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
012/12/25 08:00 김삼웅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 독립행진곡
함석헌은 자신의 표현대로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다가”가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이다.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주석 1)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왕 쇼화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청사 2층에서 이른바 ‘항복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선언이지만, 정작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조서’는 8백 15자(字)로 되어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어쨌던 일제는 항복하고 한민족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 36년’하면, 그렇게밖에 아니됐던가 의심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했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악착한 이리가 이 양(羊)을 놓고 물러갈 줄은 저희도 생각 않았거니와 우리도 감히 생각 못하였다.
그 이빨은 간 잎갈피에까지 들어갔고 그 발톱은 우리 등뼈 마디 짬에까지 박혔었다.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는 그 물러날 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정치권이 그들 손에 있고, 경제정책이 그들 자기네 본위요, 토지가 대부분 그들 소유가 됐고, 교육방침이 철저한 일본 국민이나 혹은 그들의 영구한 종 기름에 있었고, 마지막에는 풍속을 고치고, 성을 갈고 말을 없애고, 글을 말살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세계사조 조차 혼란에 빠져, 민족 사이의 동정의 생각도 얻어볼 수 없고 국제간의 정의감도 찾아볼 수 없어져 세계 모퉁이에서 대낮에 인간의 대량학살을 공공연히 하게 됐으니, 아무도 그 종살이에 끝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志士)라던 사람들도 다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교육자는 학생보고 일본인돼야 한다고 아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도들보고 일본섬기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짐짓 짓는 죄로 인도하고 있었다.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식한 못난 민중이었다. (주석 2)
함석헌은 8ㆍ15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했다. (주석 3)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중경과 미주 그리고 국내에서 단파방송을 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총독부의 정보ㆍ언론의 통제로 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두 손에 수갑이 채워 일경에 끌려 갈 때에 아는 채도 않던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불러냈다. 용천과 용암포에서 열린 해방축하회에 불려나가 만세를 부르고 시기행진도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방은 ‘도둑맞고’ 있었다.
“해방 후 분한 일, 보기 싫은 꼴이 하나 둘만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참 분한 일은 이 해방을 도둑해가려는 놈들이 많은 것이다.” (주석 4)
곳곳에서 정치 모리배들이 해방을 마치 자기네들이 쟁취한 것인양 민중을 속이고 공을 가로채고 있었다.
함석헌은 지극히 비사교적 인물이다. 비정치적이고 감투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감투’를 쓰게 되었다. 본의와는 상관없이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자리에 앉혀졌다. 평북 자치위원회위원장에는 독립운동가 이유필이 추대되었다. 함석헌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것이 정치꾼들의 눈에도 이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에게 그를 앞세워 써먹자는 심산이었다.
“새 역사의 어떤 매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4쪽.
2>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57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358쪽.
4> 앞과 같음.
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276쪽.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 독립행진곡
함석헌은 자신의 표현대로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다가”가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이다.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주석 1)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왕 쇼화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청사 2층에서 이른바 ‘항복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선언이지만, 정작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조서’는 8백 15자(字)로 되어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어쨌던 일제는 항복하고 한민족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 36년’하면, 그렇게밖에 아니됐던가 의심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했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악착한 이리가 이 양(羊)을 놓고 물러갈 줄은 저희도 생각 않았거니와 우리도 감히 생각 못하였다.
그 이빨은 간 잎갈피에까지 들어갔고 그 발톱은 우리 등뼈 마디 짬에까지 박혔었다.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는 그 물러날 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정치권이 그들 손에 있고, 경제정책이 그들 자기네 본위요, 토지가 대부분 그들 소유가 됐고, 교육방침이 철저한 일본 국민이나 혹은 그들의 영구한 종 기름에 있었고, 마지막에는 풍속을 고치고, 성을 갈고 말을 없애고, 글을 말살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세계사조 조차 혼란에 빠져, 민족 사이의 동정의 생각도 얻어볼 수 없고 국제간의 정의감도 찾아볼 수 없어져 세계 모퉁이에서 대낮에 인간의 대량학살을 공공연히 하게 됐으니, 아무도 그 종살이에 끝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志士)라던 사람들도 다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교육자는 학생보고 일본인돼야 한다고 아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도들보고 일본섬기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짐짓 짓는 죄로 인도하고 있었다.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식한 못난 민중이었다. (주석 2)
함석헌은 8ㆍ15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했다. (주석 3)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중경과 미주 그리고 국내에서 단파방송을 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총독부의 정보ㆍ언론의 통제로 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두 손에 수갑이 채워 일경에 끌려 갈 때에 아는 채도 않던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불러냈다. 용천과 용암포에서 열린 해방축하회에 불려나가 만세를 부르고 시기행진도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방은 ‘도둑맞고’ 있었다.
“해방 후 분한 일, 보기 싫은 꼴이 하나 둘만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참 분한 일은 이 해방을 도둑해가려는 놈들이 많은 것이다.” (주석 4)
곳곳에서 정치 모리배들이 해방을 마치 자기네들이 쟁취한 것인양 민중을 속이고 공을 가로채고 있었다.
함석헌은 지극히 비사교적 인물이다. 비정치적이고 감투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감투’를 쓰게 되었다. 본의와는 상관없이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자리에 앉혀졌다. 평북 자치위원회위원장에는 독립운동가 이유필이 추대되었다. 함석헌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것이 정치꾼들의 눈에도 이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에게 그를 앞세워 써먹자는 심산이었다.
“새 역사의 어떤 매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4쪽.
2>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57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358쪽.
4> 앞과 같음.
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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