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감금된 지 꼭 50일 만인 1946년 11월 11일 출옥했다.
네 번째의 투옥이었다. 세 차례나 일제에 투옥당한 것은 식민지 백성이어서 ‘불가피’했다 치더라도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군’으로 진주했다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50일 간이나 옥살이를 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주위의 시선도 차갑게 바뀌었다.
집에 와보니 세상은 달라졌다.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수갑을 차고 형사에게 끌려가니 어느 사람 하나가 아는 체 하지 않더니 해방이 되는 날 떠메어다 놓고 저마다 존경하노라더니 또 소련 사람에게 끌려갔다 오니 마주 서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인심은 조석변을 말로만 들었더니 실제로 당하고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우리 집에서 길러낸 것들이 나를 잡아먹었다. (주석 11)
출감한 함석헌은 장녀 은수를 결혼시키고(3월 5일), 연말에 장녀가 출산하는 신의주 만포동 딸네 집에 갔다가 12월 23일 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잡혀가서야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인물이라는 거였다.
다섯번째 투옥은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서인지 한 달 만에 풀어주었다. 나와보니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주 숙청령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2만 평의 전답이 지주로 낙인되었다. 그때 일꾼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의 경우, 항일운동의 전력과 일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서 제외돼야 한다는 주장과 정말 애국자라면 지주 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 갈렸다고 한다. 결국 신의주사건 등의 ‘반동’과 함께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었다. 재산은 전부 압수되고, 함석헌은 다시 투옥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이 예비되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한 해를 지난 후 다시 붙들려가서 한 달을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내 주위의 친구들은 나를 그 이상 더 머물지 못하게 남으로 가라 권했습니다. 더구나 박승방 같은 분은 전혀 나 하나를 월남시키기 위해 박천에서 용천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1947년 2월 26일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을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들으며 그와 같이 떠나 월남길에 올랐습니다. (주석 12)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함석헌은 박승병과 함께 평양에서 잠깐 머물다 해주를 거쳐 육로로 38선을 넘는데 성공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3월 17일이었다. 어머니와는 이때 헤어진 것이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가 월남할 때는 이미 38선이 굳어져서 무단 월선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다.
생사의 선을 넘어 나는 밝아오는 새날을 맞으러 친구와 둘이 손을 잡고 섰었다. 가지고 넘어온 것은 입은 옷 한 벌 밖에 성경이 한 권과 갇혔다 나온 후 지은 노래를 몇 수 적은 노트가 있을 뿐이었다. (주석 13)
함석헌도 젊은 시절 여느 지식 청년들처럼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짧은 기간 소련 점령기 북한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당하고)는 정신적으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학생 시절에 기독 신앙을 가지나, 사회주의자가 되나 많이 망설였다. 도덕적 정신적인 데서는 문제도 아니되지만 역사적인 자리에서 볼 때 사회주의에 어떤 ‘기본적’인 것이 있음을 인정아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주의 이론에 일면의 진리가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일면이지, 그것으로 사람을 옳게 이끌어 나갈 수는 없다. 그래 분명하게 잘라 버렸다.
기독 신앙이 아니었다면 나는 험악한 공산주의는 몰라도 영국의 페비언 같은 것은 됐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 같이 현대 사람이야 넓은 의미로는 다 사회주의자지. ‘사회’란 생각을 빼고 오늘날 사람의 살림은 있을 수 없다. (주석 14)
함석헌의 경우와 같이 해방 뒤 북한에서 탈출한 월남자 수는 1945~1949년 사이에 대략 45.6~74.0만 명, 6.25 전쟁 시기의 월남자 수는 대략 55.8~64.6만 명에 이른다. 두 시기를 합치면 해방 뒤 한국전쟁 종결시점까지 월남자는 101.4~138.6만 명에 달한다. 해방 직후 1946년 말 현재의 북한 인구 926만 명을 기준으로 삼으면 1945~1949년 사이에 북한 전체 인구의 4.9~8.0%가 월남한 셈이 된다. (주석 15)
월남자 중에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이 많았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 수는 20만 명 안팎으로 북한 총인구의 2.2% 수준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월남한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극우반공의 기수가 된 기독교 목사들이 있었고, 함석헌ㆍ강원룡ㆍ장준하ㆍ리영희 등처럼 민주화의 기수도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함석헌은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 칩거하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집회를 시작했다.
날씨가 풀리면서 4월부터는 유영모의 주일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무렵부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1일 1식 주의를 실행한다. 1947년 7월 20일 함석헌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란 시를 지었다. ‘그 사람’의 대상이 김교신인지, 사선을 넘어 서울까지 인도해주고 다시 북녘으로 돌아간 박승방인지, 또는 낮선 서울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준 유영모인지, 생애의 지침이 된 남강ㆍ도산ㆍ고당인지, 아니면 이 모두인지, 함석헌의 명작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지었다. 얼마 뒤 아내와 자식 일부가 월남하였다. 어머니와 장남, 딸 3명은 내려오지 못했다.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되었다.
주석
11>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1쪽.
12> 앞의 책, 277쪽.
13> <38선 넘나들어>, 앞의 책, 53쪽.
14> 앞의 책, 46~47쪽.
15>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410쪽, 중심, 2006.
네 번째의 투옥이었다. 세 차례나 일제에 투옥당한 것은 식민지 백성이어서 ‘불가피’했다 치더라도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군’으로 진주했다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50일 간이나 옥살이를 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주위의 시선도 차갑게 바뀌었다.
집에 와보니 세상은 달라졌다.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수갑을 차고 형사에게 끌려가니 어느 사람 하나가 아는 체 하지 않더니 해방이 되는 날 떠메어다 놓고 저마다 존경하노라더니 또 소련 사람에게 끌려갔다 오니 마주 서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인심은 조석변을 말로만 들었더니 실제로 당하고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우리 집에서 길러낸 것들이 나를 잡아먹었다. (주석 11)
출감한 함석헌은 장녀 은수를 결혼시키고(3월 5일), 연말에 장녀가 출산하는 신의주 만포동 딸네 집에 갔다가 12월 23일 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잡혀가서야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인물이라는 거였다.
다섯번째 투옥은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서인지 한 달 만에 풀어주었다. 나와보니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주 숙청령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2만 평의 전답이 지주로 낙인되었다. 그때 일꾼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의 경우, 항일운동의 전력과 일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서 제외돼야 한다는 주장과 정말 애국자라면 지주 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 갈렸다고 한다. 결국 신의주사건 등의 ‘반동’과 함께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었다. 재산은 전부 압수되고, 함석헌은 다시 투옥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이 예비되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한 해를 지난 후 다시 붙들려가서 한 달을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내 주위의 친구들은 나를 그 이상 더 머물지 못하게 남으로 가라 권했습니다. 더구나 박승방 같은 분은 전혀 나 하나를 월남시키기 위해 박천에서 용천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1947년 2월 26일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을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들으며 그와 같이 떠나 월남길에 올랐습니다. (주석 12)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함석헌은 박승병과 함께 평양에서 잠깐 머물다 해주를 거쳐 육로로 38선을 넘는데 성공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3월 17일이었다. 어머니와는 이때 헤어진 것이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가 월남할 때는 이미 38선이 굳어져서 무단 월선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다.
생사의 선을 넘어 나는 밝아오는 새날을 맞으러 친구와 둘이 손을 잡고 섰었다. 가지고 넘어온 것은 입은 옷 한 벌 밖에 성경이 한 권과 갇혔다 나온 후 지은 노래를 몇 수 적은 노트가 있을 뿐이었다. (주석 13)
함석헌도 젊은 시절 여느 지식 청년들처럼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짧은 기간 소련 점령기 북한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당하고)는 정신적으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학생 시절에 기독 신앙을 가지나, 사회주의자가 되나 많이 망설였다. 도덕적 정신적인 데서는 문제도 아니되지만 역사적인 자리에서 볼 때 사회주의에 어떤 ‘기본적’인 것이 있음을 인정아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주의 이론에 일면의 진리가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일면이지, 그것으로 사람을 옳게 이끌어 나갈 수는 없다. 그래 분명하게 잘라 버렸다.
기독 신앙이 아니었다면 나는 험악한 공산주의는 몰라도 영국의 페비언 같은 것은 됐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 같이 현대 사람이야 넓은 의미로는 다 사회주의자지. ‘사회’란 생각을 빼고 오늘날 사람의 살림은 있을 수 없다. (주석 14)
함석헌의 경우와 같이 해방 뒤 북한에서 탈출한 월남자 수는 1945~1949년 사이에 대략 45.6~74.0만 명, 6.25 전쟁 시기의 월남자 수는 대략 55.8~64.6만 명에 이른다. 두 시기를 합치면 해방 뒤 한국전쟁 종결시점까지 월남자는 101.4~138.6만 명에 달한다. 해방 직후 1946년 말 현재의 북한 인구 926만 명을 기준으로 삼으면 1945~1949년 사이에 북한 전체 인구의 4.9~8.0%가 월남한 셈이 된다. (주석 15)
월남자 중에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이 많았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 수는 20만 명 안팎으로 북한 총인구의 2.2% 수준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월남한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극우반공의 기수가 된 기독교 목사들이 있었고, 함석헌ㆍ강원룡ㆍ장준하ㆍ리영희 등처럼 민주화의 기수도 있었다.
방수원.현동완.유영모.김흥호.함석헌
날씨가 풀리면서 4월부터는 유영모의 주일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무렵부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1일 1식 주의를 실행한다. 1947년 7월 20일 함석헌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란 시를 지었다. ‘그 사람’의 대상이 김교신인지, 사선을 넘어 서울까지 인도해주고 다시 북녘으로 돌아간 박승방인지, 또는 낮선 서울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준 유영모인지, 생애의 지침이 된 남강ㆍ도산ㆍ고당인지, 아니면 이 모두인지, 함석헌의 명작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지었다. 얼마 뒤 아내와 자식 일부가 월남하였다. 어머니와 장남, 딸 3명은 내려오지 못했다.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되었다.
주석
11>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1쪽.
12> 앞의 책, 277쪽.
13> <38선 넘나들어>, 앞의 책, 53쪽.
14> 앞의 책, 46~47쪽.
15>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410쪽, 중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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