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4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출감하고 얼마 뒤 가슴 아픈 비보를 들어야 했다. 혈맹의 동지, 신앙의 동지 김교신의 부음이었다. 1945년 해방을 얼마 앞둔 4월 25일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와규>의 필자,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일경은 그를 악질 불온분자로 낙인하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돌연한 사망은 장티푸스였으나 극심한 옥고로 육신이 쇠약해지면서 발생한 병이었다. 김교신의 때 이른 죽음은 함석헌에게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아픔이었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중국 명말 청초의 개혁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좋은 벗이고 훌륭한 스승의 관계였다.
함석헌이 월남하여 1947년 7월 20일에 지은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는 김교신을 그리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깨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주석 23)
함석헌은 김교신을 기리면서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도 지었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을 비쳐 눈의 얼굴 보는 듯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느냐 북악산만 높았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주석 24)
함석헌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가 내던 <성서조선>도 폐간되어 어디에 글 한 줄도 쓸 수 없는 암담한 처지에서,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없이 참고서도 없이 읽었으니, 읽었던들 변변히 읽었다 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속이 트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주석 25)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고 있다는 징조이다. 일제는 1943년 11월부터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고,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꽃다운 조선의 소녀와 처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어갔다. 막장이었다. 함석헌은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면서 먼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
22>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전집> 4, 196쪽.
23>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133~134쪽, 일우사, 1961.
24> 앞의 책, 132~133쪽.
25> <전집> 4,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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