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0 08:00 김삼웅

 

 

1959 백죽문화사

함석헌은 해외 순방 중이던 1962년 12월 국내에서 <생활철학>이란 단행본을 서광사에서 출간했다.
4ㆍ19 이후에 신문ㆍ잡지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59년 3월에 출간한 <새 시대의 전망>이래 두번째 펴낸 평론집이다. <새 시대의 전망>은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제되어 발행되었다.

<생활철학>의 서문에서 저자는 ‘누에의 철학’을 강조한다. 미국 벤틀 힐에서 쓴 글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닮았으니 푸른 뽕을 먹어 흰 실을 뱉는 신비의 누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같지 않은가? 어떤 이는 호랑이라 하고 어떤 이는 토끼라 하지만 차라리 누에라 할 것이다.
힘을 자랑하고 싶으면 호랑이라 할 것이고, 업신여기려면 토끼라 하겠지만, 이럴 것도 저럴 것도 아니요, 누에처럼 겸손히 누에처럼 부지런히, 누에처럼 평화롭게 살 것이니라. 그 땅만 아니라, 그 사람도 누에 같다. 그럼 또 누에와 같이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 힘은 비록 약하고, 그 입은 비록 적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 아니어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는 날, 천하라고 다 먹을 수 있다. 유교문화도 옴질옴질, 불교문화도 옴질옴질, 기독교문화도 옴질옴질, 과학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정신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다툴 것 없이, 시기할 것 없이, 떠밀면 돌아눕고, 뺏으면 또 다시 가 붙으면서, 소리도 없이, 떠듦도 없이 먹고는 자고, 자고 나면 한 껍질 벗고, 새로 나서 또 먹어서 애기 잠, 두 잠, 석 잠, 그리고 한 잠을 자고 나면 백옥(白玉) 같은 문화의 전당 지을 수 있지 않겠나?

누에 - 번데기 - 나비의 생활철학이야말로, 씨알의 생활철학이다.
(주석 23)

함석헌의 글 ‘누에의 철학’은 연구가들이 놓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머리말은 그의 어느 글 보다 의미와 상징성이 깊은 내용은 담고 있다. 하여 책의 내용보다 ‘누에의 철학’을 소개하기로 한다.

잠사(蠶史)란 말이 있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이른 말이다. 그가 흉노와 싸우다가 져서 항복한 이릉(李陵)이를 동정해서, 잘못이라 하지 않았다는 죄로 임금이 노하여, 궁형(宮刑)곧 자지를 잘라서 잠실 속에 던졌다. 잠실은 감옥이란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사기>를 씀에 임금이 도로 좋아해서 중서경(中書令)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 잠실 속에서 쓰고, 그 때문에 살아나온 것이라 해서 잠사라 한다.

예로부터 정치한다는 것들이 그랬다.
제게 나쁘면 남의 생명 뿌리라도 자르고, 제게 좋으면 벼슬 주고 그러니 오늘 와서 보면 누가 정말 무서운가?
사마천의 자지를 잘랐던 임금인가? 그 잠실에서 실 뽑듯하는 글로 그것을 뚫고 나왔고, 그 뿐 아니라 오늘까지 살아, 그 따위 정치가란 것들은 목을 자르는 역사가인가?
(주석 24)

함석헌은 이름 없는 씨알을 누에에 비유하면서 권력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가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도 한 마리 누에로 자처했다.

번쩍 번쩍하는 네 옷이 그게 무어냐? 네 군복에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솥 다리가 그게 어디서 온 거냐? 얼마나 많은 누에가 죽어서야 된지 아느냐?
한 번 번드쳐, 빛 나라에 날아 보자던 나비를, 그 잠을 채 자기 전 그 집을 뺏고, 그 몸을 솥에 삶아 살로 뽑아내서 짠 것이 그 비단, 그 영광 아니냐?
살아나면 그리스도가 될 얼마나 많은 씨을 죽이고, 그 공로를 빼앗서 되는 너희 권력이요, 너희 도덕이요, 너희 종교요, 너희 명예인 줄 아느냐?
비단을 짜기 위해, 누에치는 계집의 손에서 고치를 뺏지 마라. 실을 뽑기 위해, 애매한 번데기를 솥에 삶지 마라.
한 잠을 자려고, 이 벤들 힐 뽕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나를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내가 채 변화하기 전에 너희가 내 무덤을 연다면, 가락꼬치나 미운 돌밖에 있을 것이 없느니라.
(주석 25)

함석헌은 안반덕 산골짜기에 머물 때 장준하의 요청으로 또 한 편의 평론을 썼다. <레지스탕스>였다. 자신이 ‘신을사조약’이라 명명한 한일조약 이후 <사상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필자들은 글 쓰기를 망설이고, 인쇄소도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신년호와 2월호의 발간이 늦어졌다며, 장준하는 추락하는 국민정신을 살리는 것과 항거 정신에 대해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날 망설임 끝에 찬 바람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 정좌하여 필을 들었다. 이 평론 역시 밑 줄을 치고 읽을 대목이 많다.

생명의 길은 끊임없는 반항의 길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생명 있기 전에 무엇이 있던 것 아니요, 생명이 다 산 다음에 또 무엇이 있을 것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외를 생각할 수 없다. 생명이 처음이며 끝이요, 생명이 목적이며 수단이다. 다른 무엇이 또 있어서 생명의 가는 길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니고, 생명 그 자체가 규정이요 범주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되려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26)

함석헌은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비록 당장은 권력이 승리하고 패악이 선을 누르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진보하고 선이 승리한다고 믿었다.

“역사는 절대의 진보요. 인생은 절대의 긍정이다. 작게 보면 진보의 시대도 있고 퇴보의 시대도 있으나 그것은 마치 올라가는 산길에, 한때 내려간 언덕도 결국 올라간 길인 것 같이, 스스로의 뜻이 목적이 되는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 다 진보의 과정이다.” (주석 27)

한·일협정 비준 반대

함석헌은 한일조약 비준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정신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항거정신을 잃어버린 국민정신에 대해 비판한다.

5천년 역사를 대체로 통틀어 볼 때, 이 민족이란 것이 무엇인가? 남의 세력에 기운을 못 펴고, 겨우 생존하여 온 사람들 아닌가? 백 가지 불행의 원인이 모두 거기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사를 새로 짓는다는 이 마당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국민으로 하여금 먼저 쪽지를 펴고 내로라는 기상을 가지도록 길러 주는 일 아닌가? 한 마디로 해서 항거하는 정신의 고취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더 북돋고 가꾸어 주지는 못하고, 겨우 돋우려는 싹도 잘라 버리니 어떻게 하나?

숨김없이 말해보자. 한일조약이 아주 체결이 된 이후 오늘까지 얼마 아니되는 시일이나, 그 동안에 국민의 의기는 올라갔다고 할 것인가, 내려 갔다고 할 것인가?
(주석 28)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 은거할 만큼 굴욕회담 과정에서 보인 지식인들과 국민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그래서 국가(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국민의 의기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절감하면서, 이 원고를 썼다.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글이다.

나라는 하루만 하고 마는 것도 아니요 일부 사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닌데, 국민의 마음을 이꼴을 만들어 놓고는 도저히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의기 없는 국민을 가지고 무엇을 할 터인가? 제 나라 안에서도 감히 정치의 비평을 못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자는 용기를 못내는 백성이 어떻게 외국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을까? 더구나 국민을 덮어 누르는 이 정책이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그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도 못되고 첨부터 남의 나라 세력에 끌려서 된 것임에서일까.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려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느냐고 네가 묻느냐? 그렇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하는 인격만이 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도덕이 없다.
(주석 29)



주석
23> 함석헌, <생활철학>, 머리말, 서광사, 1962.
24> 앞과 같음.
25> 앞과 같음.
26> 함석헌, <레지스탕스>, <사상계>, 1966년 3월호.
27> 앞과 같음.
28> 앞의 책.
29>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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