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범 4학년이 되었다. 이 해는 졸업반의 의미보다 그의 생애에 비중 있는 가닥이 되는 동인지 <성서조선>의 창간에 참여한 일이다.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신앙적, 민족적 뜻을 함께 한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ㆍ정상훈ㆍ송두용ㆍ양인성ㆍ유성동은 1927년 7월 도쿄에서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창간호는 국판 44쪽으로 김교신의 창간사에 이어 6인의 무교회 신앙의 고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실었다. 창간사에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국경이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쓰라린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자고 주장하고, 기성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며,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자고 강조하였다.

창간호는 뒷 부분에 동인들이 1편씩 단상을 실었다. 함석헌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글을 발표했다. 생애의 첫 활자화 된 글이다. 처녀작인 셈이다. 꽤 긴 글이다. 마태복음 6:31-33을 인용한다.

“그런 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외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을 너희 천부(天父)가 너희 쓸 것인 줄 아시나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은 적도 일본에서 잡지를 내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야수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서를 인용하면서, 알아듣는 사람들은 깨우치게 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함석헌의 대 사회 발언의 첫 마디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제목이었음은, 27세 청년 함석헌의 의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고난에 찬 생애의 방향성을 예시한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함석헌은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한다.

근역(槿域-무궁화가 많이 피는 땅, 즉 한국)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 해도 이는 우원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파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줄을 놓으라는 것 같아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 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장막이 우리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니,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이 계셔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으시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4)

흰 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같이 희기를!
(주석 21)

<성서조선>은 동인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 단독의 이름으로 편집, 발행되어 그의 개인잡지 성격의 신앙월간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고, 함석헌도 계속하여 기고하였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 통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하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다시 쓸 것이다. 


주석
21> <성서초선>, 1927년 7월(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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