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 Oldest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박물관의 고대 회화 컬렉션은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여기에는 약 5천 개 이상의 아이콘이 있다. 
미하일로프스키 궁전(Mikhailovsky Palace)의 러시아 박물관 처음 4개 홀에 있는 상설 전시는 
고대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예술 센터인 노브고로드(Novgorod), 프스코프(Pskov), 
블라디미르(Vladimir)에서 제작된 12~17세기의 가장 귀중한 작품들이 일부 선보이고 있다. 

 

Archangel Gabriel with Golden Hair, Novgorod school of painting. 12 century, 
Wood, gesso, tempera. 49 x 38.8 x 2.8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에서 가장 오래된 이 아이콘은 

몽골 이전 시대의 가장 눈에 띄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노브고로드(Novgorod) 회화 학교에서 작업한 것으로 본다. 
아이콘은 대천사 가브리엘 (Archangel Gabriel)을 묘사한다. 

이미지의 특성과 글의 특성은 비잔틴 예술의 전통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머리카락의 황금실은 고대 예술에서 위대함과 불멸의 상징이다. 
이 아이콘은 분명히 제단 장벽을 위한 것이었고 기도(Deesis) 의식의 일부였다. 

 

Saint Nicholas the Wonderworker, with selected saints in the background and in the fields, 
First half of the 13th century. Wood, three lime planks, traces of lost end dowels, 
two later counter dowels, no pavolok tempera. 67.5 x 52.8 x 2.4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배경과 들판에서 선택된 성도들과 함께 기적을 행하는 성 니콜라스

(Wonderworker Saint Nicholas)는 전통적이며 동양 기독교 예술에서 

가장 널리 퍼진 것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한 도상학 유형은 10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개발되었다.

우리에게 내려온 러시아 아이콘 그림에서 성자의 가장 초기 묘사는 
12~13세기 (Tretyakov Gallery)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브고로드(Novgorod)의 예술에서 아이콘은 게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3세기 이전에 안정된 캐릭터를 획득했다.

주위에는 그리스도의 몸 주위와 마찬가지로 메달리온과 아이콘의 가장자리에 묘사된 
지상 및 하늘 교회의 성도들과 의인이 모인다. 
이미지의 상징주의는 성도들의 초상화와 함께 메달리온을 배치하여 강조된다. 
천사의 형상과 함께 그들은 그의 머리 위에 아치형 캐노피를 형성한다. 

 

Raising Lazarus, Late 14~early 15 century. Wood, gesso, tempera. 
53.5 x 44 x 4.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그리스도에 의해 부활한 유명한 복음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는 죽은 나사로가 나흘 동안 묻혀 있는 무덤으로 다가간다. 
나사로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리스도는 뻗은 손을 뻗고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고 외치자 
수의에 싸여 죽은 사람이 관에서 일어난다. 


나사로의 부활의 도상학은 6-7 세기에 비잔티움에서 형성되었다. 
고대 시대의 아이콘 그림은 풍부한 캐릭터 즉 수많은 유대인 그룹, 
나사로의 관을 해체하고 수의를 풀고 있는 여러 청소년, 
건축 요소가 있는 풍경 커튼 개발과 같은 구성적 특징이 독특하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 Oldest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The Mother of God of Tenderness of the White Lake, 12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56,0 х 107,0 х 2,0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화이트 레이크의 부드러움의 성모(The Mother of God of Tenderness of the White Lake)'는 
13세기 초의 아이콘이자 극히 희귀한 고대 예술 작품이다. 
그리스도 아이가 어머니에 안겨 얼굴로 뺨을 부드럽게 비비는 
엘레우사(Eleusa) 아이콘은 12세기 이전에 비잔티움에서 확립되었다. 
아이콘 여백의 표현은 훨씬 오래된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은 예수의 미래에 닥칠 고통을 예견하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소통의 순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한다. 
중앙 장식의 상단 모서리에 둥근 메달에 있는 대천사, 
가장자리에 있는 19개의 메달에 있는 선지자와 

거룩한 여성의 이미지는 뛰어난 자발성과 밝기로 구별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콘에서 중보와 후원을 찾았다.

 

St Boris and St Gleb, Second part of the 14th century. 
gesso on wood. 142,5 x 94,3 x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성 보리스(St Boris)와 성 글렙(St Gleb)의 아이콘은 14세기 중반 
러시아 박물관 컬렉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다. 
보리스의 진한 파란색 망토와 빨간색과 금색의 장식 디자인이 빛을 발하면서 
아이콘에 엄숙하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보리스와 글렙은 러시아에서 기독교의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왕자의 두 아들 형제다. 
불라디미르 왕자의 죽음으로 인테르네시네 전쟁이 발발했고 이 때 두 형제가 모두 사망했다. 
보리스와 글렙은 이후 러시아에서 신앙의 수호자로 존경받아 왔다.

보리스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고 글렙 (Gleb)은 어깨 위에 머리카락이 느슨하고 젊게 묘사되어 있다.
손에는 순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왕권의 속성인 칼이 그려져 있다. 
보리스와 글렙의 이미지 중 러시아 박물관에 속한 이 아이콘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Deesis, First half of the XIV century. Wood, pavoloka, gesso, tempera, metal. 
140 х 110 х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디시스(Deesis)는 기도, 청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Deesis 구성의 중심에는 중보,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있다. 
성모, 세례 요한, 대천사 및 성도들이 기도 포즈를 취한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1, Oldest Icons.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ohn the Baptist from the Deesis order, Constantinople. 1387~1395. 
Wood, gesso, tempera. 150.5 x 98 x 3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7 자리 벨트 모양의 디시스(Deesis) 작품의 일부로, 
6개의 아콘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State Tretyakov Gallery)에 보관되어 있다. 
성 요한은 주님의 선지자이자 세례자이다. 
러시아 국민은 세례 요한에 대해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와 성모의 아이콘과 함께 세례 요한의 아이콘은 

성상화의 디시스(Deesis) 핵심을 구성했다. 
이 아이콘은 엄격하고 슬픔에 잠긴 금욕적인 은둔자의 모습을 한 성인으로 묘사한다. 
색의 구성을 제한하여 이미지의 금욕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Apostles Peter and Paul,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Wood, gesso, tempera. 139 х 90 х 2,5 cm. Mikhailovsky Palace, Hall 1,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 아이콘은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가장 초기에 남아 있는 이미지이다. 
일반적으로 갈색 또는 녹색 스트립의 형태로 아이콘의 아래쪽 부분에 지구를 지정한다. 
상징적으로 이 아이콘은 11세기의 유명한 비잔틴 기념물인 
노브고로드의 소피아 대성당에 있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아이콘과 가깝다. 


성도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정면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은 키가 같고 몸짓과 옷이 거의 서로를 반복하여 영적 친밀감을 강조한다. 
그들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아이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영상]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궁전 Hall 1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

 

넵스키 대로의 왼쪽 편에 위치한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광장의 중앙에는 

1825년, 알렉산더 1세 황제의 동생인 미하일을 위해 건립된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이 있다. 


한 팔을 벌려 환영을 표하는 푸쉬킨 동상이 서 있는 이 '예술 광장'에는
민속학 박물관, 뮤지컬 코미디 극장, 쇼스타코지치 필하모니, 

무소르그스키 오페라 발레 극장 등이 모여 있다.

이 문화의 중심지에서 단연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는 것은 
푸쉬킨 동상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러시아 미술관이다. 
노란색의 우아한 건물은 미술관의 중심이 되는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과 베누아 윙(Benois Wing) 전시관이다.
이 궁전은 1898년 이후 러시아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푸쉬킨 동상과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

러시아 미술관은 1898년 3월 7일 아버지 알렉산더 3세 (Alexander III)를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Nicholas II)가 개관했다.
러시아 미술을 위한 최초 관 주도의 러시아 미술품 전시관이었다.
미술관의 기본이 되었던 것은 니콜라이 2세의 선왕인 알렉산드르 3세의 컬렉션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아이콘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미술관과 에르미타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루미안체프 미술관 등은과감하게 미술품을 교환해서 소장품을 체계화했으며, 

1934년 고고학적 유물들을 분리시켜서 
지금과 같이 순수 미술품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미술관은 모두 40만여 점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하일로프스키 궁전과 베누아 윙(Benois Wing) 전시관

현재 국립 러시아 박물관은 종합적인 미술 박물관으로,
총 6개의 건물과 2개의 정원을 사유하고 있다. 
본관인 미하일로프스키 궁전과 베누아 윙(Benois Wing) 전시관을 비롯하여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대리석 궁전),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성, 여름 정원에 있는 표트르 1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름 정원(Summer Garden)과 미하일로프스키(Mikhailovsky) 정원을 포함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버금가는 방대한 전시량을 자랑하는 
이곳의 주 전시 작품으로는 고대 러시아의 미술품들과 18~19세기의 회화 및 
소비에트 시대의 미술로 그 소장 수가 30만여 점에 이른다. 
특히 이곳에는 러시아의 위대한 아이콘(성상) 화가인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작품들을 포함, 
6000여 점이 넘는 성상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 되고 최고의 귀족 거주지 중 하나인  
스트로가노프 궁전(Stroganov Palace)은 넵스키 대로와 
모이카(Moika) 강이 만나는 교차점 모퉁이에 있다. 
지금은 러시아 국립 박물관 컬렉션의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은 15세기부터 저명한 상인이었지만,  
대북 전에서 차르의 군대에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한 덕분에
페트로 대왕 통치 때에 귀족 계급으로 올라갔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이 가문은 엘리자베스 황후 통치 당시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남작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에 의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궁전의 가장 인상적인 인테리어는 1790년대와 1800년대에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백작이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인테리어 장식을 
개조하기 위해 고용한 카잔 대성당의 건축가 안드레이 보로니킨이 만든 것이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1918년에 국유화되었으며 

원래 귀족 생활박물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929년에 문을 닫았고 전시 유물들은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에 넘겨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그 이후로 궁전은 식물연구소와 선박건조 연구 시설을 포함한
다양한 소련 기업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840년대에 인테리어가 재장식되었고 1995년에 복원되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스트로가노프 궁전 내부

이 건물은 1988년 정부에 의해 러시아 박물관으로 넘어 갔고  
그 이후로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집중적인 복원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2003년 외부 복원이 완료되었고 내부 작업 결과가 점차 공개되고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는 신고전주의 대리석 궁전으로 
여름 정원과 수보로프 광장 사이에 있다.
이 궁전은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1729~1796)가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리 올로브(Grigory Grigoryevich Orlov 1734~1783) 백작을 위한 선물로 지어졌다.

그리고리 올로브는 캐서린의 남편인 러시아의 표트르 3세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이끌었고 캐서린이 황후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사실상 캐서린과 공동 통치자 였지만, 
캐서린과의 반복되는 불신과 다른 고문들과의 적대감으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내부

 

[영상] 마블 팰리스(Marble Palace)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과 정원

1990년대 초부터 미하일롭스키 성과 정원은 러시아 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초상화 갤러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황후의 공식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
엔지니어링 성(Engineering castle)이라는 애칭이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남쪽)

18~19 세기에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표트르 1세(Paul I)의 주요 거주지로 지어져야 했다. 
폰탄카(Fontanka) 강과 모이카(Moika) 강이 합류하는 곳에 성을 건설하기로 한 것은
이곳이 표트르 대제 가족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모이카 강 유역을 따라 차르의 여름 정원이 뻗어 있고, 
여기에는 표트르 1세의  여름 궁전과 캐서린 1세의 황금 저택이 있었다.

1745년 이 지역에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황후의 제 3의 여름 궁전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미래의 황제인 파벨 페트로비치가 1754년에 태어났다.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은 뛰어난 러시아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Vasily Ivanovich Bazhenov)에 의해 12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표트르 대제가 직접 자신이 거주할 궁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전 건설은 표트르 대제가 왕좌에 오른 후에야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이곳을 미하일롭스키 궁전(Mikhailovsky Palace)이라고 명명했다.

 

미하일롭스키 궁전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광장 중앙에는 1799년 3월 3일 표트르 1세의 법령에 따라 조각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osco Bartolomeo Rastrelli)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형상에 표트르 1세의 승마 기념비가 세워졌다.

라스트렐리의 표현에 의하면 황제는 새로운 수도를 둘러보고 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놀랍도록 강력하다. 
그는 발에 로마 샌들을 신고 무릎 아래에 사자 반 마스크를 착용한 군용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는 구호의 외투가 달린 로브가 드리워져 있다. 
왼손에는 강한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에는 사령관 막대가 있다.
조각품의 높이는 4.6m, 받침대 높이는 6.2m이다.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안뜰에 있는 표트르 1세(Peter I) 기념비

1797년 2월 26일에 새 저택의 기초가 세워졌다. 
표트르 대제는 4년 동안 건설 작업의 진행 상황을 직접 모니터링했다. 
새로운 거주지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의 이름은 
표트르 대제의 애착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 성의 건축물이 그를 매료시켰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의 남쪽 주요 정면은 광장을 향하고 있다. 
궁전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모이카 강에 의해 씻겨진 섬의 북쪽 해안은 화강암으로 옷을 입었고 
대포가 설치된 두 개의 세미바스티언이 있었다. 
대포는 폰탄카 강변에도 설치되었다. 
운하는 서쪽과 남쪽에 만들어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궁전의 계획은 둥근 모서리가 있는 정사각형이며 
그 중앙에는 팔면체 폐쇄 안뜰이 있다. 
주요 정면 측면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3중 돌다리가 있는 부활의 문이 표시되어 있다. 
황실 가족과 외국 대사만이 다리의 중앙 경간을 통과 할 수 있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오른쪽으로 폰탄카 강이 흐르고 뒷쪽에 여름 정원과 화성 필드(Mars Field), 
왼쪽으로 미하일로프스키 정원(Mikhaylovskiy Garden)이 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표트르 대제의 법령에 의해 "성(Castle)"이라는 단어는 
도시와 교외의 다른 거주지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겨울 궁전(Winter Palace)은 겨울 성(Winter Castle)이 되었다.
하늘 군대의 지도자인 대천사 미가엘-미하일(Mikhail)의 이미지도 표트르 대제가 애용했고
표트르 대제는 미하일을 하늘의 후원자로 받아 들였다. 
대천사 미가엘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이 정해졌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그러나 거주지의 이름 만이 중세 성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Mikhailovsky Castle"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붉은 벽돌로 된 건물 하나만을 의미한다. 
표트르 대제 당시 이 문구는 웅장한 궁전과 
여름 공원 앙상블이었던 황실 거주지를 의미했다. 
그것은 네바 강에서 넵스키 대로 방향으로 폰탄카 강을 따라 
광대한 영토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 여름 정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성 내부

 

[영상] 미하일롭스키 성(Mikhailovsky castle) 둘러보기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과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네바(Neva) 강변에 있는 여름 정원(Summer Garden)은 기하학적 원리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어 희귀한 꽃과 식물들을 식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유럽에서 들여온 새로운 대리석으로 분수와 조각을 만든 원조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의 문장(紋章) 분수 (Heraldic fountain)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여름 정원 숲 터널

 

국립 러시아 박물관 -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여름 정원

 

[영상] 여름 정원 둘러보기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지어진 최초의 궁전이자 수도관이 있는 도시 최초의 건물이었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국립 러시아 박물관 -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내부 

 

[영상]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Summer Palace of Peter the Great) 

 

국립 러시아 박물관 -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Mikhailovsky Palace)은 넵스키 대로 옆, 그리스도 부활성당 바로 옆에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은 넵스키 프로스펙트 역이고 근처에 카잔 대성당도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중심가는 도보로 커버 가능한 범위기 때문에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이 주로 서유럽 및 그 외 전 세계의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다면 
여기는 주로 러시아 본국의 명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에르미타시보다 여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정면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조그마한 문에 있다.

 

입장 후 인증샷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은 성 이삭 대성당 앞 네바 강 왼쪽 제방에 위치해 있다.
1782년부터 1925년까지는 피터 광장(Peter's Square)으로
1925년부터는 데카브리스트 광장 (Decembrists 'Square)으로 불렸다가
2008년부터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상원'은 캐서린 대제의 통치 기간 동안 "상원 광장"으로 옮겨진
러시아 제국의 상원을 의미한다.

상원 광장은 동쪽의 해군성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상원 건물과 현재 러시아 헌법재판소 본부 건물이 있다. 
표트르 대제를 기리는 동상인 청동 기마상 기념비는 1782년부터 광장에 세워져 있으며
이곳의 공식 명칭은 '피터 광장'이다.

데카브리스트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상원 광장에서일으킨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 December)에서 기인했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인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파리를 점령한 것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4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1세는 비록 삽질을 거듭하긴 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황제를 따라 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의 모습이었다. 
청년 장교들은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아래의 농노들이 
언젠가 들고 일어나 결국 지배층들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다. 
따라서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선제적으로 해나가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로 삼게 된다.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Alexander N. Muravyov)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Salvation union)이라는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Southern Society),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Northern Society),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된다.

그러던 1825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하고 난 뒤,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아 일대 혼란이 발생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1779~1831)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상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 대상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 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상원 광장에서 봉기했다.
그러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준비와 조직이 충분치 않았고, 
사령관을 맡기로 했던 사람들은 도망쳤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보기 꺼려 유화적으로 나왔지만, 
결국 반란군 3천 명은 총격 끝에 포병까지 동원한 충성파 군대 9천 명에게 진압당했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살아남은 장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져 다시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콘스탄틴은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직을 계속 맡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00여년 뒤 결국 러시아 제정이 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당하게 되고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다 같이 망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맞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장교,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는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해서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불릴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들 중 한 명인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저택을 복원한 박물관이 있어 가 본 적이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보여준 순애보도 유명한데,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 

택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다만 남편들은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살거나 현지 여자들과 
바람난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 시대에 강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캐릭터들로 많이 띄워졌다.
2019년 개봉한 러시아 영화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영화] Union of Salvation 2019 (Decembrist revolt 1825)

한글 자막 제공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청동 기마상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를 기념하는 기마상이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서사시 <청동의 기수>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

<청동의 기수 / 푸쉬킨>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 (Bronze Horseman)>의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쉬킨은 그를 위하여 3장 476행으로 구성된 대 서사시를 썼다.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나는 사랑한다. 
너의 엄숙하고 정연한 모습을.

네바 강의 힘찬 흐름을.
강변의 화강암 둑을.
고운 문양 새겨진 철책을.

생각에 잠긴 밤들의 투명한 어둠을.
백야의 섬광을.

시에서 푸쉬킨은 네바 강의 심한 홍수 동안 가난한 사람 예브게니(Evgenii)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묘사한다. 
예브게니는 동상을 저주하고, 그처럼 부적합한 위치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간접적으로 사망시킨 표트르 대제에게 분노한다. 
기수는 살아나면서 도시를 통해 예브게니를 쫓는다. 
이 시는 강 가장자리에 떠 있는 폐허가 된 오두막에서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끝난다.

1903년에 예술가 알렉산더 베노이스(Alexandre Benois 1870~1960)는 
그의 삽화와 함께 시집을 출판하여 아르누보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것을 창조했다.
이 시는 다른 장르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라인홀드 글리에르(Reinhold Glière 1875~1956)는 이를 바탕으로 발레를 안무했고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미아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 1881~1950)의 
교향곡 10번 심포니(1926~7)는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오른쪽에 라틴어로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로마노프 혈통과 결혼한 독일 공주 출신 캐서린(Catherine) 2세는 
궁전 쿠데타를 통해 왕좌에 올라 법적 권리가 없었으며 자신을 
표트르 대제의 정당한 상속자로 대표하고 싶었다.
그녀는 청동기마상의 건축을 주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한 러시아 통치자 계보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청동기마상에 문구를 새겨 넣도록 했다.

전 유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도록 거대한 청동 말의 앞다리가 번쩍 들려 있지만 
실제 동상의 무게를 오랜 세월 지탱하는 것은 뒤쪽의 말 꼬리가 
다리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낸 조각술에 있다고 한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왼쪽에는 러시아어로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표트르 대제(Pyotr Alekseyevich, Peter the Great 1672~1725)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자이다. 
전제정을 세우고 행정· 산업· 상업· 기술· 문화 등 나라의 모든 부분을 개혁했다.
어린 나이로 공동 제위에 올라 통상적인 황제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군대 놀이와 항해 놀이를 하면서 군사술을 익혔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얼지 않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유럽의 발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절대주의 왕정을 확립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근대 정규군을 창설하고 서유럽의 역법을 도입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 
귀족의 지위를 관등표로 수정해 혈통이 아닌 업무에 따른 승급 체계를 갖추었다. 
제조업과 야금업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교역량은 7배 증가했다.

표트르 대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근대 러시아를 설계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표트르 대제는 우리에게 과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종종 어떠한 숭고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목표와 정반대되는 가혹하거나 비열한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숭고한 목표가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The Transportation of the Thunder-stone in the Presence of Catherine II; Engraving 
by I. F. Schley of the drawing by Yury Felten, 1770.  
캐서린 2세 시대 선더 스톤의 이동; 1770년 I. F. 쉴리가 조각하고 유리 펠튼이 그림

천둥 스톤(Thunder stone)
청동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되는 천둥 석(Thunder stone)은 거대한 원석 돌 위에 
천둥이 내리쳐서 조각을 냈다는 현지 전설에서 이름을 얻었다. 
청동 기마상을 제작한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 1716~1791)는 
원래 위치에서 석재를 조각하고 이동하기를 원했지만 캐서린 대제는 
바위를 절단하지 말고 원형 그대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습지 지형으로 땅이 견고하지 않아서 러시아인들은 거대한 돌을 
운반하는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마리노스 하버리스(Carburis 1729~1782)그는 볼로냐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본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학위를 받았다. 
1770년 그는 러시아의 캐서린 대제 공병단의 장교가 되었다.
하버리스는 노동자들에게 땅이 얼어 붙은 겨울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큰 돌을 얼어 붙은 땅 위로 바다로 끌고 가서 도시로 운송하도록 했다. 
그는 직경 13.5cm (6 인치) 정도의 청동 구체 위를 궤도 위로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개발했다. 
이 과정은 나중에 볼 베어링 발명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위업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이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장소의 돌을 상원광장으로 가져 오는 데 동물이나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다. 
하버리스가 그 방법을 고안 한 후, 400 명의 남자가 돌을 옮기는 데 9 개월이 걸렸다.

캐서린 대제는 그들의 작업을 독려하고 감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천둥석이 바다에 도착하자 천둥석 전용으로 거대한 바지선이 건설되었다. 
이 바지선은 두 대의 대형 전함이 양쪽을 지원해야 했다. 

절단되기 전의 돌의 크기는 7×14×9m였다. 
화강암의 밀도에 따라 무게는 약 1500톤으로 측정되었다 .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는 이 부분을 
잘라서 받침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받침대의 무게는 상당히 적어졌다.

19세기 전설에 따르면 청동 기마상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한가운데 서 있는 동안 
어떠한 적군도 이 도시를 정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 도시의 이름이었던 레닌 그라드가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900일 동안 포위당하는 동안 동상은 모래주머니와 나무 보호소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보호하여 900일 동안의 폭격과 포병을 사실상 온전하게 유지했다. 

 

Opening of the monument to Peter the Great. Engraving by AK Melnikov, drawing by A.P. Davydov, 1782
표트르 대왕 기념비 개관식. AP Davydov, 1782년 AK Melnikov가 조각하고 A.P. Davydov가 그림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가 디자인한 청동 기마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으며 도시의 설립자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거대한 대리석 위에 뒷다리로 서 있는 
청동 말의 등에 걸터 앉아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상징적인 표트르 대제의 동상과 동상이 올려져 있는 유명한 석조 받침대를 살펴보자.

기념물은 1760년대에 외국인 왕비, 예카테리나 2세가 옛 군주와 자신을 연결시키고 
러시아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의뢰한 것이다. 
청동 기마상이 서 있는 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시민들은 힘겨운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에도 이 동상을 보호했고 
여전히 반석 위에서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가까이 보면 말이 발굽으로 뱀을 짓밟고 있다. 
이 뱀은 반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각상의 세부 묘사, 특히 뒷다리로 서 있는 말 다리의 

불룩 솟은 근육을 눈여겨 보면 팔코네(Falconet)는 이 정도 수준의 사실성을 

구현하기 위해 말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조사했다.

 

1782년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모습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가 성 이삭 대성당을 배경으로 
거대한 동상에서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는 그 역사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파생되어 나온 '루스(Rus)'라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서부 러시아에서 남하한 바이킹 부족들의 후예로 
슬라브 계열의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9세기 후반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최초로 공국(公國)을 세웠다.

키예프의 뒤를 이어 교역 요충지나 넓고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에는 '공(公, Prince)'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공국이 세워졌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공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은 통치자는 '대공(大公, Grand Prince)'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키예프 대공의 패권은 13세기에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모스크바 대공에게 넘어갔다.

14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정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보다는 약화된 러시아를 노리고 자주 침공한 
게르만의 튜튼 기사단과 스웨덴으로 인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았던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난폭한 통치자들이었다.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Ivan Ⅳ)에게는 '광제(狂帝, the Terrible)' 
혹은 '뇌제(雷帝, the Awesom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반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전제주의적인 강력한 왕권을 세워 몽골 제국의 잔재인 
두 개의 작은 칸국을 정복했으며 태평양을 향한 동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적으로 난폭함을 드러내는 증상을 보이곤 했다.

이반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며느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때려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 처사에 대해 아들 젊은 이반이 항의하자 
그는 다시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이반은 치명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차르는 아들을 껴안고 통곡했지만 젊은 이반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반 뇌제도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것으로 9세기 중엽 
노브고르드(Novgord) 대공으로 시작된 류리크 왕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반 4세의 치세 이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승자가 바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될 로마노프 가문이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여러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십 개의 동등한 명문가 중 하나였을 뿐인 로마노프 가는 
왕권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 강국들인 독일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튀르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또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자들과 높은 세금과 함께 
갖가지 의무와 지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거센 도전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얻게 될 표트르 1세였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패기와 야심에 찬 젊은 표트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40년 간은 러시아에 또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진보된 행정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문호 개방 등 강력한 국제적 지위를 다져가게 되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공국 표트르 대제가 과감하게 전개한 개혁 정책의 결과였다.

17세기 초 러시아 개혁의 주역이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레믈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여러 외국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세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말에 편자를 능수능란하게 박는 일, 주거 공간을 힘들이지 않고 짓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관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 부대들과 병정놀이를 하거나 기계 기구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1695년 모스크바 정부는 흑해 진출로를 학보하기 위해 터키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군대가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터키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터키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터키는 당시 그들의 함대를 이용하여 바다를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다. 
그러므로 함대를 소유하지 않은 러시아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가 이처럼 함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 부문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 해군 병사들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를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터키와의 전쟁은 일단락지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이 죽었다. 
이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터키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 계획을 생각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대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 서유럽의 문화를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포병으로서 이 사절단에 합류해 행동을 같이했다.

1697년 봄, 기묘한 무리들이 서쪽을 향해 여행을 시작했다. 
마부, 고적수, 나팔수, 행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으며 

관복 차림의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들 중 유난스레 남루하고 초라한 옷을 걸친 표트르는 
행렬 속에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당시 25세의 나이로 7척이 넘는 장신이었던 그는 큰 키 외에도 턱 부분에 
독특한 혹과 유난스럽게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가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동 행렬은 스웨덴 지배에 있는 발트 해의 리가 항을 지나 프로이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표트르는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도 그의 탁월한 성격은 자주 노출되었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한번은 보오르하베의 외과교실에서 해부학 강의를 받던 중 그의 일행이 
시체 관찰을 기피하자 표트르는 느닷없이 이렇게 명령했다.

"저 시체의 힘줄을 입으로 물어뜯어라."
신분노출에 대한 염려보다는 신하들에게 서유럽의 선진 과학을 
많이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이처럼 가차 없이 명령했던 것이다. 
그는 과학적이고 지적이며, 나름대로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표트르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가 영국을 여행할 때 영국은 그를 위해 스피트헤드 앞 바다에서 

대규모의 모의 전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상당히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가 영국에 체류할 때 겉옷 하나만 걸치고 월리엄 3세를 방문했으며, 
그가 묵었던 곳은 전쟁 중의 야영장 같았고 고급 식기의 사용법이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표트르가 서유럽 여행을 하던 중 169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약 14개월 간의 여행을 중단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 유럽에서는 표트르 대제에 관한 갖가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여행 중 신분 노출을 꺼렸기 때문에 후에 그의 신분이 드러났음에도 
유럽 사람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비쳐졌다. 


여러 곳을 다니며 큰 술잔치를 벌이는 습관이나 호색적인 일면 때문에 
그는 우스갯거리로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관찰력을 가졌던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표트르 대제를 '지혜로운 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권력 투쟁으로 보낸 청년기
표트르 1세는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인물이었다.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사람으로, 그에 대한 평가도 가지각색이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후진성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영웅이자 동시에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시킨 폭군이기도 했다. 
그는 잔인한 숙청이라는 면을 기준으로 하면 이반 4세를 훨씬 능가하는 기록을 남겼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Pyotr Alexeyevich Romanov)는 열 살의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은 이복형 표도르 3세(Fyodor Ⅲ)를 계승해서 

차르가 되어 43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렇지만 그의 치세는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Alexei)는 두 부인으로부터 1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알렉세이가 죽고 나서부터 명문가 출신이었던 부인들의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결국 유혈 충돌을 불러왔다. 
표트르의 외가 친척 두 사람이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으며, 
만성질환으로 인해서 사실상 황제의 직위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던 표트르의 형 
이반 5세(Ivan Alexeyevich Romanov)가 표트르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고 
표트르의 외가인 나르시킨(Narshkin) 가는 권력에서 제외되었다. 
심신이 허약한 청년과 열 살 먹은 소년을 명목상의 차르로 세워 놓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표트르의 이복누나인 소피아(Sofia Alexeyevna)였다.

표트르는 어린 시절을 일반인들과 함께 보낸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알렉세이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표도르 3세가 차르를 계승했을 때 그는 세 살이었다. 
이때에 그는 어머니 나탈리야(Nataliya Narshkina)와 함께 왕궁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 부근에서 살았으며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백해 연안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궁으로 옮기지 않고 줄곧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표트르는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장난꾸러기였다. 
그는 부근의 상가와 수공업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반인들과 함께 인쇄, 석공, 목공 일을 배웠다. 
그는 특히 외국을 오가는 항해사들과 무역상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차르가 된 이후에도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장난감 무기로 아이들을 무장시켜서 군대를 조직하여 병정놀이를 하는 데 열중했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세 살 위의 아름다운 

에우도키아 로푸키나(Eudoxia Lopukh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표트르의 어머니 나탈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자인 

소피아를 상대로 거둔 정치적인 승리였다. 
소피아는 당시의 최정예 근위대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렐치(Streltsy)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크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나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소피아는 이미 한 번 쿠데타에 성공해서 병약한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차르로 세우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렐치도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수백 명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다 스트렐치 내부에서 표트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쿠데타 계획을 표트르에게 알렸다.

소피아는 쿠데타의 불발로 실각했다. 
그녀는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남은 평생을 베일을 쓰고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표트르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의 표트르 대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어머니인 나탈리야였다. 
표트르는 여전히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외국인 거주 지역을 들락거리면서 분주한 일과를 보냈다.

 

표트르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시기는 어머니 나탈리야가 사망한 1696년 1월이었다. 
이즈음에 표트르와 로푸키나의 결혼도 그리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장났다. 
그들은 결혼 이듬해 후계자인 알렉세이(Alexei Petrovich)를 낳았지만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표트르와 달리 로푸키나는 전형적인 대귀족의 취향을 고수했다. 
표트르는 로푸키나에게 그녀의 직위와 신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수녀원에 집어넣어 버렸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생활했던 표트르는 러시아 민중들의 고통과 
러시아 사회 자체의 후진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선진 유럽 국가를 모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바다를 이용한 교역의 확대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발트 해와 흑해로의 진출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그런데 이는 각각 스웨덴과 오스만튀르크가 모두 봉쇄하고 있었다.

표트르가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것은 1695년이다. 
차르가 아니라 오스만튀르크와 벌어진 전쟁에 포병 장교 신분으로 종군한 것이다.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돈 강 하구의 튀르크 요새 아조프를 포위하고 거센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지만 
요새는 끄덕하지 않고 버텨 냈으며 러시아 군은 상당한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오스만 튀르크 군이 선전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이 러시아 군보다 
특별히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튀르크의 해군이 흑해를 통해서 
풍부한 군수물자는 물론 보충 병력까지 수송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 군으로서는 이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표트르는 이 전투를 통해서 해군과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추진한 개혁에서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1696년에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이 사망하자 
그는 명실공히 유일한 절대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조프에서 철군한 다음 곧바로 함대를 만들기 시작해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이 함대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선박들로 이루어졌지만 
규모 면에서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아조프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튀르크의 수송선단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했다.

표트르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고 나서 유럽으로 파견할 사절단을 조직했다. 
지중해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오스만 튀르크의 서방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유럽 국가들의 대튀르크 동맹을 다시 한 번 결성하려고 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개월에 걸쳐 인접국 폴란드, 
튀르크와 대치 중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표트르 자신도 포병 하사관 표트르 미하일로프(Pyotr Mikhailov)로 
신분을 위장해 함께 장기간의 해외 순방에 나섰다. 
이 대사절단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는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는데 
표트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던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직접 선박 건조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분을 계속 위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가 2m(203m)가 넘는 거인 장신인데다 커다란 눈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Glaisher Street, Deptford의 표트르 대제 기념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표트르 대제는 1698년 몇 달 동안 영국 런던 남동부 지역 
뎁트포드(Deptford) 왕립 조선소에 머물면서 조선 공부를 하는 동안 꽤 잘 해냈다.  
뎁트포드는 템즈 강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표트르 대제의 체류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 사절단은 유럽 최고의 산업 현장을 돌면서 필요한 기술을 흡수하고 
뛰어난 외국인 기술고문들을 여러 명 고용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대튀르크 동맹을 결성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이 후계자가 없는 스페인의 왕좌를 놓고 
계승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와는 제대로 협상을 
해 보지도 못하고 표트르는 급히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본국에서 스트렐치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쿠테타는 그가 없는 사이에 손쉽게 분쇄되었으나 14개월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에 가담한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 두도록 했다. 
스트렐치는 러시아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수십 년 동안 
정치 문제에 간섭해 오면서 러시아 정치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다. 
표트르는 스트렐치를 해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표트르는 1699년 그동안 사용하던 러시아식 달력을 폐지하고 
율리우스력을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책 방향을 상징적으로 선언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그동안 러시아가 고수해 오던 폐쇄적인 
전통주의를 포기하고 유럽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흑해와 발트 해를 확보해야 하는데, 표트르는 먼저 
튀르크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흑해로의 진출을 뒤로 미루고 
스웨덴이 지배하고 있는 발트 해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스웨덴은 열여덟 살이던 카를 12세 (Karl Ⅻ)가 통치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자신도 스물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이 어린 카를 12세를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오스만튀르크와 그의 아조프 점거를 인정하는 선에서 평화 협정을 타결한 다음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시 '잉그리아(Ingria)'라고 불리던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 영토로 자신만만하게 진군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카를 12세는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스웨덴 군의 전투력은 유럽 최고였기 때문에 
이제 막 근대화가 시작된 허약한 러시아 군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1700년 최초로 대회전이 벌어진 나르바에서 러시아 군은 불과 1만 명 규모의 
스웨덴 군에게 격파당해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력이 전사했다. 
이 승리 이후 카를이 표트르를 계속 추격했다면 후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카를은 공격 방향을 돌려 폴란드를 침공했다. 
카를은 폴란드를 상대로 한 일련의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두며 
폴란드에 입성했으나 이후 그들 사이에 벌어진 내분에 말려들었다. 
그동안 표트르는 잃었던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전투는 여러 해 후에야 속개되었다. 
폴란드 문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4만 4,000명이라는 대군을 몰아 선공을 가했다. 
이번에 그는 곧바로 모스크바를 향했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 군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표트르는 상당한 손실을 입은 카를의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남하하던 스웨덴 군 병력을 도중에 요격해서 격파해 버렸다. 
그러자 카를은 퇴각하는 대신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그곳의 코사크 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으나 보급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문제였다. 
표트르는 스웨덴 군이 진군하는 방향의 앞쪽으로 넓은 지역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펼쳐 
스웨덴 군의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보급도 거의 끊어진 상황에서 1708년 겨울을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에서 보낸 스웨덴 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카를은 다음 해 여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남쪽에 있는 폴타바 요새를 포위했다. 
스웨덴 군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으며 동맹군인 코사크 기병대는 
러시아 군 기병대의 교란 작전에 말려 자신들의 근거지까지 내주고 멀찌감치 후퇴했다. 
표트르는 폴타바에 4만 5,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병력의 열세와 기병대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에도 
스웨덴 군은 꼬박 이틀 동안 눈부신 선전을 했다.

그렇지만 6월 28일 정오 무렵에 스웨덴 군은 결국 와해되고 카를은 
가까스로 1,500명의 병력만 수습해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 탈출했다. 
표트르가 막강한 스웨덴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그때까지 표트르에 대해서 우호적이던 유럽 각국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1710년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Ⅲ)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의 도약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가 꾸준히 그를 부추긴 결과였다.

1711년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발칸으로 남하했다. 
그는 강적 스웨덴을 격파한 기분에 들떠서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정교도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발칸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항복을 선택했다.

아흐메드 3세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아조프 요새를 돌려받고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흑해 함대를 인수받는다는 조건만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스웨덴의 카를 12세도 고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Petropavlovskaya Fortress,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은 
스웨덴과의 전쟁 도중에 시작되었다. 
이 도시가 들어선 네바 강의 하구는 원래 대단히 척박한 지역이었다. 
황량한 습지는 파도가 높은 날이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겨울이면 차가운 북풍을 정면으로 맞는 지역으로, 
스웨덴 군이 건설한 요새 니엔스칸스(Nyenskans)만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표트르는 이 척박한 습지에 미래 러시아의 수도를 건설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1703년 이 지역을 확보하자마자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이전의 표트르는 다혈질이기는 했어도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은 한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의 잔혹한 일면이 드러났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외의 지역에서는 석조 건물의 건축을 금지시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여기에 퍼부었다.

그가 투입한 자원에는 스웨덴 출신의 전쟁 포로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농노 수만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 도시를 건설하다 죽어 간 

수만 명의 목숨과 바꾼 거대한 위령비였다. 
그는 사람들을 무기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고된 노동을 시켰다. 
질병과 과로와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한겨울에 수백 명 단위로 죽어 나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선언되던 당시는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상태였으며 스웨덴과의 전쟁도 마무리되지 않아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시점이었지만 
표트르는 그다음 해에 수도 이전을 강행했다.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이미 러시아와 전력 차가 크게 벌어졌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줄기차게 전쟁을 지속하다 

1718년 겨울, 노르웨이 원정 중에 전사했다. 
이로써 비로소 두 나라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1721년 표트르는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벌이면서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는 새로운 수도가 들어선 지역에 대해서 장차 스웨덴과의 
소유권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근 지역 전체를 사들이는 형식을 취했으며, 
핀란드의 점령 지역은 스웨덴에 모두 돌려주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전략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핀란드와의 접경 지역은 
제국의 명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가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1721년 스웨덴과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표트르는 
'모든 러시아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동방의 황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 
그에게 붙는 '대제(the Great, le Grand)'라는 칭호에는 절차가 수반된다. 
어느 나라든 먼저 국내에서 국민들에게 선출된 대의기관의 의원들이 먼저 의결하고 나서 
다른 국가에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

표트르의 경우는 스웨덴과 폴란드가 즉시 이 칭호를 승인했고 점차 유럽 각국이 따랐으며 
마지막까지 승인을 보류하고 있던 프랑스는 그가 죽은 지 25년 후에 외교문서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 칭호를 사용하여 국제적인 공인 절차를 마쳤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근본부터 바꿔놓은 인물로 충분히 
'대제'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뿐 아니라 즉위 초기에 그의 권력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통치 기간 내내 분리주의자들이나 
그 자신의 강압 정치에 반발한 민중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여러 차례의 반란 중에서도 가장 큰 고비는 

민중봉기의 성격이 강한 '불라빈의 반란'이었다. 
대북방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707년에 발생한 이 거센 봉기는 
원인도 표트르였으며 목표도 표트르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표트르의 강압 정치는 강력한 개혁 정책과 맞물려서 고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던 농노들의 삶 자체를 위협했으며 지방은 물론이고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조차 도망치는 농노들이 속출했다. 
표트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정책을 고수했다. 

그가 도망친 농노들을 추격하기 위해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고용하자 농노들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던 코사크의 지도자 콘드라티 불라빈(Kondrati Bulavin)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불라빈이 농노를 추격해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기습해 
전멸시키면서 시작된 이 반란은 비참한 상황에 있던 러시아 농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급격히 번져 나갔으며, 여기에 표트르의 개혁에 불만을 가진 성직자와 분리주의자들이 
가세하면서 러시아 남부 지방 전역이 2년 이상 표트르의 통치를 벗어난 상태가 지속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실행되었던 개혁 자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표트르의 개혁은 제도, 행정 조직, 군대, 법률 같은 분야뿐 아니라 
권위주의와 부패의 온상이 되어 버린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개혁과 같은 
예민한 분야에서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방법론에서도 
오직 힘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개혁에는 전통적으로 러시아 남성들이 기르던 수염을 밀어버리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밝은 미래가 약속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트르의 개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반란이나 개혁에 대한 저항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러시아에서 
관습화되어 버린 권력형 부패에 대한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수많은 인사들이 부패 혐의로 처형되거나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표트르의 신임을 받는 
동지나 친구 들이 채웠지만 그들 역시 쫓겨난 사람들만큼이나 부패한 인물들이었다. 
표트르의 측근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개혁의 동지였던 알렉산드르 멘시코프였다. 
멘시코프는 야전에서도 이름을 날려 최종적으로 대원수(Generalissimo)까지 
오르는 인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점령 지역에 새로 만들어진 이조라 공작령 (Izhira, Dukedom of Ingria)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권력형 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했으며 영지에서 가혹한 착취로 원성을 샀다. 
1711년에 표트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사실 표트르로서는 이러한 경고 자체도 대단히 이례적으로 관대한 조치였다.

그러나 멘시코프 공작은 2년 후에 다시 10만 루블의 공금을 횡령해 
대형 부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에 멘시코프가 중병에 걸려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지 않았더라면 
표트르는 그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투옥했을 것이다. 
그가 극적으로 병에서 회복된 후 부정 행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이유는 
그가 이제 갓 마흔을 넘긴 표트르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트르는 실질적으로 차르가 되었던 스물네 살 이후로 혼자서 
거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철 같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표트르의 심신은 젊은 시절부터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는 술에 의존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알코올은 야금야금 그의 정신과 육체를 먹어 들어갔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나타나면서 표트르는 점차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잔인하고 괴팍한 사람이 되어 갔다. 
명석했던 판단력도 급속도로 빛을 잃었다. 
정신적인 결함은 육체적으로도 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면 신경통에 시달리는가 하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수시로 간질과 유사한 발작을 했다. 
위험한 상태로 간신히 버텨 오던 상황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황태자 알렉세이는 첫 번째 부인 

에우도키아가 낳은 왕자로, 표트르의 열다섯 자녀 가운데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셋 중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유일한 아들이었다. 
강제로 왕궁에서 쫓겨난 어머니와 얼굴도 보기 힘든 아버지 밑에서 
반동주의적인 성직자들에게 교육받은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러한 아들에게 표트르는 가혹하게 황태자 수업을 강요했다. 
알렉세이는 열세 살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해서 그다음 해에 실제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열여덟 살에는 모스크바 시의 성곽 공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 이후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수행하기 쉽지 않은 임무를 계속 맡겼으며 
어린 알렉세이는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면 표트르는 열정이 부족하다며 아들을 비난하고 알렉세이는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알렉세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과 어울리다 
아예 이마저 포기하고 국정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재되어 있던 부자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알렉세이의 결혼이었다. 
1710년 표트르는 스무 살의 알렉세이를 그보다 네 살 연하인 독일의 명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둘째 딸 샬로트(Chalotte Christine Sofie of Brunswick-Wolfenbuttel)와 결혼시켰다. 
샬로트의 언니 엘리자베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의 카를 6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혼에 크게 반발했으며 
결혼 생활은 당연히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샬로트가 1715년 둘째 아이인 후일의 표트르 2세(Pyotr Alexeyevich)를 낳고는 며칠 만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의 장례식 날 표트르는 아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알렉세이의 반응은 해외 도피였다.

그는 핀란드 출신 정부와 함께 동서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로 피신했으며 
카를 6세는 알렉세이의 말만 듣고 표트르가 아들을 암살하려 한다고 굳게 믿어 
그를 나폴리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부자의 오랜 갈등은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1718년 알렉세이의 측근이나 친구들은 모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반역자 처형 방식에 따라 긴 창으로 꿰어 매달아 놓는 페일 형(Pale)이나 
바퀴에 묶여 온 몸이 부서지는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알렉세이의 어머니 에우도키아는 근거 없는 간통죄로 기소되었으며 
알렉세이도 법정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알렉세이가 정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기필코 옛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요."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끝이 갈라진 채찍으로 등을 맞는 나우트 형(knout)에 처해져 
두 번에 걸쳐 마흔 대를 맞고 나서 이틀 만에 사망했다.

알렉세이의 처형은 망가진 표트르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에게도 회복이 불가능한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721년 힘겨웠던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고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서 표트르가 대제의 칭호를 받을 무렵 그는 이미 
세상사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 (Yekaterina I)

표트르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던 인물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Yekaterina I)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의 
유일한 방향타인 표트르를 움직일 수 있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보잘 것 없는 위치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표트르에게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표트르의 친구 멘시코프가 그에게 선물로 보낸 '성적 노리개' 정도의 존재였다.

예카테리나는 본명이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로, 
에스토니아 인(人)인데다 러시아 정교도가 아니라 루터파 신교도였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스웨덴 군인과 결혼한 그녀는 결혼 직후 
러시아 군이 스웨덴 점령지 잉그리아를 정복하면서 포로로 잡혔으며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선량한 품성과 진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 그리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을 짓고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또한 생활 여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다. 
마르타는 아이를 여러 명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표트르와 마르타는 이것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부부 생활을 한 데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멘시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귀환한 이후에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마르타는 예카테리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는 예카테리나가 비밀 결혼식 이후에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 안나(Anna Petrova)와 옐리자베타(Yeliza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 시기에 방광에 이상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며 
목숨을 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 후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핀란드 만 부근을 시찰하던 도중 물에 빠진 병사를 보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차가운 물에 뛰어든 것이 병세를 악화시킨 것이다. 
1725년 2월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후계자 문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딸 안나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표트르 대제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다.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든 러시아 역사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단 한 사람만 

러시아의 찬란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러시아 인들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업적을 깨달았다. 
표트르 사후,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짧은 통치 이후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반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의 작은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야 완만한 개혁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으나 그 개혁마저 완전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맞이했다.

표트르가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후계 절차가 매끄러웠더라면 
러시아는 훨씬 더 일찍 개명한 강대국으로 탈바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표트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인들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억압적이고 권위적인데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통치자를 섬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표트르는 오직 자신만이 보고 있던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방해가 된다면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처형하거나 생존조차 어려운 땅으로 유배를 보냈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아예 그 뿌리를 뽑아 버렸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표트르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
표트르는 그의 개혁의지를 밀고 나가는 데 정말로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국민의 무지와 

용감하게 싸운 기사 정신의 소유자로 보기는 어렵다. 
이반 뇌제와 비교할 때 잔인성에서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를 화나게 만들면 그의 손에 잡힌 모든 물건이 곧 무기였다. 
상대방의 코를 쇠꼬챙이로 쑤셔 찢어버리는가 하면 

고문이나 사형을 시킬 때도 사람을 몹시 괴롭혔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며 죽어간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잔인성은 혈육이나 친지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아내 에브드키아 로푸히나가 고풍스럽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1698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세이도 그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가해 옥에서 죽게 했다. 

그리곤 아들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자신이 설계한 
선박의 진수식에 참여하기 위해 냉정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당시 표트르는 리투아니아 농민 출신의 예카테리나라는 여자와의 사이에 
또 다른 자식을 낳고 수년 동안 함께 지냈다. 
1712년에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후 칭호까지 주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뒤에도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표트르는 죽을 때까지 안면신경통에 시달렸고 때로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병과 유사한 병을 앓고 있었으며 중년이 되었을 때는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도 했다. 
후에 그는 합병증이 생겨 1725년 2월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그의 업적과 가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 지식인들과 20세기 스탈린주의자들이 저마다 표트르 대제를 
자신들의 선구자라고 주장할 정도로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부 역사가들은 표트르 대제를 혁명가로 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역사가들은 점진적인 개혁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표트르가 러시아에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통치 형태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슬라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적 풍습과 문화를 경시한 배신자였고 
서구주의자 시각에서는 시대를 바꿔놓은 진정 위대한 영웅이었다. 
이처럼 표트르 대제를 놓고 붙여볼 수 있는 수식어, 정의어가 다양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진정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죽은 지 200년 이상이 된 지금도 그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전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의 업적 중 일부분에 대한 것만 일방적인 견해로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표트르 자신은 위대한 애국자였고 그가 행했던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러시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표트르는 러시아가 운명의 전환점에 있을 때 공을 세운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과거에 기독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한 키예프 대공 

블라지미르도 분명히 나라를 구했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이반 뇌제도 당시 국가를 

몰락의 구덩이에서 구한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표트르 대제가 유난스럽게 두드러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러시아가 

세계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표트르는 키가 2m나 될 정도로 매우 컸고 잘생겼으며 체력도 강했다. 
이전의 차르들과는 달리 비잔틴의 후광을 거부했으며 행동이 매우 소박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조선공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외국선원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던 그는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종 낡은 구두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으며 자주 군인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는 환락을 좋아했으며 조야한 농담을 즐기기는 했으나 즐겁게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으며 그의 손님들도 그렇게 마시도록 만들었다. 
정직하지 못함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던 그는 화를 낼 때는 무서웠으며, 
반대에 직면하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들만이 그를 달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2번째 부인 예카테리나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트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주 그녀에게 부탁했다. 
때때로 표트르는 고위 관리들을 매로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시코프 공도 많이 얻어맞았다.

정치가로서 표트르의 뛰어난 재능의 하나는 최고 귀족가문의 사람이건 

사회의 밑바닥 사람이건 고위직에 재능 있는 인물을 선택해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통치자로서 표트르는 전제적 영주의 방법, 즉 채찍과 자의적인 지배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국가의 강제력이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전제군주로 늘상 행동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국가의 머슴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랫 사람들의 위치에 자신을 둘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그는 그의 군경력을 가장 낮은 계급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그 기본부터 시작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또 실질적으로 수행한 봉사에 따른 승진만을 기대할 것을 요구했다.

표트르의 인격은 러시아의 전 역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하고 원기왕성했으며 용기있고 근면했으며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격차를 메우지는 못했지만 
국민경제· 교역· 교육· 과학· 문화· 대외 정책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러시아는 강국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러시아의 협력이 없이는 
어떠한 유럽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내정개혁은 이전의 어떠한 개혁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

 

[영상]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성 이삭 성당의 나무 모형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 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 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성 이삭 대성당 모형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사악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 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성당을 만들 때의 목재 틀

늪지대 위에 대규모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다. 
기초을 다지기 위해서 총 2만 4천 개의 말뚝을 밑에 박고 그 위에 성당을 올렸다.
40만 명이 동원되어 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몽페랑 흉상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은 이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 감독한 프랑스인으로 약관의 20대에 전 유럽인이 참가한 콩쿨에서 입상하여 
40년간 러시아에서 성 이삭 대성당 및 성당 주위의 마린스키 궁전 등 건물과 
겨울궁전 내 지금의 1호 전시실인 표트르 대제의 방, 궁전광장 등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고 러시아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그는 러시아에 묻히길 원했지만 당시는 이미 다른 황제인 알렉산드로 2세가 
그의 시신을 그의 조국 파리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성 이삭 성당 내부

내부 장식은 22명의 예술가에 의해 꾸며졌는데,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중앙 큐폴라에 그려진 카를 브리료프의 작품은 꼭 한 번 볼 만한 그림이다. 
모자이크도 63점이나 있고 그중 '예언자 에제키에리의 환상', 
'대홍수', '최후의 심판'이 볼 만하다.
성당을 장식하는 300점 이상의 부조와 동상, 무게가 10t인 3개의 문도 훌륭하다.

 

중앙홀의 정면

성 이삭 대성당의 내부 레이아웃은 18 세기 정교회 종교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내부 면적은 4,000 평방 미터가 넘는다.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사원 입구는 건물의 남쪽, 북쪽 및 서쪽에 3 개의 큰 문이 있다.

중앙홀 정면의 화려한 전경으로 녹색의 화강암 기둥과 가운데 
회중석으로 들어가는 왕의 문 (Royal Doors) 주변이 엄청 화려하다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성상화 칸막이) 중앙 황금의 문 안쪽 회중석에 
스테인드 글래스로 제작한 예수상이 돋보인다.

 

정교회에서 부활절에만 열리는 황금의 성문(Holy Doors)

궁정문(Royal doors) 사이로 1843년 뮌헨에서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스테인드 글래스가 보인다. 
특이한 점은 흔히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동방정교회의 색 대신 
카톨릭을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제단 스테인드 글래스

대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금박을 입힌 조각, 공작석과 청금석 기둥의 아름다움, 
모자이크 이미지 등 다양하고 화려한 예술품들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주요 제단의 왕실 문이 열리면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제단 
스테인드 글래스 이미지에 관심이 끌리게 된다.

이는 녹색 에메랄드와 옅은 보라색 자수정으로 장식된 금 자수가 있는 
자주색 망토를 입고 황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단 창문의 거의 전체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틀 안에서 곧 구주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것 같다. 

창 아래 부분은 보기에 간신히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관객을 향해 떠다니고 있어 그리스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의 손에는 흰 십자가가 있는 흔들리는 주홍색 깃발이 있다. 

부활하신 구주의 웅장한 차원은 이미지의 중요성과 지배적인 위치를 나타낸다.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 윗부분은 후광 광선의 역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색을 밝게 하여 더 밝은 조명으로 강조된다. 
유사한 장식 요소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지만 정교회에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면적이 28.5 평방미터인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의 모습.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스테인드 글라스 창 중 하나이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창이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에 있는 보석은 납의 도움으로 삽입된 볼록한 프리즘이다. 
후광의 색상 효과는 3층 유리의 개별 레이어가 부분적으로 제거되어 
노란색이 녹색 색조를 띠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뮌헨의 장인들은 또한 단색 유리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림의 구름은 단단한 스모키 그레이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십자가의 배너는 
루비로 만들어졌으며 배너의 십자가는 흰색으로 만들어졌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의 일부는 특수 페인트로 칠하고 
머플로에서 소성한 다음 기계 가공을 거쳤다. 

사람의 얼굴과 노출된 인체 부위를 스테인드 글래스에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소위 '양피지' 유리를 발명했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은 막대로 연결된 두 개의 금속 프레임으로 구성된다. 
두꺼운 거울 유리가 외부 유리에 삽입되고 스테인드 유리 창 자체는 
납 납땜으로 고정된 컬러 반투명 유리 요소로 내부 프레임에 장착된다. 
여닫이 창에서는 금속 패스너로 제자리에 고정된다. 

 

녹색의 화강암 기둥 사이에 성인들의 성상화가 많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성모자 상, 가운데 성냐 카테리나, 왼쪽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들의 성상화들

 

천장화 <최후의 심판>

 

러시아 정교회의 특징은 홀과 회중석 사이에 이코노스타시스가 있고 
가운데 황금의 문이 설치되어 카톨릭 교회로 착각할 수도 있다.

 

중앙홀 상단에 있는 <최후의 만찬> 성상화

 

우측홀 아래쪽에도 회중석이 설치되어 가운데 성상화 칸막이 이코노스타시스가 보이고 
중앙의 문을 왕의 문(Royal Doors) 또는 황금의 문이라 부른다.

 

동쪽에는 고대 러시아 교회의 제단 장벽과 같이 주요 제단과 성상화 칸막이(iconostasis)가 있다. 
성상화 칸막이의 세 개의 큰 아치는 교회의 제단 입구로 사용된다. 
중앙 아치는 두 개의 청금석 기둥과 왕의 문(Royal Doors)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호화로운 장식에서 메인 돔의 드럼 디자인은 매우 중요하다. 
벽면에서 튀어 나온 열두 천사상은 대리석 기둥과 함께 
하나의 수직을 형성하고 드럼의 명확한 분할에 기여한다. 


전기 도금법으로 만든 조각품 사이에는 열두 사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북창에 의해 조명이 잘 비추는 천사의 금박이 벽 배경에 
밝은 점으로 돋보이며 그림과 함께 풍부한 장식 효과를 만든다.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816 평방 미터의 면적을 가진 "영광의 성모"광장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캔버스의 원형 구성은 사원의 건축에 ​​의해 결정된다. 
장식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진 난간은 건축 형태에서 
그림 같은 형태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다. 
환상은 드럼의 엔테블러처를 증가시키고, 이미지가 없는 플라폰드의 중심은 
공기 공간의 깊이와 궁창의 무한함을 불러 일으킨다. 

 

다양한 유형의 예술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본 돔의 
드럼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대성당 내부 장식의 중요한 특징은 금으로 장식된 세부 사항, 
청동 주물, 부조 장식, 기둥의 베이스와 수도, 메달리온, 케이슨, 화환 등이다. 
총 300kg의 금이 대성당의 금박에 사용되었고 또 다른 100kg은 돔의 금에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은 다양한 유형의 장식 및 응용 예술과 건축을 통합 한 놀라운 예이다. 
수많은 그림, 모자이크, 조각, 유색 돌과 금박의 환상적인 조합은 
풍부하고 포화된 색 구성표를 만든다. 

 

성당 내부에는 천장과 벽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많은 이콘화들과 
성인, 종교 스토리가 담긴 그림들이 가득하다. 
이 당시 유명했던 러시아 화가 브를료프의 그림들이 많이 있다.

 

메인 돔 플라폰드의 구성은 딜레브(I. Dylev)가 만든 비둘기 조각으로 완성된다.
86.5m 높이의 금고 아래를 맴돌며 성령의 상징이다. 
비둘기 조각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84kg이고 비둘기의 날개 길이는 2.06m이다. 
조각품의 빛은 전기 도금 방법으로 적용된 은층으로 제공된다.

 

돔 중앙의 비둘기 
비둘기는 기독교 삼위일체 중 성령을 의미한다.
비둘기의 시선으로 내려오면 성모 마리라가 있고 세레 요한도 있다.

 

약 3톤의 무게로 투각 도금된 샹들리에

 

실내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 내부 장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사도, 선지자, 천사, 돔의 북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es)가 있다. 
조각, 건축 및 회화의 합성의 예는 르네상스의 전통으로 만들어진 메인 돔의 드럼이다. 
12개의 천사상이 있는 사도들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다. 
천사 위에는 조각상과 하나의 수직을 형성하는 기둥이 있다. 
이 솔루션은 건축 구성의 가벼움과 무결성을 강조한다.

 

성전 서쪽 금고에 있는 선지자들과 동쪽에 있는 천사들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림, 모자이크 및 조각을 조화롭게 결합한 이코노스타시스의 장식이 특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은 다섯 인물로 구성된다. 
그룹의 논리적이고 구성적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양손을 들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전체 인물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주님의 열망이 위쪽으로 향한 동기는 왼쪽 천사의 포즈를 성공적으로 해결한다. 

이 조각품은 안정적이고 명확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석한 군인들의 모습다. 
그들은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의 영향으로 시각적인 균형을 이룬다. 
주님이 뻗은 손의 모습은 유난히 가볍고 역동적인 것처럼 보이며 
선지자들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금고, 돔의 드럼 및 이코노스타시스의 조각은 전기 도금 방법을 사용한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성 이삭 대성당 건설 중에 처음으로 이러한 규모로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용기에 황산구리 용액으로 흑연으로 덮인 미래 조각품이 배치된다. 
양극은 그것에 연결되고 전기 배터리의 음극은 황산염(vitriol)로 낮아진 구리판에 연결된다. 
전류가 흐르면 조각된 흑연의 얇은 층에 구리가 증착된다. 
상대적으로 얇은 구리 층으로 인해 전기 주조 조각은 상당히 가볍다. 

이를 통해 몽페랑(Montferrand)은 대성당의 질량을 줄이고 정착지의 불균일성을 완화할 수 있었다. 
전기 도금 작업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공장에서 수행되었다. 
몽페랑의 제안에 따라 금고의 조각은 벽돌 세공이 아니라 
장식적인 내부 금고를 형성하는 특수 금속 구조물에 부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건축 관행에서 볼 때 혁신이었다.

사원 문에 새겨진 조각은 청동으로 주조되었고 장식적인 푸른 녹으로 덮여 있었다. 
성 이삭 대성당에서 러시아 조각가들이 만든 350 개 이상의 작품은 
19 세기의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플라스틱의 독특한 컬렉션을 나타낸다.

 

러시아의 조각가 이반 비탈리(I.P. Vitali)가 제작한 여러 모양의 부조로 장식된 
3개의 각 오크 문 위에는 비문의 의미를 나타내는 줄거리가 있다. 
넓은 망토를 입고 정력적으로 논쟁하는 남자와 침착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철학자,
명상으로 가득찬 노인 아테네 인의 긴장된 모습,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구성을 결합한 바울 자신의 모습이 있다. 

 

북쪽 문의 부조는 흥미롭다. 
사원의 모든 내부 문에는 둥근 메달의 틈새와 흉상이 많이 있다. 
비탈리(Vitali)와 그의 조수는 기존의 이상화 된 이미지와 크게 다른 여러 이미지를 만들었다. 
많은 흉상은 누군가의 특정 기능을 재현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장식용 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43년 몽페랑(O. Montferrand)이 개발한 실내 장식 
프로젝트가 승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석재 샘플이 선택되었다. 


성당 내부의 바닥은 밝고 어두운 회색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으로 된 석판으로 포장되었다. 
인테리어의 주요 건축 부문에 따라 분홍색 티비디안(Tivdian) 대리석 줄무늬가 디자인을 강조한다. 
돔 아래 바닥의 중앙 부분은 티비디안 대리석의 화려한 대리석 장미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벽과 철탑은 쇼크샤(Shoksha) 반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코린토스 양식(Corinthian)의 수많은 플루트 기둥은 분홍색 
티비디안(Tivdian)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인테리어 장식 솔루션의 주요 색조를 정의한다. 
기둥의 도금한 수도 수준을 지나가는 프리즈의 황기도 그것으로 만들어진다. 
녹색 제노아(Genoese)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직사각형 프로파일 슬래브 형태의 
노란색 시에나(Siena) 대리석은 4 개의 중앙 철탑을 장식하여 따뜻한 색조로 내부를 활기차게 만든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주요 이콘스타시스 앞에는 쇼크샤(Shoksha) 반암 석판이 놓여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처마 장식 위에는 대성당의 다락방과 아치형 천장과 돔의 치장 벽토, 
"석고"라고도 불리는 인조 대리석이 있다. 
이 재료의 주성분은 초크, 설화 석고, 석회, 시멘트, 

대리석 칩 및 유색 안료를 포함하는 세립 석고이다. 


덩어리를 벽에 적용하고 경화 후 착색된 돌을 모방하기 위해 주어진 패턴에 따라 
오목한 부분을 긁어 추가 안료가 도입되어 자연석의 정맥과 내포물이 생겼다. 
인조 대리석은 부석과 백랍 재로 수작업으로 연마하고 

습지 말꼬리 식물의 줄기로 최종 광택을 내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일반적으로 성 이삭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뛰어난 광채와 다양한 마감재로 놀랍다. 
벽 클래딩에는 다소 밝은 석재가 사용되었지만 

색상 대비가 능숙하게 분포되어 잡 색감을 만들지 않는다. 
다양한 유형의 석재가 건물의 건축물을 강조한다. 
따라서 다른 색상의 도움으로 주문의 요소가 강조된다. 


분홍색 기둥은 벽의 흰색 표면에서 명확하게 읽히고 엔타블레이처의 색상은 
어두운 반암으로 명확하게 윤곽이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사원 내부는 엄숙함과 축제의 느낌을 준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말라카이트는 불투명하고 깨지기 쉬우며 매우 아름다운 돌로 
밝은 청록색에서 새틴 광택이 있는 짙은 녹색에 이르기까지 색상이 다양하며 
밝은 말라카이트는 어두운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미네랄은 쉽게 처리되고 연마된다. 

러시아에서는 18세기에 우랄에서 많은 공작석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구리 광산의 활발한 개발과 관련이 있다. 
화학적 조성 측면에서 말라카이트는 구리의 수성 탄산염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소위 "새싹"이라고 불리는 
둥근 형태의 형태로 가장 자주 발견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왕실 문을 둘러싸는 기둥에는 황금빛 반짝임이 있는 진한 파란색 바다크 산 

청금석이 늘어서 있으며, 이는 품질면에서 세계 최고로 간주된다. 
아프간 청금석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색이 매우 강하며 
섭씨 1000도 이상 가열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화가들이 이 돌을 사용하여 때때로 퇴색하지 않는 군청색 페인트를 만들었다. 
성 이삭 대성당과 같은 규모에서 청금석은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청금석 기둥의 높이는 약 5m, 지름은 0.5m이다.

기둥의 표면은 이 돌의 취약성 때문에 사용된 "러시아 모자이크"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되었다. 
돌은 몇 밀리미터 두께의 얇은 판으로 절단되었다. 
그런 다음 돌의 패턴에 따라 잘라내어 아름다운 패턴을 만들고 
개별 판 사이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조정했다. 
세트는 뜨거운 왁스와 로진매스틱을 사용하여 금속 또는 석재 주형에 접착되었으며, 
불규칙한 부분은 매끄럽고 연마되었다. 

 

모자이크 프레스코화
아주 작은 돌들을 색깔별로 붙여서 만든 성화로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내부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과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회 성당이다.
이 성당 이름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믿음의 조상의 아들’이지 
그리스정교나 동방정교, 혹은 카돌릭에서 말하는 성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 이삭은 ‘이삭 달마시안’이라고도 불리우는 
지중해 북동쪽의 작은 나라 달마시아의 성인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그 먼 곳의 성인의 이름을 이 성당에다가 가져다 붙였을까? 
성 이삭의 축일이 5월 30일이었는데 그 날이 바로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란다. 
표면적으로는 정교 성인을 위한 성당을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지었지만 
그 저의에는 당시 막강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첫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은 1707년 표트르 대제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세워졌다. 
길이 18m, 폭 9m, 높이 4~4.5m의 목조 건물로 된 소박한 규모였으며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 강가에 너무 가까이 지은 탓에 건설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건물에 사용된 자재가 썩기 시작했다. 

이에 1717년 원로원 광장으로 부지를 옮겨 공사에 들어가 
1727년 두 번째 대성당을 지었고, 바로크풍의 종탑도 추가했다. 
하지만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735년에 벼락을 맞아 불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대성당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인 1761년 건설을 시작해 
약 40년 후 파벨 1세 때인 1802년 5월 30일에 축성되었다.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이 완성된 뒤 겨우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808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설계 공모를 몇 차례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구스틴 드 베탕쿠르(Agustín de Betancourt, 1758-1824)에게 
새로운 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베탕쿠르는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까지 무명인 20대 후반 젊은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엄한 건물을 원하자 
몽페랑은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성당의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정하고 
코린트식 열주와 박공지붕으로 된 파사드를 네 면에 두며, 
높게 세운 드럼 위에 43m 높이 돔을 얹는 대담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본격적인 공사는 1818년 2월 20일에 황제의 승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몽페랑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성당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운 도시기 때문에, 
공사 현장의 지반을 충분히 다지지 않으면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 m, 두께 26~28 cm인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에 세울 원기둥 48개는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다.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 여가 더 걸렸다. 
각 파사드마다 12개씩 원기둥을 세웠고, 
그 위를 덮은 박공지붕은 12사도의 청동상으로 장식했다. 
그동안 벽돌공들은 성당의 주요 벽체와 볼트 천장을 마무리 지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40년 간 계속된 공사 끝에 마침내 1858년 5월 31일 네 번째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신성한 건물에 동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 기간 내내 
4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로지 인력으로만 건물을 지었다. 
공사 책임자인 몽페랑은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7월 10일에 
72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사회 치고 역술을 즐기는 러시아에서 
당시의 유명한 점장이가 성당이 완공되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초창기에 예언했다는 것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렌처럼 몽페랑 역시 
자신이 설계한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운 건축가였지만 사후에 받은 대우는 렌보다 못했다. 

몽페랑은 평생을 바쳐 지은 성 이사악 대성당에 묻히기를 바랐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청원했지만 
황제는 몽페랑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당 내의 매장을 거부했다. 
결국 몽페랑의 유해는 아내가 프랑스로 운구해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혔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튀어 나온 건물의 주요 볼륨 모서리에는 4개의 
작은 종탑이 있어 사원의 실루엣을 성공적으로 보완한다. 
그들은 종탑 자체의 규모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는 
가벼운 금박 돔으로 완성되었으므로 메인 돔보다 훨씬 작다. 
대성당의 피라미드 구조로 인해 메인 돔이 있는 거대한 드럼 위로 
역동성과 열망이 생기고 건물 전체가 주변 공간과 연결된다. 

19세기 중반까지 겨울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나 성당의 빛나는 금빛 돔을 바라볼 수 있다. 
주철로 건축된 성 이삭 대성당의 돔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건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그 때부터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1990년부터 일정한 날에는 정교회 행사를 다시 열고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둥과 벽에서 총알자국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이삭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종교용 건물로서의 이용이 재개하고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남쪽과 서쪽 외관을 따라 
해군성과 궁전광장, 네바 강으로 이어지고 동쪽에 성 이삭 대성당이 있다. 
공원을 벗어나 네바강 쪽으로 나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세나츠카야 광장 복판에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성당을 마주 보며 세워져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에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2세기 로마 대리석상 '파르네스의 헤라클레스' 복제품이 서 있다.
조금 지친듯한 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씌운 자기 몽둥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원엔 고골리부터 글린카, 고르바초프에 이르는 여러 작가, 정치인의 조각상도 있다.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정면은 높이 17m, 무게 114 톤의 화강암 기둥이 있는 현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은 사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화강암 기둥 위에 설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 (St. Isaac 's Cathedral)은 세련된 화강암 기둥과 대리석이 사용된 
외부 장식에 있는 러시아 고전주의의 기념물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현관의 짙은 빨간색 기둥, 메인 돔의 열주 및 회색 대리석 벽 클래딩과 
금박 돔이 있는 건물 지하의 멋진 조합은 전체 구조에 의식적인 느낌을 준다. 

대성당의 현관은 웅장함과 고귀함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6열로 된 현관 하나는 네바(Neva) 강과 청동 기수(Bronze Horseman)상을 향해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 이삭 광장(St. Isaac 's Square)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성전의 두 입구는 도시 계획 기능으로 인해 제단과 관련하여 측면으로 판명되었다. 
성전의 제단은 서쪽에 대칭으로 반복되는 8열 현관으로 외부에 표시되어 있다. 

대성당 벽의 매끄러운 평면은 상단에 거대한 판금과 

볼류트가 있는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잘린다. 
건물의 웅장함한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건축가 몽페랑은 창문과 문의 크기를 
엄청나게 늘려 사원의 실제 크기에 대한 생각을 왜곡했다. 
동쪽 외관을 제외하고 세 개의 외부 문은 각각 

42평방 미터 크기의 현관과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벽의 전체 평면의 1/3은 불필요하게 주요 주문보다 

우세한 거대한 다락방으로 채워져 있다. 
그 크기는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의 동쪽 정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봉헌된 부분은 해체할 수 없었다. 
몽페랑은 4개의 종탑의 수직 관절과 벽의 윗부분에 모돈이 있는 
수평 처마 장식으로 거대한 다락방을 다소 부드럽게 했다. 
모서리에 위치한 기둥은 건물의 주요 구획의 수직적 특성을 강조한다. 

성 이삭 대성당은 기념비적이며 장식적인 예술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대성당의 건축은 회화 및 조각과 직접적인 예술적 관계에 있다. 
외관의 장식용 솔루션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조각에 의해 결정된다. 

관람 파트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매표소에서 각각 따로 표를 판매한다. 
ISIC 카드 소지자 기준으로 두 곳 모두 입장하는데 300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한 곳은 콜로네이드. 즉 성당 돔 지붕 테두리에 올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나머지 한 곳이 
성당 내부 겸 박물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내부에서는 200루블에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성당 한쪽 구석에서 200루블에 기념 주화를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다.

내부관람 시 특정구역을 제외하고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있다. 
여느 정교회 성당이 그러하듯 오후 6시에 매표소가 문을 닫은 뒤로는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가 시작되고, 관광객 또한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단 이때부터는 기도예식을 진행하므로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고, 
최대한 조용히 둘러보다가 나감을 추천한다. 
이때에는 당연하게도 여성 관광객들은 정교회 규칙에 따라 머리 부분에 천을 둘러야 한다.

 

성 이삭 성당 3D 레이아웃

메인 종은 이삭의 이미지와 표트르 1세부터 니콜라스 1 세까지 
러시아 주권을 묘사하는 5개의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외관 장식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빼어나다.
페디먼트 옅은 부조, 천사 동상, 외부 문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사원의 각 건축 세부 사항은 매우 상징적이다. 
정면은 흉내낼 수 없는 조각 주제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돔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돔을 받치는 각 기둥은 특별히 개발된 설계에 따라 들어 올려졌다. 
100kg의 순금이 기둥의 도금에 사용되었다. 
대성당 콜로네이드는 도심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다. 
대성당의 돔은 핀란드 만에서도 볼 수 있다.

평일, 공휴일 및 일요일에 하루 16시간 동안 4만 농노가 역사적인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농노 건축업자의 4분의 1이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1842년에 대성당은 3,200만 은 루블을 사용하여 세워졌다. 
대성당은 1858년 5월 30일에 봉헌되었고 예배를 위해 개장했다.

 

사원의 돔

건축가 몽페랑(Montferrand)은 40년 동안 장기 건설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점쟁이는 사원이 건축 된 후 건축가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몽페랑은 건축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몽페랑은 작업 완료 후 한 달 남짓 후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 2 세가 성전을 조사하던 중 성도들의 조각품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달마티아의 이삭, 몽페랑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24천사가 돔 아랫부분을 에워싸고 있다. 
이 천사상은 거푸집에 지어부어 만드는 전통적 청동 주물 방식이 아니라 
전기 도금법을 응용해 정밀하게 뜨는 전기주물(electrotyping) 방식을 처음 적용한 동상이라고 한다.

돔에 금을 입힐 때도 당시로는 첨단 방식인 스프레이 페인팅을 했는데 
금 녹이는 용해액에 수은이 함유돼 금물을 뿌리던 인부 60명이 

수은 증기를 쐬고 중독돼 죽었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공습의 표적이 되지 않게 하려고 돔에 잿빛 칠을 했다. ​
돔 아래 둥글게 난간을 두른 곳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전망대이다.

 

정면 윗쪽의 삼각박공 조각

장식 조각의 위치는 건물의 주요 부분에 해당하여 별도의 건축 덩어리를 통합하고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부드럽게 하여 
구조의 개별 요소의 역할과 중요성을 높여 준다. 

19세기 초 건물의 엄격함과 고상한 단순함은 화려함과 효과를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벽의 가소성을 강화하여 페디먼트의 매끄러운 들판을 복잡한 옅은 부조로 채운다. 
이 모든 것이 성 이삭 대성당의 외부 장식에 완전히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성전 내부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외부 조각 

네 귀퉁이에 ​천사상과 불 밝히는 받침대를 세웠다.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조각품은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 졌을 뿐만 아니라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정교회와 러시아 군주제, 러시아 차르의 숭배를 강조했다.

 

외부 조각

 

북쪽 삼각박공 조각

네바 강 쪽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북쪽 삼각박공에 새긴 부조상의 주제는 
조각가 ‘레 무아(F. Lemer)’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중앙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이고 양쪽에는 천사상과 무덤을 지키는 군인과 여인들이 보인다.  
박공 상부에는 제자 요한 동상, 왼쪽에는 베드로, 오른쪽에는 바울의 동상이 있다
아래 길게 새긴 글귀는 "신이여, 왕이 당신의 권능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이다. 
'왕'은 표트르대제를 가리킨다.

 

남쪽 삼각박공

남쪽 현관의 벽에는 성모 마리아와 자녀, 측면에는 동방 박사가 있다. 
거대한 청동 고부조의 변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강력한 금속 보강재로 둘러싸여 있으며 수많은 핀으로 고정되었다. 
덕분에 높은 부조는 처마 장식에 놓이지 않고 대리석 클래딩을 파괴하지 않는다. 

대성당의 현관은 사도의 부조와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는 램프로 천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완성하고 
메인 돔의 난간에는 24개의 천사 동상이 있다. 

 

동쪽 삼각박공

4면 박공마다 부조상을 새겼는데 동쪽 박공은 성 이삭이 4세기 로마황제 발렌스를 
가로막고 서서 계속 가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리는 장면이다. 
조각과 건축 형태의 합성 관점에서 볼 때 동부 현관의 구호가 가장 성공적이다. 

 

사도 요한 조각

박공 위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다.  
곁에 있는 독수리는 요한복음을 상징 한다.

 

4면 박공을 따라  열 두 명의 사도상이 서 있는데 사진 왼쪽이 베드로, 오른쪽이 바울이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서쪽 현관 "이삭(Isaac)은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축복합니다"의 
높은 부조는 엄격하게 대칭으로, 차분하게 지어졌다. 
부조의 구석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모형이 손에 든 골동품 토가에 
몽페랑(O. Montferrand)의 조각상이 있다.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네 명의 전도자의 상징이 있는 조각이 있다. 
서쪽에는 사자가 있는 마가, 남쪽에는 천사가 있는 마태, 
북쪽에는 독수리가 있는 요한, 동쪽에는 누가가 있는 송아지. 
북부 페디먼트의 성 베드로, 폴 및 전도자 요한은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고 
나머지 9개는 청동으로 주조도었다.

 

외부 조각 - 천사상

천사상은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천사의 옷과 날개가 벽에서 약간 튀어 나와 조각품이 점차 
벽면으로 이동하고 천사는 유기적인 건축 세부 사항처럼 보인다. 
다락방 천사와 램프가 달린 천사는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며 인공 녹청으로 덮여 있다.

 

풍부한 야외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의 외관에 시각적으로 
과부하가 걸리지만 동시에 화려함과 엄숙함을 선사한다. 

 

정면에 선 코린트식 기둥이 웅장하다. 

한 개 무게가 많게는 114톤이나 되는 붉은 화강암 기둥이 모두 112개다.​ 
중앙 돔은 ​순금을 입힌 것으로도 유명하다. 
돔 성당으로는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과 함께 세계 3대 성당에 꼽힌다고 한다.

 

붉은 화강암의 굵은 원주들이 받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많은 뛰어난 건축 기념물 중 성 이삭 대성당은 건축 및 장식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유색 돌이 비정상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그들은 화강암, 다양한 유형의 대리석, 쇼크샤(Shoksha) 반암, 각력암(breccia), 
순지트(shungite) 슬레이트, 공작석 및 청금석을 사용했다. 

건축가 몽페랑은 거친 나뭇결의 핀란드 화강암인 라파키비(Rapakivi) 화강암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라파키비 화강암은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큰 블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구별된다. 
이 돌은 대성당의 주요 구조인 기초, 기단 및 112개의 기둥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화강암은 1740년대부터 개발된 거대한 비보르크 산괴의 영토에서 채굴되었다. 
피털락(Piterlax) 채석장은 핀란드 만 해안 근처의 여러 섬에 위치해 있어 
석재 블록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쉽게 운송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배를 타고 물에 의해 대성당의 건설 현장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의 기단 블록과 기둥을 연마하기로 결정했다. 
연마는 돌을 풍화로부터 보호하고 습기 침투를 방지하며 멋진 장식 효과를 주었다. 
붉은 화강암 기둥은 대리석 벽 클래딩의 밝은 회색 배경에 선명하게 눈에 띄며 
돔의 금과 결합하여 우아한 색 구성표를 나타낸다.  
따라서 성 이삭 대성당을 건설하는 동안 화강암은 

건설적인 것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다양한 종류의 대리석이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돌들은 다양한 색상이 될 수 있다. 
유색 대리석은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거나 줄무늬가 있다. 
처리하기 쉽지만 내구성이 떨어진다. 
대리석은 대기의 온도, 습도, 이산화황의 급격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건축에서는 외관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 이삭 대성당은 외관과 내부가 대리석으로 된 몇 안 되는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은 성당의 정면에 사용되었다. 
이 돌의 퇴적물은 러스킬라 마을 근처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8 세기 중반부터 개발되었다. 
러스킬라 대리석 채석장은 밝은 황록색에서 짙은 녹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돌을 제공했다. 
대리석은 색상과 구조가 균일하지 않은 패턴으로 처리되어 쉽게 처리되고 거울 광택을 냈다. 


그러나 러스킬라 대리석은 내후성이 충분하지 않으며 외부 장식에 사용될 때 중요한 단점이 있다. 
약 50-60 년 후에 부분 또는 전체 교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이삭 대성당의 정면은 그것과 마주하고 있으며, 
3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외부 문이 새겨진 문이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밝고 어두운 회색 대리석은 비스듬한 바둑판 케이지 형태로 성전 바닥을 포장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대성당 장식에서 티브디아(Tivdia) 대리석은 티브디아 마을 
북쪽의 칼렐리아(Karelia)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벨라야 고라(Belaya Gora) 광상에서 채굴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벨로고르스크(Belogorsk)라고 불렸다. 
색상에서 분홍색과 빨간색 톤이 우세한 것은 미네랄 적철광의 존재 때문이다. 
이 대리석은 석영 함량이 높기 때문에 매우 단단하며 가공 정도면에서 가장 복잡한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당 내부에는 러시아산 석재와 함께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서 수입된 석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선 흰색 이탈리아 세라베초 대리석으로 벽이 마주보고 있다.
짙은 회 녹색 제노바와 노란색 시에나 대리석도 이탈리아에서 구입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붉은색 그리오토(griotto) 대리석은 프랑스 남부에서 가져왔다. 
이 돌은 짙은 체리 레드 또는 짙은 정맥과 작은 방해석 반점이 있는 밝은 빨간색이 매우 눈길을 끈다.
성 이삭 대성당은 실내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돌 바위가 장식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쇼크샤(Shoksha) 반암은 진한 빨강색 또는 체리색을 띠고 규암 그룹에 속한다. 
주된 암석 형성 물질은 석영이며, 그 입자는 석영 물질에 의해 밀도가 높은 덩어리로 접합된다.
색상은 철 안료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므로 규암은 대부분 빨간색, 분홍색 또는 갈색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석재가 채굴된 쇼크신스코예 광상은 러시아에서 200년 넘게 알려져 왔으며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오네가 호수 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구조상 쇼크샤 반암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내후성이 뛰어나다. 
가공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완벽하게 경면 마무리로 연마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카렐리야(Karelia)에서는 각력암(breccia)도 채굴되었으며 복잡한 구성과 
구조의 암석으로 건물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밀한 백운석-사문석 물질로 단단히 접합된 디아베이스 포르피라이트의 작은 조각으로 구성된다. 
이전에는이 ​​품종을 대리석이라고 했지만 더 취약했다. 
각력암의 추출 및 가공은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큰 블록이 떨어져 나갔을 때 돌은 상당히 강한 단일체의 인상을 주었지만, 
추가 가공, 특히 연마할 때 다양한 크기의 조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1m 40cm 높이의 벽과 철탑의 지하 부분에는 흰색 세라베조(Seravezzo)와 
분홍색 티브디안(Tivdian) 대리석이 있다. 
티브디안 광물 프레임에는 직사각형의 수평으로 길쭉한 패널과 둥근 격력암 메달이 있다. 
주각은 넓은 슬레이트 주각으로 바닥에서 끝나며 회색 대리석 바닥으로의 일종의 전환 역할을 한다. 

세라베조 대리석의 벽에는 약간 칙칙한 색조가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약하게 발음되는 패턴이 있다. 
흰색 카라라 대리석은 주 아이콘과 부 아이콘을 마주 보는 데 사용된다. 
주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의 철탑 벽감과 난간 세부 사항도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주요 제단 측벽의 대리석 조각은 특별한 우아함으로 구별된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성당에는 3개의 청동으로 만든 대형 문이 3개 있는데 하나의 무게가 10톤 이라고 한다.
성경의 내용으로 장식한 조각들이 인상적이다.
출입문은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들어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든 출입문과 문에 새긴 정교한 조각들은 
하나의 청동주물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성 이삭 성당은 옥상 전망대를 유료로 개방하고 있다. 
원통형의 125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10개 계단마다 번호가 쓰여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 전망대에 올라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 지는데 
도시를 한눈에 볼수 있어 인기가 있는 곳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의 앞쪽의 첨탑이 구 해군성 본부 건물이고 뒤쪽의 첨탑이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의 피터와 폴 대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남쪽 방향으로 멀리 푸른 돔이 보이는 곳이 카잔 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 뒤쪽에 황금색 돔과 첨탑이 보이는 곳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일명 : 피의 구원성당)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의 지붕에는 중앙 꾸뽈(돔)과 작은 꾸뽈(돔) 4개가 있는데, 
꾸뽈은 모두 붉은색 화강암 기둥이 둘러싸고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외부

 

 

 

그리스도 부활성당 내부

이 성당의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모자이크 화'이다. 
지금 사진으로 보는 모든 그림들이 다 모자이크 화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모자이크화로 되어 있다.
벽화는 예수의 행적과,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모자이크 그림 스케치를 하는 데에만 32명의 화가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장식에는 많은 화가, 모자이크 예술가, 요업 기술자, 유약 기술자들이 참여하였다.
외부 장식에는 모자이크가 광범위하게 쓰였고, 
둥근 지붕들은 귀금속 성분의 유약으로 칠해졌으며, 
천막 모양의 지붕들은 채색 기와로 씌워졌다.
그리스도 부활교회가 유명한 것은 308점의 현란한 모자이크 작품 장식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성당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1818~1881)가 암살당한 장소다.
성당 안에서 상징적인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기둥에 쓰인 돌들은 우랄 지역의 귀한 석재라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로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선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나키스트에게 1881년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1861년 발표한 

농노 해방령이며 이 외에도 법률 제도를 재조직하고 지역 재판관을 

선출제로 바꾸었으며 가혹한 제도들을 폐지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르 2세는 '알렉산드르 해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지역 자치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군사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편했으며 귀족들의 특권 일부를 삭제하고 대학 교육과 산업 발전에 힘썼다.

대외적으로 그는 미국에 알래스카를 판매했으며 나폴레옹 3세나 빅토리아 여왕,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같은 유럽 내 여러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평화를 추구했다. 
1872년 그는 삼제동맹에 가입해 유럽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발칸반도의 여러 슬라브 국가들과 연합해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시베리아, 캅카스 산맥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투르키스탄을 병합했다. 


그는 동방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얻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는데도 앞장섰다. 
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위기는 폴란드 지역에서 발생한 1863년의 1월 봉기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 제국 내의 폴란드 영토에 별도의 
입법 기구를 마련하는 대신 그 입법 기구를 러시아 제국 직속으로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알렉산드르 2세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그는 나약하고 선량한 기질의 인물로서 정책에 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해 어떤 때는 아버지보다도 더 반동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와 크리미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여론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여러 개혁을 추진하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노 해방을 비롯한 그의 개혁은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 제도의 폐지였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개혁은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농노 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은 농노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요가 대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지주들이 솔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권리들을 빼앗길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귀족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론을 더욱 자극했고,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우선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해 공개 토론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으며, 
해방된 농노들에게 농토를 분배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대다수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 해방령을 공포하여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 전에 
“아래에서 농민이 자신을 해방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위에서 농노 제도를 폐지하는 편이 더 좋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측면에서 보기

농노 해방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법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인간의 예속을 철폐하는 이 부분은 농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4,000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농노 해방이 완벽한 개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주들은 상실한 토지에 대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받은 농민들은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토지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적었으며, 상환금액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토지가 개인에게 분양된 것이 아니라 
농민공동체 단위로 분양되었으며, 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에게 재분할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들에게 납세 의무와 토지 상환금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결정은 농민공동체의 기능을 상쇄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농노 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종래 지주가 농노에 대해 행사했던 
독점적 재판권이나 치안 유지에 대한 권한 등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고, 
지주들이 누렸던 권위도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일임되었던 지방행정은 1864년 젬스트보 기구가 조직되어 재편되었다. 
젬스트보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 세 계층이 대의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젬스트보에서는 주민들의 복지에 관한 사항만을 주로 다루었으며 
일반 행정과 공공권력의 행사는 중앙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이 맡았다. 


젬스트보에서는 기구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젬스트보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지주에게 유리하게 치러졌지만 

자치의 원칙이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지방의 생활조건 향상을 위해 

여러 사회계층이 협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젬스트보의 의석은 귀족과 관리에게 42%, 농민에게 38%, 
상인과 기타 계층에게는 20%가 배정되었으며, 도로 건설, 의료, 식량, 
교육 등과 같은 뒤처진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지방행정 못지않게 많이 바뀐 곳은 법원이었다. 
계급차별주의 원칙을 근거로 한 개혁 이전의 재판은 권위주의와 
재화주의에 물들어 있는 재판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행해졌으며 피고를 대변할 변호인도 없었다. 
또 재판과정이 매우 느리고 많은 경비를 소모하게 되어 있었다. 


1864년의 개혁에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이 선포되었고 계급 차별도 없어졌다.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었으며 재판관은 종신제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은 공개되었고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으며 변호사협회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에 이르는 전 부문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러시아의 법원 조직은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군대의 개편이 실시되어 이전까지는 하층계급만이 징병에 대한 부담을 지었으나 
국민징병제가 실시되어 귀족과 평민에게도 군복무를 하게끔 만들었다. 
복무 기한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도 
훨씬 나아졌으며 훈련도 인도적 원칙이 강조되었다. 
특히 사병들에 대한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새로 조직된 법원과 함께 개편된 군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더불어 검열을 완화하고 태평도 폐지하였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교들의 반란인 데카브리스트당의 
반란 가담자들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석방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구체제가 세워 놓았던 계급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이었다. 
즉 농노 제도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이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에서 그들의 옛 주인과 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새로 개편된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상을 내걸었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군대의 개혁도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고, 그가 가는 곳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암살 위기를 겪으면서 몇 해간 개혁 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로 들어섰으나 시간은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년)

 

1881년, 알렉산드로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나로드니키(공화주의자)의 인민의 의지당 소속 
그리네비츠키, 소피아 페룹스카야 등의 폭탄테러와 조우했다.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호위병과 마부만 다치고 황제는 무사했으나, 
다친 호위병들을 살피러 마차 밖으로 나왔고 그 순간 
두 번째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로 2세는 폭살당했다.

황태자 니콜라이가 22살에 요절하여 다른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뒤를 잇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사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천장과 벽 등 내부가 온통 타일로 된 모자이크 화로 덮여 있다.

 

인증샷

 

성당의 바닥은 다채로운 종류의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카펫'이다. 
다양한 색상의 12개 이상의 돌이 600 평방 미터가 넘는 면적의 
바닥 표면을 덮는 45개의 사실상 반복되지 않는 패턴으로 되어 있다.

 

인증샷

 

지성소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다가 성찬 예배를 할 때는 문이 열린다.
문 안에 제단이 있다.

성상화 벽 (iconostasis)은 섬세한 파스텔 색조의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교회 장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교회 예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책임 있는 전문가가 작업 수행에 참여했다.
성상화 벽 (iconostasis)의 우아한 석재 조각은 흠 잡을 데가 없으며 나무 조각같은 느낌을 준다.

 

지성소

 

지성소는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전통적인 유대교는 지성소를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으로 간주한다 

 

지성소

 

성인들을 묘사하는 타일 모자이크 화

 

천장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천장과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천장과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 왼쪽과 오른쪽에는 클리로스 (kliros 성가대)와 
주요 성당 공간을 분리하는 아이콘 케이스가 있다. 
12년 동안 러시아의 석재 절단기로 최고의 장식용 돌을 사용하여 
각 아이콘 케이스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웅장한 반암 (quartzite) 석재 조각, 다양한 색상의 미네랄 조합이 
아이콘 케이스에 특별한 장식 효과를 준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석재 장식 제작에 관한 모든 작업은 자연석의 아름다움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제시된 뛰어난 공예품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스도 부활성당 난간에서 카잔 대성당 방향으로 인증샷

 

그리스도 부활성당 난간에서 인증샷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내부

 

 

 

그리도예프 운하를 가로 지르는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i) 다리

넵스키 대로에서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Griboedova) 운하를 가로지르는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에서 상류 그리스도 부활성당 쪽으로 올라가
첫 번째 다리가 이탈리안 다리 (Italiansky Bridge)이고
조금 더 가면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피의 구세주교회 건설을 돕기 위해 

1880년대에 이곳에 최초로 목조로 건설되었다 . 
공사 기간 동안 다리의 너비는 115m에 달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다리인 Blue Bridge의 너비는 97.5m다. 


1907년에 대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다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Christ Bridge 부활의 교회로 명명되었다. 
이후 10월 혁명으로 1917년 이름이 바뀌었고 1975년에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건설되면서 이 다리는 

그리네프스키 다리(Grinevsky Bridg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 난간의 주철 조각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또다른 명칭은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 
약칭 '피의 구원사원'으로 흔히 불린다.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중심부인 미하일로프스키 정원과 
코뉴셴나야 지역의 그리보예도프 은행 근처에 위치한다. 
사원의 길이는 81m이며,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박물관이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이 사원은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1883년에서 1907년 동안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프로젝트로 건립되었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사원의 건설은 24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1907년 8월 6일 변모축일에 문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이다.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이 교회는 알렉산더 2세 암살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곳에 
1883∼1907년에 걸쳐 세워져서 일명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피의 사원에서 '피'는 1881년 이곳에서 암살당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피를 가리킨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 1907년 첫개관 이후로 
90년 후 공개되었으며,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1881년 3월 13일 ,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 니콜라이 리사코프, 소피아 페롭스카야 등에게 폭탄 테러를 당했는데 
첫 번째로 리사코프가 던진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지나가던 민간인만 다쳤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흐르니예비츠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을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비록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황제를 공격하는 동안 17명이 부상당했고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살해당한 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더 3세는 정치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여 비극의 현장에 회개의 사원인 기념 사원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건축은 레온티 볘눈에게 위임, 빠른 진행으로 인해 
1881년 4월 17(29)일 예배당 헌당식(정화식), 기념 추도식을 지냈다. 
그로모프와 밀리틴 일급 상인 길드원이 건축비를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 임시 예배당은 1883년 봄 사원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존되었으며 
이후 카뉴셴나야 광장으로 옮겨져 9년 동안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어쨌든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이후 1997년에 수리를 거쳐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근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중세 러시아 성당건축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지었다. 
다섯 개의 화려한 돔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건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매우 화려하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모자이크화로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이 많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의 서유럽화에 선을 긋고 
러시아적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알렉산드르 3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보예도프(Griboedov) 운하를 가로 지르는 

15m 길이의 극장 다리와 모이카 강(Moika River)을 가로 지르는 18m 길이의 

말로-코유센니 다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의 모이카 부두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한 쌍의 작은 다리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이름으로, 
디자인과 장식이 비슷하고 그리스도 부활성당 앞에 서로 수직으로 위치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장소다.
이 다리는 실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신혼 부부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혼 부부가 혼인 신고를 마치고 삼자 다리에 도착하면 오래 살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세 개의 다리를 모두 걸어야 하고 반드시 피 흘린 구세주 교회에 절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운하길 끝을 가로막듯 선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모습으로 
찬란한 반구 돔들과 박공 모자이크화, 다채로운 색깔로 치장한 성상들, 
광택 벽돌과 다색 타일, 이탈리아 대리석 등이 참으로 화려하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켠 성 바실리 성당 닮았는데 실제로 그 교회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 
전면 너비 52m, 높이 81m에 이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는 유럽풍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물로 넘치는데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이 인공 도시를 건설하면서 유럽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유서 깊은 건물 가운데 17세기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것은 19세기 말에 세운 이 성당이 거의 유일하다.

 

인증샷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피 위에 선 구세주교회, 뿌린 피에 선 교회, 그리고 우리에겐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 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 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이다.​
​지방자치제 젬스트보를 도입했고 배심원 제도를 채택한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에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인증샷

 ​그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제도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를 습격한다.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바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 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힌다.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둔다.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 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구근(球根) 또는 양파 모양 돔으로 
피의 사원은 정면 가운데에 제일 높은 돔탑이 서 있고 좌우 앞뒤로 두개씩 
에나멜로 장식한 돔 네 개까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사진에선 중앙 탑 좌우 에나멜 돔과 똑같은 것이 뒤쪽에도 있지만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맨 왼쪽 종탑과 오른쪽 측면에 황금빛 구근 돔 셋이 있어 모두 아홉 개에 이른다.

 

정면 제일 높은 탑 위 에나멜 돔은 똬리를 틀 듯 꼬아​서 인도 터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탑 아래 실내에 반구형 돔 천장이 있는데 
이 돔탑에 나 있는 창을 통해 실내 돔 천장으로 빛과 공기를 공급한다. 
자연 채광과 환기를 하는 장치이고 장식도 겸하는 이것을 ​랜턴(등불)이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구근 돔은 ​대지에서 타오르는 하느님의 촛불을 상징한다.
돔의 직경이 아래쪽 탑의 원기둥 직경보다 크고​ 높이도 
여느 유럽 교회나 성당의 돔보다 훨씬 높아 금방 눈에 뛴다.

학자들은 구근 돔이 몽골 지배 이전 13세기에 러시아 고대 건축 양식의 헬멧 돔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
헬멧 돔이란 러시아 영웅들이 썼던 헬멧 모양을 본뜬 돔으로 구근 돔은 이반 뇌제 때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말고도 바바리아 지방 카톨릭 성당과 중동 이슬람 사원, 인도 사원에서도 구근 돔을 볼 수 있다.
구근 돔이 셋이면 성령을 상징하고 다섯이면 예수 그리스도와 네 천사를 상징한다. 
에나멜 돔 중에 가장 많은 형태가 이렇게 초록과  푸른색, 하얀색을 교차해 쓰는 형태이다.

 

정면 돔 아래 박공에 모자이크화가 있다. 
가운데에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가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들고 있다.
이런 예수상을 만물의 지배자,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는 판토크라토르(팬토크레이터)라고 한다.
그런 판토크라토 상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세례 요한, 
왼쪽엔 성 게오르기우스(조지)가 무릎 꿇고 뭔가를 탄원하고 간청하고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 대신 성모가 요한과 함께 인류의 죄를 사면 해달라고 청원하는 그림을 
데이시스(디시스-Deisis)라고 하는데​ 성모 자리에 성 게오르그가 있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유럽 전역과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가 성인으로 받든다.
러시아에서는 국가 문장(紋章)에 넣을만큼 각별한 성인이어서 데이시스에 등장시킨 게 아닌가 싶다.

 

예수 모자이크 양쪽 탑 아랫부분엔 천사와 성인들을 묘사한 반원형 모자이크화들이​ 있다.

 

정면 왼쪽으로 치우친 현관은 화려하게 장식한 지붕과 
뾰족한 지붕 모양 탑을 이고 있고 탑 위엔 독수리상이 서 있다.

 

15세기 말부터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에
독수리 머리가 하나씩 왕관을 쓰고 중간 위쪽에도 왕관이 하나 더 있다. 
세 개의 왕관은 통합된 러시아를 상징한다.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

두 마리 독수리 머리가 각기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포용하겠다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 문장에는 독수리가 양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왼손의 황금 공은 전 세계를 그리스도화 하겠다는 뜻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인 형상을 하고 있고 오른손의 홀(笏)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뜻한다. 

이 문장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폐기되고 낫과 망치가 들어간 소비에트 문장이 
등장했다가 1991년 소련방이 해체되면서 옛 문장이 다시 등장했다.
민주주의 시대에 맞춰 왕관의 의미가 바뀌었는데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의미한다.
독수리가 쥔 홀과 구(球)도 주권 수호 의지와 국가 통일성을 상징한다.
가운데 말을 타고 용을 무찌르는 기사는 정면 박공 그림 데이시스에도 들어간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지붕은 러시아 전통 주택에서처럼 사면을 따라 풀잎 무늬 장식을 했는데 금박 입힌 구리이다.​
지붕 박공에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는 교회 이름에 맞춰 예수 부활을 그려 놓았다.​

 

첨탑 아래쪽에도 반원형 아치를 만들고 천사상과 성인상 모자이크화를 넣었다.

 

정면 이층과 삼층에는 화려한 창문을 냈다. 
섬세하게 부조 장식을 새긴 창틀은 에스토니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창문 사이와 양쪽 끝으로는 기둥 장식을 하고 

안에 화병과 쌍두 독수리 타일화를 번갈아 붙였다.

 

정면 일층 벽에 붙은 모자이크화는 프릴루키의 성 드미트리이다.
14세기 러시아에 여러 수도원을 세워 수도의 삶을 정립한 성자이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 동쪽 측면을 보면 황금빛 구근 돔 셋이 동쪽을 보고 서 있다. 
가운데 돔 아래 그려진 예수상을 에워싼 아치가 끝이 뾰족하다.   
이런 모양의 반원 아치 양식을 가리켜 코코슈니크라고 한다.
코코슈니크 양식은 러시아 전통 건물, 특히 정교회에서 즐겨 쓴다.

 

북쪽 면 모습

알렉산드르 3세는​ 설계 공모를 거쳐 1883년 그리스도 부활성당을 착공한다.
무른 습지 기반을 다지고 화강암을 쌓아 기초 공사를 하는 데만 3년이 걸렸고 
모두 25년 세월을 들여 1907년 완공 한다.
건축비는 왕실 돈과 귀족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고 일반 신자를 받는 교회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2세를 추모하고 기리는 왕실 교회로 썼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뒤 피의 사원을 폭파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큰 건물이 드물어 창고로 썼다.

1931년엔 알렉산드르 2세 테러를 기념하는​ '인민의 의지' 박물관을 안에 만들었다가 
자신에 대한 테러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스탈린이 3년 만에 폐쇄한다.
피의 사원은 그 뒤로도 여러번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폭파될 위기를 넘긴 끝에 
1969년 이삭성당 종교박물관의 분관이 된다. 
오랜 복구와 단장을 거쳐 1998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건물 뒷면 북쪽 모습이다.
매표소가 있는 관람객 출입구가 뒤쪽으로 나 있다. 입장료는 250루블이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수요일엔 휴관한다.  
북쪽 구조는 남쪽과 똑같이 좌우만 다르게 선형(線型) 대칭으로 만들었다.  
정면 중앙 돔탑과 박공 사이, 그리고 창문들 위쪽도 코코슈니크 아치로 처리했다. 
교회는 모스크바 성 바실리교회를 본떠 정통 17세기 러시아 양식으로 지었지만 
당시로는 첨단이었던 전기 시설을 들여 전등 1689개를 밝혔다.

 

북쪽 면 박공에도 예수 부활 성화가 모자이크로 붙어 있다.
교회 안팎엔 당대 러시아 대표 작가들이 10년에 걸쳐 만든 모자이크 성화가 있는데 
그림 면적을 모두 합치면 7천 제곱미터, 2천 평이 넘는다.

 

북쪽 면 오른쪽에도 남쪽 정면과 마찬가지로 쌍두 독수리가 올라선 현관 탑이 솟아 있다. 

 

그리바예도프 운하를 건너 부활성당의 동북쪽 모습을 보니 수상택시들이 운하를 달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난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짜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 궁에서 텃밭을 일구며 소일한다.
해방자 알렉산드르 2세가 피 뿌린 지 37년,  마지막 짜르는 

볼셰비키들에게 가족과 함께 연행돼 시베리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1차대전 때 드러난 
그 체제의 무기력함이 낳은 필연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해방자 짜르가 테러에서 
살아 남았다면 러시아는 물론 세계 현대사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종탑 아래 각진 다섯 면 가득 문장(紋章) 144개를 각기 붙여 놓았다.
제정러시아 시대 지역과 도시와 마을의 문장들을 모았다. 
온 나라가 황제의 피살에 애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바예도프 운하 건너편에서 서쪽 측면을 바라본 모습

 

창문 위 아치 모자이크에 두 천사가 천에 그린 
'천 위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얼굴' 만딜리온(Mandylion)을 받쳐들고 있다.
성상화 이콘(Icon)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도 대상이자 숭배 대상이다.
300 가지에 이르는 이콘을 감상 대상인 예술품이 아니라 
신의 세계가 출현한 것으로 여겨 집마다 성소에 걸어두고 기도한다. 

 

십자가에 못박힘

 

아래쪽 감실, 못 박힌 손발에서 피 흘리는 모자이크 이콘 '십자가에 못박힘'을 본다.
교회 이름을 왜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고 붙였을까?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 당한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아마도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외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 플렛홈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은 1955년 11월 15일에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레닌그라드 지하철이라는 이름이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처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이름이 높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도시내 고속 교통 기관에 관한 최초의 계획은 
적어도 1899년에는 존재했으며, 그것은 고가식 철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졌고 계획은 10년 이상 나오지 않았다. 
1935년 모스크바 지하철의 개통을 계기로 1930년대 후반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건설 계획은 다시 부상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하 구조물 굴착은 
지하수와 지하 동굴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플렛홈 붉은 모자이크 벽을 배경으로 인증샷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적인 지하철망의 역사는 주요 철도의 터미널역을 
모두 연결하는 노선 건설이 시작된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계획은 지연되었고, 이 노선은 1955년 11월 15일에 개통되었다. 
당초 구간에는 7개 역이 있으며, 몇 달 후에 8번째 역인 푸시킨스카야 역이 개통되었다. 
이 구간은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일부가 되어, 
시 중심부 모스크바와의 열차가 발착하는 역인 모스크바 역과 
시의 남서부에 있는 키롭스키 공업 지대를 연결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계속해서 북쪽으로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58년에는 네바강을 통과하는 구간이 개통되었고, 
나아가 197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주택 개발이 진행되던 
북쪽 구간을 연결하기 위하여 비보륵스키 지구까지 건설되었다. 
1978년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레닌그라드주까지 연장되었다.

 

100 미터가 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친 지질은 종종 지하철 건설공사를 방해했다. 
최악의 사례는 1970년대에 진행된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터널 구간 공사 
도중에 일어났는데 이는 네바강 지하에 동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터널을 완성했지만, 1995년에 이 구간의 터널은 폐쇄할 수밖에 없었고 
레스나야 역-플로샤치 무제스토바 역 구간은 한동안 침수된 상태로 있었다. 
9년 이상 동안 이 노선의 이북 구간은 지하철망 이외의 구간에서 물리적으로 분할되었고, 
2004년 6월에 새로운 터널이 개통되면서 원래대로 회귀했다.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사

2008년에는 프라보베레즈나야 선의 일부가 분할되면서 
새로운 5번째 노선인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 선이 되었다.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선은 북부에 위치한 프리모르스키 지구와 
남부에 위치한 프룬첸스키 지구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현재는 총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 동상

도스토옙스카야 역 앞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의 동상이다.
러시아문학의 대표자이며 예언자, 선각자, 심리학자, 잔인한 재능을 지닌 시인 
등으로 불려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의 구제병원 
부속관사에서 군의관을 아버지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상당히 엄격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조용한 성격이었고 독서를 무척 즐겼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세습사족으로 그런대로 살만은 하였다. 
13세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15살 때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17세때 그의 영지에서 농노에 살해당한다.

1847년초,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어느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그의 방에 웬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페트라 셰프스키서클’ 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정치적 불안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잠재적인 반체제단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이 넉달이나 이어진 끝에, 
페트라 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에게 전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던 12월의 어느날 아침, 간수들이 스물 여덟 살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어딘가로 끌고가 일렬로 세웠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열 여섯 명의 사수(射手)들이 있었다. 
곧 이어 죄수들은 명령에 따라 세 명 씩 짝을 이뤄 나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될 세 명에게 두건이 씌워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속한 무리는 다음 차례였다. 
집행관의 우렁찬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장전! 조준!”

뒤이어 정적이 흘렀다. 
“발사!” 신호는 없었다. 
대신 특사가 가져온 황제의 새 명령문이 큰소리로 낭독되었다.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되, 사형대신 장기간 복역형을 명하노라!”

이 극적인 상황은 전부 니콜라이 1세가 꾸민 일이었다. 
그들이 죄의 무게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간 후에 형량을 감해 준 것이다. 
얼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1850년 1월부터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 처럼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운 순간, 
작가의 뇌리를 스친 문학적 영감이 어두운 감방에 한줄기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빛은 훗날 <죄와 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  동상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이미 
‘범죄의 고백’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지만,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알맞은 실존 인물을 우연히 알게 된 덕이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 (Vremya 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데 주력하는, 
자그마치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삿거리를 찾아 프랑스의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프랑수아 라스네르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는 주먹다짐을 하던 상대가 죽어버린 일을 계기로 본인이 타고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죽어버린 상대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듯 성취감마저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관심사를 시 쓰기로 돌렸지만, 

시인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 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범죄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쇠 창살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방이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의 사연에 매료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네르를 모델로 
<죄와 벌>의 타락한 주인공으로 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버는 수단으로 치부하고, 
둘 다 죄질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보다 작가 자신이 훨씬 더 전문가였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블라디미르 광장을 끼고 돌아가면 쿠드네치니 (Kuznetsjny Pereulok) 골목 5번가
모퉁이에응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 생을 살았던 집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났을지언정 나약한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이 곧 <죄와 벌>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단편들이, 
‘파산의 충격’으로 한데 모여 하나의 이야기 틀로 짜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 
물론 돈이 절실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꺾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갑자기 어느덧 꽤많은 분량으로 늘어난 <죄와 벌> 원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줄거리가 내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그때까지 쓴 원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전했다. 
과연 작가의 본능은 옳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펜이 종잇장 위를 
훨훨 날듯이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866년 1월, <죄와 벌> 제1부가 
<러스키베스트니크 (RuskiiVestnik)>에 실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 작품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러스키베스트니크>는 12개월 동안 <죄와 벌>을 연재했고, 
그동안 정기 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특수를 누렸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인 1867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직전 황제의 특사로 4년 징역과 
4년의 병역 복무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배지 옴스크로 호송되는 중에
성서를 선물받아 유형지에서 탐독하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뀐다.
그의 인생관은 이 춥고 고독한 유형지에서 완성되고 이 경험은 <죄와 벌>에서 묘사된다.

그는 젊은 시절의 무신론에서 벗어나 윤리적 이상과 고난을 통한 구원 등을 확신하게 되고
열악한 환경과 다른 죄수들로부터 적대감과 따돌림을 당하는 등 그가 겪은 심리적 고통
또한 성경을 통한 새로운 인생의 변화 등이 그의 작품 속에 잘 나타난다.
온갖 부류의 죄수를 통한 러시아 민중의 실체를 깨닫고 

인간 행태에 대한 작가적 통찰력을 키우게 된다.

이 시기의 고통으로 간질을 앓게 되어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1854년 옴스크에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몽고 근처 세미 팔라틴스크의 

보병대대에 배치되고 36세에 하급관리 미망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마리아는 알코올 중독자인 하급관리의 아내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이긴 하지만 

서른 나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남편 있는 마리아를 사랑하는 데 이 여자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관심조차 없다가 미망인이 되고 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하급장교가 되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등 뻔뻔스런 여인이었다. 
하물며 결혼 전날 밤에도 마리아는 다른 남자와 함께 지냈다고도 한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자와 일주일에 두 번 씩이나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그들의 생활은 힘든 삶으로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185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폐렴을 앓던 마리아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허가를 받게 되고 1864년 아내 마리아가 죽고 경제적 후원자인

동생마저 죽자 재정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41~42세 때 당시 동료 남학생에 바람맞은 여대생

폴리나를 만나 함께 여행다니면서 별의 별 애정 행각을 다 벌이면서 여전히 도박에 빠진다.

 

특히 도박 롤렛을 좋아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년 간 채권자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44세까지 여행과 도박에 미쳐 빈털터리가 되고 폴리나는 그에 질려서 청혼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폴리나를 만나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1866년 악덕 출판업자와 불리한 계약을 하게 된다. 
계약 내용은 어리석게도 한 달 안에 새 장편소설을 완성해서

원고를 넘겨주지 않으면 모든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기로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도스토예스키 기념관은 넵스키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그의 탄생일에는 각종 축제가 열리고 또한 작품의 무대를 순례하는 
애독자 관광객들의 행렬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표작 <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이나 

S골목(Stolyarnyi Lane) 하숙집, K다리 (Kokushikin Bridge)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가와 동시대를 교감해 울림을 맛보는 것이다.

간질과 빈곤 두 가지 재앙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 대작가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금전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민 끝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라는 속기사를 고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구술하고 안나는 그것을 속기로 받아 적는다. 
작업은 놀랍게도 26일 만에 끝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소설<도박꾼 The Gambler>이다.

1866년 <죄와 벌>,  1869년 <백치> 1872년 <악령> 등을 완성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73년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지막 소설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을 발표하고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바로 이 기념관에서 60세의 나이로 폐동맥 재출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작가와 속기사의 관계로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서로 사랑을 느끼고 결혼까지 이른다. 
속기사에서 대문호의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중에 회고록을 남기게 되는데, 책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중년부터 말년까지 14년 동안의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남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다음의 삽화는 특히 정겹다. 

안나가 임신을 하자 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라도 산파를 부르러

갈 수 있도록 미리 길을 익히기 위해 매일 산파의 집까지 산책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신심깊은 사제의 집에 찾아가 통곡하며 그녀없인 살수 없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대작가의 진솔하고 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입장권 매표소

안나와의 결혼 피로연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증세가 나타나 
‘사람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악마의 포효소리’를 안나의 가족들이 듣고 도망치지만 
안나 역시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안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더우기 안나의 신혼 집은 절대 빈곤할 뿐만 아니라 전처의 자식, 친구의 아들, 
조카 등이 들끓었고 남편의 지독한 도박광으로 안나의 결혼반지까지 저당 잡혀가며 
도박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안나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늘이 맺여준 인연인가 보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 풍토는 남녀 교제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혼도 쉬웠지만 어떤 고난과 시련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스물 다섯이나 많은 도박꾼에 간질병자인 남편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차남은 54세 때 늦게 보았지만 아버지의 간질 유전으로 세살 때 죽고 만다.

 

짐 보관소

세상에 남편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숭고한 여인도 많지만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그녀도 결혼 반년 만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곁에서 오랫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보좌해 지켜줌으로 
작가의 천재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게 되고 위대한 작품이 탄생된 것이다.
화를 내다가도 상대의 심정을 미리 이해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의 희생이며 그를 위대한 작가로 탄생시킨 길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런 안나의 희생을 알고 있었던지
“나의 모든 미래는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행복이며 축복이오”
“나는 늘 꿈속에서 당신과 키스하고 있소. 당신의 몸에서 내 입술을 떼지 않고...”
이렇게 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인증샷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을 한 날에는 죄책감에 아내에게 꾸짖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맹세하고도 끊지 못했던 도박, 어김없이 다음날에 도박장에서 
망연자실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곤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했던 그 가혹한 세월에 안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밤이 새도록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그의 순결한 영혼만을 사랑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지는 않았을까?
남편이 사망한 후 38년 정도를 더 살았던 안나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대한 추억으로 그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인증샷

 

도스트예프스키 외모는 어땠을까?
“그는 보잘것없는 외모에다 사소 무뚝뚝하며 수염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여위어 있고 오른쪽 빰에는 사마귀가 나 있었다. 
의심과 불신으로 때때로 불타오르는 눈은 슬픈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두 눈에 깊은 생각과 번민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괴기스런 극도로 부자연스런 흉측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에 더 놀랐을 여인들이지만 그녀는 그 곁에 남아 있었다..

과거의 불행을 한방에 날릴 도스트예프스키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은 헌신적인 안나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가 없이도 존재했지만 

개인으로서 그는 안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 위대성은 고난과 고뇌와 불우한 환경에서 더 현실적인 위대함이 탄생될 수 있다.
예술의 가장 위대한 원천은 사랑이다. 
한없이 부어주는 사랑과 그 단절 속에 갈증이 샘물같은 예술의 원천이 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의 문학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영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첬고 
많은 인물들에게 천재 또는 위대한 작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1878년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가 열린 솔랴노이 고로독이 그 장소였다. 
당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동행이었던 비평가 니콜라이 스트라호프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소개시키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부탁 때문에 그를 자신의 친구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스트라호프를 원망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사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은 톨스토이 역시 그 강의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그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후배 작가 톨스토이에게 강한 열등감이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감탄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 무결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는 톨스토이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태생도 백작 가문 출신이라 느긋하게 
퇴고를 할 수 있으니, 속기사까지 불러가며 작품을 재빨리 완성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에서는 톨스토이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톨스토이도 나이가 들면서 사상적인 변화가 있었고 
급기야 자기가 썼던 대작들조차 셀프 디스하던 회심(回心) 시기에 접어든다. 
이때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모든 문학서를 불살라 버려도 상관없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모두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악령>을 읽고 감탄했다고도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을 때 
그의 침대 곁에 놓여 있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말년에는 서로에 대해 존경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된 것 같다. 
서로의 작품에서 각자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후반부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 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후반부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19세기 센나야광장은 죄와 벌의 무대
이 그림은 <죄와 벌> 거의 백년 후의 작품인데, 분위기가 내용과 잘 어울린다.

차가운 족쇄가 도스트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야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고 4년을 보낸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인물이 겪고 느끼는 일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는 반드시 살아 남아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계단은 죄와 벌 주인공의 하숙집.

훗날 작가는 <죄와 벌>이 이 감옥에서 지은 이야기라고 전하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 회고했다. 

 

감옥 생활을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그 동기에 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기념관 3층
3층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겸 집필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
그리고 탈진한 작가는 이곳 소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재 겸 집필실 - 그가 죽은 1월 28일 8시 38분에 시계는 멈춰 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트에서 28년을 살면서
주소를 스무 번이나 바꾸었다.
그는 이 도시를 많이 산책하고 여행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도시에서 느낀 것을 자신의 작품에 아낌없이 반영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첫 대작은 <죄와 벌>인데 여기 사람들은 이 소설을
페테르부르크의 소설가가 쓴 페테르부르크의 소설이라고 부른다.

 

거실
소박한 거실 테이블 위에는 작가가 생전에 소장했던 담배곽이 놓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용하던 담배곽

 

다이닝룸

 

가족 사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안나가 썼던 책상, 커텐 뒤에서 찰랑이는 빛을 받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는 작가와 속기사로 처음 만났다. 
안나는 당시 속기 교육을 받아 처음 일을 시작하는 단계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빚 때문에 빠듯한 마감 안에 원고를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탈고를 그들은 멋지게 해냈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가난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건강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로서 그 문제들을 극복해나가며 
14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안나의 회고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했던 행복과 고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한 작품을 읽을 때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이 쓰일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을 함께 놓고 보면 더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안나의 회고록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엿보게 해준다. 
가족과 빈민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재산을 내주고, 
욱하는 성격에 질투가 강하면서 마음은 무척 여린, 
도박을 좋아하면서 작가로서 성실함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들. 

아내인 안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서술한 그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해서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노름을 위해 기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안나는 오히려 찢어질듯한 가난과 빚 독촉으로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를 존경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평가할 때 그가 놓인 경제적, 
정신적 고난을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회고록에도 담겨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문단과 사회에서는 자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다른 재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너저분하게 쌓인 잡동사니 더미인 반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잘 다듬어져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난하곤 했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살았던 여건과 작업 환경을 남편의 환경과 비교하거나 
그런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은 거의 대부분 건강하고 유복한 사람들로서 
자기 작품을 충분히 구상하고 다듬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가지 힘든 질병에 시달렸고, 대가족과 빚을 짊어지고 있었으며, 
내일에 대한, 절박한 빵에 대한 괴로운 생각에 짓눌린 사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 작품을 다듬는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2, 3장은 이미 잡지에 실렸고, 4장은 인쇄에 들어갔고, 
5장은 우편으로 <러시아 통보>에 보냈는데, 나머지는 아직 쓰지도 못한 채 구상만 하고 있는

그런 피말리는 경우가 그의 생애 마지막 14년 동안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자기 소설을 읽다가 
한순간 잘못 쓴 부분이 확연히 눈에 들어와 자신의 애초 구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에 빠진 적이 너무 많았다.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하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수정할 수만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글이 잘 안 풀렸는지, 
내 소설이 왜 성공하지 못할 지 이제야 보이는군. 
어쩌면 이 실수로 내 ‘사상’을 완전히 죽인 셈인지 몰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안나는 결혼 후에도 속기로 그의 집필을 도우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그의 손님을 환대하고 
채무업자들을 상대하는 등 남편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빚에 허덕이는 가계 관리를 도맡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수입을 늘리기 위해 출판사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러시아 최초의 도전적인 직업 여성으로 안나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들은 쓰여지기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가정을 지켜내는 아내이면서 작가의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자신의 작가 활동에 미치는 안나의 영향력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안나의 회고록을 읽어본다면 그녀는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켜주고 배려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의해 서술된 도스토예프스키를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책상에 놓여있는 노트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그녀가 관리했던 서적의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 책상에 앉아 왼편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입구가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중에 굳게 닫힌 문을 종종 바라보았을게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채우고서. 


신혼초 안나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나에게 매달려 울면서 몽땅 잃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비참한 몰골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그를 껴안고 ‘울지 말아요’하고 달랬지만 그는 
‘나 같은 놈은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하고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조의 여왕,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 <백치>, <도박꾼>,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은 
안나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60세에 폐기종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안나는 아내로서, 
독순술(讀脣術)까지 동원한 속기사 비서로서, 출판 동업자로서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를 찬미하는데 헌신했다.

 

딸 류보프의 방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내 안나의 둘째 딸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Lyubov Fyodorovna Dostoevskaya 1869~1926).
이들의 첫 번째 딸 소냐는 1868년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했다.

류보프는 결혼하지 않았다. 
나중에 류보프는 어머니와 멀어지고 1913년 치료를 위해 해외로 여행한 후  
1926년 이탈리아에서 악성 빈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린 시절

 

이 방은 세면실이라고 되어 있던 듯

 

기념관 2층
기념관 2층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작품 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전시된 전시물들은 LED 조명 처리로 아주 보기 편하게 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드 마스크(Death mask)가 인상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육필 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죄와 벌>의 육필 원고
작가 생전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작품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곳곳을 잘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것은 기념 문학관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둠 속에서 인증샷을 해 본다.

 

도박광 도스토예프스키를 상징하는 도박용품까지 전시되어 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 사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러시아의 저명시인 네크라소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 여성들의 힘은 추위와 굶주림, 무엇보다 무능한 남자들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기구한 숙명에서 온 것이다.”라고.

그녀에게서 과거 한국 여인의 ‘종부상(從夫像)’을 떠올린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숨을 거둘 때 판명난다고 한다. 
작가의 기념관은 고증은 잘 되어 있었지만 세계적 대작가 기념관 치고는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쪼들리며 살았고, 미완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죽어 간 곳이기 때문에 의미는 각별했다. 
그때 그대로 작은 대문에 반지하 형태의 집에 문구류 역시 그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안나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영상] Dostoyevsky Museum in Saint Petersburg

 

 

 

Room of Auguste Rod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1917)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어머니 메리 체퍼와 경찰청 사무원이었던 
아버지 진 밥티스트 로댕 사이에서 출생했다. 
로댕은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이 전문화된 프티 에콜(Petite École)

이라는 학교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했다. 

로댕은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Horace Lecoq de Boisbaudran)으로부터 
드로잉을 비롯한 미술 교육을 받았다.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그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그리는 것이 학생들의 인격을 발전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Eternal spring, early 1900s.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조각 "영원한 봄 (Eternal spring)"은 "지옥의 문"이라고 불리는 파리 장식 및 
응용 예술 박물관의 미완성 정문의 구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 복잡한 작품의 구성 중 하나인 "키스(The Kiss)" 조각과 주제 면에서 인접해 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제퍼와 지구(Zephyr and the Earth)" 또는 "젊음(Youth)"이라고 불렸다. 

연인의 이미지는 젊은 마음에 떠오른 감정을 의인화한다. 
로댕은 석재 가공의 특별한 방법을 적용했다. 
오목한 부분에서 대리석을 완전히 선택하지 않고 형태를 일반화했다. 
결과적으로 인물은 모호한 윤곽을 얻고 약간 빛을 투과하는 대리석의 흰색 층은 
사랑 장면의 순수함과 순결한 인상을 준다.

 

Cupid and Psyche, 1905.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2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장난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었던 에로스가 
처음으로 너무나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인간 여인인 
프쉬케 (Psyche, 영혼을 의미)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1857년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를 모델로 만든 찰흙작품을 제출하지만 입학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두 작품을 더 제출했지만 그마저도 거부되었다. 
그랜드 에콜에 입학하기 위한 요청사항이 그 당시 높지 않았는데도 
입학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로댕은 심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들이 거부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판정가들이 
로댕의 새로운 감각적인 조각품들보다는 신고전주의적인 
작품들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1857년 로댕은 프티 에콜을 떠나게 된다. 
그 후에는 생활비를 위하여 조각가의 조수 등을 지냈는데, 
이는 오히려 관학의 형식주의적 타락을 막아주는 결과가 되었다. 
20여 년간을 장식품들과 건축장식들을 제출하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살았다.

24세 때 최초의 걸작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862년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Maria)가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혼자를 소개해 주었던 로댕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로댕은 결국 조각을 그만두고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을 가졌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 
신부는 로댕이 다시 조각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데이말드 신부가 보기에 로댕은 교회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조각을 하는 게 맞는 사람이었다. 

 

Romeo and Juliet, 1905.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7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은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동물 조각가였던 
앙투안루이 바리(Antoine-Louis Barye)의 수업에 참여했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바리의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75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의 의미가 있으며, 〈청동 시대〉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ène Beuret)을 
낳았으며,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 건물 장식들을 만들며 미술활동을 계속했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했다. 

 

Poet and muse, early 1900s.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의 연인은 카미유 클로델이다.
1881~1882년 로댕은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작가인 
카미유 클로델(작가 콜로델의 누이동생)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자가 되었지만,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을 당한다. 

1900년에 로댕은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다.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들어 조각계에는 뤼드나 바리, 카르포 등이 등장했으나, 
조각은 여전히 회화에 종속되어 있어, 이 3인의 출현도 
아카데믹한 경향에 저항하는 소수의 움직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각의 고정관념을 근저로부터 깨고 새로운 전도(前途)를 개척하여 
조각에 대한 인식을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로댕의 제작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생활에 쫓겨서 조각작품의 발표가 늦어졌다. 

 

Bronze Age, between 1877 and 1914. by Auguste Rodin. gypsum, height 1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이 최초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청동시대(靑銅時代 1896)〉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의 대상이었다. 
심사원은 그 생생한 청년상을 보고 산 사람을 방불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을 다한 로댕의 오랜 기간의 탐구와 관찰로 이루어진 것으로, 
조각을 하나의 형(型)에 따라 제작하는 사람이나, 
고정된 미(美)의 관념으로 보는 사람은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포착하고 생각한 인간상을 
한 사람의 청년의 육체를 통해 생명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로댕은 시종 기성관념과 충돌하여 가지만, 그는 살아 있는 것같이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 속에 산 인간을 놓고 생명의 상호 접촉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빛과 그늘의 역할을 아주 크게 비약케 하여 
조각의 면(面)이나 요철(凹凸)을 내적 생동에 결합시키고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여 초인적인 노력으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였다. 
인상(人像)은 외치고, 두려워하고, 노호하면서,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 모습을 보여 약동의 분방성(奔放性)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창조된 것은 기왕에 걸쳐 있던 건조의 구렁으로부터 
끌어 내어 점토에 살아 있는 언어를 부여했다. 
더욱이 만년에는 〈발자크 상(像)〉(1898)을 발표하여 더 한층 물의를 자아냈다. 

그것은 문호(文豪)가 잠옷 바람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데, 이 제작은 부분을 떠나 
조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조형하여 모든 것을 내부에 포함시켜 
외면의 묘사로서는 불가능한 내면적인 웅대성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조각 분야에 다시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로댕은 전생애를 통해 조각에는 별재(別在)하는 웅변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표현의 방법을 모조리 개선하여, 
조각을 근대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이다.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1907년 <걷는 사람>, 
1913년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써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Auguste Rod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438~440번 홀은 20세기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는 20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회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판화, 조각 분야에서도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색채의 마법사’로 통할 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감각으로 색을 사용했다. 
20세기 초반 야수파 운동을 주도하며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는 마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늘 경쟁의식을 느꼈다.

1869년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고향에서 서기로 일했다. 
스무 살 되던 해 맹장염 수술을 받고 요양하던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이웃 사람의 권유로 풍경화를 그리면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1891년 파리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이듬해 저명한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모로는 당시 고전주의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이 공존했던 프랑스 미술계의 다리 같은 존재였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고전주의적 화풍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화법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실험했다. 
1895년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하여 학교를 다니면서도 1898년까지 모로에게 그림을 배웠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05년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고 
둘은 색과 빛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5년 그들의 전시회를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은 그들의 그림을 혹평하며 
‘야수(Les Fauves)’와 같다고 조롱했고 이후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다. 

1905년 거트루드 스타인의 소개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났고 친구이자 라이벌로 평생 교류했다. 
두 예술가는 서로 영향을 받으며 폴 세잔 이후 현대 미술의 양대 축을 이룬 예술가로 성장한다. 
1906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와 이국적인 조형물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영향은 이후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1907년부터는 과감한 색채가 특징인 야수파 스타일을 버리고 장식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아울러 회화에서 인체 형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조각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징병을 면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 당시 그린 그림에서는 마티스 특유의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 대신 우울하고 칙칙한 무채색 톤의 그림을 그렸다. 
1917년에 파리를 떠나 니스로 거처를 옮겼고, 더욱 강렬하고 대비가 두드러지는 색채를 사용했다. 
1925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30년대 이후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이 과거를 답습한다는 느낌을 받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히티, 미국 등지를 여행했고, 직물 디자인, 유리 공예, 

책 삽화, 성당 벽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했다. 
1939년 부인과의 이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은 예민한 예술가였던 그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고 급기야 1941년에는 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안락의자나 침대에 누워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 작품을 만들었다. 
색종이 작품으로 사물의 본질적인 면을 표현하면서 그의 예술 세계는 더욱 풍부해졌다. 
말년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남부 로제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색종이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954년 그가 37년 동안 살았던 니스에서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니스에 마티스 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 · 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재혼을 하여 약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시작하면서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동비중(同比重) · 순일(純一) · 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 정밀(靜謐)· 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은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으로 평가된다.

 

Dance, 1909~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260 x 39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러시아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슈츄킨은 마티스가 파격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프랑스에 유명해지기 전까지 열렬히 후원해주던 사람이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
라고 말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는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한편, 쫙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지점에는 
마티스가 불어넣은 역동적인 긴장감이 감돈다. 
선, 색채, 형태의 혁명적 적용을 달성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본능적이고 근원에 가까운 행위를 다룬 이 작품은 
2006년 말 영국 가디언 신문에서 '죽기 전에 봐야할 그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두 개의 장대한 짝을 이루는 패널 "Dance"와 "Music"은 마티스가 
1908~1913년 사이에 제작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5 개의 인물은 명확하게 윤곽이 그려져 있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변형은 열정적인 흥분과 모든 것을 소비하는 리듬의 힘을 표현한 것이다. 
빠른 관절 운동은 불굴의 활력으로 몸을 채운다. 
그리고 "약간 밀도가 다른" 붉은 ​​색은 내부 열의 상징이 된다. 
물들은 코스모스의 진한 파란색에서 춤을 춘다. 
푸른 언덕은 무용수들의 에너지로 가득차 있으며 발 아래로 떨어지고 탄력적으로 솟아 오른다. 

그러나 캔버스의 구성에서 볼 때 마티스는 "댄스"에서 

줄거리의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여 표현하고 있다. 
논리와 비례감은 본능과 의식을 조화로운 전체로 통합한다. 
그것은 또한 그림에서 작용하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에 있다.

 

Music,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260 x 3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40

 

'음악(Music)'은 1910년에 그린 '춤(Dance)'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마티스는 예비 스케치 없이 '음악'을 커다란 캔버스에 작업했다. 
구성을 여러번 다시 생각한 흔적이 캔버스에 변형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화가의 열정처럼 완전한 창작의 몰입에 빠져 있다.

'음악'은 춤과 동일한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녹색, 빨강, 파랑의 동일한 표현의 조화이다. 
음악가와 가수의 단순화된 다섯 명의 인물은 춤에서도 일치한다. 
'춤'에서 인간은 지상과 하늘을 동시에 향유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언덕을 올라간다.  
일상에서 벗어나 시공의 바깥에 존재하는 상징화된 이미지이다. 
반면 '음악'은 응축된 고요와 고립된 인물들의 절대적 부동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악기 연주 및 노래에 대한 총체적 집중은 감상자를 몰입하게 하고 놀라게 한다. 
열린 입은 공명을 발하는 것 같다. 

노래 부르는 인물들에서 감상자는 인간의 목소리를 육체적으로 경험한다. 
악보의 표기처럼 배치된 인물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몰입하고 있다. 
음악으로 전체가 하나로 묶여 있는 공간은 단지 캔버스 안의 세계만이 아니다.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미지의 세계이며 구현 가능한 세계이다. 
음악으로 조화로운 세계이며, 춤으로 함께 하는 세계. 

춤 작품에 매우 만족한 슈추킨이 다음으로 주문한 것이 음악이다. 
보통 마티스와 피카소는 비교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마티스의 그림은 사물을 자신의 감성대로 최대한 표현하려고 했다면, 
피카소의 그림은 비판, 분석으로 사물 자체보다는 은유로 바꾸어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는 사물을 기억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Bowling,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15 x 1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에서는 세 명의 청년, 아마도 마티스의 아들과 조카가 공놀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쇠로 된 공을 교대로 굴리며 표적을 맞추는 놀이에서 마치 
그의 대표작인 춤(Dance)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마티스는 게임을 인간의 창의성의 표현이자 삶의 코드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본다. 

보색 관계를 교묘히 살려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진다. 
청결한 색면 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확고한 자기만의 예술을 구축해 나간다. 
누군가 그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침내 그의 경쟁자이던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지침이 되어 그 성격을 결정지었다.

 

Nymph and satyr,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요정과 사티로스(Nymph and Satyr)"에서 마티스는 자연의 배경에 알몸을 그린다. 
언덕은 부드럽게 하늘로 올라가고 맑고 빛나는 지구의 색은 아쿠아 마린 물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녹색-파란색 톤의 세계에 마티스는 두 가지 선명한 색상 악센트를 도입했다. 
분홍색(님프의 몸 색깔)과 붉은 색 (사티로스 satyr)이다. 

인물의 수를 2개로 줄였고 마티스는 다시 두 개의 아치형 인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생성된 하모니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큰 손을 뻗은 

의도적인 남성 인물의 접근 방식에 의해 더욱 위협적이 되었다. 
여성 인물이 잠든 것처럼 보이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누락되었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솔직한 에로티시즘은 예술가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림의 주제는 아폴로와 다프네, 판과 시린가의 고대 신화를 떠올리게 하며, 
열정과 탈출이라는 두 성별의 영원한 반대를 담고 있다.

 

Fruits, flowers, panel 'Dance',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5 x 1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마티스는 그림의 깊이로 빠르게 멀어지는 각도에 

테이블을 펼치고 이젤에 설치된 대형 패널 "춤(Dance)"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로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패널 "춤(Dance)"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림의 에너지 센터 ​​중 하나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Dionysian thyrsus를 연상시키는 긴 꽃 줄기의 힘에 해당한다. 
테이블, 패널, 들것, 바닥의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평면은 

수직, 대각선, 수평의 롤 뿐만 아니라 색상 반점에 의해서도 상호 작용하여 

마티스가 가치 있는 논리와 선명도를 그림 구성에 가져온다.

 

Moroccan Amido,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61.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모로코를 처음 여행했을 때 그린 것이다. 
모로코 아미도(Moroccan Amido)에는 일반적인 동양적 이국주의도, 

민족주의적인 요소도 없지만 모델의 자연스러운 용이함, 

태양으로부터의 축복을 생각하는 기쁨이 있다. 

빛으로 가득 찬 색, 탕헤르 호텔에서 포즈를 취하는 10대 신랑은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그의 긴 다리가 있는 경쾌한 인물은 마티스가 설정한 캔버스의 좁은 형식에 자유롭게 들어 맞아 
청년의 마른 구조와 그림의 공간을 구성하는 컬러 평면의 강조된 수직 리듬을 모두 충족시킨다. 
마티스는 그을린 피부, 하얗게 빛나는 셔츠와 조끼, 짧은 바지의 순수한 색 반점을 포착한다. 
아미도의 몸매는 볼륨감과 무게감이 동시에 가볍고 약간 비대칭적이며 
마티스가 공간에 배치해 역동성을 만들어 낸다. 

 

Standing Zora,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13년 마티스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모로코 그림 여러 점이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 컬렉션에 등장했다. 
그중에서 "스탠딩 조라(Standing Zora)"는 1912년 말 
모로코를 두 번째로 여행하는 동안 마티스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모로코 아미도"(Hermitage)와 한 쌍으로 구상되어 그려졌다. 
두 그림은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 소리에서 "Standing Zora"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림의 구성과 색상 등 전체 구조는 작가가 받은 깊은 인상을 보여준다. 
마티스 방식의 인상은 "Standing Zora"에서 변형되었으며 
아티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은 신비한 동양의 표시가 되었다. 

그림의 공간은 캔버스의 평면을 따랐다. 
짙은 녹색 로브를 입은 조라 초상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매우 밝은 진홍색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눈에 띈다. 
검은색 장식 점선이 있는 흰색 테두리는 거의 균일한 색점으로 
리드미컬한 분해를 도입하고 미묘한 느낌을 향상시킨다. 
매혹적인 색의 마법,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아몬드 모양의 눈을 멈춘 시선의 요술 등 
모든 것이 외국 문화의 위대한 비밀을 구현하여 마티스에게 강력한 창조적 충동을 부여한다.

 

 Standing Moroccan in green clothe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9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말 두 번째 모로코를 여행하는 동안 그렸다. 
모델로 거무스름하고 넓은 어깨를 가진 밝은 녹색의 옷을 입은 남자를 묘사한다. 
평등하고 엄숙한 부동성은 캔버스의 전면을 거의 완전히 채우는 
엄격하게 정면으로 설정된 인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상한 방식으로, 아랍의 이 위엄있는 인물에는 어떤 애매함이 있는 것 같다. 

그림은 녹색, 파란색, 분홍색 황토색과 같은 빛나는 색상으로 구체화되며 
가볍고 투명한 캔버스 레이어가 흰색 바탕에 놓여 있다. 
그림의 차가운 색조는 마치 뜨거운 공기 속의 오아시스의 신기루, 
훅하면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다. 
구성 라인의 역할이 최소화되어 눈의 윤곽이 그려지고, 
입과 코, 버너스 후드의 윤곽이 그려진다.

 

Bouquet of flowers. Calla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10월부터 1913년 2월까지 

두 번째로 모로코를 여행 할 때 그렸다.
정물, 인테리어, 풍경이 포함된 이 구성은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녹색과 회색-청색 톤의 대비는 신중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부드럽게 빛나는 노란색과 함께 희미한 햇살을 연출한다. 
마티스는 채색되지 않은 흰색 영역과 색상 패치를 번갈아 표시한다. 
마티스는 전체 그림의 밝은 색상 구조와 일치하는 스모키 그레이 색상의 
가볍고 정확한 윤곽선으로 쌀쌀하고 세련된 꽃의 윤곽을 그린다.

 

Family portrait 가족 초상화, 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3 x 19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Arab coffee shop, 1913. by Henri Matisse. glue paints on canvas, 176 x 21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아랍 커피 숍(Arabian Coffee House)"은 모로코 연작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이다. 
마티스가 1913년 초 제작한 이 작품은 같은 해 4월 그림에 포함된 
명상적 성격을 미묘하게 감지한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이 구입했다. 
이 작품에서는 절대적인 내면의 침묵, 자신의 몸의 느낌을 잃어버린 
움직이지 않는 인물들의 명상적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붕어가 있는 어항과 뒤편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극히 평온한 상태...
마티스가 항상 추구하던 이 평화로운 공간은 따뜻한 색상의 황토색과 
핑크, 파스텔톤의 청록색과 연회색으로 조화시킨다.
형태는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동양적인 곡선의 형태는 남겨 놓는다.
간결한 마티스의 동양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표현이 구체화되었다. 
현실과 관습의 교차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세상은 높은 시학과 평화를 발견한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13.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 x 9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마티스 아내의 초상화는 1913년 여름 파리 근교 자신의 집 정원에서 그려졌다. 
아내 아밀리(Amelie)는 우아하고 캐주얼하며 동시에 
녹색 정원 의자에서 남편을 위해 포즈를 취한다. 
마티스는 자세를 표현하는 데 있어 표현적으로 정확하며 옷의 완벽한 맛을 강조한다. 
그림을 만드는 동안 작가는 의식적인 세속적 초상화의 
전통적인 계획을 사용했지만 완전히 색다른 소리로 채웠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다른 현실이다. 

아내 아밀리(Amelie)의 얼굴은 녹색 그림자에 잠겨 있다. 
단단하게 짜여진 회로도 기능으로 간결하게 윤곽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 가면은 모델의 내부 본질을 숨길 뿐만 아니라 
마음의 명료성과 논리를 거스르는 비밀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녀의 생생한 긴장감과 조화를 이루고 신비하게 교란하며, 
전체적으로 퍼지는 파란색과 파란색-검정색 톤의 그림, 내부에는 밝은 녹색이 있다. 
1914년 "예술가의 아내 초상화"는 S. I. Shchukin 컬렉션에 인수되었다.

 

Conversation, 1908~10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77 x 2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대화(Conversation)"는 1908~1913년에 제작진 마티스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청록색의 구도는 1909년 여름 마티스가 시골집에서 그린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인 마티스와 그의 아내 아밀리(Amelie)는 이미지를 
극도로 단순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의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변화하는 삶의 특정 순간부터 시작하여 마티스는 
"현실에 대해 보다 안정된 해석을 위한 예술가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더 진실하고 깊은 의미를 포착한다" 
고 말한다. (Matisse. "Painter 's Notes")  

잠옷차림의 마티스와 실내복을 입은 아내가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 남편은 높은 위치에 그림 밖으로까지 솟아있는 반면, 
낮은 위치의 아내는 의자 안에 자루같은 가운데 휩싸여서 매우 수동적으로 보인다.
외부의 배경도 남편은 나무와 아내는 연못과 매치된다.  
곧게 뻗은 나무에 비해 3개의 연못은 모두 잘린채 보인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도 파란색이 주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카펫이나 벽의 색상이 아니다.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연관성으로 인해 그 자체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색상은 감정적으로 중요하며 깊이 또한 매혹적이다. 

파란색의 다차원성에 순종하여 녹색은 잔디의 색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표시, 생명의 표시가되며 곧고 강한 나무 줄기인 "생명의 나무"에 의해 강조된다. 
순수한 색의 빛, 이상적인 세계에서 두 가지 
영원한 시작을 구현하는 기호를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반대와 중력에서 직선 (남성적 원리의 논리)과 기발한 곡선 
(예측 불가능, 여성의 감성)은 존재의 신비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리하고 연결하는 주철 격자는 그 그림과 함께 
과거의 불가사의하고 읽을 수 없는 모노그램과 닮았다. 

 

Young woman in a blue blouse (Portrait of L. N. Delectorskaya), 193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5.4 x 2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파란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는 1935~39까지 마티스의 화풍에 
빼 놓을 수 없는 모델이 되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9년에 아내와 결별한 마티스에게 있어 리디아는 더 이상 모델일 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0년부터 리디아는 모델 일에는 거의 손을 떼고, 
아내와 지금으로 치면 관리이사의 역할을 같이 해야 했다.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고 모델의 급료의 지급, 방문자의 선별, 
그리고 아픈 마티스를 위해 간병인의 역할도 도맡아 했다.

 

Portrait of Lydia N. Delektorskaya, 194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4.5 x 4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리디아는 러시아 출신의 골격과 체격이 큰 모델로 마티스를 만나기 전까지 다소 비참한 생활을 했다.
12살에 고아가 되어 파리로 흘러들어 와, 소르본 의대를 다녔지만 돈이 없어 곧 그만두고
상점 점원과 약간의 모델일, 그리고 이것저것 닥치지 않고 생활고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1932년 22살 때 우연히 마티스의 작업실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Blue pot and lemon, 189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9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작품은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보관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1897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인상주의적 비전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들어가는 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에서 그 자체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가 밝은 색상의 통일로 표현된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창에서 은은하게 쏟아지는 빛은 컬러 반사 신경으로 화면의 분위기를 채운다. 
레몬과 파란색 냄비는 색의 본질과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서 소리의 색채가 될 수 있지만 
마티스는 일관되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색을 빛에 종속시킨다. 

 

Sunflowers in a vase, 1898~189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46 x 3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꽃병 속의 해바라기'는 마티스가 툴루즈의 코르시카에서 그린 작품이다.
밝은 남부의 자연과 눈부신 태양의 빛을 만나는 코르시카로의 여행은 
마티스가 변덕스럽고 깜빡이는 인상주의적인 빛 공기 요소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마티스는 마치 세잔처럼 공기를 두껍게 하고 빛과 형태를 강화한다. 
그리고 아마도 우연이 아니라 절단 이미지가 있지만 태양 에너지, 해바라기를 계속 방출한다. 
이 꽃들과 활기 넘치는 반죽의 본질은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Fruit and coffee pot, 189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898년 말에 제작된 이 작품은 부드럽게 시뮬레이션된 과일, 
접시, 컵 등이 밝은 환경에 담겨 있지만 용해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넓은 획이 있는 커피 포트의 정력적인 조각은 
가소성의 느낌을 높이고 색상 윤곽은 각 개체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그림의 색상은 이전 작품에 비해 분명히 더 큰 독립성을 얻고 있다. 
커피 포트 표면의 다채로운 반사 신경의 강도, 식탁보의 짙은 색 그림자,  
이 모든 것이 정물의 색채 사운드를 향상시킨다. 
마티스가 만든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에 덜 의존하게 된다. 

 

Dishes on the table, 190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7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898년에서 1903년 사이에 제작된 대부분의 마티스 작품은 날짜가 없다. 
이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는 서명과 1900년이 적혀 있다. 
작가의 작업 연구자들은 1900년 정물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을 강조한다. 
인상주의에 대한 열정은 과거의 일이다. 

"테이블 위의 접시"에서는 색상의 도움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이 채용된다. 
그림 공간은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구성의 역동적이고 안정적인 요소는 절대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마티스는 차가운 반사 신경에 의해 짙은 청색과 적색의 비율로 그림을 만든다. 
이 칙칙한 색조로 자랑스럽게 서 있는 초콜릿 그릇에 순수하고 빛나는 색상이 빛나고 
흰색 그릇에 이국적인 라일락, 핑크, 블루 반사 신경이 나타난다. 
그림의 축제 성격을 결정하는 색상이다. 

 

Dishes and fruits, 190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1 x 6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접시와 과일"이 제작된 1901년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반 고흐의 회고전이 열렸다. 
반 고흐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색의 선택은 아마도 전시회 방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물화에서 순수한 색은 강렬하다. 

마치 태양의 열을 흡수하는 것처럼 깊고 복잡한 라일락-바이올렛 톤과 
오렌지 주전자의 강력한 코드를 제공한다. 
밝은 빨간색 정강이가 있는 차가운 그늘의 노란색 레몬은 
잘 익은 토마토뿐만 아니라 캔버스의 전체 그림같은 구조에서도 공명한다. 
강렬한 색상, 다이나믹한 스미어는 화면에 활력을 더 해준다.

 

Vase, bottle and fruit, 190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정물화의 첫인상은 캔버스 표면을 지배하는 차분한 색상의 깜박임이다. 
하지만 언제나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림은 감정이자 논리다." 
그림의 공간에 펼쳐지는 활기찬 다이아몬드 모양의 테이블은 안정된 중심을 형성한다. 
과일의 밝고 순수한 색상, 눈에 띄지 않게 드러난 캔버스의 중앙 축 
(우유 용기 및 어두운 병) 및 주변의 물체의 명확한 배열은 
스트로크의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거의 고전적인 선명도를 제공한다. 

엑스레이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마티스가 다른 그림 위에 그렸다. 
어두운 바탕은 정물의 배경을 통해 보여진다. 
마티스는 느슨하게 배치된 흰색 도료, 노란색, 빨간색, 녹색 페인트의 
"흩어진" 장식용 획을 사용하여 이 바닥을 걸었고, 
이것은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검정색 톤에 환상적인 진동을 주었다. 
이 그림은 마티스의 야수파(Fauvist)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Luxembourg garden, 190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9.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901년경 마티스는 룩셈부르크 정원(Luxembourg garden)의 전망과 함께 여러 풍경을 그렸다. 
인상파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작업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특정한 느낌과 논리에 따라 만들어 낸다. 
인상주의적인 매력을 희생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정원(Luxembourg Gardens)의 구성은 큰 색점으로 그려졌다. 
그림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효과가 있다. 
색상은 밝은 가을날의 인상을 준다. 

마티스는 양식을 단순화하고 세부 사항은 생략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데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중요한 것은 주제와 

예술가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 그리고 그가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구성하는 힘"
이라고 마티스는 말했다.

 

Lady on the terrace, 190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8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07년 여름 프랑스 남부의 콜리어(Collioure)에서 그렸다. 
열린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성은 마티스의 아내 아밀리(Amelie)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이 극도로 단순화되었다. 
작가는 컬러 윤곽선으로 윤곽이 잡힌 큰 컬러 평면으로 컴포지션을 만든다. 


그림은 그림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색상과 마찬가지로 캔버스의 리드미컬한 구성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주장한다. 
활기찬 선으로 수평 난간, 물 위의 움직이는 요트, 언덕의 부드러운 모양, 
아내의 품위 있는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마티스는 
삶의 맥박과 엄숙한 평화가 느껴지는 세상을 만든다. 

 

Collioure's view, 1905.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9.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지중해 연안의 남쪽 마을인 콜리어(Collioure)에서 
마티스는 1905년 여름과 1906년 봄과 여름을 보냈다. 
이 작품의 색상은 매우 강렬하다. 
밝은 남쪽 자연의 느낌, 눈부신 햇살이 채색된 그림자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다. 
그것은 기와 지붕을 짓는데 사용되는 주황색, 빨간색, 라일락 분홍색, 
진홍색 점, 태양에 의해 "구워진" 지구, 집의 벽 및 바다 위에 있는 
교회의 종탑의 복잡한 병치에서 발생한다. 

물의 붉은 색과 차가운 파란색의 대비가 더위를 더 해준다. 
덮이지 않은 흰색 흙의 부분은 페인트를 밝게 만들고 캔버스를 여분의 빛으로 채운다. 
1905년 가을에 악명 높은 살롱이 문을 열었고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이 전시한 그림은 
전례없는 개방적인 색감, 단순한 기술, 충동성 등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예술가들은 비평가 복셀에게 그들을 "fauves, wild"라고 부르는 이유를 주었다. 
여기에서 "fauvism(야수파)"이라는 이름이 20세기 예술의 트렌드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야수파의 수명은 1905년에서 1907년까지로 짧았지만 
마티스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예술 장르를 소유하게 되었다. 

 

Dishes and fruits on a red and black carpet, 190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1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906년 봄과 여름, 알제리 비스크라 여행을 마치고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인 콜리우르에서 지내면서 이 정물화를 그렸다.. 
민속 공예가의 작품인 빨간색과 검은색 목도리 깔개는 비스크라(Biskra)의 예술가가 가져왔다. 
양식화된 반복 패턴으로 덮인 밝은 깔개는 캔버스의 거의 전체 면에 걸쳐 펼쳐진다. 


접시와 과일을 그 위에 올려 놓은 마티스는 그것들을 
평평한 공간에 "보관"하여 색이 있는 장식적인 장소로 바꾸려고 한다. 
자랑스러운 유리 용기만이 상대적인 독립성을 보여준다. 
가느다란 모양은 캔버스를 구성하는 직사각형의 "놀이"에 건설적인 수직성을 제공한다.

 

Bouquet (Vase with two handles), 190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74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Bouquet"의 색 구성표는 순수하고 축제적이다. 
그림을 만드는 역동적인 붓놀림이 생생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정물 작업을 할 때 마티스는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에서 진행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자연의 노예적인 복제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방 공간, 일상 생활의 산문적인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사진의 중앙 부분에 집중된 블루톤의 차가움은 이 이웃에 깊이, 
밝은 노란색-오렌지색을 제공하여 화면의 평면을 "유지"한다. 
테이블의 분홍색-진홍색 표면이 이를 확인한다.

 

Seated woman,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0.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작가가 색채, 그림 및 구성 분야에서 발견한 것을 사용하여 
작가가 자연과 어떻게 작업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검은색 윤곽선은 플랫폼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형의 
크고 흠 잡을 데 없이 구성된 인물을 포함한다. 
노란색이 풍부한 아름다운 녹색 색상은 자연스러운 일광 느낌을 만든다. 

명확하고 중단된 윤곽선은 이제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빛이 몸과 상호 작용하여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부피는 빛과 그림자의 비율로 드러난다. 
검은 윤곽선과 검은 그림자는 여성의 몸의 따뜻함을 향상시킨다. 
이 모델은 1908년 마티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Nude woman. Black with gold,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0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모델의 그림을 캔버스의 절대 중심으로 만든다. 
공간의 해답이 완전히 바뀌어 작가는 공기의 착시를 주는 밝은 배경과 내부 요소를 제거한다. 
이 모든 것이 여성 이미지를 상징적이고 중요하게 만들었다. 
주요 변형은 색상에서 발생했다. 
마티스가 인물의 볼륨을 강조하는 검정색과 노란색은 신체의 흑백 발달이 아니다. 
검은색과 노란색의 대담한 대비는 금이 있는 곳에서 
번쩍이는 골동품의 어둡게 패티닝  청동 느낌을 준다.

 

Nude woman,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0.5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앉은 여인(Seated woman)"과 같은 모델을 그린 이 작품은 앞의 그림 
"누드. 블랙 위드 골드(Nude woman. Black with gold)"의 변형이다. 
"앉은 여인(Seated woman)"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델의 모습은 상당히 표시된 공간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티스는 캔버스의 수직의 위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서서 그린다. 
벌거벗은 몸통의 위치, 엉덩이에 천을 잡고 있는 손의 위치는 
그리스의 멀고 영원한 이미지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모델의 몸은 "크레프트 업", 살아 있는 관능미가 떠났고, 
그 비율이 더욱 "클래식"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생성된 이미지에서 명확성을 추구하고 
모델의 얼굴에 약간 눈에 띄는 슬픔으로 채색한다.

 

The Red room,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80.5 x 22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1908년, 회랑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작업장에서 마티스는 
1908~1913년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The Red Room"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유명한 러시아 수집가 세르게 슈츄킨(S. I. Shchukin)의 

모스크바 저택 식당을 위한 것이다. 


마티스는 꽃병, 과일, 꽃으로 방을 장식하는 특성으로 전환했다. 
빨간색과 진홍색 톤의 고급스러운 패브릭, 파란색 패턴의 활기찬 곡선이 벽에서 내려온다. 
그녀는 테이블의 평면을 차지하여 단일 전체를 형성하고 
방의 3 차원 공간을 흡수하며 캔버스 평면의 장식 가능성을 권위있게 주장한다. 


이 기법은 마티스가 이 작품 The Red Room에서 타협없이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붉은색의 평탄함을 확인하면서 그 안에 
꽃병을 휘두르는 여성 인물이 움직일 수있는 공간과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푸른 정원이 열리는 창문의 폭을 연출한다. 

여성의 모습의 부드러운 윤곽, 창 밖의 나무의 부드러운 윤곽과 함께 
일직선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조용하고 침묵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드러난 조화의 밑에 있는 "명확함과 질서"를 긍정한다. 
뒤에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녹색 정원이 열리고 캔버스 깊이로 눈이 움직인다. 
그림의 구성 리듬은 완벽하게 디버깅되고 의미가 있다. 
직물 장식에 존재하는 압력, 성장의 힘은 느낌과 열정에 대한 은유이다. 

 

Still life with a blue tablecloth,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8.5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은 1909년 마티스가 만든 최고의 정물화 중 하나다. 
마티스는 그가 사랑하는 파란색 식탁보를 사용하여 꽃병, 병 및 과일과 
앞의 작품 "The Red Room"에서 변형된 형태로 그렸다. 

 

Lady in green,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여름에 그렸다. 
모델은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등장한 여인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직립 자세, 날씬한 목, 자신감 있는 머리 위치, 달 모양의 타원형 얼굴 등. 
그림의 녹색은 장식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깊고 풍부하며 개발하기 어렵고 수심과 울창한 녹지의 
시원함을 불러 일으켜 신비와 삶의 의인화가 된다. 

그러나 겉보기에 유비쿼터스 그린의 마법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 있고 간결하게 윤곽이 그려져 있으며 완전히 독립적이다. 
밝은 초록색 블라우스, 정확히 그림 중앙에, 전체 이미지를 고정하는 것처럼 
빨간 카네이션-브로치와 같은 유일한 밝은 점이 켜진다. 
젊은 아가씨는 차분하고 엄숙하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검은 눈동자에 약간 신비하다.

 

Girl with tulips,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2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집을 빌린 파리 근처의 이씨 레 물레노I(ssy-le-Mouléno)에서 그렸다. 
아티스트를 위해 포즈를 취한 소녀는 마티스의 이웃인 쟌느 바드렌(Jeanne Vaderen)이다. 
그림의 여 주인공의 모습에는 일종의 부드러움과 우울함, 
고통스러운 연약함과 정교함이 있다. 


모델의 그림을 약간 구부림으로써 마티스는 캔버스 구성에 약간의 비대칭을 도입했다. 
마티스는 중심 축 안에 쟌느의 머리와 팔, 분홍빛을 띠는 
두 개의 몸매를 유지하면서 탄력 있는 새싹의 톤을 강화했다. 
색상과 인물의 병치 및 상호 작용은 그림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중요한 색채와 리드미컬한 악센트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강력하고 찢어진 튤립 줄기, 날카로운 강한 잎의 짙은 녹색,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꽃의 성장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블라우스의 밝고 쉽게 발달된 녹색 톤, 
닫힌 손의 타원형, 거대한 눈의 슬픔은 사람의 내면 세계의 비밀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특이성을 가리는 조화로운 전체를 형성하고 
색의 일관성과 타원형과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롤을 고수한다. 
이 삶의 조화는 예술가가 보라색-파란색과 옅은 노란색의 넓은 영역의 
대조를 방해하는 긴장감으로 만들어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Pink figurine and a jug on a red chest of drawers,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0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 역시 마티스가 집을 빌린 파리 근처의 이씨 레 물레노I(ssy-le-Mouléno)에서 그렸다. 
집 근처의 정원에 마티스는 넓고 가벼운 작업장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대화" (작업장이 내려다 보이는 방의 창에서), "댄스(Dance)", 
"음악(Music)"과 같은 대형 작품이 그려져 있다. 

정물의 배경을 이루는 이 공방의 판자벽은 이번 작품에서 많이 그려져 있다. 
마티스는 자신의 작품을 화면에 도입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 기울어진 여성의 분홍색 조각상이 있다. 
마티스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작품에서 여러번 발표했다. 
주전자와 유연한 한련 줄기와 그릇처럼 현실 세계의 주제가 아니라 주어진 구성의 주제가 된다.

 

Seville still life, 1910~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0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0년 10월에 떠난 스페인 세비야에서 그렸다. 
마티스는 세비야 호텔 방에서 이러한 작업을 했다. 
꽃과 새가 보이는 소파의 에메랄드 장식의 멋진 장식은 
세상에 피는 제라늄의 밝은 점을 유기적으로 포함하고 
테이블에 있는 노란색 목도리의 작고 어두운 패턴과 충돌한다. 

풍부한 색상 반점과 복잡한 장식품의 대비와 에코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구별되며 
밝은 핑크 톤과 함께 인테리어의 답답한 향신료를 향상시킨다. 
그러나 연한 초록색 커튼이 펄럭이면서 신선한 바람의 숨결이 그림에 들어오고 
보이지 않는 창문의 존재가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강렬하고 빛나는 핑크 톤이 아침 햇살에 대한 은유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벽과 바닥을 하나의 평면으로 결합함으로써 마티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폭동을 수용하여 그림 공간을 조화시킨다. 

 

Spanish still life, 1910~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5 x 11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도 마티스가 스페인 세비야 같은 호텔방에서 그렸다.
그러나 그림의 구성은 익숙한 동기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테이블과 소파는 캔버스의 전면에 접근하여 "세비야 정물"의 전경 물체를 대체했다. 
색 반점이 커지고 색조가 더 강해져 장식적인 리듬이 변경되었다. 


직물은 그림의 아래쪽과 중간 부분을 특히 적극적으로 채우는 크고 선명한 패턴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 장식적인 고급스러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식탁보의 활기찬 디자인과 진한 파란색 직물의 눈길을 끄는 양식화된 과일과 꽃은 
테이블 위의 제라늄과 고추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티스는 캔버스와 화분, 그리고 두 개의 주전자의 구조에서 물리적 존재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구도의 중심이되어 이 화려한 세상에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Vase with irise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17.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꽃 창포가 있는 꽃병 (Vase with irises)"은 마티스가 

1912년 겨울을 보냈던 모로코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렸다. 
"Spanish Still Life"에서와 같이 작가는 호텔방 한 구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 캔버스는 1904~1910년의 작품과 비교할 때 
자연의 전이에 있어서의 자발성과 신선함으로 표시된다. 


그림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구성의 기초는 고전적인 무대에서 마티스가 

꽃이 만발한 화병을 선물한 대리석 꼭대기에 화장대이다. 
라일락 색상의 강렬한 스트로크는 꽃잎의 자연스럽고 기발한 장식을 이끌어낸다. 

꽃과 강한 녹색 줄기를 둘러싼 흰색 캔버스의 작은 영역은 

색조를 감소시키지 않고 그림에 빛을 가져온다. 
나무와 도자기의 따뜻한 갈색 - 붉은 질감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돌의 시원한 표면과 
표현력이 매우 뛰어나며, 꽃의 강렬한 삶에 비해 역동적인 패턴이 차분한 것 같다. 


마티스가 창조한 시각 감각 세계는 거울이 객관적인 환경을 반영하지 않고 
기묘한 빛과 신비한 검은 색으로 가득 차 있어 일상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신비로운 거울의 세계와 나란히 살고 있다. 
공간의 색상 변화는 그림의 배경에서 계속되며, 녹색 톤이 검정을 통해 놀랍게 깜박인다. 

 

Ballerina, 192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20년 마티스는 7년 이상 그의 모델이 되어 니스 시대의 

많은 작품의 정신을 알리는 19세 소녀를 만났다. 
헨리에트(Henriette Darricarrère)가 발레를 공부하고 있었다. 

마티스는 자신의 외모, 잘 조각된 강인한 형태뿐만 아니라 

예술성에도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그녀는 자신을 오다 리스크 , 스페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 댄서로 쉽게 변신시킬 수 있었다. 
발레리나는 색 구성표와 구성 균형의 단순함으로 유명하다. 
배경은 거의 추상적이다. 
그림을 강조하는 서로 다른 색상의 4 개의 수평 띠가 있다. 
헨리에트(Henriette)가 무엇에 앉아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의상의 벽과 끈은 같은 색이며, 발레리나의 스타킹과 바닥도 가까운 색조다.

 

Henri Matisse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