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YS 후보 진영에서

 

 

여름 내내 나눔기획은 거의 매일 야근 작업을 했다.
2 ~ 3 일에 한 번씩은 철야 작업을 해야 했다.

가을에 들어서자 일은 더욱 많아지고 바빠졌다.
16 년 만에 실시되는 제 13 대 대통령 선거가 12 월로 다가오면서
인쇄 시장은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네 후보가 각축을 벌이는 동안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와 동료들은 운동의 전략 전술적 방향을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이번에는 김대중 씨가 한발 양보하고 김영삼 씨를 후보로 단일화해서
우선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소위 '후보 단일화(후단)' 입장과

김영삼 씨 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개혁적인 김대중 씨에게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대통령으로 세워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 입장으로 나뉜 것이다.

민통련과 민청련 간부들, 연세대 후배들은 특히 나에게 논쟁에 참여해서
이끌고 정리해 주기를 바랬지만, 나는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들어 극구 사양했다.

앞으로 최소한 5 년 동안 혜숙이 암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나는 오로지 혜숙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에 다시 복귀하겠노라고 했다.

84 년 말과 85 년 초 민청련을 대표해서 나는 김영삼 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두 번을 배석자 없이 긴밀하게 만난 적이 있다. 소위 독대를 했다.
그때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전 국회의원) 씨가 나를 맞이해서 안내를 했다.

당시 김영삼 씨의 이야기인즉슨 85 년 12 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민청련의 전술 방침이 총선 거부 투쟁으로 정해진다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를 배경으로
이민우 씨를 총재로 내세워서 창당하는 신민당에
나를 비롯한 청년 세력들이 후보자로도 적극 나서고 참여해서
전두환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나는 민청련의 전술 방침에 대해서
전면적 총선 거부 투쟁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지만
논쟁의 초점을 총선 참여냐 거부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볼 때 어떻게 하면 군사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쟁취해 내느냐 하는데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년 세력이 후보자로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반 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을 더욱더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강화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을 지도하고 이끌어 나가야 할 세력 또한
역량을 보다 더 축적하고 강화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니만큼 민청련의 주요 간부는
다가오는 국회의원 총선에 후보자로 나설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신민당에서 개혁성과 선명성, 도덕성을 갖춘 인사들을 후보자로 내세우면
선별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2 년 여가 흐른 싯점에
다시금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나는 정치적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면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들어 정중하게 사양하기로 작정했다.
한편으로 선거 홍보 인쇄물이나 주문 받았으면 하고 기대했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도 김영삼 씨는 이성헌(전 국회의원) 비서를 통해서
화환과 축의금을 보내 준 바 있다.

이성헌 비서는 연세대 후배로 총학생회장 제도가 부활되기 직전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을 맡았었다.

그는 학생회를 이끌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장래의 진로에 관해서

나의 지도와 안내를 부탁했었고 나는 그 당시 YS 진영에 합류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었다.

그런저런 인연에선지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는 내가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암에 걸린 아내를 곁에서 병 간호도 못 하고 인쇄소를 차렸다는데
기왕이면 일감을 맡겨 주자며 선전 포스터와 전단지 등을 주문했다.

그 당시에는 홍보 유인물에 대한 규제 조항이 없었던지
후보자의 포스터를 거리 곳곳마다 담벽마다 수십 장씩 연달아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시피 했다.


▲ 1987년 대선 당시 선전벽보

주문을 받고 보니 엄청나게 큰 일거리였다.

매출액이 1 억 원 정도 되는 물량이었다.

이제 나눔기획 자체 시설과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정이 벌어졌다.

거래처를 통해서 대형 트럭으로 몇 대씩 되는
고급 용지를 수송해 와야 했다.

기존 단가보다 더 얹어 주고
대형 인쇄기를 잡아 며칠 씩 밤낮으로 작업해야 했다.

납기일을 맞추느라 제본소에 지켜서서
며칠이고 밤을 꼬박 지새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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