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안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다.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트레치니(Domenico Trezzini)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여러 차례 불타고 1850년에 철골로 된 첨탑이 서게 되었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피터와 폴 대성당(Peter and Paul Cathedral)은 30 x 60 미터의 
긴 직사각형 형태로 유럽 ​​건축의 전통에 따라 지어졌다.
표트르 대제의 희망에 따라, 모스크바 크렘린 안의 이반 대제의 종루보다 더 높이 지었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에서 알렉산드르 3세까지의 역대 황제가 매장되어 있다.

금으로 도금된 종탑은 높이가 122.5m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D. 트레지니에 의해서 서구교회의 건축양식과 
고대 러시아 교회 건축 양식을 결합해 1712~1733에 만들어 졌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현장에 세워진 
최초의 목조 교회 공사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1704년 4월 1일에 봉헌되었다. 
이 건물은 완전히 건축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실제로 20년 여가 지난 1733년 6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종탑의 기저 역할을 하는 서쪽 정면은 정문 양쪽에 6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부분

대성당의 직사각형 바닥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벽은 창틀에 천사의 머리가 달린 평평한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시계와 천사상

종탑의 시계는 네덜란드에서 1720년에 배송되어 45,000 루블에 구매되었다.
시계는 교회와 군주제 찬송가를 불렀고 18세기부터 현재까지 2번, 
혁명 기간과 위대한 애국 전쟁 기간에 멈췄다.
혁명 시대에 볼셰비키는 혐오스러운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시계에 총을 쐈고 그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 

 

종탑 안의 편종(Carillon) 

표트르 대제의 요청에 따라 첨탑이 있는 종탑이 처음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 사람들의 침략을 관찰하기 위해 전망대가 필요했다. 
종탑은 네바 땅이 러시아로 귀속된 것을 상징했다. 
표트르 대제는 건설 중인 도시가 자랑스러웠고, 수도의 파노라마를 감상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외국인 손님과 종탑으로 올라가 전망을 보여주곤 했다.

 

편종(Carillon) 

기둥으로 장식된 다층 100미터 종탑은 대성당의 주요 부분이다. 
위쪽을 향한 세 번째 층은 금박을 입힌 8 피치 지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거대한 흰색 돌 프레임에 4개의 둥근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편종(Carillon) 

지붕 위에는 좁은 수직 개구부가 있는 우아한 팔각형 드럼이 있다. 
그 위에는 40m의 첨탑이 설치된 얇은 황금 포탑이 있는 높은 황금 왕관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종탑에는 103개의 종이 있으며, 원래의 종은 31개이다.

 

피터와 폴 대성당 외부

동쪽 정면에는 러시아 예술가 티토프(P. Titov)의 프레스코 화가 있다.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

 

피터와 폴 대성당의 첨탑에 있는 천사 풍향계

다층 성당 종탑 꼭대기 첨탑에는 네덜란드인 독일인 폰 볼리스 (von Bolis)가 만든 
6.5 미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으는 천사의 모습이 구리 도금 시트로 장식되어 있다. 
날개 길이는 3.8 미터, 높이는 3.3m, 구조물의 무게는 250kg이다. 
건물 위쪽에 천사는 운명의 변덕으로부터 새로운 러시아 수도의 수호자이다.

 

첨탑에 있는 천사 풍향계

표트르 대제는 날아 다니는 천사를 보지 못했으며 종탑이 미완성된 1725년 1월에 운명했다. 
1833년 6월 29일, 새로운 황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는 

대성당 봉헌식에서 대관식을 열고 축하를 받았다.

 

피터와 폴 대성당의 첨탑에서 바라본 네바 강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웅장한 기둥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 내부 공간은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지만 참배자를 위한 사원이 아니다. 
기둥은 대리석, 벽옥, 로도나이트(rhodonite)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석회암 석판으로 포장되어 있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비교적 정교한 프레스코화, 화려한 샹들리에, 
인조대리석 기둥 등이 조화로운 화려함을 보인다. 
초록색과 분홍색의  코린트 양식의 대리석 기둥은 
실제 대리석이 아니라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내부 장식은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아주 훌륭하다. 
러시아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을 보아도 훌륭하다.

 

돔 아래 로얄 문(Royal Door) 메인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코노스타시스'는 원래 그리스어로 ‘이콘(icon)을 거는 장소’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동방교회의 성당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만든 신랑부(nave)와 
성직자를 위하여 만든 내진 (內陣) 사이에 ‘이콘’을 걸어 
칸막이를 한 장벽이란 의미로 '성장(聖障)'이라고도 한다.

비잔틴과 러시아 정교 교회에서 성당 전체 건물과 성당 내 가장 신성한 장소를 
분리시키는 경계막으로 보통은 규율에 따라 성화상을 장식한다.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실내장식만 약 20년이 소요된 만큼 황제의 성당에 걸맞게 내부 공간이 넓고 햇볕이 잘 든다. 
지주, 벽기둥, 대리석 벽, 다양한 색채의 아치, 금박의 석고상, 그리고 다양한 빛깔의 샹들리에 등 
모든 것이 훌륭한데, 특히 이코노스타스(성막)는 떡갈나무를 조각하여 금박을 붙여 장엄함 그 자체다.

 

황제의 궁륭 (Tsar's Canopy)

황제를 비롯한 황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성당에서는 선채로 예배를 드려야했다.
다만 일반 신자들과 다른 점은 지정된 자리(사진)에서 예배를 보았다.

 

피터와 폴 대성당 천장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피터와 폴 대성당 내부 무덤

피터와 폴 대성당을 제국의 무덤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은 표트르 대제의 뜻이었다. 
나무로 된 피터와 폴 교회의 첫 번째 무덤은 캐서린 황제의 두 살된 딸이 죽었을 때 설치되었다.

 

표트르 대제 묘

1725년 1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 대제의 시신은 네바 강의 얼음 위에서 
종소리와 대포가 울리면서 미완성 된 피터와 폴 교회로 옮겨졌다. 

 

표트르 대제와 아내 아내 캐서린 1세의 묘

표트르 대제의 무덤에는 왕의 흉상, 꽃 및 세인트 앤드류의 해군 깃발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아내 캐서린 1 세와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가 묻혀 있다. 

 

알렉산드르 2세와 Dagmar de Danemark 공주 묘

 

보석이 박혀 있는 황제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와 부인의 묘

성당의 한쪽에는 우랄(Ural)산맥 부근에 묻혀 있다가 1998년 이곳으로 옮겨진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묘(Maria와 Alexei 제외)가 안치되어 있다. 
이들의 시신은 DNA 분석을 통해 확인되었다.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1918] 는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였다. 
적극적인 극동 진출로 러일전쟁을 초래하여 국내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2월혁명(1917)으로 제정이 붕괴되었다.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 황제 부인인 카트리나 예배실

 

카트리나 2세 묘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1894년 사망)까지, 역대 황제가 잠들어 있다. 
또한 1998년 7월 17일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발굴되어 이곳에 다시 매장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묘지도 있다.

 

로마노프 왕조의 계보 

 

스테인드글래스의 성 베드로와 바울

 

스테인드글래스의 성 유다와 성 바르바나 

 

부활하는 예수 스테인드글래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그랜드 듀칼 무덤은 피터와 폴 대성당 옆에 있는 작은 돔형 구조의 건물이다.
황제가 되지 못한 왕족들의 묘로 사용하기 위해서 1896년 러시아 건축가 
다비드 그림(David Ivanovich Grimm)의 설계로 지어졌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영묘는 최대 60개의 무덤을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13개에 불과했다. 
소련은 건물을 도시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하기 위해 무덤을 파괴했다. 
무덤은 나중에 복원되었다. 

 

대공 무덤(Grand Ducal Tomb) 내부

내부는 대리석, 모자이크 및 오르몰루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1908년에 처음으로 영묘에 안치되었다. 
다른 8명의 왕족의 시신은 대성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영상]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피터와 폴 대성당 (Saints Peter and Paul Cathedral) 조감도
피터와 폴 대성당 앞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1716~1824)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조감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금속주화를 만들었던 곳이다.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며 현재도 특별한 기념주화나 메달, 배지 등을 만들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폐국 (Saint Petersburg Mint)

 

1899년 조폐국에서 만든 5루불 주화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상트페테르부르그 조폐국 건물 뒤 네바강 벽 쪽으로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이 있다.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정문

 

네바 강에서 본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 성벽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내부

 

표트르 대제와 그의 아들 비운의 알렉세이 (그림)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표트르 대제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 존재였다. 
그는 키 2m에 가까운 거구에,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지녔다. 
그가 노여워 고함을 칠 때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개혁왕 표트르 대제는 그 목소리로 러시아를 중세의 긴 잠에서 깨웠다.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겼다. 
평생을 '전사 군주(Royal Warrior)'로 자처하며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 
러시아를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급격한 개혁은 잘 이해받지 못했고 반대에 부딪혔으며,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니콜라이 게(Ge·1831~1894)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페트로고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문책하는 표트르 대제'(1871)에서 
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표트르 대제는 노여운 표정으로 아들을 쏘아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서는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말한다. 
창백하고 무기력하게 서 있는 황태자는 러시아 정교회의 지지를 받는 보수적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겪는 갈등 속에서 스스로 왕위를 포기했던 황태자는 
반란죄로 체포돼 투옥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가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부자(父子)의 유명한 대립은 후에 러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는 서유럽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의 정신적 핵심이며 
서유럽과는 다른 국가라고 생각한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사상적 대립은 
결코 소모적인 것만이 아니어서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힘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가 배출한 세계적 문호들도 
이 대립적 사유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했다. 
최근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대항하여 유라시아 연합을 주장하고, 
유라시아 연합 내부에서는 카이사르 같은 패권을 주장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이런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세 고문 도구 전시관 (Torture instruments of the Middle Ages)

 

[영상]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Prison of Trubetskoy Bastio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