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3 08:00 김삼웅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성서조선>팀을 덮쳤다.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개인의 종교잡지, 신앙전문지까지 덮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함석헌은 1940년 11월 서울로 올라와 김교신의 집에서 <성서조선> 창간 14주년 기념 감사집회를 갖고, 1941년 3월에는 장남 국용의 결혼식을 치렀다. 김교신이 주례를 서주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서도 <성서조선>에는 꾸준히 글을 썼다. 일제는 함석헌과 동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덮쳤다.
일제는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를 트집잡았다.
<조와>는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면서, 혹한 속에서도 봄이 오면 부활하는 개구리를 통해 민족독립 정신을 담은 짧은 글이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봄비 쏟아지든 날 새벽 이 바위 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랜만에 친구 외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었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주석 18)
김교신은 이 책에 <조와>외에 <강성지도(强盛之道)>, <부활의 춘(春)> 등 일제의 탄압과 침략전쟁, 결국 그들이 패망하고 민족 부활의 새봄이 올 것을 상징하는 단문을 실었다. <성서조선>은 당시 규정에 따라 모든 언론ㆍ출판물처럼 총독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간행하였다. 검열에서 통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뒤늦게 발매금지는 물론 샅샅이 뒤져 10년도 더 지난 창간호부터 전량을 회수하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12명의 필자 그리고 200여 명의 독자 중에 상당수를 구속하였다. 함석헌의 글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도 필화의 한 원인이었다.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에게 유일의 매체이었던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발행인 김교신과 주요 필자 함석헌 등은 ‘일망타진’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세번째 투옥이다. 수사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일본인 검사와는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검사 :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 그렇다.
검사 :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 잘 들어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검사 : 에이, 그런 협잡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 (주석 19)
검사의 신문은 함정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데 일왕(천황)도 멸망한다는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처벌하려는 흉계였다. 함석헌은 이를 꿰뚫고 ‘성경의 탄력’을 이유로 빠져나왔다.
함석헌이 수형번호 1588번을 달고 미결수로 1년 동안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운형이 부일을 거부하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시인 김광섭도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는 등 많은 항일 인사들이 수감돼 있었다. 1942년 1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33명은 대부분 함흥감옥 등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은 여러 차례 형사와 검사의 수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였다. 결코 그들의 동정을 살 요량으로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형사와 턱 마주 앉으면 인정도 도리도 다 없고 저와 나와는 이해가 서로 상반되는 양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비위를 맞추어서 일을 쉽게 만들어보려는 따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비위를 거슬러야 매를 맞는 것 밖에 없는데, 사람이 매를 맞아서는 여간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내 지킬 것인 담에는 터럭만한 것이라도 지켜야지 일단 그것을 내놓으면 그 담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고집이란 말을 들어도, 경위로 따짐을 당해도 잡아뗄 것은 딱 잡아떼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저보다 위에 서야 한다. 맘의 가라앉음으로, 심리를 더듬음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리로 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 봐야 한다. 형사에겐 동정이란 털끝만큼도 없는 법이다. 저는 나를 먹으려다 못 먹으면 그저 아까운 것을 놓쳤다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죄로 만들지 못하면 손해가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이해싸움이다. 그러므로 절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주석 20)
함석헌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면서 시 한 편을 지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꿈 속에 다녀간 길 꿈 같이 다시 왔네
깼던 꿈 잇는건가 깼다던 것 꿈인가
모두 다 꿈속엣 일을 맘 상할 것 없고나
강남밥 한 웅큼이 삭아서 피어나니
스물네 마리 끝에 가지가지 생명의 꽃
거룩한 창조의 힘을 몸에 진고 있노라
쉬인 해 가르치자 다시금 채치시니
내 둔도 둔이언맘 아빠 맘 지극도 해
날 아껴 하시는 마음 못내 눈물 겨워서
짓밟는 형틀 밑에 흘린 피 술로 빚고
풀무교에 타고난 밤 금잔으로 쳐 나오니
아버지, 눈물 섞어서 이 잔들어 주소서
바람아 네가 불면 언제나 불 것이냐
울부는 가지 끝에 네 만가(輓歌)높았더라
겨울이 왔다면이야 봄을 멀다 할 거냐
삭풍아 불어 불어 마음껏 들부숴라
떨어진 내 잎새로 네 무덤 쌓아놓고
봄 오면 우는 꽃으로 그 무덤을 꾸미마. (주석 21)
주석
18> 김교신 <조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19> 이치석, 앞의 책, 292~293쪽.
20>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5쪽.
21>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 168쪽, 나남출판, 2000.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개인의 종교잡지, 신앙전문지까지 덮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함석헌은 1940년 11월 서울로 올라와 김교신의 집에서 <성서조선> 창간 14주년 기념 감사집회를 갖고, 1941년 3월에는 장남 국용의 결혼식을 치렀다. 김교신이 주례를 서주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서도 <성서조선>에는 꾸준히 글을 썼다. 일제는 함석헌과 동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덮쳤다.
일제는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를 트집잡았다.
<조와>는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면서, 혹한 속에서도 봄이 오면 부활하는 개구리를 통해 민족독립 정신을 담은 짧은 글이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봄비 쏟아지든 날 새벽 이 바위 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랜만에 친구 외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었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주석 18)
김교신은 이 책에 <조와>외에 <강성지도(强盛之道)>, <부활의 춘(春)> 등 일제의 탄압과 침략전쟁, 결국 그들이 패망하고 민족 부활의 새봄이 올 것을 상징하는 단문을 실었다. <성서조선>은 당시 규정에 따라 모든 언론ㆍ출판물처럼 총독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간행하였다. 검열에서 통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뒤늦게 발매금지는 물론 샅샅이 뒤져 10년도 더 지난 창간호부터 전량을 회수하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12명의 필자 그리고 200여 명의 독자 중에 상당수를 구속하였다. 함석헌의 글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도 필화의 한 원인이었다.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에게 유일의 매체이었던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발행인 김교신과 주요 필자 함석헌 등은 ‘일망타진’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세번째 투옥이다. 수사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일본인 검사와는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검사 :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 그렇다.
검사 :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 잘 들어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검사 : 에이, 그런 협잡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 (주석 19)
검사의 신문은 함정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데 일왕(천황)도 멸망한다는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처벌하려는 흉계였다. 함석헌은 이를 꿰뚫고 ‘성경의 탄력’을 이유로 빠져나왔다.
함석헌이 수형번호 1588번을 달고 미결수로 1년 동안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운형이 부일을 거부하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시인 김광섭도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는 등 많은 항일 인사들이 수감돼 있었다. 1942년 1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33명은 대부분 함흥감옥 등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은 여러 차례 형사와 검사의 수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였다. 결코 그들의 동정을 살 요량으로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형사와 턱 마주 앉으면 인정도 도리도 다 없고 저와 나와는 이해가 서로 상반되는 양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비위를 맞추어서 일을 쉽게 만들어보려는 따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비위를 거슬러야 매를 맞는 것 밖에 없는데, 사람이 매를 맞아서는 여간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내 지킬 것인 담에는 터럭만한 것이라도 지켜야지 일단 그것을 내놓으면 그 담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고집이란 말을 들어도, 경위로 따짐을 당해도 잡아뗄 것은 딱 잡아떼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저보다 위에 서야 한다. 맘의 가라앉음으로, 심리를 더듬음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리로 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 봐야 한다. 형사에겐 동정이란 털끝만큼도 없는 법이다. 저는 나를 먹으려다 못 먹으면 그저 아까운 것을 놓쳤다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죄로 만들지 못하면 손해가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이해싸움이다. 그러므로 절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주석 20)
함석헌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면서 시 한 편을 지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꿈 속에 다녀간 길 꿈 같이 다시 왔네
깼던 꿈 잇는건가 깼다던 것 꿈인가
모두 다 꿈속엣 일을 맘 상할 것 없고나
강남밥 한 웅큼이 삭아서 피어나니
스물네 마리 끝에 가지가지 생명의 꽃
거룩한 창조의 힘을 몸에 진고 있노라
쉬인 해 가르치자 다시금 채치시니
내 둔도 둔이언맘 아빠 맘 지극도 해
날 아껴 하시는 마음 못내 눈물 겨워서
짓밟는 형틀 밑에 흘린 피 술로 빚고
풀무교에 타고난 밤 금잔으로 쳐 나오니
아버지, 눈물 섞어서 이 잔들어 주소서
바람아 네가 불면 언제나 불 것이냐
울부는 가지 끝에 네 만가(輓歌)높았더라
겨울이 왔다면이야 봄을 멀다 할 거냐
삭풍아 불어 불어 마음껏 들부숴라
떨어진 내 잎새로 네 무덤 쌓아놓고
봄 오면 우는 꽃으로 그 무덤을 꾸미마. (주석 21)
주석
18> 김교신 <조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19> 이치석, 앞의 책, 292~293쪽.
20>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5쪽.
21>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 168쪽, 나남출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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