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고보 시절, <성서조선>에 종교(기독교)에 관해 많은 글을 쓸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초기의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 차츰 벗어나 독자적인, 조선적인 기독교로 바뀌어 갔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의 계보’를 연구한 강돈구 교수는 그의 종교적 특징을 지적한다.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함석헌도 우치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되, 우치무라의 ‘일본적 기독교’ 대신에 ‘조선적 기독교’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조선적 기독교’는 김교신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김교신은 한반도의 강역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함석헌은 한반도의 강역보다는 오히려 역사에 착안하였다.” (주석 5)

그는 이어서 둘째 특징으로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그것보다 한층 더 진전된 것으로, 유영모로부터 받은 영향에 기인한다.” (주석 6)라고 분석했다. 함석헌은 1940년대 초 무교회주의와 멀어질 때까지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30대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함석헌은 1934년 2월부터 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 (61~83호)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였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역사 교육이 금지된 시국에 그는 소수나마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자 ‘조선역사’를 지었다. 연재에 앞서 1933년 12월 30일부터 새해 1월 5일까지 서울 오류동 송두용의 집에서 6박7일 동안 동계 성서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그는 ‘조선역사’의 초고를 발표하고, 참석자들과 토론하였다. 그의 명저가 태어나게 된 고고지성인 셈이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망명지 중국에서 나라를 빼앗겨도 “국혼과 국사만 잃지 않으면 독립이 가능하다”면서 <한국통사>(박은식)와 <조선상고사>(신채호)를 지은 것과 비교된다.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것을 보완하여 엮은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비견되는 민중사관의 독특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은 망명지가 아닌 일제의 억누름이 극박스러운 오산에서 씌여졌음에 의미가 각별하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이미 한국의 역사학계는 ‘민족주의’,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근대 사학의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다. 예컨대 신채호는 1931년부터 조선의 <상고문화사(上古文化史)>를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었고, 백남운은 1933년에 계급투쟁사론의 관점에서 <조선사회경제사>를 동경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1934년 5월에는 실증주의를 내건 이병도에 의해서 진단학회도 창립되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성서조선>에 <조선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이병도의 진단학회가 설립되기 석 달 전부터였다. 그밖에도 문일평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을, 정인보는 1936년부터 <동아일보>에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여 각각 민중중심과 유물론적 사관의 일단을 선보였다. (주석 7)   

한편 이 무렵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35권을 편찬하였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조선사 관련 각종 사서를 불태우거나 주요한 것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1923년 1월부터 총독부 정무총감이 배석하고(편찬위원장), 1925년부터는 중추원으로 이관하여 1937년까지 27년에 걸쳐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반도사>를 편찬하였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97만5천원이 투입되고,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를 총동원하였다. ‘조선사’ 35권 외에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천 623편을 별도로 펴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관학자와 조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면서 내건 ‘편찬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개발하여 그들을 훌륭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또한 민심훈육의 일단에 기하고자 함이다. 일본에서는 ‘신부(新府)’의 인민을 교육함‘을 불평과 반한의 기풍을 조작하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상례라 하고…. 이제 조선인에게 조선역사를 읽는 편의를 제공하면 그들 조선인에게 옛날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지만…. 조선에는 고대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이 적지 않다…. <한국통사> 등 후자는 근대 조선의 청일, 노일간의 세력걱정을 서술하여 조선이 등을 돌릴 길을 밝히고 있으니 이들 사서가 인심을 심히 곤호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절멸’을 가함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공명ㆍ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가 현저할 것이다. (주석 8)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야욕에서, 그리고 속국화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은 본래 북만부는 중국의 속국이고, 남반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억지를 ‘역사적 사실’로 꾸미고자 온갖 궤변과 망설을 끌어들이면서 왜곡과 날조로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반도사> 편찬 시기는 함석헌의 일본 유학과 오산고분 교사 시절과 맞닿는다. 그가 남달리 재능이 있고 탐구하고 싶었던 미술, 기독교사 등을 뒤로 하고 역사를 지망한 데는 일제의 한민족사 왜곡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온갖 억누름 속에서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하겠다. 조선총독부가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일본의 관학자들과 조선에서는 최남선ㆍ이병도ㆍ신석호 등 어용사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편찬 과정의 여러 가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이런 추론은 가능하다.

함석헌의 조선사 연재는 그때마다 일제 관헌들의 요시찰의 대상이 되고 잡지는 회원 외에 배포가 금지되었다. 그는 초년 교사 시절에 총독부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해방 뒤 1950년 4월 이 원고를 단행본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발행처는 성광문화사, 값은 750원이었다, 함석헌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밝힌다.

이 조그마한 글은 본래 20년 전 10여 인의 신앙동지 앞에서 이야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우리 거문고를 바빌론 시냇가 언덕 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 때다. 외적(外的) 압박, 내적(內的) 비탄으로 말이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쓰디 쓴 입에 붙이어 우리의 온 길, 갈 길을 이야기 해 본 것이 이 고난의 역사다.

그 후 그것을 그 동지의 1인이요, 지금은 고인이 된 김교신 군이 <성서조선>지에 연재하였다. 광고도 선전도 않은 그 잡지는 독자가 가장 많을 때에도 2백이 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나마도 압박자의 뜻에 거슬려 폐간을 당하게 되는 때에 이 역사도 그 이유의 하나였고, 책은 모두 수색되어 없애 버린 바 되었으니 이 고난의 역사는 그 바빌론 거친 들에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깐 들렀다가 들 끝에 사라지는 외로운 포수(捕囚)의 신음성 같이 아주 없어져 버린 듯하였다. (주석 9)


주석
5> 강돈구, <함석헌 종교사상의 계보>, <종교연구>, 2001년 여름호, 18쪽, 한국종교학회.
6> 앞의 책, 19쪽.
7> 이치석, 앞의 책, 303쪽.
8>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선사편수회 개요>, 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223쪽 재인용, 인물과 사상사, 2004.
9>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서문, 1쪽, 성광문화사,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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