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

012/12/15 08:00 김삼웅

 

 

 

오산학교 시절에 기독교 신앙이 더욱 깊었던 그에게 현장에서 지켜 본 간도 대진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이 때의 영적 체험은 섭리사관(攝理史觀)을 싹 틔워 그의 독특한 역사관, 역사철학이 되고, 곧 만나게 되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에 입문하게 된다.

함석헌에게 간도 대진재의 참화 그 자체도 맨 정신으로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그 와중에 벌어진 일본인들의 야수성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같은 마을에 사는 기독교인, 불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국가주의의 패악을 뼈저리게 체득했다. 함석헌은 며칠 뒤 함덕일과 하숙집에서 반찬을 사러 가게에 갔다가 일본도와 대창을 든 일단의 무리에게 쫓기게 되었다. 다행히 안면이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함석헌은 뒷날 수차례 감옥과 유치장을 드나들면서 이를 일러 ‘인생대학’이라 불렀다. 그가 인생대학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간도 대진재 때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이 아닌 사범학교에 입학한 것도 간도 대진재의 영향이 작용하였다.

나는 하룻밤을 경찰서에 잡혀가서 새고 왔습니다. 그것이 나의 감옥길의 입학식이였습니다. 하룻밤 지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제 일본 민족이란 어떤 민족인지 알았다기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도 도덕도 어떤 것인지 눈앞에 똑바로 나타났습니다.

일생 동안 수차례 드나들게 된 감옥(형무소)의 첫 경험이었다. 마치 미국의 저항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45년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다가 하룻동안 콩고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이 경험이 <시민의 불복종>을 쓰게 되었듯이, 함석헌도 이 때의 경험이 조국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향하는 거대한 발걸음이 되었다.

함석헌은 1924년 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1부 갑조)에 들어갔다. 전공과 진로를 두고 여러 날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고, 노동자계급의 지위향상과 노동조합 결성이 추진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전파 되고, 아나키즘,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 각종 이데올로기가 번창하였다.

노동운동이 고조되면서 오스키 사카에 등의 아나키즘운동과 1920년 결성된 일본 사회주의동맹 등 볼세비즘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아나’ 대 ‘볼’의 논쟁이 치열해지고, 1925년 6월 일본공산당원 전원이 검거되는 ‘제1차 공산당사건’이 발생하였다. 간도 대진재의 와중에 아나키즘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지도자 상당수가 학살되거나 피검되었으나, 지식인ㆍ노동자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나ㆍ볼 사상이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럴진대, 지식인ㆍ상류사회란 것이 이럴진대,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ㆍ도덕으로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 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20대 초반의 함석헌에게 1920년대 초기 일본 사상계와 종교풍토는 많은 사상적ㆍ정신적 갈등을 겪게 하였다. 조선 유학생들과 노동자 대부분이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이를 조국해방 투쟁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반면에 친일계열의 부르조아 청년ㆍ학생들은 일본의 선진문물을 배워 식민지 조국의 관리가 되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 거의 대부분이 그 소위 신사조에 휩쓸려서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나 자신의 경우로만 보아도 그러한 영향이 확실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일본의 현실을 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상적인 모든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덤벼든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일본 청년들과 같이 휩쓸려 다녔지만 박열ㆍ신용우ㆍ방한상 등 맹장들과 흑도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해 우리들만이 사상계에 있어서 최첨단을 걷는 선구자인 것처럼 뽐내고 우쭐대던 기억이 난다.

함석헌은 일본에서도 명문이라는 동경고사에서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교사를 훈련하는 양성소이지 학문을 하는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났고, 일본식 국가주의 정신 교육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일본의 수재들이 모이는 이 학교의 역사교육 학과의 사비생(私費生)이 되어 그들과 경쟁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학비와 하숙비는 오산학교의 보조비와 고국에서 아버지가 한의사로 어렵게 마련한 돈을 보내주어 어느 정도 꾸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학생들과 역사연구를 목표로 하는 함석헌의 공부의 방향이 같을 리 없었다. 함석헌은 학교 공부보다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과 역사서적을 읽고 현대사상의 관련 서적도 탐독하였다. 타고르의 <기탈잘리>를 읽은 것도 이때였다. 이를 계기로 간디의 책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었다.

동경고사 시절 성적표에 따르면 수신, 교육학, 역사를 위주로 한 갑조(甲組)의 교과목 가운데 법제와 경제는 1학년 때만, 교육학은 3개년, 국사(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는 4개년간 수강했는데, 특히 1,2학년 때는 사범학교 교육의 특성상 수신ㆍ교육학ㆍ국어ㆍ한문 등이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석헌은 졸업하면서 당시 규정에 따라 사범학교 교원면허증, 보통중학교 교원면허증, 고등여학교 면허증 등 3종을 모두 수여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졸업생 중에는 김교신 외에 시인 조병화, 문학평론가 백철, 친일 언론인 서춘, 전 대통령 최규하, 북한의 역사학자 문석준 등이 손꼽힌다.

함석헌은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일왕의 충용스러운 ‘교육병사’들을 양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을 묵묵히 보내면서도 일본인 동기생들을 사귀지 않았고, 국체명징의 일본 교육정신에 반발하여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었다. 또 세계적으로 알려진 저항 인물들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는 뒷날 많은 글을 쏟아냈지만 동경고사 시절에 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없었을 것이고, 무의미한 기간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주석
11>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노명식, 앞의 책, 147~148쪽.
12> <전집> 4, 215쪽.
13>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2ㆍ3ㆍ5호 연재.
14> 조광, <1930년대 함석헌의 역사인식과 한국사 이해>, <한국사상 사학 2>, 2003. 이치석, 앞의 책, 151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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