게 갖게 됐다. 
이듬해 숨진 쿠투조프는 카잔성당에 묻혔고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이 그의 영묘에 유명한 애가(哀歌) '쿠투조프의 묘'를 바친다. 

카잔 성당은 라틴 십자가 (세로대의 아래쪽이 긴 십자가) 모양으로 
서쪽, 북쪽, 남쪽으로 코린트 양식의 열주 회랑이 있고 

동쪽에는 반원형 애프스(apse)가 위치한다. 
건물의 상단은 거대한 장식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애프스 위에 조각된 프리즈(frieze, 띠 모양의 장식물)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회랑을 이루는 기둥과 같은 기둥으로 떠받쳐진 돔(dome)이 성당의 머리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 독특한 구조의 성당을 넵스키 대로와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는 기발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성당의 중심축(동서 방향)이 넵스키 대로와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에 보로니힌은 
북쪽으로 대로를 마주보는 웅장한 파사드를 만들고 동과 서 양쪽으로 
육중한 기둥의 곡선형 열주 회랑을 배치시켰다. 
당초 계획은 남쪽에도 같은 회랑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서쪽 파사드의 중앙문은 북쪽 회랑에 가려졌다.

카잔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할 경우 넵스킨 대로에서 볼 경우 측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석고 대리석으로 이어 만들어진 94개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한다.  
반원형의 모양을 만든 것이 성당을 한층 웅장해 보이게 한다.

카잔 대성당 제단

중앙 본당은 측면 본당보다 4 배 더 넓고 반 원통 모양의 금고로 덮여 있다. 
측면 통로는 직사각형 케이슨으로 덮여 있다. 
천장은 프랑스 설화 석고로 만든 양식화된 꽃 형태의 그림 같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회색과 분홍색의 카렐리안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제단의 계단과 바닥, 왕실의 바닥과 강단은 진홍색 반암과 마주하고 있다. 
인테리어는 밝고 세속적이며 고급스럽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은 돔이 높이 치솟는 인상을 준다.
치장 벽토 장식품과 조각 구성은 내부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메인 예배당의 이콘은 프랑스에서 가져온 금과 트로피 실버로 장식되어 있다.

 

Iconostasis

프레스코화와 캔버스화로 구성된 실내 회화는 제국예술아카데미가 감독했다.
성화벽은 바실리 보로비콥스키와 유명한 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아들 
안드레이 이바노프 등 주로 아카데미 소속 화가들이 그렸다.

중앙 본당의 금고에는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과 옅은 "갈보리 행렬"이 있다. 
중앙 벽에는 옅은 "십자가를 들고"와 "구금 됨"과 칼 브룰로프의 그림 
"천국에 하나님의 어머니를 데려 가기"가 있다.

사원의 우아한 장식은 작은 사원 형태의 우랄색 돌로 된 성막으로 
계단식 바닥에 배치되고 현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돔 볼트

하나님의 어머니 아이콘의 전형적인 옷을 입은 하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머리는 축복의 몸짓으로 손가락을 접은 채 손을 들었던 
아기 예수를 향해 약간 기울어져 있다. 
성모의 얼굴 표정은 아들을 기다리는 고통을 예상하여 슬퍼한다. 
아기의 얼굴은 성숙함과 진지함으로 놀라운 감동을 받는다. 
그들의 시선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영혼을 직접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돔 볼트

 

카잔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의 중심은 돔 하단의 공간이다. 
굵직한 기둥이 네 복음서의 저자가 그려진 펜덴티브(pendentive)를 받치고 있다. 
돔 밑부분은 예수와 성모의 생을 주제로 한 조각처럼 보이도록 
그린 회색조 프리즈(그리자이유, grisaille)로 꾸며졌다. 
격천정 돔은 두 겹으로 이루어졌다.

 

카잔 대성당 내부

1811년 공사가 끝날 무렵, 카잔 성당은 국가적 성지가 될 위용을 갖추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카잔 대성당 내부

1813년 7월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운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톨스토이의 작품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의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대성당에는 격자로 둘러싸인 미하일 쿠투조프 (Mikhail Kutuzov) 사령관의 묘비가 있다.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내부

 

인증샷

 

인증샷

 

카잔 대성당 내부

 

카잔 대성당 예배

 

[영상]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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