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 플렛홈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은 1955년 11월 15일에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레닌그라드 지하철이라는 이름이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처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이름이 높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도시내 고속 교통 기관에 관한 최초의 계획은 
적어도 1899년에는 존재했으며, 그것은 고가식 철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졌고 계획은 10년 이상 나오지 않았다. 
1935년 모스크바 지하철의 개통을 계기로 1930년대 후반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건설 계획은 다시 부상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하 구조물 굴착은 
지하수와 지하 동굴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플렛홈 붉은 모자이크 벽을 배경으로 인증샷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적인 지하철망의 역사는 주요 철도의 터미널역을 
모두 연결하는 노선 건설이 시작된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계획은 지연되었고, 이 노선은 1955년 11월 15일에 개통되었다. 
당초 구간에는 7개 역이 있으며, 몇 달 후에 8번째 역인 푸시킨스카야 역이 개통되었다. 
이 구간은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일부가 되어, 
시 중심부 모스크바와의 열차가 발착하는 역인 모스크바 역과 
시의 남서부에 있는 키롭스키 공업 지대를 연결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계속해서 북쪽으로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58년에는 네바강을 통과하는 구간이 개통되었고, 
나아가 197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주택 개발이 진행되던 
북쪽 구간을 연결하기 위하여 비보륵스키 지구까지 건설되었다. 
1978년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레닌그라드주까지 연장되었다.

 

100 미터가 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친 지질은 종종 지하철 건설공사를 방해했다. 
최악의 사례는 1970년대에 진행된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터널 구간 공사 
도중에 일어났는데 이는 네바강 지하에 동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터널을 완성했지만, 1995년에 이 구간의 터널은 폐쇄할 수밖에 없었고 
레스나야 역-플로샤치 무제스토바 역 구간은 한동안 침수된 상태로 있었다. 
9년 이상 동안 이 노선의 이북 구간은 지하철망 이외의 구간에서 물리적으로 분할되었고, 
2004년 6월에 새로운 터널이 개통되면서 원래대로 회귀했다.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사

2008년에는 프라보베레즈나야 선의 일부가 분할되면서 
새로운 5번째 노선인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 선이 되었다.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선은 북부에 위치한 프리모르스키 지구와 
남부에 위치한 프룬첸스키 지구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현재는 총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 동상

도스토옙스카야 역 앞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의 동상이다.
러시아문학의 대표자이며 예언자, 선각자, 심리학자, 잔인한 재능을 지닌 시인 
등으로 불려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의 구제병원 
부속관사에서 군의관을 아버지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상당히 엄격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조용한 성격이었고 독서를 무척 즐겼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세습사족으로 그런대로 살만은 하였다. 
13세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15살 때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17세때 그의 영지에서 농노에 살해당한다.

1847년초,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어느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그의 방에 웬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페트라 셰프스키서클’ 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정치적 불안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잠재적인 반체제단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이 넉달이나 이어진 끝에, 
페트라 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에게 전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던 12월의 어느날 아침, 간수들이 스물 여덟 살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어딘가로 끌고가 일렬로 세웠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열 여섯 명의 사수(射手)들이 있었다. 
곧 이어 죄수들은 명령에 따라 세 명 씩 짝을 이뤄 나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될 세 명에게 두건이 씌워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속한 무리는 다음 차례였다. 
집행관의 우렁찬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장전! 조준!”

뒤이어 정적이 흘렀다. 
“발사!” 신호는 없었다. 
대신 특사가 가져온 황제의 새 명령문이 큰소리로 낭독되었다.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되, 사형대신 장기간 복역형을 명하노라!”

이 극적인 상황은 전부 니콜라이 1세가 꾸민 일이었다. 
그들이 죄의 무게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간 후에 형량을 감해 준 것이다. 
얼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1850년 1월부터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 처럼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운 순간, 
작가의 뇌리를 스친 문학적 영감이 어두운 감방에 한줄기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빛은 훗날 <죄와 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  동상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이미 
‘범죄의 고백’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지만,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알맞은 실존 인물을 우연히 알게 된 덕이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 (Vremya 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데 주력하는, 
자그마치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삿거리를 찾아 프랑스의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프랑수아 라스네르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는 주먹다짐을 하던 상대가 죽어버린 일을 계기로 본인이 타고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죽어버린 상대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듯 성취감마저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관심사를 시 쓰기로 돌렸지만, 

시인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 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범죄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쇠 창살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방이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의 사연에 매료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네르를 모델로 
<죄와 벌>의 타락한 주인공으로 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버는 수단으로 치부하고, 
둘 다 죄질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보다 작가 자신이 훨씬 더 전문가였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블라디미르 광장을 끼고 돌아가면 쿠드네치니 (Kuznetsjny Pereulok) 골목 5번가
모퉁이에응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 생을 살았던 집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났을지언정 나약한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이 곧 <죄와 벌>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단편들이, 
‘파산의 충격’으로 한데 모여 하나의 이야기 틀로 짜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 
물론 돈이 절실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꺾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갑자기 어느덧 꽤많은 분량으로 늘어난 <죄와 벌> 원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줄거리가 내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그때까지 쓴 원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전했다. 
과연 작가의 본능은 옳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펜이 종잇장 위를 
훨훨 날듯이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866년 1월, <죄와 벌> 제1부가 
<러스키베스트니크 (RuskiiVestnik)>에 실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 작품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러스키베스트니크>는 12개월 동안 <죄와 벌>을 연재했고, 
그동안 정기 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특수를 누렸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인 1867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직전 황제의 특사로 4년 징역과 
4년의 병역 복무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배지 옴스크로 호송되는 중에
성서를 선물받아 유형지에서 탐독하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뀐다.
그의 인생관은 이 춥고 고독한 유형지에서 완성되고 이 경험은 <죄와 벌>에서 묘사된다.

그는 젊은 시절의 무신론에서 벗어나 윤리적 이상과 고난을 통한 구원 등을 확신하게 되고
열악한 환경과 다른 죄수들로부터 적대감과 따돌림을 당하는 등 그가 겪은 심리적 고통
또한 성경을 통한 새로운 인생의 변화 등이 그의 작품 속에 잘 나타난다.
온갖 부류의 죄수를 통한 러시아 민중의 실체를 깨닫고 

인간 행태에 대한 작가적 통찰력을 키우게 된다.

이 시기의 고통으로 간질을 앓게 되어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1854년 옴스크에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몽고 근처 세미 팔라틴스크의 

보병대대에 배치되고 36세에 하급관리 미망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마리아는 알코올 중독자인 하급관리의 아내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이긴 하지만 

서른 나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남편 있는 마리아를 사랑하는 데 이 여자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관심조차 없다가 미망인이 되고 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하급장교가 되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등 뻔뻔스런 여인이었다. 
하물며 결혼 전날 밤에도 마리아는 다른 남자와 함께 지냈다고도 한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자와 일주일에 두 번 씩이나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그들의 생활은 힘든 삶으로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185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폐렴을 앓던 마리아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허가를 받게 되고 1864년 아내 마리아가 죽고 경제적 후원자인

동생마저 죽자 재정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41~42세 때 당시 동료 남학생에 바람맞은 여대생

폴리나를 만나 함께 여행다니면서 별의 별 애정 행각을 다 벌이면서 여전히 도박에 빠진다.

 

특히 도박 롤렛을 좋아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년 간 채권자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44세까지 여행과 도박에 미쳐 빈털터리가 되고 폴리나는 그에 질려서 청혼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폴리나를 만나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1866년 악덕 출판업자와 불리한 계약을 하게 된다. 
계약 내용은 어리석게도 한 달 안에 새 장편소설을 완성해서

원고를 넘겨주지 않으면 모든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기로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도스토예스키 기념관은 넵스키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그의 탄생일에는 각종 축제가 열리고 또한 작품의 무대를 순례하는 
애독자 관광객들의 행렬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표작 <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이나 

S골목(Stolyarnyi Lane) 하숙집, K다리 (Kokushikin Bridge)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가와 동시대를 교감해 울림을 맛보는 것이다.

간질과 빈곤 두 가지 재앙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 대작가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금전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민 끝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라는 속기사를 고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구술하고 안나는 그것을 속기로 받아 적는다. 
작업은 놀랍게도 26일 만에 끝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소설<도박꾼 The Gambler>이다.

1866년 <죄와 벌>,  1869년 <백치> 1872년 <악령> 등을 완성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73년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지막 소설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을 발표하고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바로 이 기념관에서 60세의 나이로 폐동맥 재출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작가와 속기사의 관계로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서로 사랑을 느끼고 결혼까지 이른다. 
속기사에서 대문호의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중에 회고록을 남기게 되는데, 책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중년부터 말년까지 14년 동안의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남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다음의 삽화는 특히 정겹다. 

안나가 임신을 하자 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라도 산파를 부르러

갈 수 있도록 미리 길을 익히기 위해 매일 산파의 집까지 산책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신심깊은 사제의 집에 찾아가 통곡하며 그녀없인 살수 없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대작가의 진솔하고 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입장권 매표소

안나와의 결혼 피로연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증세가 나타나 
‘사람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악마의 포효소리’를 안나의 가족들이 듣고 도망치지만 
안나 역시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안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더우기 안나의 신혼 집은 절대 빈곤할 뿐만 아니라 전처의 자식, 친구의 아들, 
조카 등이 들끓었고 남편의 지독한 도박광으로 안나의 결혼반지까지 저당 잡혀가며 
도박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안나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늘이 맺여준 인연인가 보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 풍토는 남녀 교제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혼도 쉬웠지만 어떤 고난과 시련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스물 다섯이나 많은 도박꾼에 간질병자인 남편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차남은 54세 때 늦게 보았지만 아버지의 간질 유전으로 세살 때 죽고 만다.

 

짐 보관소

세상에 남편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숭고한 여인도 많지만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그녀도 결혼 반년 만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곁에서 오랫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보좌해 지켜줌으로 
작가의 천재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게 되고 위대한 작품이 탄생된 것이다.
화를 내다가도 상대의 심정을 미리 이해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의 희생이며 그를 위대한 작가로 탄생시킨 길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런 안나의 희생을 알고 있었던지
“나의 모든 미래는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행복이며 축복이오”
“나는 늘 꿈속에서 당신과 키스하고 있소. 당신의 몸에서 내 입술을 떼지 않고...”
이렇게 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인증샷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을 한 날에는 죄책감에 아내에게 꾸짖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맹세하고도 끊지 못했던 도박, 어김없이 다음날에 도박장에서 
망연자실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곤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했던 그 가혹한 세월에 안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밤이 새도록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그의 순결한 영혼만을 사랑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지는 않았을까?
남편이 사망한 후 38년 정도를 더 살았던 안나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대한 추억으로 그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인증샷

 

도스트예프스키 외모는 어땠을까?
“그는 보잘것없는 외모에다 사소 무뚝뚝하며 수염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여위어 있고 오른쪽 빰에는 사마귀가 나 있었다. 
의심과 불신으로 때때로 불타오르는 눈은 슬픈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두 눈에 깊은 생각과 번민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괴기스런 극도로 부자연스런 흉측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에 더 놀랐을 여인들이지만 그녀는 그 곁에 남아 있었다..

과거의 불행을 한방에 날릴 도스트예프스키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은 헌신적인 안나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가 없이도 존재했지만 

개인으로서 그는 안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 위대성은 고난과 고뇌와 불우한 환경에서 더 현실적인 위대함이 탄생될 수 있다.
예술의 가장 위대한 원천은 사랑이다. 
한없이 부어주는 사랑과 그 단절 속에 갈증이 샘물같은 예술의 원천이 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의 문학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영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첬고 
많은 인물들에게 천재 또는 위대한 작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1878년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가 열린 솔랴노이 고로독이 그 장소였다. 
당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동행이었던 비평가 니콜라이 스트라호프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소개시키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부탁 때문에 그를 자신의 친구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스트라호프를 원망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사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은 톨스토이 역시 그 강의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그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후배 작가 톨스토이에게 강한 열등감이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감탄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 무결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는 톨스토이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태생도 백작 가문 출신이라 느긋하게 
퇴고를 할 수 있으니, 속기사까지 불러가며 작품을 재빨리 완성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에서는 톨스토이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톨스토이도 나이가 들면서 사상적인 변화가 있었고 
급기야 자기가 썼던 대작들조차 셀프 디스하던 회심(回心) 시기에 접어든다. 
이때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모든 문학서를 불살라 버려도 상관없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모두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악령>을 읽고 감탄했다고도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을 때 
그의 침대 곁에 놓여 있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말년에는 서로에 대해 존경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된 것 같다. 
서로의 작품에서 각자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후반부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 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후반부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19세기 센나야광장은 죄와 벌의 무대
이 그림은 <죄와 벌> 거의 백년 후의 작품인데, 분위기가 내용과 잘 어울린다.

차가운 족쇄가 도스트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야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고 4년을 보낸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인물이 겪고 느끼는 일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는 반드시 살아 남아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계단은 죄와 벌 주인공의 하숙집.

훗날 작가는 <죄와 벌>이 이 감옥에서 지은 이야기라고 전하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 회고했다. 

 

감옥 생활을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그 동기에 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기념관 3층
3층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겸 집필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
그리고 탈진한 작가는 이곳 소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재 겸 집필실 - 그가 죽은 1월 28일 8시 38분에 시계는 멈춰 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트에서 28년을 살면서
주소를 스무 번이나 바꾸었다.
그는 이 도시를 많이 산책하고 여행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도시에서 느낀 것을 자신의 작품에 아낌없이 반영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첫 대작은 <죄와 벌>인데 여기 사람들은 이 소설을
페테르부르크의 소설가가 쓴 페테르부르크의 소설이라고 부른다.

 

거실
소박한 거실 테이블 위에는 작가가 생전에 소장했던 담배곽이 놓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용하던 담배곽

 

다이닝룸

 

가족 사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안나가 썼던 책상, 커텐 뒤에서 찰랑이는 빛을 받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는 작가와 속기사로 처음 만났다. 
안나는 당시 속기 교육을 받아 처음 일을 시작하는 단계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빚 때문에 빠듯한 마감 안에 원고를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탈고를 그들은 멋지게 해냈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가난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건강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로서 그 문제들을 극복해나가며 
14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안나의 회고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했던 행복과 고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한 작품을 읽을 때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이 쓰일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을 함께 놓고 보면 더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안나의 회고록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엿보게 해준다. 
가족과 빈민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재산을 내주고, 
욱하는 성격에 질투가 강하면서 마음은 무척 여린, 
도박을 좋아하면서 작가로서 성실함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들. 

아내인 안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서술한 그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해서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노름을 위해 기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안나는 오히려 찢어질듯한 가난과 빚 독촉으로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를 존경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평가할 때 그가 놓인 경제적, 
정신적 고난을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회고록에도 담겨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문단과 사회에서는 자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다른 재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너저분하게 쌓인 잡동사니 더미인 반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잘 다듬어져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난하곤 했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살았던 여건과 작업 환경을 남편의 환경과 비교하거나 
그런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은 거의 대부분 건강하고 유복한 사람들로서 
자기 작품을 충분히 구상하고 다듬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가지 힘든 질병에 시달렸고, 대가족과 빚을 짊어지고 있었으며, 
내일에 대한, 절박한 빵에 대한 괴로운 생각에 짓눌린 사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 작품을 다듬는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2, 3장은 이미 잡지에 실렸고, 4장은 인쇄에 들어갔고, 
5장은 우편으로 <러시아 통보>에 보냈는데, 나머지는 아직 쓰지도 못한 채 구상만 하고 있는

그런 피말리는 경우가 그의 생애 마지막 14년 동안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자기 소설을 읽다가 
한순간 잘못 쓴 부분이 확연히 눈에 들어와 자신의 애초 구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에 빠진 적이 너무 많았다.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하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수정할 수만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글이 잘 안 풀렸는지, 
내 소설이 왜 성공하지 못할 지 이제야 보이는군. 
어쩌면 이 실수로 내 ‘사상’을 완전히 죽인 셈인지 몰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안나는 결혼 후에도 속기로 그의 집필을 도우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그의 손님을 환대하고 
채무업자들을 상대하는 등 남편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빚에 허덕이는 가계 관리를 도맡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수입을 늘리기 위해 출판사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러시아 최초의 도전적인 직업 여성으로 안나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들은 쓰여지기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가정을 지켜내는 아내이면서 작가의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자신의 작가 활동에 미치는 안나의 영향력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안나의 회고록을 읽어본다면 그녀는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켜주고 배려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의해 서술된 도스토예프스키를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책상에 놓여있는 노트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그녀가 관리했던 서적의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 책상에 앉아 왼편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입구가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중에 굳게 닫힌 문을 종종 바라보았을게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채우고서. 


신혼초 안나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나에게 매달려 울면서 몽땅 잃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비참한 몰골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그를 껴안고 ‘울지 말아요’하고 달랬지만 그는 
‘나 같은 놈은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하고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조의 여왕,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 <백치>, <도박꾼>,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은 
안나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60세에 폐기종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안나는 아내로서, 
독순술(讀脣術)까지 동원한 속기사 비서로서, 출판 동업자로서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를 찬미하는데 헌신했다.

 

딸 류보프의 방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내 안나의 둘째 딸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Lyubov Fyodorovna Dostoevskaya 1869~1926).
이들의 첫 번째 딸 소냐는 1868년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했다.

류보프는 결혼하지 않았다. 
나중에 류보프는 어머니와 멀어지고 1913년 치료를 위해 해외로 여행한 후  
1926년 이탈리아에서 악성 빈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린 시절

 

이 방은 세면실이라고 되어 있던 듯

 

기념관 2층
기념관 2층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작품 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전시된 전시물들은 LED 조명 처리로 아주 보기 편하게 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드 마스크(Death mask)가 인상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육필 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죄와 벌>의 육필 원고
작가 생전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작품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곳곳을 잘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것은 기념 문학관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둠 속에서 인증샷을 해 본다.

 

도박광 도스토예프스키를 상징하는 도박용품까지 전시되어 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 사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러시아의 저명시인 네크라소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 여성들의 힘은 추위와 굶주림, 무엇보다 무능한 남자들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기구한 숙명에서 온 것이다.”라고.

그녀에게서 과거 한국 여인의 ‘종부상(從夫像)’을 떠올린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숨을 거둘 때 판명난다고 한다. 
작가의 기념관은 고증은 잘 되어 있었지만 세계적 대작가 기념관 치고는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쪼들리며 살았고, 미완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죽어 간 곳이기 때문에 의미는 각별했다. 
그때 그대로 작은 대문에 반지하 형태의 집에 문구류 역시 그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안나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영상] Dostoyevsky Museum in Saint Peters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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