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8 08:00 김삼웅

 

1927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한국인학생들과 함께 졸업기념(가운데줄 중앙).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1928년 지체없이 귀국했다. 4월부터는 모교인 오산고보의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섰다. 동경고사에서 교사자격증을 땄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얼을 키워 주고 유학비를 지원해 준 모교에 지원하여 발령을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품었던 얼을 한아름 키워서 모교로 돌아온 것이다. 함석헌은 수신과 역사지리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

교사 함석헌은 한복으로 일관했다. 여름에는 흰 옷 모시 두루마기, 겨울이면 무명옷에 회색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었다. 이같은 옷차림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고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 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이 있습니다. 속알 여물려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올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석 1)

함석헌이 귀국하여 오산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될 무렵, 조선에서는 이태 전의 6.10 만세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전국의 학교에는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1927년 1월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통일전선운동 단체로 신간회가 발족하여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고, 5월에는 여성운동 통일체 근우회가 발족하였다. 1928년 1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34명이 구속되고, 5월에는 조명하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 구미노미야 기니히코 육군대장을 독검으로 공격했다가 현장에서 피체되어 10월에 처형되었다. 6월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사형ㆍ무기형을 추가하는 등 독립운동가를 더욱 심하게 탄압하였다. 7월에는 제1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70여 명이 피체되었다. 일제에 병탄되어 20여 년이 지났는 데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3ㆍ1운동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미명 아래 다소 유화책을 펴는 듯 했지만, 내실은 더욱 한민족을 옥죄고 탄압하였다.

 


935년 오산학교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병탄 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의 핵심이었던 ‘동화(同化)=일본화(日本化)=충량화(忠良化)’ 정책을 기독교학교에도 강요ㆍ관철시키려”  (주석 2)했다. 기독교학교 뿐만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식민정책이었다. 일제는 한국 민족을 일본적 가치관을 주입시켜 일본화하기 위해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제시하고, 인종적인 면에서 동일 근원성의 이론을 날조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키 위해 더욱 심하게 동화정책을 폈다.

병합 이래 소위 동화정책은 대체로 일본의 조선통치 근본방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내(寺內), 장곡천(長谷川) 양 총독의 시정을 보면 끄덕여지는 바가 있다. 원(原) 수상은 동화라는 말을 피하여 전에는 내지연장(內地延長)이라 하고, 후에는 일선융화를 주장하고 있다. 동공이곡(同工異曲)의 어휘지만 그간 통치 방침의 점차적 추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3)

일제의 동화정책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반발하면 가혹한 형벌로 처벌하고, 친일 조선인을 앞세워 민중을 억압하고 ‘교화’시켰다. 총독부는 1928년부터 1936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의 초등교육의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공립보통학교 일면일교(一面一校)계획’으로, 매년 130여 교씩 1,074교를 설립하였다. 어디까지나 조선의 아동들을 일본적 가치관으로 키우려는 ‘일선동화책’의 일환이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이라는 오산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동화정책은 특히 심했다. 함석헌의 힘든 교사생활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초년 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동경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년 봄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할 만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못되어 나는 역사 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석 4)

역사 교사 함석헌의 고민은 깊어갔다. 망국의 교사로서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처지였고, 외적으로는 날이 갈수록 억누름이 심해졌다. 김교신을 도와 <성서조선>을 계속 내고, 여기에 매달 빠지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보였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오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운동을 철저하게 지켰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정례를 없애고, 교회의 성직을 두지 않는, 그래서 특정한 교직자가 없는 신앙생활이었다. 이 때문에 전통적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함석헌은 <성서조선> 창간호에 <먼저 그 의를 구하라>를 쓴 것을 시발로 동경고사 시절 <주여 믿어지이다>(2호), <선지자>(3,4호)에 이어 귀국하여, <살아계신 하나님>(4호), <신앙은 힘이다>, <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나>,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우연과 연기>,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 <대담>, <고통의 가치>, <의와 악>,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나>, <성삼문과 스테반>, <큰 식물>, <부활>,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산 신앙>, <20세기의 출애굽기>,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그리스도 모방/토마스 아 켐피스 번역>, <의인은 멸절하는가>, <신 우주 시편 19장 연구>, <창구세주>, <예수 출현의 우주사적 의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버리시었나>, <러시아에 감사함>, <아모시스 연구>, <고난의 의미 - 시편 44장 연구>, <인생의 두 길-시편 1장 연구>, <순교의 정신>, <무교회신앙과 조선>, <무교회>, <서풍의 노래>, <강재선 선생의 일생>, <매소랜 도의 발시>, <세상을 이기는 용기>, <전도사를 기다림>, <바디매오와 삭개오>,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 <결혼의 의미>, <요엘서 강의> 등을 기고하였다. 오산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0년 동안에 이밖에도 많은 글을 썼다.


주석
1> 함석헌,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전집> 4, 241쪽.
2> 김승태, <식민권력과 종교>, 4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3> 지바 사타루(千葉了), <조선의 현재 및 장래>, <조선통치문제논문> 제1집, 38쪽, 경성, 1929.
4>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1>, <전집> 4,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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