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여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던 중에 일은 이미 크게 꼬여들었다. 신의주학생사건이 터지고,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해방되던 해 11월 23일 신의주에서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결의하고 반소, 반김일성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에 보안부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뒤늦게 학생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신의주사범학교의 부속 강습생들과 신의주공립여자중학교 학생들은 시인민위원회를 습격, 기밀문서 등을 빼앗고 공산당원들과 대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발포로 다시 많은 학생이 피살되거나 중경상ㆍ투옥되었다. 해방 100일 만에 일어난 참변이다.

함석헌은 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어 있는 신의주공산당본부에 들어갔다가 이들에게 체포되었다.

함석헌은 공산당본부에서 순식간에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한국인 2세로 보이는 소련군이 일어나 러시아어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소련군 교육고문이 함석헌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한 사람이었는데, 함경도가 고향이라면서 자신을 친절하게 소개했었다. 함석헌은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흥분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지목하는 것 같이 느꼈다.

이제부터 자신의 운명이 끝이라고 직감하는 순간, 뜰에 꽉 찬 소련군들의 ‘총칼이 일시에 쏵’하고 그의 가슴으로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소련군 장교의 지시로 함석헌을 둘러싼 칼과 총부리와 피스톨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가 물러갔으나, 곧 방사선 형태로 죽음의 물결은 반복해서 그에게 다가들곤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마음은 그렇게 차분하고 평안해질 수가 없었다.
(주석 6)

함석헌은 소련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졸도하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깨어나면 다시 구타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연후에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처넣었다. 가족의 면회도 금지시켰다. ‘해방군’의 이름으로 들어온 소련군과 북쪽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었다.

함석헌은 죽음의 문턱에서 어렵게 살아났다. 짧은 ‘해방공간’에서 조만식 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10월 초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될 때 함석헌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가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승에서 스승과 만난 마지막이 되었다. 그는 11월 초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추위,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네번째 투옥이라 이골이 날만큼 났다. 옥살이의 요령도 생겼다. 시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옥중에 쉰 날을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봐야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내 할 일은 우는 것인가 보다 하여 날마다 일어나는 느낌을 적어보았다. 그것이 내가 난 후 처음으로 시를 써 본 시작이다. (주석 7)

1961 일우사

옥중에서 시를 택한 것은 갑자기 시심(詩心)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필기구가 없어서였다. 어렵게 구한 몽당연필로 소련군의 휴지에 쓴 300여 편의 시는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는 기약없는 처지에서 씌였다. 함석헌은 월남하여 뒷날(1961년) 펴낸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저간의 사정을 담는다.
소위 신의주학생사건이 일어나, 정권에 미친 놈들 단순한 젊은 가슴의 의분에 총칼로서 대립하고, 그 원통한 피 모두 내 머리에 돌려, 나를 잡아 옥속에 던지니, 해방의 소식을 밭고랑에서 거름통 멘 채 들으며 “오, 그날이 오기는 왔나보다” 하고 들을 뿐이리만큼 둔감한 내 가슴에서도 울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그래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 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이다. 50일 갇혀 있는 동안,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짬짬이 면회 온 친구에게 주어 보낸 것이 모이니 삼백 여 수여서, 나온 후 그것을 한데 엮어 <쉰 날>이라 이름했는데, 그것은 1947년 봄 38선을 넘을 때 거의 다 잃어버렸다.
(주석 8)

함석헌의 초기 옥중 시는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졌다. 뒷날 그는 다시 여러 편의 시를 썼고, 시집을 간행했으며, 사후에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는 시비가 세워졌다. 그는 시에 대해 일가견을 가졌고, 시인으로도 불린다. 시인 아닌 시인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아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위즈위즈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서 타골이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말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났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 같이 다 곯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참혹한 일이다.
(주석 9)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는 최근 ‘함석헌의 종교시’를 탐구하는 저서를 냈다. 그의 ‘시인 함석헌론’이다.

필자의 관심은 창조적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그의 시론(詩論), 다시 말해서 그가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동양적 선비가 흔히 갖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동서양 고전의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 오늘에 재해석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함석헌의 진면목은 동트는 새문명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전령자로서, 예언자로서, 신탁을 맡은 사제로서 살고 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 시대의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운명적 역할담당자를 한마디로 우리 시대 언어로 말할 때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석 10)


주석
6> 조동영, <동구보다 먼저 일어난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이치석, 앞의 책, 376쪽, 재인용.
7>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0쪽.
8> 함석헌, <수평선 넘어>, <머릿말>, 생각사, 1961.
9> 앞과 같음.
10> 김경재,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 12~13쪽, 책보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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