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French painting of the early 20century.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420번 홀은 인상파와 포스트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초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Artemis, 1911. by Marie Laurencin. oil on canvas glued to cardboard, 35.5 x 2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는 1912년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 헤어지고,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쓴다.
1907년, ‘세탁선’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아폴리네르는 가난한 문인이었고, 로랑생은 무명 화가였다. 
둘 다 사생아로 태어났다. 

둘은 연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했다. 
1911년 경, 개성 강한 성격이었던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뒤, 
기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과의 사랑을 추억하며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썼다. 
마리 로랑생은 그렇게 우리에게 화가보다는 시인의 뮤즈로 더 알려졌다. 

한참 사랑에 불타고 있던 아폴리네르가 주문해서 두 연인을 그린 루소의 그림은 
로랑생을 시인의 뮤즈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종종 그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 누군가의 뮤즈로 더 알려지곤 한다. 
로댕의 연인이었고 재능 있는 조각가였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그늘에서 괴로워했으며, 
프리다 칼로는 생전에 화가보다는 유명한 벽화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여성 예술가들은 예술가 자체가 아니라 뛰어난 다른 예술가의 연인이나 뮤즈로 더 알려진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신비로운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여성 예술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와 예술에 영향을 준 삶에 대해 보기 보다는, 
여성적인 스타일을 이야기하고 대상화된 여성 ‘뮤즈’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Bacchante, 1911. by Marie Laurencin. oil on canvas glued to cardboard, 32.7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마리 로랑생은 불행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독일인 귀족과 결혼을 한다.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충돌로 시작된 이 전쟁 와중에 
로랑생은 적국의 군인과 결혼을 했던 터라 국외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1920년 경에 남편과 이혼하고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마리 로랑생은 다른 여성 예술가와는 달리 생전에 유명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마리 로랑생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문인 장 콕토는 마리 로랑생을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낀 불쌍한 사슴으로 비유했고, 
로댕은 야수파의 소녀라고 놀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그녀는 사립학교에서 미술 강사로 일했다. 
그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Woman leaning on the table, 1901.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 (Eugène Carrière 1849~1906)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그는 오귀스트 로댕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그의 작품은 피카소에게 영향을 줬다. 
카리에르의 흑백 양식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 잘 나타나 있다.

 

Woman with baby on her lap, 1890.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61.3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는 소년 시절 석판화가의 문하생이 되지만, 후에 회화를 그린다. 
처음은 신중한 생활을 했는데,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影像)을 화면에 그려보는 것을 궁리했다. 
그 때문에 색채를 다 쓰지 않고 단색으로 그려서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깊게 하여, 
인물을 음영(陰影)에 매몰되듯 녹여서 그리고 있다. 

 

Mother and child, 1880.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38 x 50.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의 작품은 박력과는 먼 표현이지만, 
인상(人像)에는 꿈속을 보는 듯한 호소력이 있으며, 
모성애를 그린 작품은, 부드럽고 단아함을 머금고 있다.

 

Naiad, 1896.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41.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작품에는 〈바티뇰의 화실〉(1870년), 〈들라크루아 예찬〉(1864년) 등이 있다.

나이아데스(Naiad)는 그리스 신화에서 일종의 물의 요정으로 
연못, 호수, 우물, 개천 등 담수에 살고 있다고 여겨졌다.
다른 물, 바다의 요정과 비교해 보면 오케아니스는 큰 바다, 대양, 바다의 요정, 
네레이스는 바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에게 해의 요정인데 비해 
나이아데스는 흐르는 물 중에서 작은 개천, 우물들의 정령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에서 세상의 모든 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나이아데스는 자신이 속한 연못이나 물의 원천과 연결되어 

만약 그 물이 모두 마르면 그 요정도 죽게 되었다. 
대부분의 나이아데스는 동물과 인간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아르고 호의 

선원 중 하나인 힐라스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때로는 인간에게 위험하기도 했다.

 

Hamlet, 1898. by Fernand Maglen. oil on canvas, 41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Town with a cathedral, 1899. by Fernand Maglen. oil on canvas, 137.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Miners. by Jules Gustave Bess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줄스 베송 (Jules Besson 1868~?)은 프랑스 화가였다. 
50대에 그는 인도 차이나로 이사했다. 
사이공에 있는 그의 제자들의 작품은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Market in Brest 브레스트 시장, 1899. by Fernand Pie. oil on canvas, 64.7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Landscape in Saint-Denis, 1906~1910. by Charles René Picart Le Doux. oil on canvas, 46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샤를 피카르 르두 (Charles Picart Le Doux 1881~1959)는

프랑스 시인, 작가 및 화가였다.

 

Lodge (Spectators), 1906. by Tony Minartz,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토니 미나츠(Tony Minartz 1870~1944)는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일러스트 레이터였다.

 

Music hall, between 1895 and 1896. by Jean Louis Forein. oil on canvas, 50.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장 루이 포랭 (Jean-Louis Forain 1852~1931)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이자 판화가로 
오일, 수채화 , 파스텔 , 에칭 및 석판화를 포함한 미디어에서 일했다. 
그의 많은 인상파 동료들과 비교할 때, 그는 평생동안 더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후세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Plowing, 1902. by René Auguste Seyssaud. oil on cardboard, 4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르네 오귀스트 세이소(René Auguste Seyssaud 1867~1952)는 

프랑스의 인상파이자 현대 화가이다.

 

Road, 1901. by René Auguste Seyssaud. pasted on canvas paper, 30.7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In the restaurant, 1907. by Charles Hoffbauer. oil on canvas, 115 x 16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찰스 호프바우어(Charles Constantin Joseph Hoffbauer 1875~1957)는 
미국 시민이 된 프랑스 태생의 화가였다. 
그는 역사적인 흥미로운 장면을 묘사한 많은 주제를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를 그렸다.

 

Hall of the Dauphin in the Palace of Versailles, 1901. by Maurice Lobre. oil on canvas, 

80 x 9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모리스 로브레 (Maurice Lobre 1862~1951)는 프랑스 예술가였다. 
그는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했다.

모리스 로브레는 19세기 후반에 그의 작품이 살롱 드 샹 드 마르

(Salon du Champs-de-Mars)에 전시되면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1888년 그는 살롱에서 명예 멘션과 여행 보조금을 받았다. 
그해 여름 그는 노르망디로 가서 자크-에밀 블랑쉬와 함께 지냈다. 
드가(Degas) 와 휘슬러(Whistler)는 그와 가장 절친한 손님 중 하나였다. 

 

Lobby of the Palace of Versailles, 1903. by Maurice Lobre. oil on canvas, 92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20세기 초에 모리스 로브레는 앙티미즘(Intimist) 스타일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모티프는 편안한 부르주아 환경이 지배했다. 
1905년 4월, 그의 작품은 앙리 거벡스(Henri Gervex) 갤러리의 공동 전시에서 
다른 스타일의 실무자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전시회는 앙리 마티스, 헤르만 폴, 르네 프리네 , 어니스트 로랑 등과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앙티미즘(Intimist)"라는 용어를 만든 
에드워드 빌라드(Édouard Vuillard)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Shrine relocation, 1899. by Gaston de La Touche. oil on canvas, 145 x 15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가스통 라 터치(Gaston de La Touche 1854~1913)는 

프랑스 화가, 삽화가, 조각가 및 조각가였다.

 

 

 

Room of Albert Marqu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419번 홀은 주로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1875-1947)의 풍경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알베르 마르케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초기 작품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로 야수주의의 성향을 보였으나 
점차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온화한 화풍으로 변모했다. 
색과 빛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강과 바다, 항구와 범선이 있는 풍경은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Room of Albert Marqu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알베르 마르케는 1875년 보르도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장식화가를 지망하였으나 22세 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더불어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문하생이 되었다. 
마티스와는 절친하였고 같은 아틀리에서 1900년의 만국박람회의 장식화를 
공동 제작한다든지 또는 같은 전람회에 각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림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볼 때 마티스를 양(陽)이라고 한다면 

마르케는 음(陰)이라 할만큼 서로 달랐다고 한다.

 

Louvre embankment and New Bridge, 1906.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0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루브르 제방과 새로운 다리
이 작품은 마르케 자신의 재능적 특징인 건설적이고 명확하고 
쉽게 보이는 구성을 만드는 능력을 보여준다. 
지평선이 올라가고, 제방의 선은 그림의 공간을 비스듬히 가로 지른다. 
그러나 컴포지션의 역동성은 “평면” 색상으로 균형을 이룬다. 
포비즘(fauvisme)의 교훈을 배웠을 때 마르케는 신중하게 색상의 관점을 약화시킨다.

무더운 여름날의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그림의 컬러 팔레트를 
몇 장으로 줄였지만 정확하게 발견된 비율은 흰색과 새벽 비행기와는 달리 
빛이 넘치고 보라색 음영이 깊고 차가운 것처럼 보인다. 
밝은 녹색 울창한 단풍이 태양을 통해 갈색처럼 붉어진다. 
더운 날의 센세이션은 마르케가 길가의 한가운데 나무가 던지는 그림자의 
명확한 윤곽을 투명한 페인트로 강조한다는 사실에 의해 향상되었다.

상반된 원칙 즉 건축 고전과 일상 생활의 결합, 역동성 및 동시에 구성의 엄격한 계산, 
하프톤 및 순수한 색의 사용 등 마르케의 경관은 독특한 특성을 부여하여 
회화의 고유한 인식 모두를 작품에 알린다. 

 

View of the Seine and the monument to Henry IV, 1906.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5.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센 강과 헨리 4세 기념비 보기
마르케는 인상파가 유지하는 표현적 또는 현실적 가치에 비해 
회화적 특성과 강한 색채를 강조한 포비즘(Fauvism - 野獸派)에 속했다.
포비즘은 1904년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운동은 
1905-1908년에 불과 몇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세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이 운동의 주창자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였다.

 

Saint Jean de Luz, 1907.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생 장 드 루즈
마르케는 일찍부터 바다나 항구와 같은 해변의 풍경화를 그렸고, 이러한 기호는 늙어갈수록 
화면에 인적이 없는 고요한 취향을 가미하여 그 제작을 일관하였다. 
같은 모티프의 풍경화에도 뒤피의 경우에는 축제의 광경, 
그 생생한 환희의 표현에 특색이 있으나 마르케가 노리는 것은 대범한 색면 구성 
즉 넓고 넓은 하늘의, 언덕의, 모래 형태의 이조(移調)에 중점을 두고 있다.

 

Gulf of Naples 나폴리 만, 1909.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2 x 80.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야수파 (fauvisme, 野獸派)는 현대미술의 서막을 시작하는 그룹이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1905년 비평가 '루이 복셀'이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 전시회에서  
마르케의 작품을 "야수의 무리 속에 같혀 있는 도나텔로 같다."라고 평한데서 유래하였다. 
야수주의는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의 일단의 작가들이 보인 
도발적인 색채 작업에 대해 경멸적으로 붙인 용어이다.  
야수파의 그림들은 대체적으로 재현적이며 동시에 
매우 과장된 색채를 호화에 주된 요소로 사용하였다. 

 

Hamburg port 함부르크 항구, 1909.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6.5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야수파들의 그림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도발에 가까웠다. 
비자연적인 원색과 세련되지 못한 기법, 
정교하게 그리지 못하고 대충 그린 듯한 기법으로 혹평을 받았다. 
야수파는 후기 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 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면서 발전되었다. 
즉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그러나 야수파의 두드러진 특징은 색채의 강렬함이므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명암,양감 )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표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않으면서도 포괄적이고 
오히려 개성적인 자아표출에 공통점을 가지는 야수파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에 이루어졌고 1908년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A rainy day in Paris. Notre dame cathedral, 1910.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81 x 6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파리의 비오는 날. 노트르담 대성당
마르케의 초기 작품은 젊은 마티스의 작업과 구별되는 똑같은 날카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나면서 마르케는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난다. 
마르케의 작품의 본질은 변화한다. 
색깔이 더욱 조화되고 조화로워지면서, 마르케는 

대기의 전달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포비즘의 유산으로서, 마르케는 대담한 다채로운 일반화와 

발레리와 함께 순수한 음색의 사용 경향을 유지한다.

 

Harbor in Menton 망통의 항구, 1905.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마르케는 격렬한 색채에 의한 포브의 화가가 아니고, 
그 색조의 대담함에 의해 포비스트라 말하는 견해도 있다. 
확실히 단조로운 색채로 덮인 그의 화면은 때때로 중후한 이면의 
뉘앙스가 노출되어 몽롱한 애수마저 풍기고 있다. 
포비즘 운동 이후의 그는 구성을 더욱 순화하여 견고하고 평형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르케는 현대 회화에 유니크한 지위를 차지하는 풍경화가로 기억되는 화가일 것이다.

 

Milliners, 1901.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50.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알베르 마르케의 작품은 다른 포비즘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야수파의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Maina with Venice in the distance, 1896. by Charles Cotte. oil on canvas, 60 x 7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찰스 코트(Charles Cotte 1863~1913)는 프랑스 화가다. 
그는 어둡고 떠오르는 브리트니 시골과 바다 풍경으로 유명하다.
1885년에 찰스 코트는 브리트니를 방문하여 매년 몇 달 동안 카마라 쉬르 메르에서 
어부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종교 축제에 참여했다. 
브르타뉴 어의 삶의 항구, 폭풍 및 장면은 찰스 코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제가 되었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쓰여진 장르 구성, 어두운 색, 작가는 상징적인 성격을 주었다. 
1889년 처음으로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발표했다.

1897년 코트는 파리의 갤러리에서 베니스에서 쓴 일련의 그림 
"바다에서 바라본 베니스의 전망", "베니스가 있는 바다"를 전시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큰 존경을 받았던 "Nabi"그룹의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그는 1904년 스페인과 1907년 아이슬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에 새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1905년 이후 그는 책 삽화로 전환하여 약 60개의 판화를 만들었다. 
1913년 질병으로 인해 Cotte는 그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View of Venice from the sea, 1896. by Charles Cotte. oil on canvas, 55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897년 찰스 코트는 파리의 갤러리에서 베니스에서 쓴 일련의 그림 
"바다에서 바라본 베니스의 전망", "베니스가 있는 바다"를 전시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큰 존경을 받았던 "Nabi"그룹의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그는 1904년 스페인과 1907년 아이슬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에 새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1905년 이후 그는 책 삽화로 전환하여 약 60개의 판화를 만들었다. 
1913년 질병으로 인해 Cotte는 그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Exit from the Moulin Rouge 물랑 루즈 출구, 1901~1902. by Tony Minarts,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토니 미나츠(Tony Minartz 1870~1944)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독학 화가인 토니 미나츠는 1896년 National Society of Fine Arts 에서 
그림을 전시하여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Grand Guignol” 스타일의 쇼를 위한 
페인트 패널 로 파리의 퐁파두르 극장을 장식했다. 
미나츠는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전국 미술협회 살롱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Bretons and Bretons, 1907. by Lucien Simon,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뤼시앵 사이먼(Lucien Joseph Simon 1861~1945)은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화가이자 교사였다.
1891년에 그는 화가 잔느 사이먼 (Jeanne Simon 1869~1949) 의 여동생 과 결혼하여 
그녀의 고향인 브리태니(Brittany)의 풍경과 농민 생활에 매료되었다.

 

Lady in the garden, 1909~1911. by Pierre Laprad, oil on canvas. 5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피에르 라프레이드 (Pierre Laprade 1875~1931)는 프랑스 화가이다.

 

[영상] Albert Marquet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Louis Valta.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418번 홀은 루이 발타(Louis Valtat 1869~1952)의 자연의 품 속에 풍경을 보여준다. 
루이 발타는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다. 
루이 발타는 20 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비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는 강렬하고 거의 야생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데 중점을 두는 그룹을 창립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오히려 인상파 경향을 특징짓는 보다 섬세한 손길을 사용했다.

 

Children's games (Girls playing with a lion cub), 1905~1906. by Louis Valt. oil on canvas, 
81.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는 프랑스의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디에프에서 

선박 소유자의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발타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리세 호슈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중등 학교에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풍경 화가로 젊은 루이스가 예술에 관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17세에 예술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그는 에콜 (École des Beaux-Arts de Paris)에 지원했다. 
1887년 발타는 파리로 이주하여 에콜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유명한 학술 예술가들과 함께 공부했다.

 

Lilac rocks (Sea surf), 1900.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5.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890년, Jauvin d 'Attainville 상을 수상한 발타는 파리의 La Glaciere 거리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는 1893년 독립 예술가 살롱에서 데뷔하여 자신의 아트 스튜디오를 둘러싼 
동네의 거리 풍경을 묘사한 여러 그림을 전시했다. 
그의 경력의 이 초기 기간 동안 발타는 인상주의의 자연스러운 빛 터치와 
Pointillism 에서 발견되는 다채로운 점을 사용했다. 

 

Sea bay in Antheor, 1906~1907. by Louis Valt.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성인이 되었을 때 발타는 결핵에 시달렸기 때문에 
파리의 여름과 지중해 연안의 겨울로 시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지중해 근처에서 보낸 시간 동안 발타는 색채 사용을 강화하고 
특히 바다 풍경을 그리는 데 있어서 포비스트 성향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By the boat,1899. by Louis Valt. oil on canvas, 81 x 10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914년 이후 그는 파리와 루앙과 베르사유 인근 지역에서 작업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꽃, 풍경, 현대 생활의 장면을 포함, 그는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발타의 그림은 그가 아직 20대 였을 때 미술 평론가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93년 쉬르 르 블러 바드 는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Society in the garden, 1898.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5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에게 가장 초기의 그림인 이 작품은 1898년경에  제작되었다. 
활기차고 분리된 붓놀림과 그림의 격렬하고 역동적인 질감은 발타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와 반 고흐(Van Gogh) 등의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Sun under the trees, 1908~1909.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6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가 가장 유명한 그림을 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였다. 
여기에는 1903년 Les Rochers Rouges dans la Mer와 3년 후 La Dentelliere가 포함되었다. 
이 작품들은 발타가 그의 동료인 앙리 마티스보다 명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포비즘 운동의 비공식적 지도자로 자리 매김하는 것을 보았다.

 

In the south of France, 1908.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의 초기 작품은 그의 아버지의 풍경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로서의 완전한 성숙은 마티스(Matisse)를 포함한 두 명의 동시대인과 함께 
1905년 파리의 Salon d 'Automne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으며 그의 그림을 전시했던 시기였다. 
그 후 발타의 그림은 생생하고 거의 뚜렷한 순수한 포비즘의 색상과 
발타가 인상파에 대한 초기 경험에서 유지했던 약간 더 부드럽고 
덜 추상적인 터치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발타는 1948년까지 페인트 계속 녹내장으로 고생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고 
결국은 시력을 잃고 1952년 1월 2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Village under the snow in Morvan, 1910~1911. by Louis Charlot.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스 샬롯(Louis Charlot 1878~1951)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1910년에서 1911년 사이에 완성된 이 작품은 루이스 샬롯의 대표작이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빈곤을 겪었지만 그림을 그만 두지 않고 파리에서 전시회를 늘렸다. 
루이스 샬롯은 1920년이 되어서야 조르주 쁘띠 갤러리(Galerie Georges Petit) 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Salon d' Automne의 회원인 그는 또한 1927년부터 1943년까지 Salon des Tuileries에 출품했다 . 

 

Village under the snow in Morvan, 1908. by Georges Dufrenois.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조지스 더프레노이(Georges Dufrenois 1870~1943)는  포비즘과 관련된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였다.
그는 프랑스 티 아이스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건축과 회화 사이에서 망설임 끝에 더프레노이는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가 1895년에 작업하기 시작한 그의 초기 작품은 인상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1902년에 그는 베니스로 첫 여행을 했고 
1차 세계 대전 중을 제외하고 거의 매년 1939년까지 반복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위대한 거장인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 네제를 발견했다. 
예술 평론가 마리우스-아리 르 블론은 자신의 베니스 작품이 
"베네치아 마스터의 위대한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는 이탈리아 인의 직계 계승에 자신을 두고 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부유하고 귀족적인 베네치아 인으로 남아 있다"고 썼다.

 

House in the garden, 1905. by Charles Lacoste. oil on cardboard, 

25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샤를 라코스테 (Charles Lacoste 1870~1959)는 프랑스 화가였다.

 

[영상] Louis Valtat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elix Vallotto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화가들 중에는 평생을 한가지 화풍만 고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 무쌍하게 다양한 화풍을 보여준 화가들도 있다. 
그런 화가들 중 스위스의 펠릭스 발로통(Felix Edouard Vallotton 1865~1925)은 
정밀한 대상의 묘사에서 나비파까지 연결되는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발로통은 스위스의 로잔에 있는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 열 일곱의 나이에 로잔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것을 보면 꿈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그가 배운 분야는 고전이었다.

 

Landscape at Arques-la-Bataille, 1903. by Felix Vallotton. oil on board, 67 X 10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파리에 도착한 발로통은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 
구스타브 블랑제와 쥘 르페르브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많은 학생들처럼 발라통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화가는 홀바인과 뒤러 그리고 앵그로였다. 
이들의 작품은 평생 발라통 미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처음 발로통은 초상화가로 미술가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885년, 스무 살 되던 해, 정식 살롱전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살롱전에 
출품을 하고 난 후 작품의 주제가 실내 풍경으로 바뀐다. 
작고 정밀한 붓 터치, 선 처리로 아주 섬세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기법도 
이즈음부터 그가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Interior, Bedroom with Two Figures, 1903-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rdboard, 61.5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그의 이런 기법은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자 했던 1920년대의 신즉물주의 화가들의 
기법과 유사한데, 그를 신즉물주의의 선구자라고 평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로통은 화가보다는 목판화가로 더 미술사에 크게 기록되는 것 같다. 
현대 목판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처음 목판화 제작을 시작한 것은 발라통이 스물 여섯 되던 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에칭 분야에도 뛰어든다.
1890년대 책을 통해 그의 수많은 목판화가 소개 되었고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도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그에게 그래픽 미술가의 선두 주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Lady at the Piano, 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43.5 X 5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많은 잡지에 기고도 하고 포스터 제작에도 열성이었던 발로통은 1893년, 
프랑스 예술가 협회를 탈퇴하고 기존의 살롱전에 반대하던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이 이어진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또한 아르누보 갤러리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발라통은 나비(Nabi)파와도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이미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 안에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품은 나비파는 종교적인 주제와 
초자연적인 주제가 주요 모티브였지만 나중에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까지 폭 넓게 다루었다. 
’미술에서 색채는 사물의 원래 색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고갱의 관념을 
그 시작으로 해서 표현을 단순하게 하고 굵은 윤곽선을 강조해서 
작품 속 대상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Woman with a Black Hat,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3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나비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발로통의 작품에서는 

점차 전통적인 기법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후기 인상파와 상징주의 그리고 일본 판화의 영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890년 에콜드 보자르에서 개최된 일본의 우키요에 전시회가 열렸을 때 
많은 화가들이 앞 다투어 작품을 구입했는데 발라통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9년, 34세가 되던 해 발로통은 베르넴 가문의 여인과 결혼을 한다. 
베르넴 가문은 르노와르 작품을 구입한 대표적인 화상이었다. 
아내 덕분에 발라통은 금전적인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베르넘 전느 (Bernheim-Jeune) 갤러리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도 얻게 되었다.

 

Portrait of Mrs. Haazen,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유화 작품에 치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목판화 제작이 줄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술 비평도 시작했다. 
비엔나에서는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고 독일 잡지에는 그의 비평이 실리는 등 
국제적으로 발라통의 명성이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고국인 스위스 사람들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1910년, 그러니까 마흔 다섯이 되고서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발로통은 군에 지원한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다. 
비록 군에 입대하지 못했지만 발라통은 그의 장기인 

목판화를 통해 일련의 반전 작품을 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명성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꾸준히 살롱에는 작품을 출품했다. 
암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발로통은 60세 생일을 보내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환갑 다음 날이다.

 

Portrait of G. E. Haasen, 1913,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7 cm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1,700점이 넘는 회화와 드로잉을 남겼다고 하니까 그의 다작에는 그저 입이 벌어진다. 
그 외에도 조각과 3편의 소설, 수많은 연극 대본을 남긴 발라통을 생각하면 
끝없이 열기를 뿜어 내는 용광로가 떠오른다.
스위스 화가인 펠릭스 발로통은 1882년에 파리에 왔다. 
그는 본래 목판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나비파에 합류하면서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영상] Felix Vallotto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Pierre Bonn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1947)는 프랑스 출신 화가 겸 판화 제작자이다. 
후기인상파 중 전위 화가 단체인 나비(Les Nabis)파의 창립자이다. 
보나르는 그림을 참조로 하여 기억에서부터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의 그림은 종종 꿈 같은 느낌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개인적인 그림들에는 그의 부인 
마르트 드 멜리니(Marthe de Meligny)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그녀의 그림을 384점이나 그렸다.

그의 작품이 특별히 우월한 점은 통상적인 그림 구조가 아니라 
관능적인 색채, 시(詩)적인 암시, 시각적 재치에 있다. 
인상주의의 후기 멤버로 인정되지만, 보나르는 색의 독특한 사용과 

복잡한 상상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Roberta Smith는 '보나르의 작품에서 발산되는 것은 색채만이 아니다. 
매끄럽게 연마되고, 다채로운 색의 베일로 가려졌으며, 예상치않은 공간적 수수께끼와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들에 의해 강조된 뒤섞인 감정의 열기도 있다.'라고 말했다.
보나르는 '20세기의 모든 위대한 화가 중 가장 특이한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보나르는 1891년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을 만나며, 독립예술가협회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의 연례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사작했다. 
같은 해에 보나르는 1889년부터 1903년까지 발간된 미술, 문학 잡지인 <La Revue Blanche>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에두아르 뷔야르(Édouard Vuillard)와 함께 권두 삽화를 그렸다. 

보나르는 20대 때에는 상징적, 정신적 본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젊은 화가들의 모임인 Nabi파 (Les Nabis)의 일원이 되었다. 
나비파의 다른 인물로는 에두아르 뷔야르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가 있다. 
보나르는 그림뿐만 아니라 포스터와 책의 삽화, 판화, 극장 세트 그림 등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1910에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로 갔다.

 

Room of Pierre Bonn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보나르의 친구와 역사가들은 그를 '조용한 한결같은 기질'이라고 평하였다. 
그의 일생은 비교적 '긴장과 역경의 반전'이 없는 편이었다. 
그는 60년 동안 한결같은 발전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보나르는 특히 작은 붓 자국과 비슷한 명도로 이루어진 영역에서

색의 강렬한 사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복잡한 작품은 서술적이며 자서전적이다. 
그의 부인 마르테(Marthe)는 수십 년 동안 늘 함께한 대상이었다. 
음식이 남아 있는 식탁에 앉아 있기도 하고, 

목용통에 비스틈히 있는 일련의 그림에서처럼 누드도 있다. 
보나르는 또한 몇 개의 자화상, 풍경화, 거리의 모습 등도 그렸으며, 
보통 꽃과 과일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정물화를 그렸다.

보나르는 생물에서 바로 그리기 보다는 그의 주제를 그렸다. 
때로는 사진을 찍고 색에 대한 주석을 붙였다. 
스튜디오에서 주석에 따라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모든 주제를 손 안에 쥐고 있다. 돌아가서 이것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다시 생각하며, 꿈을 꾼다."

그는 작은 스튜디오의 벽에 못질을 해둔 여러 개의 캔버스들에 동시에 작업을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그림의 형태를 더 자유롭게 결정할 수가 있었다. 
"만약 나의 캔버스들이 틀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어떤 면을 내가 선택할지를 결코 미리 알지 못했다."

 

By the Mediterranean Sea (triptych). Central panel,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07 x 1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지중해 풍경(삼부작) : on the Mediterranean (Triptych).
기둥을 이용해 하나의 그림을 삼부작으로 그린 것처럼 표현했다.

 

By the Mediterranean Sea (triptych). Right panel,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07 x 1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By the Mediterranean Sea (triptych). Left panel,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07 x 1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Behind the fence, 1895. by Pierre Bonnard. oil on cardboard, 31 x 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프랑스의 화가인 보나르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느껴 에콜 드 보자르와 아카데미 쥘리앙을 다녔다.
1889년 그림에 전념키로 결심하고
고갱의 영향을 받은 반인상파 그룹과 나비파(The Nabis)를 결성하였다.

 

Corner of Paris, 1905. by Pierre Bonnard. oil on cardboard glued to wood, 

49.2 x 5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보나르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와 판화, 포스터에도 뛰어났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져 40대로 들어서면서 밝은 색조로 
60세 이후부터는 선명한 색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Train and scows (Landscape with a freight train), 1909.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77 x 10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보나르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하여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보나르는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구도로 풍경, 멱감는 나부, 정물,
사람이 모인 실내 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정감으로 그려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앵티미스트(Intimiste)로 평가 되었다.

 

Landscape in the Dauphin, 1899.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5.5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앵티미스트(Intimiste)란 인상파 이후 실내의 정경을 
친밀한 정감으로 표현한 실내화가를 말한다.
보나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남프랑스의 칸에서 은거하며
제작에 몰두하다가 전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The beginning of spring. Little fauns, 1909.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102.5 x 1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Seine near Vernon,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41.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Morning in Paris 파리의 아침,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76.5 x 12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Evening in Paris 파리의 저녁, 1911. by Pierre Bonnard. oil on canvas, 76 x 12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Triumph of Bacchus (Countryside Holiday), 1911~1913. by Ker Xavier Roussel. oil on canvas, 
166.5 x 11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Mythological plot, 1903. by Ker Xavier Roussel. oil on cardboard, 47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6

 

[영상] Pierre Bonnard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Maurice Deni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414번 홀에는 나비(Nabis)파의 창시자이자 주요 이론가 중 한명인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 1870-1943)의 작품 "The History of Psyche"(1907-1909)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1908년~9년 사이 러시아의 사업가이자 예술계의 유명한 후원자였던 
이반 모로조프(Ivan Morozov)가 자기 집에 장식을 의뢰한 벽화 작품들이다.
푸시케(Psyche)와 에로스(Eros)의 사랑에 관한 신화 이야기로 7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는 187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해안 마을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모리스 드니의 관심은 종교와 예술로 14살 때인 1884년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찾았던 모리스 드니는 이듬해인 1885년 15살 때 일기에 지역 교회에서의 예배, 
색상, 양초 빛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면서 자신이 가야할 화가의 길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느님의 기적을 표현하는 크리스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1890년의 샹젤리제의 살롱(앙데팡당 전)에 등장해 점차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많은 근대적인 회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로 종종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림은 군마(軍馬)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14세기와 15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이탈리아 프레스코 화가들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그때부터 주제와 전통적인 원근법과 입체감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모리스 드니는 이론적 박식함에 순수함과 세련된 감수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08년 아카데미 랑송이 설립될 때 교수가 되어 191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후년에는 스스로 신전통주의라고 부른 고전주의에로의 회복을 시도하여 고전적이고
카톨릭의 종교적인 장식성을 가미한 독자적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제작한 웅장한 벽화는 공공 작품 중 1912년 샹젤리제 극장
(Theatre des Champs-Elysees)의 천장에 그린 그림이 가장 중요한 그림이다.  
종교적 신앙이 깊었던 드니는 종교화를 혁신하고 부흥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17년 제네바의 생폴 성당(Church of St. Paul)의 벽화를 그렸고, 
1924년에는 파리의 the Petit Palais의 돔을 장식했으며 1928년에는 the Senate Building, 
1936년과 1939년 사이에는 제네바의 the Palais des Nations 등의 수많은 프레스코화를 완성하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들이 사망하자 종교 미술에만 전념한
조르주 데스발리에르(George Desvallieres:1861~1950)와 함께 종교 미술
아틀리에(Ateliers d' Art Sacre)를 세웠으며 프랑스 종교 미술 부활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종교 미술에 관한 많은 이론을 남겼는데, 1920년에 <이론(Theories) 1890~1910>, 
1922년에 <새로운 이론(Nouvelles Theories)>, 1939년에 <종교 미술사(Histoire de l'Art religieux)>, 
1943년에 <세뤼지에의 생과 작품 (Serusier, sa vie, son oeuvre)>을 출간했다.

'상징파' 화가로 꼽히는 작가는 처음에 세잔(1839∼1906)과 고갱(1848∼1903)의 영향을 받있으며, 
이후 세뤼지에(1863∼1927) 등과 19세기 말 고갱의 작화사상에 공명하여 모인 반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인
'나비(Nabis)파'를 결성해 신선한 색채 감각을 이어받으면서 나아가 
고갱의 평면적인 표현에 새로운 착상을 담는 표현을 하였다.

 

Room of Maurice Deni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예술가로서의 
예민한 감수성과 열정을 가톨릭 신앙을 통해 승화시킨 독특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모리스 드니는 나비파(les nabis)의 일원이기도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는 
표피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인상주의를 거슬러, 인간과 우주의 본연의 아름다움과 
종교성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창조하자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래, 나는 그리스도교 미술가가 되어야 해.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야 해”라는 다짐을 노트에 옮겨놓을 정도로 
종교와 예술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조르주 데발리에르(Georges Desvallieres)와 함께 
아르 사크레 아틀리에(les Ateliers d’art sacre)를 만들어 종교미술의 혁신과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저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모던 아트와 아르 사크레에 관한 새로운 이론(1922)> 등의 책을 통해 
입체파와 야수파, 그리고 추상미술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론을 펼쳤는데, 
순수한 선과 평면적인 형태, 그리고 단순하고 조화로운 색채가 화면에서 이뤄내는 질서는 바로 자연의 
성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매입해 ‘작은 수도원’(Prieure)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작업했는데, 
내부에는 직접 벽화를 그려 장식한 성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리스 드니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며, 함께 활동했던 나비파 작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

 

Panel 1 : Flying Cupid amazed at the beauty of Psyche,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4 X 26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놀란 플라잉 큐피드(Flying Cupid amazed at the beauty of Psyche).
큐피드(에로스)는 수많은 사랑 주제의 그림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하나의 장면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회화는 

등장 인물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큐피드를 그려 넣으면 그 사랑 이야기를 보다 쉽게 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주로 화면 귀퉁이에 자리할망정 

이 사랑의 신만큼 미술 작품에 많이 등장한 신화의 캐릭터도 없다.
자연스레 큐피드에게는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라는 상찬이 주어졌다. 
신화 속의 지위는 낮아도 미술 속의 지위는 매우 높은 신인 것이다.

수많은 선남선녀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큐피드, 그 자신도 사랑에 깊이 빠진 적이 있다. 
프시케와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 사례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던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는 서기 2세기 로마의 문인 
아풀레이우스에 의해 아름다운 철학적 동화로 진화했다. 
그 글을 토대로 수많은 화가들이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얼마나 많이 그려졌는지 그림책을 만든다 하면 

각 장면마다 필요한 그림들을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을 정도다. 

프시케는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미의 여신 비너스마저 시기할 정도였다. 
자존심이 상한 비너스는 아들 큐피드에게 프시케를 

아주 무가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라고 시켰다. 
그러나 프시케를 찾은 에로스는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모리스 드니는 공중에서 프시케를 바라보던 큐피드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그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중심을 다 잃을 정도다.

 

Panel 2 : Zephyr brings Psyche to the Island of Bliss,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6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신화가 말하는 프쉬케는 그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뭍 남성들을 두렵게 하였다. 
그의 아비는 신탁에 묻고 딸고 결혼 예복을 입혀 바위 위에 버렸다. 
산의 정상에 홀로 버려진 푸쉬케는 갑자기 바람에 실려 어딘가 잡혀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 계곡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 
잠이 깨어 보니 어느 화려한 왕궁 침심이었다. 
매일 밤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찾아와 

자기를 보려고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고 떠났다. 
자기를 보려고 하면 자기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고 

사랑을 남기고 떠나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Panel 3 : Psyche discovers that her mysterious lover is Cupid,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7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어느 날 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푸쉬케는 등불을 밝혀 

잠에 취한 신비한 남편을 보고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의 용모에 떨린 푸쉬케의 등잔에서 

기름 한방울이 떨어져 젊은 에로스의 몸에 흘렀다. 
놀라 도망가버린 에로스를 바라보며 푸쉬케는 절망에 빠진다. 

 

Panel 4 : Psyche, opening a box with dreams of the underworld, plunges into sleep,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5 X 2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패널 4. 언더 월드의 꿈으로 상자를 여는 프시케는 잠에 빠진다
프시케는 그리스 왕과 왕비의 막내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형제 자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여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제를 포함한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과 아름다움의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와 비교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프시케를 숭배하기 시작하여 아프로디테의 사원이 버려졌을 때 여신은 격분했다. 
처벌로 그녀는 그녀의 아들 에로스를 보내서 프시케가 
사악하고 끔찍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큐피드는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고 어머니의 분노에서 그녀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언니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질투했다. 
그녀의 자매는 결국 왕과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남았다. 
아무도 프시케에게 결혼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차라리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였다.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델파이의 오라클에 답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왕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델파이 오라클에 문의했다. 
여사제 내부에서 아폴로가 직접 말했다. 그는 
"당신의 딸은 신들이 두려워하는 짐승과 결혼할 것입니다. 
그녀를 장례식 옷을 입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바위 첨탑으로 데려 가십시오.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의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상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폴로(Apollo)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았기 때문에 주문한대로 했다.
그는 그녀를 장례식 옷을 입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바위 첨탑으로 데려갔다. 
프시케는 짐승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을 때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첨탑에서 뛰어내렸다. 왕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 서풍의 군주인 제피루스는 그녀를 죽음에서 구했다. 
그는 그녀를 에로스의 궁전으로 데려가 에로스가 돌아올 때까지 밤새 기다렸다. 
그곳에서 그녀는 궁전이 매우 크고 각 찬장이 금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에로스가 돌아 왔을 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서 프시케에게 그를 보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보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는 그녀에게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망칠 것이다.

Psyche가 궁전에서 생활한 첫 몇 주 동안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매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Panel 5 : In the presence of the gods, Jupiter bestows immortality on Psyche and 
celebrates her marriage to Cupid,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9 X 2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패널 5. 신들 앞에서 주피터는 프시케에게 불멸을 부여하고 큐피드와의 결혼을 축하한다.

 

그리스의 여신 푸쉬케는 에로스를 찾아 세상을 헤메다가 수많은 시험과 역경을 거쳐 
올림푸스 산에 신의 자리에 오르고 에로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영혼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메타포를 보여준다. 
푸쉬케는 그리스 언어로 영혼을 가리킨다. 
푸쉬케의 역경은 우리 영혼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Panel 6 : Relatives leave Psyche at the top of the mountain, 1909.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200 X 2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어느 왕국의 세 공주 가운데 막내가 미모가 빼어나

미의 여신 비너스(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받았다. 
비너스는 아들인 사랑의 신 큐피드(그리스신화의 에로스)에게 프시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의 품에 안기게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큐피드는 프시케의 미모에 빠져 부부가 되었다. 
큐피드는 프시케에게 완전한 어둠 속에서만 만날 수 있으며,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동생을 시기한 두 언니는 프시케에게 남편이 괴물일지도 모르니 

밤에 그의 얼굴을 확인해 보라고 부추겼다. 
마음이 흔들린 프시케가 등불을 밝히고 살펴 보니 

침상에서 잠자는 사람은 바로 아름다운 사랑의 신이었다. 
이 때 등불의 기름이 어깨에 떨어져서 잠에서 깨어난 큐피드는 

프시케의 불신(不信)을 꾸짖고는 떠나버렸다.

 

Panel 7 : Cupid brings Psyche to heaven, 1908.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80 X 2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4

프시케는 남편을 찾아 각지의 신전(神殿)을 돌아다니다가 비너스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비너스는 여러 종류의 곡식이 섞인 곡식더미를 하룻밤 사이에 한 알씩 가려 내라거나, 
황금으로 된 양털을 가지고 오라는 등의 시련을 주었다. 
비너스는 프시케가 갖가지 시험을 통과하자 하데스의 아내이자 지하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의 처소로 가서 아름다움이 담긴 상자를 가져 오라고 시켰다.

상자를 손에 넣은 프시케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죽음의 잠이 프시케를 뒤덮었다. 
이 때 큐피드가 나타나 구출한 뒤 주피터(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게 
어머니를 설득하여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주피터는 비너스에게 이들의 결합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비너스도 둘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프시케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를 마시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생명을 얻었으며, 
큐피드와의 사이에서 희열을 상징하는 볼룹타스라는 딸을 낳았다.

 

Room of Maurice Denis and Edouard Vuill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415번 방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와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모리스 드니는 앞서 살펴 보았고, 에두아르 뷔야르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식 예술가, 판화가이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에두아르 뷔야르는 나비파의 주요 일원이었으며,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색의 영역과 내부의 장면을 조합한 그림을 제작하였고, 

주제는 색과 패턴에 혼합시켰다. 

뷔야르는 또한 극장의 세트와 실내 장식을 위한 패널에 채색을 하거나 
접시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디자인하는 장식 예술가였다. 
1900년 이후 나비파가 해체되었을 때 그는 보다 사실적인 스타일을 채택하여 
화려한 디테일과 생생한 색상으로 풍경과 실내를 그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프랑스 산업과 예술계에서 
저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 인물에게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그렸다.

에두아르 뷔야르는 1868년 11월 11일 손에루아르주 퀴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뷔야르의 아버지는 은퇴한 해군 보병 대장이었으며, 제대 후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마리 뷔야르보다 27살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1877년 아버지가 은퇴한 후, 뷔야르의 가족은 파리에 정착하였다. 
어머니의 재봉 작업장이 있던 Rue Daunou로 이사한 후, 

마리스타교육수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뷔야르는 장학금을 받아 명문 리세 퐁텐(Lycée Fontaine)에 입학하였고,
수사학과 예술을 공부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고전 조각을 드로잉하였다.
리세에서 뷔야르는 미래에 나비파가 되는 케르 자비에 루셀, 모리스 드니, 작가 피에르 베버, 
그리고 미래의 배우이자 무대 감독이 되는 오렐리앵 뤼네포를 만났다.

 

Room of Maurice Denis and Edouard Vuillard.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1889년 말에 뷔야르는 모리스 드니와 다른 리세 출신 친구들과 함께 
반비밀주의이자 반신비주의 모임인 나비파를 만들고 자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 젊은 화가 폴 세뤼지에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폴 고갱의 지도에 따라 
색의 영역으로 구성된 추상에 가까운 항구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최초의 나비파 작품인 <부적 The talisman>이 되었다. 

세뤼지에와 그의 친구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폴 랑송은 예술을 
그 토대로 환원시키는 데에 전념한 최초의 나비파 작가였다. 
1890년 드니를 통해 뷔야르는 랑송의 스튜디오나 

Passage Brady의 카페에서 만나던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의 존재는 이론적으로는 비밀이었고 회원들은 암호화된 별명을 사용하였다. 
뷔야르의 별명은 그의 군 복무로 인하여 나비 주아브(Nabi Zouave)가 되었다.

나비파는 언제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공통된 생각과 
이상을 공유했으나, 1900년 전람회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1894-1908)에 의해 나비파의 해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드레퓌스는 유태인 프랑스 육군 장교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면죄되기 전에 유배지로의 추방이 선고되었다. 
나비파에서 뷔야르와 보나르는 드레퓌스를 지지한 반면, 

드니와 세뤼지에는 프랑스 육군를 지지하였다.

1900년 나바파가 해체된 후 뷔야르의 스타일과 주제는 변화하였다. 
나비파와 함께 할 때에 바야르는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1900년 이전에 그렸던 밀폐되고 붐비는 어두운 실내를 버리고 
자연광이 비치는 야외를 더 많이 그리기 시작하였다. 


뷔야르는 계속해서 실내를 그리긴 했으나, 실내는 더 밝고 깊어졌으며 
색채는 더 다채로워졌고, 얼굴과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졌다. 
빛의 효과는 주제가 실내이든 파리의 공원과 거리이든 뷔야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가되었다. 
뷔야르는 점차 자연주의로 돌아가, 1908년 11월 Gallerie Bernheim-Jeune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다수의 새로운 풍경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한 반모더니즘 비평가로부터 "체계적인 변형에 대한 우아한 항의"라는 찬사을 받았다. 

 

Mother and child, 1895.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45 X 3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Visit of Mary Elizabeth, 1894.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03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Martha and Mary, 1896.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77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Holy spring in Gidel, 1905.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156.5 X 17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Figures in a Spring Landscape (Sacred Grove), 1897.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39 X 3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Bacchus and Ariadne, 1907.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81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술의 신 바쿠스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를 그린 작품이라 한다.
신화 속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듯하다.

 

Wedding Procession, 1892. by Maurice Denis. oil on canvas, 81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Children in the room, 1909. by Edouard Vuillard. oil on canvas, 84.5 X 77.7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방에 있는 아이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 (Edouard Vuillard, 1868 - 1940)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바느질로 생활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888년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가 피에르 보나르를 알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나비(Nabis)파의 일원으로 출발하였다.

인상파의 영향을 벗어나 고갱의 화풍을 따랐고 그의 그림은 
형태의 단순화와 색면(色面)의 장식적 배합을 지향하였다.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의 정경(情景)이나 실내의 정물과 같은 
신변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소재로 삼았으며, 깊이 있는 배색과 
애정 깊은 터치는 앵티미즘(Intimism)의 대표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임의적인 분할, 대담한 생략, 넓게 칠한 단색, 검은 테두리, 
원근감을 버리고 얻은 이분법적 화폭의 장식성, 채색의 섬세함 등이 특징이다. 
동시에 고갱의 구획주의와 종합주의에서 받은 영향이 드러나기도 하며,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 취향 역시 드러나고 있다.

 

In the room, 1899. by Edouard Vuillard. oil on 카드보드, 52 X 7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5

 

[영상] Maurice Denis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Vincent Van Gogh.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 화가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 등 그의 작품 전부를 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 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그가 죽은 지 11년 후인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반 고흐는 흔히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 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반 고흐 그림을 보유하고 있다.

 

Room of Vincent Van Gogh.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Memories of the Garden at Etten (Ladies of Arles), 1888.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13.

 

이 작품은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Arles)에서 그렸지만 
그 동기는 부모님 집 정원이 있는 북부 고향과 관련이 있다. 
이 당시 반 고흐는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고갱 역시 반 고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이 작품은 고갱의 영향과 반 고흐가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와 함께 발전시킨 종합적인 상징주의 형식과 신인상주의와 

자포니즘(Japonisme) 그리고 심볼리즘(Pont Aven Symbolism)의 융합적 결과물이다.
당시 반 고흐와 고갱과의 예술적 교류에 대해 15년 뒤 고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내가 아를(Arles)에 당도했을 때, 반 고흐는 신인상주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문제에 봉착한듯 보였으며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화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참을성 없고 의존성 강한 성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반 고흐가 그린 보라색 위에 노란색을 입히는 것과 그의 서로 보완하는 색채의 비체계적인 형식은 
그저 단순한 모노톤의 부드러운 불완전한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뭔가가 빠져있었지요.
저는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은 고유의 특성을 나타내듯이 반 고흐는 두려움도 없었고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반 고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의 해바라기 작품들에서 빛을 발하였습니다."
- 폴 고갱

평론가들은 실제로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Arles)에 당도하여 함께 작품 활동을 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화충이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고갱이 오고나서 한동안 고갱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이 작품 'Etten 정원의 추억(Memory of the Garden at Etten)'은 
반 고흐가 고갱의 화풍을 의식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 고흐는 곧 사실주의로 돌아간다.
반 고흐는 당시 고갱의 회화 이론을 간단하게 

실험적으로 사용하였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고갱과 함께 있을 당시 그린 아를의 여인,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병에 걸려 있을 때 고향인 쥔데르트(Zundert)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보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그림의 배경은 반 고흐의 부모님이 머물던 네덜란드 에텐(Etten) 목사관이며, 
화면 앞 쪽에 그려진 두 여인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인 빌이다. 

고흐는 평생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그 쓰라린 외로움 속에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 냈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출발점에 고흐를 위치시키면서, 
'고흐 이후' 화가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예술의 목적'에서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독학자들이다. (…) 
예술의 전통이 아카데미즘으로 몰락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언어를 새로 창조해야 한다. 
오늘날의 화가는 저마다 이 새로운 언어를 A부터 Z까지 재창조할 권리가 있다." 

피카소가 고흐에게서 바라본 새로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술의 규범성'이 '예술의 창조성'보다 우위에 있던 시대의 종말이 아니었을까.
미술을 배워보겠다고 학교나 스승을 찾았을 때마다 '너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돼'라든가, 
'이 학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라는 식으로 악평을 들었던 고흐가 
인생을 걸고 지켜내야 했던 '자기다움'을 피카소 이후의 화가들은 비로소 
'새로운 창조성'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새로운 예술의 언어를 창조하는 독학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피카소의 내면에는 어떤 불안도 싹트고 있었다. 
기존의 모든 전통에서 벗어나 '나만의 새로움'을 만들어간다는 것, 
마침내 그것을 해낸 고흐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고흐 이전의 화가들은 어떤 아카데미에 속하거나 어떤 유파에 속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한 유파에 속하지 않거나 살롱이나 아카데미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 재능과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흐는 바로 이런 유파나 아카데미즘의 안정감과 소속감에서 해방됨으로써 
그림 속의 색채와 형태를 '자기만의 세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고흐의 이런 면이 그의 위대성이긴 하지만, 
이후 현대 화가들에게는 활동의 제약이 될 수도 있음을 간파했다. 

"화가에게 어떤 기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기존의 정해진 규칙들이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해방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해방은 화가에게 엄청난 제약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에도 의존할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의 상태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흐가 독학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고흐는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매우 희귀한 예술가였다는 점을 피카소가 간파했고, 
평생 규범화된 전통과 싸워 온 고흐를 바라보면서 후대의 예술가들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끊임없이 자기만의 새로움을 찾아내기 위해, 
화가는 자기 자신의 새로움과도 싸워야만 한다. 
방금 전에 창조한 새로움을, 이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새로움으로 격파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끝없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다. 
이것은 희열과 고통이 뒤섞인 창조의 모순적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예술가들에게 창조의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했다. 
전통은 더 이상 따라야만 할 규범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고흐는 자신이나 다른 화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광기'와 '비정상'으로 규정해버리는 사회와 
끝까지 싸웠고, 그것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고흐에게 있어 전통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파괴의 대상은 아니다. 
고흐의 새로움과 창조성 또한 '전통과의 대화와 소통, 교감과 분석'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끊임없이 렘브란트, 밀레, 

들라크루아 등의 화가들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했고, 

모네, 고갱, 피사로 등 동시대의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는다. 
고흐는 단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전통과 동시대성과의 적극적인 소통 속에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갔다.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철학을 통해 받은 영감도 
그의 창조성을 일구어가는 데 있어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셰익스피어, 디킨스, 공쿠르 형제, 졸라, 니체 등을 통해 고흐가 받은 영감은 
고흐의 편지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곤 한다. 
그는 전통 자체를 경계한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즘으로 축소되어버린 전통을 경계했던 것이다.

고흐의 새로움은 단지 기법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고흐의 진정한 새로움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참신함이었다. 
힘겨운 노동을 버텨낸 사람들의 하루를 상징하는 신발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농부들, 똑같이 반복되는 동작을 

몇 시간이고 묵묵히 해내는 직공들의 모습을 이토록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격상시킨 것도 고흐 이전에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특히 인물화의 대상이 주로 '화가들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후원자들 
또는 그 후원자들의 취향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델 중심이었던 
과거의 관습이 고흐로 인해 거침없이 파괴된 셈이다. 
그는 '그림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취향에 호소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평생 가난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화가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작품 유통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생각 또한 고흐의 창조적 아이디어 중 하나다. 

그는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샤를 푸리에의 공동체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가들도 서로 외따로 떨어져 홀로 고통 받기보다는 함께 모여 서로의 결핍을 보살피며 
'연대'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직접 실천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고흐는 주어진 환경 내부에서 제한된 새로움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상의 작동원리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완전한 새로움을 원했던 것이다.

 

Bush, 1889.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에 속하는 부시(Bush)는 
생 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에 입원한 5월에 그려졌다.
정신병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약동하는 봄을 싱그럽게 표현했다.
병원 정원에서 라일락 덤불을 묘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붓놀림과 진동하는 모양은 인상주의의 교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인상파의 그림은 그러한 공간의 역학을 알지 못했다. 

반 고흐는 강력한 활력과 극적인 표현으로 가득찬 덤불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주는 자연의 힘은 정원 식물의 파편에 구체화된다. 
인상주의를 거부한 반 고흐는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 
예술가의 낭만적이고 열정적이고 깊이 있는 세계관을 표현했다.

 

Huts,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59 X 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사망하기 직전 아우버스(Auvers)에서 그렸다. 
농부 오두막을 모티브로 한 작업은 반 고흐를 반복적으로 매료시킨다. 

“내 생각에 건축 분야에서 내가 아는 가장 놀라운 것은 
초라한 초가 지붕과 그을음 난로가 있는 오두막입니다.”
라고 반 고흐는 그의 편지 중 하나에서 썼다. 

초가 지붕은 언덕, 들판 및 하늘처럼 자연의 일부이다. 
실생활의 언덕이 많은 부조는 화가에게 
공간의 역동성을 드러내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긴장되고 부분적으로 물결 치는 선과 선은 
기복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색상 대비로 강화된 표현을 만든다. 
이 그림은 작가의 불안한 영혼, 그의 극적인 시야를 표현한 붓으로 만들어졌다.

 

Morning: Peasant Couple Going to Work,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고흐는 밀레와 동시대 화가이지만 밀레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자신의 색깔로 다시 그렸으며 
밀레의 그림 속 언어를 자신의 색채로 번역해 냈다."

그는 밀레의 <장 프랑수아 밀레의 삶과 예술>이란 책을 읽고 밀레의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밀레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밀레의 그림을 수없이 따라 그린 
고흐의 독특한 그림은 또 다른 감동을 주면서 밀레의 그림까지 돋보이게 한다. 

결혼한 농부 부부는 여유롭게 일상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들판을 가로 지르는 길을 따라 산책한다. 
바구니를 든 농부는 마른 체형의 당나귀 등에 앉아 가고, 

남편은 갈퀴를 어깨에 메고 뒤에서 걸어간다.

태양은 오랫동안 떨어지는 그림자의 밝고 푸르고 차가운 색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고, 
따뜻하고 옅은 노란색조는 들판과 인물의 얼굴을 채색한다. 
농부 여성의 잠겨 있는듯한 얼굴은 태양쪽으로 바로 향하게 된다. 
동적인 선은 파스텔과 결합하여 동시에 밝은 색상으로 사진을 빛, 대기 및 공기로 만든다.

 

 Spectators in the Arena at Arles, 1888. by Van Gogh.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그린 그림은 투우가 열렸던 고대 원형 극장을 묘사한다. 
투우 참가자가 있는 경기장은 거의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주요 "캐릭터"는 좋아하는 쇼를 위해 모인 청중, 잡색의 사람들이다. 
관중 중에는 다른 작품에서 그에 의해 묘사된 예술가의 지인이 있다. 

그림이 만들어지는 동안 고갱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작업하였다. 
이는 공간의 평탄화, 브러시 스트로크를 넓고 어두운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일반화된 색 반점으로 대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회화의 표현은 반 고흐의 강렬한 기질, 그의 극적 시선에 의해 주어진다. 
인상주의에 대한 열정에서 살아남은 반 고흐는 강렬한 예술적 언어를 만들었다.

아를로 간 반 고흐는 이상할 정도로 꼼꼼한 필촉(筆觸)과 

타는 듯한 색채로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전개시킨다.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통요시키는 것에 아주 적합했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반 고흐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반 고흐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외젠느 보쉬(Eugène Boch)의 초상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이 그림에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경탄을, 사랑을 담고 싶었어. 
머릿속으로 나는 무한한 것을 그렸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성취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진한과 인상적인 파랑색으로 간단하게 배경을 그렸어. 
그리고 이 간단한 구성을 퉁해서 빛나는 짙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금발의 머리는 
짙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수수께끼와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어. ”

후기에 제작된 오베르의 풍경화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흐른 하늘 아래 한 없이 넓은 밭이 있고, 

나는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지.”

 

The white House at Night, 1890. by Van Gogh. oil on canvas, 59.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붉은색 지붕의 하얀 집 앞의 출입구에는 
이 집을 방문하려고 온 두 여인이 기다리고 있고 큰 길에는 여인 한명이 
무슨 보따리를 들고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1890년 6월 16일 빈센트 반 고흐가 말년에 지냈던 파리 근교 
오베르라는 곳에서 그린 것으로 밤 하늘에는 밝게 빛을 발산하고 있는 노란 별이 한개가 떠 있다. 

이 그림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 혼란기에 
독일의 나치 정부에 빼앗겨서 한동안 행방 불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95년이 되어서야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쟁 전리품 예술 전시회에 등장한 것이 고흐의 그림으로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천문학자들이 오베르의 오천 여 가구 중에 이 그림 속에 있는 하얀 집과 
똑같은 집을 찾아 내어 그 당시 그 위치에 떠 있었던 밝게 빛나는 별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역 추적해 본 결과 1890년 6월 16일 19시경에 
정확히 그림과 동일한 위치에 금성이 밝게 빛나고 있었음을 밝혀 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흐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우리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Portrait of Madame Trabuc, 1889. by Van Gogh. oil on canvas, 63.7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3

'아를레지엔’ 이라는 단어는 반 고흐의 시대에는 훨씬 더 그랬을 것인데 

즉각적으로 조르주 비제가 1872년에 작곡하기도 했던 알퐁스 도데의 

마치 진짜 주인공이 운명 그 자체였던 것처럼, 보기드문 간결함으로 

사랑과 죽음을 그린 비극적인 이야기 <아를의 여인> 을 생각나게 한다.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를의 여인들은 종종 

도데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힘을 전달해 준다.

이 연작의 주인공은 카페 드 라가르의 주인이었던 지누 부인(1848~1911)으로, 
그녀는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강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영상] Vincent van GogH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411, 412번 홀에는 포스트 인상파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인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체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1848년 혁명이 한창이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하였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귀족의 사생아였고 그로 인해 페루와 인연이 있던 트리스탕은 

혁명 강연을 다니다 보르도에서 1844년 병사하였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다행이 페루에서 알린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알린과 식솔을 환대하였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1854년 후견자가 실각하자 알린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조부인 기욤 고갱이 살고 있는 오를레앙으로 갔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알린의 어머니와 배다른 귀족 형제인 트리스탕 모스코소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고 알린은 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알린은 파리에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고갱은 지역의 학교 두어 곳을 옮겨 다니다 명문으로 평가되던 
루아레의 라 사펠-상-메스밍에 있는 카톨릭계 신학 소학교로 편입하였다. 
고갱은 이 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 파리에 있는 해군 예비학교인 로리올 학원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고갱은 다시 오를레앙의 리시 잔 다르크 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구한 직업은 상선 해병을 위한 도선사였다. 
3년간 도선사 생활을 한 고갱은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하였다. 
1867년 7월 7일 어머니 알린이 사망하였으나 고갱은 누나 마리가 
인도까지 달려와 알려주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그 소식을 알지 못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직하였다. 
가족과 친한 지인이었던 구스타프 아로사가 마련해 준 자리로 취직 당시 고갱의 나이는 23세였다.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이 되어 11년을 근무하였다. 
1879년 고갱의 수입은 연간 3만 프랑으로 

2008년 기준으로 환산할 때 12만 5천 달러 정도가 된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고갱은 미술품 거래에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는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73년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1850년 – 1920년)와 결혼했다. 
이후 10년 동안 살면서 둘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4년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수포 판매를 했지만 실패했다. 
고갱은 덴마크어를 하지 못했고 덴마크 사람들은 프랑스제 방수포를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인 가드가 외교관을 위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떠안았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11년간 이어져 오던 중산층의 결혼 생활은 고갱이 전업 화가가 되면서 주저 앉았다. 
살림이 급격히 기울자 아내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하였고 고갱은 1885년 파리로 돌아갔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가드는 결별을 선언하였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종종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렸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이사했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계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채소밭>과 같은 그림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2년 동안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간간히 폴 세잔과도 작업하였다. 
1883년 10월 폴 고갱은 피사로에게 자신이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듬해 1월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했다. 

루앙은 파리보다 집값이 싸지만 멀지는 않아서 고갱은 여름이 오면 
피사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그해 말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끝났다. 
고갱은 1884년 11월 자신의 작품과 도구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곧이어 자신도 아내에게 갔다. 
이때 보낸 작품들 몇 점은 아직도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들의 코펜하겐 삶은 녹녹치 않았고 1년여 만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갔다. 

고갱은 6살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에서 메테가 키웠다.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겨울이 닥치자 고갱은 밑바닥 일들을 하며 혹독한 빈곤을 겪었다.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자 고갱은 누나 마리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다. 

1885년 한 해 동안 고갱은 몇 점 밖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1886년 8회차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 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하였다. 
이 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루앙이나 코펜하겐에서 그린 것으로 새로 작업한 것이라곤 
예전에 그렸던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위로 옷을 덧입힌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 브라크몽이 고갱의 작품 하나를 샀다. 
이 전시회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하였는데 
고갱은 쇠라의 신인상주의니 점묘법이니 하는 것을 경멸하였다. 
이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주선하고 쇠라를 초대한 피사로와 

의견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둘은 절교하였다. 

 

Room of Paul Gaugu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 반도의 퐁타벤에서 보냈다. 
고갱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무엇보다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갱은 다혈질에 권투와 펜싱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퐁타벤의 화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찰스 라발로 고갱에게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다. 
이 여름에 고갱은 제8차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피사로 화풍의 
누드화를 찢어버리고 대신 <브르타뉴의 양치는 소녀>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당시 퐁타벤에는 영국의 랜돌프 칼데콧이 그린 삽화를 사용한 브르타뉴 여행 안내서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고갱은 이 안내서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화가들 처럼 자신의 작품도 보다 원색을 많이 쓰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브르타뉴 지역의 소녀를 소재로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때의 습작들은 나중에 파리로 돌아와 
<네 명의 브르타뉴 여성>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바탕이 되었다. 

고갱은 라발의 권유대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하였고, 
여행 뒤엔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커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과 함께 퐁타벤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내세우고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였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 화풍, 특히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렸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Miraculous Spring (Nave nave moe), 1894.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4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은 고갱이 폴리네시아를 처음 여행한 후 파리에서 만들어졌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는 원시적 자연성을 보존한 분위기로 고갱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은 타히티의 기억과 만물의 조화에 대한 낭만적인 꿈을 모두 구현했다. 
타히티 여성의 이미지는 삶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수면에 잠긴 그녀의 머리 위로 빛나는 젊은 섬사람은 처녀 순결의 화신이다. 
두 번째 소녀는 과일을 손에 들고 이브처럼 그와 함께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풍경의 깊숙한 곳에서 원주민들은 신비한 고대 신인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춘다. 

고갱은 타히티 (1891-1893)에 처음 머무르고 돌아와 거의 2년 동안 파리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는 원시적 단순함의 보존으로 보았던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 작가의 상상력을 포착했다. 
이 작품은 타히티에 대한 그의 기억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조화에 대한 그의 낭만적인 꿈을 담고 있다. 

타히티 소녀들은 삶의 여러 단계를 상징한다. 
머리 위에 후광이 있는 젊은 섬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진 처녀 순결의 화신이며, 
손에 과일을 들고 있는 두 번째 소녀는 이브와 같다. 
풍경 깊은 곳에서 섬 주민들은 신비한 고대 신인 우상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캔버스는 선과 같이 하나의 리듬에 종속된 일반화된 평면 영역에 
순수한 색상을 적용하여 작가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보여준다.

 

Tahitian Pastorals,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87.5 X 11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타히티 섬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은 자연스러운 "원시적" 삶의 짧은 서사시를 구현한다. 
이 세계의 조화를 찾아 고갱은 폴리네시아로 갔다. 
이국적인 자연의 인상, 섬 주민들의 독특한 외모, 자연의 은혜, 
신비한 신념과 관습이 결합된 낭만적 인 꿈, 타히티 소녀 중 한 명이 플루트를 연주한다. 
원주민들은 이 음악을 달의 여신인 히나에게 바쳤다. 
그림은 히나를 기리기 위한 의식 춤과 음악의 시간이 일몰과 함께 시작된 저녁 시간을 묘사한다. 

 

Tapera mahana (Late Afternoon), 1892. oil on canvas, 72.3 X 9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빈센트 반 고흐가 이십 대를 훌쩍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면 
그의 절친한 친구 고갱은 한술 더 떠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 전에 증권 브로커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지망생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컬렉터가 되기도 했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고는 수준급의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직업을 그만두고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가뜩이나 고갱은 이미 삼십 대를 훌쩍 넘긴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고갱은 결국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갔고, 작품 활동도 아마추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그림을 찾는 컬렉터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절망감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Conversation (Les Parau Parau), 1891.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0.3 x 7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고, 고갱은 유럽과는 다르고 
자연의 조화를 보존한 세계에 대해 낭만적인 인상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에 작가가 붙인 제목은 섬 주민들의 언어에서 "험담" 혹은 "흉보기"으로 번역된다. 
원 안에 앉아 있는 여성들은 대화에 참여하지만 줄거리의 일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의 느낌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갱은 끊임없는 삶의 흐름과 함께 영원한 세계의 
이미지를 창조하는만큼 구체적인 현실을 그리지 않는다. 
인상주의 시대를 거친 고갱은 이 방식을 떠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선의 리듬을 사용하고 공간을 단순화하여 
색상 반점의 음질 조합을 만들어 강조된 장식성에 도달한다.

 

At the foot of the mountain,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 x 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작품 '산 기슭에서(At the foot of the mountain)'는 낭만적인 이국주의와 
자연의 조화로 고갱을 매료시킨 폴리네시아 타히티 섬에서 그려졌다. 
이 풍경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된 산기슭의 큰 나무는 고갱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 

 

Still Life with Mig and Carafe, 188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54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1. 

이 정물에서 사물의 조합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형식적인 병치의 논리뿐만 아니라 
주제별 고려 사항에서도 나온 것 같다. 
예를 들어 중앙의 레몬은 전체 구성이 걸려 있는 밝은 점이지만 
테이블의 다른 항목과 마찬가지로 그 로그를 준비하는데도 필요하다. 
따라서 레몬 옆에는 매우 강한 와인 한 병, 각설탕, 
뜨거운 물 잔, 혼합용 숟가락 및 큰 머그잔이 있다. 

고갱은 정교하게 조각된 병과 가장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머그잔이라는 
아이러니 한 메모와 함께 두 개의 물체를 나란히 배치했다. 
현재의 정물은 빛을 재현하는 인상파의 관심뿐만 아니라 강한 구성으로도 유명하다.

 

Woman holding a fetus (Eu haere ia oe),1893,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 역시 고갱이 타히티에 머물던 시대에 속한다. 
유럽과는 달리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국적인 세계에서 오세아니아의 밝은 색과 
무성한 초목의 인상, 타히티인들의 모습과 삶 등은 화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섬 주민들의 삶의 평범한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삶의 영원한 리듬, 인간과 자연의 조화의 구체화를 본다. 

손에 과일을 들고 전경에 서 있는 타히티 여인은 이 토착 낙원의 이브이다. 
전통적인 회화의 규칙을 버리고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공간의 평탄함, 선, 모양 및 색 반점의 리드미컬 한 반복, 
큰 배열로 놓인 순수한 페인트는 장식 효과를 증가시킨다.

 

Month of Mary (Te avae no Maria),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6 X 7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타히티 섬에서 일어난 고갱의 생애 말년에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다. 
작품의 주요 주제는 봄 자연의 개화이다. 
기독교 이전의 유럽에서는 5월 초에 깨어남을 위한 이교도 명절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5월 예배는 성모 마리아 숭배와 관련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이국적인 세계와 고대 동양 문화에 대한 작가의 인상에서 탄생한 
삶의 자연스러운 리듬은 선과 색의 조화로 캔버스에 구현된다. 
노란색은 동양 미술에서 특히 중요하다. 
여성의 포즈는 자바 섬에 있는 사원 부조의 모습을 닮았고, 
그녀의 흰 가운은 기독교인과 타히티인 모두에게 순결의 상징이다. 
다양한 종교적 사상과 신념을 결합한 작가의 상상력은 원시적 삶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Pie (Te vaa),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5.5 X 1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폴리네시아에서 제작된 이 그림은 섬 주민들의 가족을 묘사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퓌뷔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의 
"가난한 어부(Poor Fisherman)"의 그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갱의 낭만적인 상상력은 타히티의 인상뿐만 아니라 
고대 문화의 기념물인 다른 거장들의 작품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원주민의 포즈는 고대 이집트 그림의 인물인 
어깨의 정면 이미지와 다리의 프로필 이미지와 비슷하다. 
코코넛 껍질에서 마시는 타히티 인의 몸짓은 의식적인 성격을 띤다. 
불행히도 그림의 색상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었으며 
이로인해 색상이 어느 정도 원래의 사운드를 잃었다.

 

Scene from the life of the Tahitians,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89 X 12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는데, 그곳에서 고갱은 깨끗한 세계에 대한 꿈을 이끌었다. 
섬 주민들의 삶의 에피소드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참가자들이 이미지 외부에 남아 있는 일종의 종교적 행동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저녁 시간은 신성한 의식을 위한 시간이다.  

원주민의 고대 숭배를 연구한 작가는 종종 마오리족의 
신념과 관련된 모티프와 상징을 그의 작품에 도입했다. 
일부 캐릭터의 포즈는 파르테논 프리즈의 인물과 비슷하다. 
고대 문화의 공통성을 감지한 주인은 이집트와 골동품 기념물로 눈을 돌렸다. 
고갱은 원래의 자연 생활의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했다. 
소리가 나는 색상의 일반화된 반점, 공간의 평평함, 
선의 리드미컬한 반복은 탁월한 장식 효과를 만든다.

 

Baby (Christmas), 1896.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7 X 7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없는 순수함 속에는 꿈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빈센트 반 고흐의 초대로 아를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버려, 재차 순수함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Hiva Oa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는 세잔 · 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Landscape with two goats (Tarari Maruru), 1897.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은 고갱의 생애 마지막 몇 년 전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다. 
작품의 주제는 아마도 타히티인들의 종교적 신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주민의 관습, 생활 및 신념은 자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영원한 리듬을 따른다. 
전통적인 표현 수단을 포기한 고갱은 이국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개별 스타일을 개발했다. 
어두운 색은 수수께끼의 작품을 제공한다. 
자연 그대로의 오세아니아는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약속된 땅"의 의인화가 되었다. 

 

Idol, 1898.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3.5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타히티 섬에 그려진 우상(Idol)은 신비한 이국적인 세계를 묘사한다. 
아이돌은 유기적인 부분으로 문명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삶의 구체적이고도 신비한 생물처럼 동상이 아니다. 
그림의 실루엣은 나무 줄기의 긴장된 곡선에 반영된다. 
우울한 색상은 기분의 불안을 증가시킨다. 
이 아이돌의 이미지는 고갱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우상은 섬 주민들이 숭배한 폴리네시아의 달의 여신 히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생물에는 자연의 힘이 구체화되어 생성하고 죽인다. 
고갱은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삶에 대한 낭만적인 꿈에 따라 폴리네시아로 옮겨졌다. 
아이돌은 이 삶의 흥미진진한 신비 중 하나의 구체화이다.

 

Women by the sea (motherhood),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5.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이 작품 바다의 여성 (모성)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의 생애 말년에 그렸다. 
생명이 자연의 흐름을 보존하는 이국적인 오세아니아 세계에서 고갱은 유럽 문명을 떠난다. 
모성이라는 주제는 마스터 작업의 폴리네시아 시대에 두 번 이상 발생했다. 
이 작품의 등장은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다. 

타히티인으로 고갱의 사랑을 받는 파후라는 1899년 아들을 낳았다. 
실제 장면은 신성한 의식의 특징을 취한다. 
이 구성은 유럽 종교 그림에서 전통적으로 아기를 숭배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접힌 손에 꽃을 든 여성의 중심 인물이 특히 중요해 보인다. 
장식 효과는 리드미컬하게 구성된 색상 배열과 
고갱의 개별 스타일의 특징인 윤곽선의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Three Tahitian women on a yellow background, 1899.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8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노란색 바탕에 세 타히티 여성(Three Tahitian women on a yellow background)은 
고갱의 생애 말년 폴리네시아에서 그려졌다. 
타히티와 고대 문화의 인상을 결합한 작가의 상상력은 
이국적인 세계의 신비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항상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작품은 미해결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색 반점과 리드미컬한 선의 조화를 이루는 장식적인 그림이다. 
여성의 포즈-특별한 우아함과 가소성, 원주민 여성의 중심은 
자바 섬의 보로부두르 사원 부조에 묘사된 그림과 유사하다. 
"야만인"의 세계는 문명화된 유럽이 잃어버린 자연의 조화를 보존한다.

 

Sunflowers, 1901.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해바라기(Sunflowers)는 고갱이 그의 생애 말년에 폴리네시아에서 그렸다. 
그 주제는 태양의 상징인 해바라기의 모티브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반 고흐의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에 두 예술가는 아를(Arles)에서 작업했으며 반 고흐(Van Gogh)는 해바라기로 정물을 그렸다. 
고갱은 프랑스에서 그에게 보낸 씨앗을 오세아니아에서 재배했다. 
배경의 꽃 중앙에 펼쳐지는 눈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는 눈"과 유사하다. 

 

Two sisters, 1892.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0.5 X 6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두 명의 타히티 소녀인 자매는 고갱의 가장 훌륭한 아이들 이미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어린 딸에 대한 기억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신비한 배경은 어린이 피규어의 단순한 실루엣과 대조를 이룬다. 
고상한 단순함은 어린 시절 특유의 섬세함과 결합된다. 

 

Bouquet, 1884.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65.3 X 5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Man Picking Fruit from a Tree, 1897. by Paul Gauguin. oil on canvas, 92.5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2.

 

[영상] Paul Gaugu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가는 서부 Piedmont에 있는 Cesana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들의 성 세잔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에 있는 액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1839년 2월 22일에는 그의 할머니를 대모로, 
삼촌인 Louis를 대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아우구스테 세잔(Louis-Auguste Cézanne 1798~1886)은 
한 은행의 공동창업자였는데, 이 은행은 폴 세잔이 살아있는 동안 번영하여 
폴의 경쟁자들에겐 불가능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폴은 큰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매일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매리(Marie)와 로즈(Rose), 두 여동생이 있었다. 
폴이 열살이 되던 해에 그는 Aix에 있는 성 요셉 학교에 입학했다. 
1852년, 그보다 낮은 학년에 있던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Baptistin Baille를 만났던 
Collège bourbon(지금은 Collège Mignet)에 입학했다. 

1861년, 폴 세잔은 그의 미술적 발전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을 버리고 아약스를 떠나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된다. 
처음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피사로는 세잔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Louveciennes와 Pontoise에서 10년이 넘게 함께 풍경화를 그리면서 
둘의 관계는 합작하는 평등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Jas de Bouffan, the Pool, 자 드 부팡의 수영장, 1876.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1 x 5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특히 상상으로 그려진 중후하고 큰 풍경화도 있었다. 
나중 그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숙된 작품들에서는 거의 건축에 가까운 굳어진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Girl at the Piano (Tannhäuser Overture), 186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2.5 x 5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많은 예술가들이 바그너의 위대한 오페라 작품의 서사적이며, 정신적이고 회화적인 암시에 
전율했지만 가장 열정적이고 원칙주의자였던 화가는 세잔과 반 고흐였다. 
세잔은 바그너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같은 주제로 세 편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 중 마지막 작품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1868년 파리에 간 세잔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서곡뿐 아니라 <탄호이저>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 한달 후 세잔은 액상프로방스로 돌아와 다시 이젤 앞에 섰다.

긴긴 밤에 바느질하는 엄마와 피아노 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어느 시골 가정의 모습은 
그 설명적인 제목으로 인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직선적인 구도와 충돌하며, 벽과 의자 주위에서 불안정한 기운을 조성하는, 
시각적으로 다소 산란스러운 문양에서 감성적인 교류를 포착할 수 있다. 
세잔은 친구에게 자신을 위해 연주해 줄 것을 부탁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으로 청각 신경을 자극시켜 달라' 고 말했다.

 

Flowers in a Blue Vase, 1873.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 x 5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이 작품은 세잔이 인상주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기에 그려졌다. 
세잔의 그림은 60년대의 그림에 비해 더 가벼워졌다. 
작업은 빛의 반사와 진동을 전달하고, 질감은 뛰어난 이동성을 획득했다. 
동시에 형태의 명확성과 회화의 밀도는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한 세잔은 그들의 친구였다. 
그러나 인상파 시대의 작품에서 이미 드러난 세계에 대한 다른 비전은 
세잔을 친구들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미래에 그는 그의 "고전적인" 태도에 의해 결정된 길을 따랐다.

 

Self-portrait in a cap 모자를 쓴 자화상, 1872.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9.7 x 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9. 

 

이 그림은 폴 세잔이 인상파, 특히 피사로(Pissarro)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려졌다. 
작품의 구성은 피사로의 자화상 (Musée d' Orsay, Paris)과 비슷하다. 
인상주의와 함께 캔버스는 자유 획과 관련이 있으며 

조명 효과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글씨의 스케치 성과 윤곽선의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형식은 더 큰 확실성과 밀도를 유지한다. 
세잔은 그의 외모의 특징인 그의 나이보다 나이가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수염뿐만 아니라 세잔이 끊임없이 경험한 내면의 긴장과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평생동안 그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간단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는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 

라고 말한 것과, 그가 Poussin의 “After Nature”를 재구성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통합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조했다.

1852년 세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가난하고 병약한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가 곧 훗날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 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와의 관계는 그가 대표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 네 번째 소설 
〈작품(L'oeuvre)〉 속에 등장시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의 모델이 
세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국을 맞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상황이 세잔 본인과 비슷했고 다른 등장 인물들 또한 
졸라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과 유사했기에 세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졸라가 보내준 소설을 읽은 세잔은 1886년 4월 그에게 "이렇게 훌륭히 추억을 담아주어 감사하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30여년의 우정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잔은 졸라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과 갈등은 훗날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 Cezanne and I, 2015)>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Room of Paul Cézann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각의 진실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세잔의 욕망은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생생하게, 혹은 살짝 다르게 해석하여 
관객이 이전의 이상적인 관점과는 다른 심미적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잔의 혁신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다양한 설명들을 병든 망막, 맑은 시각, 
그리고 증기 기관차의 영향이라고 평가하게 만들기도 했다.

 

Bank of the marne, 188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1.3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나무로 둘러싸인 전용 센터가 있는 그림의 구성은 닫혀 있고 안정적이다. 
물체의 모양에 배치된 스트로크는 단순한 기하학적 몸체에 접근하는 일반화된 볼륨을 조각한다. 
색상의 색조는 나무의 녹색과 공기의 파란색에 의해 결정되며 작가의 의지로 압축된다. 
세잔이 밝힌 물질 세계 구조의 명확성은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Smoker, 1890~1892.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3.5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종종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자세의 인물은 그에게 더 이상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도움으로 캔버스에 관심 있는 문제의 컬러 솔루션을 전달할 수 있었다.

흡연자(Smoker)에 묘사된 농민의 모습은 차분하고 확고한 성격, 전체적인 특징이 부여된다. 
작가가 결코 사람의 개별적인 특성을 전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인물의 사회적 또는 심리적 초상화를 그려 내려고 했지만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은 사회의 상황에 관계없이 거의 기념비적이다.

흡연자의 눈 대신 페인트의 어두운 점만 있지만 구성이 
일상 생활과 사소한 소란에서 분리되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흡연자(Smoker)의 등 뒤에는 세잔의 병과 사과가 있는 정물이 보인다. 
"무엇보다도-나는 관습을 어기지 않고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Big pine near Aix, 1895~1897.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1 x 7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인상주의가 포착하려고 했던 것은 ‘순간적 인상’이었다.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빛과 이 빛이 빚어내는 불규칙한 색채에 의해 
사물의 윤곽은 깨지고, 형태는 해체된다. 
빛으로 채색된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은 회화사의 빛나는 순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 전시가 있은 지 불과 10년 후, 르느와르는 인상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토로하며 
고전주의 거장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갔고, 피사로는 과학을 통해 
인상주의 화면의 허약함을 넘어가려 했던 신인상주의에 주목했다.

그리고 세잔은 인상주의 화면에 ‘솜방망이’ 같은 비전 대신 
“박물관에 있는 미술처럼 단단하고 지속적인” 것을 집어넣고 싶어했다. 
‘경이적인 눈’을 가진 모네의 그림에 단단한 골격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생트-빅트와르로 향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좋은 참고서입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다양한 그림이야말로 실재하면서도 경탄을 금치 못할 연구 대상입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다시 고전주의에 이르고자 했다.

투시도법에 의해 구축된 전통적 회화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변화를 제거한다. 
이 경우 회화 평면은 하나의 점 (소실점)을 중심으로 질서화됨으로써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통제하며, 회화의 모든 요소는 대상과 공간에 종속된다. 
이와 반대로 인상주의의 캔버스는 모든 것이 변화인, 변화가 모든 것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빛과 대상은 해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화면은 해방되는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는 잔상(殘像)들, 흔적들의 무덤이 되었다. 

세잔은 이 모두를 넘어선다. 그에게 자연은 우선적으로 ‘진동’이며 ‘흐름’이다. 
그러나 진동은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순간들이 아니라, 
순간 속에 새겨지는 우주적 힘이자 동일성을 생산하는 차이의 장(場)이다.
그러나 이런 진동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화가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과 견해들에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관습과 제도가 양산하는 온갖 클리셰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세계를 감각하는 ‘민감한 판’이 되어야 한다. 
세계의 삶 속에서 순간이 지나간다. 
화가는 모든 것을 망각한 채 ‘바로 그 순간’이 되어야만 클리셰가 아닌 리얼리티를 그릴 수 있다.

 

Still life with drapery, 1895.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4.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커튼이 있는 정물화(Still life with drapery)는 정물 장르에서 세잔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옛 거장들과 달리 세잔은 사물의 질감을 전달하지 않는다. 
경쾌한 색상으로 표현되어 전체 구성의 역동성과 긴장감을 갖게 한다. 
동시에 그림은 형태와 색상의 균형으로 물질 세계의 무결성과 안정성을 갖게 한다. 

화가 ‘ 모리스 드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는 바로 ‘폴 세잔’의 사과라고 말했다. 
서구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의 사과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세잔의 사과이다. 


세 가지의 사과 중 첫 번째 사과는 이브의 사과다. 
이는 유럽 사회를 지탱하는 힘,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로 합리적 사상과 과학적 사고방식의 근원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은 바로 세잔의 사과인데 세잔은 고흐처럼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사과는 과거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미술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개척한 사과로 유명하다. 

 

Still Life with Apples, 189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5.2 x 4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사과가 왜 유명한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원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재력으로 아들을 마음껏 공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세잔이 법과대학을 가기를 원했다.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법 공부는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본 세잔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1861년 세잔은 법 공부를 그만두고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 ‘아카데미 쉬스’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세잔은 그곳에서 일생의 친구인 ‘카미유 피사로’와 ‘아르망 기요맹’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랑스 유일의 국립 미술 학교인 ‘에꼴 드 보자르’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여 다시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가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된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년 뒤 
은행 일을 그만두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 그림에 몰두하였다.

피사로, 기요맹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1863년부터 1866년까지 꾸준히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바로 낙선전에 참여하였으나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낙선전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유명세를 탄 ‘ 에두아르 마네’를 
친구 소개로 만나게 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그림에서는 유화물감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와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감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했고 
세잔은 그런 새로운 기법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형태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늘 아쉬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해가 지기 전, 즉 빛의 양이 변하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려 했고, 
그러다 보면 유화물감의 성질상 짧은 터치로만 붓질을 하게 되어 
외곽선과 깔끔한 면은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은 항상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보면 그는 붓 터치로만 해가 뜨는 파리의 풍경을 
표현하려 했고, 결국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세잔은 빛에 대한 색의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깊게 교류하지는 못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작업실을 차리고 그 변하지 않는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Still Life Peaches and Pears, 1888~189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46.2 x 5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은 유독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모델이 고정된 포즈를 
오랫동안 취해야 하는 인물화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경화와 달리 
정물은 시간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물은 내가 마음대로 위치를 바꿔도 괜찮은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다.

세잔이 그린 사과가 우리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곽선도 그림자도 진하게 그리지 않았다. 
세잔 이전의 사과는 붉은 색채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빛과 그림자, 반사광 등을 넣어 
사과처럼 보이게 하는 정해진 방법으로 그렸다. 

그러나 세잔은 사과를 입체적이고 둥글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순색으로 붓질을 하였다. 
붓질의 방향이나 터치로 생긴 자연스러운 반짝거림으로, 
보는 사람이 더 직관적으로 사과라고 느낄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사과라는 ‘구’(동그라미) 형태를 짧은 터치가 아닌 
면과 붓질로 더욱 구처럼 보이도록 풀어내려 한 것이다.

세잔의 그림에서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보로 가려져 얼핏 보면 모를 수 있지만 사과가 놓인 탁자의 왼쪽 부분과 
오른쪽 부분의 높낮이가 맞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원근법이나 시선의 높낮이 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세잔은 하나의 완성된 그림에서 여러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데 
대상이 가장 그 대상같이 보이는 시점으로 서로를 조립하는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접시는 보다 접시다워 보이는 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생강 단지는 
속이 빈 둥근 항아리 본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으로 그려내는 것. 
즉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성질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그림에서 고정된 시점이 아닌 다시점으로 형태의 본질을 
색으로 표현하려 했던 세잔의 시도는 당시에는 인정받기 힘들었지만 그의 사후,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세잔의 위대함과 존재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Apples, Peaches, Pears and Grapes, 1879~188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3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순수한 색 면으로 대상의 형태를 견고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동시대 화가 ‘고갱’을 거쳐 야수주의 ‘마티스’에게,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형태와 각각의 대상들이 보여주는 다시점은 
입체주의 ‘브라크’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 

 

Mont Sainte-Victoire. 1896~189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99 x 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이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 후 
얼마동안 체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 
이 이동은 파리 중심적이던 인상파들이 세잔의 고향이 있는 
남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호텐스(Hortense)의 형제 중 에스타크(Estaque)에 
생트-빅투아르 산(Montagne Sainte-Victoire)이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880~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1888년 가단느(Gardanne)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The Constructive Period)라고 불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세잔의 가족들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세잔은 호텐스(Hortense)와 결혼하였다.

이 해에, 또한 세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잔에게 

1859년에 산 사유지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8년에 가족은 편리를 제공하는 넓은 땅이 있는 대저택 Jas de Bouffan으로 옮겼다. 
이 저택은 현재 땅이 줄어들었지만 시 소유로 공공을 위해서 개방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세잔의 친구이던 에밀 졸라(Émile Zola)와의 친분도 깨어졌다.

 

Mount Sainte-Victoire, 1897~1898.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10. 

 

세잔은 말한다.
"나는 그 산에 때때로 올라가보곤 했다. 
팔레스트로에서부터 벌써 숲이 나타난다. 벌써 공간의 시작이다.
산타크루스로 인도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들은 벌써 

어떤 위대한 정적이 심신을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도시 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란을 피운 뒤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애써 나는 쾌락으로 들떠서 빠르게 뛰는 가슴의 고동소리며 숲의 넓고 깊은 호흡을 듣는다.
이처럼 음악도 때로는 '스타카토'로부터 '레가토'로 과도기의 과정없이 뛰어넘는 수가 있다.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곡식단처럼 묶여있다가 이 지점에 오면 매듭이 풀려 기쁘게 개화(開花)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순간만을 살도록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Bathers, 1890~189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54.2 x 6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작품 Bathers는 유럽 예술의 유서 깊은 전통을 이어 갔지만 
동시에 화단의 학문적 누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Bathers는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현한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Arc River에서 수영을 즐기는 시골로 갔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잔은 관습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원시적"인 그림처럼 "어색하게" 되었다. 
현재의 그림을 포함한 그의 그림은 역동적인 세계가 살아남을 수 없는 
견고함을 표현하는 단단한 피라미드 구조이다.

 

Self Portrait 자화상, 1880~188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55.5 x 4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어느날, 세잔은 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폭풍에 갇히고 말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2시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잔은 지나가던 마차에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늙은 집사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원래 혈색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러 나갔으나 얼마 후에 다시 쓰러졌다. 
그와 함께 일하던 모델이 도움을 요청하여 침대로 돌아왔지만 세잔은 이후로 일어나지 못했다. 
몇일 뒤, 1906년 10월 22일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렴이었으며, 그의 고향 Aix-en-Province에 있는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Blue landscape 푸른 풍경, 1904~1906.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82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풍경은 인상파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티브로, 물 속의 진동하는 반사는 보이는 세계의 다양성을 상징한다. 
세잔의 작품에서 반사는 움직이지 않고 물은 얼어 붙은 거울과 비슷하다. 
인상파와는 다른 세계관은 예술가를 그들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했다. 
세잔은 자연에서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Houses Along a Road (Maisons au bord d'une route) 길가의 주택들, 1881.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6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도로가 회전하는 모티브는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초에 
세잔의 그림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인상을 표현적이고 간단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림을 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도로는 작업 내에서 다양한 평면을 연결한다. 
도로의 굴곡은 세잔에게 자신을 전경과 중간 지대로 제한하는 편리한 방법을 제공했다. 
풍경에는 사람이 없지만 인간 활동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 
통로를 따라 있는 작은 집과 돌담은 사람들이 이 벽 뒤에 남겨진 느낌을 준다.

 

Lady in blue, 1900. by Paul Cézanne. oil on canvas. 73.5 x 9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0. 

세잔의 마지막 여성 초상화 중 하나인 이 작품의 모델은 브레몽 부인(Madame Brémond)이다. 
작품의 색조, 모양 및 색상에서 포비즘과 입체파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영상] Paul Cézanne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407 ~ 408번 홀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출난 표현을 선보였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에 대비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 것은 르누아르이다. 
세잔이 풍경 속에 자연의 정신을 품듯이 르누아르는 여인을 그려서 미의 도취를 자아내고 있다.

르느와르는 1841년 2월 25일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4살에 파리로 이사와 7살에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난이 더 심해져 더 이상 르느와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13살의 그를 학교에서 데려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보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자기의 윗그림 그리기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이 훈련소를 다녔는데, 낮에는 이 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료로하는 드로잉 수업에 가곤 했다. 
르느와르는 그 때부터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애칭이 루벤스였다는 것과 
그를 제자로 삼겠다고 자청했던 이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그의 부모님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싶었지만, 
당시 화가라는 직업이 가난으로 직통하는 확실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는 결국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가 되던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화가가 되기로 그와 그의 가족이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살 수도, 모델을 살 수도 없었고, 
먹을 것을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Lady in black,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5.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블랙 레이디 (Lady in black) 초상화는 '르누아르 형' 여성의 서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자연스러운 조화와 여성스러움을 사로 잡는다. 
인상파의 전성기에 그려진 이 작품은 주로 검은 드레스 이미지에서 복잡한 색상 뉘앙스를 보여준다. 
가벼운 공기 환경의 영향으로 음영이 변하는 검은 색은 넓은 범위에 걸쳐 다채로운 비율로 전달된다.
흰색 커프스와 칼라의 색상 반사 작용은 훌륭하게 보여진다. 

얼굴이 더 부드럽고 세밀하다. 
르누아르 초상화의 특징인 이 기법은 자유로운 진동 브러시 스트로크와 결합됩니다. 
이 작품의 모델은 유명한 음악 출판사 사장의 아내인 마담 아트만 (Madame Artmann)라고 한다.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8.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05 x 1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누아르에게 있어서 여성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매력과 

직접적이고 신선한 지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네가 풍경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르누아르는 초상화에서 

어떤 하나의 순간의 느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르누아르의 작품 속 모델들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생함과 자연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여배우 프랑세스 잔느 사마리를 모델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잔느 사마리가 19세기 후반의 특징적이지만 다소 무미건조한 듯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전신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수줍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장갑을 끼고 포개어 놓여 있는 두 손, 가볍게 안쪽으로 살짝 굽혀져 있는 몸, 
매력적이만 다소 경직된 그녀의 미소 등은 그녀가 대중들 앞에 서 있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배경으로 등장하는 응접실과 바로 잔느 사마리이다. 
배경이 되는 응접실의 분위기는 화려하지만 무거운 듯한 느낌이 깃들여져 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잔느 사마리는 밝고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또한 분명 어두운 배경 하에서 묘사된 분홍색 드레스의 

아름답고 거품처럼 부드러운 효과와 잔느 사마리의 자연스러운 자태와 

밝은 미소의 결합이 관객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Girl with a Fan, 1880.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부채를 들고 있는 소녀는 여러 차례 르누아르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르누아르도 그렸던 La Grenouillere 바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전적으로 배열된 특징이 아니라 젊음의 매력, 그녀의 얼굴의 생생한 색, 
그녀의 눈의 빛, 르누아르가 항상 그의 주제에서 추구했던 그 자질들에 있었다. 
따라서 얼굴이 더 매끄럽게 그려지고 여기에서 세부 사항을 선택할 수 있으며 
손, 드레스, 심지어 부채는 대략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Woman Combing Her Hair, 1887.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5.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느와르는 당시 글레르의 밑에서 함께 수학하며 촉망받던 의학도이자 
부유한 화가 지망생인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얹혀 살면서 
모네도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시슬리도 얼마 후 같은 건물로 이사오게 된다. 

르느와르는 모델료가 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 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훗날 외광파의 일원으로 묶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르느와르의 운명이 그를 자연에만 몰두하도록 두지는 않았는데,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후 그녀는 그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의 전기 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글레르의 스튜디오를 나와 바티뇰에서 함께 살던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들에게 
화가 지망생으로의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매일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자기가 칠하고 싶은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온갖 색으로 그들의 캔버스를 물들일 순 없었지만, 그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던 숲 속에서 캔버스를 펼쳐 둔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인 모네, 
시슬리에게 자연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느와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르느와르는 분개했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의 기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Young Girl in a Hat, 189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41.3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1890년대에 르누아르는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의 주제를 자주 그렸다. 
세기 말의 멋진 여성용 모자는 르누아르의 관심을 더욱 불러 일으켰다. 
르누아르는 때때로 그의 모델을 위해 특히 특이한 모자를 주문했다. 
19 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모자인 샬럿은 그 기간 동안 여러차례 
그림과 석판화에서 르누아르에 의해 묘사되었다.

 

Young Woman in a Flowered Hat, 189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41.5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여성은 사상자나, 행동이나 가정 주부, 혹은 자연의 창조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창조자이거나, 혹은 그 장식품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가장 활기찬 색깔, 풍부한 정원 꽃들은 여기서 꽤 적절하다. 
이 작품에서 대표되는 여성은 보통 부드럽고 타원형인 얼굴과 
작고 동그란 코를 가진 여성의 일반적인 르느와르 타입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모델이 아니라, 초상화를 의뢰한 여성일 것이다. 
캔버스가 구식이라는 사실은 모델들의 규칙적인 사진들이 

날짜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Woman head,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38.5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초상화는 주요 장르가 되었고, 
주인공은 살아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의인화하는 여성이다. 
이 모델은 헤어 스타일의 외모와 성격 모두에서 
이번 아티스트의 작품에 등장한 여러 캐릭터와 유사하다. 
이 모델은 안나(Anna)라고 한다. 
스케치는 이미지가 서정적이고 여성스러운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별도의 붓놀림의 자유와 유연성, 색상 관계의 부드러운 뉘앙스 및 
가벼운 공기 환경에 대한 관심은 최근 르누아르 그림 스타일의 특징이다.

 

Woman on a Staircase,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67.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1870년 기병대로 2년 간의 프러시아전쟁 기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르느와르는 
동료들과 자신들만의 협회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하였고, 
그의 총감독 하에 1874년 첫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관람객들은 매우 적었으며, 재정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듬해 재정적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작품들을 

경매에 부쳤지만 반응은 매우 냉담할 뿐이었다.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되주었던 부유한 바지유의 전시와 더불어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심각하게 재고해야만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무렵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이었다. 
그는 프러시아 전쟁기간에 런던에서 처음 모네와 시슬리를 알게 되었는데, 
르느와르는 아마 모네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뒤랑-루엘을 통해 르느와르는 다른 여러 화상들을 만나고, 
자신의 후원자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즉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Man on a Staircase, 1876.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67.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이후 르느와르는 살롱에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1878년과 79년 두 차례 모두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다. 
특히 79년 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르느와르에게 부와 명성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르느와르는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0세가 다 된 르느와르에게도 이 무렵에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 모자상 Aline Charigot가 그 주인공이었다. 
1880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서 5년 뒤 그들의 아들 Pierre가 태어나고, 10년 뒤 결혼하게 된다.

젊은 화가 지망생을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의 명성은 
그의 지난날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여러 가지 전개 과정을 거쳐 발전과 성숙, 완성미를 모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으로의 여행이 힘이 되주었다. 

그는 아탈리아로의 그림 여행을 통해 라파엘과 앵그르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잡아 줄 보다 많은 윤곽선을 넣고, 
색조를 좀더 차갑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르느와르의 작품의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따라서 인상주의 작품이라기보다 고전주의 작품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그림이 가지는 사랑스러운 질감과 보풀거리는 듯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어두워진 색조와 분명해진 윤곽선은 이전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르느와르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평가들이나 후원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분명했고, 그

들은 이런 르느와르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르느와르는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여 짙은 색조를 화면에서 격감시켰지만, 
고전에 대한 선망은 죽는 날까지 감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드가를 평생 찬사했음에서 보여진다.

 

In The Garden, 1885.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70.5 x 11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그림의 주인공은 맑은 날에 조용한 화려한 정원에서 쉬고 있는 어린 소년과 소녀다. 
연한 회색의 한 청년이 손으로 소녀를 부드럽게 붙잡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있다. 
그는 목이 마른 표정으로 그녀의 달콤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 반대의 소녀는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조금 사려 깊다. 
왜냐하면 그녀는 방금 그녀의 사랑하는 아내가 될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의 모든 생각은 이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에는 뽑은 꽃, 관능적인 외모, 부드러운 감동 등등으로 로맨스가 묻어 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자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초상화와 예술을 자연스럽게 묘사했으며 여성의 아름다움에서부터 
자연의 장엄함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의 진정한 감정가였다.

르누아르는 작품 속 인물들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청중의 동정을 얻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아를 묘사한 많은 수의 그림은 

그 당시 어떤 남자도 무관심하게 만들 수 없었다. 
르누아르의 많은 그림은 밝은 느낌을 묘사한다. 
그 주된 것은 의심 할 바 없이 사랑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화가의 표준 규칙에서 조금 벗어났다. 
이번에는 그림이 단지 초상화가 아니며 저자가 항상 보여주지 않으려고 시도한 스토리가 있다. 
이 작품은 영혼을 해치고 관객을 움직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평온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엄숙하게 회화 작품을 특정 회화 장르의 틀 속에서 만든 것으로 간주했다.

 

In The Garden, 1883.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54.5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순수한 풍경이 비교적 드물게 만나는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이 그림은 특별한 장소를 차지한다. 
1883년 여름, 르누아르는 라만체 해안의 작은 휴양지이자 어촌인 이포트로 갔다. 
그의 친구의 추천으로 르누아르는 Yport 시장인 Alfred Nunès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아이들의 큰 초상화 한 쌍을 그렸다. 
목가적이지는 않지만 평화로운이 두 캔버스와는 달리 작가는 자신을 위해 현재의 그림을 그렸고, 
일반적으로 작가와는 무관한 낭만주의 색조로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실행된다.

 

Party in the Country at Berneval, 1898.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0.3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7.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적이 성격의 소유자 르느와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드가에게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그가 매우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기법을 드가가 충실히 재현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르느와르 이상으로 드가를 찬미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르느와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기쁨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전적 기법과 결합한 그의 이런 새로운 변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의 작품에 대해 살롱 뿐 아니라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조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관절염은 그를 행복 속에만 있게 두지 않았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는 나갈 수도 없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그를 괴롭게 했다. 
르느와르가 그의 노년을 아내와 프로방스 지방의 칸에서 보낸 것은 아마도 이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은 프로방스지방의 일기는 르느와를로 하여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에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한 붓은 예전 같은 붓의 터치를 어느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6년 그의 아내가 죽고 3년 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칸에 살았으며, 
80세가 넘도록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408번 방은 1883년에서 1917년 사이에 유명한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풍경화, 정물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1858년 르누아르는 17살의 나이로 생활비를 벌고자 
문장조각가로 일하던 형 앙리를 통해 부채나 장롱을 채색했다. 
1862년 르누아르는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경쟁 시험에 합격했으며 
샤를 글레르의 공방에 들어가는데, 공방에서 그는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나게 된다. 
퐁텐블로 숲에서 자주 그림을 그리며 그들 네 명은 굳은 우정을 나눴다.

르누아르와 글레르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면서 막을 내렸으며, 
1864년 글레르가 은퇴하자 르누아르는 보자르를 그만 둔다. 
그 와중 르누아르는 살롱에서 작품을 공개하는데, 이 처녀작(에스메랄다 1864)은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전시회 이후 이 작품을 파괴한다. 
이 시기 작품들은 초상화 쪽에서는 앵그르와 드오당크의 영향이, 
또 특히 정물화 쪽에서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영향이 돋보이지만 
몇몇 주제에서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영향 역시 볼 수 있다.

 

Room of Auguste Renoir.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한층 빛에 용해되어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변하지만,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르누아르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리었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말년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 정주하여 오로지 제작만을 계속, 최후에는 영광을 누리며 홀로 들어앉아, 
의자 위에서 화필을 쉬지 않고 아름다운 나부의 제작을 계속했다. 
주요 작품으로 〈해수욕장의 풍경〉, 〈대수욕〉, 〈목욕하는 여인들〉, 〈큰길〉 등이 있다.

In the garden, 1885.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12.5 x 17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르느와르는 마흔 가까이에 18살 어린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
형편상 결혼식은 포기했고, 첫아들이 4살이 되던 해 공식 혼인한다.
르느와르의 부인은 헌신적이어서, 꽃 그리기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서
새벽에 정성들여 예쁜 꽃을 골라 사오고, 자신의 지병을 숨길 정도였다고 한다.

르느와르는 자그마치 5,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르느와르는 생생한 빛, 강렬한 색조 표현, 자유로운 붓 터치로 채색해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어 솔직하고 친근한 구성으로 그림을 그렸다. 

 

Roses and Jasmine in a Delft Vase, 1880~1881.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장미와 쟈스민이 담긴 델프트 화병

 

roses in a vase, 1910~1917.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61.5 x 50.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Landscape. Le Cannet, 1902. by Auguste Renoir. oil on canvas. 14 x 1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이 작품은 1902년 르누아르가 정착한 코트 다 쥐르에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칸 교외 르 칸에 있는 예술가의 집을 묘사한다. 
풍경은 초상화 또는 장르 작품의 구성 요소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주제로도 
르누아르의 작업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다. 

르누아르는 도시와 특히 시골 풍경을 모두 그렸다. 
모든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의 순간적인 상태를 전달하면서 야외에서 일했다. 
르누아르는 풍경을 그리는 특별한 스타일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화법을 개발했다. 
변덕스러운 붓놀림과 감미로운 색채 배합은 창의력 후반기에 
르누아르를 바꾸지 않은 쾌활한 모습을 표현한다.

 

Harbor in Marseille, 1907. by Paul Signac. oil on canvas. 55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408번 홀에는 르누아르 이외 다른 화가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폴 시냐크(Paul Victor Jules Signac, 1863~193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처음에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하였다. 
그 후 쇠라(Georges Pierre Seurat)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단순하고 신선한 수채화도 많이 남겼다. 

그는 작품 심사 없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앙데팡당 전람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작품으로 <생트로페 항>, <마르세유 항> <크리우르 항> 등이 있다. 
저서로 신인상주의의 이론서가 된 <들라크루아부터 신인상주의까지>가 있다.

 

Port Manech, 1896. by Henry Moret. oil on canvas. 60.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앙리 모레 (Henry Moret 1856~1913)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였다. 
프랑스 지도에서 퐁타방(Pont-Aven)을 지나가는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마네끄 항구가 있다.
온갖 색이 다 사용된 것 같은 작품을 보다가 문득 퐁타방에 모여 있던 화가들의 

오색 숨결이 이곳까지 흘러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덕에는 꽃들이 무리를 지어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고 

바다도 이에 질세라 다양한 색으로 몸을 바꾸고 있다.
건너편 봉우리에는 계절이 오고 가는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긴 점으로 서 있다. 
다음 계절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다.

모레의 상관인 빌레트는 모레를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로링앙 지역의 화가인 에르네스트 코롤러에게 소개한다.
코롤러는 주기적으로 파리 살롱전에 출품을 하는 아카데믹 기법의 화가였다. 
그는 전통 기법뿐만 아니라 외광파 기법도 모레에게 가르쳤다.

 

View of the Church of Santa Maria degli Angeli, near Assisi, 1909, by Henri Edmond Cross. oil on canvas, 
73.5 cm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8

앙리 에드몽 크로스(Henri Edmond Cross, 856-1910)는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였다.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e)파 화가로 분류되는 에드몽 크로스의 그림 세계는 
본래 사실주의 화풍이었는데, 모네를 만나면서 밝은 빛이 가득한 인상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는 1856년 5월 20일, 프랑스의 두에(Douai)에서 

영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10살 때부터 릴(Lille)의 보(Beaux) 예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데생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76년 파리에 나와 활동하면서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1년에는 크로스(Cross)라는 영어 이름으로 첫 전시회를 개최했다. 
1883년 프랑스 남부로의 여행과 모네(Claude Monet)를 만난 뒤로 
특히 사실주의의 어두운 색채에서 인상주의의 밝은 화풍으로 바뀌게 돤다.

1884년 쇠라(Georges Pierre Seurat)와 시냐크(Paul Signac)를 만나 
교류하면서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예술가협회(the Société des Artistes Independants)'의 일원으로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그의 작품에서 이미 점묘주의 회화를 볼 수 있다.

신인상주의 풍경화가 크로스는 1904년 생트로페(Saint-Tropez)에서 시냐크와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마티스(Hemi Matisse)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점묘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려하고 온화하면서도 쾌락적인 화풍을 창조하게 된다. 

이후로 신인상주의를 이끌어가는 대표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특히 프랑스 남부와 베니스,

이태리 등의 이탈리아의 도시와 숲, 바다 근처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직감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색체 감각이 뛰어나고, 수채화를 잘 그렸으며, 
표현주의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앙리 크로스는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동안 페루자와 아시시의 여러 풍경을 제작했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기법인 점묘법은 작은 페인트 점에 색을 적용하여 
작가가 복잡한 색조를 순수한 색으로 나누고 멀리서 눈으로 결합하는 페인팅 방법이다. 
이런 스타일은 종종 분열주의 또는 신인상주의로 묘사된다. 
인상파는 자연에 대한 경험적 태도를 보였고 신인상파는 빛과 색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 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캔버스에 동일한 붓놀림을 꼼꼼하게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장식용 컬러 모자이크 효과를 만들어 냈다.

 

In the living room, 1900. by Étienne Moreau-Nélaton. oil on canvas. 60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모로우 넬라퉁(Adolphe Étienne Auguste Moreau-Nélaton 1859~1927)은 
프랑스 화가, 미술 수집가 및 미술사 학자였다. 
그의 대규모 컬렉션은 오늘날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서 전체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모로우 넬라퉁은 파리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1882년 모로우 넬라퉁은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를 

방문한 후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1885년 그는 Salon de Paris 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가족 장면이 그의 주요 주제였지만 그는 또한 여러 풍경도 그렸다. 

 

[영상] Auguste Renoir in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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