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6 08:00 김삼웅

 

 

박정희 정권은 함석헌의 ‘광야의 외침’을 방치하지 않았다.
창간호가 세간의 화제가 되어 판매되고 있을 때 정부가 탄압의 공작을 벌였다. 창간 당시 계약한 서대문 소재 선일인쇄소가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인쇄를 거부했다. 해서 부득이 중구 소재 이우인쇄소에서 제2호를 발행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

정부는 이것을 트집잡았다. 인쇄인 변경 등록을 필하지 않고 다른 인쇄소에서 책을 찍었다는 이유로 문공부 공문 출 1028-8973으로 폐간을 통고했다. 창간 두 달 만에 폐간 처분이라는 날벼락이었다. 함석헌의 글이 얼마나 뼈아팠으면, 그의 존재가 얼마나 두려웠으면, 단칼에 폐간 조처를 취했을까. 뒷날 흘러나온 얘기로는 ‘창간사’ 중에 “시저를 죽였으면….”의 대목 등이 독재자에까지 보고되고, 비위를 크게 건드렸다고 한다.

제2호로 요절한 <씨알의 소리>는 박정권의 사나운 칼날에 비명 한 마디 못 지른 채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인권 변호사 이병린이 무료 변론을 맡아 법정투쟁에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법부는 어느 정도 양식을 지키고 있었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헌법에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인쇄소를 바꿨다고 잡지의 목을 졸라버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권력의 압력으로 인쇄소를 방해한 처사였다.

이병린은 1970년 6월 8일 문화공보부장관 신범식을 상대로 ‘행정처분 취소 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그의 법리는 당당했다. 다음은 <청구원인>의 요지다.

첫째, 헌법 제18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동조 제2항 전단에는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나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 위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본다면 월간잡지에 대한 등록은 잡지를 발행한다는 사실을 발행인이 문화공보부에 신고하면 그 신고에 의하여 등록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 등록은 허가처분이 아니라 사실 내용을 등록하는 사실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허가처분이 아닌 등록행위를 취소한다는 것은 법률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출생신고를 하여 호적부에 출생사유가 등재되면 그뿐이지 출생신고의 등재를 취소할 수 없는 것과 하등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둘째, 등록이 허가처분과 본질적으로 성질이 판이한 것이기 때문에 가사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가정할지라도 행정부에서 언론활동을 금지하여 잡지의 간행을 금지할 권한은 없다고 사려된다. 위와 같은 취지는 대법원 판례에서도 이미 명시하고 있는 바 이다. (1967. 7. 헌법 제18조의 결사의 자유는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에 의한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
(주석 8)

소송이 진행 중일 때(8월 1일) 함석헌은 스웨덴에서 열리는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였다. 다른 사람이 참석하기로 되었으나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함석헌이 대신 나가게 되었다. 소송 문제로 떠나기 어려운 발길이었으나 이 대회 역시 중요성이 덜 하지 않아 갑자기 출국하기에 이르렀다.

함석헌은 스웨덴의 시그투나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한 뒤 영국→미국→캐나다→인도, 다시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펜들 힐에 머물면서 국내에 소식을 전했다.

<씨알의 소리>는 전덕용 편집장이 이 편지 글을 그때 마다 <폐간중에 드리는 소식>으로 프린트판으로 엮어 독자들에게 보냈다. ‘소식지’는 1970년 11월 17일 제16신(信)까지 제14호로 묶여졌다. 그런데 편지 중에 제8신, 제9신, 제11신이 증발되었다. 정보기관의 소행인지 우체부의 배달사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식지’에는 이 부분이 공란으로, 백지로 나왔다. ‘백지편지’의 효시인 셈이다.

함석헌의 ‘백지편지’를 보면 <수원시화(隨園詩話)>의 재미난 이야기가 연상된다. 곽희원이란 선비가 집에 편지를 부칠 때 잘못하여 편지 대신 백지를 넣어 보냈다. 그의 아내가 답서에서 쓰기를,

푸른 비단 창 아래서 님이 보낸 편지를 뜯어보니
편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흰 종이 뿐이어라
아직도 님께서 이별의 슬픔이 가득하여
수 많은 무언중에 나를 생각함이라.
(주석 9)

곽희원은 착오로 백지를 넣어 보냈지만, 함석헌의 경우는 착오가 아닌 기관의 검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곽의 아내가 백지에 감동하였듯이, 씨알의 독자들도 천 마디의 글자보다 무언(無言)의 백지 편지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번에도 여행을 앞당겨 이듬해 4월 22일 돌아왔다. 재판에 대비해서였다. 재판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연기를 거듭하였다. 이듬 해 5월 4일 고등법원 재판장 안병수ㆍ윤일영ㆍ김석수 판사에 의해 “문화공보부의 <씨알의 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하여 <씨알의 소리> 승소판결을 내렸다. 문공부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1971년 7월 6일 재판장 김치걸ㆍ사광욱ㆍ홍남표ㆍ김영제ㆍ양병호 5인 판사의 이름으로 문공부 상고를 기각하고, ”씨알의 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 하다고 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다.”고 판시하여, <씨알의 소리>의 승소판결을 확정했다.

<씨알의 소리>는 창간 두 달만에 목이 졸리는 단절 끝에 1971년 8월호(제3호)로 복간을 하게 되었다. 피눈물 나는 법정 투쟁 끝에 당당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병린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복간호(1971년 8월호)는 표지 오른 편 반쪽은 검은 바탕에 제호와 제목을, 왼편은 승소한 신문 보도 사진을 바탕에 깔았다. 복간의 상징성이 돋보였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십자가에 달리는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펜들 힐의 명상-대화>를 함석헌이 쓰고, <‘씨알’은 죽지 않는다 - ‘씨알의 소리’ 복간에 부쳐>를 김재준 목사가 썼다. 또 <‘씨알의 소리’ 승소 경위>를 실무팀에서 소상히 밝혔다.

함석헌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승소의 소감을 밝히었다.

“법을 사랑하는 이 변호사는 문공부의 처사가 ‘분명히 헌법에 위반’이라는 문귀가 판결문 속에 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한탄은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라도 이겼으니 다행입니다.” (주석 10)라고 고마움을 표시하고, 씨알에 대한 당부를 피력한다.

씨알 여러분, 아무리 괴로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럴듯이 말해도 속지 마십시오. 벼슬아치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이젠 신문도 못 믿습니다. 신문이 우리 사정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씨알 편에 섰을 때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칼을 가지고도 그들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마는 그들은 이제 돈에 팔려 씨알을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금에 씨알을 저버리고 강했던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밖에 없습니다. (주석 11)

제3호부터는 창간 당시부터 실무를 도왔던 박선균이 편집장으로, 문대골이 업무부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하지만 급여를 줄 처지가 못 되어서 두 사람은 ‘자원봉사’로 잡지 일에 매달렸다.

순서가 조금 바뀌었지만, <씨알의 소리>가 창간→폐간→복간의 힘겨운 싸움을 하는 기간은 정치적으로 격동기였다. 야당에서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0대 후보의 경선 끝에 김대중이 선출되면서 대여 정책 공세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침체되었던 선거전을 뜨겁게 달구었다. 11월 13일에는 서울 중구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19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 ‘전국연합노조 청계 피복노동조합’이 탄생하는 직접적 배경이 되고, 노동자들의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신민당과 학생ㆍ재야의 거센 반대운동에도 박정희는 관권동원과 천문학적인 국가예산의 전용,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4ㆍ27대선에서 승리하였다. 박정희는 이로써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서고, 통치 수법은 더욱 광폭해져갔다.

대선 기간에 <씨알의 소리>는 물론 김상현이 발행하던 월간 종합지 <다리>도 1971년 2월 12일 필화사건을 당하였다. 1970년 11월호에 게재된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을 트집잡아 임중빈과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대선 기간에 잡지를 발행하지 못하도록하는 비열한 처사였다.


주석
8> <씨알의 소리를 읽으시는 분들께> - <폐간중에 드리는 첫 번째 소식>, 14~15쪽, 1970년 8월.
9> 김용준, <근원수필>, 107쪽, 범우사, 2000.
10> <씨알의 소리>, 제3호, 6쪽, 1971년 8월.
11> 앞의 책,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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