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9 08:00 김삼웅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된 박정희의 정치적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앞의 두 사안의 투쟁 과정에서 야당은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갈라지고, 언론은 박정권의 회유와 탄압이라는 강온 전략에 말려 제 기능을 잃어갔다.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로 예정된 상태에서 야권은 윤보선ㆍ유진오ㆍ이범석ㆍ백낙준 등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었다. 국민은 단일후보를 기대했으나 조정이 쉽지 않았다. 장준하가 중심이 되어 후보단일화 작업의 일환으로 ‘4자회담’을 주선했다. 거론 인사 4명을 모아 화합을 성사시킨 것이다.

곡절 끝에 윤보선이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장준하는 이범석이나 백낙준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는 아니었다. 윤보선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교체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위기를 맞은 박정희는 군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눈엣가시와 같은 장준하와 <사상계>에 보복의 칼을 뽑았다. 굴욕회담 반대의 이념적, 이론지적 역할의 중심에 장준하와 <사상계>가 있고, 그 배후에 함석헌의 존재에 주목한 것이다. 1965년 3월 중순 종로세무서 직원 10명이 사상계사에 들이닥쳐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10일 동안의 조사에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자, 이번에는 국세청의 증원부대까지 포함된 20여 명이 본사는 물론 인쇄소, 제본소, 지업상, 광고주, 지방 거래 서점까지 찾아가 이잡듯이 뒤졌다. 고사작전이었다. 또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도 ‘정치교수’로 찍어 대학에서 추방시키는 등 전방위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1966년 10월 26일 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었다.
그가 삼성계열사의 밀수행위 규탄대회에서 “박정희가 밀수왕초”라는 발언과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라는 발언 때문이었다. 광복군 장교출신 장준하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의 맞대결이었다.

<사상계>는 1967년 4월호에 ‘4자회담’을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를 마련한 것은 ‘4자회담’의 내막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의미가 있었다. 참석자는 함석헌ㆍ백낙준ㆍ이범석과 사회자 양호민이었다. 양호민은 당시 <사상계> 주간이었다.

좌담회에 참석한 함석헌은 “이번만은 정상적인 정권교체에만 국한되지 말고 한번 어려운 시국을 인식하여, 사람이야 누가 명색을 지고 나서든지간에, 중요한 이 시기에 공동의 정치책임으로 정치를 일신하는, 역사로 보면 나라를 건진다는 그런 의식에서 일을 한다면 공동으로 같은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번에는 일이 되는가보다 해서, 국민이 갑자기 ‘4자회담’이 되는 것에 감흥을 올렸었는데, 그 후에 못된 것을 보고는 아주 섭섭하군요.” (주석 21) 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박정희는 두번째로 맞붙은 윤보선과의 접전에서 쉽게 승리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야당후보에 식상한 국민은 박정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정권의 탄압으로 <사상계>가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국가원수모독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장준하는 더 이상 언론인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박정희를 물리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나서는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6월 8일로 공고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함석헌은 이때 장준하의 선거연설원이 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민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그리고 지원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세요.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은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주석 22)

함석헌은 장준하의 당선을 위해 선거구를 찾아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후보는 감옥에 갇혀 있고, 자금도 조직도 없는 선거전이었다. 흰 두루마기, 흰 머리, 흰 수염의 함석헌이 연단에 서면 우선 호기심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고, 장준하와 박정희, 그동안 <사상계>의 역할 등을 이야기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함석헌의 지원연설로 여론이 움직이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선거 판세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정보기관이 장준하를 석방하는 것이 ‘동정여론’을 차단할 수 있다는 보고에 따라 정부는 투표 일주일 전에 그를 석방하였다. 석방된 후보의 얼굴이라도 보자는 유권자들이 몰려왔다.

대세는 장준하에게 쏠렸다. 5만 7천여 표(차점은 3만 5천여 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되었다.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는 당선되었으나 신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3ㆍ15가 무색케하는 관권ㆍ부정선거로 공화당이 압승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개헌선 확보를 위해 총선에서 부정을 자행한 것이다. 야당과 학생들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나섰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부정선거규탄시위가 일어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정권은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탄압하면서 거침없이 휴교령을 내리는 파스시트적 수법이었다. 


주석
21> <사상계>, 1969년 4월호, 20쪽.
22> 고성춘, <장준하선생의 옥중당선 이야기>, <민족혼ㆍ민주혼ㆍ자유혼>,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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