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글을 마치며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내 아내 혜숙이 암으로 쓰러지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투병했던 일을 무엇보다 첫 번으로 삼는다.

내 자신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네 번씩 실형 언도를 받고
적지 않은 세월 감옥에 갇히고 했지만

그보다는 죽어 가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 보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1991 년 2 월 조금은 민주화 된 세상에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이 일은
"민주화 운동가...
제적과 징집, 복학과 구속과 제적을 거듭하다가
22 년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이란 제하와 내용으로 각 일간지와 교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1993 년 7 월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
우리 부부의 기사가 특집으로 꾸며져 가족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1996 년 3 월 나는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를 정리하여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도서출판 현암사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때는 글을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사정이 너무 촉박해서 미처 가다듬을 사이없이 졸속을 무릅쓰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 차분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날을 기약했다. 

여기 홈페이지에 실린 <우리는 하나>는 그 책의 제 1 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기약한 바대로 차분히 가다듬다보니 분량이 열 배 이상으로 늘어 났다.

2000 년 1 월 도서출판 한울에서 <사랑과 희망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언론사에서 신간 안내나 서평으로 다루는 등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종합여성지 월간 <feel> 은 2000 년 2 월호에서
<시한부 인생 아내를 암에서 구해 낸 한 사회운동가의 감동 외조 & 민족의학의 실체>
라는 제목의 특집을 꾸며 게재했다.


같은 해 2 월 3 일에는 KBS TV 아침마당 저자와의 대화 코너에

우리 부부가 함께 출연해서 생방송으로 35 분간 방영되기도 했다.


이상의 자료들은 본 홈페이지 언론방송 자료방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는 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모두

절판이 된지 오래이다.


늦은 나이에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영상작품을 만드는 일에 취미를 붙인 나는

위 두 책에 실렸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의 언론 보도와 사진 등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을 추가 보충하고 검증하여

직접 제작한 나의 홈페이지에 공개해서 올린다.

*

*
예로부터 아내와 아이들, 집안 이야기는

자랑이든 허물이든 밖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했다.

특히 아내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를 일컬어
팔불용(八不用)이요 팔불출(八不出)이라 했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소치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만시리에 공개하는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갔으면 하는 뜻에서다.

이 땅에 민주화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헌신해 온 이들


병마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당하는 이들

그리고 경제적 형편으로

절박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이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
*

( 추신 )

내 아내 혜숙은 <사랑과 희망으로>를 펴내고 4년 여

암 수술을 받은 후로는 17년 6개월 여가 흐른 뒤
2004년 9월 3일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 가족은 선후배 동지들의 간곡한 뜻에 따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혜숙을 안장했다.


나는 삼오제가 되는 날
비문을 작성하고 무덤 앞에 새겨 두었다.

(전면)
민주화운동 관련자
故 박혜숙의 묘

(후면)

故 박혜숙은 1972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제약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박정희 독재 권력에 대항해서 학생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여학생의 몸으로

갖은 고문과 공포 속에서 조사를 받고
소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이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수사 당국으로부터 수차례

지명수배와 연행 조사를 당하는 등 계속 활동해 오다가
1978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의 동지인 최민화와 결혼한 이후로는 세민약국을 경영하면서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남편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우회 등 단체의 결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오다가
1987년 위암 수술을 받고 병마와 치열하게 싸워오던 중
2001년 8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하여 증 제2224호로 민주화운동관련자 증서를 수여받고
2004년 9월 3일 02시 21분에 일기를 마치니
남아 있는 동지들의 간절한 뜻으로
여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고이 잠들다

2004 년 9월 7일 삼오제에 남편 최민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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