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Landscape. 1909.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70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Vasilievich Kandinsky, 1866 ~ 1944)는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 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다.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1922년에서 1933년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고  
1944년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프랑스어: Neuilly-sur-Seine)에서 사망하였다. 

 

Sketch for composition V. 1911.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95 x 13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이 작품으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 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Improvisation> 시리즈, <인상 Impression> 시리즈와 아울러  
<구성 Composition>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 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 · 우발적 · 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 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으로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Sketch for composition VI, 1913.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300 x 1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는 실제 장면에 기초해서 추상화를 그리곤 했다. 
그림을 보면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절제된 폭력, 오른쪽에 충돌하고 있는 두 척의 배, 
크게 흔들리고 있는 노, 가운데 배처럼 생긴 형체는 거대한 파도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다. 
밝은색의 사선은 대포를 암시하고 오른쪽 위에는 로마군기가 보인다. 
이 그림은 어느 해전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대의 그것과 같이 이 작품도 거칠고 혼란스럽다.

이 장면은 다분히 폭력적이고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통해 
배나 폭풍우를 표현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런 느낌을 전해주려 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와 형상만을 이용했다. 
이 그림을 언뜻 보면 어두운 그림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절제되어 있는 여러 부분으로 인해 경쾌한 작품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 칸딘스키의 이러한 그림들은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미움을 받았다.

 

Landscape. 1913.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88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그림 공부를 착실히 한 표현주의 화가였다. 
당시 여성화가에 대한 위상이 좋지 않았던 시절, 
둘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칸딘스키 36세, 뮌터 나이 25세 의 뮌헨의 작은 마을
무르나우(Murnau)에서 만나 사랑하며 함께 그림과 여행을 즐기게 된다. 

두 사람은 바이에른 지방의 무르나우에서 동거를 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했다. 
1911년에 창립된 '청기사'와 교류하며 활동을 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청기사파는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떠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고,  
꾸준한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1915년 스톡홀름에서 둘은 잠시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는 이후의 오랜 동안 이별하게 되었다.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뮌터는 그를 기다렸지만,  
칸딘스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장군의 딸과 결혼한다. 

칸딘스키를 기다리던 뮌터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뮌터는 한동안 그림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후에도 칸딘스키와 함께했던 무르나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뮌터의 작품에는  
그녀 삶의 모든 정서와 풍경이 담겨져 있다. 
맑고 상징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단순한 형태 
그리고 검고 뚜렷한 윤곽선으로 내면의 정서를 담아 형상화하였다.

무르나우에 남겨진 칸딘스키의 작품을 나치로부터 온전하게 지켜낸 뮌터는  
후에 자신의 작품과 함께 뮌헨 시립미술관에 모두 기증하고 
1962년 8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상] Wassily Kandinsky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Little schoolgirl, 1907.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3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르 포코니에 (Henri Victor Gabriel Le Fauconnier 1881~1946)는 
헤스딘(Hesdin)에서 태어난 프랑스 입체파 화가였다. 
1901년 앙리 포코니에는 프랑스 북부에서 파리로 이주하여 법을 공부한 후 
장 폴 로렌스 (Jean-Paul Laurens)의 스튜디오에서 회화 수업에 참석한 다음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에서 회화 수업을 들었다. 
그는 그의 이름을 Fauconnier에서 Le Fauconnier로 변경하고 1904년과 1905년 
살롱 데 인디펜던트(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전시하여 Henri Matisse 와 일치하는 대담한 색상을 구현다. 
그는 1907년 에 브리타니로 이주하여 플루 마낙의 바위 풍경을 
단순한 형태를 구분하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갈색과 녹색의 징계 톤이 특징인 원형 입체파 스타일로 그렸다.

 

Village in the mountains, 1910.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앙리 포코니에는 개인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의 입체파 형태를 개발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 시작될 때 앙리 포코니에는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6년 동안 머물렀다. 
당시 그의 작품은 입체파와 표현주의를 결합하여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성공과 영향력을 가져왔다. 
그는 1920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의 그림이 더욱 사실적이 되었다.
그는 파리 (1946)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ke, 1911.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92 x 7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ignal, 1915.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8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Luxembourg Gardens. Monument to Chopin,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8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 1910)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가난한 배관공의 자제로, 프랑스 마옌 데파르트망(Department) 라발에서 태어났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 없이,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어떠한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30대 중반에 이미 환상과 전설, 원시성이 서식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독학으로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기에 ‘일요화가’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이 시기에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되었다.

1885년부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후 
18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앙리 루소의 작품은 초기에는 그가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과 
어색한 인체 비례, 환상과 사실의 색다른 조합 등의 이유로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후에 <경악(驚愕 : 숲속의 폭풍 1891)> <잠자는 집시, 1897> <뱀을 부리는 여인, 1907>
<시인의 영감, 1909>과 같은 그의 그림은 참신성과 원시적인 자연스러움을 근거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원시림과 같은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성, 
강렬한 색채는 현대예술의 거장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앙리 루소는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연대 음악대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이 되었다. 
이때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 루소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게 된다. 

이후 22년간 세관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나온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View of the area from the Vanves Gate,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1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루소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다섯 명이 죽고 크레망스마저 1888년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조세핀누 역시 4년 후인 1903년에 사망하고 만다. 
루소는 1890년에 그린 <나 자신, 초상 : 풍경>이란 작품 팔레트 뒷면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써 넣어 먼저 간 크레망스를 추모하고, 재혼한 조세핀누의 건강을 빌었다.

1884년 루소는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18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A tiger attacking a bull. In the rainforest, 1908~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4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오늘날 루소를 환상적인 천재로, 또는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기록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상과 전설,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와 기하학적인 구성에 연유한다. 
그의 그림은 전문적인 기교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열정을 통해 
원시적인 세계를 환상에 기반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서투름과 투박한 뒤에서 역설적이게도 숭고한 신비로움을 준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 사이에 일어난 기존 가치관의 전도와 새로운 가치 기준, 
새 질서에의 욕구 의지는 급속한 템포로 예술 분야의 변혁을 촉구했고, 
특히 유럽의 정신 세계는 세기말적인 ‘~주의(-ism)의 과잉', '사상의 혼돈'이 찬양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루소의 어린이 같고 환상적인 화풍은 
회화사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사실주의 기법과 닮아 있으나 
실제로 화폭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인물의 신체 비례는 너무나 어색하고 과장되어 있고, 
등장하는 동식물 또한 자연과 닮아 있지 않아 
오히려 추상적 형태보다 환상성을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우거진 나뭇잎이나 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커다란 잎사귀 몇 개를 그려 우거진 나무로 표현하였고 
풀의 모양에 있어서도 실제의 형태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렸다. 

열대의 밀림에 신비롭게 된 꽃도 루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며, 
거기에 배치되는 하나하나의 장면도 루소의 공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루소가 그린 밀림 지대에는 건조한 초원에서 서식하는 사자가 살고 있고 
미녀가 숲속에서 나체로 드러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밀림의 생태적인 현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상념 속의 열대 밀림을 창작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미술 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루소가 그린 열대 식물의 

진/부 감정을 위촉한 결과 실존하는 식물과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회답해 왔다고도 한다.

 

St. Trinity in Paris, 1911. by Albert Marche. oil on canvas, 81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알버트 마르쉐 (Albert Marche)의 작품은 다른 포브스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Fauvist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Still life. Dishes, 1920. by Amede Ozanfan. oil on canvas, 72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아메데 오장팡 (Amédée Ozenfant 1886~1966)은 프랑스 입체파 화가이자 작가였다. 
1909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했고 
파리의 Collège de France에서 강의에 참석했다. 
1915년 Max Jacob 및 Guillaume Apollinaire 와 공동으로 오장팡은 1916년까지 편집한 
잡지 L' Elan을 창간했으며 그의 순수주의 이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거주지와 스튜디오에 
자신의 아틀리에인 l' Académie Ozenfant를 설립했다. 
그는 1936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해 5월에 오장팡(Ozenfant)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약 2년 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있는 Ozenfant School of Fine Arts는 1939년부터 1955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는 1944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장팡은 1955년 프랑스로 돌아와 1953년에 재귀화 될 때까지 미국에서 널리 가르치고 강의했다. 
그는 남은 생애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1966년 칸에서 사망했다.

 

Still life with a mirror, 1912.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92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till life with a cat, 1921.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78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Landscape, 1925. by Leopold Survage (Sturzwage), oil on canvas, 54.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레오폴 쉬르바주 (Léopold Survage 1879~1968)는 핀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였다. 
22세에 심한 병을 앓은 후 쉬르바주는 그의 경력을 다시 생각하고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0년 모스크바에서 Jack of Diamonds 그룹과 함께 전시했으며 
1911년 Salon d 'Automne 에서 Archipenko의 촉구로 프랑스에서 자신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1922년까지 쉬르바주는 신고전주의자들을 찬성하여 입체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쉬르바주는 상징과 신비주의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Postcard, 1932~1948.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92.3 x 6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1881~195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배웠다. 
페르낭 레제는 인상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부터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그는 기계적인 동적 미를 흡수하여 명쾌한 구도로 정물 · 인물을 그렸다. 

 

Composition, 1924.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는 뒤에 무대 장치와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순수 영화를 제창함으로써 전위 영화의 길을 열었다. 
1930년 전후부터 곡선을 자주 사용하고, 동적인 구도를 취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더하였다. 
대표작으로 〈결혼식〉, 〈아담과 이브〉, 〈트럼프놀이〉등이 있다.

 

Court scene, 1928. by Eve Alix,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Green landscape, 1920~1921. by Andre Lot, oil on canvas, 5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Diana on the hunt,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310 x 13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Allegorical scene,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279.5 x 8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in Provence, 1928. by Alexander Truin. oil on canvas, 
50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figure, 1924. by Andre Favori, oil on canvas, 72 x 4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Catching herring,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46 x 11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idge,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9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eton coast, 1911. by Leon Hubert. oil on canvas, 46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onoring the midshipman, 1950. by Guy de Vogue. oil on canvas, 
80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rotracted conversation, mid-19th century. by Karl Spitzweg (?). oil on canvas, 
6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late 19th century. by Caspar Ritter. oil on canvas, 
55 x 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early 1890s.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Warrior with a banner, 1821.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59.6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athing Diana, 1872.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41.2 x 5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ea view, 1837.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63 x 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oy with dog, 19 century.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97 x 72.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around 1900. by Ludwig Hoffmann.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orest landscape, around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by Fritz Ebel.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with a lake, 1840~1860.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107 x 1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asant children,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by Edward Ackerman. oil on canvas, 

42 x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hipwrecked, 1855. by Johann Wilhelm Cordes. oil on canvas, 
120.5 x 1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cenery, 1828. b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80 x 1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430번 홀은 모리스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1958)와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1880~1954)의 작품을 전시한다. 
모리스 블라맹크는 프랑스의 화가로 1899년 앙드레 드랭과 

사귀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블라맹크는 마티스 등과 더불어 야수파 운동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고흐의 영향을 받아 원색의 밝은 색조로 

점과 곡선을 사용하여 유동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세잔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1918년부터는 새로운 사실주의의 작품을 그렸다. 

'예술에 있어서 이론이란 의사의 처방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자임에 틀림없다. 지식은 본능을 말살해 버린다. 
그림의 창작은 유통(流通)이 자재(自在)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가장 야수파적인 화가였으며 

포비즘 속에 산 화가이기도 하였다. 


블라맹크는 1876년 파리에서 출생했으나 그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이라 한다. 
양친은 음악가로 자제의 교육에는 무관심한 보헤미안 기질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자전거 경주 선수를 해 가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그는 본능에 의하여 화가가 되려고 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모리스 블라맹크는 "화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아 직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어린이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라고도 하였다. 
그는 앙드레 드랭과의 교우로 마티스와 사귀어 포비슴 운동에 가담하였다. 
블라맹크는 무엇보다도 생명력의 표현을 화면에서 추구해 보려던 화가이다. 

"나는 미풍양속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진부한 이론과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서 해방된 자연의 활달함을 보여주고 싶다"
고 말하던 블라맹크의 패기는 색채의 과잉과 범람으로 화면에 마구 넘쳐 흘러 
야수파 중에서도 더한층 높은 음색의 절규가 되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1880~1954)은 프랑스의 예술가, 화가, 조각가이다. 
앙리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을 주창하였다.
드랭은 1880년 파리 외곽의 일드프랑스, 이블린, 샤투에서 태어났다. 
블라맹크와 마티스를 만난 뒤 그림을 기리기 사작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앙드레 드랭은 1895년에 그림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1898년 Académie Camillo에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수학하는 동안 
그는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회화 수업에 출석했고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드랭은 모리스 블라맹크를 만나 스튜디오를 공유하였고, 
함께 인근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1901년 9월부터 1904년까지 
Commercy에서의 군 복무로 인해 작업은 중단되었다. 
퇴역 후 마티스는 드랭의 부모에게 드랭이 공학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에 전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설득하였고 이후 드랭은 줄리안느 아카데미에 출석했다. 

드랭과 마티스는 1905년 여름동안 지중해 마을 콜리우르(Collioure)에서 함께 작업했으며, 
같은 해 말에 살롱 도톤에서 매우 혁신적인 그림을 공개했다. 
생생하고 부자연스러운 색상으로 인해 비평가 루이 복셀은 그들의 작품을 
"les Fauves" 또는 "야수"라고 조소적으로 불렀고, 이것이 야수파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1906년 3월, 유명한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앙드레 드랭을 런던으로 보내 런던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30점의 그림(그 중 29 점은 아직 현존)에서 드랭은 휘슬러나 모네와 같은 
이전의 화가의 작품과 완전히 다른 런던의 초상을 선보였다. 

대담한 색상과 구성으로 드랭은 템스강과 타워 브리지가 등장하는 여러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을 보고 미술 평론가 T. G Rosenthal는 이렇게 평가했다.
"모네 이후로 런던을 그렇게 신선하게 묘사하면서도 
영국적인 본질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랭은 템즈강을 묘사할 때 여러 개의 점을 찍는 점묘법을 사용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점들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에, 분할 점묘라고 불리는 색상의 분리 그 이상이며,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강물 안에서 분할된 색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Seine view, 1906.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54.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own by the lake, 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81.3 x 100.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own, 1908~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73.4 x 92.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Bougival, 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Landscape with a house on a hill, 1925~1926.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33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 1905.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2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he road among the mountains, 1907.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Houses by the water, 1910.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1 x 102.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he rocks,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0.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Clay jug, white napkin and fruit,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Basket with bread, jug and glass of red wine,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00.5 x 1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able and chairs,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88 x 8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with a skull,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72 x 11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Grove,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16.5 x 81.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Landscape with a boat near the coast (Quarry-Senis-Denis), 1915.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0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Martigues. Harbor in Provence,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41 x 9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rait of an Unknown Man Reading a Newspaper (Chevalier X), 1911~1914.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62.5 x 9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Girl in black,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93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rait of a girl in black,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16.5 x 8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영상] Maurice Vlaminck and André Dera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422번 홀은 강렬한 색상의 페인팅이 주된 역할을 하는 

야수파(fauvist)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의 모든 그림은 20 세기 초반에 제작되었다.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야수파는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 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야수파의 주요한 화가로는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문하생인 
앙리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라울 뒤피(Raoul Dufy),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진 푸이(Jean Puy),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야수파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였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했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즘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즘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이처럼 야수파는 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미술활동이었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의 신호탄과 같은 주요 사조로써 평가된다. 
그 이유는 야수주의를 시작으로 화가의 주관이 색채로 표출되는, 
즉 관념적 사상이 색채로써 표출될 수 있는 색채의 추상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수파의 화가들은 하늘과 바다는 푸른색, 나무가 울창한 산은 초록색이라는 
색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개성 강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3세계 미술의 성향인 원시주의(Primitivism)에 
영향을 받아 더욱 과감하고 강렬하게 색채를 왜곡해 나갔다. 
여기에 더해진 생략된 묘사와 허술한 표현 그리고 성의없어 보이는 
붓질의 흔적이 더해진 야수파의 작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추한 그림 ’ 
그리고 ‘미치광이의 반란’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들은 야수파의 작품들을 야수적이라고비꼬았으며, 
'야수파'의 미술적 사조에 가담된 화가들을 ‘야수들’이라 조롱하는 가운데 
'야수파'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Red dancer,1907.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99.7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1877~1968)은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1877년 1월 26일 로테르담에 가까운 구시가지인 항구도시 델프스하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되던 1892년 
로테르담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과정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시간을 부둣가에 나와 

선원들과 매춘부들을 스케치하며 보냈다. 
1897년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가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간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사풍자 잡지에 삽화 그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반 동겐은 마티스 이후 야수파를 일군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감각적으로 그린 여인의 초상화들로 유명하다. 
선원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낸 그는 
가난한 집안의 사정 때문에 1896~1898년에서야 

로테르담 예술학교에서 화가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보헤미안같은 생에 대한 태도와 미술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한 불만 등으로  
화가 마티누스 실트(Martinus Schilt)의 작업실 이층으로  옮긴 뒤 
이곳에서 삼년동안 지내게 되며 그동안 주로 창녀들이나 
배의 선원들을 그의 그림의 테마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퇴페적인 여자들의 그림들이 이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Antonia La Coquinera, 1906.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로테르담 왕립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20세 때인 1900년 파리에 옮겨간 후 
몽마르트르 지역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칠장이, 풍자 답지 삽화가, 
카페 예술가, 신문을 배달할만큼 가난에 찌들어진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 몇몇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친분을 맺고 주간지에 그의 삽화를 기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던 반 동겐은 
1902년부터 점차 채색 중심의 대담한 화풍의 그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904년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화랑에서 1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등과 함께 살롱 도톤전에 참여했다.

​이때 미술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이들의 작품을 두고 
‘레 포브(Les Fauves)' 즉, 야수들의 그림이라고 비꼬았다. 
반 동겐은 원색조의 강렬한 색채와 정적인 관능미가 돋보이는 
<팜므파탈 (Femme Fatale 1905)>을 출품하여 야수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Woman in black hat,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1906년 몽마르트르의 세탁선(바토 라부아르)으로 거주지를 옮겨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와 시인, 
음악가들과 친분을 맺고 그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받았다. 
이 때 피카소의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풍부한 예술적 토양과 환경 속에서 그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1906년 포비즘 운동에 참가하여 신선한 색채와 
힘세고 북돋운 것 같은 필치로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동겐은 1907년 피카소 그림의 판매인이었던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와 
계약을 맺은 뒤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당시 드레스덴에 본거지를 두었던 독일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cke)'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의 솔직하면서도 색채효과가 뛰어난 초상화 양식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선풍적으로 유행했다.​

한편, 반 동겐은 1908년 독일 표현주의 그룹인 다리파에 가담하여 
드레스덴에서 열린 다리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유일한 야수파 화가로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회화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Lucy and her partner, 1911.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30 x 9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주로 서커스나 카바레 같은 도시의 유흥시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여인들의 누드와 밤의 도시 생활을 주제로 택해 
감성적이면서도 긴장과 불안감이 엿보이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유혹적이되 정적인 관능미가 넘치는 인물 표현으로 
사교계의 큰 호응을 얻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사교계의 공식적인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후기에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미가 부각되었지만, 오히려 상류 사회의 호평을 받아 
저명인사나 유명 여배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권력과 부로 치장된 화려한 외관 속에 감추어진 
부패하고 타락한 실상을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퇴폐적인 관능성을 견디어 낸 초상화를 그려 크게 인기를 얻었다. 
만년에는 사교계의 총아로서 오로지 유명인의 초상을 그렸다. 
초상화와 삽화를 그리는 화가로 서구에서는 마티스와 같이 야수파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겐은 풍부한 색채의 바다 풍경과 과감하고 간결한 양식의 파리 풍경도 여러 점 그렸다.

Spring, 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초기에 인상파 풍(風)의 그림을 익히고 있었으나, 1906년 포브 운동에 참가하여 
생생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당시는 마티스의 영향이 현저했다. 
후에는 드레스덴의 '브뤼케' 파(派)에도 가입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표현파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1905∼1913)의 제작을 동겐에게 있어서 절정이라고 보는 비평가가 많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는 여기에 일찍이 공감해 마지않던 수틴의 작풍을 받아들여서 사교계의 히로인과 은행가 
그리고 무희 등을 신랄하게 그려 내어 그의 붓은 그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 동겐이라고 하면 경묘한 필치로 표현한, 
세련된 부인들과 그녀들의 멋장이 유행 감각에만 맴돌았다고 평한다.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안 반 동겐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고 1908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키쉬너(E.L. Kirchner) 등 4명의 대학생들로 창립된 독일 인상파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ecke/Bridge)의 회원이 되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그림들은 더 사실적으로 변하고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며 반 동겐은 192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반 동겐은 1926년에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27년에는 벨기에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929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반 동겐은 1959년부터 모나코에서 살았고, 
1968년 91세를 일기로 몬테카를로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Roofs and Cathedral in Rouen,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119 x 9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1879~1949)는 프랑스의 포비스트(야수파) 운동 예술가였다. 
프리에스는 오랜 조선소와 선장의 아들로 르 아브르(Le Havre)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96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Le Havre School of Fine Arts)에서 
공부하는 동안 평생 친구인 뒤피(Raoul Dufy)를 만났다. 

 

Temptation (Adam and Eve),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73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와 뒤피는 1895~96년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장학금을 받고 함께 파리로 가서 
에콜 드 보자르에서 보나의 교실에 입실하고 귀스타브 모로의 교실에 있었던 
마티스(Henri Matisse), 마르케(Albert Marquet),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를 만났다. 
프리에스는 야수파의 일원이 되어 1907년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Tulips and daisies,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908년 프리에스는 노르망디(Normandy)로 돌아왔다. 
그는 1912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1914년까지 가르쳤고, 전쟁 기간 동안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919년 파리에서 다시 살았고 1949년 사망할 때까지 
툴롱과 쥐라 산맥으로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Still life with a statuette of Buddha, 1909.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1 x 4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의 생애의 마지막 30년 동안, 그는 이전 동료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희미한 바로크 풍미는 그의 풍경, 정물화 및 인물화에 활력을 더했다.

 

Hill,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1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생동감 넘치는 아라베스크와 야수파 시절의 화려한 색채를 포기한 프리에즈는 
더 냉정한 팔레트로 돌아와 논리적 구성, 단순한 색조, 볼륨의 견고함 및 
평면의 뚜렷한 분리에 대한 세잔(Cézanne)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Autumn works, 1907.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4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프리에스는 194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파리 교외에 있는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에 묻혔다.

 

Rural landscape, 1910. by Auguste Chabo. oil on canvas, 77 x 10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1882~1955)는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프랑스 남부 님(Nimes)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차보드는 아비뇽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합류했다. 
1899년에 그는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다. 
1900년에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그의 부모의 포도원으로 돌아왔다. 
그 사업이 그곳의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1년에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리를 다시 떠나야 했다. 
그는 배에서 일하면서 서아프리카 해안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파리의 밤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파리 인근 몽마르뜨에서 그는 파리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그렸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튀니지에서 군 복무하는 동안 차보드는 사람들과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이후 파리로 돌아와 야수파(Fauves)와 함께 전시했다. 
수년 동안 그의 파리의 밤 문화 그림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주제를 포기하자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차보드의 입체파 단계는 1911년에 시작되어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 그는 1913년 뉴욕을 포함하여 많은 전시회를 가졌으며 
그의 작품은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Vlaminck) 및 피카소(Picasso)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1920년부터 그는 "푸른 시대"를 보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유일한 색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사용했다. 
그때부터 그는 프랑스 남부에만 집중했다. 
그는 시골 생활, 농부, 알필(Alpilles)의 언덕과 산책로의 장면을 그렸다. 
그는 1955년 Graveson에서 사망했다.

 

Flowers, 1906.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81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1882~1960)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릴의 에콜 데 보자르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드로잉을 공부하고 파리에 정착하였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피카소, 브라크, 후앙 그리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입체주의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1917년에 처음 추상 작품을 제작하였고 추상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Mill on the Marne, 1911.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22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onies, 1906. by Pierre-Paul Girieud.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1876~1948)는 1876년 6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프로방스에서 자라 독학으로 화가가 된 그는 1900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몽마르뜨의 테르트르 광장 근처로 이사한 후 현대 미술의 거장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 

샤를 카무앙(Charles Camoin),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곳에서 피에르 지리유드는 몽마르뜨 크리에이티브 클러스터의 본사이자 
유명한 카페인 "Lapin Agile"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인 피에르 지리유드의 

그림에 대한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그는 전통적 표현의 경계를 넘어 포비즘과 표현주의의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Quay Notre Dame in Le Havre, 1908. by Georges Dupuis. oil on canvas, 58 x 7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s 1874-1932)는 프랑스 화가이다.

 

Portrait of Suzanne Dufy, the artist's sister, 1904. by Raoul Dufy. oil on canvas, 

46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라울 뒤피 (Raoul Dufy 18877~1953)는 프랑스의 화가로 
직물, 도자기 디자이너 사이에서 유행한 다채롭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877년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23세에 파리로 나와 오로지 
인상파의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다. 
라울 뒤피가 자기의 묘화 과제에 대하여 스스로 계발(啓發)된 계기는 
마티스의 작품 <호사 · 정밀 · 쾌락>을 접한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포비슴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프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큐비즘으로 접근했으며, 한때는 화상(畵商)도 위험시하는 

실험가인 척도 하였지만 그 금욕적인 분석과 구성의 수법은 결국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칭 '바캉스의 화가'로 회귀하였다. 
특히 그는 생활을 위하여 디자인을 하는 일에도 손을 대어 
장식 미술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아 그 힌트에 의하여 회화도 충실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09. by Jean Puy. oil on canvas, 131.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876 년 11월 8일 프랑스 로안에서 태어난 진 푸이(Jean Puy)는 

파리의 Académie Julian에서 공부하고 1905년에 다른 야수파(Fauves)와 함께

Salon de Indédependants 및 Salon d' Automne에 작품을 전시했다. 

 

Landscape, 1903. by Jean Puy. oil on canvas, 48.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늘날 진 푸이의 그림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런던의 Courtauld Institute of Art 등에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진 푸이는 1960년 3월 6일 프랑스 Roanne에서 사망했다. 

 

Landscape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50.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망갱 (Henri Charles Manguin 1874~1949)은 프랑스 야수파(Fauves) 화가였다.
앙리 망갱은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에게 사사하고 마티스(Henri Matisse ), 

마르케( Albert Marquet),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 등과 교유하며, 
1905년 살롱 도톤의 유명한 포비슴(野獸派) 출품 사건에 참가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들어졌고,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듯이 격렬한 색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으나, 
다른 포비스트에 비하면 종래의 형태나 구도에 집착하여, 

온화한 경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Path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73 x 9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Morning in the Cavaliere, 1906.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Flowers, 191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41.7 x 3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Room of Charles Guer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421번 홀은 샤를 프랑수아 프로스페르 게랭(Charles-François-Prosper Guérin 1875~1939)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샤를 게랭은 파리의 보자르 드 파리(l' École des Beaux Arts) 에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와 마티스, 마르케와 함께 공부했으며 1910년 
그래프턴 갤러리(Grafton Galleries)에서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Room of Charles Guer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Lady with rose 장미를 든 여인, 1901.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2.5 x 3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stroll, 1921.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79.5 x 1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Girl with a book, 1906.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73.5 x 5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Walk in the park, 1910.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44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Gallant scene, 1908.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45.5 x 5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Terrace, 1909.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5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Musician, 190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61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Expectation, 190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6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Nude woman, 1910.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116 x 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Portrait of a young woman, 1909.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2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Moonlit night in the forest in Montmorency, 189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38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영상] Charles-François-Prosper Guér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rench painting of the early 20century.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420번 홀은 인상파와 포스트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초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Artemis, 1911. by Marie Laurencin. oil on canvas glued to cardboard, 35.5 x 2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는 1912년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 헤어지고,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쓴다.
1907년, ‘세탁선’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아폴리네르는 가난한 문인이었고, 로랑생은 무명 화가였다. 
둘 다 사생아로 태어났다. 

둘은 연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했다. 
1911년 경, 개성 강한 성격이었던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뒤, 
기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과의 사랑을 추억하며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썼다. 
마리 로랑생은 그렇게 우리에게 화가보다는 시인의 뮤즈로 더 알려졌다. 

한참 사랑에 불타고 있던 아폴리네르가 주문해서 두 연인을 그린 루소의 그림은 
로랑생을 시인의 뮤즈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종종 그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 누군가의 뮤즈로 더 알려지곤 한다. 
로댕의 연인이었고 재능 있는 조각가였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그늘에서 괴로워했으며, 
프리다 칼로는 생전에 화가보다는 유명한 벽화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여성 예술가들은 예술가 자체가 아니라 뛰어난 다른 예술가의 연인이나 뮤즈로 더 알려진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신비로운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여성 예술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와 예술에 영향을 준 삶에 대해 보기 보다는, 
여성적인 스타일을 이야기하고 대상화된 여성 ‘뮤즈’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Bacchante, 1911. by Marie Laurencin. oil on canvas glued to cardboard, 32.7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마리 로랑생은 불행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독일인 귀족과 결혼을 한다.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충돌로 시작된 이 전쟁 와중에 
로랑생은 적국의 군인과 결혼을 했던 터라 국외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1920년 경에 남편과 이혼하고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마리 로랑생은 다른 여성 예술가와는 달리 생전에 유명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마리 로랑생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문인 장 콕토는 마리 로랑생을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낀 불쌍한 사슴으로 비유했고, 
로댕은 야수파의 소녀라고 놀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그녀는 사립학교에서 미술 강사로 일했다. 
그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Woman leaning on the table, 1901.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 (Eugène Carrière 1849~1906)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그는 오귀스트 로댕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그의 작품은 피카소에게 영향을 줬다. 
카리에르의 흑백 양식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 잘 나타나 있다.

 

Woman with baby on her lap, 1890.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61.3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는 소년 시절 석판화가의 문하생이 되지만, 후에 회화를 그린다. 
처음은 신중한 생활을 했는데,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影像)을 화면에 그려보는 것을 궁리했다. 
그 때문에 색채를 다 쓰지 않고 단색으로 그려서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깊게 하여, 
인물을 음영(陰影)에 매몰되듯 녹여서 그리고 있다. 

 

Mother and child, 1880.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38 x 50.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의 작품은 박력과는 먼 표현이지만, 
인상(人像)에는 꿈속을 보는 듯한 호소력이 있으며, 
모성애를 그린 작품은, 부드럽고 단아함을 머금고 있다.

 

Naiad, 1896.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41.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작품에는 〈바티뇰의 화실〉(1870년), 〈들라크루아 예찬〉(1864년) 등이 있다.

나이아데스(Naiad)는 그리스 신화에서 일종의 물의 요정으로 
연못, 호수, 우물, 개천 등 담수에 살고 있다고 여겨졌다.
다른 물, 바다의 요정과 비교해 보면 오케아니스는 큰 바다, 대양, 바다의 요정, 
네레이스는 바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에게 해의 요정인데 비해 
나이아데스는 흐르는 물 중에서 작은 개천, 우물들의 정령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에서 세상의 모든 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나이아데스는 자신이 속한 연못이나 물의 원천과 연결되어 

만약 그 물이 모두 마르면 그 요정도 죽게 되었다. 
대부분의 나이아데스는 동물과 인간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아르고 호의 

선원 중 하나인 힐라스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때로는 인간에게 위험하기도 했다.

 

Hamlet, 1898. by Fernand Maglen. oil on canvas, 41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Town with a cathedral, 1899. by Fernand Maglen. oil on canvas, 137.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Miners. by Jules Gustave Bess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줄스 베송 (Jules Besson 1868~?)은 프랑스 화가였다. 
50대에 그는 인도 차이나로 이사했다. 
사이공에 있는 그의 제자들의 작품은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Market in Brest 브레스트 시장, 1899. by Fernand Pie. oil on canvas, 64.7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Landscape in Saint-Denis, 1906~1910. by Charles René Picart Le Doux. oil on canvas, 46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샤를 피카르 르두 (Charles Picart Le Doux 1881~1959)는

프랑스 시인, 작가 및 화가였다.

 

Lodge (Spectators), 1906. by Tony Minartz,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토니 미나츠(Tony Minartz 1870~1944)는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일러스트 레이터였다.

 

Music hall, between 1895 and 1896. by Jean Louis Forein. oil on canvas, 50.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장 루이 포랭 (Jean-Louis Forain 1852~1931)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이자 판화가로 
오일, 수채화 , 파스텔 , 에칭 및 석판화를 포함한 미디어에서 일했다. 
그의 많은 인상파 동료들과 비교할 때, 그는 평생동안 더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후세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Plowing, 1902. by René Auguste Seyssaud. oil on cardboard, 4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르네 오귀스트 세이소(René Auguste Seyssaud 1867~1952)는 

프랑스의 인상파이자 현대 화가이다.

 

Road, 1901. by René Auguste Seyssaud. pasted on canvas paper, 30.7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In the restaurant, 1907. by Charles Hoffbauer. oil on canvas, 115 x 16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찰스 호프바우어(Charles Constantin Joseph Hoffbauer 1875~1957)는 
미국 시민이 된 프랑스 태생의 화가였다. 
그는 역사적인 흥미로운 장면을 묘사한 많은 주제를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를 그렸다.

 

Hall of the Dauphin in the Palace of Versailles, 1901. by Maurice Lobre. oil on canvas, 

80 x 9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모리스 로브레 (Maurice Lobre 1862~1951)는 프랑스 예술가였다. 
그는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했다.

모리스 로브레는 19세기 후반에 그의 작품이 살롱 드 샹 드 마르

(Salon du Champs-de-Mars)에 전시되면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1888년 그는 살롱에서 명예 멘션과 여행 보조금을 받았다. 
그해 여름 그는 노르망디로 가서 자크-에밀 블랑쉬와 함께 지냈다. 
드가(Degas) 와 휘슬러(Whistler)는 그와 가장 절친한 손님 중 하나였다. 

 

Lobby of the Palace of Versailles, 1903. by Maurice Lobre. oil on canvas, 92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20세기 초에 모리스 로브레는 앙티미즘(Intimist) 스타일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모티프는 편안한 부르주아 환경이 지배했다. 
1905년 4월, 그의 작품은 앙리 거벡스(Henri Gervex) 갤러리의 공동 전시에서 
다른 스타일의 실무자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전시회는 앙리 마티스, 헤르만 폴, 르네 프리네 , 어니스트 로랑 등과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앙티미즘(Intimist)"라는 용어를 만든 
에드워드 빌라드(Édouard Vuillard)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Shrine relocation, 1899. by Gaston de La Touche. oil on canvas, 145 x 15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가스통 라 터치(Gaston de La Touche 1854~1913)는 

프랑스 화가, 삽화가, 조각가 및 조각가였다.

 

 

 

Room of Albert Marqu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419번 홀은 주로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1875-1947)의 풍경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알베르 마르케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초기 작품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로 야수주의의 성향을 보였으나 
점차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온화한 화풍으로 변모했다. 
색과 빛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강과 바다, 항구와 범선이 있는 풍경은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Room of Albert Marqu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알베르 마르케는 1875년 보르도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장식화가를 지망하였으나 22세 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더불어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문하생이 되었다. 
마티스와는 절친하였고 같은 아틀리에서 1900년의 만국박람회의 장식화를 
공동 제작한다든지 또는 같은 전람회에 각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림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볼 때 마티스를 양(陽)이라고 한다면 

마르케는 음(陰)이라 할만큼 서로 달랐다고 한다.

 

Louvre embankment and New Bridge, 1906.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0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루브르 제방과 새로운 다리
이 작품은 마르케 자신의 재능적 특징인 건설적이고 명확하고 
쉽게 보이는 구성을 만드는 능력을 보여준다. 
지평선이 올라가고, 제방의 선은 그림의 공간을 비스듬히 가로 지른다. 
그러나 컴포지션의 역동성은 “평면” 색상으로 균형을 이룬다. 
포비즘(fauvisme)의 교훈을 배웠을 때 마르케는 신중하게 색상의 관점을 약화시킨다.

무더운 여름날의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그림의 컬러 팔레트를 
몇 장으로 줄였지만 정확하게 발견된 비율은 흰색과 새벽 비행기와는 달리 
빛이 넘치고 보라색 음영이 깊고 차가운 것처럼 보인다. 
밝은 녹색 울창한 단풍이 태양을 통해 갈색처럼 붉어진다. 
더운 날의 센세이션은 마르케가 길가의 한가운데 나무가 던지는 그림자의 
명확한 윤곽을 투명한 페인트로 강조한다는 사실에 의해 향상되었다.

상반된 원칙 즉 건축 고전과 일상 생활의 결합, 역동성 및 동시에 구성의 엄격한 계산, 
하프톤 및 순수한 색의 사용 등 마르케의 경관은 독특한 특성을 부여하여 
회화의 고유한 인식 모두를 작품에 알린다. 

 

View of the Seine and the monument to Henry IV, 1906.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5.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센 강과 헨리 4세 기념비 보기
마르케는 인상파가 유지하는 표현적 또는 현실적 가치에 비해 
회화적 특성과 강한 색채를 강조한 포비즘(Fauvism - 野獸派)에 속했다.
포비즘은 1904년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운동은 
1905-1908년에 불과 몇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세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이 운동의 주창자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였다.

 

Saint Jean de Luz, 1907.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생 장 드 루즈
마르케는 일찍부터 바다나 항구와 같은 해변의 풍경화를 그렸고, 이러한 기호는 늙어갈수록 
화면에 인적이 없는 고요한 취향을 가미하여 그 제작을 일관하였다. 
같은 모티프의 풍경화에도 뒤피의 경우에는 축제의 광경, 
그 생생한 환희의 표현에 특색이 있으나 마르케가 노리는 것은 대범한 색면 구성 
즉 넓고 넓은 하늘의, 언덕의, 모래 형태의 이조(移調)에 중점을 두고 있다.

 

Gulf of Naples 나폴리 만, 1909.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2 x 80.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야수파 (fauvisme, 野獸派)는 현대미술의 서막을 시작하는 그룹이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1905년 비평가 '루이 복셀'이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 전시회에서  
마르케의 작품을 "야수의 무리 속에 같혀 있는 도나텔로 같다."라고 평한데서 유래하였다. 
야수주의는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의 일단의 작가들이 보인 
도발적인 색채 작업에 대해 경멸적으로 붙인 용어이다.  
야수파의 그림들은 대체적으로 재현적이며 동시에 
매우 과장된 색채를 호화에 주된 요소로 사용하였다. 

 

Hamburg port 함부르크 항구, 1909.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6.5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야수파들의 그림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도발에 가까웠다. 
비자연적인 원색과 세련되지 못한 기법, 
정교하게 그리지 못하고 대충 그린 듯한 기법으로 혹평을 받았다. 
야수파는 후기 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 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면서 발전되었다. 
즉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그러나 야수파의 두드러진 특징은 색채의 강렬함이므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명암,양감 )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표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않으면서도 포괄적이고 
오히려 개성적인 자아표출에 공통점을 가지는 야수파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에 이루어졌고 1908년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A rainy day in Paris. Notre dame cathedral, 1910.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81 x 6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파리의 비오는 날. 노트르담 대성당
마르케의 초기 작품은 젊은 마티스의 작업과 구별되는 똑같은 날카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나면서 마르케는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난다. 
마르케의 작품의 본질은 변화한다. 
색깔이 더욱 조화되고 조화로워지면서, 마르케는 

대기의 전달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포비즘의 유산으로서, 마르케는 대담한 다채로운 일반화와 

발레리와 함께 순수한 음색의 사용 경향을 유지한다.

 

Harbor in Menton 망통의 항구, 1905.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마르케는 격렬한 색채에 의한 포브의 화가가 아니고, 
그 색조의 대담함에 의해 포비스트라 말하는 견해도 있다. 
확실히 단조로운 색채로 덮인 그의 화면은 때때로 중후한 이면의 
뉘앙스가 노출되어 몽롱한 애수마저 풍기고 있다. 
포비즘 운동 이후의 그는 구성을 더욱 순화하여 견고하고 평형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르케는 현대 회화에 유니크한 지위를 차지하는 풍경화가로 기억되는 화가일 것이다.

 

Milliners, 1901.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50.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알베르 마르케의 작품은 다른 포비즘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야수파의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Maina with Venice in the distance, 1896. by Charles Cotte. oil on canvas, 60 x 7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찰스 코트(Charles Cotte 1863~1913)는 프랑스 화가다. 
그는 어둡고 떠오르는 브리트니 시골과 바다 풍경으로 유명하다.
1885년에 찰스 코트는 브리트니를 방문하여 매년 몇 달 동안 카마라 쉬르 메르에서 
어부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종교 축제에 참여했다. 
브르타뉴 어의 삶의 항구, 폭풍 및 장면은 찰스 코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제가 되었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쓰여진 장르 구성, 어두운 색, 작가는 상징적인 성격을 주었다. 
1889년 처음으로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발표했다.

1897년 코트는 파리의 갤러리에서 베니스에서 쓴 일련의 그림 
"바다에서 바라본 베니스의 전망", "베니스가 있는 바다"를 전시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큰 존경을 받았던 "Nabi"그룹의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그는 1904년 스페인과 1907년 아이슬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에 새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1905년 이후 그는 책 삽화로 전환하여 약 60개의 판화를 만들었다. 
1913년 질병으로 인해 Cotte는 그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View of Venice from the sea, 1896. by Charles Cotte. oil on canvas, 55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897년 찰스 코트는 파리의 갤러리에서 베니스에서 쓴 일련의 그림 
"바다에서 바라본 베니스의 전망", "베니스가 있는 바다"를 전시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큰 존경을 받았던 "Nabi"그룹의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그는 1904년 스페인과 1907년 아이슬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에 새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1905년 이후 그는 책 삽화로 전환하여 약 60개의 판화를 만들었다. 
1913년 질병으로 인해 Cotte는 그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Exit from the Moulin Rouge 물랑 루즈 출구, 1901~1902. by Tony Minarts,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토니 미나츠(Tony Minartz 1870~1944)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독학 화가인 토니 미나츠는 1896년 National Society of Fine Arts 에서 
그림을 전시하여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Grand Guignol” 스타일의 쇼를 위한 
페인트 패널 로 파리의 퐁파두르 극장을 장식했다. 
미나츠는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전국 미술협회 살롱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Bretons and Bretons, 1907. by Lucien Simon,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뤼시앵 사이먼(Lucien Joseph Simon 1861~1945)은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화가이자 교사였다.
1891년에 그는 화가 잔느 사이먼 (Jeanne Simon 1869~1949) 의 여동생 과 결혼하여 
그녀의 고향인 브리태니(Brittany)의 풍경과 농민 생활에 매료되었다.

 

Lady in the garden, 1909~1911. by Pierre Laprad, oil on canvas. 5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피에르 라프레이드 (Pierre Laprade 1875~1931)는 프랑스 화가이다.

 

[영상] Albert Marquet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Louis Valta.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418번 홀은 루이 발타(Louis Valtat 1869~1952)의 자연의 품 속에 풍경을 보여준다. 
루이 발타는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다. 
루이 발타는 20 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비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는 강렬하고 거의 야생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데 중점을 두는 그룹을 창립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오히려 인상파 경향을 특징짓는 보다 섬세한 손길을 사용했다.

 

Children's games (Girls playing with a lion cub), 1905~1906. by Louis Valt. oil on canvas, 
81.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는 프랑스의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디에프에서 

선박 소유자의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발타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리세 호슈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중등 학교에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풍경 화가로 젊은 루이스가 예술에 관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17세에 예술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그는 에콜 (École des Beaux-Arts de Paris)에 지원했다. 
1887년 발타는 파리로 이주하여 에콜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유명한 학술 예술가들과 함께 공부했다.

 

Lilac rocks (Sea surf), 1900.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5.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890년, Jauvin d 'Attainville 상을 수상한 발타는 파리의 La Glaciere 거리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는 1893년 독립 예술가 살롱에서 데뷔하여 자신의 아트 스튜디오를 둘러싼 
동네의 거리 풍경을 묘사한 여러 그림을 전시했다. 
그의 경력의 이 초기 기간 동안 발타는 인상주의의 자연스러운 빛 터치와 
Pointillism 에서 발견되는 다채로운 점을 사용했다. 

 

Sea bay in Antheor, 1906~1907. by Louis Valt.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성인이 되었을 때 발타는 결핵에 시달렸기 때문에 
파리의 여름과 지중해 연안의 겨울로 시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지중해 근처에서 보낸 시간 동안 발타는 색채 사용을 강화하고 
특히 바다 풍경을 그리는 데 있어서 포비스트 성향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By the boat,1899. by Louis Valt. oil on canvas, 81 x 10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914년 이후 그는 파리와 루앙과 베르사유 인근 지역에서 작업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꽃, 풍경, 현대 생활의 장면을 포함, 그는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발타의 그림은 그가 아직 20대 였을 때 미술 평론가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93년 쉬르 르 블러 바드 는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Society in the garden, 1898.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5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에게 가장 초기의 그림인 이 작품은 1898년경에  제작되었다. 
활기차고 분리된 붓놀림과 그림의 격렬하고 역동적인 질감은 발타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와 반 고흐(Van Gogh) 등의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Sun under the trees, 1908~1909.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6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가 가장 유명한 그림을 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였다. 
여기에는 1903년 Les Rochers Rouges dans la Mer와 3년 후 La Dentelliere가 포함되었다. 
이 작품들은 발타가 그의 동료인 앙리 마티스보다 명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포비즘 운동의 비공식적 지도자로 자리 매김하는 것을 보았다.

 

In the south of France, 1908.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의 초기 작품은 그의 아버지의 풍경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로서의 완전한 성숙은 마티스(Matisse)를 포함한 두 명의 동시대인과 함께 
1905년 파리의 Salon d 'Automne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으며 그의 그림을 전시했던 시기였다. 
그 후 발타의 그림은 생생하고 거의 뚜렷한 순수한 포비즘의 색상과 
발타가 인상파에 대한 초기 경험에서 유지했던 약간 더 부드럽고 
덜 추상적인 터치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발타는 1948년까지 페인트 계속 녹내장으로 고생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고 
결국은 시력을 잃고 1952년 1월 2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Village under the snow in Morvan, 1910~1911. by Louis Charlot.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스 샬롯(Louis Charlot 1878~1951)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1910년에서 1911년 사이에 완성된 이 작품은 루이스 샬롯의 대표작이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빈곤을 겪었지만 그림을 그만 두지 않고 파리에서 전시회를 늘렸다. 
루이스 샬롯은 1920년이 되어서야 조르주 쁘띠 갤러리(Galerie Georges Petit) 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Salon d' Automne의 회원인 그는 또한 1927년부터 1943년까지 Salon des Tuileries에 출품했다 . 

 

Village under the snow in Morvan, 1908. by Georges Dufrenois.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조지스 더프레노이(Georges Dufrenois 1870~1943)는  포비즘과 관련된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였다.
그는 프랑스 티 아이스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건축과 회화 사이에서 망설임 끝에 더프레노이는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가 1895년에 작업하기 시작한 그의 초기 작품은 인상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1902년에 그는 베니스로 첫 여행을 했고 
1차 세계 대전 중을 제외하고 거의 매년 1939년까지 반복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위대한 거장인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 네제를 발견했다. 
예술 평론가 마리우스-아리 르 블론은 자신의 베니스 작품이 
"베네치아 마스터의 위대한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는 이탈리아 인의 직계 계승에 자신을 두고 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부유하고 귀족적인 베네치아 인으로 남아 있다"고 썼다.

 

House in the garden, 1905. by Charles Lacoste. oil on cardboard, 

25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샤를 라코스테 (Charles Lacoste 1870~1959)는 프랑스 화가였다.

 

[영상] Louis Valtat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elix Vallotto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화가들 중에는 평생을 한가지 화풍만 고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 무쌍하게 다양한 화풍을 보여준 화가들도 있다. 
그런 화가들 중 스위스의 펠릭스 발로통(Felix Edouard Vallotton 1865~1925)은 
정밀한 대상의 묘사에서 나비파까지 연결되는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발로통은 스위스의 로잔에 있는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 열 일곱의 나이에 로잔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것을 보면 꿈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그가 배운 분야는 고전이었다.

 

Landscape at Arques-la-Bataille, 1903. by Felix Vallotton. oil on board, 67 X 10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파리에 도착한 발로통은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 
구스타브 블랑제와 쥘 르페르브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많은 학생들처럼 발라통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화가는 홀바인과 뒤러 그리고 앵그로였다. 
이들의 작품은 평생 발라통 미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처음 발로통은 초상화가로 미술가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885년, 스무 살 되던 해, 정식 살롱전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살롱전에 
출품을 하고 난 후 작품의 주제가 실내 풍경으로 바뀐다. 
작고 정밀한 붓 터치, 선 처리로 아주 섬세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기법도 
이즈음부터 그가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Interior, Bedroom with Two Figures, 1903-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rdboard, 61.5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그의 이런 기법은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자 했던 1920년대의 신즉물주의 화가들의 
기법과 유사한데, 그를 신즉물주의의 선구자라고 평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로통은 화가보다는 목판화가로 더 미술사에 크게 기록되는 것 같다. 
현대 목판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처음 목판화 제작을 시작한 것은 발라통이 스물 여섯 되던 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에칭 분야에도 뛰어든다.
1890년대 책을 통해 그의 수많은 목판화가 소개 되었고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도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그에게 그래픽 미술가의 선두 주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Lady at the Piano, 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43.5 X 5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많은 잡지에 기고도 하고 포스터 제작에도 열성이었던 발로통은 1893년, 
프랑스 예술가 협회를 탈퇴하고 기존의 살롱전에 반대하던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이 이어진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또한 아르누보 갤러리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발라통은 나비(Nabi)파와도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이미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 안에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품은 나비파는 종교적인 주제와 
초자연적인 주제가 주요 모티브였지만 나중에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까지 폭 넓게 다루었다. 
’미술에서 색채는 사물의 원래 색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고갱의 관념을 
그 시작으로 해서 표현을 단순하게 하고 굵은 윤곽선을 강조해서 
작품 속 대상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Woman with a Black Hat,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3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나비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발로통의 작품에서는 

점차 전통적인 기법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후기 인상파와 상징주의 그리고 일본 판화의 영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890년 에콜드 보자르에서 개최된 일본의 우키요에 전시회가 열렸을 때 
많은 화가들이 앞 다투어 작품을 구입했는데 발라통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9년, 34세가 되던 해 발로통은 베르넴 가문의 여인과 결혼을 한다. 
베르넴 가문은 르노와르 작품을 구입한 대표적인 화상이었다. 
아내 덕분에 발라통은 금전적인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베르넘 전느 (Bernheim-Jeune) 갤러리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도 얻게 되었다.

 

Portrait of Mrs. Haazen,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유화 작품에 치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목판화 제작이 줄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술 비평도 시작했다. 
비엔나에서는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고 독일 잡지에는 그의 비평이 실리는 등 
국제적으로 발라통의 명성이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고국인 스위스 사람들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1910년, 그러니까 마흔 다섯이 되고서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발로통은 군에 지원한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다. 
비록 군에 입대하지 못했지만 발라통은 그의 장기인 

목판화를 통해 일련의 반전 작품을 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명성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꾸준히 살롱에는 작품을 출품했다. 
암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발로통은 60세 생일을 보내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환갑 다음 날이다.

 

Portrait of G. E. Haasen, 1913,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7 cm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1,700점이 넘는 회화와 드로잉을 남겼다고 하니까 그의 다작에는 그저 입이 벌어진다. 
그 외에도 조각과 3편의 소설, 수많은 연극 대본을 남긴 발라통을 생각하면 
끝없이 열기를 뿜어 내는 용광로가 떠오른다.
스위스 화가인 펠릭스 발로통은 1882년에 파리에 왔다. 
그는 본래 목판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나비파에 합류하면서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영상] Felix Vallotto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Pierre Bonn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1947)는 프랑스 출신 화가 겸 판화 제작자이다. 
후기인상파 중 전위 화가 단체인 나비(Les Nabis)파의 창립자이다. 
보나르는 그림을 참조로 하여 기억에서부터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의 그림은 종종 꿈 같은 느낌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개인적인 그림들에는 그의 부인 
마르트 드 멜리니(Marthe de Meligny)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그녀의 그림을 384점이나 그렸다.

그의 작품이 특별히 우월한 점은 통상적인 그림 구조가 아니라 
관능적인 색채, 시(詩)적인 암시, 시각적 재치에 있다. 
인상주의의 후기 멤버로 인정되지만, 보나르는 색의 독특한 사용과 

복잡한 상상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Roberta Smith는 '보나르의 작품에서 발산되는 것은 색채만이 아니다. 
매끄럽게 연마되고, 다채로운 색의 베일로 가려졌으며, 예상치않은 공간적 수수께끼와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들에 의해 강조된 뒤섞인 감정의 열기도 있다.'라고 말했다.
보나르는 '20세기의 모든 위대한 화가 중 가장 특이한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보나르는 1891년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을 만나며, 독립예술가협회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의 연례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사작했다. 
같은 해에 보나르는 1889년부터 1903년까지 발간된 미술, 문학 잡지인 <La Revue Blanche>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에두아르 뷔야르(Édouard Vuillard)와 함께 권두 삽화를 그렸다. 

보나르는 20대 때에는 상징적, 정신적 본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젊은 화가들의 모임인 Nabi파 (Les Nabis)의 일원이 되었다. 
나비파의 다른 인물로는 에두아르 뷔야르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가 있다. 
보나르는 그림뿐만 아니라 포스터와 책의 삽화, 판화, 극장 세트 그림 등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1910에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로 갔다.

 

Room of Pierre Bonn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보나르의 친구와 역사가들은 그를 '조용한 한결같은 기질'이라고 평하였다. 
그의 일생은 비교적 '긴장과 역경의 반전'이 없는 편이었다. 
그는 60년 동안 한결같은 발전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보나르는 특히 작은 붓 자국과 비슷한 명도로 이루어진 영역에서

색의 강렬한 사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복잡한 작품은 서술적이며 자서전적이다. 
그의 부인 마르테(Marthe)는 수십 년 동안 늘 함께한 대상이었다. 
음식이 남아 있는 식탁에 앉아 있기도 하고, 

목용통에 비스틈히 있는 일련의 그림에서처럼 누드도 있다. 
보나르는 또한 몇 개의 자화상, 풍경화, 거리의 모습 등도 그렸으며, 
보통 꽃과 과일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정물화를 그렸다.

보나르는 생물에서 바로 그리기 보다는 그의 주제를 그렸다. 
때로는 사진을 찍고 색에 대한 주석을 붙였다. 
스튜디오에서 주석에 따라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모든 주제를 손 안에 쥐고 있다. 돌아가서 이것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다시 생각하며, 꿈을 꾼다."

그는 작은 스튜디오의 벽에 못질을 해둔 여러 개의 캔버스들에 동시에 작업을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그림의 형태를 더 자유롭게 결정할 수가 있었다. 
"만약 나의 캔버스들이 틀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어떤 면을 내가 선택할지를 결코 미리 알지 못했다."

 

By the Mediterranean Sea (triptych). Central panel,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07 x 1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지중해 풍경(삼부작) : on the Mediterranean (Triptych).
기둥을 이용해 하나의 그림을 삼부작으로 그린 것처럼 표현했다.

 

By the Mediterranean Sea (triptych). Right panel,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07 x 1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By the Mediterranean Sea (triptych). Left panel,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07 x 1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Behind the fence, 1895. by Pierre Bonnard. oil on cardboard, 31 x 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프랑스의 화가인 보나르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느껴 에콜 드 보자르와 아카데미 쥘리앙을 다녔다.
1889년 그림에 전념키로 결심하고
고갱의 영향을 받은 반인상파 그룹과 나비파(The Nabis)를 결성하였다.

 

Corner of Paris, 1905. by Pierre Bonnard. oil on cardboard glued to wood, 

49.2 x 5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보나르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와 판화, 포스터에도 뛰어났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져 40대로 들어서면서 밝은 색조로 
60세 이후부터는 선명한 색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Train and scows (Landscape with a freight train), 1909.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77 x 10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보나르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하여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보나르는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구도로 풍경, 멱감는 나부, 정물,
사람이 모인 실내 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정감으로 그려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앵티미스트(Intimiste)로 평가 되었다.

 

Landscape in the Dauphin, 1899.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5.5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앵티미스트(Intimiste)란 인상파 이후 실내의 정경을 
친밀한 정감으로 표현한 실내화가를 말한다.
보나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남프랑스의 칸에서 은거하며
제작에 몰두하다가 전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The beginning of spring. Little fauns, 1909.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102.5 x 1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Seine near Vernon,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1.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Morning in Paris 파리의 아침,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76.5 x 12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Evening in Paris 파리의 저녁,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76 x 12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Triumph of Bacchus (Countryside Holiday), 1911~1913. by Ker Xavier Roussel. oil on canvas, 
166.5 x 11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Mythological plot, 1903. by Ker Xavier Roussel. oil on cardboard, 47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영상] Pierre Bonnard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Maurice Deni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414번 홀에는 나비(Nabis)파의 창시자이자 주요 이론가 중 한명인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 1870-1943)의 작품 "The History of Psyche"(1907-1909)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1908년~9년 사이 러시아의 사업가이자 예술계의 유명한 후원자였던 
이반 모로조프(Ivan Morozov)가 자기 집에 장식을 의뢰한 벽화 작품들이다.
푸시케(Psyche)와 에로스(Eros)의 사랑에 관한 신화 이야기로 7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는 187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해안 마을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모리스 드니의 관심은 종교와 예술로 14살 때인 1884년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찾았던 모리스 드니는 이듬해인 1885년 15살 때 일기에 지역 교회에서의 예배, 
색상, 양초 빛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면서 자신이 가야할 화가의 길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느님의 기적을 표현하는 크리스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1890년의 샹젤리제의 살롱(앙데팡당 전)에 등장해 점차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많은 근대적인 회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로 종종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림은 군마(軍馬)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14세기와 15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이탈리아 프레스코 화가들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그때부터 주제와 전통적인 원근법과 입체감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모리스 드니는 이론적 박식함에 순수함과 세련된 감수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08년 아카데미 랑송이 설립될 때 교수가 되어 191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후년에는 스스로 신전통주의라고 부른 고전주의에로의 회복을 시도하여 고전적이고
카톨릭의 종교적인 장식성을 가미한 독자적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제작한 웅장한 벽화는 공공 작품 중 1912년 샹젤리제 극장
(Theatre des Champs-Elysees)의 천장에 그린 그림이 가장 중요한 그림이다.  
종교적 신앙이 깊었던 드니는 종교화를 혁신하고 부흥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17년 제네바의 생폴 성당(Church of St. Paul)의 벽화를 그렸고, 
1924년에는 파리의 the Petit Palais의 돔을 장식했으며 1928년에는 the Senate Building, 
1936년과 1939년 사이에는 제네바의 the Palais des Nations 등의 수많은 프레스코화를 완성하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들이 사망하자 종교 미술에만 전념한
조르주 데스발리에르(George Desvallieres:1861~1950)와 함께 종교 미술
아틀리에(Ateliers d' Art Sacre)를 세웠으며 프랑스 종교 미술 부활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종교 미술에 관한 많은 이론을 남겼는데, 1920년에 <이론(Theories) 1890~1910>, 
1922년에 <새로운 이론(Nouvelles Theories)>, 1939년에 <종교 미술사(Histoire de l'Art religieux)>, 
1943년에 <세뤼지에의 생과 작품 (Serusier, sa vie, son oeuvre)>을 출간했다.

'상징파' 화가로 꼽히는 작가는 처음에 세잔(1839∼1906)과 고갱(1848∼1903)의 영향을 받있으며, 
이후 세뤼지에(1863∼1927) 등과 19세기 말 고갱의 작화사상에 공명하여 모인 반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인
'나비(Nabis)파'를 결성해 신선한 색채 감각을 이어받으면서 나아가 
고갱의 평면적인 표현에 새로운 착상을 담는 표현을 하였다.

 

Room of Maurice Deni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예술가로서의 
예민한 감수성과 열정을 가톨릭 신앙을 통해 승화시킨 독특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모리스 드니는 나비파(les nabis)의 일원이기도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는 
표피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인상주의를 거슬러, 인간과 우주의 본연의 아름다움과 
종교성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창조하자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래, 나는 그리스도교 미술가가 되어야 해.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야 해”라는 다짐을 노트에 옮겨놓을 정도로 
종교와 예술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조르주 데발리에르(Georges Desvallieres)와 함께 
아르 사크레 아틀리에(les Ateliers d’art sacre)를 만들어 종교미술의 혁신과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저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모던 아트와 아르 사크레에 관한 새로운 이론(1922)> 등의 책을 통해 
입체파와 야수파, 그리고 추상미술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론을 펼쳤는데, 
순수한 선과 평면적인 형태, 그리고 단순하고 조화로운 색채가 화면에서 이뤄내는 질서는 바로 자연의 
성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매입해 ‘작은 수도원’(Prieure)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작업했는데, 
내부에는 직접 벽화를 그려 장식한 성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리스 드니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며, 함께 활동했던 나비파 작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

 

Panel 1 : Flying Cupid amazed at the beauty of Psyche,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4 X 26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놀란 플라잉 큐피드(Flying Cupid amazed at the beauty of Psyche).
큐피드(에로스)는 수많은 사랑 주제의 그림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하나의 장면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회화는 

등장 인물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큐피드를 그려 넣으면 그 사랑 이야기를 보다 쉽게 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주로 화면 귀퉁이에 자리할망정 

이 사랑의 신만큼 미술 작품에 많이 등장한 신화의 캐릭터도 없다.
자연스레 큐피드에게는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라는 상찬이 주어졌다. 
신화 속의 지위는 낮아도 미술 속의 지위는 매우 높은 신인 것이다.

수많은 선남선녀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큐피드, 그 자신도 사랑에 깊이 빠진 적이 있다. 
프시케와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 사례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던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는 서기 2세기 로마의 문인 
아풀레이우스에 의해 아름다운 철학적 동화로 진화했다. 
그 글을 토대로 수많은 화가들이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얼마나 많이 그려졌는지 그림책을 만든다 하면 

각 장면마다 필요한 그림들을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을 정도다. 

프시케는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미의 여신 비너스마저 시기할 정도였다. 
자존심이 상한 비너스는 아들 큐피드에게 프시케를 

아주 무가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라고 시켰다. 
그러나 프시케를 찾은 에로스는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모리스 드니는 공중에서 프시케를 바라보던 큐피드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그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중심을 다 잃을 정도다.

 

Panel 2 : Zephyr brings Psyche to the Island of Bliss,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6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신화가 말하는 프쉬케는 그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뭍 남성들을 두렵게 하였다. 
그의 아비는 신탁에 묻고 딸고 결혼 예복을 입혀 바위 위에 버렸다. 
산의 정상에 홀로 버려진 푸쉬케는 갑자기 바람에 실려 어딘가 잡혀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 계곡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 
잠이 깨어 보니 어느 화려한 왕궁 침심이었다. 
매일 밤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찾아와 

자기를 보려고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고 떠났다. 
자기를 보려고 하면 자기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고 

사랑을 남기고 떠나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Panel 3 : Psyche discovers that her mysterious lover is Cupid,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7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어느 날 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푸쉬케는 등불을 밝혀 

잠에 취한 신비한 남편을 보고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의 용모에 떨린 푸쉬케의 등잔에서 

기름 한방울이 떨어져 젊은 에로스의 몸에 흘렀다. 
놀라 도망가버린 에로스를 바라보며 푸쉬케는 절망에 빠진다. 

 

Panel 4 : Psyche, opening a box with dreams of the underworld, plunges into sleep,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패널 4. 언더 월드의 꿈으로 상자를 여는 프시케는 잠에 빠진다
프시케는 그리스 왕과 왕비의 막내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형제 자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여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제를 포함한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과 아름다움의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와 비교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프시케를 숭배하기 시작하여 아프로디테의 사원이 버려졌을 때 여신은 격분했다. 
처벌로 그녀는 그녀의 아들 에로스를 보내서 프시케가 
사악하고 끔찍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큐피드는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고 어머니의 분노에서 그녀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언니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질투했다. 
그녀의 자매는 결국 왕과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남았다. 
아무도 프시케에게 결혼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차라리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였다.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델파이의 오라클에 답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왕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델파이 오라클에 문의했다. 
여사제 내부에서 아폴로가 직접 말했다. 그는 
"당신의 딸은 신들이 두려워하는 짐승과 결혼할 것입니다. 
그녀를 장례식 옷을 입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바위 첨탑으로 데려 가십시오.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의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상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폴로(Apollo)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았기 때문에 주문한대로 했다.
그는 그녀를 장례식 옷을 입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바위 첨탑으로 데려갔다. 
프시케는 짐승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을 때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첨탑에서 뛰어내렸다. 왕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 서풍의 군주인 제피루스는 그녀를 죽음에서 구했다. 
그는 그녀를 에로스의 궁전으로 데려가 에로스가 돌아올 때까지 밤새 기다렸다. 
그곳에서 그녀는 궁전이 매우 크고 각 찬장이 금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에로스가 돌아 왔을 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서 프시케에게 그를 보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보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는 그녀에게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망칠 것이다.

Psyche가 궁전에서 생활한 첫 몇 주 동안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매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Panel 5 : In the presence of the gods, Jupiter bestows immortality on Psyche and 
celebrates her marriage to Cupid,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9 X 2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패널 5. 신들 앞에서 주피터는 프시케에게 불멸을 부여하고 큐피드와의 결혼을 축하한다.

 

그리스의 여신 푸쉬케는 에로스를 찾아 세상을 헤메다가 수많은 시험과 역경을 거쳐 
올림푸스 산에 신의 자리에 오르고 에로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영혼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메타포를 보여준다. 
푸쉬케는 그리스 언어로 영혼을 가리킨다. 
푸쉬케의 역경은 우리 영혼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Panel 6 : Relatives leave Psyche at the top of the mountain, 1909.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200 X 2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어느 왕국의 세 공주 가운데 막내가 미모가 빼어나

미의 여신 비너스(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받았다. 
비너스는 아들인 사랑의 신 큐피드(그리스신화의 에로스)에게 프시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의 품에 안기게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큐피드는 프시케의 미모에 빠져 부부가 되었다. 
큐피드는 프시케에게 완전한 어둠 속에서만 만날 수 있으며,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동생을 시기한 두 언니는 프시케에게 남편이 괴물일지도 모르니 

밤에 그의 얼굴을 확인해 보라고 부추겼다. 
마음이 흔들린 프시케가 등불을 밝히고 살펴 보니 

침상에서 잠자는 사람은 바로 아름다운 사랑의 신이었다. 
이 때 등불의 기름이 어깨에 떨어져서 잠에서 깨어난 큐피드는 

프시케의 불신(不信)을 꾸짖고는 떠나버렸다.

 

Panel 7 : Cupid brings Psyche to heaven,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80 X 2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시케는 남편을 찾아 각지의 신전(神殿)을 돌아다니다가 비너스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비너스는 여러 종류의 곡식이 섞인 곡식더미를 하룻밤 사이에 한 알씩 가려 내라거나, 
황금으로 된 양털을 가지고 오라는 등의 시련을 주었다. 
비너스는 프시케가 갖가지 시험을 통과하자 하데스의 아내이자 지하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의 처소로 가서 아름다움이 담긴 상자를 가져 오라고 시켰다.

상자를 손에 넣은 프시케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죽음의 잠이 프시케를 뒤덮었다. 
이 때 큐피드가 나타나 구출한 뒤 주피터(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게 
어머니를 설득하여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주피터는 비너스에게 이들의 결합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비너스도 둘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프시케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를 마시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생명을 얻었으며, 
큐피드와의 사이에서 희열을 상징하는 볼룹타스라는 딸을 낳았다.

 

Room of Maurice Denis and Edouard Vuill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415번 방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와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는 앞서 살펴 보았고, 에두아르 뷔야르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식 예술가, 판화가이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에두아르 뷔야르는 나비파의 주요 일원이었으며,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색의 영역과 내부의 장면을 조합한 그림을 제작하였고, 

주제는 색과 패턴에 혼합시켰다. 

뷔야르는 또한 극장의 세트와 실내 장식을 위한 패널에 채색을 하거나 
접시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디자인하는 장식 예술가였다. 
1900년 이후 나비파가 해체되었을 때 그는 보다 사실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화려한 디테일과 생생한 색상으로 풍경과 실내를 그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프랑스 산업과 예술계에서 
저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 인물에게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렸다.

에두아르 뷔야르는 1868년 11월 11일 손에루아르주 퀴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뷔야르의 아버지는 은퇴한 해군 보병 대장이었으며, 제대 후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마리 뷔야르보다 27살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1877년 아버지가 은퇴한 후, 뷔야르의 가족은 파리에 정착하였다. 
어머니의 재봉 작업장이 있던 Rue Daunou로 이사한 후, 

마리스타교육수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뷔야르는 장학금을 받아 명문 리세 퐁텐(Lycée Fontaine)에 입학하였고,
수사학과 예술을 공부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고전 조각을 드로잉하였다.
리세에서 뷔야르는 미래에 나비파가 되는 케르 자비에 루셀, 모리스 드니, 작가 피에르 베버, 
그리고 미래의 배우이자 무대 감독이 되는 오렐리앵 뤼네포를 만났다.

 

Room of Maurice Denis and Edouard Vuill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1889년 말에 뷔야르는 모리스 드니와 다른 리세 출신 친구들과 함께 
반비밀주의이자 반신비주의 모임인 나비파를 만들고 자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 젊은 화가 폴 세뤼지에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폴 고갱의 지도에 따라 
색의 영역으로 구성된 추상에 가까운 항구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최초의 나비파 작품인 <부적 The talisman>이 되었다. 

세뤼지에와 그의 친구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폴 랑송은 예술을 
그 토대로 환원시키는 데에 전념한 최초의 나비파 작가였다. 
1890년 드니를 통해 뷔야르는 랑송의 스튜디오나 

Passage Brady의 카페에서 만나던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의 존재는 이론적으로는 비밀이었고 회원들은 암호화된 별명을 사용하였다. 
뷔야르의 별명은 그의 군 복무로 인하여 나비 주아브(Nabi Zouave)가 되었다.

나비파는 언제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공통된 생각과 
이상을 공유했으나, 1900년 전람회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1894-1908)에 의해 나비파의 해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드레퓌스는 유태인 프랑스 육군 장교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면죄되기 전에 유배지로의 추방이 선고되었다. 
나비파에서 뷔야르와 보나르는 드레퓌스를 지지한 반면, 

드니와 세뤼지에는 프랑스 육군를 지지하였다.

1900년 나바파가 해체된 후 뷔야르의 스타일과 주제는 변화하였다. 
나비파와 함께 할 때에 바야르는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1900년 이전에 그렸던 밀폐되고 붐비는 어두운 실내를 버리고 
자연광이 비치는 야외를 더 많이 그리기 시작하였다. 


뷔야르는 계속해서 실내를 그리긴 했으나, 실내는 더 밝고 깊어졌으며 
색채는 더 다채로워졌고, 얼굴과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졌다. 
빛의 효과는 주제가 실내이든 파리의 공원과 거리이든 뷔야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가되었다. 
뷔야르는 점차 자연주의로 돌아가, 1908년 11월 Gallerie Bernheim-Jeune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다수의 새로운 풍경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한 반모더니즘 비평가로부터 "체계적인 변형에 대한 우아한 항의"라는 찬사을 받았다. 

 

Mother and child, 1895.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45 X 3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Visit of Mary Elizabeth, 1894.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03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Martha and Mary, 1896.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77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Holy spring in Gidel, 1905.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56.5 X 17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Figures in a Spring Landscape (Sacred Grove), 1897.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 X 3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Bacchus and Ariadne, 1907.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81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술의 신 바쿠스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를 그린 작품이라 한다.
신화 속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듯하다.

 

Wedding Procession, 1892.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81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Children in the room, 1909. by Edouard Vuillard. oil on canvas, 84.5 X 77.7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방에 있는 아이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 (Edouard Vuillard, 1868 - 1940)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바느질로 생활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888년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가 피에르 보나르를 알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나비(Nabis)파의 일원으로 출발하였다.

인상파의 영향을 벗어나 고갱의 화풍을 따랐고 그의 그림은 
형태의 단순화와 색면(色面)의 장식적 배합을 지향하였다.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의 정경(情景)이나 실내의 정물과 같은 
신변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소재로 삼았으며, 깊이 있는 배색과 
애정 깊은 터치는 앵티미즘(Intimism)의 대표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임의적인 분할, 대담한 생략, 넓게 칠한 단색, 검은 테두리, 
원근감을 버리고 얻은 이분법적 화폭의 장식성, 채색의 섬세함 등이 특징이다. 
동시에 고갱의 구획주의와 종합주의에서 받은 영향이 드러나기도 하며,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 취향 역시 드러나고 있다.

 

In the room, 1899. by Edouard Vuillard. oil on 카드보드, 52 X 7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영상] Maurice Denis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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