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

013/01/2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0년 4ㆍ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제도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상계>마저 발행인이 바뀌면서 더욱 쪼그라들고 있던 시점이다. 등록번호는 문화공보부 정기간행물(월간) 등록번호 라-1257호였다.

창간 당시에는 편집위원 제도가 없었으나 1972년 4월에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편집위원에는 참여에 시차가 있었으나 함석헌(주간)ㆍ이병린ㆍ이태영ㆍ김성식ㆍ안병무ㆍ송건호ㆍ법정ㆍ장준하ㆍ천관우ㆍ김용준ㆍ계훈제ㆍ김동길 등이었다. 창간호의 글은 모두 함석헌이 쓰고, 편집위원들은 나중에 집필에 참여했다. 창간 1,2호 때는 전덕용이 편집 실무를 맡았다.

시대는 점차 악화되고, 그래서 할 말이 많은데, 지면이 봉쇄되었다. 지식인들은 벙어리가 되고, 언론은 할 말을 못하였다. 3선개헌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가시화되면서 이같은 현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어 갔다. 잡지를 내게된 배경이었다.

함석헌은 나이 70에 이르러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쉽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저항의 횃불을 켜든 것이다. 남들이 사업을 접을 연차였다. 사업 경험은커녕 잡지를 낼 경제적 여건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도전에 나섰다. 믿는 것은 도처에 산재한 씨아이고, 솟구치는 것은 학정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개인 잡지로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해방 뒤에는 믿음의 동지 노평구가 1946년부터 <성서연구>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재 신채호가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천고(天鼓)>를 힘겹게 펴낸 바 있었다. 3천부를 찍은 <씨알의 소리> 창간호(4월호)는 56쪽, 값 100원이었다. 일체의 상업광고를 배제한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500쪽이 넘는 여느 잡지보다 알찬 내용과 시대의 경고음을 담고 있었다.

창간호에는 5편의 글이 실렸다. 모두 주간 함석헌이 썼다.
<4월혁명 열돐에 되새겨 보는 말 - 썩어지는 씨알이라야 산다>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씨알>
<씨알의 울음>
<하나님의 발길에 채워서(1)>이다.

창간사 격인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에서 함석헌은 잡지 발행의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이 글은 그의 언론관과 시대의식이 들어 있는, 대표적 논설 중의 하나에 속한다. 띄엄띄엄 소개한다.

“잡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해방 후 줄곧 해오는 생각입니다. 아시는 분은 알지만 <말씀>도 그래서 냈었습니다. 6호까지를 내다가 5ㆍ16 파동으로 중단됐습니다. 그 담은 월간보다도 주간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꾸는 데는 나는 반드시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듯 합니다.”

“그 후 알아 보니 주간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입을 열기보다는 틀어막기만 밤낮 연구하는 집권자들은 이상 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정의감과 기백은 줄어드는 것이므로 그 법령의 그물을 통과하고 나오는 놈이면 묻지 않고 자기네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해도 좋다 하는 심산에서 나온 법입니다. 하여간 그래서 다시 월간지 생각을 했습니다.”

“군사정권에서 제1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2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3선개헌 파동으로 나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다름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겁쟁이라고나 했겠지만 이제는 겁쟁이 정도가 아니라 얼빠진 놈입니다. 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왼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 서양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을까? 시저 죽은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여야 할 것 아닙니까? 프랑스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ㆍ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른 건 긇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기관총, 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 체 하고 친구가 바른 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가도 못 본척 하고 있었습니다.”

“풍토를 어떻게 고칩니까? 뒤집어엎어야 해! 누가 뒤집어엎습니까? 씨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오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ㆍ극장ㆍ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 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이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동맹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싸움터는 국회의사당도, 법정도, 학교도, 교회도, 신문사조차도 아닙니다. 직장, 다방, 선술집, 소풍 놀이터에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일만도 아니요, 누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요,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두의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생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왜 정치에 관계된 말을 하나?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럼 ‘도둑놈이야!’ 하고 내쫓을 생각도 아니해야겠습니까? 이런 때, 정치가 온갖 사회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때에 입을 닫고 중립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한패입니다.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아니하는 놈은 도둑 한패 아닙니까? 나의 바라는 것은 정치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감히 못바라도, 적어도 손에 무기 쥔 정치 무리가 판을 치는 날이 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바보의 생각을 좀 말하리다. 나는 씨알에 미쳤습니다. 죽어도 씨알은 못 놓겠습니다. 나 자신이 씨알인데, 나는 농사꾼의 집안에서 났습니다. 참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자갓은 베고 죽는다’고 우리 마을에선 표본적인 농부였던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농사는 나만이 하는 농사입니까? 밥은 나만이 먹는 밥입니까? 천하 사람이 영원히 먹을 밥입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알의 속에는 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순교자는 처음부터 강하지만 한 번 순교하고 난 다음 돌아보지 않으면 순교자의 씨는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순교자 자신은 물론 그것을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는 그것을 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희생자의 뒤를 봐주는 조직적인 활동은 설교보다도 중요합니다.”

“씨알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길르기위해서입니다. 나라에 늙은이(중심세력-필자) 없으면 못생긴 우리 끼리라도 서로 마음을 열고 의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우리 다음 세대는 늙은이를 가질 것입니다.”
(주석 4)

주석
4> <씨알의 소리>, 창간호, 1~14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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