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문익환 목사님의 방문

 

 

1988 년 8 월 하순 경 어느날 아침 시간에
문익환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문 목사님은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신지 한 달 남짓되었다.


어쩐 일이시냐고 여쭈니까
세민약국에 들러 우리집 위치를 알아 보고
집 근처에 와 계신데 집을 못 찾겠다는 거다.

문익환 목사님은 1975 년 나와 혜숙이 학생 운동을 할 적부터
각별한 인연으로 허물없을만큼 가까이 모시고 지내 왔다.


내가 감옥에 있을 적에도 약속 시간에 간격이 생길 때

두 어 차례 세민약국에 들러서 허물없이 쉬다 가곤 하셨단다.

특별히 내가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 일을 맡고 있을 적에는
문 목사님이 사모님을 통해 옥중에서 보내 주신 통일을 염원하는 시
"꿈을 비는 마음"을 우여곡절 끝에 곧바로 <씨알의 소리> 에 실릴 수 있어

목사님께서 명실공히 시인의 반열에 자리매김 하게 됨은 물론
이 후 목사님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85년 8월 함석헌 선생님께서 퀘이커 세계협회 종교대회 참석 차

멕시코와 미국, 카나다를 방문하시던 중에 함 선생님과 친분이 아주 두터운 목사님 한 분이

북한을 방문하고 함 선생님의 친종손을 만났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가

할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연이 적힌 편지와 가족 사진을 함 선생님께 전달한 적이 있다.

함 선생님으로서는 근 45 년 여 만에
가족의 생사여부와 근황을 접하게 된 일이었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 목사님은 함 선생님 같은 분이 당당하고도 공개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다시 떳떳하게 한국으로 돌아 와야 비로소 총칼로 가로막힌 남북한 사이의 담을 헐어서
화해하게 하고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함께 북한을 방문하자고 막무가내로 권면했단다.

강권을 뿌리치고 그 해 연말 미국에서 돌아 온 함 선생님은
비밀하게 나를 불러 친손자의 편지와 북한에 있는 가족 사진을 보여 주시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저간의 일들을 내게 말씀해 주셨다.

얼마 후 내게 비밀히 이런 사연을 전해 들은 문 목사님은 무릎을 탁 치시면서

함 선생님을 영원히 살리고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다시면서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 흥분해 마지 않으셨다.

그 후 문 목사님과 나는 함 선생님의 당당하고도 공개적인 방북에 대해
비밀스럽게 의견을 나누어 왔다.

하지만 이 일은 성사를 이루지 못한 채
함 선생님은 병고를 겪고 1989년 2월 4일 끝내 운명하셨다.


▲ 함석헌 선생님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 ~ 1989년 2월 4일)

함 선생님이 운명하시던 날 문 목사님은 나를 붙들고
이제 우리 민족의 큰 어른이시자 스승이 통일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셨으니
누가 그런 소임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면서 하염없이 울먹이셨다.

나는 오히려 문 목사님을 위로하면서
이제 그런 역할을 감싸 안고 감당하셔야 할 분은 문 목사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보름만인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은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두차례 회담하여 통일 3단계 방안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셨다.


▲ 방북 중 문익환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


결국 문 목사님은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고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한편
한국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투옥되셨고
1990년 10월 2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후 공안정국을 조성한 정부에 의해
1991년 6월 6일 재수감되고 이후 1993년 초 석방되신다.


다시 말머리로 돌아가

1986년 5월 20일 문익환 목사님은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셨다.

석방되시는 날 나는 당연히 교도소로 마중을 나갔어야 마땅한 일이거늘
석방 후 여러 날이 지나도록 먼저 찾아 뵙지를 못하고 뜻밖에도 목사님께서 오히려 먼저

안부를 여쭈면서 우리집 근처에 오셔서 서성이고 계시다니 몸둘바없고 말이 아닌 꼴이 되었다.

목사님 계신 곳으로 달려 나가 보니
한창 건축 중인 우리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집을 헐어서 다시 짓는 중이라고 설명드리고
임시로 거처하는 집으로 모시고 왔다.

박혜숙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지나다가
이렇게 불쑥 찾아 오게 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혜숙의 몸 상태와 그간의 과정을 말씀드렸다.
문 목사님 주재로 예배를 드렸다.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보니
문 목사님은 우리 어머니와 동갑내기시다.

두 분이 고향 얘기며 집안 얘기를 나누신다.
문 목사님은 북간도 용정이 고향인데
사모님이신 박용길 장로님이 함경도이시다.

어머니 고향이 함경도 함흥이시고 어린 시절을 블라디보스톡에서 보내셨다.
함경도에서는 가장 역사가 깊고 제일 큰 초대 교회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외할아버님은 명예롭고 편안한 직임을 마다하시고 선교사를 자청해
우리 나라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소련 땅 불라디보스토크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다.

어머니가 한 때 성장했던 불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나라의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활동했던 곳이다.

거기에서 어머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셨다.
큰오라버니는 고등보통학교에 다닐 적부터 독립 운동에 심취해서 활동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함흥으로 돌아와 함경도에서 제일 역사가 깊고
외할아버님이 담임하시던 함흥 중앙교회 소속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다.
그리고 함남도립간호전문학교를 나오셨다.

졸업 후 원산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던 어머니는
1940 년 결혼하면서 아버님 근무지를 따라 북간도로 가셨고
그곳에서 3 년 여 사시다가 1943 년 서울로 나오셨다.

문익환 목사님의 선친께서도 목사님이시다.
선친이신 문재린 목사님은 북간도와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셨다.

제씨 되는 문동환 박사도 목사님이시다.
문동환 박사님은 일찌기 내가 대학에 다닐 적부터 우리를 지도해 주셨다.

문 목사님과 나의 어머니는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신다.
내가 잘 모르는 그 당시 상황과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되짚기도 하신다.

그러더니 서로 생일을 물으신다.
어머니는 1918 년 5 월 1 일 생이시다.
문 목사님은 한 달 늦은 6 월 생이시다.

동갑내기란게 그리도 반갑고 할 얘기가 많으신건지...
하긴 파란만장했던 민족사의 지나온 발자취를

동시대를 살아 왔던 분들이 만나서 되돌아 볼 때
한도 없고 끝도 없겠지 싶기도 하다.

문 목사님은 정말로 오랜만에
낯선 동갑내기 여인을 만나는 느낌이
이제까지 생사도 모르고 소식도 알 수 없던
그 옛날 옛적 소꿉 동무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다.

어머니도 그러셨을까......
문 목사님이 자리를 일어 서시자
어머니는 나와 함께 문밖 골목 저편까지 나가
목사님을 배웅하고 차제에 공사 중인 집을
한바퀴 둘러 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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