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

012/12/14 08:00 김삼웅

 

 

1923년 관동재진재 학살된 조선인들의 숫자는 6천 6백여 명이나 된다. 이런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찌 제대로 된 역사를 말하겠는가? ⓒ 자료사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1923년 3월 하순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당시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다. 일제는 우민화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에 대학을 세우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너무 멀고 극소수의 친일파 자녀가 아니고는 유학비가 만만치 않았고, 중국에서는 아직 근대적인 대학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집에서는 유학비를 댈 여력이 없어서 오산학교의 도움을 받았다.

함석헌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끼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한 남강의 둘째아들 이택호의 도움으로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입학자격이 필요없는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거치는 기본코스처럼 되었다. 일왕 부자를 처단하려든 박열, 2ㆍ8독립운동을 주도한 김상덕 등도 세이소쿠에서 영어를 배웠다.

함석헌은 일본으로 가면서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문학, 영문학, 미술 등 취미가 있는 분야를 하나씩 검토하고 삭제해 나갔다. 3ㆍ1운동 이후 국내에서 열기를 띤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고심 끝에 교육을 전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범학교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였다.

하지만 도쿄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대지진을 맞게 되었다. 1923년 9월 1일 유지마에 사는 함덕일 형제를 만나러 갔다가 지진을 겪었다. 유지마는 함석은이 메이지(明治)대학을 다닐 때 하숙하던 곳으로, 평고시절의 하숙집 아들 함덕일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간토 지방의 진도 7ㆍ9라는 대지진으로 57만 가구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10만 여 명, 피해 가옥이 45만 채, 건물 피해로 압사한 인명이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큰 피해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인이 폭등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폭등을 선동한다”는 따위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조선인의 폭등을 단속하기 위해” 조선인을 수용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일본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조선인 폭동 소문에 격분한 일본인 자경단과 군ㆍ경찰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그 와중에 박열 등 불령단 소속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일왕부자 폭살 사건’의 혐의로 구속되고, 일본 아나키스트운동 지도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英)가 살해되었다.

함석헌은 용케 살아남았다. 지진이 일어난 반대쪽에 있다가 참변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친구의 집에서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지진으로 황급히 층계에서 내려오자, 집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처참한 자연의 재앙과 인간의 아비규환을 현장에서 목견하였다.

23세의 함석헌을 대진재의 한복판에 있게 한 섭리는, 그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일본인은 어떤 민족이며 한국인은 또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종교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다 무엇인가를 그 똥구멍까지 철저히 파헤쳐 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3ㆍ1운동이 아니었더라면 자기는 사람질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함 선생은 만일 대지진의 한복판에서 그 무서운 광경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돈을 주고 사려 해도 살 수 없고, 지혜로 찾아내려 해도 찾아낼 수 없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면 기회요 계시라면 계시였던” 그 기회와 계시를 놓칠 뻔 했는데, 자기를 그곳에 있게 하여 그 끔찍한 경험을 하게 하고 그 속에서도 아니 죽고 살아남아 오늘까지 한 것은,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라고 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의 그 광경을 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말로 전하라고 해서 죽지 않고 살아남게 했는데 “그걸 말로 다 할 수 없다니! 부끄럽고 슬픈 일”이라고 탄식하면서, 그 광경은 사람의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고, 그저 “장엄이라고 할까 처참이라 할까 처절이라 할까, 지옥ㆍ연옥이 있다면 그런 곳일까”라고 한다. (주석 10)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함석헌은 이튿날 자기 하숙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운명의 신비를 깨치게 되었다. 자신들이 시노비즈이케를 떠난 날 밤에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거기에 있던 수 만 명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주석
10>  노명식, 앞의 책,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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