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3 08:00 김삼웅

 

 

1969. 9.13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박정희의 권력욕은 군정 2년과 민선 2기 8년 도합 10년 세도로도 욕심이 차지 않았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김용태 등 공화당 의원들이 국민복지연구회를 만들어 김종필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다 철퇴를 맞고, 이른바 ‘항명파동’으로 김종필은 정계를 은퇴하였다. 박정희는 1968년 초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을 빌미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청장년들을 한 묶음으로 엮고,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여 교육계와 학생들의 통제에 나섰다.
박정희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다가 4월혁명으로 쫓겨난 지 10년도 채 안 되어 1968년 말부터 권력지향의 충성분자들을 앞세워 개헌에 대한 애드벌룬을 띄우기 시작했다. 1968년 12월 17일 공화당 당의장서리 윤치영이 부산에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이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3선개헌의 물꼬를 텄다.

6ㆍ8 부정선거를 통해 이미 개헌선을 확보하고, ‘항명파동’을 진압하여 공화당내 개헌반대 세력을 숙청한 터였다. 언론계도 그동안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대부분 순치시켰다. 문제는 학생과 야당이었다. 당시만 해도 재야는 아직 이렇다할 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박정희가 1969년 7월 25일 여당에 공식적으로 개헌안을 발의할 것을 지시하면서 그동안 지하에서 맴돌던 3선개헌 공작이 양성화되고, 정계는 개헌정국으로 파란에 휩싸였다. 개헌안은 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에서 변절한 3명 등 모두 122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되었다.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9월 13일 국회본회의장이 야당 의원들에 점거되자 14일 새벽에 국회 제3별관에서 서명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단 6분만에 개헌안이 변칙 처리되었다. 박정희의 3선, 곧 장기집권의 길을 튼 것이다.

 


1969.9.12 3선개헌반대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 귀가조치를 당하는 함석헌선생 (이 사진은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 기구로 3선개헌저지투쟁위원회를 설치하고, 원내외에 걸쳐 저지투쟁에 나섰다. 재야에서는 3선개헌반대범국민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신민당과 연합하여 3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함석헌은 여기에 참여하여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개헌반대 연설을 하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자 수많은 씨알이 강연장을 매웠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ㆍ19기념 강연회를 마친 뒤 범청년민주투쟁위원회 소속 인사들과 광화문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7월 19일 오후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범야 3선개헌반대 강연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국민에게 호소했다.

3선개헌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민족의 역량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바로 민족의 역량으로 이를 저지해야 한다. 오늘날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반드시 공화당만의 책임을 아니다. 여기 앉아 있는 신민당 사람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제대로 저지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속 의원 3명이 이탈하는 것도 막지 못하였다. 요즘 우리나라 신문은 신문이 아니다. 한심하다. 학생 데모는 제대로 보도도 못하면서 아폴로 발사만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이 신문이냐.

여러분! 신문에 국민이 무섭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자.
사실보도도 하지 못하는 신문에 본떼를 보여주자.
우리가 단결하면 신문사 한 두 개쯤은 문 닫게 할 수 있다.
(주석 3)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투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전국의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교문을 박차고 나와 3선 반대 시위를 벌였다. 3선개헌 반대투쟁에는 변호사ㆍ교수ㆍ문인ㆍ종교인 등 사회 각계의 양심적 인사들이 참여했다. 신문 중에서는 <동아일보>만 8월 8일치 사설에서 <우리는 개헌주장의 동기가 결코 합치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고 주장,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히고, 대부분의 언론이 지지하였다.

3선개헌은 결국 박정희의 의지대로, 오로지 일 개인의 장기 집권을 위한 방편으로 헌법을 장식물로 변개시키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여 요식적인 국민투표의 절차를 거쳤다.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건널 수 없는 다리’ 라고 명명한 대로,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국가의 비극이고, 그 자신의 단초가 되었다.

함석헌은 다시 한 번 깊은 좌절과 통분을 삼키면서, 씨알을 일깨우는 방안 찾기에 몰두하였다. 세상은 역류되고, 시름은 깊어만 갔다.


주석
3> <김삼웅 취재수첩>, 1969년 7월 19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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