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

012/12/25 08:00 김삼웅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 독립행진곡

함석헌은 자신의 표현대로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다가”가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이다.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주석 1)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왕 쇼화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청사 2층에서 이른바 ‘항복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선언이지만, 정작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조서’는 8백 15자(字)로 되어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어쨌던 일제는 항복하고 한민족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 36년’하면, 그렇게밖에 아니됐던가 의심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했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악착한 이리가 이 양(羊)을 놓고 물러갈 줄은 저희도 생각 않았거니와 우리도 감히 생각 못하였다.
그 이빨은 간 잎갈피에까지 들어갔고 그 발톱은 우리 등뼈 마디 짬에까지 박혔었다.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는 그 물러날 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정치권이 그들 손에 있고, 경제정책이 그들 자기네 본위요, 토지가 대부분 그들 소유가 됐고, 교육방침이 철저한 일본 국민이나 혹은 그들의 영구한 종 기름에 있었고, 마지막에는 풍속을 고치고, 성을 갈고 말을 없애고, 글을 말살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세계사조 조차 혼란에 빠져, 민족 사이의 동정의 생각도 얻어볼 수 없고 국제간의 정의감도 찾아볼 수 없어져 세계 모퉁이에서 대낮에 인간의 대량학살을 공공연히 하게 됐으니, 아무도 그 종살이에 끝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志士)라던 사람들도 다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교육자는 학생보고 일본인돼야 한다고 아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도들보고 일본섬기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짐짓 짓는 죄로 인도하고 있었다.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식한 못난 민중이었다.
(주석 2)

함석헌은 8ㆍ15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했다. (주석 3)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중경과 미주 그리고 국내에서 단파방송을 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총독부의 정보ㆍ언론의 통제로 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두 손에 수갑이 채워 일경에 끌려 갈 때에 아는 채도 않던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불러냈다. 용천과 용암포에서 열린 해방축하회에 불려나가 만세를 부르고 시기행진도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방은 ‘도둑맞고’ 있었다.

“해방 후 분한 일, 보기 싫은 꼴이 하나 둘만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참 분한 일은 이 해방을 도둑해가려는 놈들이 많은 것이다.” (주석 4)

곳곳에서 정치 모리배들이 해방을 마치 자기네들이 쟁취한 것인양 민중을 속이고 공을 가로채고 있었다.

함석헌은 지극히 비사교적 인물이다. 비정치적이고 감투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감투’를 쓰게 되었다. 본의와는 상관없이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자리에 앉혀졌다. 평북 자치위원회위원장에는 독립운동가 이유필이 추대되었다. 함석헌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것이 정치꾼들의 눈에도 이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에게 그를 앞세워 써먹자는 심산이었다.

“새 역사의 어떤 매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4쪽.
2>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57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358쪽.
4> 앞과 같음.
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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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4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인생대학’ 3차년의 옥살이는 만 1년으로 1943년 봄에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불렀다.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처럼, 함석헌은 거듭되는 세 차례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생각은 한량없이 깊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다. <무량수경>을 비롯하여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금강경> 등을 읽으면서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 22) 그만큼 종교와 사상의 폭이 넓어졌다.

출감하고 얼마 뒤 가슴 아픈 비보를 들어야 했다. 혈맹의 동지, 신앙의 동지 김교신의 부음이었다. 1945년 해방을 얼마 앞둔 4월 25일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와규>의 필자,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일경은 그를 악질 불온분자로 낙인하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돌연한 사망은 장티푸스였으나 극심한 옥고로 육신이 쇠약해지면서 발생한 병이었다. 김교신의 때 이른 죽음은 함석헌에게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아픔이었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중국 명말 청초의 개혁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좋은 벗이고 훌륭한 스승의 관계였다.

함석헌이 월남하여 1947년 7월 20일에 지은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는 김교신을 그리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깨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주석 23)

함석헌은 김교신을 기리면서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도 지었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을 비쳐 눈의 얼굴 보는 듯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느냐 북악산만 높았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주석 24)

함석헌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가 내던 <성서조선>도 폐간되어 어디에 글 한 줄도 쓸 수 없는 암담한 처지에서,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없이 참고서도 없이 읽었으니, 읽었던들 변변히 읽었다 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속이 트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주석 25)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고 있다는 징조이다. 일제는 1943년 11월부터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고,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꽃다운 조선의 소녀와 처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어갔다. 막장이었다. 함석헌은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면서 먼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
22>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전집> 4, 196쪽.
23>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133~134쪽, 일우사, 1961.
24> 앞의 책, 132~133쪽.
25> <전집> 4,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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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3 08:00 김삼웅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성서조선>팀을 덮쳤다.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개인의 종교잡지, 신앙전문지까지 덮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함석헌은 1940년 11월 서울로 올라와 김교신의 집에서 <성서조선> 창간 14주년 기념 감사집회를 갖고, 1941년 3월에는 장남 국용의 결혼식을 치렀다. 김교신이 주례를 서주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서도 <성서조선>에는 꾸준히 글을 썼다. 일제는 함석헌과 동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덮쳤다.

일제는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를 트집잡았다.
<조와>는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면서, 혹한 속에서도 봄이 오면 부활하는 개구리를 통해 민족독립 정신을 담은 짧은 글이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봄비 쏟아지든 날 새벽 이 바위 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랜만에 친구 외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었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주석 18)

김교신은 이 책에 <조와>외에 <강성지도(强盛之道)>, <부활의 춘(春)> 등 일제의 탄압과 침략전쟁, 결국 그들이 패망하고 민족 부활의 새봄이 올 것을 상징하는 단문을 실었다. <성서조선>은 당시 규정에 따라 모든 언론ㆍ출판물처럼 총독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간행하였다. 검열에서 통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뒤늦게 발매금지는 물론 샅샅이 뒤져 10년도 더 지난 창간호부터 전량을 회수하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12명의 필자 그리고 200여 명의 독자 중에 상당수를 구속하였다. 함석헌의 글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도 필화의 한 원인이었다.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에게 유일의 매체이었던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발행인 김교신과 주요 필자 함석헌 등은 ‘일망타진’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세번째 투옥이다. 수사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일본인 검사와는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검사 :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 그렇다.
검사 :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 잘 들어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검사 : 에이, 그런 협잡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
(주석 19)

검사의 신문은 함정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데 일왕(천황)도 멸망한다는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처벌하려는 흉계였다. 함석헌은 이를 꿰뚫고 ‘성경의 탄력’을 이유로 빠져나왔다.

함석헌이 수형번호 1588번을 달고 미결수로 1년 동안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운형이 부일을 거부하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시인 김광섭도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는 등 많은 항일 인사들이 수감돼 있었다. 1942년 1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33명은 대부분 함흥감옥 등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은 여러 차례 형사와 검사의 수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였다. 결코 그들의 동정을 살 요량으로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형사와 턱 마주 앉으면 인정도 도리도 다 없고 저와 나와는 이해가 서로 상반되는 양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비위를 맞추어서 일을 쉽게 만들어보려는 따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비위를 거슬러야 매를 맞는 것 밖에 없는데, 사람이 매를 맞아서는 여간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내 지킬 것인 담에는 터럭만한 것이라도 지켜야지 일단 그것을 내놓으면 그 담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고집이란 말을 들어도, 경위로 따짐을 당해도 잡아뗄 것은 딱 잡아떼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저보다 위에 서야 한다. 맘의 가라앉음으로, 심리를 더듬음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리로 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 봐야 한다. 형사에겐 동정이란 털끝만큼도 없는 법이다. 저는 나를 먹으려다 못 먹으면 그저 아까운 것을 놓쳤다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죄로 만들지 못하면 손해가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이해싸움이다. 그러므로 절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주석 20)

함석헌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면서 시 한 편을 지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꿈 속에 다녀간 길 꿈 같이 다시 왔네
깼던 꿈 잇는건가 깼다던 것 꿈인가
모두 다 꿈속엣 일을 맘 상할 것 없고나

강남밥 한 웅큼이 삭아서 피어나니
스물네 마리 끝에 가지가지 생명의 꽃
거룩한 창조의 힘을 몸에 진고 있노라

쉬인 해 가르치자 다시금 채치시니
내 둔도 둔이언맘 아빠 맘 지극도 해
날 아껴 하시는 마음 못내 눈물 겨워서
짓밟는 형틀 밑에 흘린 피 술로 빚고
풀무교에 타고난 밤 금잔으로 쳐 나오니
아버지, 눈물 섞어서 이 잔들어 주소서

바람아 네가 불면 언제나 불 것이냐
울부는 가지 끝에 네 만가(輓歌)높았더라
겨울이 왔다면이야 봄을 멀다 할 거냐
삭풍아 불어 불어 마음껏 들부숴라
떨어진 내 잎새로 네 무덤 쌓아놓고
봄 오면 우는 꽃으로 그 무덤을 꾸미마.
(주석 21)


주석
18> 김교신 <조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19> 이치석, 앞의 책, 292~293쪽.
20>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5쪽.
21>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 168쪽, 나남출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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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2 08:00 김삼웅

 

 

1931년 2월 오산학교에서는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석헌의 교실에 장학관이 불쑥 들어와 일본어로 강의하는가를 감시했다.

다시 고난의 현장으로 돌아오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창씨개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오산을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심정에서입니다. 감히 일본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는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빤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와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 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론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은 제자들에게 일본말로 일본식 교육을 시킬 수 없어서, 그리고 조선인의 혼, 성씨와 이름까지 고치라는 창씨개명에는 견딜 수 없어서 교사직을 내던졌다. 예나 지금이나 불의에 저항하여 직장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신념도 신념이지만 ‘권속’의 생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함석헌에게는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다. 1919년 장남 국용이 태어나고, 1921년 8월 장녀 은수 출생, 1926년 4월 2녀 은삼 출생, 1929년 8월 3녀 은자 출생, 1931년 9월 2남 우용 출생, 1933년 4녀 은화 출생으로 2남 4녀가 있었다. 퇴직 이후인 1939년 1월에 5녀 은선이 태어났다.

이런 대가족을 거느린 함석헌은 교직을 떠나서 평양 송산리에 있는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거처를 옮겼다. 퇴직 2년여가 지난 1940년 3월의 일이다. 이 학원은 조만식의 뜻을 이어받은 김두혁이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본받아 사람을 길러보자고 세운 농사학원(農事學院)이었다. 이것을 함석헌이 인수한 것이다. 그동안 월급에서 모아 둔 돈을 털어서 인수했다.

20여 명에 불과한 학생들과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땅을 파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아직까지 농사일과는 거리가 있는 먹물에게 농삿일은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심은 참외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8월에 때 아닌 서리가 내렸다. ‘서리’의 정체는 일본 경찰이었다.

설립자인 김두혁이 일본에서 동경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의 모임인 계우회(鷄友會)를 조직하여 활동중에 그가 구속되고,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9월 평양 대동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 세 번째 투옥이다. 이와 관련 평양 숭인상업학교 학생들이 ‘장학축상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그중 한 명이 일본에서 함석헌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경찰의 가택수색으로 적발되어 학생 6명이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옥고보다도 작은 실수로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 두고두고 자책하였다. 평소 주의를 해서 편지를 불태웠는데 한 통이 쓰레기통에서 적발되면서 이들은 2년 반씩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듬해 초여름에 출감할 때까지 1년여를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옥살이를 하였다. 농사학원은 폐농이 되고, 옥고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불온분자’로 찍힌 함석헌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허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큰 불효에 속한다. 아들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 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상주 노릇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함석헌은 하릴없는 농사꾼이 되었다. 서툰 농사일이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땅이 2만 평 정도가 되었다. 7명의 자식들까지 식구가 열 명이 넘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땅을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고심 끝에 결국 상속하여 농사일을 맡았다. 이것이 뒷날 화근이 되었다.

함석헌은 세 번째 옥고를 치루면서 ‘과외’의 소득을 얻었다. 같은 구치소에 있던 한 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일본인 사이고 다까모리(西卿隆盛)의 시였다. 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였으나 그럴 듯한 싯구를 남겼다.

그때에 지낸 가지가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당장 기억에 새롭게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방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어떤 늙은이에게서 들은 일본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기나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옥 속에 쓰고 신 맛 겪으니 뜻은 비로소 굳어진다.
사내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처럼 옹글기 바라겠나
우리 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손 위해 좋은 논밭 사줄 줄 모른다고 하여라.

獄中辛酸志始堅
丈夫玉碎 愧甑全
我家遺法人知否
不用子孫買美田
(주석 16)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호주가 됐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땅이 2만 평 정도 있었는데 상속을 할 것이냐 생각을 하다가, 이상으로 하면 상속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깝다는 생각에서도 아닌데, 종시 단행을 못하고 그냥 풍속대로 따라 상속을 했다가 4년 후 공산당이 와서 지주 숙청하는 것을 당하면서야 “그때에 차라리 단행했더라면”하고 뉘우쳤습니다. (주석 17)

함석헌의 농삿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국은 점차 어려워지고,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극악해졌다.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시행되고, 1937년 6월에는 민족주의계열 인사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수양등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흥사단 계열의 실력 양성 단체이던 수양동우회를 수사하면서 무관한 기독교계 인사들까지 구속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에 끌어갔다.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3차) 하여 ‘국체명징’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서사’의 암송을 의무화했다.

1938년 4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폐지,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창립, 1939년 10월 국민 징용령 실시, 1940년 2월 창씨개명 실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 도발, 1943년 3월 징병제 공포, 10월 학병제 실시 등 일제의 폭압통치는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이땅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맞이로 내몰았다.

따라서 반일ㆍ항일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그만큼 심해졌다. 1년 만에 석방된 함석헌은 서투른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농삿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0년 8월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한 것이다.


주석
1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0쪽.
16>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24쪽.
17> 앞의 책, 272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1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함석헌이 오산고보에서 ‘선생질’(자신의 표현)을 하고 있던 1930년 5월 9일 남강 이승훈이 눈을 감았다.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3년여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 3ㆍ1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대표로 참가했다가 다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2년 가출옥하여 오산고보로 돌아와서 이 학교의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훈은 함석헌이 일본 유학 중일 때인 1924년 김성수의 간청으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때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고, 다시 오산고보로 돌아와 학교운영에 힘을 쏟다가 66세를 일기로 삶을 접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자기의 유골을 해부하여 생리학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학교 동산에 안장되었다.

함석헌에게 남강은 생애의 큰 스승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여러 날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상념을 이렇게 썼다.

여순이 지났어도 언제 몸을 찌그리는 일도 다리를 뻗고 버둥버둥하는 일도, 대낮에 낮잠을 자는 것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에게는 어려워서 자란 곳이 놋점(유기농장)이었던 것 같이 인생을 다듬어냄이었고, 젊어서 직업이 장사였던 것 같이 삶이란 개인이거나 나라거나 밑져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갈 때는 올 때보다 이를 남긴 것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성경에 있는 착하고 진실한 종, 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이었다.

할 것은 하자는데 좋고 언짢고, 높고 낮고, 네 거 내 거가 있을 리 없다. 3ㆍ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하자고 부서를 다 짜놓은 민족대표들! 이 선언서에 뉘 이름부터 먼저 쓰느냐가 문제가 되어 옥신각신하는데 어디 나갔다 들어오다가 비로소 그것을 알고 “그거 무슨 문제될 것 있느냐, 순서가 무슨 순서냐? 죽는 순서야! 어서 손병희부터 먼저 써라”해서 막혔던 일이 동이 터지듯이 일사천리로 됐다는 것은 세상이 잘 아는 이야기 아닌가?
(주석 12)

함석헌은 이같은 스승을 오산동산에 묻고 한동안 슬픔에 잠겼다.
강토는 아직 캄캄한 미명인데 나라 걱정하던 스승이 떠나고, 그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함석헌은 1930년 학교 교정에 세운 동상 앞으로 신입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으로 ‘남강정신’을 강의하였다. 당시 전교생이 500명 정도여서 교사와 학생들은 가족처럼 유대가 이루어졌다. 교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 건물이었다.

1930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간회가 해체되고, ‘민중대회사건’으로 40여 명의 핵심간부가 체포되었다.
그는 언제까지 평범한 교사생활로 안주하지 못하였다. 함석헌은 일경의 감시 뿐 아니라 교무처 직원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보고했다. “하나님의 발길”은 그를 고난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1930년 여름방학에 서울에 사는 김교신과 정릉 그의 집에서 2주일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하고 새학기를 위해 오산으로 내려간 날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에 붙잡혀 갔다. 불문곡직, 무슨 혐의인지 밝히지도 않고 정주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언론에서는 ML당(마르크스ㆍ레닌당) 간부를 체포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ML쪽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함석헌은 일주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한 주일에 유치장이 어떤 것임을 비로소 그 풍속화 맛을 알아서 이것이 훗날에 퍽 도움이 되었다.” (주석 13)고 말했다.

두번째 투옥까지는 일종의 ‘맛 뵈기’ 수준이였다면, 세번째는 좀 더 강했다.
세번째 투옥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사직하였다. 이유는 창씨개명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억누름에 더 이상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른 결단이었다. 그는 감시자들의 압박에도 수업시간에 우리 말로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가치있는 책들을 읽으라고 추천하면 학생들은 정주로 나가 사왔다. 1930년 7월에는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어 성경 연구와 함께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행동은 ‘불온’의 대상이 되고, 압박이 심하여 차라리 그만 두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를 폐지하고, 조회 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낭독케 했다. 그리고 친일인사들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국 강연회를 통해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옹호했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동창이며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서춘도 이 대열에 끼었다. 함석헌은 더 이상 ‘교사질’을 버티기 어려웠다.

오산시절의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함 도깨비’로 통했다.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해서였다. 어느 해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평소 친일 성향으로 밉보였던 교사들을 두들겨 주기로 했다. 그런데 사전에 정보가 새나간 것인지, 막상 대상 교사들은 피신하고 엉뚱하게 존경하는 함석헌이 구타를 당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학생들이 폭행하려 하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라는 것, 나중에 학생들이 반성하면서 그 이유를 묻자 “나도 사람인데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작가ㆍ언론인 선우휘는 <사상계>에 쓰기도 했다.

그 이전 이미 나는 학생시절에 함옹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듣고 있었다.
오산고보에 다니는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화제에서 곧잘 ‘도깨비’라는 닉네임을 가진 교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함옹이다.

처음이나 “도깨비가 개천물 마시듯 한다”는 속언이 생각시켜 “술을 잘 마시는 선생이냐”고 물었더니 “노오”, “그럼 성품이 고약하냐” 그것도 “노오”, “우악스럽게 생겼느냐”, 그것도 “노오”, 내가 곤혹을 느끼자 연민과 그제야 자기들만이 안다는 자랑이 뒤섞인 얼굴도 “무엇이고 못하는 것이 없어서 도깨비란다”고 알려주었다. 이어서 그들은 “오산고보를 나오고 동경일고와 동경고사의 입시를 보았는데 두군데 다 합격되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은사 이승훈 옹의 육영사업을 도울 생각에서 동경고사를 다닌 것이라 하여 너무 성적이 좋아 그것을 시기한 일인 학생에게 칼로 찔린 일이 있다”느니 “회화ㆍ작시ㆍ작곡 못하는 것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늘 조선옷(한복)만 입고 다닌다고 했다. 개중에는 “일본말 교과서를 내놓고 조선식 한문자음을 옥편으로 찾아내라는 것은 질색이라”고 투덜거리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주석
12>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 4, 166~167쪽.
13>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쪽.
14> 선우휘, <주관적 함석헌론>, <사상계>, 196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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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해방을 맞아 이 책을 펴내게 된 사연도 적었다.
그가 소련군에 피체되어 북한에 억류중일 때 먼저 내려온 친구 노평구가 묵은 잡지에서 어렵게 원고를 찾아서 자기가 내는 <성서연구>에 다시 연재를 하고, 이것이 마치면서 단행본으로 내게 되었음을 밝힌다. 함석헌의 서문은 이어진다.

골방에서 무릎을 겯고 앉아 친구들에게 이야기로 한 그대로를 다듬지도 못하고 일반 세상에 내어놓은 저자의 맘은 부끄럽고 두려울 뿐 아니라 차라리 설음을 금할 수 없다. 본래 이것은 자신 홀로의 탄식이며 반성이요, 친구에게 하는 위로며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신앙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은 자 같이 다듬을 겨를도 없이 내어놓는다고 하기는 하면서도 될 수 있다면 ‘고난의 역사’를 연구해 보자고 뜻만은 먹었다. (주석 10)

함석헌은 해방 뒤의 혼란과 자신의 투옥 등으로 원고를 보완하지 못한 사정을 밝히면서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이라는 말이 일반 독자에게 걸림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떨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 글이 이 글이 된 소이는 성서적 입장인 데 있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성서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만 역사는 쓸 수 있다. 엄정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성서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희랍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적으로 보는 이 성서의 입장에서만 성립이 된다. (주석 11)

2003년 한길사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은 1962년 3월 “사슴에서 뿔을 제하는” 격의 ‘성서적 입장’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재, 대폭 보완하여 재출간하였다. 초판 출간이 그의 표현대로 ‘박옥’이었다면, 개재 증보의 신간본은 ‘금옥(金玉)’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해방 뒤 역사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저술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책과 관련해서는 뒤에 다시 쓰겠다. 그는 민족사의 어둠이 짙던 시대 민족사관과 식민사관이 부딪히던 1930년대에 ‘씨알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독특한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 책을 저술하였다.


주석
10> 앞의 책, 2쪽.
11> 앞의 책,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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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고보 시절, <성서조선>에 종교(기독교)에 관해 많은 글을 쓸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초기의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 차츰 벗어나 독자적인, 조선적인 기독교로 바뀌어 갔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의 계보’를 연구한 강돈구 교수는 그의 종교적 특징을 지적한다.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함석헌도 우치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되, 우치무라의 ‘일본적 기독교’ 대신에 ‘조선적 기독교’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조선적 기독교’는 김교신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김교신은 한반도의 강역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함석헌은 한반도의 강역보다는 오히려 역사에 착안하였다.” (주석 5)

그는 이어서 둘째 특징으로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그것보다 한층 더 진전된 것으로, 유영모로부터 받은 영향에 기인한다.” (주석 6)라고 분석했다. 함석헌은 1940년대 초 무교회주의와 멀어질 때까지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30대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함석헌은 1934년 2월부터 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 (61~83호)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였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역사 교육이 금지된 시국에 그는 소수나마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자 ‘조선역사’를 지었다. 연재에 앞서 1933년 12월 30일부터 새해 1월 5일까지 서울 오류동 송두용의 집에서 6박7일 동안 동계 성서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그는 ‘조선역사’의 초고를 발표하고, 참석자들과 토론하였다. 그의 명저가 태어나게 된 고고지성인 셈이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망명지 중국에서 나라를 빼앗겨도 “국혼과 국사만 잃지 않으면 독립이 가능하다”면서 <한국통사>(박은식)와 <조선상고사>(신채호)를 지은 것과 비교된다.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것을 보완하여 엮은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비견되는 민중사관의 독특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은 망명지가 아닌 일제의 억누름이 극박스러운 오산에서 씌여졌음에 의미가 각별하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이미 한국의 역사학계는 ‘민족주의’,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근대 사학의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다. 예컨대 신채호는 1931년부터 조선의 <상고문화사(上古文化史)>를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었고, 백남운은 1933년에 계급투쟁사론의 관점에서 <조선사회경제사>를 동경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1934년 5월에는 실증주의를 내건 이병도에 의해서 진단학회도 창립되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성서조선>에 <조선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이병도의 진단학회가 설립되기 석 달 전부터였다. 그밖에도 문일평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을, 정인보는 1936년부터 <동아일보>에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여 각각 민중중심과 유물론적 사관의 일단을 선보였다. (주석 7)   

한편 이 무렵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35권을 편찬하였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조선사 관련 각종 사서를 불태우거나 주요한 것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1923년 1월부터 총독부 정무총감이 배석하고(편찬위원장), 1925년부터는 중추원으로 이관하여 1937년까지 27년에 걸쳐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반도사>를 편찬하였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97만5천원이 투입되고,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를 총동원하였다. ‘조선사’ 35권 외에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천 623편을 별도로 펴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관학자와 조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면서 내건 ‘편찬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개발하여 그들을 훌륭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또한 민심훈육의 일단에 기하고자 함이다. 일본에서는 ‘신부(新府)’의 인민을 교육함‘을 불평과 반한의 기풍을 조작하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상례라 하고…. 이제 조선인에게 조선역사를 읽는 편의를 제공하면 그들 조선인에게 옛날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지만…. 조선에는 고대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이 적지 않다…. <한국통사> 등 후자는 근대 조선의 청일, 노일간의 세력걱정을 서술하여 조선이 등을 돌릴 길을 밝히고 있으니 이들 사서가 인심을 심히 곤호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절멸’을 가함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공명ㆍ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가 현저할 것이다. (주석 8)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야욕에서, 그리고 속국화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은 본래 북만부는 중국의 속국이고, 남반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억지를 ‘역사적 사실’로 꾸미고자 온갖 궤변과 망설을 끌어들이면서 왜곡과 날조로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반도사> 편찬 시기는 함석헌의 일본 유학과 오산고분 교사 시절과 맞닿는다. 그가 남달리 재능이 있고 탐구하고 싶었던 미술, 기독교사 등을 뒤로 하고 역사를 지망한 데는 일제의 한민족사 왜곡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온갖 억누름 속에서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하겠다. 조선총독부가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일본의 관학자들과 조선에서는 최남선ㆍ이병도ㆍ신석호 등 어용사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편찬 과정의 여러 가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이런 추론은 가능하다.

함석헌의 조선사 연재는 그때마다 일제 관헌들의 요시찰의 대상이 되고 잡지는 회원 외에 배포가 금지되었다. 그는 초년 교사 시절에 총독부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해방 뒤 1950년 4월 이 원고를 단행본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발행처는 성광문화사, 값은 750원이었다, 함석헌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밝힌다.

이 조그마한 글은 본래 20년 전 10여 인의 신앙동지 앞에서 이야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우리 거문고를 바빌론 시냇가 언덕 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 때다. 외적(外的) 압박, 내적(內的) 비탄으로 말이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쓰디 쓴 입에 붙이어 우리의 온 길, 갈 길을 이야기 해 본 것이 이 고난의 역사다.

그 후 그것을 그 동지의 1인이요, 지금은 고인이 된 김교신 군이 <성서조선>지에 연재하였다. 광고도 선전도 않은 그 잡지는 독자가 가장 많을 때에도 2백이 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나마도 압박자의 뜻에 거슬려 폐간을 당하게 되는 때에 이 역사도 그 이유의 하나였고, 책은 모두 수색되어 없애 버린 바 되었으니 이 고난의 역사는 그 바빌론 거친 들에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깐 들렀다가 들 끝에 사라지는 외로운 포수(捕囚)의 신음성 같이 아주 없어져 버린 듯하였다. (주석 9)


주석
5> 강돈구, <함석헌 종교사상의 계보>, <종교연구>, 2001년 여름호, 18쪽, 한국종교학회.
6> 앞의 책, 19쪽.
7> 이치석, 앞의 책, 303쪽.
8>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선사편수회 개요>, 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223쪽 재인용, 인물과 사상사, 2004.
9>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서문, 1쪽, 성광문화사, 1950.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8 08:00 김삼웅

 

1927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한국인학생들과 함께 졸업기념(가운데줄 중앙).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1928년 지체없이 귀국했다. 4월부터는 모교인 오산고보의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섰다. 동경고사에서 교사자격증을 땄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얼을 키워 주고 유학비를 지원해 준 모교에 지원하여 발령을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품었던 얼을 한아름 키워서 모교로 돌아온 것이다. 함석헌은 수신과 역사지리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

교사 함석헌은 한복으로 일관했다. 여름에는 흰 옷 모시 두루마기, 겨울이면 무명옷에 회색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었다. 이같은 옷차림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고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 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이 있습니다. 속알 여물려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올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석 1)

함석헌이 귀국하여 오산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될 무렵, 조선에서는 이태 전의 6.10 만세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전국의 학교에는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1927년 1월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통일전선운동 단체로 신간회가 발족하여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고, 5월에는 여성운동 통일체 근우회가 발족하였다. 1928년 1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34명이 구속되고, 5월에는 조명하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 구미노미야 기니히코 육군대장을 독검으로 공격했다가 현장에서 피체되어 10월에 처형되었다. 6월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사형ㆍ무기형을 추가하는 등 독립운동가를 더욱 심하게 탄압하였다. 7월에는 제1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70여 명이 피체되었다. 일제에 병탄되어 20여 년이 지났는 데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3ㆍ1운동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미명 아래 다소 유화책을 펴는 듯 했지만, 내실은 더욱 한민족을 옥죄고 탄압하였다.

 


935년 오산학교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병탄 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의 핵심이었던 ‘동화(同化)=일본화(日本化)=충량화(忠良化)’ 정책을 기독교학교에도 강요ㆍ관철시키려”  (주석 2)했다. 기독교학교 뿐만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식민정책이었다. 일제는 한국 민족을 일본적 가치관을 주입시켜 일본화하기 위해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제시하고, 인종적인 면에서 동일 근원성의 이론을 날조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키 위해 더욱 심하게 동화정책을 폈다.

병합 이래 소위 동화정책은 대체로 일본의 조선통치 근본방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내(寺內), 장곡천(長谷川) 양 총독의 시정을 보면 끄덕여지는 바가 있다. 원(原) 수상은 동화라는 말을 피하여 전에는 내지연장(內地延長)이라 하고, 후에는 일선융화를 주장하고 있다. 동공이곡(同工異曲)의 어휘지만 그간 통치 방침의 점차적 추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3)

일제의 동화정책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반발하면 가혹한 형벌로 처벌하고, 친일 조선인을 앞세워 민중을 억압하고 ‘교화’시켰다. 총독부는 1928년부터 1936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의 초등교육의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공립보통학교 일면일교(一面一校)계획’으로, 매년 130여 교씩 1,074교를 설립하였다. 어디까지나 조선의 아동들을 일본적 가치관으로 키우려는 ‘일선동화책’의 일환이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이라는 오산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동화정책은 특히 심했다. 함석헌의 힘든 교사생활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초년 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동경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년 봄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할 만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못되어 나는 역사 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석 4)

역사 교사 함석헌의 고민은 깊어갔다. 망국의 교사로서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처지였고, 외적으로는 날이 갈수록 억누름이 심해졌다. 김교신을 도와 <성서조선>을 계속 내고, 여기에 매달 빠지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보였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오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운동을 철저하게 지켰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정례를 없애고, 교회의 성직을 두지 않는, 그래서 특정한 교직자가 없는 신앙생활이었다. 이 때문에 전통적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함석헌은 <성서조선> 창간호에 <먼저 그 의를 구하라>를 쓴 것을 시발로 동경고사 시절 <주여 믿어지이다>(2호), <선지자>(3,4호)에 이어 귀국하여, <살아계신 하나님>(4호), <신앙은 힘이다>, <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나>,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우연과 연기>,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 <대담>, <고통의 가치>, <의와 악>,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나>, <성삼문과 스테반>, <큰 식물>, <부활>,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산 신앙>, <20세기의 출애굽기>,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그리스도 모방/토마스 아 켐피스 번역>, <의인은 멸절하는가>, <신 우주 시편 19장 연구>, <창구세주>, <예수 출현의 우주사적 의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버리시었나>, <러시아에 감사함>, <아모시스 연구>, <고난의 의미 - 시편 44장 연구>, <인생의 두 길-시편 1장 연구>, <순교의 정신>, <무교회신앙과 조선>, <무교회>, <서풍의 노래>, <강재선 선생의 일생>, <매소랜 도의 발시>, <세상을 이기는 용기>, <전도사를 기다림>, <바디매오와 삭개오>,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 <결혼의 의미>, <요엘서 강의> 등을 기고하였다. 오산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0년 동안에 이밖에도 많은 글을 썼다.


주석
1> 함석헌,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전집> 4, 241쪽.
2> 김승태, <식민권력과 종교>, 4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3> 지바 사타루(千葉了), <조선의 현재 및 장래>, <조선통치문제논문> 제1집, 38쪽, 경성, 1929.
4>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1>, <전집> 4,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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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범 4학년이 되었다. 이 해는 졸업반의 의미보다 그의 생애에 비중 있는 가닥이 되는 동인지 <성서조선>의 창간에 참여한 일이다.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신앙적, 민족적 뜻을 함께 한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ㆍ정상훈ㆍ송두용ㆍ양인성ㆍ유성동은 1927년 7월 도쿄에서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창간호는 국판 44쪽으로 김교신의 창간사에 이어 6인의 무교회 신앙의 고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실었다. 창간사에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국경이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쓰라린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자고 주장하고, 기성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며,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자고 강조하였다.

창간호는 뒷 부분에 동인들이 1편씩 단상을 실었다. 함석헌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글을 발표했다. 생애의 첫 활자화 된 글이다. 처녀작인 셈이다. 꽤 긴 글이다. 마태복음 6:31-33을 인용한다.

“그런 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외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을 너희 천부(天父)가 너희 쓸 것인 줄 아시나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은 적도 일본에서 잡지를 내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야수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서를 인용하면서, 알아듣는 사람들은 깨우치게 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함석헌의 대 사회 발언의 첫 마디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제목이었음은, 27세 청년 함석헌의 의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고난에 찬 생애의 방향성을 예시한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함석헌은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한다.

근역(槿域-무궁화가 많이 피는 땅, 즉 한국)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 해도 이는 우원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파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줄을 놓으라는 것 같아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 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장막이 우리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니,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이 계셔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으시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4)

흰 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같이 희기를!
(주석 21)

<성서조선>은 동인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 단독의 이름으로 편집, 발행되어 그의 개인잡지 성격의 신앙월간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고, 함석헌도 계속하여 기고하였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 통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하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다시 쓸 것이다. 


주석
21> <성서초선>, 1927년 7월(창간호).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비즘을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걷고,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어 길고 긴 옥고를 치루었다. 이들에 비해 함석헌은 지극히 온건한 지점에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 즉 일본 사회에 신사조의 물결이 넘실대고, 재일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조국해방 투쟁의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희생을 감수할 때, 그는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우찌무라의 무교회 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성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주려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 선생님(유영모-필자)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다니면서 우찌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연구회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생애를 두고 또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3ㆍ1운동의 체험으로 얻게 된 민족주의 정신을 이으면서도 우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나, 일본 유학 중에 지켜보아 온 아나ㆍ불 계열의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기독교사상을 통한 정신적ㆍ사상적 연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치무라를 만난 것은 오산에서 남강ㆍ도산ㆍ고당을 만난 것과 궤를 같이할만큼 생애에 두고 두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훗카이도 출신인 우치무라는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때 신문기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일왕의 칙어를 비판하여 역적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교회 안의 형식과 위선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하면서 지식 수준이 높은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다.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성경연구회에 나갔다. 여기서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사귀고, 함께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의 둥지가 된 <성서조선> 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 여섯이 의결하고 동인지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金)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석 16) 여섯사람은 함석헌ㆍ김교신 외에 유석동ㆍ송두용ㆍ정상훈ㆍ양인성이다.

함석헌이 유학중에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저물고, 황도파 세력에 의한 치안유지법 제정, 노동자와 일본공산당 탄압, ‘대역사건’이라 하여 박열과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 사형선고(무기형으로 감형), 간토 대진재 와중에서 5천 명 이상의 조선인 학살과 일본 아나키스트ㆍ사회주의(공산주의) 지도자 암살(처형)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함석헌은 학교 교육보다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고 교우들과의 토론으로 폭 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교신ㆍ송두용 등과는 평생 신앙의 동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배울수록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동서양의 명저를 통해 안목이 확대되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를 내세울만큼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다. 하나의 j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의 j는 재핀 즉 일본이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떴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 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해석의 참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이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게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주석 17)

애를 더듬어 보면 지극히 자주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자주성과 창조성은 뒷날 독재권력과 싸우게 되는, 민주주의와 씨알사상으로 영글게 되었다. 뛰어넘어 자기의 주체성과 폭넓은 신앙체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평생 자주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씨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줄기차게 싸웠다.

동경고사를 다니는 동안 많은 배움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의 요절한(31세 때 선박 전복사고) 낭만파 시인 쉘리(1792~1822)다. 그의〈서풍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높이 산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서풍의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몇 사람 아니되는 세 시대의 정신적 영웅의 한 사람이다. 도덕의 테두리에서 견주어 볼 때 그에게 비난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가 가진, 세 시대에 대해 날카롭고 억센 힘으로 나가려는 독수리 같은 정신에 비하면 아무것서도 아니다.
(주석 18)

오, 사나운 서풍아, 너 가을의 산 숨이야,
네가 볼 수 없이 올 때 그 앞에 몰리는 시든 잎새
술사에게 쫓기는 유령의 때와 같으니,(…)

예언의 나팔소리를 외치라, 오,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주석 19)

함석헌은 <서풍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를 민족 해방의 메시지로 환치하면서 쉘리를 배우고, 간디를 읽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시인 타고르, 독일의 문호 괴테를 좋아한 것도 이 시기였다.

괴테는 많은 사상적 편력을 했다고 한다. 스웨덴붉에서 신비주의, 헤델에서 능동주의, 스피노자에서 단독사상, 자연에서 범신론 등으로….

이 점이 함 선생님과 통하는가?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ㆍ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내촌(內村)에게서 성서, 타골ㆍ칼라일ㆍ카스키ㆍ노자ㆍ장자ㆍ바다받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20)


주석
15> <전집> 4, 215쪽.
16> 앞의 책, 218쪽.
17> 앞의 책, 218~219쪽.
18> 함석헌, <겨울이 만약 온다면>, <전집> 4, 111~112쪽.
19> 함석헌, <역사와 민족>, 233~238쪽, 제일출판사, 1964.
20> 안명우, <선생님께 드리는 글>, <씨알 인간 역사-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5쪽, 한길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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