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죽으면 죽으리라

 

 

이튿날 혜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좀 달라고 했다.
수술 이후 처음으로 혜숙은 자기 의지로 자기 욕구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반갑고 신이 나신 듯
밝고 환한 표정으로 물으신다.

"에미야~~~ 배가 고프다고?...
무얼 먹고 싶어? 무슨 반찬을 해 줄까?"

"조기 반찬이 먹고 싶어요"

혜숙이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책을 읽어 보니
지은이 오혜령도 암 수술을 받고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다가
끝내 배에 복수가 가득차고 의학적으로 터미널 상태에 다달았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나서
맨 먼저 먹고 싶었던 것이 조기 반찬이었다는 거다.

오혜령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며 평온해 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가득 찼던 복수가 점점 빠지고
암 세포의 진행이 멈추더라는 것이다.

혜숙은 오혜령의 수기에서처럼
자신도 그렇게 소생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게다.

암 환자의 심리적 변화에서
제 1 단계인 부정하고 거부하는 상태에서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모든 것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상태...

그러고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고
한없이 무력해 지는 상태를 지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려는 단계까지 예외없이 겪어 온 혜숙은

이제 이 모든 단계들이 때때로 혼재되어 나타나면서
그래도 살아 나야 한다는 희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어머니는 조기반찬에 자연식 야채로
상을 가득히 채워 놓으셨다.

어머니와 나는 혜숙이 얼마나 먹을까...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기대하고 염려하면서 지켜 보았다.

혜숙은 입에 넣자마자
먹은 음식들을 토해 내느라 정신 없어 했다.

하지만 혜숙은 토하면서도 먹기를 계속했다.
먹으면 토하고... 먹고 토하고......

물만 먹어도 토하고
먹은 것보다 더 토하곤 했다.

이후부터 혜숙은 토하면서 죽도 먹고
조기 반찬도 먹고 했다.

그래. 먹어야 한다.
먹자. 먹자.

혜숙은 죽기 살기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혜숙은 생기가 돌면서
삶의 의욕이 생기는 듯 했다.

비록 토하더라도 먹는 재미
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제일 맛있는 것이 물이라고 했다.
그즈음 해서 나는 생수기를 들여 놓았다.

의학적으로는 대책이 없고 방법도 없는 터미널 상태지만
혜숙은 그 날부터 풍욕과 냉온욕 그리고 간간이 먹어 대는 일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맏아들이 친구들을 몰고 집에 와도 개의치 않고
맞바람 치도록 창문과 방문을 열어 놓고는 벌거벗은 채로 풍욕을 하고
하루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냉온욕을 하고 왔다.


밤에는 마고약을 배에 얹고 잤다.
하루에 풍욕 8 번 냉온욕 1 번 마고약 1 번

그렇게 석 달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혜숙은 필사적으로...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작정하듯 매달렸다.

그즈음 해서 혜숙은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이제껏 살아 오면서 잘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지금껏 마음 속 깊이...
가장 꺼림직하게 남아 있는 게 무언가...
무엇을 제일 잘못하고 있었나...
혜숙은 곰곰 생각하고 따져 보았단다.

1 번 2 번 순서를 달아 적어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들이
모두 마음에 걸리고 한도 끝도 없이 나오더란다.
한 30 여 가지를 적어 놓았단다.

가장 마음에 걸리고 잘못한 일은
시어머니를 마음 속 깊이 공경하지 못했던 거란다.

혜숙은 시어머니에 대해 마음 속으로 불편해 하고 짜증 낸 것을
첫 번째로 삼아 회개했다.

돌이켜 보고 뉘우치며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 기도를 하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제목이 해결되어야 다음 순서로 넘어 갈 텐데...
너무 오래 걸리더란다.

그래도 철저하지 못했다면서
두고두고 아쉬웠단다.

회개 기도를 하면서 혜숙은 마음을 비우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

혜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야만 되는
이과 전공 출신이어선지 성격도 좀 원칙적인 편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좀 까다롭고
힘에 겨운 일을 잘 참아 내지 못한다.
곧잘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혜숙은 자신의 이러한 성격을
모두 다 비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시건방진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넉넉하게 편안하게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했다.

한 달 쯤 지나자
혜숙은 체중이 5 백 그램 정도 늘었다.

혜숙은 체중이 늘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며
사소한 일에도 자주 웃고 즐거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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