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월간 <말> 합본호

 

 

내가 '나눔기획'을 차린 소식이
주변에 점점 알려 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아내가 위암에 걸려 죽어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병 구완도 제대로 못 한 채
돈을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행여나 내 마음이 다치거나 상처 받을새라
각별한 조심과 배려를 더 해 주었다.

그 당시 월간 <말> 지 사장으로 있던
김태홍 선배에게서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김태홍(1942 ~ 2011) 전 국회의원


김태홍 선배는 한국일보와 합동통신에서
외신부 기자로 있던 언론인 출신이고 
나중에는 광주 북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80 년 계엄 치하에서
기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라 할 수 있는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아
언론 검열 철폐 및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벌인 죄로 계엄 당국에 의해 구속 수감되고
신문사에서도 해직되었다.

"최 형을 이 고생하도록 놔 둔다는 것은 우리 주변 모두의 수치예요.
부끄러움이고 후안무치한 일이지...
요즘 <말> 지 사정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 이후로
<말> 지는 오히려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소.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그런데 마침 <말> 지 창간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간행된 것을
보도지침 폭로 기사 내용까지 수록해서 합본호로 만들기로 했는데
기왕이면 당신이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겠고...
비용은 한 천 여 만 원 들텐데 필요한대로 먼저 가져다 쓰시고..."

<말> 지는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월간 <씨알의 소리>가 1980 년 7 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의해 폐간된 이후로

이 땅의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1950 년대부터 60 년대 말까지는
장준하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발행한 <사상계>가 있고
박 정권에 의해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

그 뒤를 이어 1970 년부터 80 년까지
함석헌 선생을 발행인으로 한 <씨알의 소리>가 있다.

<씨알의 소리> 역시 전두환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후
무려 5 년 여의 공백기를 지난 1985 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지가 있어
우리 나라 월간 잡지 역사의 전통과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75 년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과
1980 년 계엄 하에서 역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기자들은
1984 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설립했다.

그동안 거리로 내쫓긴 해직 기자들은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글과 각종 성명서를 통해, 때로는 거리 시위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구속되고 옥고를 치루면서까지
자유 언론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 왔다.

하지만 정작 언론 매체를 스스로 만들어서
실천적 활동을 벌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85 년 5 월 월간 <말> 지를 창간하게 되고
이를 모태로 해서 1988 년에는 급기야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기까지 이르르게 되는 것이다.

김태홍 사장은 내게 각별히 부탁한다.

"월간 <말> 지 합본호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제작해 줄 사람이
아마도 최 형 말고는 없을 것 같소... 

최형 입장에서야 어디 이 정도를 가지고 두려워서 못 할 분은 아니잖소...
그러니 가급적 조심해서 꼭 해 내 주기를 바랄 뿐이요..."

그 때 상황으로는 실로 엄청난 주문이었다.
인쇄량은 물론이거니와 양장 특수 제본을 비밀리에 해 낸다는 게
여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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