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18th century. Nikitin, Matve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a Field Hetman, 1720s.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 76 x 6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헤트만(Hetman)은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폴란드 왕국,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3국의 연합체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공화국)에서 
국왕 다음의 지위를 지닌 군 사령관직의 호칭이다. 
17세기 후반,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때에는 그 국가 원수의 칭호로써 계승되었다.

화가 이반 니키틴(Ivan Nikitin 1690~1741)은 초상화와 전투 작품을 그린 러시아 화가였다.
니키틴은 모스크바에서 정통 성직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716~1720년에 그와 그의 형제 로만 니키틴(Roman Nikitin)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에 의해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이 형제들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회화 예술을 배웠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니키틴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가 가장 좋아하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회화 작업을 했다.

1725 프트르 대제의 죽음 후에 니키틴과 그의 형제 로만 니키틴은
총독에 대한 팜플렛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이반 니키틴은 
5년 동안 피터와 폴 요새에 수감된 후 토볼스크(Tobolsk)로 추방되었다.

1740년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황후는 
니키틴 형제들을 위한 사면에 서명했고 이들은 1741년에 사면되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엘리자베스 황후의 요청으로 니키틴은 토볼스크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1741년 말이나 1742년 초에 길가에서 죽었다.

니키틴의 초기 초상화는 전통적인 17세기 파스나 스타일의 강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미술사 학자들은 이 작품 (Portrait of a Field Hetman)을 
니키틴의 작품 중 최고의 초상화로 평가한다.

 

Peter the Great on the deathbed 1725,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82 x 6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 대제가 죽은 직후 이반 니키틴(Ivan Nikitin)은 죽은 황제의 모습을 그리도록 초대되었다. 
초상화는 흰 셔츠를 입은 왕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슴을 노란색 커튼으로 덮고 파란색 맨틀에 족제비(ermine) 모피가 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는 위엄 있고 엄숙하며 깊은 슬픔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죽은 황제의 이미지를 보면 그의 평생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다.

 

Portrait of Tsesarevna Elizabeth Petrovna, 1724(?).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56.5 x 50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루이 카라바크(Louis Caravaque 1684~1754)는 러시아에서 일한 프랑스 초상화 화가였다.
카라바크는 마르세이유(Marseil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에 가서,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의 초상, 
엘리자베스 황후의 초상화, 캐서린 2세의 초상화 등을 그렸다.
카라바크는 1754년 6월 9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Elizabeth I Petrovna 1709~1761) 러시아 황후이다.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는 1741~1761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했는데
그녀의 통치는 러시아의 계몽주의 시대의 도래와 군사 교육 기관의 개편과 관련이 있다. 
1744년에 초등학교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 (1755)와 카잔 (1758)에 최초의 체육관이 문을 열었다. 

1755년 모스크바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757년 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1756년에 그녀는 제국 극장 창설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다. 
왕실 거주지 배치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재무부에서 할당되었다. 
그녀의 재임 기간에 건축가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는 
러시아 군주의 주요 거주지로 사용된 겨울궁전(Winter Palace)과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e Selo)의 캐서린 궁전(Catherine Palace)을 지었다. 

 

Self-Portrait with Wife, 1727~1729. by Andrey Matveyev. oil on canvas. 75,5 x 90,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안드레이 마트베예프(Andrey Matveyev 1701~1739)는 러시아 예술가였다. 
그는 1701년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트베예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초기의 현대적인 초상화 화가 중 한 명이다.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마트베예프의 초기 작업에 대해 알게 되고 
감동을 받아 그를 유럽에서 공부하도록 보냈다. 
1716년부터 그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에서 11년을 지내면서 공부했다. 
1723~1727년에 그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엔터워프 왕립 예술아카데미 
(Royal Academy of Fine Arts, Antwerp)에서 지냈다. 
그는 러시아 밖에서 가르친 최초의 러시아 예술가였다.

1727년에 마트베예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법원의 수석 예술가가 되었다. 
1731년경부터 그는 피터와 폴 성당 (Peter and Paul Cathedral)의 인테리어와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황후를 기리기 위한 개선문을 포함하여
여러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한 화가팀의 책임자였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아내와의 자화상이다. 
네델란드에서 돌아온 마트베예프는 대장장이의 딸인 
이리나 안트로포바(Irina Stepanovna Antropova)와 결혼했다. 
초상화 속의 작가는 오른손으로 젊은 아내를 껴안고, 왼손으로 그녀를 앞쪽으로 가져 와서 
보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져 오는 것처럼 그녀를 지지한다. 
두 사람의 자세와 움직임은 허식이 없으며, 차분하고 자연스럽고 품위와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초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당대에 예상하지 못한 깊은 서정으로 가득 차 있다. 

마트베예프가 만든 이미지는 개인적 특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그는 이미지의 정서적 내용에 초점을 맞춘 자신만의 서정적 초상화를 만든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매트베예프의 작품은 최초의 자화상이었다.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18th century. Nikitin, Matve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Baron Sergei Stroganov, Youngest Son of the Salt manufacturer Grigory Stroganov 
and his Wife Maria, 1726.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 87 x 6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이반 니키틴(Ivan Nikitin)의 작품으로 소금 제조업체를 세운 그리고리 스트로가노프(Grigory Stroganov)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마리아 야코브레브나(Maria Yakovlevna)의 막내 아들, 
세르게이 스트로가노프(Sergei Stroganov 1707~1756) 남작의 초상화이다.

세르게이 스트로가노프는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가 설계하고 건축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ct)에 위치한 스트로가노프 궁전의 소유자이다. 
세르게이 스트로가노프는 Stroganov Art Gallery의 수집가이자 창립자였다. 
1735년에 그는 소피아 나리쉬키나(Sofia Kirillovna Naryshkina)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스트로가노프(Alexander Stroganov)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장이 되었다.

이 초상화는 1804년 이반 니키틴(Ivan Nikitin)이 직접 서명하고 날짜가 적힌 작품으로 
작가의 서명과 날짜가 적힌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평론가들은 초상화의 기술이 매우 훌륭하고 다른 작품보다 잘 보존되어 
작가의 개별적인 태도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고 평가한다. 

 

Portrait of Peter I, Late 1717. by Louis Caravaque. oil on canvas. 69 x 55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루이 카라바크(Louis Caravaque 1684~1754)는 러시아에서 일한 프랑스 초상화 화가였다.
카라바크는 마르세이유(Marseil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에 가서,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의 초상, 
엘리자베스 황후의 초상화, 캐서린 2세의 초상화 등을 그렸다.
그는 1754년 6월 9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표트르 1세 (Peter I 1672~1725)는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xei Mikhailovich)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나탈리야 나리시키나(Natalia Kirillovna Naryshkina) 사이에서 
알렉세이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그의 형 테오도르가 죽은 후 그와 그의 형 이반은 차르 왕좌를 계승했다. 
이후 1689년 그는 소피아를 정교회 수녀원에 유배를 보내고 국사를 전적으로 지배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에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은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이후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문화에서 '중세'란 표현은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는 '고대'라고 쓴다. 

이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나 '차르'라고 하는 왕정(슬라브족)일 뿐 
다른 국가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아울러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의 실책 역시 존재한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특히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노임도 제대로 안주고 
가혹하게 부려먹어 도시 건설을 한 것이 비판받는다. 
강제 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달라고 간언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며 강행했고 도시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또한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농노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였다.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표트르 1세의 통치기 때부터 러시아의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과 교회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이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하여 
러시아의 농노제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난을 계기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Portrait of Princess Natalia Alekseevna, 1716 (?).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83 x 6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Natalya Alekseevna 1673-1716)는 1673년 차르 알렉세이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나탈리아 나리쉬키나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겨우 3살 때 그녀는 아버지인 차르 알렉세이를 잃었으며 이후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인 표트르 (후에 표트르 대제)와 함께 지내게 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늘 오빠인 표트르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나탈리아는 
표트르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오빠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내게 된다.

표트르 역시 이런 여동생을 아꼈으며 그는 여동생에게 늘 개인적 서신을 보내서 
여러가지 소식들을 알렸었는데 사소한 문제부터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나 
전투에서의 승리 등을 빠짐없이 동생에게 알렸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늘 자신을 지지해 온 여동생에게 오빠가 이렇게 
잘 하고 있단다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어느정도 있었을 듯하다.

나탈리아는 오빠인 표트르가 서구화 작업을 추진했을 때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 
이복언니들과 달리 이에 대해서 어려움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늘 지지했던 오빠의 일이기에 

자신이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을 듯하다. 

표트르 대제가 자신의 첫번째 아내를 수녀원으로 보내버린 뒤, 
궁정에서 나탈리아는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 된다. 
그리고 나탈리아는 궁정의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으로써 궁정을 이끌어나가게 된다. 
또한 표트르는 여동생을 통해서 그의 연인이 되는 여성들을 만났었다. 
표트르 대제는 다정한 오빠였으며 여동생에게 권위를 부여했었지만 
여동생을 시집보내려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나탈리아 역시 언니들처럼 혼처를 구하기 애매했었을 듯하다. 
러시아 내에서 남편감을 찾기에는 정치적 위험 부담이 너무 컸었으며, 
그렇다고 러시아 밖에서 구하기도 애매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서구화 되기 시작했다고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서유럽과는 좀 다른 나라였으며 
통혼하기가 애매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표트르 대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을 때 나탈리아도 오빠를 따라 그곳에 가지만, 
아직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나탈리아는 자주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여동생에게 가트치나에 영지를 주고 

그곳에 나탈리아를 위한 궁전을 짓도록 했다. 
나탈리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첫 병원을 설립했으며 

극장을 만들었고 배우들을 고용하기도 했었다. 
극장을 설립하고 배우를 고용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나탈리아는 스스로 연극 작품을 썼는데 
나탈리아의 연극은 서유럽식 의복 등을 입고 나오는 작품으로 
오빠가 추진하던 러시아의 개혁에 따르는 것이었다.

나탈리아는 표트르의 두번째 아내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가 정교회로 개종할 때 참석했지만 
나탈리아와 표트르 대제 사이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1715년 나탈리아가 표트르의 첫번째 아내인 예브도키아 루프키나를 만나러 갔었고 
이에 대해 표트르는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1716년 사망한다. 

제시된 초상화는 러시아 예술가들이 유럽 방식으로 그린 ​​러시아 예술의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다. 
여 주인공의 모습, 드레스 스타일, 가발, 태도 등은 뉴 에이지 스타일을 말한다. 
그림의 해석에 있지만 여 주인공의 얼굴은 볼륨과 표현으로 작성되었다. 
회화에서 다른 시대의 특징, 예술적 솔루션의 이중성은 세속 예술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자연스럽다. 

 

Portrait of Princess Praskovya Ivanovna, 1714.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83 x 66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Praskovya Ivanovna 1694~1731)는 1682~1696년 사이에 
표트르 1세와 공동 통치를 한 러시아의 차르 이반 5세(Ivan V)와 
그의 아내 프라스코브야 살티코바(Praskovia Saltykova)의 딸이다. 
그러니까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는 표트르 대제의 조카이자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황후의 누이였다.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두 살 때인 1696년에 사망하고 
그녀는 그녀의 자매와 함께 자랐다.

 

Portrait of Andrei Besyachy by A. M. Apraksin. Between October 8, 1696 ~ 
no later than May 11, 1697. b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93 x 88 cm. 
The Mikhailovsky Palace, Hall 5,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안드레이 마트비비치 아프락신 (Andrey Matveyevich Apraksin 1663-1732)은 
러시아의 차리나 마르파 마트베브나 아프락시나(Marfa Matveevna Apraksina) 여왕의 
형제로 아프락신(Apraksin) 백작 가문의 일원이다.

 

[영상] Mikhailovsky Palace, Hall 5, 18th century. Nikitin, Matveev. 

The State Russian Museum in St. Petersburg,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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