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1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함석헌이 오산고보에서 ‘선생질’(자신의 표현)을 하고 있던 1930년 5월 9일 남강 이승훈이 눈을 감았다.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3년여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 3ㆍ1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대표로 참가했다가 다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2년 가출옥하여 오산고보로 돌아와서 이 학교의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훈은 함석헌이 일본 유학 중일 때인 1924년 김성수의 간청으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때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고, 다시 오산고보로 돌아와 학교운영에 힘을 쏟다가 66세를 일기로 삶을 접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자기의 유골을 해부하여 생리학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학교 동산에 안장되었다.

함석헌에게 남강은 생애의 큰 스승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여러 날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상념을 이렇게 썼다.

여순이 지났어도 언제 몸을 찌그리는 일도 다리를 뻗고 버둥버둥하는 일도, 대낮에 낮잠을 자는 것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에게는 어려워서 자란 곳이 놋점(유기농장)이었던 것 같이 인생을 다듬어냄이었고, 젊어서 직업이 장사였던 것 같이 삶이란 개인이거나 나라거나 밑져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갈 때는 올 때보다 이를 남긴 것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성경에 있는 착하고 진실한 종, 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이었다.

할 것은 하자는데 좋고 언짢고, 높고 낮고, 네 거 내 거가 있을 리 없다. 3ㆍ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하자고 부서를 다 짜놓은 민족대표들! 이 선언서에 뉘 이름부터 먼저 쓰느냐가 문제가 되어 옥신각신하는데 어디 나갔다 들어오다가 비로소 그것을 알고 “그거 무슨 문제될 것 있느냐, 순서가 무슨 순서냐? 죽는 순서야! 어서 손병희부터 먼저 써라”해서 막혔던 일이 동이 터지듯이 일사천리로 됐다는 것은 세상이 잘 아는 이야기 아닌가?
(주석 12)

함석헌은 이같은 스승을 오산동산에 묻고 한동안 슬픔에 잠겼다.
강토는 아직 캄캄한 미명인데 나라 걱정하던 스승이 떠나고, 그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함석헌은 1930년 학교 교정에 세운 동상 앞으로 신입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으로 ‘남강정신’을 강의하였다. 당시 전교생이 500명 정도여서 교사와 학생들은 가족처럼 유대가 이루어졌다. 교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 건물이었다.

1930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간회가 해체되고, ‘민중대회사건’으로 40여 명의 핵심간부가 체포되었다.
그는 언제까지 평범한 교사생활로 안주하지 못하였다. 함석헌은 일경의 감시 뿐 아니라 교무처 직원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보고했다. “하나님의 발길”은 그를 고난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1930년 여름방학에 서울에 사는 김교신과 정릉 그의 집에서 2주일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하고 새학기를 위해 오산으로 내려간 날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에 붙잡혀 갔다. 불문곡직, 무슨 혐의인지 밝히지도 않고 정주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언론에서는 ML당(마르크스ㆍ레닌당) 간부를 체포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ML쪽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함석헌은 일주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한 주일에 유치장이 어떤 것임을 비로소 그 풍속화 맛을 알아서 이것이 훗날에 퍽 도움이 되었다.” (주석 13)고 말했다.

두번째 투옥까지는 일종의 ‘맛 뵈기’ 수준이였다면, 세번째는 좀 더 강했다.
세번째 투옥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사직하였다. 이유는 창씨개명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억누름에 더 이상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른 결단이었다. 그는 감시자들의 압박에도 수업시간에 우리 말로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가치있는 책들을 읽으라고 추천하면 학생들은 정주로 나가 사왔다. 1930년 7월에는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어 성경 연구와 함께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행동은 ‘불온’의 대상이 되고, 압박이 심하여 차라리 그만 두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를 폐지하고, 조회 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낭독케 했다. 그리고 친일인사들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국 강연회를 통해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옹호했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동창이며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서춘도 이 대열에 끼었다. 함석헌은 더 이상 ‘교사질’을 버티기 어려웠다.

오산시절의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함 도깨비’로 통했다.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해서였다. 어느 해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평소 친일 성향으로 밉보였던 교사들을 두들겨 주기로 했다. 그런데 사전에 정보가 새나간 것인지, 막상 대상 교사들은 피신하고 엉뚱하게 존경하는 함석헌이 구타를 당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학생들이 폭행하려 하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라는 것, 나중에 학생들이 반성하면서 그 이유를 묻자 “나도 사람인데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작가ㆍ언론인 선우휘는 <사상계>에 쓰기도 했다.

그 이전 이미 나는 학생시절에 함옹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듣고 있었다.
오산고보에 다니는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화제에서 곧잘 ‘도깨비’라는 닉네임을 가진 교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함옹이다.

처음이나 “도깨비가 개천물 마시듯 한다”는 속언이 생각시켜 “술을 잘 마시는 선생이냐”고 물었더니 “노오”, “그럼 성품이 고약하냐” 그것도 “노오”, “우악스럽게 생겼느냐”, 그것도 “노오”, 내가 곤혹을 느끼자 연민과 그제야 자기들만이 안다는 자랑이 뒤섞인 얼굴도 “무엇이고 못하는 것이 없어서 도깨비란다”고 알려주었다. 이어서 그들은 “오산고보를 나오고 동경일고와 동경고사의 입시를 보았는데 두군데 다 합격되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은사 이승훈 옹의 육영사업을 도울 생각에서 동경고사를 다닌 것이라 하여 너무 성적이 좋아 그것을 시기한 일인 학생에게 칼로 찔린 일이 있다”느니 “회화ㆍ작시ㆍ작곡 못하는 것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늘 조선옷(한복)만 입고 다닌다고 했다. 개중에는 “일본말 교과서를 내놓고 조선식 한문자음을 옥편으로 찾아내라는 것은 질색이라”고 투덜거리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주석
12>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 4, 166~167쪽.
13>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쪽.
14> 선우휘, <주관적 함석헌론>, <사상계>, 1962년 11월호.


01.gif
0.15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