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비즘을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걷고,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어 길고 긴 옥고를 치루었다. 이들에 비해 함석헌은 지극히 온건한 지점에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 즉 일본 사회에 신사조의 물결이 넘실대고, 재일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조국해방 투쟁의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희생을 감수할 때, 그는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우찌무라의 무교회 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성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주려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 선생님(유영모-필자)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다니면서 우찌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연구회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생애를 두고 또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3ㆍ1운동의 체험으로 얻게 된 민족주의 정신을 이으면서도 우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나, 일본 유학 중에 지켜보아 온 아나ㆍ불 계열의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기독교사상을 통한 정신적ㆍ사상적 연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치무라를 만난 것은 오산에서 남강ㆍ도산ㆍ고당을 만난 것과 궤를 같이할만큼 생애에 두고 두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훗카이도 출신인 우치무라는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때 신문기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일왕의 칙어를 비판하여 역적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교회 안의 형식과 위선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하면서 지식 수준이 높은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다.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성경연구회에 나갔다. 여기서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사귀고, 함께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의 둥지가 된 <성서조선> 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 여섯이 의결하고 동인지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金)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석 16) 여섯사람은 함석헌ㆍ김교신 외에 유석동ㆍ송두용ㆍ정상훈ㆍ양인성이다.

함석헌이 유학중에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저물고, 황도파 세력에 의한 치안유지법 제정, 노동자와 일본공산당 탄압, ‘대역사건’이라 하여 박열과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 사형선고(무기형으로 감형), 간토 대진재 와중에서 5천 명 이상의 조선인 학살과 일본 아나키스트ㆍ사회주의(공산주의) 지도자 암살(처형)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함석헌은 학교 교육보다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고 교우들과의 토론으로 폭 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교신ㆍ송두용 등과는 평생 신앙의 동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배울수록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동서양의 명저를 통해 안목이 확대되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를 내세울만큼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다. 하나의 j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의 j는 재핀 즉 일본이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떴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 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해석의 참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이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게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주석 17)

애를 더듬어 보면 지극히 자주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자주성과 창조성은 뒷날 독재권력과 싸우게 되는, 민주주의와 씨알사상으로 영글게 되었다. 뛰어넘어 자기의 주체성과 폭넓은 신앙체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평생 자주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씨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줄기차게 싸웠다.

동경고사를 다니는 동안 많은 배움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의 요절한(31세 때 선박 전복사고) 낭만파 시인 쉘리(1792~1822)다. 그의〈서풍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높이 산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서풍의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몇 사람 아니되는 세 시대의 정신적 영웅의 한 사람이다. 도덕의 테두리에서 견주어 볼 때 그에게 비난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가 가진, 세 시대에 대해 날카롭고 억센 힘으로 나가려는 독수리 같은 정신에 비하면 아무것서도 아니다.
(주석 18)

오, 사나운 서풍아, 너 가을의 산 숨이야,
네가 볼 수 없이 올 때 그 앞에 몰리는 시든 잎새
술사에게 쫓기는 유령의 때와 같으니,(…)

예언의 나팔소리를 외치라, 오,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주석 19)

함석헌은 <서풍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를 민족 해방의 메시지로 환치하면서 쉘리를 배우고, 간디를 읽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시인 타고르, 독일의 문호 괴테를 좋아한 것도 이 시기였다.

괴테는 많은 사상적 편력을 했다고 한다. 스웨덴붉에서 신비주의, 헤델에서 능동주의, 스피노자에서 단독사상, 자연에서 범신론 등으로….

이 점이 함 선생님과 통하는가?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ㆍ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내촌(內村)에게서 성서, 타골ㆍ칼라일ㆍ카스키ㆍ노자ㆍ장자ㆍ바다받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20)


주석
15> <전집> 4, 215쪽.
16> 앞의 책, 218쪽.
17> 앞의 책, 218~219쪽.
18> 함석헌, <겨울이 만약 온다면>, <전집> 4, 111~112쪽.
19> 함석헌, <역사와 민족>, 233~238쪽, 제일출판사, 1964.
20> 안명우, <선생님께 드리는 글>, <씨알 인간 역사-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5쪽, 한길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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