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첫 번째 주문

 

 

실천문학사 송기원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 좀 내어 저녁을 같이 하잔다.

송기원은 한국 문단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의 마지막 세대이자
합병된 중앙대 문창과의 선두 세대다.


▲ 작가 송기원


그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문인들을 이끌고 실무일을 도맡아서
가장 치열하게 활동해 온 시인이요 소설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각각 단편 소설과 시로
한국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치열했던 자신의 삶만큼이나 예리한 통찰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 주는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나는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고 있을 적부터
그와 가까이 사귀어 왔다.

때로는 서대문 구치소에 함께 구속된 처지에서
서로 통방을 하며 각별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종로 1 가 허름한 목로집에서 만났다.
손님들이 앉을 틈도 마땅찮게 비좁은 집이다.

"야! 니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겪을 수 있냐?...
재야에서 니 경제적 지원 안 받은 단체가 없을꺼고...
니 신세 안 져 본 사람도 그리 없을텐데...
그런 천하의 아무개가 어떻게 사무실도 없이...
전화통만 달랑 갖고 나가 인쇄소 골목에서
나까마(행상)하게 되었냔 말야 임마!!!"

눈깔사탕처럼 땡그란 얼굴에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송기원은 동그랑땡 안주 국물에 소주를 들이키면서
황소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선 사무실이라도 마련해야 되겠지?...
급한대로 우리 실천문학사에 들러
한 2,3 백 만 원 가져 가 임마...
니가 할 일거리도 챙겨 둘테니까 가져 가고...
일거리 떨어지면 미리미리 얘기해.
출판사에서도 어차피 들어가야 할 비용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감옥 사는 동안에 우리 출판사 책 좀 팔렸어.
그러니 니가 했던 것만큼은 다 못 하더라도
네 사무실 제목마따나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눠 먹자 임마!..."

다음날...
나는 실천문학사로 송기원을 찾아 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는 경리부를 통해서 내게 2 백 만 원을 내 주었다.

그리고 원고 정리가 아직 덜 되었다면서
이미 출판되어 있는 소설책 한 권을 내밀고
전산 조판부터 인쇄 제작까지 새로 만들어
3,000 부를 납품해 달라는 거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느냐고
새 원고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송기원은 앞으로 어차피
활판 인쇄용으로 조판된 책들을 재인쇄 할 때는
옵셋 인쇄용 전산 조판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니까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일거리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들러서 가져 가라고 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로 의뢰 받은 주문이었다.

각별한 배려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사업이랍시고 뛰어 들어서
처음으로 결재 받은 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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