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2 08:00 김삼웅
1931년 2월 오산학교에서는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석헌의 교실에 장학관이 불쑥 들어와 일본어로 강의하는가를 감시했다.
다시 고난의 현장으로 돌아오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창씨개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오산을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심정에서입니다. 감히 일본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는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빤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와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 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론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은 제자들에게 일본말로 일본식 교육을 시킬 수 없어서, 그리고 조선인의 혼, 성씨와 이름까지 고치라는 창씨개명에는 견딜 수 없어서 교사직을 내던졌다. 예나 지금이나 불의에 저항하여 직장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신념도 신념이지만 ‘권속’의 생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함석헌에게는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다. 1919년 장남 국용이 태어나고, 1921년 8월 장녀 은수 출생, 1926년 4월 2녀 은삼 출생, 1929년 8월 3녀 은자 출생, 1931년 9월 2남 우용 출생, 1933년 4녀 은화 출생으로 2남 4녀가 있었다. 퇴직 이후인 1939년 1월에 5녀 은선이 태어났다.
이런 대가족을 거느린 함석헌은 교직을 떠나서 평양 송산리에 있는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거처를 옮겼다. 퇴직 2년여가 지난 1940년 3월의 일이다. 이 학원은 조만식의 뜻을 이어받은 김두혁이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본받아 사람을 길러보자고 세운 농사학원(農事學院)이었다. 이것을 함석헌이 인수한 것이다. 그동안 월급에서 모아 둔 돈을 털어서 인수했다.
20여 명에 불과한 학생들과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땅을 파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아직까지 농사일과는 거리가 있는 먹물에게 농삿일은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심은 참외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8월에 때 아닌 서리가 내렸다. ‘서리’의 정체는 일본 경찰이었다.
설립자인 김두혁이 일본에서 동경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의 모임인 계우회(鷄友會)를 조직하여 활동중에 그가 구속되고,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9월 평양 대동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 세 번째 투옥이다. 이와 관련 평양 숭인상업학교 학생들이 ‘장학축상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그중 한 명이 일본에서 함석헌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경찰의 가택수색으로 적발되어 학생 6명이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옥고보다도 작은 실수로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 두고두고 자책하였다. 평소 주의를 해서 편지를 불태웠는데 한 통이 쓰레기통에서 적발되면서 이들은 2년 반씩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듬해 초여름에 출감할 때까지 1년여를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옥살이를 하였다. 농사학원은 폐농이 되고, 옥고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불온분자’로 찍힌 함석헌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허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큰 불효에 속한다. 아들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 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상주 노릇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함석헌은 하릴없는 농사꾼이 되었다. 서툰 농사일이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땅이 2만 평 정도가 되었다. 7명의 자식들까지 식구가 열 명이 넘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땅을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고심 끝에 결국 상속하여 농사일을 맡았다. 이것이 뒷날 화근이 되었다.
함석헌은 세 번째 옥고를 치루면서 ‘과외’의 소득을 얻었다. 같은 구치소에 있던 한 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일본인 사이고 다까모리(西卿隆盛)의 시였다. 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였으나 그럴 듯한 싯구를 남겼다.
그때에 지낸 가지가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당장 기억에 새롭게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방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어떤 늙은이에게서 들은 일본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기나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옥 속에 쓰고 신 맛 겪으니 뜻은 비로소 굳어진다.
사내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처럼 옹글기 바라겠나
우리 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손 위해 좋은 논밭 사줄 줄 모른다고 하여라.
獄中辛酸志始堅
丈夫玉碎 愧甑全
我家遺法人知否
不用子孫買美田 (주석 16)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호주가 됐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땅이 2만 평 정도 있었는데 상속을 할 것이냐 생각을 하다가, 이상으로 하면 상속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깝다는 생각에서도 아닌데, 종시 단행을 못하고 그냥 풍속대로 따라 상속을 했다가 4년 후 공산당이 와서 지주 숙청하는 것을 당하면서야 “그때에 차라리 단행했더라면”하고 뉘우쳤습니다. (주석 17)
함석헌의 농삿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국은 점차 어려워지고,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극악해졌다.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시행되고, 1937년 6월에는 민족주의계열 인사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수양등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흥사단 계열의 실력 양성 단체이던 수양동우회를 수사하면서 무관한 기독교계 인사들까지 구속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에 끌어갔다.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3차) 하여 ‘국체명징’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서사’의 암송을 의무화했다.
1938년 4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폐지,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창립, 1939년 10월 국민 징용령 실시, 1940년 2월 창씨개명 실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 도발, 1943년 3월 징병제 공포, 10월 학병제 실시 등 일제의 폭압통치는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이땅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맞이로 내몰았다.
따라서 반일ㆍ항일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그만큼 심해졌다. 1년 만에 석방된 함석헌은 서투른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농삿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0년 8월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한 것이다.
주석
1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0쪽.
16>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24쪽.
17> 앞의 책, 272쪽.
다시 고난의 현장으로 돌아오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창씨개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오산을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심정에서입니다. 감히 일본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는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빤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와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 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론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은 제자들에게 일본말로 일본식 교육을 시킬 수 없어서, 그리고 조선인의 혼, 성씨와 이름까지 고치라는 창씨개명에는 견딜 수 없어서 교사직을 내던졌다. 예나 지금이나 불의에 저항하여 직장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신념도 신념이지만 ‘권속’의 생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함석헌에게는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다. 1919년 장남 국용이 태어나고, 1921년 8월 장녀 은수 출생, 1926년 4월 2녀 은삼 출생, 1929년 8월 3녀 은자 출생, 1931년 9월 2남 우용 출생, 1933년 4녀 은화 출생으로 2남 4녀가 있었다. 퇴직 이후인 1939년 1월에 5녀 은선이 태어났다.
이런 대가족을 거느린 함석헌은 교직을 떠나서 평양 송산리에 있는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거처를 옮겼다. 퇴직 2년여가 지난 1940년 3월의 일이다. 이 학원은 조만식의 뜻을 이어받은 김두혁이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본받아 사람을 길러보자고 세운 농사학원(農事學院)이었다. 이것을 함석헌이 인수한 것이다. 그동안 월급에서 모아 둔 돈을 털어서 인수했다.
20여 명에 불과한 학생들과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땅을 파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아직까지 농사일과는 거리가 있는 먹물에게 농삿일은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심은 참외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8월에 때 아닌 서리가 내렸다. ‘서리’의 정체는 일본 경찰이었다.
설립자인 김두혁이 일본에서 동경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의 모임인 계우회(鷄友會)를 조직하여 활동중에 그가 구속되고,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9월 평양 대동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 세 번째 투옥이다. 이와 관련 평양 숭인상업학교 학생들이 ‘장학축상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그중 한 명이 일본에서 함석헌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경찰의 가택수색으로 적발되어 학생 6명이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옥고보다도 작은 실수로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 두고두고 자책하였다. 평소 주의를 해서 편지를 불태웠는데 한 통이 쓰레기통에서 적발되면서 이들은 2년 반씩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듬해 초여름에 출감할 때까지 1년여를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옥살이를 하였다. 농사학원은 폐농이 되고, 옥고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불온분자’로 찍힌 함석헌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허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큰 불효에 속한다. 아들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 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상주 노릇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함석헌은 하릴없는 농사꾼이 되었다. 서툰 농사일이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땅이 2만 평 정도가 되었다. 7명의 자식들까지 식구가 열 명이 넘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땅을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고심 끝에 결국 상속하여 농사일을 맡았다. 이것이 뒷날 화근이 되었다.
함석헌은 세 번째 옥고를 치루면서 ‘과외’의 소득을 얻었다. 같은 구치소에 있던 한 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일본인 사이고 다까모리(西卿隆盛)의 시였다. 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였으나 그럴 듯한 싯구를 남겼다.
그때에 지낸 가지가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당장 기억에 새롭게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방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어떤 늙은이에게서 들은 일본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기나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옥 속에 쓰고 신 맛 겪으니 뜻은 비로소 굳어진다.
사내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처럼 옹글기 바라겠나
우리 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손 위해 좋은 논밭 사줄 줄 모른다고 하여라.
獄中辛酸志始堅
丈夫玉碎 愧甑全
我家遺法人知否
不用子孫買美田 (주석 16)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호주가 됐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땅이 2만 평 정도 있었는데 상속을 할 것이냐 생각을 하다가, 이상으로 하면 상속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깝다는 생각에서도 아닌데, 종시 단행을 못하고 그냥 풍속대로 따라 상속을 했다가 4년 후 공산당이 와서 지주 숙청하는 것을 당하면서야 “그때에 차라리 단행했더라면”하고 뉘우쳤습니다. (주석 17)
함석헌의 농삿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국은 점차 어려워지고,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극악해졌다.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시행되고, 1937년 6월에는 민족주의계열 인사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수양등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흥사단 계열의 실력 양성 단체이던 수양동우회를 수사하면서 무관한 기독교계 인사들까지 구속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에 끌어갔다.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3차) 하여 ‘국체명징’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서사’의 암송을 의무화했다.
1938년 4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폐지,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창립, 1939년 10월 국민 징용령 실시, 1940년 2월 창씨개명 실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 도발, 1943년 3월 징병제 공포, 10월 학병제 실시 등 일제의 폭압통치는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이땅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맞이로 내몰았다.
따라서 반일ㆍ항일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그만큼 심해졌다. 1년 만에 석방된 함석헌은 서투른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농삿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0년 8월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한 것이다.
주석
1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0쪽.
16>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24쪽.
17> 앞의 책,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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