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3 08:00 김삼웅

 

 

정치권력에 맛이 들린 박정희세력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이 황야에서 아무리 목메이게 외치고 글을 써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오히려 선동가로 몰아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켜 미ㆍ일ㆍ한 동맹체제화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1961년 6월 케네디ㆍ이께다(池田)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ㆍ케네디 회담을 통해 이 문제가 깊숙히 논의되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였다.

<사상계> 1964년 3월호에 함석헌은 비감한 마음으로 <양한재조 재차일념(兩韓再造在此一念)>을 썼다.
평소 한자 제목을 잘 붙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편집자는 “한 마음 한 끝 먹고 조선을 새겨 보니 조은 땅 조은 빛이 한 글월 피웠구나. 한 조선 첨서 한난걸할 알속에 지키네”란 알듯 모를 듯한 발문을 붙였다.

우리는 또 다시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부끄럽고 분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이 다 잘 사는 이 때에, 우리 만이 못 살고 밤낮이 이꼴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분하다는 것은 했으면 했을 것인데 번히 알고 못하니 분하지 않습니까?

함석헌은 자신들이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할 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총질을 한 친일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마땅히 요구해야 할 청구권과 문화재 반환 등이 묵살당한 데 하염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 글을 썼다. 박정희 권력의 비리와 인권탄압,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한말의 망국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요새 나라 꼴 그 때와 꼭 같습니다. 한일회담, 그 때의 5조약, 7조약, 맺으려던 꼴과 꼭 같고, 창가학회니 뭐니 그 때의 흑룡회, 일진회와 터럭도 다를 것 없습니다. 그 때에도 미ㆍ러ㆍ중이 뒤에서 어물어물하다 우리를 팔아넘기더니, 오늘도 또 셋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나라를 지키자!”하는 글을 짓게 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교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의 핵심은 후반 다음의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나라가 일본 침략자들 때문에 위태했을 때 그것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이성계를 나가 맞으며 최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三韓再造 在此一擧 (삼한재조 재차일거)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이성계가 가슴 속에 나라라는 일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거(一擧)는 삼한을 재조(再造) 못하고 잃는 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또 다시 나라는 남으로 일본침략주의의, 북으로 중공침략주의의 엿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내며,

兩韓再造 在此一念

이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일념을 품었습니까?
나라가 임(臨) 하옵소서!
일체 중생이 다 이 한 나라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또 씨알에게!

- 念, 念, 念 , 아멘.
(주석 29)

박정희의 대일 굴욕회담이 강행되면서 장준하는 1965년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했다.
160쪽 전 지면을 털어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이 책은 야당, 재야ㆍ학생들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의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박두진ㆍ박남수ㆍ조지훈의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연작시에 이어 함석헌의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란 권두시론, 백낙준의 <한국근대화와 일본침략>, 이범석의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양호민ㆍ부완혁ㆍ정문기ㆍ김철ㆍ김원룡이 각 전문 분야에서 집필한 <한ㆍ일협정문의 분석>, 각계 지도급 인사 105인의 앙케트 <105인의 발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서가 실렸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에는 김홍일ㆍ김재춘ㆍ박병권ㆍ박원빈ㆍ송요찬ㆍ손원일ㆍ이호ㆍ장덕창ㆍ조흥만ㆍ최경록 등이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장성들까지 참여하여, 국민이 얼마나 굴욕회담에 반대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부제가 붙은 이 시론에서 처연한 심경으로 국민에 호소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나?
이 4천만 문화민족은 어떤 운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는가?
5천년 고난의 역사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하고 있나?
지금 한ㆍ일조약의 비준이라는 한 순간을 놓고 민심은 마치 회오리바람 밑에 노는 물결처럼 미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 조약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고, 정의와 자유의 정신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기 대해 뭉치와 최루탄과 철창의 고통을 무릅쓰며 혹은 주린배,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단식을 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반 국민은 그 두 사이에 불안과 의심과 분노와 두려움에 떨고 서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정이 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 있다.
(주석 30)



주석
29> <사상계>, 1964년 3월호, 45쪽.
30> <사상계>, 긴급증간호, 20쪽,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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