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도예프 운하를 가로 지르는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i) 다리

넵스키 대로에서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Griboedova) 운하를 가로지르는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에서 상류 그리스도 부활성당 쪽으로 올라가
첫 번째 다리가 이탈리안 다리 (Italiansky Bridge)이고
조금 더 가면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피의 구세주교회 건설을 돕기 위해 

1880년대에 이곳에 최초로 목조로 건설되었다 . 
공사 기간 동안 다리의 너비는 115m에 달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다리인 Blue Bridge의 너비는 97.5m다. 


1907년에 대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다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Christ Bridge 부활의 교회로 명명되었다. 
이후 10월 혁명으로 1917년 이름이 바뀌었고 1975년에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건설되면서 이 다리는 

그리네프스키 다리(Grinevsky Bridg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 난간의 주철 조각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또다른 명칭은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 
약칭 '피의 구원사원'으로 흔히 불린다.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중심부인 미하일로프스키 정원과 
코뉴셴나야 지역의 그리보예도프 은행 근처에 위치한다. 
사원의 길이는 81m이며,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박물관이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이 사원은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1883년에서 1907년 동안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프로젝트로 건립되었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사원의 건설은 24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1907년 8월 6일 변모축일에 문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이다.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이 교회는 알렉산더 2세 암살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곳에 
1883∼1907년에 걸쳐 세워져서 일명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피의 사원에서 '피'는 1881년 이곳에서 암살당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피를 가리킨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 1907년 첫개관 이후로 
90년 후 공개되었으며,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1881년 3월 13일 ,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 니콜라이 리사코프, 소피아 페롭스카야 등에게 폭탄 테러를 당했는데 
첫 번째로 리사코프가 던진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지나가던 민간인만 다쳤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흐르니예비츠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을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비록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황제를 공격하는 동안 17명이 부상당했고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살해당한 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더 3세는 정치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여 비극의 현장에 회개의 사원인 기념 사원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건축은 레온티 볘눈에게 위임, 빠른 진행으로 인해 
1881년 4월 17(29)일 예배당 헌당식(정화식), 기념 추도식을 지냈다. 
그로모프와 밀리틴 일급 상인 길드원이 건축비를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 임시 예배당은 1883년 봄 사원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존되었으며 
이후 카뉴셴나야 광장으로 옮겨져 9년 동안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어쨌든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이후 1997년에 수리를 거쳐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근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중세 러시아 성당건축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지었다. 
다섯 개의 화려한 돔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건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매우 화려하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모자이크화로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이 많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의 서유럽화에 선을 긋고 
러시아적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알렉산드르 3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보예도프(Griboedov) 운하를 가로 지르는 

15m 길이의 극장 다리와 모이카 강(Moika River)을 가로 지르는 18m 길이의 

말로-코유센니 다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의 모이카 부두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한 쌍의 작은 다리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이름으로, 
디자인과 장식이 비슷하고 그리스도 부활성당 앞에 서로 수직으로 위치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장소다.
이 다리는 실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신혼 부부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혼 부부가 혼인 신고를 마치고 삼자 다리에 도착하면 오래 살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세 개의 다리를 모두 걸어야 하고 반드시 피 흘린 구세주 교회에 절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운하길 끝을 가로막듯 선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모습으로 
찬란한 반구 돔들과 박공 모자이크화, 다채로운 색깔로 치장한 성상들, 
광택 벽돌과 다색 타일, 이탈리아 대리석 등이 참으로 화려하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켠 성 바실리 성당 닮았는데 실제로 그 교회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 
전면 너비 52m, 높이 81m에 이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는 유럽풍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물로 넘치는데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이 인공 도시를 건설하면서 유럽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유서 깊은 건물 가운데 17세기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것은 19세기 말에 세운 이 성당이 거의 유일하다.

 

인증샷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피 위에 선 구세주교회, 뿌린 피에 선 교회, 그리고 우리에겐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 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 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이다.​
​지방자치제 젬스트보를 도입했고 배심원 제도를 채택한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에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인증샷

 ​그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제도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를 습격한다.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바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 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힌다.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둔다.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 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구근(球根) 또는 양파 모양 돔으로 
피의 사원은 정면 가운데에 제일 높은 돔탑이 서 있고 좌우 앞뒤로 두개씩 
에나멜로 장식한 돔 네 개까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사진에선 중앙 탑 좌우 에나멜 돔과 똑같은 것이 뒤쪽에도 있지만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맨 왼쪽 종탑과 오른쪽 측면에 황금빛 구근 돔 셋이 있어 모두 아홉 개에 이른다.

 

정면 제일 높은 탑 위 에나멜 돔은 똬리를 틀 듯 꼬아​서 인도 터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탑 아래 실내에 반구형 돔 천장이 있는데 
이 돔탑에 나 있는 창을 통해 실내 돔 천장으로 빛과 공기를 공급한다. 
자연 채광과 환기를 하는 장치이고 장식도 겸하는 이것을 ​랜턴(등불)이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구근 돔은 ​대지에서 타오르는 하느님의 촛불을 상징한다.
돔의 직경이 아래쪽 탑의 원기둥 직경보다 크고​ 높이도 
여느 유럽 교회나 성당의 돔보다 훨씬 높아 금방 눈에 뛴다.

학자들은 구근 돔이 몽골 지배 이전 13세기에 러시아 고대 건축 양식의 헬멧 돔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
헬멧 돔이란 러시아 영웅들이 썼던 헬멧 모양을 본뜬 돔으로 구근 돔은 이반 뇌제 때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말고도 바바리아 지방 카톨릭 성당과 중동 이슬람 사원, 인도 사원에서도 구근 돔을 볼 수 있다.
구근 돔이 셋이면 성령을 상징하고 다섯이면 예수 그리스도와 네 천사를 상징한다. 
에나멜 돔 중에 가장 많은 형태가 이렇게 초록과  푸른색, 하얀색을 교차해 쓰는 형태이다.

 

정면 돔 아래 박공에 모자이크화가 있다. 
가운데에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가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들고 있다.
이런 예수상을 만물의 지배자,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는 판토크라토르(팬토크레이터)라고 한다.
그런 판토크라토 상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세례 요한, 
왼쪽엔 성 게오르기우스(조지)가 무릎 꿇고 뭔가를 탄원하고 간청하고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 대신 성모가 요한과 함께 인류의 죄를 사면 해달라고 청원하는 그림을 
데이시스(디시스-Deisis)라고 하는데​ 성모 자리에 성 게오르그가 있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유럽 전역과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가 성인으로 받든다.
러시아에서는 국가 문장(紋章)에 넣을만큼 각별한 성인이어서 데이시스에 등장시킨 게 아닌가 싶다.

 

예수 모자이크 양쪽 탑 아랫부분엔 천사와 성인들을 묘사한 반원형 모자이크화들이​ 있다.

 

정면 왼쪽으로 치우친 현관은 화려하게 장식한 지붕과 
뾰족한 지붕 모양 탑을 이고 있고 탑 위엔 독수리상이 서 있다.

 

15세기 말부터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에
독수리 머리가 하나씩 왕관을 쓰고 중간 위쪽에도 왕관이 하나 더 있다. 
세 개의 왕관은 통합된 러시아를 상징한다.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

두 마리 독수리 머리가 각기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포용하겠다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 문장에는 독수리가 양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왼손의 황금 공은 전 세계를 그리스도화 하겠다는 뜻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인 형상을 하고 있고 오른손의 홀(笏)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뜻한다. 

이 문장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폐기되고 낫과 망치가 들어간 소비에트 문장이 
등장했다가 1991년 소련방이 해체되면서 옛 문장이 다시 등장했다.
민주주의 시대에 맞춰 왕관의 의미가 바뀌었는데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의미한다.
독수리가 쥔 홀과 구(球)도 주권 수호 의지와 국가 통일성을 상징한다.
가운데 말을 타고 용을 무찌르는 기사는 정면 박공 그림 데이시스에도 들어간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지붕은 러시아 전통 주택에서처럼 사면을 따라 풀잎 무늬 장식을 했는데 금박 입힌 구리이다.​
지붕 박공에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는 교회 이름에 맞춰 예수 부활을 그려 놓았다.​

 

첨탑 아래쪽에도 반원형 아치를 만들고 천사상과 성인상 모자이크화를 넣었다.

 

정면 이층과 삼층에는 화려한 창문을 냈다. 
섬세하게 부조 장식을 새긴 창틀은 에스토니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창문 사이와 양쪽 끝으로는 기둥 장식을 하고 

안에 화병과 쌍두 독수리 타일화를 번갈아 붙였다.

 

정면 일층 벽에 붙은 모자이크화는 프릴루키의 성 드미트리이다.
14세기 러시아에 여러 수도원을 세워 수도의 삶을 정립한 성자이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 동쪽 측면을 보면 황금빛 구근 돔 셋이 동쪽을 보고 서 있다. 
가운데 돔 아래 그려진 예수상을 에워싼 아치가 끝이 뾰족하다.   
이런 모양의 반원 아치 양식을 가리켜 코코슈니크라고 한다.
코코슈니크 양식은 러시아 전통 건물, 특히 정교회에서 즐겨 쓴다.

 

북쪽 면 모습

알렉산드르 3세는​ 설계 공모를 거쳐 1883년 그리스도 부활성당을 착공한다.
무른 습지 기반을 다지고 화강암을 쌓아 기초 공사를 하는 데만 3년이 걸렸고 
모두 25년 세월을 들여 1907년 완공 한다.
건축비는 왕실 돈과 귀족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고 일반 신자를 받는 교회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2세를 추모하고 기리는 왕실 교회로 썼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뒤 피의 사원을 폭파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큰 건물이 드물어 창고로 썼다.

1931년엔 알렉산드르 2세 테러를 기념하는​ '인민의 의지' 박물관을 안에 만들었다가 
자신에 대한 테러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스탈린이 3년 만에 폐쇄한다.
피의 사원은 그 뒤로도 여러번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폭파될 위기를 넘긴 끝에 
1969년 이삭성당 종교박물관의 분관이 된다. 
오랜 복구와 단장을 거쳐 1998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건물 뒷면 북쪽 모습이다.
매표소가 있는 관람객 출입구가 뒤쪽으로 나 있다. 입장료는 250루블이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수요일엔 휴관한다.  
북쪽 구조는 남쪽과 똑같이 좌우만 다르게 선형(線型) 대칭으로 만들었다.  
정면 중앙 돔탑과 박공 사이, 그리고 창문들 위쪽도 코코슈니크 아치로 처리했다. 
교회는 모스크바 성 바실리교회를 본떠 정통 17세기 러시아 양식으로 지었지만 
당시로는 첨단이었던 전기 시설을 들여 전등 1689개를 밝혔다.

 

북쪽 면 박공에도 예수 부활 성화가 모자이크로 붙어 있다.
교회 안팎엔 당대 러시아 대표 작가들이 10년에 걸쳐 만든 모자이크 성화가 있는데 
그림 면적을 모두 합치면 7천 제곱미터, 2천 평이 넘는다.

 

북쪽 면 오른쪽에도 남쪽 정면과 마찬가지로 쌍두 독수리가 올라선 현관 탑이 솟아 있다. 

 

그리바예도프 운하를 건너 부활성당의 동북쪽 모습을 보니 수상택시들이 운하를 달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난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짜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 궁에서 텃밭을 일구며 소일한다.
해방자 알렉산드르 2세가 피 뿌린 지 37년,  마지막 짜르는 

볼셰비키들에게 가족과 함께 연행돼 시베리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1차대전 때 드러난 
그 체제의 무기력함이 낳은 필연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해방자 짜르가 테러에서 
살아 남았다면 러시아는 물론 세계 현대사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종탑 아래 각진 다섯 면 가득 문장(紋章) 144개를 각기 붙여 놓았다.
제정러시아 시대 지역과 도시와 마을의 문장들을 모았다. 
온 나라가 황제의 피살에 애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바예도프 운하 건너편에서 서쪽 측면을 바라본 모습

 

창문 위 아치 모자이크에 두 천사가 천에 그린 
'천 위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얼굴' 만딜리온(Mandylion)을 받쳐들고 있다.
성상화 이콘(Icon)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도 대상이자 숭배 대상이다.
300 가지에 이르는 이콘을 감상 대상인 예술품이 아니라 
신의 세계가 출현한 것으로 여겨 집마다 성소에 걸어두고 기도한다. 

 

십자가에 못박힘

 

아래쪽 감실, 못 박힌 손발에서 피 흘리는 모자이크 이콘 '십자가에 못박힘'을 본다.
교회 이름을 왜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고 붙였을까?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 당한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아마도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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