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네 번째 명함

 

 

첫 직장으로 나는 70 년대 후반
월간 < 씨알의 소리 > 사에서 편집일을 맡아 했다.

주위 동료들이 더러 선망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이 내게 맡겨 졌다.

이 후로 나는
감옥에 들어 가 있는 동안을 빼고
계속 직장 생활을 이어 갔다.

두 번째 직장으로 나는
당시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의 추천으로
우리나라에서 전통 있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현암사에 입사해서
대작 "한국미술 5 천년"의 기획 출판을 맡아 했다.

10.26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 뒤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째 감옥을 살게 된 나는 출소하자마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출판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각각의 단체에서 상임위 의장, 청년단체 대표위원
실행위원 등을 맡아 활동해 왔다.

그러던 중 민청련 시위 사건으로
김근태 등과 함께 구속되어
네 번째 감옥을 살고 나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네 번째 감옥을 사는 동안
나는 인쇄 공장에 출역하게 되었다.

인쇄공장에는 활판인쇄기, 옵셋인쇄기, 조판 정판실,

최신형 마스타 인쇄기, 재단기 등등의 기계들과 제본실이 있었다.

원고가 들어 오면 편집과 조판 교정에서부터
인쇄와 제본까지 일괄해서 처리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0 개월 여 동안 인쇄 공장에 출역하면서
나는 제작 공정의 모든 실무를 직접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내 팔자에 인쇄 사업이 예정돼 있었던건가?...'

월간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미술 대작의 기획 출판을 맡고
연구원의 출판부서를 운영하는 책임과
인쇄 공장의 실무를 익히는 등으로

나는 우연치 않게도 10 여 년 동안
출판 인쇄 분야의 모든 실무와 운영을
두루 경험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마음 한구석에
무언지 모를 자신감...
해 낼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 나는 네 번째 명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달려 나갈 준비를 차린 것이다.

 

 

 

 

83. 첫 번째 주문

 

 

실천문학사 송기원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 좀 내어 저녁을 같이 하잔다.

송기원은 한국 문단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의 마지막 세대이자
합병된 중앙대 문창과의 선두 세대다.


▲ 작가 송기원


그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문인들을 이끌고 실무일을 도맡아서
가장 치열하게 활동해 온 시인이요 소설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각각 단편 소설과 시로
한국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치열했던 자신의 삶만큼이나 예리한 통찰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 주는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나는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고 있을 적부터
그와 가까이 사귀어 왔다.

때로는 서대문 구치소에 함께 구속된 처지에서
서로 통방을 하며 각별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종로 1 가 허름한 목로집에서 만났다.
손님들이 앉을 틈도 마땅찮게 비좁은 집이다.

"야! 니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겪을 수 있냐?...
재야에서 니 경제적 지원 안 받은 단체가 없을꺼고...
니 신세 안 져 본 사람도 그리 없을텐데...
그런 천하의 아무개가 어떻게 사무실도 없이...
전화통만 달랑 갖고 나가 인쇄소 골목에서
나까마(행상)하게 되었냔 말야 임마!!!"

눈깔사탕처럼 땡그란 얼굴에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송기원은 동그랑땡 안주 국물에 소주를 들이키면서
황소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선 사무실이라도 마련해야 되겠지?...
급한대로 우리 실천문학사에 들러
한 2,3 백 만 원 가져 가 임마...
니가 할 일거리도 챙겨 둘테니까 가져 가고...
일거리 떨어지면 미리미리 얘기해.
출판사에서도 어차피 들어가야 할 비용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감옥 사는 동안에 우리 출판사 책 좀 팔렸어.
그러니 니가 했던 것만큼은 다 못 하더라도
네 사무실 제목마따나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눠 먹자 임마!..."

다음날...
나는 실천문학사로 송기원을 찾아 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는 경리부를 통해서 내게 2 백 만 원을 내 주었다.

그리고 원고 정리가 아직 덜 되었다면서
이미 출판되어 있는 소설책 한 권을 내밀고
전산 조판부터 인쇄 제작까지 새로 만들어
3,000 부를 납품해 달라는 거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느냐고
새 원고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송기원은 앞으로 어차피
활판 인쇄용으로 조판된 책들을 재인쇄 할 때는
옵셋 인쇄용 전산 조판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니까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일거리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들러서 가져 가라고 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로 의뢰 받은 주문이었다.

각별한 배려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사업이랍시고 뛰어 들어서
처음으로 결재 받은 돈이기도 했다.




 

84. 월간 <말> 합본호

 

 

내가 '나눔기획'을 차린 소식이
주변에 점점 알려 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아내가 위암에 걸려 죽어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병 구완도 제대로 못 한 채
돈을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행여나 내 마음이 다치거나 상처 받을새라
각별한 조심과 배려를 더 해 주었다.

그 당시 월간 <말> 지 사장으로 있던
김태홍 선배에게서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김태홍(1942 ~ 2011) 전 국회의원


김태홍 선배는 한국일보와 합동통신에서
외신부 기자로 있던 언론인 출신이고 
나중에는 광주 북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80 년 계엄 치하에서
기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라 할 수 있는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아
언론 검열 철폐 및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벌인 죄로 계엄 당국에 의해 구속 수감되고
신문사에서도 해직되었다.

"최 형을 이 고생하도록 놔 둔다는 것은 우리 주변 모두의 수치예요.
부끄러움이고 후안무치한 일이지...
요즘 <말> 지 사정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 이후로
<말> 지는 오히려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소.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그런데 마침 <말> 지 창간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간행된 것을
보도지침 폭로 기사 내용까지 수록해서 합본호로 만들기로 했는데
기왕이면 당신이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겠고...
비용은 한 천 여 만 원 들텐데 필요한대로 먼저 가져다 쓰시고..."

<말> 지는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월간 <씨알의 소리>가 1980 년 7 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의해 폐간된 이후로

이 땅의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1950 년대부터 60 년대 말까지는
장준하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발행한 <사상계>가 있고
박 정권에 의해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

그 뒤를 이어 1970 년부터 80 년까지
함석헌 선생을 발행인으로 한 <씨알의 소리>가 있다.

<씨알의 소리> 역시 전두환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후
무려 5 년 여의 공백기를 지난 1985 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지가 있어
우리 나라 월간 잡지 역사의 전통과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75 년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과
1980 년 계엄 하에서 역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기자들은
1984 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설립했다.

그동안 거리로 내쫓긴 해직 기자들은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글과 각종 성명서를 통해, 때로는 거리 시위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구속되고 옥고를 치루면서까지
자유 언론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 왔다.

하지만 정작 언론 매체를 스스로 만들어서
실천적 활동을 벌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85 년 5 월 월간 <말> 지를 창간하게 되고
이를 모태로 해서 1988 년에는 급기야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기까지 이르르게 되는 것이다.

김태홍 사장은 내게 각별히 부탁한다.

"월간 <말> 지 합본호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제작해 줄 사람이
아마도 최 형 말고는 없을 것 같소... 

최형 입장에서야 어디 이 정도를 가지고 두려워서 못 할 분은 아니잖소...
그러니 가급적 조심해서 꼭 해 내 주기를 바랄 뿐이요..."

그 때 상황으로는 실로 엄청난 주문이었다.
인쇄량은 물론이거니와 양장 특수 제본을 비밀리에 해 낸다는 게
여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2. 네 번째 명함  (0) 2008.01.22
83. 첫 번째 주문  (0) 2008.01.22
85.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0) 2008.01.22
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0) 2008.01.22
87. 마지막 예배  (0) 2008.01.22

 

85.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책상 하나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더 큰 사무실이 필요했다.
당장에 작업을 진행시킬 직원이 필요했다.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사무실을 옮겼다.
출판 편집 경력 15 년 이상되는 베테랑급으로 우선 두 분을 간부 직원으로 초빙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다시 보름 만에 20 여 평되는 사무실을 구해 이사했다.
직원도 여섯 분으로 늘었다.

내가 두 번째로 직장 생활을 했던 도서출판 현암사 조근태 사장을 찾아 갔다.
조 사장은 이미 나의 형편과 사정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계셨다.

 

 

▲ 현암사 조근태 사장 (1942 ~ 2010 )


"최 선생! 사업을 하게 되면 무슨 사업이든 부채를 지게 마련이오.
5 천 만 원이란 부채는 사업 규모에 따라서 별 거 아닐 수도 있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외상 매입 부채가 한 5 천 만 원에서 늘 깔려 있도록 사업 규모를 키워 놓으면...
재정적인 문제도 어렵지 않게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께요.
나도 최 선생을 위해서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우선 아무런 시설도 없고 거래처도 없을 테니까 내가 그것을 맡아 주겠소...
제일 큰 부담이 원재료인 종이값일텐데...
내가 거래하는 지업사에 특별히 부탁해 놓을테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주문해서 갖다 쓰시고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 하시오...
그밖에 인쇄소나 제본소도 필요하다면 소개해 주겠소...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정히 필요하다면...
우리 현암사 어음을 발행해 드릴 테니까 그리 아시고요...
아마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꺼요..."

그 때 조 사장의 도움과 제안은
내게 크나큰 의욕과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세 번씩이나 울먹이며 피마르는 심정으로
주저주저하며 안쓰런 표정으로
사정하던 혜숙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혜숙에게 속삭였다.

"내 꼭 올해 안으로... 6 개월 안으로 빚을 갚을께...
몸조리 잘 하고 살아 있어야 돼!..."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3. 첫 번째 주문  (0) 2008.01.22
84. 월간 <말> 합본호  (0) 2008.01.22
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0) 2008.01.22
87. 마지막 예배  (0) 2008.01.22
88. 죽으면 죽으리라  (0) 2008.01.22

 

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고
그 후 협의회 총무를 맡았던 김동완 목사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김동완 목사는 내가 소속된 감리교단의
교회 개혁과 사회 운동을 실천적으로 대표해 오던 분이다.

 

▲ 김동완 목사 (1942 ~ 2007 )


김동완 목사는 일찌기 박형규 목사와 더불어 빈민 운동과 노동 운동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오면서 세 차례나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나와 혜숙은 김동완 목사와 각별한 관계로
함께 기독학생 운동을 하기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난리야!...
우리 혜숙 씨 병 구완도 못 하고...
세상에 최 아무개가 이렇게 돼도 되는 거야???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구!!!
당신이 감옥 들어가기 전 기사연(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있을 때
당신들이 계획하고 준비해 왔던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를
우리 인권위원회에서 펴 내기로 했소...
기사연에서 내게 되면 정보 기관의 압력을 버텨 내기도 어렵고
위험할 것 같아서 우리가 내기로 한 거요...
어차피 당신들이 계획하고 준비해 온 거니까
기왕이면 직접 맡아서 출판까지 해 주시오...
예산은 한 1 천 5 백 여 만 원을 당신도 알다시피 별도 통장으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가져다 쓰고..."

원고를 가져 왔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4 . 6 배판으로 2,200 여 페이지 가량 되는 분량이다.
당시 20 여 평형 아파트 값이 천 여 만 원 할 때던가 그랬다.

상황이 또 바뀌었다.
공타기로 조판하기에는 어느 세월에 마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첨단 컴퓨터 기술을 응용해서 마악 새로 개발해 시중에 나온
전산 조판기를 구입해야 했다.

다시 보름 만에 사무실을 40 여 평으로 늘리고
최신형 한컴 전산 조판기 4 대와 사진식자기 1 대를 리스로 구입했다.

<말> 지를 비밀리에 인쇄하기 위해서 서울 시내에는 3 대밖에 없다는
미국산 최신형 4 절 마스터 인쇄기도 리스로 구입했다.

구입 비용이 6 천 여 만 원에 달했다.
15 평 남짓 되는 인쇄 공장도 별도로 마련했다.

직원도 20 여 명으로 늘었다.
시작한 지 40 여 일 만의 일이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4. 월간 <말> 합본호  (0) 2008.01.22
85.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0) 2008.01.22
87. 마지막 예배  (0) 2008.01.22
88. 죽으면 죽으리라  (0) 2008.01.22
89. 가족 여행  (0) 2008.01.22

 

87. 마지막 예배

 

 

한편 혜숙은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단계도 지나 있는 듯 싶다.

앞으로 몇 날을 더 살 수 있을지
내일이건 모래건 숨이 끊어지면 그냥 죽는거지 하는 표정이다.

의학 용어로 터미널 (Terminal) 상태...
우리 말로 풀자면 종착역 종점에 임박해 있는 상태다.

7 월 첫째 주...
혜숙이 여러 달 동안 교회에 나가지 못하자
담임이신 조승혁 목사님과 교인들이 심방을 오셨다.

목사님과 교인들 모두 혜숙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 심방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조 목사님의 심방 예배가
마지막일 꺼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 조승혁 목사 (1935 ~ 2014 )


혜숙이 자신도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예식이 되겠구나 싶단다.

혜숙은 교인들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듯
목사님과 교인들이 대문으로 들어 서는 기척에
벌떡 일어서서 울음으로 맞이한다.

방이며 마루 가득히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동안 내내
혜숙은 엎드려 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흑흑거렸다.

나는 혜숙과 만난 이래로
이처럼 절망적인 혜숙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혜숙은 체신이니 뭐니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 하나님!!! 왜 이 여인을 데려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여인이
왜 민주화 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어 온 남편을 뒷바리지하고
어려운 동료들을 보살펴 온 당신의 귀하고 의로운 따님을
주님! 데려 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사오니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조승혁 목사님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 몸에 땀을 흠뻑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참석한 교인들도 모두 울고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목사님은 교회가 세워진 이래 이처럼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 교인이 합심된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다고 하신다.

안수 기도 중에 조승혁 목사님은 배와 등허리 쪽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단다.
통증을 견디다 못 해 기도 소리가 더 커졌다고 한다.

함께 울고 통곡하고 기도하던 혜숙은 마음이 조금 평온해 지는 듯 했다.
그날 밤 혜숙은 오랜 만에 모처럼 잠을 편하게 들 수 있었다고 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5.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0) 2008.01.22
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0) 2008.01.22
88. 죽으면 죽으리라  (0) 2008.01.22
89. 가족 여행  (0) 2008.01.22
90. 비선대 추억  (0) 2008.01.22

 

88. 죽으면 죽으리라

 

 

이튿날 혜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좀 달라고 했다.
수술 이후 처음으로 혜숙은 자기 의지로 자기 욕구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반갑고 신이 나신 듯
밝고 환한 표정으로 물으신다.

"에미야~~~ 배가 고프다고?...
무얼 먹고 싶어? 무슨 반찬을 해 줄까?"

"조기 반찬이 먹고 싶어요"

혜숙이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책을 읽어 보니
지은이 오혜령도 암 수술을 받고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다가
끝내 배에 복수가 가득차고 의학적으로 터미널 상태에 다달았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나서
맨 먼저 먹고 싶었던 것이 조기 반찬이었다는 거다.

오혜령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며 평온해 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가득 찼던 복수가 점점 빠지고
암 세포의 진행이 멈추더라는 것이다.

혜숙은 오혜령의 수기에서처럼
자신도 그렇게 소생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게다.

암 환자의 심리적 변화에서
제 1 단계인 부정하고 거부하는 상태에서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모든 것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상태...

그러고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고
한없이 무력해 지는 상태를 지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려는 단계까지 예외없이 겪어 온 혜숙은

이제 이 모든 단계들이 때때로 혼재되어 나타나면서
그래도 살아 나야 한다는 희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어머니는 조기반찬에 자연식 야채로
상을 가득히 채워 놓으셨다.

어머니와 나는 혜숙이 얼마나 먹을까...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기대하고 염려하면서 지켜 보았다.

혜숙은 입에 넣자마자
먹은 음식들을 토해 내느라 정신 없어 했다.

하지만 혜숙은 토하면서도 먹기를 계속했다.
먹으면 토하고... 먹고 토하고......

물만 먹어도 토하고
먹은 것보다 더 토하곤 했다.

이후부터 혜숙은 토하면서 죽도 먹고
조기 반찬도 먹고 했다.

그래. 먹어야 한다.
먹자. 먹자.

혜숙은 죽기 살기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혜숙은 생기가 돌면서
삶의 의욕이 생기는 듯 했다.

비록 토하더라도 먹는 재미
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제일 맛있는 것이 물이라고 했다.
그즈음 해서 나는 생수기를 들여 놓았다.

의학적으로는 대책이 없고 방법도 없는 터미널 상태지만
혜숙은 그 날부터 풍욕과 냉온욕 그리고 간간이 먹어 대는 일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맏아들이 친구들을 몰고 집에 와도 개의치 않고
맞바람 치도록 창문과 방문을 열어 놓고는 벌거벗은 채로 풍욕을 하고
하루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냉온욕을 하고 왔다.


밤에는 마고약을 배에 얹고 잤다.
하루에 풍욕 8 번 냉온욕 1 번 마고약 1 번

그렇게 석 달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혜숙은 필사적으로...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작정하듯 매달렸다.

그즈음 해서 혜숙은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이제껏 살아 오면서 잘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지금껏 마음 속 깊이...
가장 꺼림직하게 남아 있는 게 무언가...
무엇을 제일 잘못하고 있었나...
혜숙은 곰곰 생각하고 따져 보았단다.

1 번 2 번 순서를 달아 적어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들이
모두 마음에 걸리고 한도 끝도 없이 나오더란다.
한 30 여 가지를 적어 놓았단다.

가장 마음에 걸리고 잘못한 일은
시어머니를 마음 속 깊이 공경하지 못했던 거란다.

혜숙은 시어머니에 대해 마음 속으로 불편해 하고 짜증 낸 것을
첫 번째로 삼아 회개했다.

돌이켜 보고 뉘우치며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 기도를 하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제목이 해결되어야 다음 순서로 넘어 갈 텐데...
너무 오래 걸리더란다.

그래도 철저하지 못했다면서
두고두고 아쉬웠단다.

회개 기도를 하면서 혜숙은 마음을 비우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

혜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야만 되는
이과 전공 출신이어선지 성격도 좀 원칙적인 편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좀 까다롭고
힘에 겨운 일을 잘 참아 내지 못한다.
곧잘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혜숙은 자신의 이러한 성격을
모두 다 비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시건방진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넉넉하게 편안하게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했다.

한 달 쯤 지나자
혜숙은 체중이 5 백 그램 정도 늘었다.

혜숙은 체중이 늘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며
사소한 일에도 자주 웃고 즐거워 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0) 2008.01.22
87. 마지막 예배  (0) 2008.01.22
89. 가족 여행  (0) 2008.01.22
90. 비선대 추억  (0) 2008.01.22
91. YS 후보 진영에서  (0) 2008.01.22

 

제 3 부 / 89. 가족 여행

 

지금까지의 그리 짧지 않은 이야기들은
내 아내 혜숙이 1987 년 4 월 암 수술을 받고
그 해 7 월 중순 경까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내 인생에 너무 충격적이고
그만큼 힘들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인가
3 개월 여 동안의 이야기로는
너무 길고 지루한 점 없지 않았다.

이제 호흡을 좀 빨리 해서
마무리 정리를 해야겠다.

1985 년 7 월 마지막 주간에
우리 가족은 다함께 동해안에서 휴가를 보냈다.

어머니와 두 아이까지 모두 함께 여행하기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때 혜숙은 내게 조용히 임신한 사실을 알리고 
꼭 건강하게 낳고 싶다고 했다. 

 

나는 뜻밖의 통보(?)에 약간 멈칫했지만
이내 고마운 마음에 손을 꼬~옥 잡고
격려의 뜻을 담아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다.

 

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 단란하게 여행하는 것이 
혹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사진 찍기에 바빴다. 
 

무려 여덟 통을 찍었다. 
이 사진들은 지금도 우리집 앨범에 담겨 
암울했던 가운데서도 한때나마 즐거웠던 가족 분위기를 소중하게 밝혀 주고 있다.

 

오색약수터 근처에 숙소를 마련하고 

탐방로를 따라 선녀탕과 금강문을 지나 용소폭포에 닿았다.

 

▲ 1985년 7월, 막내 중현이를 임신하고 설악산 용소폭포 앞에서


용소폭포는 높이 약 10m, 소 깊이 약 7m로, 
이 소에서 살던 천년 묵은 암수 이무기 두 마리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가
숫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된 탓에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4 년 뒤
막내 중현이가 세 돌 되는 해 여름
우리 가족은 또다시 동해안과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때에 어머니는 힘이 드실 것 같다고 집에 계셨다.

초등학교 5 학년이던 딸 사옥이와 3 학년이던 아들 중수에게
체력 단련도 시킬 겸 해서 설악산 금강굴을 향해 올라갔다.

비선대에 이르러 우리는 주변의 경관에 취해서
잠시 쉬고 있었다.

거울처럼 해맑은 물 하며 물줄기에 곱게 다듬어진 웅장한 바위들은
깍아 세운듯한 산줄기를 배경으로 자연이 빗어 놓은 아름다움을 한껏 빛내주고 있다.

비선대에서 흘러 내리는 물은 이내 큰 바위를 굽이쳐 폭포로 변한다.
폭포 위로는 비선대 각자바위에서 연못으로 건너가는 사다리형 다리가 놓여 있었다.

 

▲ 설악산 비선대

 

▲ 비선대 각자바위 : 비선대 암반에 새겨진 각자로 세로로 내려 쓴 글씨가 선명하다.

 

세 아이와 우리 부부는 각자바위 아래 다리를 건너

위에 보이는 고인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취한 듯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 댔다. 

세살배기 막내 중현이도 신명이 났던지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잠깐 절경을 둘러보는 사이에 
막내 중현이는 사다리형 다리가 신기했던지 
그 쪽으로 다가가 사다리 사이에 팔을 걸치고 폭포 위에 서 있었다. 

다시 위로 오르기가 어려웠던지 
중현이는 잡고 있던 사다리를 놓고 
밑으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막내가 폭포 아래 낭떠러지로 
휩쓸려 떨어지리라 직감했다. 

중현이를 구해 낼 시간이 없었다.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것 외엔 방법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연못에서 뛰쳐 나왔다. 

 

 

하지만 중현이는 이미 
물살에 몸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더니 
거대한 폭포에 휩쓸려 낭떠러지 절벽으로 떠내려 갔다. 

이제 
중현이를 살릴 방법이 없다. 

나는 몸을 돌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막바로 낭떠러지 절벽 폭포를 향해 몸을 내 던졌다. 

천만다행이게도 폭포에 미끄러져 내려 오는 중현이보다 
한 뼘 정도 먼저 떨어 질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바위에 부딪칠 찰라에 있는 
중현의 머리를 팔등으로 막아 냈다. 

중현이의 머리와 몸이 
내 팔등에 세차게 부딪쳤다. 

그리고는 퉁겨져 나와 
폭포를 타고 웅덩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 
가라 앉는 중현이의 몸을 찾았다. 

잠시 후... 
나는 중현이를 받쳐 들고 
물 위로 떠올랐다. 

주위에 있던 관광객들이 모두 경악하면서 
삽시에 폭포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내가 중현이를 받쳐 들고 물 속에서 떠 오르자 
300 여 관광객들은 
"와 ㅡ !!!" 하는 함성과 함께 
힘차게 박수를 쳐 댔다. 

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놀란 중현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한동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관광객들은 팔과 팔을 이어서 
인간 밧줄을 만들어 중현이를 받아 올려 주었다. 

중현이가 무사하게 구출되는 순간 
다시 한번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현이를 올려 보내고 
너무 긴장했던 탓에 호흡을 가다듬던 내가 
인간 밧줄을 잡고 마지막으로 기어 올랐을 때 
주위 분들 모두 비선대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우렁찬 박수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설악산에 머물 기회가 있으면

나는 되도록 비선대를 찾아 옛 추억을 기린다. 

 

[영상] 비선대 추억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7. 마지막 예배  (0) 2008.01.22
88. 죽으면 죽으리라  (0) 2008.01.22
90. 비선대 추억  (0) 2008.01.22
91. YS 후보 진영에서  (0) 2008.01.22
92. DJ 진영과 재야 단체에서  (0) 2008.01.22

 

90. 비선대 추억

 

혜숙은 그때 막내와 내가 
함께 죽는 줄로 알았단다. 

혜숙이 면전에서 
사옥이와 중수가 벌건 대낮에 
시퍼런 눈으로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서 
막내와 아빠가 사고를 당해 죽는구나 했단다.

 

 

혜숙은 중현이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중현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 중현이 귀에서
혜숙은 큰 귀우지 덩어리를 빼내었다.


내 팔뚝에 차고 있던 시계는
중현이 머리에 받쳐 바위에 부딪치는 순간
박살이 난 채 떨어져 나가 버렸다.

 

모여 있던 관광객들이 우리 가족에게 다가 와서
내게 악수를 청하고 중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모두들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한다.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한다.

내가 먼저 격려와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일일이 올려야 했는데
모두들 오히려 먼저 내게 고맙다고 한다.

 

        ▲ 비선대 폭포에 떨어진 후 구출된 막내 중현이


이제 모여 있던 관광객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나도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갔다.

나는 사옥이와 중수에게
계획했던 대로 금강굴에 올라 갔다 오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도 너무 놀란 가슴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아내와 막내를 쉬게 하고
사옥이와 중수의 손목을 잡고 금강굴로 향했다.

힘들다는 투정없이
땀을 흘리며 산에 오르는 아이들 모습을 지켜 보면서
나는 가슴이 뿌듯해 왔다.

 

        ▲ 금강굴에서 중수와 사옥

이날 이후로
우리 아이들은 아빠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아빠는 자기들을 포기하지 않고
꼭 구해 주실 꺼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가정에서는 이 일을 가끔씩 되돌아 보면서
화제를 삼아 왔다.

 

 

나와 혜숙은 막내가 너무 어릴 때라서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몇 년이 흐른 뒤
막내 생일에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려 주니까
그때서야 막내가 고백하더란다.

"엄마, 나 여태까지 엄마한테 비밀로 한 거 있는데...
말 해도 돼?"

"응, 그래그래... 뭔대? 우리 막내가 무슨 비밀이 있을까?
궁금한데?... 엄마한테 얘기해 봐. 무슨 비밀인지..."

"그때 아빠가 구해 준 거 나 기억하고 있어.
내가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물미끄럼 타고 싶어서 일부러 그렁건데 아빠가 살려 준 거야...
지금까지 혼날까봐 말 안 하고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아이구 우리 늦둥이!"

우리집 애들에게는 이 일이
두고두고 재미있게 구전되는 이야깃거리다.

이때부터 아이들이
아빠를 보는 눈빛과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아이들이 아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 낙산해수욕장에서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8. 죽으면 죽으리라  (0) 2008.01.22
89. 가족 여행  (0) 2008.01.22
91. YS 후보 진영에서  (0) 2008.01.22
92. DJ 진영과 재야 단체에서  (0) 2008.01.22
93. 분에 겨운 호사  (0) 2008.01.22

 

92. DJ 진영과 재야 단체에서

 

 

대통령 선거가 중반으로 접어 들자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도 주문 물량이 쏟아져 들어 왔다.

구속과 망명과 가택 연금으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탓인지
김대중 후보는 조직과 재정이 김영삼 후보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종교 시민 사회 단체의 연합체인 민통련에서는
선거 운동 방침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으로 정했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 단일 후보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지지, 지원 활동을 벌여 나갔다.

87 년 6 월 민주시민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는 공정선거감시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전국적으로 부정 행위를 감시 고발하는 활동을 펴 나갔다.

나와 가까이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온 이들은
대부분 '김대중 선생 단일 후보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일부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본부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두 조직에서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곁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모금 운동은 그야말로 쇄도할만큼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두 조직에서도 나에게 많은 일거리를 맡겼다.
서로가 어려운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관계로
나는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마련해서 차질이 없도록 홍보물을 만들어 납품했다.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에 속한 부문과 지역 활동 단체들에서도
아연 활기를 띠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모든 단체마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선거 홍보물이었던만큼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새없이 거래처와 인쇄 골목을 누비고 뛰어 다녀야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2 월 말이 다가오는 즈음에
나는 혜숙이 부탁한 빚을 모두 청산했다.

혜숙에게는 정작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당신 가슴에 한을 남길지도모를
빚을 그 안에 꼭 갚고야 말테니까...'
하고 말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이 다짐했던대로 올 해 안에,
연말을 넘기지 않고 모두 갚게 된 것이다.

6 월 말에 시작해서 12 월까지
6 개월 만의 일이다.

1987 년 12 월 31 일 자정에
나는 혜숙과 함께 교회에 나갔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지나간 1 년 동안의 감회를 말하고
다가오는 새해에 바라는 소원을 종이에 써서 촛불에 태우는 순서가 있었다.

나는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되돌아 보자니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견딜 수 없어 한참을 울먹였다.

"여보! 나 해 냈어...
당신 가슴에 그토록 맺혀 있던 빚을 다 갚았어...
이제 당신이 해 낼 차례야...
당신이 내 부탁 들어 주어야 할 차례라구...
당신 살아야 해! 당신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구!!!..."

나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 우리 혜숙이와
제발 헤어지는 일 없이 오래오래 함께 살게 해 주옵소서..."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90. 비선대 추억  (0) 2008.01.22
91. YS 후보 진영에서  (0) 2008.01.22
93. 분에 겨운 호사  (0) 2008.01.22
94. 문익환 목사님의 방문  (0) 2008.01.22
95. 시련은 떠나지 않고  (0) 2008.01.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