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에서 본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 윗정원과 핀란드 만 조감도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정원은 도심에서 30km 떨어진 페테르고프에 위치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 버스 또는 수중익선을 타면 궁전에 도달할 수 있다. 
분수, 소규모 폭포, 정원으로 유명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아랫공원 상공에서 본 조감도

1705년, 표트르 대제의 지시로 여름 휴양을 위한 궁전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1710년부터 정원(공원)을 가꿨고, 1714~25년에는 건축가 요한 브라운슈타인 등이 
윗정원과 같은 높이에 바로크 건축 양식을 띤 네덜란드풍의 2층 건물로 황제의 여름 관저를 건립했다. 

이때부터 페테르고프 궁전은 대궁전과 공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여름궁전이 되었다. 
그러나 1745~55년에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대궁전을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러시아의 베르사유",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 라고 불리는 페테르고프는 
황제의 가족들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이 여름을 보내던 곳이다.

궁전 주변에 위치한 소규모 폭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에 

의해 건립된 마를리궁을 본떠서 건립되었다. 
소규모 폭포 안에는 삼손 조각상과 64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궁전 하단부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정원 양식을 본뜬 정원이 들어서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의 일부를 형성한다.

페테르고프 궁전과 정원 경내에는 다양한 궁전 및 분수가 있고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러시아의 베르사유'로 알려진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사치품이 존재하고 있다. 
경내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과거 러시아 군주의 생활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바로크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궁전의 웅장한 노란색과 
흰색 파사드는 내부 장식에 의해 실제로 가려진 느낌이 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독일 군대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지만 나중에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대학살 이후 완벽하게 재현된 대궁전 경내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벽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거대한 그림들이 붙어 있고 금박이 벗겨진 침실은 찾아볼 수 없다. 
왕족들은 활기가 넘치는 공식 알현실과 거실에 앉아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가구와 벽화에 에워싸여 편안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페테르고프의 분수대는 그 자체가 관광명소다. 
5월에 오픈 행사가 시작되고 음악 공연과 불꽃놀이 등 하루 종일 축제가 열린다.
녹음이 우거진 윗정원의 격자 울타리를 따라 거닐어 보거나 
아랫정원에 흩어져 있는 완벽한 하얀색 조각상들을 둘러볼만 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여름궁전이라고도 불리는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대궁전을 사이에 두고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정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Peterhof, State Museum-Reserve
⑪ Fountain-cracker Dubok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윗정원은 넵툰분수, 멍청이분수,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마를리박물관,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이 있다.

 

페테르고프 궁전 앞문(Paradnyye Vorota, Front Gate)

지금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쓰이는 겨울궁전에 대비해 

러시아 제국 황제가 여름에 지내던 궁전으로, 
궁전에서 바로 핀란드 만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분수의 궁전',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분수가 가득한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윗정원(Upper Garden)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국립 에르미타지 박물관 말고 
또 하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궁전들이 근교도시에 자리들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름궁전이다. 
이 대궁전은 길이 300m, 3층으로 지어진 작은 궁전이지만 
이곳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경계라할 수 있는 윗정원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 현관 부분은 육지쪽 윗정원 방향으로 되어 있고, 

후문 현관은 뱃길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아랫공원 핀란드만 방향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도 쾌속선이 다니고 있는 이 뱃길은 에르미타지 박물관 정문 네바강에서 출발하여 
핀란드만을 지나 아랫공원 선착장에 다다른다. 
이 길은 경호의 안전성 때문에 황제들과 손님들이 육로보다 자주 이용했었다.

 

메제움니 (Mezheumny) 분수


물고기 형태의 황금 신화 생물이 있는 메제움니 분수(Mezheumny Fountain) 
윗공원의 연못에서 가운데 금잉어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금잉어가 물을 뿜어대고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매일 11시 정각부터 물을 뿜는 분수들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른 수압을 이용하여 
무동력으로 물이 뿜어지게 만들었으며 분수와 어울어지는 조각상의 균형감 있는 배치들로 해서 
이 정원은 18세기 초 유럽 정원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각상들은 대부분 로마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윗정원의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e) 동상이 오른손에 삼지창을 들고 서 있다.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으로 유피테르와 플루톤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투르누스와 옵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과 거의 비슷한 신이지만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넵투누스(Neptunus)의 개념은 많은 부분 에트루리아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조각상

넵튠 동상 아래에는 좀 더 작은 크기로 말을 탄 기사, 창을 든 전사, 
물고기를 탄 아기들 모습의 동상이 넵튠을 호위하고 있다.
이들 말과 물고기의 입에서는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넵툰 (Neptune) 조각상

로마 신화에 나오는 넵투누스(Neptunus)는 바다의 신으로 바다와 강, 호수, 
조그만 샘에 이르기까지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친 머리칼과 턱수염을 한 건장한 모습에 언제나 세 개의 
뾰족한 끝이 달린 창을 세워 든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단체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숲 터널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오크(Oak-tree) 분수

오크 (Oak-tree 떡갈나무) 분수는 1734년 조각가 P. Sual이 만들었으며 
1746년에 납 참나무가 제거되었고, 1802년에는 아랫공원으로 옮겨졌지만 
"Oak"이라는 이름이 이전 분수에 남아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분수대의 역사는 끝없는 재건과 개조로 오늘날 구체화되었으며 
1929에 마침내 구성적으로 완성되었다.

 

오크(Oak-tree) 분수

오크 분수는 우아함과 조화로 관광객들에게 계속 주목받고 있다. 
분수의 건축 파노라마는 화강암 바닥이 어둡고 밝은 색조의 석판으로 늘어선 둥근 수영장이며, 
중앙에는 불가사리 모양의 응회암 슬라이드가 있다. 

"Oak" 분수의 수영장 한가운데 응회암 언덕에 조각가 D. Rossi가 1809년에 만든 
연극 마스크를 쓰고 있는 큐피드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오크(Oak-tree) 분수에서 인증샷

 

단체 인증샷

 

인증샷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의 측면 날개 맞은 편에는 

대칭으로 위치한 두 개의 광장 연못이 있다. 
이 연못들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의해 지어졌으며 

아랫정원의 분수 시스템을 위한 저수지로 사용되었다. 
처음에 연못은 기술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 연못에 별도의 분수가 세워졌다.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서쪽 연못은 "다이아나의 나무 아래 목욕"이라는 구성으로 장식되었다. 
사냥의 여신은 다섯 마리의 어린 님프, 개, 돌고래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동부 연못의 중앙에는 젊은 신 아폴로(Apollo)의 형상이 있다. 
분수대는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두 조각은 6 개의 동일한 청동 돌고래로 둘러싸여 있다. 
금박을 입힌 바다 동물의 입에서 강력한 아크 제트물이 분출한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전면

정원에 들어서면 잘 조경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를 빠져나가면 세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훤히 드러난다. 
북쪽으로는 연한 갈색의 벽에 푸른빛이 약간 감도는 흰색지붕, 
그 위로 황금색의 탑이 찬란한 로코코 양식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 전면에서 인증샷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 여름궁전

 

궁전의 내부는 라스트렐리의 바로크 양식과, 유리 펠텐 등이 예카테리나 대제를 위해 
새로이 장식한 방들의 보다 차분한 신고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작은 오두막에서 이주해 와 이곳에서 여름을 지냈다고 한다. 
1층은 표트르 대제의 방이고 2층에는 예카테리나 1세의 방이 있었는데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은 표토르 대제가 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름 궁전(Peterhof Summer Palace)''이라고 불린다. 
표트르 대제가 베르사유 궁전을 염두해 두고 조성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이유' 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궁전은 길이 300m의 2층 건물로 1714년에 건조되고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8년까지 완전히 복구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1714년 착공된 이래 9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50년이나 지난 후에야 공사가 끝이 났다.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여름궁전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핀란드만에서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이 조성되었으며, 
러시아 황제의 여름 별장 중에서는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다.  
총면적 1000ha의 부지에는 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 공원,  
가로수 길, 대궁전을 포함하여 20개의 궁전건물이 서 있다.

 

러시아 황제 문장인 쌍두 독수리상이 있는 표트르 궁전 꼭대기의 장식

쌍두 독수리 문장은 27m 높이에 설치했는데 특수 장치로 인해 풍향계처럼 돌아간다. 
이 독수리는 머리가 세 개로 되어지만 보는 각도에서는 머리 두 개만 보이도록 되어 있다.

 

대궁전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탑을 가진 여름궁전 동쪽 입구의 성당 (Church Of Grand Peterhof)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정원으로 향한다.

 

[영상]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윗정원(Upper garden)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출입구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은 중요한 행사와 축하 행사, 리셉션, 
무도회 및 가장 무도회를 주최하는 러시아 차르의 주요 의식 거주지였다. 
이 기념비적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약 30 개의 방이 있다.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 사진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인 
첫 번째 방을 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 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연회실을 지나면서 건물 2층은 아랫공원 부분과 윗정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아랫공원 쪽은 거울방, 모델방, 황금의방, 침실, 황제와 황족들의 전용 하얀식당, 중국의 방 등 
주로 여황제들이 사용하였다는 방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우측으로 돌면서 윗정원 부분은 표트르 대제의 침실, 표트르 대제의 집무실 등으로 나뉘어진다. 
윗정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한 영국식으로, 
아랫공원은 대분수(삼손분수), 장난분수, 요술분수 등 많은 분수와 
바다까지의 작은 수로 등 프랑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하지만 이곳은 대조국전쟁(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으로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이에 독일군들의 보복으로 대궁전 등이 불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 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실내 관람을 위해서 신발 겉에 신어야 하는 덧버선 바구니

 

실내 관람을 위해서는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황금으로 치장한 대궁전의 화려한 그랜드 계단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대부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Winter Palace, Hermitage Museum) 건축가인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에 의해 디자인되어서 스타일은 비슷하다.

대궁전 입구는 건물의 서쪽 부분에 배치되었고

1751년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황금으로

치장하여 만든 화려한 그랜드 계단이 나온다. 

현재 페테르고프 대궁전은 러시아 통치자의 그림과 도자기, 

직물, 독특한 가구 및 개인 소지품을 포함하여 약 350 점의 

전시물을 포함하는 독특한 역사 및 예술 박물관이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18 세기에 댄스홀은 머천트 홀로 알려졌고 270평방 미터로 넓은 면적은 
대궁전 서쪽 절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창문이 2단으로 배열되어 있고 수많은 거울과 그림이 장식으로 사용된다. 
전설에 따르면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제는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금을 방 디자인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인증샷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체스마(Chesma) 홀은 관리들이 리셉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왕좌의 방 앞에 위치한 대기실이다. 
독일 출신 화가 제이콥 필립 해커트(Jacob Philipp Hackert 1737~1807)가 그린 

12점의 작품이 홀의 주요 장식으로 사용된다. 
이 작품들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체스마(Chesma) 전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였다.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재미있는 사실은 체스마(Chesma) 전투의 그림을 보다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카테리나 여제 (Catherine II)는 이탈리아 리보르노 항구에서 호위함을 폭파하여 
해전을 본 적이 없는 예술가가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북쪽과 서쪽 벽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세 개의 빈 벽을 따라 두 줄로 배열된 12 개의 유화를 비춘다. 
해커트(Hackaert)가 그린 이 대형 캔버스는 1769년에서 1773년 사이에 
지중해, 에게해 및 아드리아 해에서 러시아 함대가 수행한 전투에 대한 일종의 그림 기록이다. 
자세한 내용이 담긴 전투 차트, 사건을 목격한 옛 선원의 회상, 
해커트(Hackaert)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괴테(Goethe)는 이러한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왕좌의 방은 군주가 공식 행사를 '위엄 있게' 주재하고, 의회를 개최하고, 
청중에게 경의를 표하고, 높은 영예와 직책을 수여하고, 기타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장소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러시아의 차르가 사용하는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단과 왕좌는 
백말을 탄 캐서린 2 세의 큰 그림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에는 또한 수많은 유화와 11개의 샹들리에가 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는 1730 ~ 1740년 

러시아 제국의 여제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했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Romanov, 1709~1762)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옐리자베타는 모스크바 근처의 콜로멘스코예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 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옐리자베타는 자신이 정식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즉위식 다음 해에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 후계자는 요절한 한 살 위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테르 울리히(Karl Peter Ulrich) 공을 
러시아로 불려서 황위 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울리히는 표트르 대제의 공식 혈통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열 살 때 아버지까지 잃어 공작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가 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면서 
러시아 황태자의 공식 명칭으로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Grand Duk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자 옐리자베타는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러시아 총리대신 베추체프의 영향력이 
약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관여했다.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 소피아 아우구스테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소피아의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Johanna Elisabeth)는 옐리자베타가 
젊은 시절에 약혼했다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홀슈타인-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테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피아는 당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옐리자베타 여제가  표트르 3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고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던 중
1729년생으로 표트르보다 한 살 아래인 소피아가 약혼자로 결정되었다.

훗날 캐서린 여제가 되는 소피아는 1744년 1월에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함께 러시아로 들어와 옐리자베타의 왕궁에서 생활했다. 
소피아는 열성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서 배웠으며, 
옐리자베타와 표트르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때문에 차리나와 귀족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소피아가 남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러시아로 오면서 러시아의 황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745년에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 예카테리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장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 폐기하여 
연대기 작가들의 애를 태웠던 차리나 옐리자베타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보존했을 뿐 아니라,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정리한 <회상록>까지 남겨 
후대의 작가들을 위해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회상록>에 의하면,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곳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표트르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따른 위대한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도 
좀처럼 어릴 적에 받았던 프로이센식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표트르 3세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통치해야 하는 러시아를 후진국이라며 경멸했다. 
특히 그는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러시아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정의한 
프로이센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존경해서 손가락에 
프리드리히가 조각된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은 표트르는 정신적인 성장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유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으며, 
십 대인데도 음주벽이 있었다. 
특히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를 앓고 나서 얼굴에 심한 마마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표트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되었다. 
그의 성기에 결함이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를 할 때 

심각한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녀는 <회상록>에서 이때의 심경을 간단하게 적고 있다.

'만약 그에게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거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 첫날 남편에게 잔인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네가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거야. 
조심해, 예카테리나. 이 남자와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 라고.'

결혼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대신 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당대의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거의 모두 독파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볼테르의 저술에 감동해서 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이들의 교류는 볼테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표트르와 성 관계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스물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남자 경험을 했다. 
명문가 출신의 미남 청년인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였다. 
살티코프는 대략 열두 명 정도로 집계되는 예카테리나의 진지한 애인 중에서 첫 번째 남자였다.

예카테리나는 스물다섯 살인 1754년에 첫 아이 파벨 페트로비치(Pavel Petrovich)를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일 파벨이 표트르의 아들이 아니라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예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파벨이 태어나기 2년 전쯤에 잠시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표트르가 성기 수술을 통해서 성 기능을 회복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녀는 결혼 초기의 

결심을 철회하고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두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우리의 의견은 항상 너무나 달라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무 그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몸을 맡겼다.'

파벨이 태어나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표트르가 애인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Yelizaveta Vorontsova)였다. 
보론초프 가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1세기에 성립된 노브고로드 대공을 계승한 집안이다. 
당시 보론초프 가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던 두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인 옐리자베타와 동생인 예카테리나였다.

옐리자베타 보론초바가 표트르와 공공연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동생인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황태자비인 예카테리나와 긴밀한 친구 관계였다.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명문가 출신인 
미하일 다쉬코프 대공(Prince Mikhail Dashkov)과 결혼해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대공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내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사람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을 낳자마자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파벨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키웠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을 한 달 후에 세례식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여섯 달 후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이유는 예카테리나에게 차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표트르 3세를 거울삼아 
파벨을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손답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생애에서 대단히 소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리 오를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는 노브고로드 시의 행정관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들로 나이는 예카테리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애국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문했으며,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가 부상이 회복된 후에는 동생 
알렉세이(Alexey Grigoryevich Orlov)와 함께 근위대에 배속되어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 가면서 
표트르는 점차 주변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동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그리 영리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예카테리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했다. 
예카테리나 역시 표트르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가급적이면 공개석상은 피했다. 
또한 표트르는 공식적으로는 부적절한 관계임이 분명한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도 보란 듯이 동행하곤 했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 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되었다.

브릴리언트 말을 타고 황후 캐서린 II, 1762. by Virgilius Eriksen. Grand Peterhof Palace.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비길리우스 에릭센(Vigilius Eriksen, 1722~ 1782)은 
1757년부터 1772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예카테리나 2세 황제를 포함한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을 소재로 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덴마크로 귀환한 이후에는 왕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을 포함한 덴마크의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예카테리나의 남편의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고, 황후가 된 직후부터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과 접견하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군부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또한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도 
자주 만나 자리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고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카잔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남편을 폐위하고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표트르 3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당했다.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3세의 살해를 명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사건은 그녀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일반 대중들은 
예카테리나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1762년 9월 차르의 고도(古都)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예카테리나 2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여제의 34년 통치시대가 개막되었다.

개인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배자였다.
러시아에 대해 진정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러시아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녀는 질서와 정의에 바탕을 둔 
통치체제의 확립과 교육의 확대를 꿈꾸어왔었다.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필적하는 궁정을 꾸미고 프랑스를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어 왔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아서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계획에만 쏟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옐리자베타 여제 사망 당시 
이미 텅 비어버린 국고를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762년 성직자의 재산을 정부재산으로 이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나라 전체 토지와 봉토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미미한 정도로 남아 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국록을 받는 공직집단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한편 자신의 쿠데타와 표트르 3세의 의문스런 죽음은 그녀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과 안정을 찾는 것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통적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오랜 적대 국가인 프로이센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764년 자신의 오랜 정부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으로 앉힘으로써 분명한 국경선이 없이 이웃한 3개 열강들의 
야심의 대상이 되어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했다.

반면 그녀의 개혁 노력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가 옹호하던 개혁이 무정부적 · 후진적인 성격의

러시아 현실에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유럽에서도 실행에 옮겨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767년 자신의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하고 헌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과 각 계층(농노를 제외하고)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 개월간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위원회에 내려진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헌법의 초안이 되고 곧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프랑스에서 공포되기에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에서는 사문화되었다.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자 예카테리나는 1768년 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무엇보다도 국가의 영광을 앞세우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와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신하들의 애국심과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1770년 체슈메 전투의 승리가 예카테리나에게 군사적 영예를 

안겨다주기는 했으나 투르크족들은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으며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는 예기치 않았던 곤경에 직면했다. 
먼저 전쟁에 따른 어려움과 함께 무서운 전염병이 모스크바에 창궐했다. 
전염병은 대중들 사이에 민심이탈과 함께 대중동요의 기운을 조성했다. 
1773년 돈 카자크족의 장교 출신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죽은 표트르 3세로 자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 
우랄 산맥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은 남동부 각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774년 6월 푸가초프의 카자크 군대는 모스크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투르크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반란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참수되었으나 
그가 야기한 공포와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이 연민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이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속박을 더욱 단단히 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권좌에 오르기 전 예카테리나는 농노해방을 계획했었다. 
산업의 95%가 농업인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농노는 소유주들의 
재산이었으며 귀족들의 재력은 토지가 아니라 농노의 숫자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자 농노해방이 
농노 소유주들로부터 너그러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소유주들은 곧 예카테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었으므로, 생산수단인 
농노를 빼앗기게 될 경우 나라 전체를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불가피한 악습과 타협한 예카테리나는 
과거 한때 자신이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비난했던 농노제를 
이제 새로이 조직하고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었으며 
이른바 왕실 소유영토를 자신의 총신과 각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 왔던 해당 농민들의 운명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권 말기에 러시아에서는 자유농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농노들의 형편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어쨌든 러시아 국민의 95%는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이룩된 
업적들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 농노의 강제노동은 경제와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원대한 계획에 소요되는 증가일로의 막대한 지출에 자금을 조달해 주었을 따름이다.
그결과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자신이 훌륭한 행정가였음을 입증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도 

술에 관한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바로 예카테리나 2세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였다. 
리가는 소련에서 독립한 발틱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현재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2세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건강이 나빠진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때 주위의 권유에 따라 리가에서 나는 약주를 마셨는 데 
마신 지 얼마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일로 여제를 살린 술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프랑스의 드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마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이 술은 과연 어떤 술일까?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인데 
'블랙 리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세기 중반에 리가의 한 약사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보드카에 25 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45도의 독한 술인데 자세한 성분은 아직까지 비밀이다. 
이 술은 여제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감기 치료 효과와 
건위(健胃, 위를 튼튼하게 함) 작용이 있는데 이름처럼 짙은 검은빛이다.

명실공히 라트비아의 국민주인 리가 블랙 발삼은 국제적인 주류 
품평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기 때문에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두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그러한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예카테리나 여제의 평가와 비판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모순은 그녀의 치세에서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왕이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삐 풀린 특권을 누렸다. 
대신에 이러한 부담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지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들이 
러시아의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하자 농민들은 본래의 땅을 잃었으며,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스스로 귀족들의 농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노들의 삶은 피말릴 정도로 처절하였으며, 특히 성격 파탄의 귀족들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농노들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학대도 감수해야 했으며, 
귀족들의 교활함은 농노들에게 일부러 싼 봉급을 시간제로 줌으로써 
그들이 일주일 내내 노역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도박장에서 돈 대신에 거래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농노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궁전 초상화 홀

이 방의 벽은 유명한 러시아인과 표트르 대제의 친구 및 친척의 그림으로 덮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 곳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조심스럽게 잘 복구되어 보존되고 있다.
대궁전의 내부는 왕좌실, 서재, 중국식 로비, 흰색 식당, 초상화 홀의

다섯 부분으로구성되었으며, 내부 장식이 대단히 아름답다.

 

대궁전 초상화 홀
대궁전 전체 초상화의 갯수가 370개가 넘는다고 한다.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대형 거울이 많이 걸려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흰색 식당은 축제식 사용으로 원래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설계했다. 
그 후 1774 ~ 1775년에 독일계 건축가 유리 펠텐(Yuri Felten 1730~1801)은 
예카테리나 여제(캐서린 대제)의 주문으로 홀을 크게 바꾸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정원의 주철 난간 건축으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유리 펠텐의
새로운 스타일은 이전 라스트렐리 스타일과 완전히 반대였다. 
금빛의 광택 대신 내부는 엄격한 고전적인 대포로 장식되었다. 
방 중앙에는 유명한 영국의 거장이자 도자기 산업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만든 흰색 식탁보와 
30인용 도자기 세트로 덮인 거대한 테이블이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중국식 왕족 거실

 

대궁전 탈의실

 

대궁전 '하프가 있는 방'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 (왕족들의 휴게실)

 

대궁전 표트르 대제의 오크 연구

 

대궁전의 푸른색 드로잉 룸

 

대궁전 브레이크 프론트(Breakfront) 찬장 및 세라믹 스토브

이 세라믹 스토브는 제국 러시아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페테르고프(Peterhof) 대궁전뿐만 아니라 캐서린 궁전(Catherine Palace), 
심지어 우글리치(Uglich) 궁전과 같은 많은 웅장한 궁전에서 볼 수 있다.

 

[영상]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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