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암 수술을 받은 지 이제 만 5 년이 되었다.
생존 가망성 15 퍼센트 뒤집어 말하면 십중팔구에 해당하는

85 퍼센트는 사망한다는 의학적 생존율...

5 년이 지나면 암에서 해방된 것으로 본다는 바로 그 5 년을
기적같이 살아서 맞이하는 날이 온 것이다.

혜숙은 이제 성령의 은사로 뿐만 아니라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온전히 암에서 해방된 것이다.

1992 년 4 월 첫째 주일
나는 혜숙의 가까운 친구들을 교회로 초청했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국회의원) 여사,
조성우(민화협 사무총장)의 부인 홍현실 선생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고 있던 이석표의 부인 이희순 여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임희일 목사 등이 참석했다.

앞서도 말했거나와 교회에서는 지난 5 년 동안 모든 교우들이 합심해서
매 월 첫째 주일마다 빠짐없이 혜숙의 건강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가져 왔다.

조승혁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교인들은 지나간 5 년 동안 다함께 합심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 들이시고 응답하시어서
건강하게 지켜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특별 예배를 드렸다.

혜숙은 이 날 5 년 동안의 투병 생활과 파란만장했던 체험들을 특별 간증으로 발표했다.
나는 혜숙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간증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 같았지만 혜숙은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무슨 천기라도 누설하는 것인양 내가 낌새라도 차릴새라 굳이 감추려 들었다.
혜숙이 그러는 눈치인데 내 쪽에서 굳이 좀 보자고 하기도 민망스러웠다.

나름대로 계면쩍기도 했겠고
기도 중에 하나님과 단 둘이서 다짐한 내용들도 있을 터였다.

혜숙이 강단에 올라 서자 나는 한가롭게 궁금할새 없이 온 몸으로 긴장감이 몰려 왔다.
아마도 예배에 참석했던 이들 모두 그랬던 듯 싶다.

혜숙은 처음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차츰차츰 목이 메여 갔다.

점점 울먹이더니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했다.
초청된 친구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바쁘다.

교인들도 모두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혜숙이 위암으로 쓰러져 있다.
그 와중에서 각계각층의 분들을 모시고 어머니의 고희연을 차려 올린다.

선후배 동료들의 관심과 위로...

광주로 끌려가 자연 건강 훈련을 받는다.
경제적인 곤란까지 겹쳐 맨손으로 인쇄소 골목에 뛰어 든다.

혜숙은 점점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간다.
부채를 갚고 사업체를 세워 낸다.
집을 헐고 새로 짓는다.

병마가 다시 찾아 오고 혜숙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온다.
약국을 되찾고 삶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 혜숙이 생명을 완전히 되살리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어린 간증을 하고 있다......

그 날로 우리 교회에서는
'박혜숙 권사의 건강을 위한 특별기로회'를 5 년 만에 마감했다.

조승혁 목사님은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하고 우리 집에서

혜숙을 위해 안수 기도 드릴 때 말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배와 등뼈에 견디기 힘든 통증이 순간적으로 전해져 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열로 몸살을 앓듯 온몸으로 땀이 철철 흐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혜숙 권사가 간증으로 밝혔듯이 성령이 임하셔서 암세포를 내쫓고
몸의 병을 깨끗이 치유하는 은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조 목사님을 통해서 박혜숙 권사에게 나타나
병 고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조승혁 목사님은 조화순 조지송 목사님과 함께
산업 현장,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 선교 활동을 한 분으로 유명하다.

한국 교회가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이끌어 온 장본인이다.

조 목사님의 산업 선교, 노동 선교 활동은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획을 긋고
분기를 이루는 역할로 평가되면서 기록되어 있다.

조승혁 목사님은 혜숙에게 간증 집회를 같이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 후로 혜숙은 종종 암 환자를 위한 기도회에 조 목사님을 따라다니며 간증을 했다.

때로는 혜숙이 여러 교회들에서 초청을 받아
간증 예배 설교를 맡기도 했다.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그 날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소생함을 얻은 혜숙을 위한 날이었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하고
온 교인들이 다함께 감사의 잔치를 벌였다.

목사님과 교인들. 혜숙의 친구들에게 나는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하루를 마음껏 축제와 감사의 날로 보냈다.

이제 혜숙이 그날 밝혔던 간증 내용과
그 후 여러 교회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간증한 내용을 정리해서 여기에 덧붙인다.

 

 

 

104. 간증 ㅡ 하나님의 은총으로 / 박혜숙

 

 

(1) 먼저 드리는 말씀

오늘 본 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성도님들을 만나 뵙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앙 체험을 귀한 예배 시간을 통해서

간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 중이던 위암과 중증 근무력증에 따른 호흡 마비 증세로
두 번을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일을 되돌아 볼 때마다 죽음의 사선을 넘고 소생의 길로 들어 서서
이처럼 건강한 몸으로 여러 성도님들 앞에서 간증할 수 있게 된 것을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 가는 저에게
귀한 은사를 세 번이나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마귀의 형상이 나타나서 저를 혹독하게 시험하고 갔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달콤하고 산뜻한 향내음으로 제게 향기로운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자마자 샘을 내고 시기해서인지 시멘트못 형상을 한 마귀가 나타나서
저를 혹독한 시험에 빠뜨립니다.

다음으로 위암 수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들어 선 제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셔서 암세포를 깨끗이 씻어 내 주십니다.

그리고 제가 호흡마비 증세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차라리 죽음의 사신을 달콤하게 그리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저를 천국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사가 과연 어떤 모양으로
어떤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한편 마귀는 어떤 형상과 모양을 띠고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가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성도 여러분께 간증드릴 때
다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

우선 먼저 제가 신앙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본래 유교를 지키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 계통인 정신여중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다른 학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성경과목을 저는 참으로 흥미있어 했고 좋아했습니다.

성경 구절 암송대회.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여서인지 정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공립학교인 경기여고를 다녔는데
그때 저는 성경 과목이 없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1972 년 이화여대 약대에 입학하자마자
저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KSCF 라고 불리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이 단체는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모든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독학생회 모임의 연맹체입니다.

요즘에는 대학마다 기독학생회 단체가 여러 성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한국 기독교계 단체와 지도자 그리고 기독학생들이 학원 사회에서까지도
교파와 교권으로 분열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의논하고 합의해서 다함께 통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YMCA와 YWCA에서 대학생부를 없애고
기존의 기독학생회와 더불어 초교파적 통합체로 KSCF를 구성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2 년 가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 사회는 물론 온 나라 전체가 두려움과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물론 온 국민들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기독교계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이 독재 권력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데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한국 사회에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 가운데 특히 우리 기독교계 인사들이
제일 강건하게 비판하고 저항해서 수많은 분들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적 결단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유신체제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저는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목사님과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동료 대학생들과 함께 1974 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여학생의 몸으로 저는 100 여 일 동안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서대문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여기 앉아 계신 최민화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3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고 서로 사귀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최 장로님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 두 차례 구속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결혼하고서부터는 장로님을 따라 서울 회원교회에 다녔습니다.

장로님은 결혼 후에도 두 번을 더 감옥에 가게 되어서 첫 애 낳을 때만 제 곁에 있었고
둘째 셋째 애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낳았습니다.


(3) 향기로 주신 첫 번째 은사

저는 졸업과 함께 결혼하자마자 약국을 개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험도 없고 실력도 모자라서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 년 여 만에 약국을 정리하고 종로 5 가에 있는 대형 약국과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3 년 여 동안 경험을 쌓고 모자라는 실력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겠다 싶어서
1984 년에 다시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으로 믿음이 돈독하고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약국을 다시 개업한다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시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순복음교회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안내로 시무하시는 목사님께 특별 안수 기도를 받았는데
저는 그때 이상한 향내에 도취되었습니다.

아카시아향 같기도 하고 박하사탕에서 나는 향내 같기도 한데
달콤하고 생그러운 맛과 산뜻한 향내음이 제 코에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순복음교회 목사님들은 박하사탕이나 껌을
입에 물고 기도해 주시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 와서 저는 기도원에서 지낸 일들을 시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 시어머님은 경건하신 초대교회 목사님의 따님으로 신앙심이 깊고 돈독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함께 안수 받은 제 친구는 그 향내를 맡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꺼라면서
한번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친구는 제 곁에 바로 붙어 있었는데도 향내를 전혀 맡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선택하고 저에게만 내리신 특별한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를 받고 나면 마귀가 샘을 내고 시기해서 시험에 드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 하십니다.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온 몸이 떨려 왔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저를 택하셔서
은총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으로 믿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약사라는 전문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라는
계시임을 믿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4) 마귀의 시험

며칠 후에 정말로 마귀가 찾아 왔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어김없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한옥이었습니다.
곤하게 자고 있는데 시멘트못 형상을 한 마귀가 대청마루 유리창을 통해서

방으로 마구 쳐들어 오더니 제 오른팔에 무수히 꽂힙니다.

저는 어머님 말씀을 듣고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기도가 입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또 외쳤습니다.

외치면서 입으로 악악거리고 토해 내자
오른팔에 박힌 시멘트못 형상이 하나 둘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마귀의 형상이로구나!
겁내지 말고 물리쳐 이겨 내야지!'

용기를 내고 희열을 느끼며 열심히 소리쳐 기도하니까
마귀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남은 하나가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대문에서 벨소리가 울립니다.

깨어 일어나 대문을 열어 보니 남편이 들어 옵니다.
그 바람에 저는 이 하나를 미처 뽑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게 은총을 내리시어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겁니다.

또한 이를 믿고 매사에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라는 메시지요 계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저는 이 메시지를 잊어버리고
세상 일에 매달려 아둥바둥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생활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5) 위암 수술

어리석은 저는 제가 스스로 잘나고 유능해서
약국 운영도 잘 되는 줄 알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1987 년 제 나이 34 살 때 일입니다.
그 당시 남편은 네 번째로 감옥에 갇혀 집에 없었습니다.

제 몸은 점점 말라가고 얼굴은 핏기없는 색으로 변해 갑니다.
온몸으로 통증이 몰려 옵니다.
척추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등과 가슴에 파스를 더덕더덕 붙입니다.

진통제 약을 집어 먹고 영양 주사를 맞으면서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얼마 안 있으면 만기 출소하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출소하기 보름 전인 1987 년 3 월 말에
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마구 뒹굴었습니다.
친정 오라버니와 여동생이 달려 들어 억지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 입고 수술용 침대 위에 누어 있는데
저는 이 환한 세상을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왔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두려움을 떨치고
이겨 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찬송가 364 장 입니다.

십자가를 진 고생의 길이 아니라 주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
주님을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부른 것입니다.

저는 무슨 수술을 받는 건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위궤양이 심해서 위를 좀 잘라 내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제가 위암 말기 상태로
수술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겠는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3 개월에서 6 개월 정도밖에 못 살꺼라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보름 후에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했습니다.
저는 주치의를 만나 본 남편을 통해서

제가 위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암 세포가 이미 위 전체로 다 퍼져 있고
위 주변의 임파선까지 전이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수술을 해도 별 소용이 없거나
수술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지도 모를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나마라도 부탁하고 사정해서 위를 다 잘라 내고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를 잘라 냈다고 합니다.


(6) 십중팔구는 죽을 병

암에 걸렸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을 의학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고 하는데
제 경우에는 5 년 생존율이 15 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가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은 15 퍼센트, 죽을 확율이 85 퍼센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중팔구는 죽을 꺼라는 얘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서른 네 살의 젊은 여자, 세 아이의 엄마...
막내는 아직 첫돌이 마악 지난 상태였는데...
죽으리라는 생각조차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직업이 약사인 저는

과학적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 버립니다.
얼굴이며 살갖은 핏기와 탄력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온 몸은 앙상하게 뼈가죽만 남고
앉아 있기조차 힘듭니다.

빨갛고 시퍼런 항암제 주사를 맞고 있자니
그것이 바로 제 생명의 줄을 쥐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기계 밑에 누어 있으면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위에 붙어 있는 횡경막이 없다보니까
창자에 있는 분비물이 목으로 코로 사정없이 넘어 옵니다.

이렇게 넘어 올라 오는 쓰디쓴 쓸개액과 침액과 구토물로
저는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식도와 코는 망가지고 헐고 진물이 나서 얼마나 쓰라리고 아프던지
방바닥에 마구 뒹굴어야 했습니다.

수술 후 석 달 가량을
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죽음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체중이 34 kg 으로 떨어집니다.
남편과 가족이 거의 반 쯤은 포기하고 준비합니다.
저 역시 살기를 제 생명을 반 쯤 포기합니다.

이제 끝이로구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로구나...
참 별것도 아닌데 아귀다툼하고 살았구나...
단지 남은 가족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먼저 갈 뿐인데...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숨이 멈출 때까지 그저 무력하게
남아 있는 숨만 쉬고 누어 있습니다.


(7) 뜨거운 안수 기도

이 때 교회 담임 목사님과 교인들이
마지막 심방으로 여기고 찾아 와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는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제 깨어 있는 정신으로 마지막 보게 될 교인들과 목사님 앞에서
저는 눈물 콧물 할 것 없이 줄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시면서
저를 위해 뜨거운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이 여인을 데려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이 여인이
왜 민주화 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서
고난과 역경을 감당해 온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어려운 동료들을 보살펴 온 당신의 귀하고 의로운 따님을
주님! 데려 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사오니,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교인들도 모두 합심해서 통성으로 울부짖고 통곡하며
보잘 것 없는 저의 생명을 위해서 간구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안수 기도 중에
온몸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다고 하십니다.

통증을 견디다 못 해
기도 소리가 더욱 더 커졌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때 제 가슴 속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말씀이 뜨겁게 전해져 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초조가 서서히 걷히고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숨쉬기가 훨씬 수월해 지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다녀 가신 그 다음날부터
제 몸에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고프다'는 신호가 위에서 뇌로 전달되는 겁니다.
먹고 싶다는 의욕이 마구 솟구치는 겁니다.

저는 이때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먹은 것을 도로 토해 내기 바빴지만 저는 토해도 먹고,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교만함과 방자함을...
인간적인 사리사욕을 하나님께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허물들을 수첩에 일일이 적어 가며
회개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8) 두 번째 은사 ㅡ 성스러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회개 기도를 드린 지 닷새 후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깊은 잠에 들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스러운 형상이 제게로 다가 오십니다.
측은한 모습으로 저를 내려다 보십니다.

그리고는
"여인아! 이제 네 뱃속이 깨끗해 지고 네 몸속에 병이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저는 약사로서 전문 지식이 있어선지

의심 많은 도마처럼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고 더 열심히 치료하고 노력하면서 기다려야 하는데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성스러운 하나님 형상께서는
"여인아! 내가 네 배를 열어 보여 주리라"
하시면서 제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보아라! 네 몸 속에 암세포가 없어지고

깨끗하게 다 낫지 않았느냐" 하십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정말로 깨끗했습니다.
암세포가 깨끗하게 없어진 겁니다.

저는 그 발 앞에 얼른 무릎 꿇고 엎드려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감사하는 기도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꿈속에서도 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몸 안에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저는 갓난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웠습니다.

매일매일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암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꺼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9) 견딜 수 없는 고통 ㅡ 중증근무력증

그 후로 저는 찬송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로 1 년 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또 한번의 혹독한 시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설명 드리자면 위와 비장, 췌장을 잘라 내고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 등으로 몸이 허약할대로 허약해 진 상태에서
저는 중증근무력증에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해서 호흡이 마비되는 증세가 온 것입니다.

근무력증은 세포와 세포를 이어주는 신경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의식은 있어도 몸 전체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심한 경우 호흡이 마비되면 순식간에 사망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저는 가슴 부위가 마비되어 제 힘으로는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1 달 여 동안 있었습니다.

항암 치료로 피가 혼탁해져서 대 여섯 차례에 걸쳐
온 몸의 피를 걸러 내야 했습니다.

앞 가슴 갈비뼈를 톱으로 절단해서 쫘악 벌려 놓고
그 안에 있는 흉선을 제거하고는 다시 갈비뼈를 붙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맥박이 30 ~ 40 까지 떨어지고
쇼크로 사망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제 몸에는 기관지를 절제해서 기계 호흡에 사용하는 줄,
소변 줄 등등... 호스 줄이 8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너무나 견딜 수 없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에게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나이까?
저는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로 저를 위하고 아끼신다면
제가 잠들어 있을 때, 영원히 이 눈을 뜨지 말고 잠들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저를 제발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곁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내일이면 이 중환자실의 기계들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통증에서 빨리 벗어 나게 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루 빨리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10) 세 번째 은사 ㅡ 예수님의 형상과 천국 가는 길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형상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사진에서 늘 보았던 거룩하고 밝은 모습이 아니라
"저 여인을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뇌하면서 애처러워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 줄까?..."
하는 모습... 안타깝고 불쌍해 하는 모습으로 저를 부르십니다.

"혜숙아~~~!!! 이제 나랑 같이 가자~~~"

저는 아무런 주저 없이 따라 갔습니다.
금보라빛으로 덮힌 그 길은 참으로 고즈넉했습니다.

그 길을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마지막 끝에 계단과 문이 있습니다.

이제 이 문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천국으로 가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집에 있을 아이들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주님! 저 조금만 있다 가면 안 될까요?
집에 좀 가 봐야 되겠는데... 다음에 다시 올 께요"

저는 되돌아 왔습니다.
며칠 후에 예수님의 형상이 또 나타나십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한없이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저를 보듬어 주시면서
'이 여인을 어찌해야 좋을꼬...' 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저희 교회 담임 목사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 안으로 들어 갔으면 그 날로 천국에 가는 건데 되돌아 와서 다시 소생하게 된 거라고 하십니다.

저는 지금도 천당 가는 길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반짝반짝 화려하거나 호화로운 건 아니지만 금보라빛이 무척이나 따스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모습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하는 모습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 인간적 예수의 모습을 보고 깨어났습니다.

암 수술보다 더 큰 수술을 받고 저는 다시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 왔습니다.


(11) 맺는 말

그 후 저는 제가 운영하던 약국을 다시 인수해서
오늘날까지 열심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지와 믿음으로
지역 주민들과 상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향기로운 은사를 내려 주셨습니다.

제 배를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 보이시며
암 세포를 깨�하게 없애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따스한 금보라빛, 천국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멘트못 형상을 띠며 온 몸에 달라붙는 마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주신 뜻이
과연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세상에 응답하실 일이 셀 수 없이 많고 많을텐데
어찌해서 보잘 것 없는 저에게까지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은총을 내리셔서
하찮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걸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저와 같이 마음이 연약한 이들
세상 만사에 흔들리며 갈등을 겪고 살아 가는 이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암으로 또는 다른 병고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저로하여금 증거케 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저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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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에 필 로 그

 

 

혜숙이 암으로부터 해방되고 중증근무력증 증세도 점점 호전되면서
병마는 이제 우리 곁을 멀리 떠난 듯했다.

하지만 혜숙은 그 후 2 년 만에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서너 가지가 연속적으로 들이 닥쳤다.

근무력증 치료를 위해서 2 년간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이제는 다 나았다고 안심하던 때였다.

약국은 전에보다 손님들도 많아 관리 약사를 두고 운영도 잘 되었지만
그만큼 더 신경을 쓰게 되고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큰 수술로 위와 비장과 췌장뿐만 아니라
흉선까지 제거한 상태이다보니 면역과 조절 기능이 크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94 년 4 월 혜숙은 갑상선 기능 저하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갑상선 질환은 수술해서 고치는 병이 아니라
평생동안 약을 복용하면서 기능을 조절해야 하는 병이란다.

그 후로도 혜숙의 몸은 자꾸 야위어 갔다.
그동안 50 kg 까지 늘었던 몸무게가 38 kg 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혜숙은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 때 60 kg 에 이를 정도로 몸집이 뚱뚱했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안경 밑이 달걀처럼 부풀어 있고
눈은 얼굴살에 가려 지금보다 조그마했다.

바지를 입으면 허리와 몸통을 구분하기 어려운데도 꼭 벨트를 차고 있어서

가까운 친구들이 '드럼통에 중간 표시를 하고 다닌다' 고 놀려대곤 했었다.

그러던 몸집이 몇 번의 병마를 겪다보니

왜소하게 말라버린 것이다.

갑상선 치료약을 계속 복용하던 중에
혜숙은 1 년도 채 지나지 않은 95 년 3 월 또다시 입원했다.

신경외과에서는 갑상선 비대와 심장 저하로 보았는데
검사 결과 의외로 당뇨병에 초기 결핵이 합병증으로 왔다는 진단이다.

급히 호흡기질환 격리 병실로 옮기고 무려 두 달 여 가량을 입원해 있었다.
퇴원 후에도 혜숙은 당뇨병으로 주머니에 설탕이나 사탕같은 것을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고 마실 물을 늘 곁에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 후 1999 년 연말까지 한 해에 두어 차례는
잠을 자다가 혹은 주위 친지 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혈당이 갑자기 저하되어
그야말로 시도때도 없이 119 앰블런스 편에 병원 응급실로 급히 실려가곤 했다.

2000 년에 들어 서서도 이런저런 증세로 한 두 해에 두어 번은 입원을 하게 되고
윗니 아랫니 합해서 반 이상은 상하고 다쳐서 틀니를 하고 생활한다.

우리 가족과 가까운 동료들은 혜숙을 '종합병원'이라고 부른다.
평생동안 한 가지 병만 지니고 살아 가기도 힘든데
세상에 못 된 병을 두루 돌아가며 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의학적으로도 싸이클 현상이란 게 있단다.
염주목걸이처럼 한 번씩 돌아가며 병치레를 겪는 현상이란다.

한양대 병원에서는 혜숙을 의학적으로
희귀한 임상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혜숙이 오랜 만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가면 주치의가 놓아 주지 않고

며칠 만이라도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굳이 권면하고 부탁한다.

혜숙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전문의 수련 과정에 있는 의사들이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혜숙은 자신이 약학을 전공한 때문인지
어려워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 보시라면서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 준다.

의학적으로 볼 때 혜숙의 몸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비하단다.
생명의 오묘함이요 기적이란다.

혜숙은 자신의 병력을 굳이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수련의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분들에게도 필요하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혜숙은 가끔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몸이 기이하고 오묘하다면서
죽으면 시신을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런 표정으로 내게 묻기도 한다.

여학생의 몸으로 서슬퍼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세월...

경제적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켜 온 세월...

혜숙이 이처럼 모진 세월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희망이라는 불씨를 가슴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 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이 땅의 민주화에 대한 믿음과 희망...
남편과 가정에 대한 지극한 책임과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 혜숙과 나에게는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그 어떤 고통과 좌절, 절망과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고단위 항암제요 치료제였다.

지금도 내 아내 혜숙의 건강이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자신의 의지와 확신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 간다면

몸과 마음의 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106. 글을 마치며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내 아내 혜숙이 암으로 쓰러지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투병했던 일을 무엇보다 첫 번으로 삼는다.

내 자신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네 번씩 실형 언도를 받고
적지 않은 세월 감옥에 갇히고 했지만

그보다는 죽어 가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 보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1991 년 2 월 조금은 민주화 된 세상에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이 일은
"민주화 운동가...
제적과 징집, 복학과 구속과 제적을 거듭하다가
22 년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이란 제하와 내용으로 각 일간지와 교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1993 년 7 월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
우리 부부의 기사가 특집으로 꾸며져 가족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1996 년 3 월 나는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를 정리하여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현암사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때는 글을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사정이 너무 촉박해서 미처 가다듬을 사이없이 졸속을 무릅쓰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 차분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날을 기약했다. 

여기 홈페이지에 실린 <우리는 하나>는 그 책의 제 1 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기약한 바대로 차분히 가다듬다보니 분량이 열 배 이상으로 늘어 났다.

2000 년 1 월 도서출판 한울에서 <사랑과 희망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언론사에서 신간 안내나 서평으로 다루는 등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종합여성지 월간 <feel> 은 2000 년 2 월호에서
<시한부 인생 아내를 암에서 구해 낸 한 사회운동가의 감동 외조 & 민족의학의 실체>
라는 제목의 특집을 꾸며 게재했다.


같은 해 2 월 3 일에는 KBS TV 아침마당 저자와의 대화 코너에

우리 부부가 함께 출연해서 생방송으로 35 분간 방영되기도 했다.


이상의 자료들은 본 홈페이지 언론방송 자료방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는 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모두

절판이 된지 오래이다.


늦은 나이에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영상작품을 만드는 일에 취미를 붙인 나는

위 두 책에 실렸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의 언론 보도와 사진 등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을 추가 보충하고 검증하여

직접 제작한 나의 홈페이지에 공개해서 올린다.

*

*
예로부터 아내와 아이들, 집안 이야기는

자랑이든 허물이든 밖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했다.

특히 아내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를 일컬어
팔불용(八不用)이요 팔불출(八不出)이라 했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소치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만시리에 공개하는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갔으면 하는 뜻에서다.

이 땅에 민주화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헌신해 온 이들


병마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당하는 이들

그리고 경제적 형편으로

절박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이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
*

( 추신 )

내 아내 혜숙은 <사랑과 희망으로>를 펴내고 4년 여

암 수술을 받은 후로는 17년 6개월 여가 흐른 뒤
2004년 9월 3일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 가족은 선후배 동지들의 간곡한 뜻에 따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혜숙을 안장했다.


나는 삼오제가 되는 날
비문을 작성하고 무덤 앞에 새겨 두었다.

(전면)
민주화운동 관련자
故 박혜숙의 묘

(후면)

故 박혜숙은 1972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제약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박정희 독재 권력에 대항해서 학생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여학생의 몸으로

갖은 고문과 공포 속에서 조사를 받고
소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이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수사 당국으로부터 수차례

지명수배와 연행 조사를 당하는 등 계속 활동해 오다가
1978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의 동지인 최민화와 결혼한 이후로는 세민약국을 경영하면서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남편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우회 등 단체의 결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오다가
1987년 위암 수술을 받고 병마와 치열하게 싸워오던 중
2001년 8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하여 증 제2224호로 민주화운동관련자 증서를 수여받고
2004년 9월 3일 02시 21분에 일기를 마치니
남아 있는 동지들의 간절한 뜻으로
여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고이 잠들다

2004 년 9월 7일 삼오제에 남편 최민화 올림

 






 



최 민 화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김정환

 

 

1

 

참 온화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1983 년 민청련을 창립하기 위해

열 두 명인가가 모였을 때다.

 

난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또 투사 정신으로 보나

한데 어울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신화였고

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개 문사였다.

 

참으로 어둠이 너무도 위세당당하고

그게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때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한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우리의 전신을 휘감고 덜덜 떨게 만들면서

우리를 집요하게 길들이던 때다.

 

회의가 진행되고 나는 오래지 않아

내 본분을 알게 되었다.

 

... 이를테면 글깨나 쓰는

서기로 불려 온 셈이었다.

 

당연하지......

... 투사는 아니니까......

 

나는 무척 안심하면서

아주 비겁하고 편안하게

 

가장된 겸손으로

내 비겁을 감싸면서

 

쟁쟁한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는 당연히 갑론을박이었다.

공개 운동이라니 !

 

야수가 휘두르는 철권에

계란같은 머리를

스스로 들이미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포기할 것인가...

 

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해 졌다.

 

그런데 쉬쉬하며 험악해 질수록

암담해 지기 마련인

그 당시 회의 모양새의 한 귀퉁이가

이상하게도 밝은 거다.

 

그게...

그가 실실 흘리는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사를 말했으되

상대방의 의견 중

장점을 키워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 저것...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 것으로

제 온화함으로 바꾸어 내면서

자신을 보충하고

 

그렇게 완성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추진하는 능력!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드문 능력이다.

 

고생은 흔히

사람을 그악스럽고

완전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혁명가는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되

 

편협한 아집과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 저런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나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의 웃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때는 내가 다 깨닫지 못했다.

 

 

 

2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그에 못지 않은 정치적 명망가로 되고

 

심지어 대학 총학생회장조차

신문지상에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내내

그가 맡은 일은 허다한 단체의 재정.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80 년대에 숱한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때론 부딪치고 때론 격려하면서

명멸해 갔다.

 

그 단체들이 왜

똑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숱한 단체 중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단체는

손꼽을 정도다.

 

따스한 격려를 받지 않은 단체 관계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게다.

 

그는 단순한 통합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분열을

스스로 제 가슴에 상처로 품고

 

그 상처가

비단 아물 뿐 아니라

 

더 질 높은

총체적인 육()의 정신으로 재생되기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적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

' , 내가 좀 더 잘해야겠구나'

라고 깨닫지 않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3

 

그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연세대를 다녔을 강은교 시인의 시에

 

" 그가 돌아오고

식구들은 이제 안심한다 "

 

라는 명구절이 있다.

최민화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상에 제 살 베어 주며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운 한 넉넉한 사내가

 

저 하나 믿고 가정을 꾸리다가

쇠꼬챙이 몸 위암 3 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내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또 어떻게 들어 주었는가

 

그리고

그의 정성이

 

어떻게 아내를

이 땅에

다시 서게 했는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얼마나 눈물겨웠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 담긴 그의 육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남이 보태봐야 췌언이거나 중언부언

아니면 한갓 미사여구에 불과할 게다.

 

다만 우리는

가장 찬란한 빛을 이루는 것은

순정한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사 앞장에

미리 적어 두면 되리라.

 

그러나 안심하는 것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안심한다.

 

그가 괜찮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주변이

 

그가 돌봐 주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괜찮다는 뜻이고

 

그가 싱긋 웃으면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면

잘 될 것 같다는 뜻이고

 

예의 그 실실 웃는 웃음을 흘리면

잘 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안심한다.

 

마음놓고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취해서 정신을 잃고 뻗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폭언을 일삼는 선배 후배조차

 

그가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팔잔가?

어쨋거나, 그래서...

 

그를 고대하며

그가 와야만 안심하는 경우는

무엇보다 장례식 때다.

 

어깨를 함께 결으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동지들의 죽음을 맞는 일은

 

경악스럽고 한꺼번에 깜깜절벽이

가슴에 들어 차는 경험이다.

 

옥중에 있는 동료의 부모가

세상을 뜨는 일은

 

안타깝고

무엇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충격적이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후자의 경우는

주먹만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들은

최민화가 와야 안심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굉장히 엄혹한 표정이

대신 들어선다.

 

모두가 다

슬픔에 탐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장례 절차를 짜야 하고

장지를 잡아야 하고

문상객 접대 준비를 해야 하고

당장 영정부터 모셔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호통치고

우리는 슬픔을 다스리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할 일을

비로소 구분하게 된다.

 

암담했던 시절

문인들이 앞장서는 일에는 소설가 이호철이

장례식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필요했다.

 

이호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아무도 앞장서지 않았고

 

이문구가 없으면

장례 절차가 꾸려지지 않았다.

 

최민화는

그 둘을 합한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의

김근태나 장기표 정도의 명망가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고

그의 뜻대로 되어 왔다.

 

그들은 그가

그리도 끔찍하게 위하는 선배며

 

그가 원했던 것은

그 둘의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배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토대로 되었던 것이다.

 

 

 

4

 

나는 지금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온화하다고 해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고

가장 온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게 얼마나 격동적이고

서사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를

애써 상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을 괴롭히던

가장 근본적인 모순...

 

적을 미워하다가

적을 닮아 버리는 모순을 극복했다.

 

~~~! 그랬던가...

 

그가...

이제까지 내 곁에 있었던가...

 

~~~ ...

정말...

형님도...

 

형님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까?

아비규환의 정치판이

형님을 기어이 부릅디까?

 

그 상처는 어찌하시려구요...

 

이제까지 주욱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형님 말이

맞을 테지요마는......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이제 전방에 있고

나는 후방에 있다.

 

후방에 있으면

전투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서

위로해 달란다.

 

그때 우린

의견 차이도 접어 두고

 

춥고 배고프지만

똘똘 뭉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며

 

이상이 정치판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해

가끔

 

눈물도 그렁그렁대고

그런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죄송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최민화...

 

이제 배경이자 토대였던 그가

우리 앞에

빛 한가운데 섰다.

 

그러나 난 오늘도 유독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다.

 

 

  1-6.jpg

김정환(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으로 등단.

1982년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이후 <황색예수전> <사랑, 파티>

20 여 권의 시와 소설, 평론집을 간행



 

1 부 / 2. 운전교육대에서


그 후 1970년 11월
나는 논산 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했다.



논산 훈련소 여러 연대 가운데서도
가장 춥고 배고프고 고달프다던 30연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는 가평 1군단 운전교육대에서 운전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이가
한 내무반에서 4~5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교육생 구대에서 학생장을 맡게 되었다.

학생장은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을
자치적으로 지도하고 통솔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같은 동료들을 강요하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다가 고참병인 구대장에게 바쳐야 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처음에 한 두 번 시도는 해 보았지만
나는 양심이나 이성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바치고 나니까
나에게는 매일 무서운 매질이 퍼부어졌다.

그때 어금니가 부서진 것을 나는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평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휴식 시간 중 교육생 가운데 한 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부대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이 긴급 소집되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인근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탈영한 교육병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육지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난생 처음으로 기차라는 것을 실제로 구경하고
훈련소에서 전방 운전교육대로 이송될 때 비로소
직접 타 보았다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과 사정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드넓은 바다와 높게 치솟은 한라산 자락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섬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마음껏 숨쉬고 자랐을 그가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제식 훈련을 하고
사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적응하기도 몹시 힘들었을 것이었다.

더우기 낯설고 물설은 전방에 갇혀서
협박당하고 기합받아가며 극심한 훈련을 견디어 내기란
그야말로 평온한 천국에서 생활하다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같은 심사였을 것이었다.

그의 탈영 사실을
나는 불과 15 분 여 만에 확인해서 보고했다.

그리고 CP라고 불리는 부대 본부로 가서
일어난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나는 그 당시 계급이 상병인 구대장에게
온갖 협박과 강요와 구타를 당하면서
그야말로 견디기 힘들만큼 주눅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했고
이제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부대장에게 불려가게까지 되었으니
나는 이제 초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나보다 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 몸이 떨려 왔다.

야전 잠바 양쪽 어깨와 군모에
대위 계급장을 단 하늘같은 부대장은
지휘봉을 든 채 열중 쉬엇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부대장은 내게 탈영 전후의 정황을 보고받고
몇몇 사실을 확인한 다음
탈영 사건 후 내가 어떻게 조치했는가를 물어 왔다.

그리고는 출신 학교 등 나의 신상에 대한 일까지
이것저것 심문하듯 물어 왔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부대장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하늘같은 부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든 신경세포가 바짝 긴장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대장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신속하게 확인하고 보고해서 다행이네...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테니까 곧 잡을 수 있을꺼네..."

하면서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어안이벙벙했다.
중대장은 입술을 내 귀 가까이에 대고
작은 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도 3년 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네...
정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었지...
애로 사항이 있나? 있으면 뭐든 얘기해 보게"

그 때 나에게 가장 절실한 애로 사항은
학생장의 직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저......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구대장님을 통해서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알았네..."


탈영병은 부대장의 말대로 3 시간 여 만에 붙잡혔다.
붙잡힌 탈영병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마치 혼절해버린 사람 같았다.

부대장은 탈영병에게 어떠한 기합이나 구타도
일체 가하지 못하도록 모든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했다.

특별히 나에게도 탈영병이 소위 '고문관'으로
따돌림당하지 않도록
한 내무반에서 각별하게 보살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결국 우리와 함께 운전교육 전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할 때까지 근무해야 할 부대로 무사히 배속되었다.

나는 학생장의 직분을 다른 교육생에게 물려 줄 수 있었고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온 범칙과 비리도 어느정도 시정되었다.

교육 훈련을 마치고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수송부로 배치되어 복무 중이던

1971 년 개악된 헌법으로 치러지던 대통령 선거에서 난생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나는
감시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야당 후보에 기표했다.


▲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연병장에서


▲ 50병기대대 수송부에서

도대체가 헌법을 자기 권력 야욕의 도구로 일삼는 박정희 후보를
자유로운 형편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찍는 사람들의 심사는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제 1 부 / 3.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


1972년 4 월 나는 제대하자마자 연세대에 복학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4 학년이거나
아직 군 복무 중에 있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하고 있던 나는
후배들과 한 반에서 공부해야 하는 처지였던만큼
학업이 뒤쳐지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스러웠다.

그러니만큼 무엇보다도 학업에 열심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적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때 만큼이나
긴장하고 열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내가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도록 놓아 두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개헌을 하고
뒤이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를 자행하면서
목적한 바대로 마지막 임기 3선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취임하고 보니까 한참 남아 있는 4년 임기조차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던가 보다.

해가 한 번 바뀌었을 뿐 임기도 한참을 남겨 둔 상태에서
이번에는 아예 원없이 영구 집권할 요량을 부려 댔다.

그 해 10월 17일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우리 백성이 조선조 말엽이나
일제 시대에 들어 보던 말이다.

한글로 국어를 삼은 이래 해방된 조국에서는
금시초문이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1867년 우리나라로는 고종 황제 적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이 분립된 권력을 완전히 빼앗아
왕권을 복고시키고 개혁을 단행해서 새롭게 뜯어고쳤다는
'메이지 유신(維新)'을 본받자는 거였다.

일본이 유신을 단행했기 때문에
우리 땅 한반도를 정복할 수 있었고
만주국을 건설했으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던
그 100 여 년 전 일본의 원대한 정신과 기상을
우리가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유신 헌법을 공고했다.


당시 국회의사당에 진주한 계엄군 (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하고
평생을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의원도 3분의 1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골라서 지명하게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꼭둑각시를 만들어서
대통령 후보도 아무나 나서지 못하게 했다.
대통령은 꼭둑각시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선출하게 했다.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국민 투표를 통해 찬반을 묻겠지만
모든 국민은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의사를
방송이나 언론은 물론 타인에게 표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면서 유신 헌법을 적극 찬성해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선전만이
방송이나 언론, 공공기관 단체를 통해
온통 난무하게 했다.

10월 유신을 찬성하지 않으면
사상이 의심스럽고 불순분자이고
북괴를 이롭게 하는 반국가적이고
빨갱이고 그랬다.

'10월 유신' 비상계엄령 치하에서
온 나라 백성은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힌 채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들어 있었다.




그 때 민주주의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표현되는
그 숨막히던 절망과 공포 속에서
나는 남은 대학 생활과 나의 전체 운명이
순탄치 않은 곡절을 겪게 되라라고 예감했다.

외국으로 떠나버리기라도 했으면 했다.
그것도 최소한 동의하지 않는 침묵적 저항일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양심을 지켜야 했다.
두려움을 떨쳐야 했다.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함석헌 선생을 찾아 뵙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그 당시 함석헌 선생은
정신적 지성과 양심적 행동을 겸비하신 상징으로
우리 백성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해 마지않던 터였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의 함자를 기억하기는
초등학교 5 학년 경인듯 싶다.

 

 

1 부 / 4.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얼마 전부터인가
싸전마당 한복판에 높은 연단이 세워지고
전봇대마다 확성기가 매달려져 있었다.

"이승만 박사..." 운운
"이기붕 선생..." 운운 하던 소리가
장꾼들의 흥정을 방해하면서
귀청을 울리고 있던 적이었다.

지낼만한 이웃 어른들 중에는
자유당이라고 적힌 완장을 팔뚝에 걸치고
장꾼들을 불러 모으는 이도 있었다.

정 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1960 년 3 월 13 일
오산 장날에 나는 희안한 행렬 끄트머리를
또래들과 더불어 신명나게 따라다녔다.

낯익은 동네 형들이 앞장을 서서
검은 교복으로 우글거리는 학생들을 이끌고 있었다.

"부정 선거..."
"공명 선거..." ... 등
상기된 모습으로 구호를 외치며 장바닥을 휩쓸고 다녔다.

장꾼들도 행렬 가장자리에서 웅성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더러는 손벽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선생인지 면사무소 직원인지 순사인지 싶은 어른들이
행렬 속으로 뛰어 들어 학생들을 붙잡고 끌어내고 하였다.

한참을 그러더니 행렬은 점점 흩어져 갔다.
동네 어른들 중에는

"제 애비는 자유당 완장차고 유세하고 다니는데...
자식 놈이 제 애비보다 백 번 낫구먼..."

하며 대견해 마지않는 이들도 있었다.
1960년 3. 15 부정선거를 이틀 앞두고 있었던
오산중고등학교 학생 가두 시위는
마산과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더우기 3월 15일 이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거사로
4. 19 혁명사는 기록하고 있다.

저녁나절 파장될 무렵 쯤 되자 한 사람은 리어카 위에서
양쪽으로 확성기를 단 나무사다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끌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조병옥 박사..."
"장 면 박사..." 운운하며 세 사람이서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유세하고 다녔다.

이런 분위기 적을 전후로
경기도 오산 시골 구석 씨알에게까지 퍼져 오가던
함석헌 선생의 담대한 필력에 관한 이야기들과
사설만큼씩한 분량으로 신문지상에 여러 날 연재되면서
글머리 밑에 씌어진 "함석헌"이라는 친필 함자가
초등학교 5 학년에 지나지 않던 나의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함 선생님을 직접 뵙기로는
연세대에 입학하고서다.

연세대 기독학생회에서 함 선생님을 연사로 모신
강연회가 있었다.

강연장에 들어 선 나는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거기에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리고서
연단 위에 곱상히 서 계신 함 선생님의 모습이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좀 일찍 오게 돼서...
이 학교 교정을 한번 둘러 보았소...
참 크고 훌륭해. 좋은 교정이요.
아름다운 꽃도 많고 나무들도 좋고...
한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면서 봤어...
그런데 젊은 학생들이 왜들 그 모양이야 ! ! !"

청중들이 모여들면서부터 자리를 마련한 학생들은
한창 부산하게 움직거리며 애를 태우게 된다.

한 5 분에서 10 분 가량을 여유로 남기고
맞춤하게 도착해서 좋을 함 선생님은
그 날 강연 시간보다 무려 2 시간 가량을
미리 도착하셨다는 것이다.

강연장에 둘러 보니 청중은 고사하고
준비하는 학생도 하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정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단다.

그런데 제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 판국인지도 모르고
배우는 학생들 머리 속에
'생각'이란 게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쉬 늙어 버릴 사람이고
배움은 이루기가 힘든 것이어서
한시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데
봄날 날씨 좋다고 교정에 앉아 정신 못 차리고
단꿈만 꾸다가는 마지막에 가서
제 망하고 나라 망한다는 것이었다.

"... 이 사람들이 도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려고 이러는 게요?...
도적질한 죄수한테서나 받아 두는 지문을
선량하고 착한 백성들한테
뭣하러 몽땅 찍어 둘려고 그러는 게야!!! ...
이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래!..."

정치라는 건 본래 더러운 것이라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라는 것이다.

주민증을 바꾸는 속셈도 필경
도둑의 심보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훌륭했을 법한 가문에서 남달리 귀하게 자라신 교수님들,
살기 좋은 외국에서 많은 학문을 쌓고 돌아오신 교수님들,
제 나라에서는 내놓고 자랑해도
뒤질데 없이 존경받을 체면에도 불구학고
앞에 나서거나 크게 주장하는 법 없는 교수님들,
조용한 목소리, 겸손한 표정으로
선진국 이론이나 엮어 전수하는 점잖고 으젓한 교수님들...

이들에 대한 인격적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그럴 법한 부류의 상징이어서 마땅할 함 선생님의 첫 모습에서
적지아니 혼돈을 갖게 되었다.

고작해서 한 발자국도 안 되는 탁상과 칠판 사이에 끼어
한 두 시간이라야 손가락으로 세기에 족할만큼
개념적인 어원만을 간단히 메모하는 것 외에
탁상 위에 펼쳐 있는 노우트를 보기 위해서
손에 쥔 안경이 눈가로 잠깐 옮겨지는 습관을 제하고 나면
거의 구두 밑굽만 떼었다 놓는 정도로 마감되는
조심스런 자태가 전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론들을 엮어서
역사적인 맥락을 깔끔하게 꿰어 내고
반론을 한다거나 재해석하는 따위로
논리정연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도대체가
음성이 조용한 것도 아니었다.

 

 

 

1 부 / 5. 봉원산거


처음의 만남이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인연이었던가?...

 

나는 유신 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은 휴교를 하고
정국은 절망과 공포로 주눅들면서 쥐죽은 듯 고요하던 때에
함석헌 선생님이라면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
치떨리는 심정으로 몸서리를 치고 계실 것만 같았다.

 

함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퍽 자상하게 맞아 주셨다.
뜻밖에도 신촌 봉원동 산거에 조용히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주선해 주셨다.

 

우선 연세대에서 뜻을 같이할 학생들을 찾았다.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한국신학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봉원산거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턱을 15 도 쯤 위로 치킨다.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긴다.

한 소리를 만나 귀속에 담고
명동(鳴動) 깊숙히 파묻히기도 하고
한 생각을 만나 머리에 이고
돌이킬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지기도 한다.

 

얼추 모였다 싶으면
적당한 헛기침 소리에 맞춰 자리를 가다듬는다.

 

간디 자서전 (Gandhi's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ht Truth)
을 펴서 차례지어 돌아 읽고 뜻을 푼다.

 

옛적부터 오랜 세월 이 땅의 서원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을 것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턱을 15 도 쯤 아래로 떨구고 있을 것이었고

 

스승은 표정을 삭이고 비스듬히 앉아 장죽대를 빨면서
모여드는 제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함 선생님의 말씀이
한 주일 동안에 생긴 일들과 어우러지고
간디의 삶과 이어져서 가이없이 펼쳐진다.

 

수줍은 미소와 겸양어린 표정으로
들릴듯 말듯 더듬으며 시작해서
차츰차츰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더듬던 '말씀'이 서둘러 지고 또렷해 진다.
안색이 변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손이 오르내리고 몸이 움직인다.

 

혈색이 벌겋게 물들어지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리고는 온 몸을 치흔들어 분노하며 외친다.
내키는 대로, 내키는 그대로를 '말씀'으로 쏟아 놓는다.

 

다시 수줍고 겸양어린 모습으로 되돌아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억 겹 올에서 한 가닥 두 가닥
섬세한 솜씨로 뽑아 내어 이리저리 휘젓다가 어느새...

 

둘러 앉은 젊은이들은 올마디를 좇아 겨를없이 헤맨다.
휘저이면서 이리저리 떠 돈다.

 

한참을 지나서야 동(東)으로
또 한참을 지나서야 (西)로 옛날로...
제 자리로...
염주처럼 꿰어진다.

 

이런 모양으로 한 해 남짓을 어울려 공부하다가
이듬해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는 대부분 구속되거나 지명수배를 당했다.

 

그 후 1975년에 다시 모임을 갖고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Bhagavadgita)를 공부하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모임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모임을 갖고 함께 어울려 공부한 이들로는
남학생으로 강경헌(태학관 관장) 강용현(판사) 
김형기(경주 중앙교회 목사)
박경수(한국공항관리공단) 박재순(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부길만(동원대 교수) 신대균(사회운동)
이도성(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이원희(목사)
임지순(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임유식(사업)
조성완(재미 목사) 허우성(경희대 교수) 등등과

 

여학생으로 강인선(성공회대 교수)

김은희(전 조선일보 문화부)  유영림(목사)
전경림(성악가)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


 참고 사진 : 1964년 봉원산거 퀘이커 모임집 광경




 

제 1 부 / 6. 1973년 가을



한편 나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평등,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내세운 기독학생회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에도 각 대학마다 총학생회가 있었지만
일반 학생들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보 기관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신 체제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고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짐에따라 학생 운동의 지도부는
고도의 자기 희생을 결단하지 않으면 진실을 외치기가 매우 힘든 시대였다.

 

학생 운동은 주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해서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몇몇 대학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모임이
학생 운동의 지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학생 운동의 연계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각 대학마다 전통과 맥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는 학생 서클의 지도부들끼리
간헐적으로 연대하여 대응해 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서클에 비해 상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대학에 연합 조직을 갖고 있는 단체가
바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조직된
YMCA와 YWCA, 그리고 KSCM이라는 기독교 학생 단체를 모두 통합하여

1968년 연맹체로 구성한 대표적 기독 학생 단체이다.

 

당시 전국에 걸쳐 어지간한 대학에는
거의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학생회(SCA, SCM 등)의 연합 조직인 것이다.
 
KSCF는 서울 지구, 영남 지구, 호남 지구 등
전국을 3개 지구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서울과 경기, 인천, 충청도와 강원도를 포함하는
서울지구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3 개월여 만인 1973년 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임원 5명이
보안사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25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 등 4 명은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10월 2일에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풍문으로만 나돌던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2시간 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출동한 경찰이 서울 문리대 교정에 난입하여
시위 학생 180 여 명을 강제 연행해서 그 중 20명을 구속하고
57 명을 즉심에 회부하여 구류 25 일에 처했다.

         ▲ 10. 2 서울문리대 학생 선언문

 

서울대 10.2 데모를 주동한 강영원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 등은
KSCF의 학사단 운동 출신 임원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대부분의 서울대 소속 KSCF 회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 처분 또는 지명 수배를 당했다.

 

유신 초기 공포와 절망으로 주눅든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 운동과 학생 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결합할 필요를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0.2시위로 서울문리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 연행되는 학생들

 

서울대 10.2 데모 사건은
유신 계엄령 이후 침묵하고 있던 당시의 전국 대학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 시발로해서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10월 16일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친동생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던 중

조사 3일 만인 10월 19일 새벽에 중정 건물 앞에서

담당수사관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중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하는 공무원과 교수 등

54명의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최종길 교수도 이 간첩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고조되고 있는 학생운동의 분위기를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가려는

박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연세대 기독학생회 이재웅(72학번, 정외과) 등과 함께 시위와 철야 농성을 이끌었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11월 27일 연세대 학생시위의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학생회관 1층 로비로 학생들을 이끌고 밤샘 농성에 돌입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당시에 이미 신촌의 명배우로 유명했던 명계남을 만나서

철야 농성에 사회를 맡아 이끌어 줄 것을 부탁했다.


학생회관 로비에는 400 여 명의 학생들이 꽉 들이차 있었다.

6시 경 초저녁에 시작된 농성의 열기 또한 식을 줄 몰랐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재치가 넘치고 유려한 명계남의 사회는

지루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되었다.

새벽 5시까지 400 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나는 명계남에게 약간의 도피 자금을 쥐어 주고

수사기관에 검거되지 말고 잘 피해 있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이후로 나와 명계남은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아야 했다.


▲ 가두로 진출한 학생 시위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 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번지고
정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유신정권은 모든 대학에 휴업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대학은 휴업과 함께 조기 방학으로 들어갔다.

 

한편 유신체체 이후 처음으로 서울 문리대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전국의 대학이 데모로 소용돌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신문과 방송에서 전혀 사실대로 보도를 못 하자
언론사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고
기자협회에서는 사실 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12월 7일 들어서면서 박 정권은 10월 2일부터 학원사태와 관련하여
구속된 학생들을 모두 석방하고 학사처벌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지명수배 조치도 해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10월 12일과 11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과 함께 조사를 받고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정보 기관에 요시찰자로 분류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 1973년 당시 서대문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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